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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erenade] ‘두루뭉술한’ 한국인들

[Seoul Serenade] ‘두루뭉술한’ 한국인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이미 제출된 뒤에 실수를 발견해서 어쩔 수 없다는 얘기지?”

“아니요. 그 전에 알았어요.”

“그럼 자네 세 명 모두 부사장의 보고서에서 중대한 실수를 발견했는데 그냥 놔뒀다고?”

“제 윗분에겐 말했어요.” 한 젊은 친구가 대답했다.

“그래서 자넨 자네 윗사람에게 말했고, 또 그는 그의 윗사람에게….”

그 메시지가 직책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희석되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신참 직원 세 명이 실수를 발견했지만 부사장에게 직접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그냥 넘겼다는 얘기였다. 그 보고서의 실수 때문에 감사를 받느라 10만 달러의 돈을 썼고 엄청 골치를 앓았다.

그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국 직원들과 일하면서 그보단 덜 하지만 비슷한 사례를 수없이 겪는다. ‘고맥락 문화(high-context culture)’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T 홀이 제시한 ‘고맥락/저맥락 문화’ 이론은 다음 비유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두 사람의 대화를 방 밖에서 엿듣는다고 치자. 그 대화자들은 서로 낯선 사람이다. 그 다음 다른 방 앞에서 옛 친구 사이의 대화를 듣는다. 어느 쪽이 이해하기 쉬울까?

낯선 사람들의 대화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서로의 유대감이 없어서 직설적으로 명확하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친구 간에는 자신들만의 암호가 있다. 간단한 신호로 돌이켜지는 공동의 경험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게는 청각장애자 아일랜드 친구가 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떤다. 오래전부터 함께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낯선 한국인 청각장애자와는 가질 수 없는 공감대다. 언어는 수천 년을 거치며 진화했다. 실제 말 자체는 케이크에 얹은 장식용 당의(糖衣)일 뿐이다. 의사전달 전체의 약 15%만 차지한다. 반면 맥락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이 몸짓, 억양 등이다.

고맥락, 저맥락은 어디든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다’)과 T S 엘리엇의 시(‘처음이 나의 끝이고, 끝이 나의 시작이다’)를 비교해 보라. 특히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더 고맥락적인 사회다. 한반도 거주자들은 수천 년간 지리적으로 고립되면서 마치 한 가족처럼 간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듯하다. 실제 말과 행동보다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수년 동안 워싱턴 DC에서 일할 때 접한 문화는 그와 전혀 달랐다. 아일랜드인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살았던 나로선 미국이 문화충격 자체였다. 동료들은 퇴근 후 함께 노래방이나 술집에 가지 않았다. 일만 잘하면 집안이 어떤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서로 낯선 이민자의 나라다. 공통의 역사나 사회계급이 없다. 따라서 저맥락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해야만 한다. 확실한 사실에 바탕을 둬야 하고, 직선적이며 결과지향적이라야 한다.

한국에서 그날 저녁 세미나가 끝나자 분위기가 떴다. 우리는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한국식’ 이탈리아 음식을 먹었다. 최고참 직원이 메뉴를 들고 일어나 독단적으로 여러 가지 요리를 시켰다. 모두 한꺼번에 나왔고 누구나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날 저녁의 대미는 당연히 노래방이 장식했다.

우연히 이야기가 결혼으로 흘러갔다. 한 여직원은 자신이 바라는 신랑감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우선 집안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집안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내가 물었다.

“우리 집안처럼요.”

한 젊은 직원은 몇 주 전 이상적인 여자를 만났다며 부모가 허락하면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서양에선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누구나 곧바로 반박하고 논쟁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공감이 기정사실이고 회식의 목적은 집단의 가치를 강화하는 방식이라고 느꼈다. 이탈리아 요리는 마치 영어처럼 한국식으로 동화됐다. 고유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 새 문화를 채택하는 방식이다. 사회적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글로벌 비즈니스에선 다르다. 위의 사례가 보여주듯 결정적이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를 고맥락적으로 전달하려다가는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

[필자 마틴 켈리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살았다. 지난 추석에는 경기도 분당에서 부산까지 6일간 자전거로 여행했다. 현재 R Global Net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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