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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동행으로 家業 100년 꽃 피운다

노사 동행으로 家業 100년 꽃 피운다

일제 강점기 말 창업해 67년째 분규 한 번 없이 노사가 어깨동무를 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생활자기 전문업체 행남자기가 그 주인공으로 창업주가 노동조합을 만들도록 권유했고, 자식 이름을 ‘행남’이라고 지을 정도로 직원들은 회사를 사랑한다.

7월도 하순, 한 해의 절반이 휙 지나갔는데 반가운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경기는 여전히 질척거리고 비정규직 문제 등 오랜 숙제는 풀리는 게 없다. 그래도 한국 경제가 굴러가는 것은 노사가 화합해 질 좋은 상품을 만들고 비전을 실현해나가기 때문이다.

전남 목포시 상동 행남식품이 그런 곳의 대표 주자다. 이곳 공장(약 3000㎡)에선 직원 60여 명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맛김( 맛좋은 김)을 만든다. “행남식품은 행남자기가 1942년 창업 이래 죽 지켜온 일자리 지키기와 노사동행(勞使同行)의 상징입니다. 어떤 경우든 노사가 다른 길이 아닌 한 길을 가야 직원도 살고, 회사도 더 뻗어날 수 있지요.”

4세 경영인으로 행남자기 마케팅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유석(38) 전무는 자주 목포공장을 찾아 직원들과 어울리며 노사동행의 정신을 실천한다. 예고 없이 노조 사무실에 들러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저녁에는 소주잔도 기울인다. 김 전무의 설명대로 도자기 회사가 엉뚱하게도 식품 회사를 차린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행남자기는 외환위기 이후 어려워진 경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2001년 본차이나 생산 라인을 여주공장에 확대 설치하고 목포공장의 일부 생산 라인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곳에서 일하던 150여 명의 일자리였다. 회사는 여주로 옮길 의사가 있는 직원은 모두 받기로 했다.

하지만 40여 명만 옮기겠다고 할 뿐 나머지는 생활 근거지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인근 다른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50여 명을 주선해주었다. 60여 명의 일자리를 찾지 못한 김용주(67·김유석 전무의 부친) 회장은 며칠을 고민하다가 가까이 지내는 남승우 풀무원 총괄대표와 상의한 끝에 맛김 공장을 세웠다.

다행스럽게도 풀무원이 납품을 받아주기로 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이 안정화하는 데는 짧아야 6개월, 길게는 1년 정도 걸리는데 행남식품은 이를 한 달 만에 해냈다. 김유석 전무는 “직원들의 오랜 근무 경험과 품질관리(QC) 개념, 애사심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행남자기의 아름다운 노사동행은 창업정신에서 비롯됐다. 행남자기는 42년 5월 고(故) 김창훈 창업회장이 ‘우리 그릇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라는 기치 아래 순수 민족자본으로 창업했다. 그리고 선친과 함께 기업을 일군 고 김준형 명예회장이 협심동력(協心同力)을 사훈으로 정했다. 일찍이 노사 화합을 경영의 제1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창업자가 노조 만들라고 권유

63년 김준형 명예회장 스스로 근로자의 권익에 도움이 된다며 회사 안에 노동조합을 만들도록 직원들의 등을 떠밀었다. 이런 전통의 영향인지 창업자 이래 3대째인 김용주 회장 밑에서 4대 김유석 전무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행남은 올해로 67년째 무분규를 기록하고 있다.

경영권과 함께 노사동행의 정신도 대를 이은 결과다. 일자리를 지켜주는 회사의 성의에 노조가 화답했다. 94년 이연성(현 목포직영점장) 당시 노조위원장이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하는 전국 우수업체 노조위원장 오찬에 초청받았다. 식사 도중 갑자기 이 위원장이 일어나 “앞으로 청와대에서 저희 행남자기를 써주십시오”라고 했다.

그의 돌발행동에 주변에선 아연 긴장했지만 김 대통령은 웃으며 “노동운동도 이젠 저렇게 해야 한다”고 칭찬했다. 이 일을 계기로 청와대와 정부기관에서 1000만 원어치의 행남자기를 사주었다. YS정부는 이 일화를 노사 교육용 사례로 활용하기도 했다. 행남의 노사 신뢰관계는 외환위기 때 더욱 빛을 발했다.

98년 3월 임금협상에서 임금동결과 함께 전 사원이 150~200%의 상여금을 반납하면서 고통을 나눴다. 당시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행남자기에도 300여 명의 잉여인력이 생겼지만 단 한 명의 해고 없이 노사합의로 고용유지 훈련을 실시했다. 회사 분위기가 이처럼 좋으니 가족, 친지는 물론 대를 이어 근무한다.


장기근속 직원이 많고, 정년퇴직 한 뒤에도 본인이 원하면 촉탁으로 일할 수 있다. 아들 이름을 회사 이름 행남(杏南)을 본떠 행남(幸男)으로 지은 직원도 있는데, 그 아들(김행남)이 현재 관리팀장이다. 다른 회사에선 정리해고 1순위에 오를 사내 커플이 목포에만 세 쌍인데, 이들은 결혼할 때 회장의 축하 메시지와 선물을 받았다.

행남자기 여주공장(법인명 모디)은 소뼈 가루를 원료로 쓰는 고급 자기 본차이나 전문 공장으로 기술력과 품질, 공장설비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생산능력은 월 100만 피스(pcs)로 세계 최대인데, 2005년부터 플라스틱 밀폐용기가 생활자기를 대체하며 도자기 판매가 위축된 뒤 월 50만 피스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하는 제품 종류가 1300여 가지에 이른다. 제품 개발과 마케팅을 책임지는 마케팅본부장 김유석 전무의 고민은 위축된 생산과 판매 여건에서 시작된다. 품질을 더욱 높이고 고급 브랜드를 지향하자는 ‘디자인 경영’ 전략을 세웠다.

“글로벌 감각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잡으려면 디자인이 달라야 합니다. 가장 세계적인 것, 가장 전통적인 것, 가장 새로운 것을 찾아 제품에 녹여내야지요.”2001년부터 세계적인 패션·인테리어 디자이너, 사진작가와 공동 작업한 디자이너스컬렉션이 그 첫 결실이다. 2006년에는 세계적 인테리어 디자이너 아릭 레비(Arik Levy)와 사진작가 김중만이 참여했다.

토털 욕실 브랜드 쿤(KOOHN갞aiser Object of HaengNam; 황제의 품격이란 뜻)도 같은 맥락에서 개발됐다. 쿤은 세계 최초 본차이나 세면기로 2년여 작업 끝에 개발했다. 기존 세면기가 도기에 백색 유약을 입히는 데 비해 쿤은 순수하게 흙으로 하얀 빛을 낸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넣기 쉽고 강도가 세다.

세면기도 따지고 보면 ‘좀 더 큰 도자기 그릇’이라서 별도의 시설투자 없이 가능했다. 그래도 본차이나 도자기라서 고급스러우면서도 값은 일본 브랜드 토토(Toto)와 비슷해 가격경쟁력을 갖췄다. “해외 바이어들이 한 번 보면 30분 정도 자리를 뜨지 못하며 감탄할 정도예요. 지금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이라서 그렇지 경기가 회복되면 매출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서 모티브를 얻어 전통자기의 대중화를 꾀한 브랜드 ‘고요(高窯)’도 김 전무의 작품이다. 웰빙 트렌드 속 한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내수는 물론 수출에 한몫할 것으로 기대한다. 쿤과 고요의 수출 시장으론 유럽을 가장 밝게 본다.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판로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릇은 그 자체보다 음식을 돋보이기 위한 존재지요. 전통자기는 우리 음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릇입니다. 그동안 수작업 제품의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이던 고객에게 ‘고요’ 브랜드로 우리 음식과 자기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로 심어주고 싶습니다. 고요와 쿤은 행남이 글로벌 톱3로 도약하는 양대 엔진이 될 것입니다.”

행남은 지난해 업계 최초로 UCC(User Created Ceramic·사용자 제작 세라믹) 개념을 도자기에 접목했다. 도자기 관련 학과 전공 대학생들의 공모전을 통해 프로슈머 브랜드 ‘am, are, is’를 론칭했다. 행남자기는 노벨상 만찬장 식기, 청와대와 예멘 대통령궁에 식기를 공급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는다.

유럽과 미주, 중동, 아시아권 등 세계 30여 개국에 수출한다. 국내 도자기업체 중 수출 1위다. 2013년까지 연 매출 1500억 원에 글로벌 톱3로 도약한다는 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현장을 발로 뛰며 지휘하는 시장 개척자가 바로 김 전무다. 사업 다각화는 행남의 4대 경영인 김유석 전무의 크고 무거운 숙제다.


그동안 경쟁사 한국도자기가 호텔·주방용품 등으로 사업을 적극 확장한 것과 달리 행남은 사업 다각화에 소극적이었다. 2004년 제빵(브랜드 Chant de Mie)사업에 뛰어들었지만 3년 만에 접었다.

“‘100세 행남의 모습’을 늘 염두에 두고 일합니다. 행남을 국민이 자랑하는 100년 가업으로 발전시키겠습니다. 생활도자기 사업을 근간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갈 계획입니다.”

2007년 흑자전환에 성공한 행남자기는 내실 경영을 더욱 다지는 모습이다. 이익률이 낮은 선물용 시장을 줄이는 대신 호텔과 레스토랑, 골프장 등을 상대로 한 영업용 고급 식기 특판사업에 신경 쓴다.

모기업 행남자기는 도자기와 욕실용품을 지키도록 하면서 계열사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의류와 건설, 금융 등 이른바 ‘돈 되는 사업’ 진출을 탐색 중이다.

“33년 뒤인 2041년 행남이 100주년을 맞습니다. 행남이 계속 뻗어나가려면 도자기 사업만으로 곤란하죠. 인구 구조와 환경 변화 등을 고려하며 아이템을 찾고 있습니다. 제 딸이 21세기 중반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무엇을 필요로 할까 상상해보기도 하지요. (파인 세라믹과 반도체 부품, 휴대전화, 공업용 절삭공구, 태양광발전 시스템을 만드는) 일본 교세라가 원래는 도자기 회사였다는 것 아세요? 노리다케도 일반 식기의 매출 비중은 30% 정도로 적습니다.”

김 전무는 행남자기 노희웅 대표를 아버지처럼 깍듯이 모시며 현장 업무를 배운다. 평직원으로 입사해 사장이 된 노 대표는 “도자기는 단순히 상품을 뛰어넘어 예로부터 그 시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무한한 시장 창출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4세 경영승계에 대해 묻자 김 전무는 한 마디로 “엄청난 부담”이라고 대답했다.

3대 김용주 회장과 그의 장남 4대 김유석 전무의 행남자기에 대한 업(業)의 개념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디자인으로 고객을 사로잡자는 기본 인식은 같다. 그런데 김 회장의 업이 ‘좋은 도자기로 (주부의) 식탁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기업’이라면 김 전무의 업은 ‘(여성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창조하는 기업’으로 더 넓다.

“쿤을 개발할 때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번에 세면기 한 번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러자 아버님이 ‘이미 다 해봤다. 네가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며 웃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 드렸지요. ‘화장실과 욕실이 바뀌고 있습니다. 욕실을 패션으로 여기는 시대가 다가옵니다’라고요.”



발품 파는 사람이 이긴다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한 김 전무는 정보기술(IT) 분야에 관심이 많다. 대학을 나와 몇 가지 IT 아이템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교훈은 두 가지다. 법과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이 못할 일은 없다는 점과 상품만 보고 뛰어들지 말고 시장을 먼저 살피라는 것이다.

“물건만 좋으면 금방 성공할 것 같지요. 막상 해보니까 아니더군요. 시장이 물건을 만들지, 물건이 시장을 만드는 게 아니더라고요. 물건을 만들기 전에 먼저 시장을 찾아내야 합니다.”9년 동안 자기 사업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은 뒤 부친의 권유로 2004년 행남에 입사했다.

그 뒤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고교 동창 중 사업하는 친구들 5~6명과 가끔 만난다.“사업을 직접 하기도 어렵지만 2?세로 가업을 물려받아 경영하는 데도 고충이 많아요. 제 또래에 벌써 부도 위기에 죽을 고생을 한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의 고충과 풍파를 헤쳐 나간 경험담이 산 교과서로 다가오더군요.”

김 전무는 회사 일을 할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동시에 ‘도자기는 흙과 불의 예술이고, 거기에 사람 인(人)을 더하면 행남자기가 된다’는 고 김준형 명예회장의 말을 강조했다.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종업원은 내가 주는 월급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나랑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고. ‘사람(人) 중심의 행남 정신’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시스템과 효율성을 따지는데, 시스템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도 결국 사람이거든요. 현장 영업할 때 그 제품을 직접 만든 생산라인의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절로 힘이 납니다.”

행남은 창업회장부터 직원들의 경조사, 특히 상을 당했을 때는 빠지지 않고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종업원이 밥을 먹여주는 것이지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서. 김 전무가 행남 식구가 된 지 올해로 6년째. 그는 얼마 전 상품 기획 서류를 결재하면서 대발견을 했다.

“새 상품이 성공하느냐 여부는 시장조사를 제대로 했느냐, 다시 말해 발바닥에 물집이 얼마나 잡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일의 열쇠는 발품인데, 과연 나는 리더로서 조직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발품을 팔고 있는가’라고 되물었지요.”

이론과 독서를 통한 게 아닌 체험의 대발견 이후 김유석 전무는 2주에 한 번 꼴로 반드시 목포공장을 찾아 직원들과 어울린다.
필자는 본지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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