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ulture books - ‘아와 비아의 투쟁’은 끝났다

시인들이 봄을 갈구하듯 역사가들은 분쟁을 필요로 한다. 조금만 예를 들자면 이렇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역사가 프레데릭 J 테가르트는 문명을 “집단 사이의 갈등에서 유발된 자극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했다. 같은 해 쇠퇴론자 오스왈드 스펭글러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자극한다는 테가르트의 이론을 부정했지만 문명 간 갈등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베스트셀러 저서 ‘서양의 몰락(Decline of the West)’에 “두 문화의 심층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썼다. 현대 쇠퇴론의 아버지 에드워드 기번은 야만인과 기독교인이 나약한 로마 제국을 무너뜨렸다는 주장을 폈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역사를 ‘극단의 시대’라고 불렀다. 9·11 테러 후에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유명해졌다. “우리 자유를 사랑한다”고 2002년 9월 조지 W 부시는 말했다. “저들은 (자유를)싫어한다.”
마니교를 연상케 하는 이분법적 선악구도로 가득찬 세상에 1990년 조금 색다른 ‘쇠퇴와 몰락’이 나타났다. 당시 컬럼비아대 교수였던 데이비드 캐너다인의 저서 ‘영국 귀족의 쇠망(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Aristocracy)’이다. 비교적 무명이었던 캐너다인은 이 책에서 이분법적 갈등없이 영국 지주 계급의 몰락을 설명해내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 책에 따르면 그들의 몰락은 물밑에서 작용한 수많은 원인들 때문이었다. 귀족들 자신이 범한 실수 탓도 있었다. 그의 관점은 책 결론부에 흠 잡을 데 없이 제시된다. 지난날의 수호자들은 오늘날 기생충이 됐다고 캐너다인은 썼다.
그러나 캐너다인은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 속에 역사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숨겨두었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봐선 안되며,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신화(us-versusthem myth)에 빠진다는 메시지다. “물론 과거와 현재를 단순화하는 것이 정치인들(그리고 기자들)의 업무이자 유혹”이라고 그는 1999년판 서문에 적었다. “그러나 역사가의 과업 중 한 가지는 정치인들(그리고 기자들)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이분법적 세계관은 귀족사회에서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9·11 사태가 있고 나서는 특히 더 그렇다.
캐너다인의 신저 ‘분리되지 않은 과거: 차이를 넘어선 인간성(The Undivided Past: Humanity Beyond Our Differences)’은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의 언어다. “중동에서 곡과 마곡(사탄에 현혹된 두 나라로 성경에 등장한다)이 준동한다.” 부시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라크전을 지원해달라며 이렇게 설득했다.
“성경의 예언은 점차 실현되고 있다. 이번 전쟁은 하느님께서 새 시대를 일으키시기 전에 그의 백성의 적들을 제거하고자 일으키셨다.” (통화가 끝난 뒤 시라크는 직원들에게 “부시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물었다.)
부시는 전쟁을 위해 기독교를 들먹이는 무뢰배 중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일 뿐이다. “종교적 독자성을 바탕으로 어떤 일이 의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고 캐너다인은 말한다. “제국주의적 야망, 국가간 경쟁, 영토 침략 야욕과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류는 이를 무시하고 서로 반목해왔다. 이는 종교적 연대라는 독자성의 범주에 바탕을 둔 호소일 뿐이다. 캐너다인은 다섯 개의 독자성 범주를 더 제시해 각각의 장에서 설명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 계급 갈등, 성 갈등, 인종 갈등, 문명을 향한 호소다.
“이런 독자성들을 믿는 개개인이 어느 한 독자성을 다른 하나보다 우선시할 때 갈등이 생긴다”고 캐너다인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칼 마르크스, 에릭 홉스봄, E P 톰슨같은 학자들을 향한 분노가 묻어났다. “그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그는 그들 중 하나라도 맞기는 한지 의문시한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세계는 기독교 민주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당면한 문제이며 우리의 초점이 돼야 한다. 캐너다인은 이런 견해를 경멸한다.
그는 영국 귀족답게(2008년에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지만 그동안 역사가 왜곡되는 모습을 보면서 지칠대로 지쳤고, 마침내 찾아낸 목표를 매우 열정적으로 추구한다. 캐너다인의 경멸은 기독교도가 항상 무슬림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는 지식에 기반을 둔다. 이슬람을 사악한 집단인 것처럼 대하는 것은 “정확하지 못하며 무책임함의 극치라고 본다”고 캐너다인은 강조했다.
에드워드 기본도 그런 견해를 내비친 적이 있다. 기본은 초기 기독교도가 “내적인 불화를 겪었다”며 “이교도에 의한 피해보다 기독교도 간 불화로 인한 피해가 훨씬 컸다”고 썼다. 때로는 한 종교 내의 사소한 차이들이 두 종교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클 때도 있다. 기독교도와 무슬림들은 갈등을 일으킨 기간은 전체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얼마 되지않는다.
캐너다인은 민족국가 사이의 구분은 대개 무작위로 형성된 지난 왕조의 부스러기들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19세기 이탈리아 정치인 마시모 다제글리오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건국했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 차례다.” 그런가 하면 이라크를 건국한 파이잘 왕은 “수많은 인간 군상”이 있을 뿐 이라크인은 없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는 국가가 아니다.” 나이지리아를 건국한 민족주의자 오바페미 아월로우의 말이다.
“단지 지리적 표현일 뿐이다.” 한때 분노에 가득 차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은 현대에 와서 돌이켜보면 어리석다고 느껴진다. 민족적 독자성을 가르는 경계선이 순전히 자의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공기와 인터넷 덕분에 그런 경계는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이제 세계 각국은 평화롭게 공존한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핑커는 저서 ‘인간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 왜 폭력은 사라져가는가(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Why Violence Has Declined)’에서 인류는 역사 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에게 평화란 “기자들에게 있어 긍정적인 소식과 같은 것”이라고 캐너다인은 썼다. 설령 아무리 선정적인 내용에 사족을 못쓴다고 할지라도 보도될 일 없는 “기본적인 상태”라는 의미다.
캐너다인은 자신의 견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다른 두 인물과 손을 잡았다. 세계 시민주의를 “차이를 포함하는 보편성”이라고 옹호하는 철학자 콰매 앤서니 애피아와 2011년 저서 ‘균열의 시대(The Age of Fracture)’로 최근 많은 독자성 범주의 실패를 지적한 역사가 다니엘 T 로저스다. 우연히도 둘 다 캐너다인처럼 프린스턴대 소속이다. 그러나 캐너다인은 애피아나 로저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혁명가들과 같은 편에 서기를 거부해 배척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가 보기에 어느 한편을 선택한다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설령 올바른 편을 선택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무 편도 선택하지 않는 바람에 캐너다인은 이방인이 됐다. 저서 ‘분열되지 않은 과거’는 맹렬한 비난과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학계의 한 동료는 “캐너다인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독자성이 아닌 인류 전체의 연대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썼고, 다른 역사학자는 “탈레반이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라면 가능할 텐데”라고 비꼬았다.
캐너다인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순진한 히피쯤으로 취급받는다. 캐너다인은 역사학에 대해 잘 모른다는 비판도 있고, 자신의 이상적 역사접근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거나 해결책 없이 문제점만 지적한다고 꼬집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나치가 진군해오는데 폴란드인들에게 민족주의에 호소하지 말라고 충고할 건가? 평화적인 사람들은 분노를 키우고 불화를 조장하는 자들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한단 말인가?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법을 무시하고 행동하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를 희생해 더 부자가 되면 어떻게 하는가? 실업자들에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할 생각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렇다. 캐너다인이 보기에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 결집으로 인해 좋은 결과도 많이 발생하지만, 그만큼 나쁜 결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집단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캐너다인은 말한다. “정도가 지나치지 않게 하자는 말이다.” 사람들을 뭉뚱그려 이름붙이는 일을 제외하면 역사가들이 할 일은 많지 않다. 동료 학자들이 캐너다인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주저할 만도 하다.
그러나 캐너다인은 집단의 독자성을 보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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