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명령으로 물가 안 잡힌다
| ▶물가는 유통구조 개선, 경쟁 강화 등 친시장원리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진은 20년 전 가격 행사를 하고 있는 할인점. | |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뛰는 물가도 주저앉을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다. 5공 출범 초기 서슬 퍼렇게 등장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물가안정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내세웠다. 평소 ‘소신’을 내세우곤 했던 힘센 정부 부처 공무원들도 군말 없이 밀어붙였다. 덕분에 물가는 가까스로 잡혔다. 그러나 목표로 했던 물가가 실제로 달성되기까지는 무려 2년여의 세월이 걸렸다. 서슬 퍼런 권력을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땐 운 좋게도 대외여건이 좋았다. 이 과정에서 무려 42.3%에 이르렀던 1980년의 물가상승률은 82년 들어 3%대로 크게 떨어졌다. 이처럼 물가 안정은 쉽지 않은 과제다. 정권에 물가안정책은 비인기 정책에 속한다. 집 주인이나 땅 주인, 기업 등에 결코 박수 받을 수 없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커다란 흠을 가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의외로 이런 비인기 정책을 추진했다. 신병현 당시 부총리의 통화긴축을 받아들이고, 추곡수매가 인상폭을 제한했다. 그 덕분에 물가가 안정됐고 전 전 대통령은 정통성 시비에도 경제 대통령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물가’가 최근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3월 10일 기획재정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생필품 50개를 선정해 집중관리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부터다. 그러자 단기간에 물가를 잡는 게 어렵다는 걸 뻔히 아는 관료들이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52개 관리품목 선정에 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에 “5공식 가격 통제냐” “대통령이 물가관리 품목까지 정해 주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대해 5공 출범 초기인 1980~82년 경제기획원 물가총괄과장이었던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통령이 물가 움직임이나 불안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정책적으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특정 품목이나 가격을 말했다면 그것은 부적절하다”고 선을 그었다.
문제는 이 논란이 쉽게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현장 체크형인 이 대통령이 ‘생필품 50개 물가관리’를 지시한 후 ‘신속하게’ 52개 품목을 선정하자 관 주변 일각에서는 “관료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왜곡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표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경제학과 교수는 “관료들이 대통령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부작용을 방치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사실 요즘에는 물가를 잡을 수단이 별로 없다. 관치시대인 80년대에도 사용하기 힘들었던 가격관리를 지금 내놓을 수도 없고, 내놓는다 해도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대외여건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다. 대외여건이 80년대보다 상대적으로 나쁜 상황에서는 물가를 잡을 방법이 거의 없다. 그래서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나 통계수치를 만지작거리고 들먹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민 생활용 물가만 어느 정도 안정시켜도 큰 성공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서민 물가 안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물가 관리 품목 수만 남은 꼴이 됐다. 박기영 연세대 교수(경제학부)는 “경제관료들이 이미 있는 생활물가지수를 더 구체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50개 품목부터 찾은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52개 품목의 소비자도 서민이지만 공급자도 서민인 경우가 많다”면서 “이 경우 가격 통제가 서민생활을 이롭게 한다고만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관료들이 ‘대통령 지시 이행’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의미다. 누구보다 물가잡기가 힘든 것을 훤히 알고 있는 전문관료들의 ‘어깃장’인지, 과잉 충성인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부작용이 눈에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 ▶대통령의 지시로 물가가 잡힐까? | |
우선 이번에 선정된 52개 품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선정됐는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52개 품목은 쌀, 밀가루, 전기료, 이동전화통화료 등 매월 통계청이 발표하는 생활물가지수 152개에서 고른 것이다. ▶서민층의 구입빈도가 높은 품목 ▶생활비 중에서 지출비중이 높은 품목 ▶서민생활 안정에 필수적인 품목 ▶최근 가격 상승이 컸던 품목이 선정 기준이다. 그렇다면 왜 52개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이유 없다”. 익명을 요구한 실무부처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선정할 때는 이명박 대통령 지시대로 50개를 뽑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각 부서들과 시민단체의 제안을 받아보니 70개 쯤 되더라. 조정 과정에서 덜 급한 것은 빼자는 의견이 나왔다. 바지는 관리 품목에 선정됐지만 티셔츠는 빠진 게 가장 대표적인 예다. ” 이런 과정을 통해 52개가 선정됐다. 당연히 논란이 불거졌다. LG경제연구원 관계자는 “대체 지출비중 조사는 누가, 어떻게 한 것이냐”고 반문하며 “시장경제에 역행하는 신종규제”라고 표현했다. 특히 선정 기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이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식료품 중 고기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들어간 반면 닭고기는 빠졌다. 2006년 기준 우리나라 1인당 쇠고기 소비량은 6.7㎏, 돼지고기는 17.9㎏, 닭고기는 7.3㎏이다. 민간 경제연구원의 연구위원은 “만약 정부가 소득 40% 이하 계층이 닭고기보다 쇠고기를 더 많이 먹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현 정부는 서민들의 삶을 잘 모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소주와 맥주도 엇갈렸다. 소주는 관리 품목에 들었고 맥주는 빠졌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소주 소비량은 69병(360ml 기준)이었고, 맥주 1인당 소비량은 86병(500ml 기준)이었다. 더구나 맥주 생활물가지수 가중치(해당 제품 가격이 오르면 다른 제품 물가 상승에 미치는 영향을 수치화한 자료. 쌀의 가중치는 14인 반면 콜라의 가중치는 0.5다)는 1.5로, 소주보다 0.4포인트 높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소주보다 맥주가 관리품목에 포함됐어야 한다. 기획재정부 물가정책과 관계자는 “맥주가 더 많이 팔리고 가중치도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서민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술이란 점에서 소주가 포함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소주를 포함시켰다면 공식적으로 발표한 선정 기준이 전혀 필요 없다는 의미가 된다.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는 선정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4가지 기준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많다. 통계청에서는 매월 1일 전달의 생활물가지수를 발표한다. 그런데 이를 토대로 최근 6개월(2007년 9월 대비 2008년 2월) 증감률을 따져보면 의문점이 드는 게 한둘이 아니다. 이 기간 중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품목은 감자였다. 99.4%포인트나 올랐다. 2위는 65.4%포인트 오른 풋고추였다. 하지만 이들은 52개 리스트에 없다. 토마토 또한 22.1%포인트 올랐음에도 빠졌다. 관리품목 리스트에 들어간 무와 배추, 마늘은 이 기간에 가격이 오히려 떨어졌다. 품목에서 빠진 감자는 가중치에서도 리스트에 들어간 파, 양파, 콩나물보다 높다. 감자는 1인 반면 파는 0.9, 양파는 0.8, 콩나물은 0.6이다. 또 최근 6개월 동안 0.1%포인트 오른 샴푸는 관리품목에 들었지만 2.8%포인트 오른 치약과 0.9%포인트 오른 비누는 빠졌다. 물가정보 전문기관인 사단법인 한국물가정보 윤석업 조사팀장은 “대체 무슨 기준으로 비누를 빼고 샴푸를 넣었는지 모르겠다”며 “52개 품목 안에 쌀, 밀가루 등을 제외하면 의문을 들게 하는 것이 절반이 넘는다”고 지적했다. 또 스낵과자는 들어갔지만 빙과류는 빠졌다. 자동차보험료는 2007년 9월 대비 5.9%포인트 올랐다. 가중치도 4.5나 된다. 기본 보험료에 다양한 옵션이 붙는다면 부담은 더욱 커진다. ‘1년에 1000만원’인 대학 등록금 역시 꼭 잡아야 할 물가다. 곽태원 서강대 경제학교 교수는 “정부가 나서 52개 품목을 집중 관리한다고 해도 체감 물가는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런 우려에 대해 관리품목에 대한 비용인상 요인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동시에 불공정행위 단속 등 미시적 관리도 함께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또 10일 단위로 가격을 점검하고 매월 상승률도 따로 조사할 예정이다. 김인호 전 경제수석은 이를 두고 “5공 정부도 가격 통제는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공급 부족 현상으로 더 큰 물가불안 요인이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판이 이어지자 정부는 농·수협 유통기능 활성화 같은 방침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의문은 계속되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거시경제실장은 “정부가 독과점 같은 시장경제를 해치는 요소 제거에만 집중해도 물가는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결국 물가는 정부에서 잡는 것이 아니라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경쟁환경을 조성해 시장에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친화를 내세운 정부가 시장을 지배하려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
“가격통제 영원히 통하는 게 아니다”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80년대 초반 하이퍼인플레이션(초고물가) 시절 경제기획원에서 물가총괄과장으로 실무를 챙겼다. 이후 85년부터 5년간 물가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가격정책은 단기적으로 잠깐 쓸 수 있을 뿐 영원히 통하지 않는다”며 “(시장에서의) 경쟁구조 조성이 물가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기업 간 경쟁을 통해 물가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5공화국 초기에도 물가 불안이 극심하지 않았나? “그래서 대통령이 물가 정책에 최우선 순위를 뒀다. 덕분에 30~40%대였던 소비자물가가 10%대로 잡혔다.”
-그땐 어떻게 잡았나? “그때와 지금은 여건이 많이 다르다. 그때는 기본적으로 공급부족의 시대였다. 언제든 물가가 올라갈 압력이 있었다. 경제도 고성장을 추구해 물가 억제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재익 전 수석이 앞장서서 안정기조로 갔다.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다. 그 결과 지속적 성장이 가능했다.”
-가격통제가 주효했나? “가격통제로 물가가 안정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일시적으로, 국지적으로만 가능하다. 대통령 명령으로 물가가 잡히는 게 아니다. 결국 경제구조가 물가 변동을 흡수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시장 자율과 경쟁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가격 정책도 썼지 않았나? “물론 썼지만 일괄적으로 가격을 통제한 것이 아니다. 가격이 오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 그리고 진짜 오를 요인이 있으면 정부가 지원도 하고 자체적으로 일부분 흡수하게 해 상승을 막았다. 그 외에 원가절감이나 유통구조 개선 등으로 내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이 부분을 개선시켰다. 그래야 (기업) 경영이 합리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기업 경영이 불가능해지면 물가 불안이 잡히지 않는다.”
-최근에는 특히 대외변수 때문에 출렁인다. “대외 개방 경제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은 해외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파도를 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는 파도 그대로 다 타면 그게 문제다. 상승 분을 업체에서도 좀 흡수해야 한다. 경쟁구조가 정착되고 확대돼야 가능하다.” -갑자기 우리 경제에 왜 이렇게 물가가 중요해졌나? “지난 몇 년간 중국 등의 요인으로 물가에 대한 중요성을 잠시 잊었다. 세계경제가 성장하고 돈이 풀려도 물가가 안 오르니까 다들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있었다. 통화량도 엄청 늘었다. 그게 지금 나타나는 거다. 경제에는 왕도가 없다. 이번 물가 상승에 잘 대처하면 경제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대통령이 물가 품목을 언급한 것을 어떻게 보나? “대통령은 그런 말 할 수 있다. 물가의 중요성을 다시 되새기고 민생을 안정시키라는 게 뭐가 문제인가. 다만 그게 가격 통제를 지시한 것이라면 문제다. 관료들도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면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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