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 참모형(류중일)·카리스마형(조 토리)·만능형(야마모토 고지) 3색 대결
Sports - 참모형(류중일)·카리스마형(조 토리)·만능형(야마모토 고지) 3색 대결
탈권위적 류중일 승부근성 강해 … 조 토리는 강한 팀 더 강하게 해
국내 명감독이 아낀 참모 류중일불과 2년 전만 해도 류 감독은 리더형보다는 참모형 인물로 평가됐다. 소탈한 성격 덕분에 선후배는 물론 구단·미디어 등과 두루 잘 지내기는 했지만 그가 감독이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류 감독 자신도 “2010년 12월 구단으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참모로서는 탁월했다. 1999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이듬해부터 11년 동안 삼성 코치를 맡았다. 예나 지금이나 삼성에는 숱한 스타 플레이어가 있지만 누구도 그처럼 오래 삼성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현역 시절 김재박을 잇는 명유격수였던 그는 수비와 주루 분야를 확실하게 장악했다. 따라서 삼성 감독이 두 번 바뀌었어도 그의 자리는 탄탄했다.
때문에 대표팀에서도 항상 그를 찾았다. 2006년 1회 WBC 때 김인식 감독이 선동열(투수)·김재박(타격)·조범현(배터리) 등 각 팀 감독들로 코치진을 꾸릴 때 수비·작전 코치는 류중일이었다. 그는 김인식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은 2009년 2회 WBC, 조범현 감독이 지휘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대표팀 코치로 활약했다. 모든 리더가 아끼고 중용하는 참모였다.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2010년 12월 선동열 감독이 삼성에서 물러나면서다. 류 감독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2011년 SK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2012년에도 우승 후유증을 떨쳐내고 2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덕분에 대표팀 지휘봉까지 잡게 됐다.
류 감독은 “코치 시절엔 내가 감독이 될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면서도 “그래도 코치로서 우리나라 최고 명장들을 가까이 모셨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 시절 백인천 감독과 김성근 2군 감독을 겪었고, 지도자가 돼서는 김응용(2001~2004년)·선동열(2005~2010년) 감독의 참모 역할을 했다. 또 대표팀에서 김인식·조범현 감독에게 한 수 배웠다. 대한민국 최고 ‘야구 CEO’들의 장점을 조금씩 빼낼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류 감독은 “여러 감독님에게 틈만 나면 질문을 했다”고 회상했다.
류 감독은 ‘참모형 리더’답게 각 분야의 전문 코치들을 존중한다. 믿고 맡겼으면 해당 파트에서는 거의 전권을 준다. 권한은 코치에게 나눠주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식이다. 때로는 “류 감독의 야구는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감독들의 스타일이 녹아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류 감독은 “위기가 찾아올 때 ‘과연 OOO 감독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몇 번 물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고 말했다.
류 감독과 오랜 생활을 한 코치와 선수들은 그의 승부근성을 잘 알고 있다. 핸디 8의 수준급 골퍼인 그는 누구와 라운딩을 해도 조금도 양보하거나 대충 치는 법이 없다. “승부할 때는 마누라도 안 봐준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 밑에서 대충하는 선수는 없다.
코치 시절 선수들을 동생처럼 대했던 그는 “감독 됐다고 사람 변했다는 얘기를 듣기 싫다”며 여전히 선수들과 장난을 치고 내기도 한다. 삼성 감독들은 전통적으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류 감독은 탈권위적이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는 약한 스타일은 아니다. 여러 감독 밑에서 핵심 참모 역할을 맡았던 만큼 이기기 위한, 위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매뉴얼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삼성은 기본이 잘 갖춰진 팀이다. 큰 폭의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발전이 필요한 조직이다. 삼성의 구슬 서 말을 잘 꿴 리더가 류 감독이다. 삼성에서 그랬듯 류 감독은 국내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WBC 대표팀 분위기도 잘 만들었다. 그는 “이전 대회 성적(1회 4강, 2회 준우승)이 워낙 좋아 부담이 된다. 우리 선수들을 믿는다.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강한 카리스마로 실력 중시하는 토리류 감독과 달리 토리 미국 대표팀 감독은 강한 리더다. 강한 구성원들을 맨 앞에서 이끄는 전형적인 강한 리더다. 선수 시절부터 그는 엘리트였다. 1960년 밀워키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그는 포수와 1루수를 번갈아 맡았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4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다. 1971년엔 타율 0.363, 137타점, 24홈런으로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뉴욕 메츠를 거쳐 1977년 은퇴했다. 수퍼스타급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18년 동안 활약했다.
뉴욕 양키스는 1995년 11월 조 토리 감독을 영입했다. 최고의 명문구단인 양키스가 선수 영입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도 상위권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다. 토리 감독은 수퍼스타들을 잘 다뤘다. 많은 연봉을 받고,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양키스 선수들에게 명료한 원칙을 내세웠다.
“실력에 따라 기용한다. 책임은 감독이 지겠다”. 뻔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양키스에서는 쉽지 않았다. 최고의 연봉과 인기를 가진 선수들이 즐비한 곳에서 그들의 이름값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토리 감독은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선수들을 썼다. 강한 선수들을 납득시킬 방법은 분명한 원칙뿐이라고 믿었다. 선수들도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토리 감독은 “훈련에 지각하지 마라” “클럽하우스에서 음악을 크게 틀지 마라”라는 지극히 원칙적인 지시를 내렸다. 개인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양키스는 토리 감독 부임 첫 해인 1996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토리 감독은 양키스에서 2007년까지 6차례 아메리칸리그 우승, 4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토리 감독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LA 다저스 감독을 지내다 은퇴했다. 감독 통산 2326승은 메이저리그 역대 5위 기록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에게 WBC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토리 감독은 강한 팀을 더 강하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 빠르고 냉정한 전술을 펴며 단기전 싸움에 능하다. 그는 WBC를 정규 시즌 전 오프닝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미국 대표팀 선수들을 향해 “포스트시즌 같은 정신 자세가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갖고도 2006년 4강 탈락, 2009년 준결승 탈락의 고배를 마신 미국 대표팀은 토리 감독 부임 직전의 양키스와 닮았다. 토리 감독은 강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미국 대표팀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오밀조밀한 스타일의 야마모토선수 시절 성적을 보면 일본 대표팀의 야마모토 감독이 가장 뛰어나다. 1968년 히로시마에 입단한 그는 1986년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만 뛰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대졸 선수 최다 홈런(536개)은 아직도 그의 기록이다. 특히 1977년부터 5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때렸다. 이는 오 사다하루와 야마모토만이 가진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루(통산 231개)도 잘했고, 외야 수비도 뛰어났다. 히로시마 팬들에게는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이상 요미우리) 같은 영웅이었다.
감독으로서는 굴곡이 있었다. 은퇴 3년 후인 1989년 그는 친정팀 히로시마 지휘봉을 잡았다. 2년 연속 2위를 기록한 뒤 1991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성공가도만 달린 그가 이듬해부터 추락했다. 이듬해 4위, 1993년엔 최하위로 떨어져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2001년 다시 히로시마 감독에 부임했지만 5년 동안 한 차례도 상위권에 들지 못하고 2005년 다시 사임했다. 선수 시절 만능이었던 야마모토 감독이 리더로서 뚜렷한 색깔을 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팀이 워낙 약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아쉽게 끝나 버린 야마모토의 리더십이 이번엔 세계무대에 오른다. 제3회 WBC를 앞두고 일본 현역 감독들이 대표팀 맡기를 꺼렸다. 노무라 가쓰야와 오치아이 히로미쓰 등 은퇴한 명장들도 하마평에 올랐지만 결국 야마모토에게 지휘봉이 넘어갔다.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야마모토 감독의 스타일은 오밀조밀한 야구와 가장 가깝다. 1회 사다하루 감독, 2회 하라 다쓰노리 감독 등 선굵은 리더와는 다르다. 이번 일본 대표팀은 특급 스타들이 대부분 빠졌고 대신 빠르고 영리한 선수들로 채워졌다. 전력이 약해진 것 같지만 가장 ‘일본다운 팀’이라는 평가도 있다. 만년 하위팀 사령탑이었던 야마모토 감독에게는 이번 WBC가 지도력을 평가 받을 마지막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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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야구 감독을 매니저(Manager)라고 부른다. 다른 구기 종목 감독을 헤드 코치(Head Coach)라고 부르는 것과 구분된다. 가장 많은 선수를 다루고, 가장 많은 경기를 하고, 가장 많은 전술을 내놔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야구 감독은 ‘선수단의 대표’라는 개념보다 선‘ 수단 운영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야구 경기는 보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 가운데 선수들이 던지고 치고 달리는 시간은 30분 안팎이다. 나머지 2시간 30분은 작전을 짜고, 사인을 내고, 상대를 속이기 위해 쓴다. ‘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김성근(71) 고양원더스 감독은 “야구는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 한다”고 단언했다.
국내 명감독이 아낀 참모 류중일불과 2년 전만 해도 류 감독은 리더형보다는 참모형 인물로 평가됐다. 소탈한 성격 덕분에 선후배는 물론 구단·미디어 등과 두루 잘 지내기는 했지만 그가 감독이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류 감독 자신도 “2010년 12월 구단으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참모로서는 탁월했다. 1999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이듬해부터 11년 동안 삼성 코치를 맡았다. 예나 지금이나 삼성에는 숱한 스타 플레이어가 있지만 누구도 그처럼 오래 삼성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현역 시절 김재박을 잇는 명유격수였던 그는 수비와 주루 분야를 확실하게 장악했다. 따라서 삼성 감독이 두 번 바뀌었어도 그의 자리는 탄탄했다.
때문에 대표팀에서도 항상 그를 찾았다. 2006년 1회 WBC 때 김인식 감독이 선동열(투수)·김재박(타격)·조범현(배터리) 등 각 팀 감독들로 코치진을 꾸릴 때 수비·작전 코치는 류중일이었다. 그는 김인식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은 2009년 2회 WBC, 조범현 감독이 지휘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대표팀 코치로 활약했다. 모든 리더가 아끼고 중용하는 참모였다.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2010년 12월 선동열 감독이 삼성에서 물러나면서다. 류 감독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2011년 SK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2012년에도 우승 후유증을 떨쳐내고 2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덕분에 대표팀 지휘봉까지 잡게 됐다.
류 감독은 “코치 시절엔 내가 감독이 될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면서도 “그래도 코치로서 우리나라 최고 명장들을 가까이 모셨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 시절 백인천 감독과 김성근 2군 감독을 겪었고, 지도자가 돼서는 김응용(2001~2004년)·선동열(2005~2010년) 감독의 참모 역할을 했다. 또 대표팀에서 김인식·조범현 감독에게 한 수 배웠다. 대한민국 최고 ‘야구 CEO’들의 장점을 조금씩 빼낼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류 감독은 “여러 감독님에게 틈만 나면 질문을 했다”고 회상했다.
류 감독은 ‘참모형 리더’답게 각 분야의 전문 코치들을 존중한다. 믿고 맡겼으면 해당 파트에서는 거의 전권을 준다. 권한은 코치에게 나눠주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식이다. 때로는 “류 감독의 야구는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감독들의 스타일이 녹아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류 감독은 “위기가 찾아올 때 ‘과연 OOO 감독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몇 번 물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고 말했다.
류 감독과 오랜 생활을 한 코치와 선수들은 그의 승부근성을 잘 알고 있다. 핸디 8의 수준급 골퍼인 그는 누구와 라운딩을 해도 조금도 양보하거나 대충 치는 법이 없다. “승부할 때는 마누라도 안 봐준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 밑에서 대충하는 선수는 없다.
코치 시절 선수들을 동생처럼 대했던 그는 “감독 됐다고 사람 변했다는 얘기를 듣기 싫다”며 여전히 선수들과 장난을 치고 내기도 한다. 삼성 감독들은 전통적으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류 감독은 탈권위적이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는 약한 스타일은 아니다. 여러 감독 밑에서 핵심 참모 역할을 맡았던 만큼 이기기 위한, 위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매뉴얼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삼성은 기본이 잘 갖춰진 팀이다. 큰 폭의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발전이 필요한 조직이다. 삼성의 구슬 서 말을 잘 꿴 리더가 류 감독이다. 삼성에서 그랬듯 류 감독은 국내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WBC 대표팀 분위기도 잘 만들었다. 그는 “이전 대회 성적(1회 4강, 2회 준우승)이 워낙 좋아 부담이 된다. 우리 선수들을 믿는다.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강한 카리스마로 실력 중시하는 토리류 감독과 달리 토리 미국 대표팀 감독은 강한 리더다. 강한 구성원들을 맨 앞에서 이끄는 전형적인 강한 리더다. 선수 시절부터 그는 엘리트였다. 1960년 밀워키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그는 포수와 1루수를 번갈아 맡았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4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다. 1971년엔 타율 0.363, 137타점, 24홈런으로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뉴욕 메츠를 거쳐 1977년 은퇴했다. 수퍼스타급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18년 동안 활약했다.
뉴욕 양키스는 1995년 11월 조 토리 감독을 영입했다. 최고의 명문구단인 양키스가 선수 영입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도 상위권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다. 토리 감독은 수퍼스타들을 잘 다뤘다. 많은 연봉을 받고,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양키스 선수들에게 명료한 원칙을 내세웠다.
“실력에 따라 기용한다. 책임은 감독이 지겠다”. 뻔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양키스에서는 쉽지 않았다. 최고의 연봉과 인기를 가진 선수들이 즐비한 곳에서 그들의 이름값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토리 감독은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선수들을 썼다. 강한 선수들을 납득시킬 방법은 분명한 원칙뿐이라고 믿었다. 선수들도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토리 감독은 “훈련에 지각하지 마라” “클럽하우스에서 음악을 크게 틀지 마라”라는 지극히 원칙적인 지시를 내렸다. 개인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양키스는 토리 감독 부임 첫 해인 1996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토리 감독은 양키스에서 2007년까지 6차례 아메리칸리그 우승, 4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토리 감독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LA 다저스 감독을 지내다 은퇴했다. 감독 통산 2326승은 메이저리그 역대 5위 기록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에게 WBC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토리 감독은 강한 팀을 더 강하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 빠르고 냉정한 전술을 펴며 단기전 싸움에 능하다. 그는 WBC를 정규 시즌 전 오프닝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미국 대표팀 선수들을 향해 “포스트시즌 같은 정신 자세가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갖고도 2006년 4강 탈락, 2009년 준결승 탈락의 고배를 마신 미국 대표팀은 토리 감독 부임 직전의 양키스와 닮았다. 토리 감독은 강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미국 대표팀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오밀조밀한 스타일의 야마모토선수 시절 성적을 보면 일본 대표팀의 야마모토 감독이 가장 뛰어나다. 1968년 히로시마에 입단한 그는 1986년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만 뛰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대졸 선수 최다 홈런(536개)은 아직도 그의 기록이다. 특히 1977년부터 5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때렸다. 이는 오 사다하루와 야마모토만이 가진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루(통산 231개)도 잘했고, 외야 수비도 뛰어났다. 히로시마 팬들에게는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이상 요미우리) 같은 영웅이었다.
감독으로서는 굴곡이 있었다. 은퇴 3년 후인 1989년 그는 친정팀 히로시마 지휘봉을 잡았다. 2년 연속 2위를 기록한 뒤 1991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성공가도만 달린 그가 이듬해부터 추락했다. 이듬해 4위, 1993년엔 최하위로 떨어져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2001년 다시 히로시마 감독에 부임했지만 5년 동안 한 차례도 상위권에 들지 못하고 2005년 다시 사임했다. 선수 시절 만능이었던 야마모토 감독이 리더로서 뚜렷한 색깔을 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팀이 워낙 약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아쉽게 끝나 버린 야마모토의 리더십이 이번엔 세계무대에 오른다. 제3회 WBC를 앞두고 일본 현역 감독들이 대표팀 맡기를 꺼렸다. 노무라 가쓰야와 오치아이 히로미쓰 등 은퇴한 명장들도 하마평에 올랐지만 결국 야마모토에게 지휘봉이 넘어갔다.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야마모토 감독의 스타일은 오밀조밀한 야구와 가장 가깝다. 1회 사다하루 감독, 2회 하라 다쓰노리 감독 등 선굵은 리더와는 다르다. 이번 일본 대표팀은 특급 스타들이 대부분 빠졌고 대신 빠르고 영리한 선수들로 채워졌다. 전력이 약해진 것 같지만 가장 ‘일본다운 팀’이라는 평가도 있다. 만년 하위팀 사령탑이었던 야마모토 감독에게는 이번 WBC가 지도력을 평가 받을 마지막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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