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인재’로 거듭나려는 직장인 백태] 밤잠도 없고 주말도 없다
[‘고급인재’로 거듭나려는 직장인 백태] 밤잠도 없고 주말도 없다
IT(정보기술) 서비스 컨설팅 업체의 데이터베이스팀에서 일하는 유현재(28)씨는 2009년 입사 후 지금까지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IT업계의 특성상 업무 관련 내용을 익히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는 “잠들기 직전에나 한가할까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유씨 같은 엔지니어들에겐 업무 관련 포트폴리오 자체가 가장 중요한 스펙이기 때문에 관련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만 해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 그는 입사 후 지금까지 인터넷 데이터베이스 관리 관련 자격증을 3개나 땄다. 일과 자격증 공부를 동시에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주말 내내 학원을 다녔다. 최근에는 집 근처 공립도서관을 단골로 다닌다. 같은 프로젝트를 맡은 직장 동료들과 스터디 그룹도 만들었다. 5명 정도가 회사 회의실을 이용해 틈틈이 공부한다. 자격증 시험에 드는 돈도 만만치 않다. 응시료만 10만~30만원에 학원비는 50만원 가까이 된다. 사회 초년병으로선 금전적인 부담이 크다.
유씨는 “원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필요한 자격증을 꼭 따야 하다”며 “전망이 좋은 자격증도 미리 확보해 둬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까지 두 개의 자격증을 더 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잠들기 직전에나 한가해유씨는 이렇게 사는 통에 변변한 연애도 하지 못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2년이 됐다”며 “당시 바쁘다는 이유로 헤어졌고 새로 여자친구를 사귈 생각조차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지금은 나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한다. 일과 시간을 빼고 나머지를 통째로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그지만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다. 지난해 6개월 정도 하다 그만둔 영어공부도 시작해야 한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도 염두에 두고 있다. 유씨는 “승진 등을 생각하면 학력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돈과 시간이 만만치 않다”며 말끝을 흐렸다.
세계적 항만운영사인 DP월드가 대주주인 부산신항만주식회사에 다니는 박다혜(28)씨의 사정도 유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본사에서 떨어지는 ‘job vacancy’만 기다린다. 어떤 해외 회사에 빈자리가 났다는 의미다. 이 회사는 세계 전역에 독립된 회사를 가지고 있고, 전체 계열사 사원을 대상으로 지원을 받아 이직 형식으로 근무처를 옮겨준다.
박씨는 현재 다니는 근무처에 큰 불만이 없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해외 근무를 하는 게 꿈이라 부지런히 능력을 키우고 있다. 모집공고는 수시로 뜨기 때문에 박씨는 평소 실력을 쌓으며 준비해야 한다. 해외 근무자는 사내 경쟁을 통해 선발된다. 해외 회사는 같은 계열사이긴 하지만 완전히 독립돼 있다. 이 때문에 박씨는 취업 상태에서 또 한 번의 취업경쟁을 치러야 한다.
주말 투자해 이직 준비해외근무자를 선발하는 기준 가운데 가장 유력한 건 현재 회사 상사의 추천이다. 5년차 대리인 박씨는 회사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여서 추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두 번 실수를 저지르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현재 회사에서 다양한 업무를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다. 박씨는 “필요한 인력이 어떤 업무에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한국 회사에서 회계, 관리, 비서 등 여러 부문을 경험해 두는 것이 워크 익스퍼리언스(Work Experience)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이라며 “정기 인사가 나기 전에 가능하면 해보지 않았던 업무로 보내달라고 조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외국 기업이 대주주인 회사인 만큼 대부분의 후보자가 영어실력은 웬만큼 갖추고 있다. 박씨는 2년 전부터 대학 전공인 러시아어를 다시 배우고 있다. 3시간여 걸리는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음성파일로 만든 러시아 소설책을 꾸준히 듣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러시아인과 1대1 과외를 한다. 한 달 수업료는 15만원이다. 박씨는 “언어는 아무리 공부해도 부족하고, 선호하는 지역의 해외 회사인 경우 숨어있던 실력자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업무 능력 외에 다양한 스포츠 능력도 평가 대상이 된다. 박씨는 “한국이나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자격증이 많아 특별한 자격증을 따는 건 별 의미가 없더라”며 “그보다 스포츠 능력이나 취미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꾸준히 보드, 승마, 수영, 골프, 테니스를 즐기며 실력을 쌓고 있다. 최근에는 매달 10만원의 회비를 내며 서핑을 추가로 배우고, 체력보강 훈련을 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박씨는 “주말을 운동으로 모두 써버리면 피곤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철수(27·가명)씨는 2년 전 한 외국계 기업의 법인영업팀에 입사했다. 진로 문제로 워낙 고민하던 터라 취업이 결정되는 순간 누구보다 기뻤다. 하지만 환상이 깨지는 데 채 6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며 미래도 없이 하루를 살아내기 바빴다”며 “이대로는 몇 년 안에 사회에서 도태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새벽 6시 일본어 학원을 등록해 다니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영어학원을 다녔다. “뭐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불안해 못 견딜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2년, 한씨는 최근 금융권 이직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두 달 전 증권투자상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내년 초까지 파생상품투자상담사와 펀드투자상담사 자격증까지 획득할 계획이다.
대학 시절 힘들게 900점을 넘겼던 토익 성적도 만료 기간이 지나 다시 공부하고 있다. 물론 회사에는 비밀이다. 몰래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저녁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데 영업직 특성상 술 약속이 많아 불가능하다”며 “이직을 위해 저녁에 학원에 다녀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결국 그는 주말을 이용한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주말마다 10시간 이상을 머문다. 한씨는 “의외로 주말 도서관에는 사람이 많다”며 “주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자격증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장인도 꽤 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주말에 도서관에 가도 집중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한씨도 의외의 공부 열기에 덩달아 땀방울을 쏟고 있다. “어쩌다 하루 도서관에 가지 않고 쉬면 남들은 다 뛰어가는데 나만 뒤로 달리는 느낌”이라며 “어쩌면 대학교 4학년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보다 더 절박한 것 같다”고 한씨는 말한다.
박성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sampark2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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