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시대는 왔다 갔나
“유럽의 시간이 도래했다.” 1992년, 무명의 룩셈부르크 외무장관 자크 푸스가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그렇다면 새로 탄생한 유럽연합이 발칸반도의 인종·종교적 대학살이라는 사소한 문제를 중단시키지 않았을까. 발칸반도는 유럽의 수도들에서 비행기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아쉽게도 아니다. 유럽의 시간은 지나갔다. 1995년 미국의 공중폭격과 데이턴에서 외교적 압박이 있은 뒤에야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의 학살이 줄었다. 1999년 코소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최근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미국 고위 관료들이 얼마나 유럽에 우호적이었는지를 보고 크게 놀랐다. “우리는 이제 모두 유럽주의자들”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왜 그럴까. 미국 정부가 ‘힘싸움’이 남성들 방식이고 ‘말싸움’이 겁쟁이들(다시 말해 유럽인들)의 방식이라고 단정한 이래 미국은 중동에서 한물 간 세력으로 간주돼 왔다. 최근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막후 중재자로 유럽이 부상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먼저 회의적인 내 시각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최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G8 정상회담에서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먼저 앞에 나섰다. 다국적군이 개입해 유엔 결의안 1559호를 집행하고 헤즈볼라를 무장해제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 국방장관이 반대했다. 이라크에 너무 많이 파병해 남은 군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가 나서야 했다. 독일은 아프가니스탄에 발이 묶였다고 발뺌했다. 테러리스트들의 로켓이 이스라엘에 빗발칠 동안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는 아라파트 스타일의 카피예를 착용했다. 팔레스타인의 상징적인 스카프다. 그러나 이라크 주둔군을 철수시킨 그가 서둘러 그들을 레바논에 다시 파병할 생각은 없다. 폴란드의 대통령과 총리가 된 쌍둥이 카친스키 형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동성애자 혐오증과 반유대 정치색이 묘하게 섞였을 뿐 아니라 고립주의, 유럽연합 경멸감도 지닌다. 전임자인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은 이라크와 우크라이나 문제를 둘러싼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폴란드의 세계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그는 물러났다. 그렇다면 프랑스 대통령 임기를 열 달 남겨둔 자크 시라크가 남는다. 그의 레바논 관련 지식은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암살당한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개인적인 친구였다.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거의 동시에 이스라엘을 양면 공격한 일은 이란과 시리아의 책임이라고 시라크는 최근 르몽드지에서 말했다. 양국이 무기를 공급한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군사적인 결정까지 그들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조지·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투와 아주 흡사했다. 어쩌면 시라크는 내심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염두에 뒀을지도 모른다. 레바논 문제에서 영웅적 입장을 보이면 그렇게 오랫동안 프랑스 정계에서 활동한 후 떳떳하게 은퇴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신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바논의 와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의 구상은 분명하다. 휴전을 실시하고 헤즈볼라를 무장해제하고 정부를 도와 레바논 전역에서 권위를 세우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시라크가 실제로 강력한 유럽 외교의 기초를 조성할지도 모른다. 그는 블레어,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접근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그들과 공유해 왔다. 이라크 사태 중 유럽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레바논(그리고 넓게는 중동권)에 미래가 있으려면 지금 이 순간 유럽에서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더욱이 유럽의 개입은 강력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무능한 유엔군을 보강한 ‘유엔레바논잠정군(UNIFIL) 플러스’가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유엔군은 현재 진지에 죽치고 앉아 자폭테러범들의 공격(1982년처럼)이나 이스라엘의 포화(지난주 유엔 참관인 네 명의 사망처럼)를 기다린다. 그는 유럽의 핵심 가치가 위기를 맞았다고 경고한다. 레바논이 안정된 민주주의로 발전하지 않으면 테러와 원리주의 이념을 수출하는, 일종의 이슬람주의 자유기업 지대가 된다는 주장이다. 70년 전 스페인의 파시스트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민선 정부를 전복하고 스페인을 폭력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때문에 스페인은 수십 년간 유럽의 역사와 발전 과정에서 누락됐다. 그동안 유럽의 민주국가들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1992년 유럽은 또다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맞서 호들갑만 떨다 말았다. 난민 100만 명이 발칸반도를 떠나 북유럽으로 향했고, 25만 명이 사망했다. 헤즈볼라가 이란과 시리아의 사주를 받아 레바논을 파괴한 일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향한 더 공격적인 인종청소 캠페인의 서막에 불과하다. 따라서 레바논은 스페인 내전이나 발칸반도의 대학살 같은 과제를 유럽에 안겨준다. 지난주 워싱턴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유럽이 행동할 준비가 됐지만 이스라엘이 즉시 레바논 폭격을 중단해야 한다고 미국 대통령에게 말했다. 미국은 단기간에 구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랍 세계에서 신용을 잃었다. 그렇다면 유럽이 아니면 누가 중재에 나서겠는가. 8월 휴가철이 다가왔다. 이스라엘의 포화와 헤즈볼라의 로켓탄들이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갈 동안 유럽 지도자들이 해변의 파라솔 아래 몸을 감출까. 지켜볼 일이다. (영국 노동당 의원인 필자는 2001~2005년 토니 블레어 정부의 유럽담당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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