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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ERY REPORT] 레이싱·패션·호텔… 이젠 시칠리아 와인 대부

[WINERY REPORT] 레이싱·패션·호텔… 이젠 시칠리아 와인 대부


3월 9일 시칠리아에선 올해 새로 출시될 와인을 전문가들에게 미리 선보이는 ‘시칠리아 앙프리뫼’(Sicilia en primeur)가 열렸다. 행사 기간에 유쾌한 와인 오너 파울로 마르조토(사진)를 만났다. 팔순의 나이에도 와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이탈리아인만큼 패션에 민감한 민족이 없다. 정육점 직원도 스카프를 두르고 고기를 자른다. 그래서 이탈리아인은 외모만 봐선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3월 8일 저녁 팔레르모 공항에서 만난 파울로 마르조토가 그랬다. 중절모에 캐시미어 정장을 입고 나타난 그는 쾌활하고 유머가 넘쳤다. 영락없는 와이너리 주인이었다.

평소 이탈리아 북부 비센차에 사는 그는 ‘시칠리아 와인 앙프리뫼’에 참석하기 위해 팔레르모를 찾았다고 했다. 기자는 이날 시칠리아 와인협회 주선으로 팔레르모 근교에 위치한 그의 양조장 ‘바글리오 디 피아네토’(Baglio di Pianetto)에서 묵기로 예정됐다.

양조장 직원이 일찌감치 공항에 나와 있었다. 파울로는 트렁크에 짐을 싣자마자 익숙하게 직원으로부터 자동차 열쇠를 건네 받았다. 이때부터 ‘흥미진진한’ 레이싱이 시작됐다. 독일 대문호 괴테가 극찬했다는 팔레르모 항구를 지나쳤지만 창밖으로 눈 돌릴 틈은 없었다. 그가 마라톤 경주처럼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을 헤쳐 나갔기 때문이다.

핸들과 브레이크를 리드미컬하게 조작하는 모습이 80대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빨랐다. 자동차는 도심을 지나 2차로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지만 거침이 없었다. 마침내 해발 600m 산중턱에 있는 양조장에 도착하자 함께 탔던 이탈리아 기자가 한마디 내뱉었다. “휴, 대단한 스피드죠?”

1시간쯤 지나자 공항에서 다른 차로 출발했던 나머지 일행이 도착했다. 파울로는 “베네치아에서 자동차로 왔다면 다른 차와 반나절 차이가 났을 것”이라며 웃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파울로는 1950년대를 풍미했던 카레이서였다. 52년 페라리를 몰며 ‘지로 디 시칠리아’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55년엔 세계 3대 레이스 중 하나인 르망 24에 참가해 완주했다. 그는 “당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나이 믿기지 않는 운전 솜씨그의 게스트하우스는 구릉진 포도밭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파울로는 19세기 말 시칠리아 귀족 라미오네 가문이 살았던 대저택을 최고급 럭셔리 리조트로 바꿔놓았다. 내부 인테리어도 중세 저택을 연상케 할 정도로 화려하고 고전적이었다.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가자 파울로가 스파클링 와인을 건넸다. 이탈리아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으로 꼽히는 카델 보스코였다. 영국 와인전문지 ‘디캔터’가 ‘죽기 전에 마셔볼 100가지 와인’에 포함시킨 유일한 스파클링 와인이다. 프랑스 고급 샴페인 못지않게 균형 잡힌 풍미가 인상적이었다. 낯익은 와인에 관심을 보이자 파울로가 입을 열었다.

“카델 보스코는 한때 오너가 여러 사업을 벌이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졌지.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기에 투자를 하고 나중엔 사장도 했어. 납작한 병 모양도 내 아이디어야. 지금은 은퇴했지만 아직 시칠리아 유통 판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 마음껏 마시게나.”

양조장 바글리오 디 피아네토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두 번째 딴 병이 바닥을 보일 무렵 정찬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이날 안주인 역할을 도맡은 파울로의 손녀 지네르바 마르조토가 한마디 던졌다. “패션산업에 관심이 있으면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세요. 발렌티노에 투자하셨으니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발렌티노 그룹은 발렌티노(Valentino)를 비롯해 휴고보스(Hugo Boss), 엠 미소니(M Missoni) 등 브랜드를 거느린 이탈리아 대표 패션그룹이다. 대주주였던 파울로는 2007년 자신의 지분을 사모펀드에 매각했다. 파울로는 “발렌티노에 아직도 지분은 남아 있다”며 “현재 비센차엔 발렌티노와 휴고보스 원단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고 말했다.

대화가 무르익자 그는 자신의 와인 중 카르두니(Carduni)를 주문했다. 프랑스 포도품종인 프티 베르도 100%로 만들어진 레드 와인이었다. 프티 베르도는 입안을 꽉 채우는 느낌의 강한 스타일. 보통 보르도 와인을 배합할 때 5~10% 정도만 들어간다. 시칠리아는 물론 프랑스 현지에서도 프티 베르도 100%로 만든 와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프티 베르도는 세월이 갈수록 숙성된 맛을 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여긴 포도밭 해발이 높고 일교차가 커 잘 맞을 것 같아 심었는데 성공한 것 같아. 그래도 아직 10~15년은 더 기다려야 제 맛이 날 거야.”

파울로 마르조토의 이름 앞엔 ‘Count’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말 그대로 백작이다. 마르조토 가문은 이탈리아 최대 직물회사 중 하나인 마르조토 그룹의 소유주다. 파울로는 마르조토 가문의 상속인 중 한 명으로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사업을 경험했다. 가족 사업인 직물 가공은 물론 호텔 사업에도 뛰어들어 남다른 수완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활약한 분야는 다름 아닌 와인이었다.

파울로가 와인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버지가 베네토 지방에 조성한 와이너리 산타 마르게리타를 맡으면서였다. 산타 마르게리타는 60~70년대 이탈리아 전통 품종인 피노 그리지오를 선보여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정말 대박을 터트린 건 70년대 말 미국 수출에 나서면서였다. 상큼하면서도 가벼운 스타일의 피노 그리지오는 순식간에 미국인 입맛을 사로잡았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90년대엔 한 해 500만 병 이상의 피노 그리지오가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내 와인은 아직 숙성되지 않았다미국 주류전문지 ‘와인&스피리츠’에 따르면 산타 마르게리타의 피노 그리지오는 1995년 이후 지금까지 15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입 와인’의 자리를 지켰다. 마르조토는 산타 마르게리타의 미국 시장 성공을 통해 발렌티노와 휴고보스까지 인수할 수 있었다.

파울로는 산타 마르게리타의 회장을 맡고 있던 1997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팔레르모 근교에 88헥타르 규모의 포도밭을 개인적으로 사들인 것. 당시 그는 시칠리아 와인 업계 최초로 프랑스 품종인 비오니에와 프티 베르도를 포도밭에 심었다. 2002년 그룹 회장에서 은퇴한 후엔 시칠리아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 시칠리아 남부 시라쿠사에 70헥타르의 포도밭을 사들여 시라와 함께 토종 품종인 네로 다볼라를 심었다. 그가 포도밭을 사고, 양조장을 신축하고, 저택을 개조하는 데 든 비용만 5000만 달러에 달한다.

당시만 해도 시칠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 와인 생산자들은 이탈리아 본토에 있는 토스카나나 피에몬테로 몰려들고 있었다. 파울로가 자신의 고향에서 500마일이나 떨어진 시칠리아에 투자한 배경은 뭘까. “난 시칠리아 와인에서 가능성을 봤어. 비싸지 않으면서도 복잡한 풍미를 내는 와인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파울로와의 식사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 9시에 시작되는 와이너리 투어에 파울로는 다시 활기 넘치는 얼굴로 나타났다.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직접 차를 몰고 포도밭을 오르내리며 와이너리에 대해 일일이 설명했다.

그의 와이너리는 강도 높은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일본식 빌딩 공법을 적용했고, 자가 발전소를 갖춘 것은 물론 대부분의 전력은 태양열로 공급받는다. 그는 “내가 은퇴할 때 가족에게 이 와이너리를 물려주고 싶은 만큼 장기적인 계획으로 양조장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시칠리아 와인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며 “나의 프티 베르도 와인이 잘 숙성될 때까지 할 일이 많이 남은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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