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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고통, 이제부터 시작이다

구조조정 고통, 이제부터 시작이다

2007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이후 말로만 떠돌던 기업 구조조정이 드디어 본격화하고 있다. 채권단과 재무개선 약정을 맺은 9개 대기업 그룹이 본격적인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면서다. 주요 내용은 계열사와 자산매각 등이다. 팔면 살고 못 팔면 죽는다. 기업들 못지않게 개인들도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된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여의도 금융위원회에서 기업 구조조정 추진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멀쩡하면 왜 구조조정 하겠나.”(진동수 금융감독위원장)

구조조정의 계절이 돌아왔다. 말로만 떠돌던 대기업 구조조정이 지난 1일로 최종 윤곽을 드러내면서 이제 대상에 오른 9개 기업과 시장에서 유동성 부족 등의 의심을 받는 기업들은 매각 경쟁에 들어섰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기업들은 ‘무엇을 살까’라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에 팔까’ ‘누구에게 팔까’가 고민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의 기업부실이 ‘과도한 차입에 의한 문어발식 경영’이었다면 이번 위기는 ‘과도한 차입에 의한 인수합병 경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확장 경영의 방식만 신규사업 확대에서 인수합병(M&A)으로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은 셈이다.

갑작스러운 경기변화로 성공의 지름길로 여겨졌던 대형 M&A가 이제는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걸림돌로 변한 것이다. 프론티어 M&A의 성보경 회장은 “M&A는 기업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만 경기예측이나 자금 조달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없으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채권단과 재무개선 약정을 맺은 9개 기업 중 상당수는 불과 지난 2~3년간 확장 경영을 주도했다.



외형 성장 불구 재무구조 급격히 악화

대표적인 곳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금호아시아나는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 재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시장에서는 금호의 자금력에 대한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대우건설 인수 당시 일정 기간 후 주가를 보장해 주는 풋백옵션을 활용한 것이 화근이 됐다.

애경그룹도 사업 영역을 무리하게 확장했다가 탈이 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항공산업 진출과 삼성플라자 분당점 인수, 평택 민자역사 신축 등으로 최근 3~4년간 5000억원 이상을 쏟아 부은 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건설업이 주력인 유진그룹도 2006년 이후 서울증권·하이마트·로젠택배 등을 차례로 인수한 뒤 자산이 8300억원에서 5조원으로 500% 이상 급증했다.

동부그룹은 이들 그룹보다 문제가 더 오래됐다. 2002년 아남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1조2000억원을 투자해 종합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반도체 경기 악화로 동부메탈을 매각해야 할 상황이다. 대한전선도 2002년 이후 무주리조트·쌍방울·명지건설과 세계 1위 전선업체인 프리즈미안 지분 9.9%를 인수했고, 지난해에도 남광토건·온세텔레콤을 사들였다.

그동안 외형은 성장했지만 재무구조가 급격히 나빠졌다. 특히 프리즈미안 지분 투자와 각종 부동산개발 관련 투자로 차입금이 급증하면서 재무 부담이 커졌다. 동양메이저는 2007년 한일합섬을 인수한 데 이어 레미콘공장 신설·인수에 5400억원 이상을 투자했다가 곤경에 빠졌다.

GM대우, 하이닉스, 대주그룹 등은 극심한 경기침체로 매출이 줄고 영업적자가 커지면서 유동성 부족 위기를 겪고 있는 경우다. 이들 외에도 두산, LS그룹도 대형 M&A의 후유증으로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기업 외에도 건설사와 건설사를 인수한 몇몇 기업도 자금 압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기업을 필두로 하반기에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실물경제 침체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기업을 매각하게 되면 부실자산 정리와 이에 따른 인력감축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에도 한국에서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이 거의 없었던 것은 기업매각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우량 계열사라고 할지라도 매각 대상에 오르는 순간 부실자산이나 경쟁력이 없는 부분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인력 감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나면 소비 위축, 금융 부실 등 경제를 위축시키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 또 하반기에 달러당 환율이 1200원대로 안정될 경우 수출부진 등으로 경상수지 흑자폭도 줄어들 수 있다. 그동안의 경제 위기가 장부상 숫자의 위기였다면 앞으로 경제 위기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유병규 상무는 “그동안 잡셰어링 등으로 경제 위기의 완충역할을 했던 대기업들이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면 개인들이 받는 충격파는 더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고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금융감독원의 김용환 수석부원장은 지난 4일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대기업 구조조정은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평가 결과를 반드시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은 철저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면서 “은행들도 옥석을 가려서 한계 기업에 대해선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해 부실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수석부원장의 말대로 대기업 구조조정을 선제적으로 하지 않을 경우 그룹 전체와 은행권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 경제 위기가 촉발된 지난해 말, 올해 초보다 환율이나 금융 환경 등 여러모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지금 정부는 왜 구조조정을 추진할까?

이는 앞으로 경기가 쉽게 살아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신문방송인협회 강연에서 “기업 구조조정 노력은 선택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경제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 경제위기는 현실”

최근 1~2개월 사이에 주가가 많이 오르고 환율이 안정되는 등 경제 환경이 안정되고 있지만 이를 경기회복으로 보기엔 무리라는 전망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올해 경제성장률을 -2.3%로 전망하고 있다. 경기 침체가 지속된다면 기업들의 유동성 문제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우량 계열사 매각을 통해서라도 위기를 조기에 해소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정부의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의문이다. 우선 현시점에서 기업들의 유휴자산이나 계열사를 살 수 있는 주체가 마땅치 않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경기침체 탓에 매수세력이 약하다.

일부 기업이 조기 매각에 반대하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매각 일정을 앞당기다 보면 헐값 매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업들도 매각 일정을 길게는 2~3년 뒤로 못박아 놓음으로써 적극적인 구조조정보다 시간을 벌며 경기 회복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환위기 때와 달리 상대적으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금융정책도 한몫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 모두 고통 없는 위기 탈출을 꿈꾸고 있지만 그런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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