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너 루스벨트의 두 얼굴
꼿꼿한 자세와 도덕적 신념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는 남몰래 손금 보기도 즐겼다. 특히 1939년 10월에 전해 받은 손금 감정(鑑定)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좋아하던 시와 함께 책상 서랍에 넣어두기도 했다. 그 손금쟁이는 지도력을 나타내는 손가락의 경우 “잠재 능력을 보여주는 왼손 쪽이 실제 일어난 과거를 보여주는 오른손 쪽보다 훨씬 굵다. 따라서 본인의 스타일을 억누른 경우가 여러 차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적었다. 점쟁이의 말보다는 엘리너가 그 종이를 오래 간직했다는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과연 영부인이라는 지위 때문에 억누르거나 발현하지 못한 지도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을까? 모든 업적과 미국 역사에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사라지지 않는 중대한 의문이 있다. 당시 여성에게 부과됐던 제약이 없었다면,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어떤 일을 이뤄냈을까? 최근 발간된 그의 문서집 ‘인권 시절(The Human Rights Years, 1945~48)’ 제1권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서문은 힐러리 클린턴이 썼다. 이 책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죽음에서 시작해 세계인권선언의 통과로 끝난다. 이 인권선언 작성에 엘리너는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그가 남긴 편지, 연설문, 칼럼, 일기 등을 연구하자 널리 알려졌던 이 여인의 모습과는 다른 초상화가 만들어졌다. 실용적이고 명석한 정치인의 모습이다. 그는 오랫동안 고통 받은 성스러운 인물로 기억되지만 지칠 줄 모르는 잘 단련된 사회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살아 생전 고정 이미지를 거부하고 열심히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고 늘 주장했다. 힐러리 클린턴과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둘 다 바람둥이 남편을 뒀고, 머리가 좋았으며,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영부인이었다. 그러나 엘리너가 단순히 힐러리의 전주곡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엘리너의 너무 뻔한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루스벨트 여사는 직설적으로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남편의 정서적, 정치적 복합성을 어느 정도 공유했다. 프랭클린은 다정하기도 하고(그를 만나는 일은 마치 “샴페인 병을 따는 일” 같았다고 처칠은 말했다), 냉정하기도 했다(트루먼은 “그렇게 냉혹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엘리너도 생전에 겹겹의 층이 있었고, 사후에도 겹겹의 층이 있다. 우리는 그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속설들은 엘리너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더 설명해 주는지도 모른다. 문서 편집자 앨리다 블랙에 따르면, 가장 보편적인 속설은 엘리너가 “온순하고 감상적인 자유주의자”라는 생각이다. “모두들 엘리너는 현실 정책을 만든 경험이 없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위대한 자유주의의 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을 만들었다”고 블랙은 말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자신의 널리 알려진 이미지 뒤에 숨어 정책을 만들었다.” 엘리너가 남편을 여의고 혼자 보낸 시절을 기록하려고 만드는 5부작의 첫 번째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엘리너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날카로운 지성을 갖춘 이 천재적 여인을 흉내 내거나 혹은 소유하고 싶어 한 사람들이 엘리너를 자주 인용했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많은 작가가 전기를 썼다. 종종 본인이 살았다면 틀림없이 저항했을 방식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첫째는 그를 잘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전기작가이자 친구인 조셉 래시는 엘리너를 독실하고 이기심 없는 사람으로 그렸다. 뻐드렁니, 결손가정,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한 남편을 극복한 여인이라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성에 무관심한 성공한 성인(聖人)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아빌라의 테레사에 비유했다. 둘째는 여권운동가들이다. 이들은 엘리너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걸로 선언하고 난민, 흑인, 여성을 도우려 벌인 맹렬한 운동을 꼼꼼히 기록했다. 신격화에는 역사적 오류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정치적 공정성을 염려한 일부 현대 운동가는 엘리너의 이미지가 무결점으로 남기를 간절히 원했다. 따라서 워싱턴 DC의 루스벨트 기념관에 세우는 조각상은 그의 전매특허 격인 은빛 여우 모피를 두르지 않은 모습이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근래에 접어들면서 엘리너의 인권운동보다는 개인생활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끈다. 특히 펑퍼짐한 체격에 시가를 피운 여기자 로레나 히콕과의 관계가 관심사다. 히콕은 오랜 세월 백악관에서 살았다. 역사가 블랜치 위젠 쿡은 대통령 일가의 저녁식사 사진들에서 히콕이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백악관 시절 엘리너와 가장 친했던 여자친구를 말해주는 사실이 삭제, 왜곡, 저평가됐다”고 적었다. 히콕과 엘리너 사이에 오간 수천 통의 뜨거운 편지는 살아남았다. “오늘 밤 네 곁에 누워 품에 안고 싶다”고 엘리너가 적었다. 히콕은 엘리너가 없는 동안 “당신 입가의 동북쪽에 있는 부드러운 부분이 내 입술에 닿을 때 짜릿했던 그 느낌이 그립다”고 썼다. 이런 언어를 열정적인 빅토리아 시대풍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의 열정은 분명 육체적 관계를 암시한다. 만일 엘리너가 훗날 레즈비언의 우상으로 환영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된다. 그러나 쿡은 엘리너가 서른두 살의 미남 경호원 얼 밀러와도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밀러가 공개적으로 애정을 과시하는 바람에 엘리너의 친구들이 거북스러워 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맏아들 제임스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편지는 파손됐다) 엘리너는 만 44세에 미국의 공인 중에서는 최초로 연하남을 애인으로 둔 중년부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가 인권과 연민의 정치로 남긴 진정한 업적이 선정성에 가려진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엘리너는 절대 영부인 역할을 맡지 않겠다고 우겼다. “평범한 루스벨트 부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전국의 신문에 공급되는 칼럼을 쓰고, 의회 위원회에 나와 증언했으며, 여성 기자들을 모아 주간 기자회견을 열었다. 빈민에 대한 책임감 따위의 문제가 “화제가 되어 사람들이 그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도록” 일부러 물의를 일으키는 발언을 했다. 남편은 종종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여자라는 사실을 세상이 다 안다고 말했다. 엘리너는 정책 문제에서, 특히 빈민이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서 남편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어느 단계에서 프랭클린은 부인이 넘기는 메모를 하룻밤 세 장 이하로 제한했다. 프랭클린은 세금이나 청년운동 같은 다양한 문제에서 엘리너의 충고를 자주 따랐지만 엘리너는 루스벨트 정부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앨리다 블랙은 “세계가 위대한 양심으로 생각한 엘리너 루스벨트도 거짓말을 했다. 그는 늘 자신은 아무 힘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정책에서도 남편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엘리너는 숨긴 죄로 비난 받고 힐러리는 솔직한 죄로 비난 받았다.” 혹자는 엘리너가 남을 도우려는 마음에서 그랬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누를 힘이 있어야 했다. 그가 민방위국의 공식 역할을 맡자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혼난 뒤로는 대체로 비밀리에 활동했다. 편지나 대화, 또는 백악관 만찬의 자리 배정을 이용해 정책적 목적을 이뤘다. 그는 대농장 여주인을 노래한 스티븐 빈센트 베넷의 시를 좋아했다. “그 여인은 실수가 잦았지만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네/여성의 모든 의무를 알았지/부담이 있지만 권력도 가졌어/겉으로는 잘 보호받는 꽃이었다네.” 이 꽃은 워싱턴에서 가장 막강한 여인이며 무임소장관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미국 여류인사 사전을 편찬한 수전 웨어는 “엘리너는 분명 타고난 정치인이지만 본인은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난 그저 남편을 내조할 뿐’이라고 말했다.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엘리너는 1945년 “낡은 닭장 같은 백악관 엘리베이터”를 마지막으로 타고 내려오면서 혼자 힘으로 어떤 일을 해낼지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끝나고 [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새 출발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해낼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뉴욕 아파트에 도착한 뒤 기자들에게 “이야기는 끝났다”고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혹시 공직에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누누이 받았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 로버트 해니건에게 보낸 서신들과 뉴욕 정치를 다룬 칼럼들에서 계속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2월 루스벨트 여사를 유엔 총회의 미국 대표로 임명했다. 그래서 엘리너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끊임없는 연설과 회의라는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하는 한편 칼럼과 편지를 계속 쓰면서 “내 생애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행복한 선언을 했다. 엘리너는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만드는 유엔 위원회 의장직을 맡아 각국을 단결시키고 협상을 중재하면서 통과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그가 소련 대표 안드레이 비쉰스키와 메모 없이 난민정책 토론을 벌여 승리하자 각국 언론이 1면 뉴스로 보도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소극적 입장에 분노하는 편지들을 쓰고 국무차관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국무부가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1947년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국무부의 충성 서약을 성토했다. 공산주의의 공포 앞에서 보여주는 소련 스타일의 항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엘리너는 국제사회의 존경을 얻었다. 역사가 제프리 워드는 “그는 강대국 대표들이 약소국 대표들과 함께 일하면서 원한을 사지 않는 법을 보여줬다. 타인의 품위를 존중하는 그의 정신적 감각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만인의 할머니가 됐다. [그러나] 매우 강인하고 용감하며 정치감각이 날카롭고 비타협적이었다”고 워드는 말했다. 엘리너는 1934년 여자 대통령이 나오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 과반수 국민이 그의 성실성과 역량에 신뢰를 보내 스스로의 힘으로 당선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로부터 74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막강한 전직 영부인이 그 신뢰를 구하려 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오래전부터 엘리너 루스벨트를 존경한다고 말해 왔고, 그와 상상의 대화를 한다는 사실까지 시인했다. 힐러리는 엘리너의 강인함을 강조한다. 정치에 몸담은 여자는 낯짝이 코뿔소처럼 두꺼워질 필요가 있다는 그의 충고와 아울러 여자는 티백과 같다는 소신을 수시로 인용한다. “뜨거운 물에 담그기 전에는 얼마나 독할지 모른다.” 힐러리의 배짱이 좋다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엘리너에게는 여러 차원이 있었다. 딱딱한 사진으로 보기보다는 더 재미난 사람이었음은 틀림없다. 장난과 무도회 드레스를 좋아했다. 1946년에는 머리와 손톱을 손질 받는 동안 난민 송환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받아쓰게 했다. 요즘 같았으면 특히 전쟁과 공포정치를 자주 언급했을 듯하다. 우리는 흔적을 지우기 어려울 만큼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산다. 그가 “잘 보호받는 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엘리너의 잔꾀에 놀아나는 꼴이 된다.
With JENNIE YABR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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