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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우주산업의 딜레마

미국 우주산업의 딜레마

"미국의 기술에 오염되다.” 이상하지만 많은 뜻이 담긴 표현이다. 지난 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는 미국의 기술을 최고로 간주했다. 누가 미국의 우주산업이 변방으로 밀려날지 모른다고 말했다면 황당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년 들어 미국산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보는 유럽 우주산업 간부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인공위성과 기타 우주선의 제작·발사·운영 면에서 많은 사람이 미국의 노하우가 이제는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주된 원인은 미국의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적성국이나 동맹국 여부를 따지지 않고 우주부품 수출에 거는 성가신 제약이다. 미국 의회는 10년 전 상업용 위성이 국제무기거래규정(ITAR)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미국 기술이 중국제 미사일과 폭탄에 사용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규정에 따르면 민간 우주선의 모든 부품이 무기다(대갈못도 우주 용도로 설계됐다면 예외가 아니다). 이 규정은 유럽과 아시아 기업들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아무리 사소한 기술이라 해도 그것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면 이용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 우주산업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대신 유럽이 약진하게 됐다. ITAR이 발효된 뒤로 10년 동안 인공위성과 그 발사체인 로켓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동통신 산업, 특히 아프리카·아시아·중동의 휴대전화 시장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하필 우주 서비스가 급증하기 시작하고 미국 기술의 대용품이 뿌리를 내리는 시점에서 엄중한 규정을 강요하기 시작한 셈이다.

특히 1230억 달러 규모의 상업용 인공위성 사업에서 그 영향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이 사업은 10년 넘게 연간 10% 이상씩 성장해 왔다. ITAR이 발효되기 전 해인 1998년 미국 기업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73%였다. 2년 뒤 그 비율은 27%로 떨어졌다. 워싱턴 DC 소재 인공위성협회에 따르면 유럽의 시장 점유율은 같은 기간에 약 4분의 1에서 절반 이상으로 늘었다.

이 규정은 성장하는 인공위성 발사 사업에서 미국 업자들의 발목도 붙잡았다. 미국의 발사 사업자들은 2003년 3억400만 달러를 벌었으나 2007년에는 수입이 1억5000만 달러로 떨어졌다.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컨설팅 전문사인 포캐스트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유럽 발사 사업자들의 수입은 같은 기간에 1억7800만 달러에서 8억4000만 달러로 늘었다.

이제는 탑재량이 크고 신뢰할 만한 프랑스의 아리안 5호 로켓이 단연코 세계 챔피언이다. 지난해 여섯 차례 발사됐다. 유럽과 기타 우주강국들의 진취적 기상과 국가적 자존심도 미국 우주산업의 전반적인 쇠퇴와 관련 있다. 그렇더라도 ITAR을 상업용 인공위성에 적용함으로써 “정부가 만들어낸 시장 왜곡”이 최대의 단일 요인이라고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두뇌집단인 렉싱턴 연구소의 우주방위 전문가 로런 톰슨이 말했다.

세계 최대의 상업용 인공위성 운영사인 인텔샛(워싱턴 DC 소재)의 규제업무 담당 부사장 캘팩 구드는 “ITAR의 수출인가 절차가 워낙 예측불허이고 일관성이 없으며 불투명해서 미국의 위성기술 판매만 손해를 본다”고 말했다.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비글로 에로스페이스의 사례를 보자.

2006년 ITAR 관계자들은 이 회사의 지네시스 인공위성 발사 준비대(크기나 생김새나 기술 난도가 커피테이블과 비슷한 수준이다)를 러시아에 수출하려면 무장경비원 두 명이 호송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비글로는 어쩔 수 없이 경비원 고용 비용을 물었다. 수출이 인가됐을 경우에도 아무리 작은 부품이라도 온갖 조건이 붙는다.

만일 프랑스의 거대기업 탈레스 알레니아 스페이스가 만든 인공위성에 어느 미국 기업의 컴퓨터 프로그램 코드 한 줄이 들어간다면 그 위성은 미국 정부의 승인 없이는 프랑스에서 제3국(독일 같은 오랜 동맹국도 소용없다)으로 못 옮긴다. 미국이 승인하지 않으면 그 위성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에 있는 우주선 기지에서 제3국을 위해 발사하지도 못한다.

미국 관리들은 예비 부품 전달도 가로막을 권한이 있다. 미국 대학의 연구원과 외국 전문가들 사이의 대화조차 제한된다. 병적이라 할 정도인 미국 정부의 제약에 발목이 잡혀 답답해진 세계의 우주연구 기관과 기업들은 자체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그 최대 수혜자는 단연코 유럽 기업들이다.

그들은 이제 부품 제조와 조립, 발사와 궤도 관리 등의 온갖 인공위성 기술을 터득했다. 이제 최첨단의 원격감지 인공위성(존재를 공식 인정받은 위성 중에서)은 이탈리아 기업(코스모-스카이메드), 독일 기업(사르-루페), 영-독 합작기업(테라사르-엑스)이 만든다. 이 규정이 군사기술을 확실히 보호한다면 미국의 상업적 이익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많은 전문가가 주장한다. 군대가 의존하는 많은 기술(몇 가지만 들자면 통신용 인공위성, 탄환유도 시스템, 무인항공기 등)이 지금은 세계 여러 곳에서 합법적으로 입수 가능하다. 이제는 수출통제가 미국 기업들의 혁신능력을 갉아먹으면서 사실상 미국의 국가안보에 해만 입혔다는 여론이다.

워싱턴의 두뇌집단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2008년 보고서는 해외주문이 끊기면서 미국 기업들이 정부 발주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현금 흐름이 줄어들면서 미국 기업들의 연구개발 능력도 저하됐다. 까다로운 수출규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할 만한 중소 하청업체들이다.

그들은 행정 장벽의 미로를 헤쳐 나가거나 종종 오랜 시간이 걸리는 ITAR의 승인과정을 기다리면서 공장이 쉬는 사태를 견뎌내는 데 필요한 자금도, 법률지식도 부족하다. ITAR의 제약은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독립성을 키우려는 유럽 지도자들의 입지도 강화했다. 유럽의 우주기관들, 특히 유럽연합의 유럽우주기구(ESA)와 프랑스의 국립우주연구센터는 우주선 제작사들에 기술지원을 하면서 토종기술로 설계토록 권장했다.

예컨대 영국 첼트넘에 있는 인공위성과 발사기구 시스템 제작사 매로타는 ESA로부터 미국산 부품을 쓰지 않아 ‘ITAR과 무관한’ 우주선 컴포넌트를 개발하는 방법을 지도 받았다. 유럽의 방위정책 계통에선 워싱턴의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기술을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의무사항으로 굳어간다”고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의 방위 전문가 시몬 베저만이 말했다.

유럽의 많은 기업은 아무 거리낌없이 ITAR과 무관한 제품을 다른 나라(주로 아시아·중남미·중동의 신흥국가)에 판매한다. 이들은 미국의 승인 없이 그 제품을 사용한다. ITAR과 무관한 인공위성이나 우주 부품을 제공하는 유럽의 대기업 중에는 EADS(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대형 컨소시엄), 프랑스의 탈레스와 이탈리아의 핀메카니카가 합작으로 세운 탈레스알레니아 스페이스가 포함된다.

그 밖에도 그보다 작은 10여 개의 기업이 ITAR과 무관한 부품이나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일부 구매자는 ITAR과 무관한 인공위성을 구입하는 대가로 5~10%의 웃돈을 기꺼이 낸다. 미국·프랑스·러시아제 로켓보다 20% 저렴한 중국제 창정(長征) 로켓으로 발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했다.

ITAR의 존속을 주장하는 미 국무부 직원들은 군사기술을 보호하려면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관리는 수출규제가 미국의 우주기업들에 피해를 준다는 증거를 관계기관의 감독자들이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바마 정부는 ITAR의 범위를 실제로 군사적 이점을 제공하는 핵심기술로 좁혀 적용하라는 요구를 호의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산적한 마당에 이 분야에서 빠른 조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미국 우주기업들은 상황을 최대한 잘 이용해 버티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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