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IT가 다른 산업 도울 때”vs 업계 “IT 자체도 지금 배고프다”
정부 “IT가 다른 산업 도울 때”vs 업계 “IT 자체도 지금 배고프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보기술(IT)업계는 정부가 IT산업 육성에 무관심하다고 의심했고, 정부는 업계가 과거에 안주한다고 비판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3월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발언이다. 곽 위원장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주최한 한 심포지엄에 기조연설자로 나서 이런 말을 했다.
“정보통신부를 해체하면서 IT가 죽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무한경쟁시대임에도 사업 독점권을 부여 받아 편하게 지냈던 그룹이다. 정부조직 개편 때 방송통신위원회를 만든 것은 첨단 미래를 지향하는 데 의미를 둔 것인데, 과거를 그리워하는 그룹들은 정통부 시절 보조금을 많이 받았던 이들이다.”
정통부 해체로 IT산업 컨트롤 타워가 없어졌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자 작심하고 던진 말이다. 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정통부 없어 IT산업이 죽는다?앞서 이명박 대통령은 “디지털 정보화시대에 묶이면 빈부격차를 줄일 수 없고, 일자리도 늘릴 수 없다”고 말했다. 집권 후 끊임없이 제기됐던 ‘IT 홀대론’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정통부가 없어져서 IT산업이 죽었나?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 정보통신부 기능을 방송통신위원회와 지식경제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로 분산했다.
IT업계의 반발이 컸지만 IT와 타 산업의 융합이라는 정책적 명분이 우세했다. 여기서 현 정부의 정책기조가 잘 드러난다. 관련 학계에서는 MB정부의 정책을 ‘수평적 IT’라고 표현한다. 쉽게 풀면 IT산업 자체의 발전보다는 조선, 자동차, 에너지 등 여타 산업에 IT가 접목되는 횡적인 정책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IT업계 일부에서는 이를 “융합이라는 명분 아래 IT를 굴뚝산업의 하도급 기술로 보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굴뚝IT’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퍼져 있다. 물론 정부 입장은 전혀 다르다. 지난 9월 2일 정부가 개최한 ‘IT 코리아 5대 발전 전략 보고회’가 좋은 예다. 이날 현대중공업과 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조선-IT 융합 사례를 발표하고, 삼성테크윈은 국방과 IT의 융합 사례를 발표했다.
현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모든 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IT의 힘”이라고 말했다. IT를 치켜세우면서도 정부 정책의 맥락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을 잘 살펴보면 업계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정책의 핵심은 10대 IT융합 전략사업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글로벌 수준의 소프트웨어 기업을 키우고, 와이브로와 IPTV 조기 활성화, 주력 IT 3대 품목 세계 1위 달성, 2012년까지 현재보다 10배 빠른 초광대역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무게는 ‘IT 융합’에 실렸다. IT가 타 산업과 연계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IT와 다른 산업의 융합은 거부할 수 없는 세계적 트렌드다. 그런데 왜 업계 관계자들이 민감해 하는 것일까?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를 대표하는 티맥스소프트 관계자의 말이다.
“정통부가 해체된 후, 정부와 협의할 일이 있어도 도대체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민관 연결고리가 끊겼다는 불만이 많다. 그나마 정통부 시절엔 정책이 나오면 대화할 수 있는 정부 창구가 명확해 사업 예측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만 믿고 갈 수가 없다. 구체적인 실천전략 없이 거대한 도화지에 비전만 잔뜩 있는데, 민간이 따라가긴 어렵다.”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옛 정통부 시절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정통부가 없어 IT산업이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만 정통부가 오로지 IT를 위한 조직이었다면 지금은 그런 곳이 없다. 한순간에 정책이 전환되면서 IT업계가 당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투의 얘기는 IT 바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그동안 IT산업이 정통부가 중심이 돼서 성장했다는 점이다. 정통부가 육성책을 만들고, 시장을 조율하고, 규제를 하고, 돈을 풀면 민간이 따라가는 식이었다. “IT업계가 너무 광화문(정통부가 있던 자리)만 바라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쉽다.
장단점은 분명 있었다. 과거 정통부는 IT예산을 총괄하면서 산업을 리드했다. 관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초고속인터넷과 CDMA, 휴대전화 및 디스플레이 시장 육성 정책은 큰 공으로 남는다.
물론 하드웨어 중심의 정책, 제조업 마인드의 산업 육성이 한국 IT산업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곽승준 위원장이 과거 IT정책을 두고 “서비스망은 발달했지만 문화 콘텐트는 걸음마 단계에 머무르게 됐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IT제조업만으론 힘들다문제는 현 정부의 IT정책이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IT정책에 깔려 있는 생각은 ‘IT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업계는 한국 IT의 고질적인 문제를 냉철하게 보게 됐다. 바로 IT제조와 IT서비스의 심각한 불균형이다.
업계가 ‘정통부 해체’를 계속 문제 삼는 것은 ‘IT산업 그 자체도 아직 멀었다’는 인식과 함께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한국경제에 불안한 외환시스템과 대외경제 의존도 개선이라는 숙제를 남겼다면, IT업계는 ‘우리는 반쪽짜리 IT강국이며, 경쟁력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와 관련해 안철수 카이스트 교수는 11월 초 한 방송에 출연해 “IT산업의 내부를 살펴보면 외국 의존도가 매우 높다”며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IT 세계 1위의 강국이라고 했을 때도 실제 내용을 보면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가 대부분 외국산이고, 거기서 운영되는 운영체제를 비롯한 소프트웨어도 전부 외국산”이라고 지적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발생 직후, 한국 IT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3대 수출품목(반도체, LCD, 휴대전화)의 4분기 수출 성장률은 30%나 감소했다. 경기부양책과 환율 효과와 경기 회복 기대감으로 회복은 빨랐다. 결국 올 1분기 이후 한국경제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IT제조업에 대한 수출 편중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불균형 성장’에 대한 반성 분위기가 퍼졌다.
IT산업 경쟁력이 3년 만에 13단계나 하락했다는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발표는 불을 지폈다. 이 와중에 정부가 발표한 IT정책이 여전히 제조업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소프트웨어 및 IT 서비스 시장 정책 강화, 핵심부품 개발 육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IT제조업 중심의 환경으로는 더 이상 IT산업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함께한다.
정부-업계, 신뢰의 융합 필요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IT제조업과 IT서비스 간 생산 규모 차이는 2001년 58조원에서 지난해 123조원으로 벌어졌다. 세계시장 위상은 훨씬 형편없다. 휴대전화가 세계시장 점유율 23%, IT서비스는 단 1.1%였다(2007년 기준). IT서비스는 IT제조업에서 생산된 제품을 많이 팔리게 만드는 유인이자, 새로운 IT기기에 대한 니즈를 제공한다.
IT 선진국은 대부분 IT서비스가 제조분야보다 발달돼 있다. 속사정은 더 기막히다. 지난해 국내 IT서비스 분야 매출 규모는 220억 달러인데, 수출 규모는 3억 달러에 불과했다. 2006년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의 IT서비스 수출 규모는 OECD 28개국 중 22위, 수입 규모는 17위였다.
전문가들은 IT서비스의 해외 경쟁력이 이렇게 취약한 것을 두고 대기업에서 문제를 찾기도 한다. 따져 보면 일리가 있다. 국내 대그룹은 거의 모두 계열사로 IT서비스 기업을 두고 있다. 삼성SDS와 LG CNS, SK C&C가 ‘빅3’로 불린다. 이들 회사의 올 상반기 매출은 삼성SDS가 1조1300억원, LG CNS와 SK C&C가 각각 7500억원, 5200억원 정도다.
그렇다면 해외 매출은 얼마나 될까? 합이 700억원을 갓 넘는다. 그나마 작년 같은 기간보다 2배 정도 늘어난 것이다. 이들 회사는 그룹사에 IT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 치열하게 경쟁할 이유가 별로 없다. 여기에 전체 2000개에 달하는 IT서비스 기업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형 업체는 자체적으로 해외로 나갈 경쟁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사업을 유지하거나 대기업 참여가 제한된 공공 IT서비스 분야에서 연명하는 곳이 대다수다. 결국 불균형하게 성장한 국내 IT산업을 놓고 ‘IT가 다른 산업에 도움을 줄 때’라는 정부 입장과 ‘IT 자체가 더 성장해야 한다’는 업계의 시각차를 융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정부는 업계와 계속 소통을 이어나가야 한다. 고무적인 것은 정부 관계자들이 9월 성장전략 발표 이후 IT업계와의 스킨십을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업계 분위기를 이해해야 한다. 지난 몇 년간 소프트웨어나 온라인 게임, 디지털 콘텐트, 무선인터넷 분야에서 대형 히트작품은 드물었다.
기대를 모았던 와이브로 서비스 역시 업계의 의욕 부진과 정부의 압박이 충돌하면서 시장성에 강한 의혹을 받고 있다. 시장을 이끌고 폭발시킬 화두가 사라지면서 업계 전체가 조용한 시절을 보냈다. 사기는 충분히 떨어져 있다. 많은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한국의 IT산업은 길을 잃고, 활력을 잃었다.
대통령이나 방통위원장이 “기가 죽은 것 같다”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가자”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없는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방석호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의 말대로 “원인이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아무리 한국 IT산업이 길을 잃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경제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IT뿐이다. 정부와 IT업계가 ‘신뢰의 융합’에 나설 때, 막혔던 길이 뚫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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