- 사회인식 개선됐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How AIDS Changed America 진 화이트-진더는 방안에서 아들 라이언의 스크랩북을 만든다. 라이언은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1985년 인디애나의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화이트-진더는 라이언의 복학 투쟁을 다룬 신문 기사를 오려 붙였다. 투쟁을 도운 엘튼 존과 그레그 루가니스, 기타 인사들과 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정리했다. PBS 방송이 ‘난 에이즈 감염자다(I Have AIDS: A Teenager’s Story)’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특집프로에서 기억할 만한 장면을 추려냈다. “장례식 부분을 방금 끝냈다. 여덟 쪽이다. 매우 힘들었다”고 화이트-진더는 말했다. 그는 에이즈 진단을 받고 7년 후인 1991년 숨진 당시 18세의 아들을 땅에 묻었다. 라이언은 혈우병 치료에 쓰인 혈액제제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됐다. 인디애나폴리스의 어린이 미술관은 역사를 바꾼 세 어린이(안네 프랑크, 루비 브리지스, 라이언 화이트) 기념 전시회를 연다. 지금 만드는 스크랩북과 라이언이 죽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놓아둔 라이언의 침실이 그 전시품의 일부다. “라이언은 에이즈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어 사람들이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배려하도록 했다”고 엄마는 말했다. 조류 인플루엔자나 중증급성호흡기중후군 (사스)의 위협만으로도 온 국민이 겁을 먹는, 그래서 연방정부가 비상대책을 세우고 약품을 비축하느라 부산을 떠는 요즘 시대에는 에이즈가 처음 출현했을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1981년 게이들이 갖가지 희한한 감염 증세로 죽어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무관심했거나 적대감을 드러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 병이 유행한 지 4년째 접어들도록 공개석상에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언급한 시점에서는 이미 1만2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숨졌다(레이건은 1987년까지 ‘에이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에이즈 감염자는 집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 해고되고 의료보험도 거부됐다. 극우파는 게이들을 마치 마귀처럼 취급했다. 레이건의 보좌관을 지낸 팻 뷰캐넌은 1983년 이런 글을 썼다. “가련한 동성연애자들, 이들은 자연과의 전쟁을 선포한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가혹한 보복을 당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도 에이즈란 그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농담의 끝마무리로 이용될 뿐이었다. “방금 자유의 여신상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소이다.” 밥 호프는 1986년 여신상 재헌정식 행사에서 농담했다. “허드슨강의 입으로 전염됐는지 스테이튼섬 요정(fairy, 동성애자를 가리키기도 함) 때문에 걸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강 건너 맨해튼에서는 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더 많이 참석했었다. 에이즈는 미 대륙을 횡단하는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모든 전쟁에서 죽은 미국인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았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다. 동성애를 묘사하는 언론의 자세와 암환자들의 투병 태도 등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많이 바꿨다. 동시에 에이즈 그 자체도 바뀌었다. 게이 남성과 마약 중독자를 죽이는 질병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파괴하고 미국 흑인사회에 큰 피해를 끼치며 세계적으로 남성 못지않게 많은 여성을 감염시킨 질병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총 인명 피해는 2500만 명이며 계속 증가추세다. 에이즈라는 시련을 통해 미국은 두려움과 편견을 직시해야 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라이언은 1년 반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고, 그 편견 때문에 고객들은 게이가 주방장으로 일하는 레스토랑을 기피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에이즈에 걸리는 사람은 그래 마땅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바이러스가 가져오는 온갖 육체적 고통을 겪어도 싸다고.” 톰 행크스의 말이다. 그는 1993년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게이 변호사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 세대의 게이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대체로 무시하고 욕해왔던 한 사회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됐다. “에이즈가 사회통합의 촉매 역할을 했다”고 에이즈 프로젝트 로스앤젤레스의 사무총장이자 25년째 에이즈 바이러스(HIV) 양성으로 살아온 크레이그 톰슨은 말했다. 에이즈가 없었다면, 에이즈 운동과 그에 따른 의식전환이 없었다면, 게이들의 결혼 같은 문제가 오늘날 논쟁거리가 됐을까? 우리가 안방에서 ‘윌 & 그레이스’(시트콤)를 재미있게 보았을까?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에이즈 인식을 촉구하려고 1991년 착용하기 시작한 빨간 리본이 없었다면 오늘날 암 연구 지지의사의 표명으로 팔뚝에 노란 고무밴드를 착용하는 일이 있었을까? 에이즈와의 투병 경험이 없었다면 과학자들이 앞으로 등장하는 세균 살인마들과의 싸움에 이용할 항바이러스 약품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전략과 기술을 가졌을까? 에이즈는 물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여기 무슨 좋은 소식이 있다는 말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1981년 처음 에이즈가 발견된 이후 이 질병과 이 질병의 확산을 수수방관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려온 래리 크레이머는 말했다. “우리는 온 국민이 애도하는 날을 제정해야 한다!” 맞다. 그러나 이 학살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그 모든 고통과 상실의 직접적 결과인 정신력과 연민, 그리고 맞다, 사랑의 표출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에이즈가 없었다면 유방암·림프종·근위축성측삭경화증 등의 난치병 환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열성적인 환자 권익운동을 벌이지 못했다. 크레이머는 실의에 빠진 에이즈 환자 1만 명을 모아 액트업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들은 “침묵은 곧 죽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고 월스트리트를 봉쇄했다. 정부가 연구비 지원을 늘려 생명을 구할 약품을 좀 더 빨리 입수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을 투쟁에 나서게 하는 유일한 요인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에이즈 운동을 벌이면서 그 점을 깨달았다”고 크레이머는 말했다. 두려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꼼짝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이즈가 처음 출현했을 때 그랬다. 정부나 언론이나 게이 사회 모두 신속 대응으로 재앙을 물리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레이건 시절의 미국에서 정치인들은 대체로 동성애자와 정맥주사 약품 이용자를 죽이는 새로운 병원균 연구를 지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에이즈 창궐 초기에 우리는 카트리나 사태 때 지붕에 올라앉아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상상한다”고 의사 마이클 고틀리브는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면역 전문가로 일하는 그는 에이즈의 확산 위험을 맨 먼저 인식한 의사로 인정받는다. 연방 질병통제센터(애틀랜타)에서 일하는 전염병 전문가 도널드 프랜시스가 에이즈 예방 캠페인 지원용으로 3000만 달러를 요청하자 “워싱턴에 보고됐는데 다들 웃기는 소리 말라고 일축했다”고 프랜시스는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곧 질병통제센터를 떠났다. 당시 “게이암”이라 불리던 에이즈는 언론의 취재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동성애 섹스를 거론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언론은 레지오넬라병, 독성쇼크증후군, 타이레놀 공포 등에는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심지어 환자 수십 명이 숨진 뒤에도 이 병에 관심을 기울인 매체가 없었다. 뉴욕 타임스는 1981년과 82년 새 살인마에 관한 기사를 총 열 꼭지 정도 실었는데 모두 안쪽 지면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이 문제에 관한 한 뉴스위크 역시 1983년 4월에야 비로소 “금세기의 보건 위협 요인이 될 소지가 있다”면서 처음 커버스토리로 취급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에이즈가 이성연애자에게 확산된 뒤에야 처음으로 그 존재를 보도했다. 1982년 2월 어느 날의 머리기사는 ‘동성애자들에게 치명적인 새 질병에 여성과 이성연애자 남성도 걸린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초기에는 게이 언론도 에이즈를 취급하지 않았다. 게이 사회를 놀라게 하고 반게이 운동을 촉발시키지 않을까 겁낸 뉴욕 네이티브 편집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질병 관련 소문은 대체로 근거 없다’는 제목을 달았다. 에이즈 관련 최초 보도인 1981년 5월 18일자 기사였다. 눈에 띄는 극소수의 예외적 사례도 있었다. 특히 고 랜디 실츠가 그랬다.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그 기자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편집진을 붙들고 에이즈를 본격적으로 취재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 기사를 바탕으로 1987년 기념비적인 저서 ‘연주는 계속된다(가제·And the Band Played On)’가 나왔다. 80년대 초반 미국이 에이즈 대책을 진지하게 세우지 않으면서 이 병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 과정을 자세하게 밝혔다. 주변사람들이 이상한 자줏빛 피부암과 심한 폐렴으로 입원하는 동안에도 많은 게이는 자기네 무리의 한복판에서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의 존재를 금세 인식하지 못했다. 크레이머는 친구들과 함께 1981년 노동절 주말에 뉴욕 파이어 섬에 갔다. 게이들이 많이 모이는 행락지 더 파인스에서 에이즈 연구기금을 조성하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모금함을 연 우리는 그 참담한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고 크레이머는 말했다. 얼마가 걷혔을까? 769.55달러였다. “사람들은 ‘게이암 연구를 지원하자’는 팻말을 들고다니는 이상한 녀석들이 파인스의 축제 분위기에 재를 뿌린다고 생각했다.” 에이즈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는 게이 사회 일각에서 여러 해 동안 지속됐다. 상당수가 자신이 획득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성적 자유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게이 사회는 1984년에 가서야 뒤늦게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전용 목욕탕들의 폐쇄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많은 게이가 파트너가 몇 명이든 개의치 않고 하룻밤 안전하지 않은 섹스를 즐기는 장소였다. 이제 죽음을 따로 떼어놓기 어렵게 된 게이 사회는 마침내 70년대라는 파티에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전례없는 에이즈의 위협에 맞섰다. 사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해야 하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에이즈 감염자와는 화장실을 같이 쓰려 하지 않고, 택시 기사는 에이즈 환자를 태우려 하지 않으며, 병원에서도 에이즈 환자의 병실 문앞에는 ‘경고.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내걸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마조리 힐은 돌이켰다. 그는 뉴욕에서 ‘게이 멘스 헬스 크라이시스(GMHC)’라는 자원단체를 이끈다. 전국에서 GMHC 같은 단체가 조직되면서 에이즈 환자들에게 의료봉사와 음식·주택 카운슬링 등 온갖 지원을 제공했다. “가진 것도 없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저렴하고 효율적이며 인도적인 의료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로스앤젤레스 게이 & 레즈비언 센터의 사무장 대럴 커밍스는 말했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판에 게이 사회가 그렇게 대응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환자들은 자신의 질병 관리에 직접 나섰다. T세포 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복잡한 공식을 배우고, 의사들에게 어떤 치료법이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을 동료와 공유했다.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 오로지 같은 환자들끼리만 얻어지는 점이 있다. 그것은 격려와 정보와 영감”이라고 HIV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잡지 포즈의 창간인 숀 스트럽은 말했다. 한 영화배우가 나선 뒤에야 비로소 온 국민이 관심을 보였다. 1985년 여름 세계는 미국 남성의 매력을 상징하던 미남배우 록 허드슨이 게이일 뿐 아니라 중증의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다”고 고틀리브는 말했다. 그는 당시 UCLA 메디컬 센터의 헬기 착륙장에 서서 록 허드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고 회상했다. 상공에선 방송사 헬기들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때 에이즈라는 병을 처음 알게 된 미국인이 많았다. 그 유명인사가 그 병에 걸렸고 몹시 아파보이는 그의 모습이 정말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6년 뒤에는 전설적인 농구스타 매직 존슨이 HIV 양성임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충격파가 더욱 컸다. 동성애와는 무관한 건강하게 생긴 수퍼스타 운동선수가 “게이”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 매직 존슨을 비롯해 아무나 걸릴 수 있다”고 32세의 젊은이는 아연실색한 미국인들에게 안전한 섹스를 권유하며 말했다. 이 병은 워낙 수치스러운지라 병에 걸린 유명인사들은 대체로 자신의 상태를 비밀로 했다. 영화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의 주연을 맡은 브래드 데이비스는 1991년 숨을 거두기까지 6년 동안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숨겼다. “공개했다가는 일거리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나 본데 옳은 판단이었다”고 할리우드에서 영화 출연자 선정 일을 하는 부인 수전 블루스타인은 말했다. 데이비스가 죽은 뒤 그가 틀림없이 게이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와 우리 딸에겐 그런 소문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블루스타인은 말했다. 그는 ‘미드나이트 이후(가제·After Midnight)’라는 책에서 남편이 마약중독자이고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게이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에이즈에 걸리는 동료가 늘어나자 연예인들은 곧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기금을 조성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그 선두주자였다. 에이즈는 단순한 신체 접촉만으로도 걸린다는 인식을 불식시킬 목적으로 텔레비전 카메라와 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친구 록 허드슨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그런 제스처가 예스럽게 느껴지지만 1985년(당시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허드슨이 TV 드라마 ‘다이내스티’에서 여주인공 린다 에번스에게 키스해 에이즈를 전염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떠들어댔다)에는 테일러의 제스처야말로 혁명적이었다. 테일러는 비영리 에이즈 연구·지원 단체인 ‘아메리칸 파운데이션 포 에이즈 리서치(amfAR)’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너무 많은 친구를 잃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너무 많은 친구가 HIV 양성으로 판명나니 언제까지 계속 이럴지 걱정스럽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막후로 돌아가 보면 할리우드는 겉보기처럼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았다. 존 어먼은 1985년 에이즈 드라마 ‘이른 서리(An Early Frost)’를 방영하려고 힘들게 싸웠던 일을 돌이켰다. “NBC의 표준관행국[방송사 내부 검열부서]과 가진 수차례의 회의는 완전 중세시대 분위기였다”고 어먼은 말했다. 한 검열관은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그에게 병을 전염시킨 “악당”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들은 긍정적인 게이 관계를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어먼은 돌이켰다. 그러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NBC 엔터테인먼트 사장 브랜던 타티코프의 지원 덕분에 마침내 원하던 대로 드라마를 만들게 됐다. 그러나 큰 광고주들은 광고를 거절했다. 10년 안으로 에이즈는 텔레비전의 얼굴을 바꿔놓았다. 1991년 방영된 ‘30대(thirtysomething)’에선 에이즈에 걸린 게이가 나왔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원조인 MTV의 ‘리얼 월드’에선 1994년 그해 말 죽게 되는 에이즈 환자 페드로 사모라(23)가 나와 젊은이들에게 HIV 양성의 의미를 가르쳤다. 텔레비전이 에이즈를 늦게 다뤘다지만 영화의 경우엔 그야말로 얼음장이었다. 에이즈를 다룬 최초의 장편영화 ‘오랜 친구(Longtime Companion)’는 에이즈 창궐 9년째인 1990년에야 비로소 개봉됐다.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 때문에 나의 배우생활이 위태롭게 됐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개봉을 앞두고 히스 레저에 관해 말이 많았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브루스 데이비슨은 말했다. 그는 그 영화 출연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필라델피아’의 경우는 “늦게 뛰어들었다”고 행크스가 맨 먼저 시인했다. 브로드웨이는 아주 예외적으로 에이즈를 소재로 한 연극을 많이 공연했다. 초기의 희생자 가운데 연극계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2년 친구 일곱 명과 함께 레스토랑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모두 연극계에서 일하거나 일하기를 지망하는 게이들이었다. 당시 에이즈 이야기를 나눴다”고 에이즈 재단인 ‘브로드웨이 케어스/에쿼티 파이츠 에이즈’의 사무총장 톰 비올라는 말했다. “그 여덟 명 가운데 넷은 죽었고, 나를 포함해 둘은 HIV 양성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톰 쿠슈너의 ‘미국의 천사들(Angels in America)’이 1993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릴 무렵 뉴욕에선 에이즈를 소재로 한 약 60개의 연극이 공연 중이었다. 제작자 제프리 셀러는 “브로드웨이에서는 ‘에이즈·동성애·마약중독’을 다루는 연극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돌이켰다. ‘렌트(Rent)’를 두고 한 이야기다. 이 뮤지컬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연일 만원사례를 이룬다. ‘렌트’의 세계는 지금 보면 억지에 가깝다. 이 뮤지컬이 1996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리기 바로 직전 과학자들은 항바이러스 칵테일 요법을 개발해 HIV 감염자 수백만 명의 목숨을 연장했다. 그 뒤로 미국에서 에이즈와의 싸움은 촌각을 다투는 긴박성을 잃었다. HIV는 곧 죽음을 뜻하는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 만성적인 상태로 간주됐다. 그러나 치료약이 에이즈를 완치시켜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80년대의 장례식 행렬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는 신약 개발로 이제는 안전하지 않은 섹스를 마음대로 해도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가는 곳마다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된 젊은이들을 만난다. 대체로 약물 내성이 생긴 (에이즈) 바이러스 변종들”이라고 클리브 존스는 말했다. 그는 20년 전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기리는 마음에서 퀼트(침대덮개)를 누비기로 결심했다. 그 퀼트가 점점 자라 이제는 4만 개 이상이 이어진 큰 덩어리로 바뀌었다. 각각의 크기가 무덤만한 이 퀼트는 고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억을 담아 일일이 손으로 꿰맨다. 이 퀼트는 점점 커지면서 워싱턴에서 몇 차례 전시됐고 내셔널 몰의 잔디밭을 형형색색의 묘지로 만들었다. 존스가 전부터 꿈꿔왔던 이상, 다시 말해 미국이 에이즈의 피해 규모를 인식해야만 하도록 만든 일이었다. “2006년에도 전혀 새로운 세대가 이 비극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20년 전 미리 알았더라면 계속할 엄두를 못 냈다”고 존스는 말했다. 그의 HIV는 약물 내성이 생겨 이제 치료가 불가능하다. 정신력이야말로 HIV 감염자들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다. “사람들은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어림없어요”라고 라이언은 언젠가 엄마에게 말했다. 처음 HIV 판정을 받았을 때 6개월을 선고받은 라이언은 5년 반을 살았다. 국민에게 에이즈와의 싸움에 동참하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가 1990년 18세의 나이로 죽자 의회는 그의 이름을 따서 포괄적인 에이즈 지원법을 새로 제정했다. 그러나 정말로 라이언의 이름을 빛낸 일은 엄마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에이즈를 둘러싼 적대감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나 윤리적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 병을 가르치고 노골적으로 거론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화이트-진더는 말했다. 그는 아들이 에이즈와 함께 살다가 죽는 모습을 지켜본 체험담을 계속 연설한다. “지금쯤은 이 병이 사라졌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With RAMIN SETOODEH 최한림 parasol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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