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부시’가 본 70년대 중국
1974년만 해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국제문제만큼은 비교적 초심자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공화당 전국위윈회 의장으로 있으면서 워터게이트 기간 내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옹호했고, 닉슨의 사임 직후에는 부통령 물망에 올랐지만 무산됐다. 그는 위로의 선물로 파리나 런던 주재 대사직을 제의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중국을 택했다. 미국은 얼마 전 그곳에 정식 대사관 대신 ‘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 부시는 사실상 광대하고 신비스러운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미국 대표였다. 부시는 1974년 10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그곳에서 다루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공산 정권뿐 아니라 우호적이었다가도 외국인 혐오증을 드러내는 인민들은 물론 동남아에서 미국의 패배가 가져온 반향과 씨름해야 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그는 국제 체제가 돌아가는 방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런 국제 체제 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인상을 녹음기에 구술하는 형식으로 일기를 남겼다. 그 내용이 오는 5월 ‘조지 H W 부시의 중국 일기(The China Diary of George H.W. Bush)’로 출간될 예정이다. 프리 A 엥겔이 엮고 소개말을 쓴 이 책의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1974년 10월 21일 중국에 가면서 자문해 본다. “나는 무엇인가로부터 도피하려고 가는가 … 언론의 과장보도와 무례함, 워터게이트와 모든 추잡함으로부터? 나는 편한 길을 가려는가?” 내 생각에 대답은 “아니다”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자극하는 호기심과 매력 때문이다 … 국무부 사람들은 우리의 중국 정책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인상이다.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중국 카드를 혼자서 움켜쥐었기 때문에 유능한 관리들이 주도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누구든 그들을 만나 봤으면 좋겠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열정과 정치적 본능은 그 목표를 위해 좀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게 즐겁다고 속삭인다. 1974년 10월 22일 마오 주석이 덴마크 총리를 접견했으나 그의 행방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덴마크 총리 일행은 그가 어디 있는지 밝힐 입장이 아니었다. 마오가 베이징 (집권) 그룹의 태도를 지켜보려고 지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각에서는 그가 고령이기 때문에 관저에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추측하고 말만 할 뿐이다. 우리는 인구 8억 명의 나라에 와 있지만 그의 행방에 관한 비밀은 철통같이 지켜진다. 최소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로 놀랍다. 1974년 10월 27일 토요일 우리는 (외교관) 존 홀드리지 부부와 함께 시산(西山)에 올랐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힘든 등반이었다. 산 입구에는 “단풍 채취 금지”라는 표지판이 있었지만 산에 오르면서 만난 군인들과 아이들은 단풍을 손에 들었다. 선명하게 붉은 단풍이었다. 길은 약간 지저분하고 먼지투성이였다. 곳곳에 아이스캔디 껍질과 종이 포장지가 흩어져 있었다. 내가 여기 지도자라면 공중도덕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공원 전체에 선전용 확성기가 설치돼 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확성기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자 우리 앞의 회색 마오쩌둥 제복을 입은 네 아이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중 한 아이가 확성기 소리를 막으려는 듯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막았다. 1974년 11월 1일 (당시 부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을 예방했다. 키가 아주 작았다. 방으로 들어선 우리는 사진 촬영차 방의 중앙으로 안내됐다. 키가 작은 덩샤오핑 좌우로 홀드리지와 내가 섰다. 그리고 접견실로 자리를 옮긴 다음 유익한 논의를 오랜 시간 가졌다 … 나는 덩에게 우리의 중국 정책에 진전이 있다는 가시적인 태도 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래야만 미국에서 다른 정책들이 받는 세세한 분석을 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덩은 정국을 주도하는 듯 보였다. 세부적인 농촌 인구 통계를 꿰고, 인도 문제를 거론하고, 우리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 기간 중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지 묻지는 않았다. 1974년 11월 3일 어제 우리 직원 한 사람이 (명나라 시대) 고분에서 불상사를 당했다. 그가 차를 몰고 “외국인 통행금지” 표시가 된 정지선을 지나다가 인민해방군 병사에 의해 제지 당했다 … 2시간 반 동안의 승강이가 있은 후 우리 측 다른 직원들이 도착한 뒤에야 그가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 이 일은 우호와 공식만찬, 정중한 태도 뒤에 숨은 이면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런 엄중하고 경직되고 비합리적인 또 다른 면이 있다 … 또 다른 예가 있다. 내 사무실에 지도를 걸어 달라고 요청했다. (총무담당) 모 모린이 중국인 목수에게 지도를 건네면서 액자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목수가 돌아와 모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대만이 중국의 나머지 지역과 다른 색깔로 표시돼 지도가 잘못됐다는 얘기였다. 1974년 11월 17일 레드 뉴스(Red News)에서 미국을 공격하는 기사를 읽을 때면 무지무지 약이 오른다. 중국은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국을 제국주의자, 약소국 착취자로 간주한다. 그런데 문득 중국 지도자들은 이런 견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협상에서 솔직하려 하고,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데 이런 공격이 어떻게 먹혀들까. 또 우리가 반격한다면 중국은 이해할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폐쇄된 사회와 개인 자유의 억압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하다. 1974년 11월 26일 키신저의 참모들은 그를 몹시 두려워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오고 있어? 그가 오고 있어? 그가 늦는데? 그가 늦는데?” 누구도 그에 맞서 바른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 그의 책임이 막중하고 업적 또한 대단하기 때문에 상식을 벗어난 그의 태도가 용인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중함이 결여돼 있다. 키신저 국무장관과 동석해 덩샤오핑과의 회담에 참석했다. 키신저는 이런 회담에 탁월하다. 역사와 세계정세에 관한 뛰어난 성찰. 이런 면에서 그는 최고의 경지에 있다. 사람들을 다룰 때 그의 언짢은 매너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수요일 아침 회의에서 그가 외쳤다. “내 참모들을 집합시키시오. 그들 모두 이 방에 모이도록 하시오. 지금 당장. 그 사람들 어디 있어요?” 이런 식의 큰 소리가 계속됐다. 그는 자신의 직책을 이런 식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위장병에 걸리지 않는 듯하다. 1974년 12월 16일 내가 처음 부임해 조인한 협약에 따라 중국의 고대 역사유물 전시회가 미국에서 열렸다. 전시회는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됐다. 그러나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맞설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중국은 이스라엘과 남아공, 한국 그리고 다른 한 나라 기자들의 회견 전 사전관람 불허를 고집했다. 결국 국립미술관과 국무부, 중국 측 간에 타협이 이뤄져 중국의 주장이 관철됐다. 우리는 미국에서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인권문제에 아주 취약하다. 언젠가 미국 의회는 중국 정책의 이런 문제에 관심을 돌릴 게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미국에서 자기네 방식을 과시하는 일을 용인하지 않아야 한다. 1975년 2월 17일 잠시 귀국했을 때 미국에 팽배한 사회적 불안감과 제도의 붕괴, 좌절감에 깜짝 놀랐다. 미국을 향한 내 믿음은 미국 사회를 압도하는 분위기 때문에 갖게 되는 믿음보다 강하다 … 역경을 극복해 내리라는 우리 능력을 자신 있게 믿어야 많은 일을 해낸다. 우리가 이런 혼란과 실패와 좌절을 드러내면 온 세계의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때 어쨌든 의아해 한다.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또는 다른 나라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우리를 볼 때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한다. 그들이 우리가 한 말을 신뢰하고, 우리가 성실하고 개방된 태도로 정직하게 그들을 대하는 자세야말로 양국 관계에 중요하다 …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협상 태도는 전통적으로 이와는 달랐다. 뭔가 미묘하고 아주 난해하다. 우리도 그들을 대하면서 동일한 방법을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인이어야 한다. 우리는 본래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 1975년 4월 30일 네덜란드 국경일 리셉션에 참석했다가 베트남 실력자들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 국무부 전문을 통해 환담 도중에 들었다. 베트콩 대표도 그곳에 있었다. 키가 아주 작은 세 남자가 기쁨을 이기지 못해 리셉션 장소를 뛰쳐나갔다. 베트콩과 북베트남 대사관은 깃발을 게양하고 당연하게도 축하잔치를 벌였다. 폭죽 소리도 들렸다. 슬픈 일이다. 여러 리셉션에 참석해 일부 사람 옆을 지날 때면 나를 향한 적대감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술 마시는 파티 장소에서 항복 소식을 듣다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1975년 5월 29일 중국인들과 가까워지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사실에 계속 놀란다. 어려운 일이다. 그들을 더욱 많이 만나고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친밀한 개인적 교분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약간 친해질 뿐 그것으로 끝이다 … 전화로 누군가를 불러 동남아나 러시아 혹은 다른 나라의 문제를 두고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들이 사무적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으면 내게 전화를 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중요한 문제의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 아주 오랫동안. 1975년 7월 30일 내가 잊지 못할 소리들. 이른 아침 공원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대부분은 우렁차고 훌륭한 테너 목소리다. 행진하는 아이들이 내는 리드미컬한 소리(“이, 얼, 이, 얼”). 베이징 시내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자전거 벨소리. 공원 근처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기차나 공원, 건축공사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선전구호를 토해 내는 확성기 소리. 칠팔월에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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