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절리나 졸리의 특명: 세계를 구하라
영화 ‘마이티 하트’에서 불굴의 여인으로 열연하는 등 배우이면서 사회운동가로 명성 떨쳐 인도의 한 무슬림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 중인 지난해 11월 6일 오후. 그 상황에서 배우들에게 파키스탄 경찰복을 입히고, AK-47 기관총을 쥐여준 뒤 그들을 교정에 세운 결정은 그리 적절한 생각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곳에서 촬영 중이던 ‘마이티 하트’란 영화가 유대계 미국인 기자 대니얼 펄이 무슬림 과격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내용이 아니었다면, 또 앤절리나 졸리(32)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그런 실수도 금세 잊혀졌을지 모른다. 현지 학부모들이 방과 후 자녀를 데리러 나타났을 때 교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망원렌즈로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포착하려 학교를 에워싼 파파라치의 출입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학부모들이 불안해 하자 학교 측은 결국 교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틈을 타 파파라치도 물 밀듯 들어왔다. 제작진의 경호원들이 몰려드는 군중을 저지하려 했고, 이내 몸싸움이 벌어졌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졸리의 경호원 중 2명이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인도 경찰에 체포됐다. 현지 신문이 인용한 익명의 소식통들은 영국인 경호원 2명이 학부모와 아이들을 밀치며 그들을 “잔인한 인도인” “무자비한 무슬림”으로 불렀다고 주장했다. 졸리는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위험한 문제를 건드리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 바로 그런 꼴이 됐다. 2001년 9·11 사태의 후폭풍과 유명 연예인을 우상화하는 미디어 문화의 토양 속에서 한 사소한 사고가 국제적 사건으로 증폭됐다. 졸리는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에서 가장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바뀌었다. 이튿날 경호원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졸리는 뭄바이 서쪽 끝에 위치한 21층 호텔의 스위트룸에 있었다. 자신이 펄 기자의 미망인 마리앤으로 출연하는 마지막 장면을 찍을 세트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졸리는 짙은 곱슬머리 가발과 갈색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고 다리를 꼰 채 동료 배우 4명과 함께 바닥에 앉아 있었다. 몸은 떨리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선 분노가 느껴졌다. “모두들 나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세우려 난리다. 차라리 내가 누구와 동침했다는 소문을 지어낸다면 말리지 않겠다. 특정 인종을 멸시하거나 아이를 다치게 할 사람을 내가 고용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내겐 가장 모욕적이다. 그 경호원들은 내 아이들을 보살핀다.” 뭄바이시의 다른 한쪽에선 이번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인 브래드 피트가 경호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경찰서에 찾아갔다. 그는 상황을 진정시기 위해 그날 저녁엔 인도의 ‘오프라 윈프리’로 알려진 바르카 더트와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다. ‘이에는 이로’의 할리우드식 대응법이다. 졸리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혐오는 서로 주고 받게 마련이다. 미국이 때로는 무책임한 외교정책을 펼쳤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보다 마음을 열고 우리 중에는 마음을 열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 주면 안 될까?” 한 시간 뒤면 호텔 측 요구에 따라 그곳을 비워줘야 했다. 시위자들은 호텔 주위를 포위하겠다고 위협했다. 졸리의 건장한 경호원 한 명이 그녀 옆에 나타나 귀에다 대고 “당장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짐을 꾸리며 뉴스위크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다, 뜁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이티 하트’는 본질적으로 국제적 이해를 촉구하는 영화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펄은 9·11 사태 발생 넉 달 뒤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있었다. 당시 임신 5개월째인 아내 마리앤과 함께였다. 펄은 2001년 12월 파리~마이애미 간을 운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신발에 채워 넣은 폭발물을 폭파시키려다 체포된 리처드 C 레이드가 파키스탄 정부와 연루됐을 가능성을 파헤치는 기사를 취재 중이었다. 그러던 중 2003년 1월 23일 펄은 알카에다 조직원들에게 납치됐다. 알카에다는 인질로 잡힌 펄의 초췌한 모습을 수차례 공개한 뒤 참수 장면을 비디오에 담았고, 그 장면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영화는 펄의 아내 마리앤과 뉴스위크 기자 출신인 새라 크라이턴이 이 사건을 토대로 쓴 베스트셀러에 기초해 제작됐다. 졸리는 마리앤 역을 맡았다. 영화는 마리앤이 월스트리트저널 편집 간부들과 파키스탄의 대테러 전문가, FBI 요원 등과 함께 얽히고 설킨 알카에다 조직망을 파헤쳐 펄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동시에 마리앤이 남편 피살 후에도 보복을 하거나 무슬림을 비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비중 있게 다룬다. 마리앤은 파리의 자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을 붙잡아 간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내 편에서 남편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기독교도·힌두교도·유대교도·불교도·무슬림 등 가지가지 종교 배경을 가졌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서로 충돌하는 느낌이 들었다.” 9·11 사태 후 미국은 변했다. 그 모든 불평등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갑자기 서로 연관성이 깊어졌으며 미국은 더 이상 그런 사실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었다. 뉴스는 보다 진지해졌고, 보다 세계적 시각이 투영됐다. 한동안은 그런 변화가 영원히 지속될 듯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난 6년간 유명 연예인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다루는 보도도 동시에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라크전에 관한 끔찍한 소식도 할리우드의 말썽꾼 린지 로핸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까마득히 잊히는 듯했다. 졸리가 그녀 세대의 다른 모든 스타들, 다른 모든 ‘공인’들과 다른 점은 그녀의 행보가 국가적 의식의 이 같은 변화뿐 아니라 미디어의 진지성과 선정성 모두를 투영한다는 점이다 2001년 이후 그녀는 육감적 몸매의 배우에서 입양아 3명을 포함한 네 자녀의 어머니로, 그리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친선대사로 변신했다. 그러곤 시에라리온·다르푸르·태국·에콰도르·파키스탄 등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세계경제포럼에도 참석하며 소득의 3분의 1을 자선사업에 내놓는다. 또 있다. 브래드 피트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이질적 요소의 결합 덕분에 그녀는 유일하게 뉴욕 타임스와 ‘어스 위클리’(연예계 소식지) 모두에 인기 있는 소재가 됐다. 전례 없는 21세기형 인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정적 연예지에 등장하는 스타이면서도 국제적 명성을 지녔고, ‘하드 뉴스’의 세계에서 존경받는 ‘소프트 뉴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졸리는 두 세계를 넘나든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UNHCR 친선대사로 임명된 지 6년이 지났는데도 그녀에겐 여전히 잘난 체하는 아마추어(다시 말해 세계적인 위기 현장을 “관광하는 유명인사”)가 아니냐는 의혹이 따라다닌다. 브래드 피트의 제작 파트너인 디드 가드너는 “졸리가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돈을 더 많이 기부해야 하나?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나?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진실성을 판단하려 하면 ‘그래? 당신은 무슨 운동을 하기는 해봤나?’라는 생각부터 든다.” 하지만 졸리가 복잡한 세계적 이슈들을 정말로 이해할까? 아니면 UNHCR이 그녀를 친선대사로 파견할 때마다 그저 사진이나 찍는 얼굴마담에 불과할까?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졸리는 결단코 진실하며 분명 세상을 안다. 그녀가 난민들을 돕는 모습은 자신을 돋보이려 해서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공부하는 사람이다.” 파월은 지난 수년간 졸리와 수차례 대화를 했으며 두 사람은 난민보호 행사장에 함께 나타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파월은 졸리에겐 가식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관심사는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구하는 일이다. 그녀가 이 일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이 일이 그녀를 필요로 한다.” 졸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런 진의를 의심하기 어렵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해결책이 분명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도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현장에서 보내지만 이젠 워싱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조그만 가게나 직업훈련소를 개설하려고 열심히 싸울 수 있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무역법이 바뀌지 않으면 그런 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난 4월 졸리와 피트는 에이즈에 걸린 고아를 돕는 프로그램과 난민촌 아동 교육에 필요한 예산지원을 촉구하는 워싱턴의 로비 단체 ‘글로벌 액션 포 칠드런’에 자금을 지원했다. 6월 초 졸리는 미국 외교정책의 산실이자 엘리트 클럽인 미 외교협회의 초청 회원이 됐다. 외교협회는 아무나 가입하는 곳이 아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ABC 방송의 앵커우먼 다이앤 소이어,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회원이다. 자선사업과 관련해 졸리에게 조언하는 트레버 닐슨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뭔지 잘 안다. 이제 매우 세련된 전략을 세우며 국제 문제에서 그녀의 영향력도 커졌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졸리가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1999)’에 출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란 점을 잊기 쉽다. 졸리가 중시하는 일의 우선순위는 최근 몇 년간 바뀌었지만 그런 변신은 영화엔 반영되지 않았다. 관객이 적었던 영화 ‘머나먼 사랑(Beyond Borders·2003)’을 제외하면 졸리는 계속 자신의 성적 매력에 의존하는 역할을 맡았다. ‘툼레이더 2: 판도라의 상자(Lara Croft: Tomb Raider·2001)’ ‘오리지널 신(Original Sin·2001)’ ‘알렉산더(2004)’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2005)’ 등. 이런 영화는 졸리가 세계를 무대로 일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데는 도움을 줬지만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바꾸진 못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6월 22일 개봉한 ‘마이티 하트’는 다르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The Road to Guantanamo·2006)’을 제작한 영국의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이 2000만 달러 이하의 예산으로 자신의 장기인 실감나는 다큐멘터리식으로 제작한 영화 ‘마이티 하트’는 남편을 찾으려는 마리앤의 처절한 투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동시에 살인자들이 남편의 일생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려는 그녀의 노력도 실감나게 묘사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나 스타 배우의 후광효과가 없는 영화다. 덕분에 졸리는 배우 경력 중에서 가장 미묘하고, 강력하며, 인간적인 연기가 가능했다. 멋진 역할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 가장 힘들었다”고 졸리는 말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일관되게 표현해야 했다. 마리앤은 차분하고, 집중력이 강하며, 생각이 정돈된 사람이지만 나 같았으면 신경과민이 돼 카라치의 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차를 몰고 달렸을지 모르겠다.” 물론 뭄바이 시내에서 운전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 졸리는 은색 SUV 뒷좌석에 앉아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의 숙소로 이동했다. ‘마이티 하트’ 제작진이 영화 촬영을 하던 호텔에서 정반대 쪽으로 도시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체포된 경호원들 소식은 아직 없었다. 그 사건으로 졸리는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서로 상대방에 관해 크게 오해한다”고 졸리는 말했다. “분노가 충만하다. 하지만 거리를 돌아보면 불평등과 슬픔이 짙게 느껴진다. 이런 문제에 더 관심을 보여야 한다.” 뭄바이 주민 1800만 명(로스앤젤레스 인구의 두 배) 중 43%가 판자촌과 슬럼가에서 산다고 한다. 어느 호텔을 가나 주변에 구걸하는 여성들이 있다. 건널목에 차가 멈추면 어린아이들이 택시 창문을 두드리며 장신구를 팔거나 먹을거리를 구걸한다. “극단적인 풍요와 빈곤이 나란히, 그것도 그렇게 대규모로 공존하는 곳을 가본 적이 없다”고 졸리는 말했다. “어떻게 그 정도로 심각해졌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차 안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릴 때 한 소년이 차창을 두드렸다. 책을 파는 아이였다. 졸리는 스낵 몇 개를 건네줬다. “꼬마가 파는 책을 봤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졸리가 물었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였다.” 졸리는 기자가 그 모순을 이해하도록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첫 장 주제가 인도의 아웃소싱이다.” 졸리는 사람을 쉽게 사귀는 재주가 있다. 자주 웃으며 몸짓 언어가 편하고 개방적이다. 사실 배우가 인기를 얻으면 외부세계와 벽을 쌓는 경향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뭔가를 요구하면(사인·사진·영화·기부금·인터뷰 등) 방어적이 될 만도 하다. 그러나 졸리에게는 그런 경계의 빛이 전혀 없다. 질문을 피하지도 않고 말투도 시원스럽다. 세상에 겁날 게 없고 자신도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가드너가 말했다. “또 주변 사람 모두가 자신처럼 허심탄회하길 바란다.” 9년 전 졸리가 영화 ‘지아(Gia)’에서 양성애 모델 연기로 일약 인기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런 솔직함이 상당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1월 사망한 여배우 마셸린 버트란드와 배우 존 보이트의 딸인 졸리는 칼과 문신을 좋아했으며 인터뷰할 때마다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빌리 밥 손턴과의 결혼, 혈액을 작은 병에 담아 서로 교환한 일, 성생활에 관한 공개적인 언급 등의 사건이 잇따랐다. “그랬죠. 나도 철없이 날뛰던 시절이 있었죠.” 졸리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날의 졸리를 보면 과거의 철부지 같은 모습을 연상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고 가드너는 말했다. “스무 살 때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가 왜 저런 미친 짓을 했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옳은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졸리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첫째 이유는 본격 사회운동가이면서 성적 우상이라는 이중성 때문이다. 착하고 똑똑한 여자는 섹시한 여자처럼 보여서는 안 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졸리는 그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하기는 케이블 TV에서 패리스 힐턴의 구속을 온종일 주요 뉴스로 보도할 정도니 정통 언론도 이제는 분명 원칙을 따르지 않는 셈이다. 졸리도 그 점을 잘 이해한다. 자신이 그런 뉴스의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언론이 뒤를 쫓는다면 이왕이면 가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단지 배우로 유명했을 때는 내 인생의 깊이가 없는 듯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그 많은 사람이 나와 인터뷰하려 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졸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계를 돌아보며 구원을 찾았다. 삶의 보람이 생겼다. 내가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마리앤 펄과 졸리가 2년 전 만나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는 자명하다. “우리는 아주 열정적인 대화를 했다”고 펄은 말했다. “졸리와 대화할 때마다 반드시 뭔가를 배운다.” 남편의 피살 이후 펄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지 그리고 아들 아담에게 어떤 인생을 열어줄지에 관해 큰 결심을 했다. “테러리즘은 심리적인 무기”라고 펄은 말했다. “테러리즘은 두려움과 반감을 유발한다. 세상을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도 못하게 된다. 테러범을 이기려면 그런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길뿐이다. 두려움을 보이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이 패한다.” 너무 고상한 주장이라고 지적하자 펄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은 용서가 아니다. 테러범들은 보복을 기대한다. 그들이 기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나의 행복이다. 그것이 진정한 복수다. 그리고 아담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내가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졸리에게 펄을 소개한 사람은 피트였다.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말 재미있다”고 피트는 말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대화하는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게다가 두 여성은 예쁘기까지 하다.” 2003년 피트는 부인 제니퍼 애니스턴과 공동소유한 영화제작사 플랜 B를 통해 ‘마이티 하트’의 저작권을 인수했다. 애니스턴은 자신이 마리앤 역을 맡을까 고려 중이라고 보그지 기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2006년 영화 제작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 피트는 애니스턴과 이혼하고 졸리와 사랑에 빠졌다. 피트는 펄의 역할에 졸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리앤만큼 강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점은 알았지만 그 이야기를 졸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피트는 말했다. “마치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여자친구에게 일자리를 구해주는 격이라는 느낌이 좀 들었다.” 하지만 졸리가 펄을 연기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연예 뉴스계는 12시간도 안 돼 대니얼 펄의 피살에 관한 영화를 스타들의 안방 드라마로 바꿔놓았다. 졸리가 애니스턴의 남편을 “빼앗았듯” 애니스턴의 배역도 “훔쳤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애니스턴은 그 배역의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고 피트의 홍보담당자는 공식 답변했다. 애니스턴의 홍보담당자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논란은 인종 문제였다. 영국 여배우 탠디 뉴턴(‘크래시’)을 비롯한 일부 흑인 배우들은 아프리카-쿠바계에 네덜란드 피가 섞인 펄 역할을 졸리가 맡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일부 블로그에서는 이 문제를 “새로운 흑인 분장 연기”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마이티 하트’를 배급하는 영화사 파라마운트 밴티지는 배역에 맞춰 일부러 졸리의 분장을 어둡게 하지 않았으며 피부색이 달라 보인다면 영화의 조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이 거짓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주 약간의 거짓말일 뿐이다. 졸리는 의상을 입고 자연광 아래에 서면 아무래도 원래의 피부색보다 좀 더 거무스레해 보인다. 어쨌든 졸리와 펄은 그런 비난에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흑인들에] 맞는 좋은 역할이 없는 데 불만이 있는 줄은 알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고 졸리는 말했다. 펄은 더 직설적이다. “이것은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졸리를 믿기 때문에 내 역을 맡아주기를 바랐다”며 펄은 한숨을 내쉰다. “아직도 이 문제로 왈가왈부해야 하나.” 장시간 차를 타고 뭄바이 시내를 이동한 끝에 마침내 졸리가 묵는 호텔에 도착했다. 객실에 들어서자 아라비아해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을 실내로 돌리니 완구·의류·소파쿠션 등 아동용품들이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졸리가 안쪽을 향해 “엄마 왔어”고 말하자 다섯 살짜리 매독스가 뛰어나와 품에 안기며 양다리로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하루종일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떻게 풀장 바닥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했는지 마치 따발총 쏘아대듯 쏟아냈다. 졸리는 한순간도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5년 전 캄보디아에서 매독스를 입양한 후 졸리는 2005년에는 피트와 함께 에티오피아에서 딸 사하라를 입양했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나미비아에서 딸 실로를 낳았고 올봄에 베트남에서 아들 팩스를 입양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아이를 입양할 계획이다. “능력이 닿는 만큼 대가족을 이루고 싶다”고 졸리는 말했다. “한 가지 제약이 있다면 모든 아이를 돌볼 만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잘 따져보니 그럴 만한 여력이 있다.” 피트는 그 문제를 꺼내면 피식 웃었다. “그렇다. 우리는 뭐를 해도 극성스럽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큰 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지금까지의 어떤 일보다도 재미있다.” 이런 가족과 함께 이런 삶을 사는 여성이 인종차별주의자로 비난받는다는 사실은 씁쓸한 모순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21세기 최첨단 글로벌 미디어의 시대지만 동서 간 공포와 증오의 골은 갈수록 깊어진다. 그러나 졸리와 피트는 인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데 상당히 능숙해졌다. 그날 밤 피트는 ‘인도의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를 하고 자신들의 무고함을 인도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다음날 졸리의 경호원들이 풀려났다. 졸리 주변은 늘 시끄럽다. 파파라치, 선정적인 연예 매체, 팬 등등. 그러니 아무래도 흔들리지 않을까. 하지만 졸리 자신은 전혀 문제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내 선택에 관해 시비를 걸고 내 행동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끝내는 나의 진정한 노력과 의지가 승리한다. 내게 중요한 일은 탄탄한 가정을 이루고 사회운동을 실천하며 내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것뿐이다.” 그런 바람은 졸리처럼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인 대스타에게는 어쩌면 약간 고리타분한 느낌이다. 반항적인 절규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오후의 햇살 속에서 매독스와 함께 이마를 마주 댄 채 서있는 모습을 보니 그 언급은 그녀가 지금까지 한 어떤 말보다 훨씬 과격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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