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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신용카드 시장 옥죄는 이유 - 가계 빚 키우는 ‘기형적 시장’ 손 보겠다

정부가 신용카드 시장 옥죄는 이유 - 가계 빚 키우는 ‘기형적 시장’ 손 보겠다

10월 21일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직불형카드 활성화 방안을 포함해 신용카드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체크카드 소득공제를 확대한다고 신용카드 사용이 줄까요? 우리나라 신용카드 시장은 이미 너무 커버렸는데….” 10월 21일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직불형카드(체크·직불카드) 활성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직후 만난 금융감독원 관계자의 말이다. 신용카드 시장의 구조를 바꾸겠다는 금융당국 수장의 방침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금융당국은 직불형카드 소득공제 비율을 현행 25%에서 30%로 높이고, 1년 이상 쓰지 않는 휴면카드를 줄이기 위해 해지 과정을 간소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신용카드 구조개선 종합대책’을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금감원은 6월에 카드회사의 대출, 신규 카드 발급, 마케팅 비용 등 3개 핵심지표의 연도별·월별 목표치를 받아 일주일 단위로 점검하고 감시하는 특별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가 키운 시장 정부가 손댄다

금융당국이 신용카드 시장에 칼을 빼든 건 카드사의 외형 확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카드사용이 급증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가뜩이나 신용카드 사용 편중이 심한데,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민간 최종소비지출액 615조4000억원 가운데 57%인 350조7000억원이 신용카드 사용분이었다. 가계에서 소비한 10만원 중 5만7000원을 카드로 결제했다는 의미다. 현금서비스 이용액은 빼고 그렇다는 얘기다. 올해 상반기 신용카드 이용액은 261조700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0% 가까이 늘었다. 민간 최종소비지출이 322조원의 81% 수준이다. 현금서비스와 기업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업구매카드 이용 실적을 제외하면 신용카드 결제 비중은 60.1%(193조원)이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신용카드 시장 분석지인 미국 닐슨 리포트에 따르면 민간 소비지출 대비 신용카드 사용 비율(2009년 기준)은 호주 34.4%, 미국 19.4%, 일본 19.2%, 영국 15.9% 등이다.

카드 결제비중이 커지면서 카드 발급도 급증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 발급된 신용카드 수는 모두 1억2230만장으로 지난해 말(1억1659만장)보다 570만장 증가했다. 카드 발급률이 느는 것은 외국에 비해 카드를 손쉽게 발급 받을 수 있는게 1차적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소비자가 카드를 발급 받으려면 신용평가사에서 신용 조회만 거치면 된다. 또한 지난해 새로 발급된 신용카드 1200만장 가운데 저신용자가 발급받은 카드는 104만장(8.7%)이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신용’을 있어야 한다. 미국인들은 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한 후 일정액을 예금하고 그 한도에서 쓸 수 있는 체크카드를 먼저 발급 받는다. 금융회사는 신용평가사에서 수집한 고객 신용성적과 함께 자체 운영하는 개인신용평가시스템을 통과해야만 신용카드를 발급해 준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선진국의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용이 없는 사람에게는 카드 발급이 이뤄지지 않는다”며 “한국은 카드사의 고객유치 경쟁이 심해 일단 해주고 보자는 식”이라고 말했다.

1999년까지만 해도 민간 소비지출 가운데 신용카드 결제 비중은 15%를 밑돌았다. 그러나 1년 만에 23.6%로 크게 늘었다. 정부가 세원을 투명하게 확보하고 신용사회를 정착시킨다는 목표로 신용카드 활성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속내는 인위적으로 소비를 늘리는 경기부양 차원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신용카드로 대출을 받는 카드론을 허용하고 소득공제 혜택 등을 도입했다. 이듬해에는 카드 사용자와 카드 가맹점에 최고 1억원의 복금을 지급하는 카드영수증 복권제를 도입했다. 국세청은 자영업자에 대해 신용카드 매출금액의 2%를 부가세에서 깎아주기도 했다. 2001년에는 1만원 이하의 카드 소액결제를 거부할 수 없도록 법제화했다.
서울 한 거리에서 과일 노점상이 신용카드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카드사들의 과열경쟁과 ‘신용 없는 신용카드’가 발급이 남발됐다. 금융당국은 감독의무를 포기했다. 화려한 성장의 밑바닥은 처음부터 썩어가기 시작했다. 신규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모집인 수당과 경품 비용 등으로 2002년 한 해 동안 카드사가 쓴 돈은 4777억원이다. 여기에 ‘카드로 결제하면 10% 할인’ ‘6개월 무이자 할부’ ‘주유시 리터당 40원 할인’ 등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부가서비스가 대거 출현했다.

2002년 기준으로 신용카드 발급 수는 1억 장을 돌파했다. 2002년 말 현금서비스와 카드론을 합한 신용대출액은 400조원에 달했다. 연 금리 20%를 웃도는 카드대출이 증가하자 ‘돌려막기’가 성행했다. 그리고 부실은 터졌다. 2003년 신용카드 연체율은 28%까지 치솟았다. 연체율과 신용불량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대출(현금서비스+카드론)과 신용판매(일시불+할부)의 자산비중을 동일하게 맞춰야 한다는 ‘50대 50 룰’ 규제로 시장을 압박했다. 여러 장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회원 수 십만 명을 골라내 현금서비스 한도를 50~100%씩 대폭 줄였다.



신용보다 높은 카드한도, 과소비 조장극약 처방 후 주춤했던 카드 시장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번엔 카드사가 불을 짚였다. 2007년 카드사들은 포인트 선 지급서비스를 선보였다. 예를 들면 물건을 살 때 카드사가 최대 70만원까지 포인트를 미리 줘 돈처럼 쓸 수 있게 하는 상품이다.

대신 일정 기간 안에 카드 이용 실적만큼 쌓이는 포인트로 이를 채워 넣거나(선 포인트), 할부 방식으로 매월 일정 포인트를 갚아야(포인트 연계 할부) 한다. 여기에 음식점, 주유소, 할인점 등 할인해주거나 적립해주는 부가서비스는 물론 시간, 장소, 금액 등 카드 이용성향에 따른 혜택도 늘렸다. 카드사도 자신의 본업인 신용판매 역할을 강조하며 고객을 유인했다. 2004년 카드결제 비중은 38.4%에서 2007년 45.5%로 늘었다.

올 들어 카드업계의 외형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은행에서 분사한 KB국민카드, 하나SK카드 등이 전업계 카드사와 마케팅 전쟁을 벌이고 있다. 카드대란이 일어난 2003~2004년에 1000억원 대로 줄었던 카드 모집비용은 지난해 5000억원을 돌파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올해는 6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3월 출범한 KB국민카드의 경우 회원 모집을 위해 올 상반기에만 971억원을 모집비용을 썼다. 7개 전업카드사 중 가장 많은 금액이다. 삼성카드는 434억원으로 전년보다 350억원을 더 썼다. 금감원 관계자는 “카드발급 요건, 과다경쟁 등 지속적으로 규제강화를 해왔다”면서도 “할인혜택은 물론 소액결제, 온라인 상거래 등은 카드 이용 편의성이 높기 때문에 사용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소비자의 무분별한 사용도 문제지만 카드사들이 너무 쉽게 돈을 빌려주는 것도 금융당국이 문제 삼는 대목이다. 코리아크레딧뷰로(KCB)가 11개(전업계 5개, 은행계 6개) 카드사의 이용고객 데이터를 분석결과 한도 소진율이 평균 10%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카드사가 고객이 이용하는 금액의 10배 가까이 이용 한도를 부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선진국은 다르다. 미국의 경우 소진율이 약 80%다. 80%가 넘으면 한도를 재조정해 준다. 일본이나 영국, 호주 등도 약 60% 수준이다. 금융원 관계자는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는 한도를 상대적으로 적게 주고 한도를 한번에 크게 준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한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과소비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와 직불카드를 키울 방침이다. 금융위 서태종 서민금융정책 국장은 “월급 받아 신용카드 빚을 갚고 다시 신용카드로 빚내서 사는 악순환에 빠진 가계가 많다”며 “체크카드로 가진 돈만큼만 쓰게 되면 씀씀이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직불형카드 사용을 늘리는 묘안을 짜내는 중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무책임한 신용카드 발급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체크카드 이용 11% 불과하지만 여신금융 업계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체크카드 사용이 늘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전업카드사도 정부의 이런 정책에 위기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은행계 카드사들은 그동안 체크카드 이용실적을 늘리기 위해 신용카드 못지 않은 포인트와 할인 혜택, 서비스를 부여했다. 일부 성과는 있었다. 올 상반기 체크카드 이용실적은 일 평균 492만건, 183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7.3%, 43.4% 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체크카드 사용은 여전히 미미하다. 지난해 국내 카드 결제금액 중 체크카드 비중(11.1%)은 신용카드(88.9%)의 8분의 1 수준이다.

독일은 체크카드(직불카드 포함)가 92.7%를 차지한다. 영국(74.4%), 이탈리아(52.9%), 미국(42.3%) 등 선진국 대부분은 체크카드 비중이 신용카드보다 높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체크카드가 신용카드보다 소득공제 비율이 높고 부가서비스도 신용카드 수준으로 늘어났지만 소액 금액 결제 위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작다”고 말했다.

체크카드의 소득공제 혜택을 늘리더라도 시장 확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체크카드는 할부 구매가 안 되고 고액 결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전업카드사보다 할인·부가서비스 혜택도 단조롭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수년 전부터 체크카드 사용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진전이 없었다”며 “이번에도 세제 지원 외에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내에서는 보다 강도 높은 규제도 거론되고 있다. 체크카드 비중을 늘리려면 동시에 신용카드 발급을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신용카드를 일정한 소득이 있는 사람에게만 발행하면 자연스럽게 체크카드 비중이 커진다는 논리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소득 없는 대학생에게도 신용카드 발급이 가능할 정도로 카드사들의 발급 기준이 느슨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올해 경제활동인구 1인당 신용카드 보유량은 4.7장으로 카드대란이 일어나던 2003년(4.6장)보다 많다.

은행 계좌를 개설하면 해당 계좌에 대한 체크카드를 만들도록 강제성을 부여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또한 지난 2000년 신용카드 활성화를 위해 국세청이 매달 신용카드 영수증을 추첨해 고객들에게 현금 100만원을 주는 신용카드 복권제를 도입한 것처럼 체크카드에도 소비자 유인책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신용카드에 대한 직접 규제의 하나로 신용카드 소득공제 비율은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상식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소득공제 비율을 줄이고 나머지 금액에 대해 세금을 더 내라고 한다면 가만있겠느냐”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이르면 11월 중에 카드시장 개선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카드 수수료 논란 등으로 불거진 반 금융정서를 잠시 무마해보려는 미봉책일지, 기형적인 시장 구조를 확 뜯어고칠 수 있는 대책이 나올지 관련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성희 이코노미스트 기자 bob28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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