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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덩치에 비해 실속 없다

17대 국회 덩치에 비해 실속 없다

17대 국회는 적어도 두 가지 신기록을 세울 전망이다. 의원 법안 발의 건수는 이미 역대 최다이고, 폐기법률안 또한 역대 최다로 보인다. 2004년 5월 30일 임기를 시작했는데 11월 30일 현재까지 4190건의 의원 발의 법안이 제출됐다. 12대부터 16대 국회까지 의원 발의 법안을 모두 더한 4158건보다 많다. 현재는 2702건(11월 30일 현재)이 계류 중이다. 이 중 20% 정도만 처리되고 나머지는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2008년 5월 17대 국회가 끝날 때는 12~16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을 모두 합친 2778건 이상의 법안이 폐기될 전망이다. 국회의원의 일차적 기능은 입법이다. 따라서 의원 발의 법안의 증가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산업사회의 진전과 지방자치의 활성화 등에 따라 법안 수요의 증가는 당연하다. 문제는 17대 국회의 의원 발의 법안의 통과율이 5건 중 1건이 채 안 된다(15.1%)는 사실이다. 나머지 4건 이상은 쓰레기통으로 사라진다. 16대 국회의 통과율 27%, 15대 국회 40%보다 크게 밑돈다. 함량미달 법안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발의 법안의 양적인 증가를 반드시 긍정적인 변화로 보기 힘들다”고 강원택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소장(숭실대 교수)은 말했다. 의원 발의 법안의 급증과 낮은 통과율은 정책 타당성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법안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강 소장은 분석했다. 법률 시행 후 생길 부작용을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지 않거나 인기를 얻고자 통과되지도 않을 법안을 불쑥 제출한다는 뜻이다. 물론 입법 정보가 부족했거나, 요령부득으로 법안의 내용이나 체계, 형식을 못 갖춘 데에서 오는 기술적인 실수도 없지 않다. 하지만 국회에 제출됐다가 그냥 사라지는 법안이 80%가 넘자 17대 국회가 ‘법안 공해’에 시달린다는 말까지 나온다. 심지어 법안 덤핑이라는 냉소적인 지적도 있다. 모두 의원들이 법안 발의 실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2000년 16대 총선으로 올라간다.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총선연대가 낙천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의원 법안 발의 실적을 평가의 한 지표로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의원 발의 법안 건수가 의정활동을 평가하는 잣대로 의미가 있었다. 15대 국회에서는 정원 299명의 64%인 191명만이 법안을 발의했다. 100명 이상이 4년 동안 단 하나의 법안도 발의하지 않았다.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법률안을 단 하나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비판받아 마땅했고 해당 의원의 낙선 사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자 16대 국회에서는 양상이 급변했다. 국회의원 정원(273명)의 95.2%에 달하는 260명이 법안을 제출했다. 당 대표나 중진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모든 의원이 입법에 참여했다. 16대 국회 때 시민단체들은 법안 발의 건수를 의원의 의정활동을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 삼았다. 그래서 의원들 사이에서는 너도나도 발의 법안 건수를 올려놓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됐다. 따라서 현재 국회법은 100건 이상의 개정안이 올라 있다. 조세특례제한법,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소득세법 등도 보통 40~60여 명 이상의 의원이 개정안을 냈다. 의원들마다 내용만 조금씩 다르다. 같은 법안을 잇달아 내는 의원도 있다.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의 경우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지난해 11월 7일 낸 뒤 1주일 후 1개 조문을 고치자고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또 냈다. 정형근 의원도 2005년 11월 10일, 11월 17일 국회법 관련 일부 조항 개정 의견을 따로 제출했다. 한나라당 유정복 의원은 2005년 3월 10일 국회법 개정안을 제출한 다음날 국회법 개정안을 또 제출했다. 시급한 개정 사유가 그 사이에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의 효율성을 따지자면 개정 조항을 한데 모아 법안에 반영했어야 마땅하다. 이른바 ‘품앗이 법안’도 있다. 의원 입법은 국회의원 10명의 서명을 받아야 국회에 제출된다. 그래서 친한 의원끼리 서로 서명해주는 경우를 가리켜 품앗이 법안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의 어느 국회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벌칙 규정이나 자구를 한두 군데 고쳐 서명을 받으러 오는 보좌관들도 있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10건씩 가져오기도 한다. 가까이 지내는 보좌관이라면 질책도 하지만 (의원을 대신해) 서명해줄 때도 있다.” 실적을 올리는 데는 기존 법안을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방법도 동원된다. 법률 중에서도 제정 목적을 상실했거나 관계 업무가 끝나 법적 실효성을 잃은 법률은 폐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효력을 잃은 법안을 존치하면 국민이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원들이 기존 법안의 생명력을 따져서만 폐지 법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원들이 내는 상당수 폐지 법률안은 국회 법제실에서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정리돼야 할 사문화 법안’ 목록을 베낀 데 불과하다. 예를 들면 한나라당의 모의원은 11월 24일 법안 7건을 제출했다. 그중 국세징수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제외한 나머지 6개 법안은 폐지 법률안이다. 한국투자공사의 해산에 관한 법률 폐지 법률안, 군사원호대상자 등록에 관한 특별조치법 폐지 법률안 등등이다. 이 의원이 제출한 6개 법안은 지난해 5월 국회 법제실이 공개한 ‘정리돼야 할 사문화 법안 목록’에 다 나와 있다. 물론 폐지 법률안 제출도 엄연한 입법 행위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법은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법’이다. 입법 취지를 고민하고, 발로 뛰면서 법안을 만든 의원들의 입장에서는 맥빠지는 일이다. 폐지 법안도 1건이고, 수십 개의 조문을 넣어 새로 만든 법안도 1건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또 1개 조문 수정 법안 10개를 내놓은 의원과 40개 조문으로 이뤄진 법안 1건을 제정한 의원을 비교해보자. 앞의 의원은 10건의 실적이 쌓이지만 뒤의 의원은 1건이 고작이다. 연세대 전지연 교수는 “실적을 의식한 법안 양산은 쓸모없는 일에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의 시간과 정력을 분산시킨다”고 말했다. 11월 말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폐지 법률안은 70여 건이다. 이미 가결된 폐지 법률안이 22건이므로 총 100건 정도가 폐지 법률안이다. 17대 들어 국회에 제출된 법안의 2% 정도가 폐지 법률안인 셈이다. 이 중 정부가 제출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국회의원들이 제출했다. 법안을 제출하면 ‘제안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의원 발의 폐지 법률안에 적힌 제안 이유도 법제실 자료에서 받침만 몇 개 바꿔 그대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 사무처의 한 고참 사무관은 “신임 보좌관이 법안 실적 스트레스를 호소해오면 법제실 목록을 활용하라고 얘기해준 적이 있다. 또 관록이 붙은 보좌관들도 요령을 부릴 땐 이 방법에 의지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일반화됐다는 얘기다. 물론 예산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선심성 법안이나 지역구 민원을 법안으로 둔갑시키는 경우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국회는 법안을 제출할 때 예산 추계서를 첨부토록 했다. 그러나 국회 예산정책처의 공식적인 추계를 단 경우는 전체의 21%(올 10월 31일 기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자신들의 주먹구구식으로 추계한 내용을 첨부한다. 예산정책처의 공식적인 추계를 기다리다가는 법안을 제때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 않는다고 강조하기 위한 편법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법안이 증가하다 보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 상임위 법안 심의가 더 부실해지거나 졸속이 됐다. 정부 입법은 부처 간 조율 과정을 거치고 이해관계도 수렴하기 때문에 국회가 큰 문제를 삼지 않으면 쉽게 통과된다. 반면 의원 입법은 걸러주는 장치가 없다. 안상수 법사위원장은 “과중한 업무량 때문에 법사위는 아예 기피 상임위가 됐다”고 했다. 17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당시에도 법사위를 자원한 의원은 단 1, 2명에 불과했다고 안 위원장은 전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부랴부랴 의원들을 차출해서 정원을 채웠다. 지난해 말 법사위는 하루만에 108건의 법안을 처리하기도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점심 식사 시간, 휴식 시간을 제외한 대략 7시간 동안 108건을 처리했으니 거의 4분에 1건꼴로 법안을 통과시킨 셈이다. 그러니 법안 심의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안 위원장은 “요즘 같은 때일수록 소관 상임위에서 법을 제대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의원 발의 법안이 남발되면서 법제실, 의안과, 예산정책실 등 지원부서도 일에 치인다. 예산정책처의 송대성 비용추계팀장은 “법안 증가에 비례해 비용추계서 작성기간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자꾸 위에서 쪼아대면 빨리 털자는 생각이 든다. 꼼꼼하게 챙길 수 없다. 예산 담당부서에 문의도 해야 하는데 시간에 쫓기면 그마저 어려워진다.” 어느 입법 사무관의 하소연이다. 의원 입법 증가는 여론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다. 국회 의안과의 한 사무관은 “신문에 사회적 이슈로 다뤄지면 요즘은 바로 법안화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의원이 국민 여론과 사회현상을 신속하게 입법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과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8, 9건이나 쏟아졌다. 서울 은평 뉴타운 분양가 파동 직후에도 주택법 개정안이 4건이나 발의됐다. 국회의원의 반응속도가 빨라지면서 입법 기능이 충실해진 결과다.” 또 법안 통과율이 저조하다는 사실만으로 의원의 입법 활동을 획일적으로 재단하기 곤란한 측면도 있다. 사형법 폐지법안의 경우 역대 국회에서 꾸준히 시도됐으나 시대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입법이 지연됐다.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법안도 정부가 반대하거나 국회에서 호응받지 못하면 사장된다. 입법고시 2회 출신으로 국회에서 27년간을 근무한 홍익대 임종훈 교수(법학)는 “통과비율이 낮아졌다고 의원 입법 활동의 질이 낮아졌다는 건 논리의 비약이다. 과반수 지지를 못 받아 부결된 법이라도 발의될 당시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법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구 민원용 법안, 이익단체의 일방적인 이해가 반영된 법안, 한건주의식 졸속 법안이 의정 활동의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은 헌법상 국민의 대표자이면서 동시에 지역과 직능의 대표자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일부라도 요구가 있으면 국회에서 대변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모순을 극복하는 현명한 태도가 요구된다. 임종훈 교수는 “국민의 1%가 요구하지만 90%가 반대할 법안이라면 발의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청회 등 사전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도록 국회법은 권장한다. 또 의정활동 평가 잣대를 바꾸면 입법 풍토가 달라질지 모른다. 가능하면 발의 건수 외에 가결률도 함께 따져보고, 궁극적으로는 질적인 검증방안을 만들면 된다. 시민단체에서도 이런 문제를 고민한다. 강원택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은 “정량화를 추구하다 보니까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고 그래서 건수 위주 입법 경향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의정감시센터의 이지현 간사는 “과거처럼 숫자나 통계를 가지고 하는 정량적 평가보다는 법안의 내용으로 평가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정당별, 의원별 입법이 어느 계층을 대변하는가 등 정성적 평가 지표 개발도 한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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