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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친구, 몰스킨 수첩

작가들의 친구, 몰스킨 수첩

시간에 묻혀 사라질 뻔한 시대의 상징이 부활해 세계인의 사랑을 받다



JAMES HARKIN1995년의 어느 저녁, 이탈리아인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여행 작가 브루스 채트윈의 호주 여행을 다룬 소설 ‘송라인(The Songlines)’을 읽고 있었다. 채트윈은 하드커버로 제본되고 두꺼운 피륙에 에나멜을 입혀 방수 처리한 수첩, 몰스킨이 사라지는 추세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올 때마다 자신의 단골 문구점에서 새 몰스킨 수첩을 구입하곤 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종이 다발이 끝에 고무 밴드로 고정돼 있다”고 채트윈은 썼다. “나는 수첩의 맨 앞쪽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수첩을 발견한 사람에게 후사하겠다는 메모를 적는다. 여권은 분실해도 상관없지만, 몰스킨 수첩을 분실한다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몰스킨 수첩은 점점 시장에서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채트윈은 판매점에 100개를 주문했다. “그 정도면 평생 쓸 수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문구점 주인은 채트윈에게 수첩을 만들던 사람이 죽었고, 상속인은 사업권을 모두 매각했다고 대답했다. “서점 주인은 안경을 벗더니 ‘진짜 몰스킨 수첩은 이제 더는 나오지 않아요(Le vrai moleskine n’est plus)’라며 비탄에 잠긴 듯 말했다.”

몰스킨 수첩에 열광했던 사람은 채트윈뿐이 아니었다. 세브레곤디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을 이끌던 다수의 예술가와 작가가 몰스킨 수첩에 데생을 하거나 글을 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브르통은 모두 몰스킨을 애용했다. “문화를 만들어내고 상상력이 충만한 이야기, 위대한 역사적 전통과 긴밀히 닿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를 다시 살려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세브레곤디는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밀라노 문구업체 모도&모도에 이야기했다. 이 회사의 창업주는 세브레곤디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모도&모도는 몰스킨 수첩의 상표권을 취득하고 자신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에 맞춰 종이를 한데 묶어 책과 같은 수첩으로 만들어줄 중국 생산업체를 찾아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첫 몰스킨 수첩이 1997년 밀라노에 도착해 그곳에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마무리됐다. 모도&모도는 5000부를 이탈리아 유통업체에 판매했다. 그 다음해에는 매출이 3만 부로 급증했다. 1999년 모드&모도는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수첩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현재 몰스킨 수첩은 61개국에서

판매된다. 2006년 모도&모도를 6000만 유로에 인수한 투자 펀드는 다이어리, 안내서, 고급스러운 한정판 몰스킨을 함께 판매하며 사업을 다각화했다.

몰스킨의 놀라운 성공은 현대판 유목민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세브레곤디는 생각한다. 문화를 숭배하는 이들은 론리 플래닛 여행 안내서와 어울릴 만한 멋진 수첩, 하나의 문화를 담은 장식품을 원한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몰스킨 수첩의 장점을 인터넷에 널리 알렸다. “다양한 무리의 사람이 신이 나서” 몰스킨 수첩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세브레곤디는 말했다. “이들 중 다수는 컴퓨터, IT에 능숙한 젊은이였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손으로 무언가를 적는 행위, 직접 경험의 즐거움을 재발견한 듯했다.”

사진작가 아르망 프라스코가 개설한 Moleskinerie.com은 몰스킨 팬사이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다. 그는 2004년 구글 검색을 통해 몰스킨 수첩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메인 이름을 등록했다. 웹사이트가 개설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세계 각지에서 5000명이 Moleskinerie.com을 방문했다. 그 후 중국에는 Moleskiner.cn, 일본에는 Moleskiner.jp가 개설되는 등 몰스킨이 판매되는 시장에서 현지 주소의 팬 사이트가 속속 생겨났다. 몰스킨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수십 개의 블로그가 만들어졌고, 페이스북에만 50개의 팬 그룹이 결성됐다. 몰스킨은 전통적 마케팅에 돈을 거의 쓰지 않고도 매년 전 세계에서 1000만 부의 수첩을 판매한다. 현대의 여행 작가가 10만 회의 인생 동안 충분히 쓸 수 있는 양이다. 부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채트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필자는 ‘틈새 시장 (Niche: Why the market No Longer Favours the Mainstream)’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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