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에세이 - 냉면 한 그릇 속 근대사
CEO 에세이 - 냉면 한 그릇 속 근대사
여름철 별미는 역시 냉면이다. 유명 냉면집은 삼복 더위에 냉면을 먹으러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정통 평양 냉면 한 그릇을 앞에 두면 북한 실향민의 후손인 나는 100년에 걸친 가족사와 함께 근대사를 보는 듯하다.
한국전쟁 때 집안 전체가 평안도에서 피난온 연유로 나의 입맛은 냉면과 더불어 만두·빈대떡과 같은 북한 음식에 익숙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북한에서 겨울에 즐겨먹던 꿩고기 냉면을 회상하면서 “겨울에 먹던 냉면이 세월이 좋아져서 여름에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고 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름에 제격인 냉면이 본래 추운 평안도의 겨울 별미였다는 이야기가 일견 생소했다. 그러나 옛날에는 냉장고는 고사하고 얼음도 구하기 어려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간식을 여름 별미로 변모시킨 핵심 기술은 냉장고였다. 인공 얼음을 만드는 제빙기술은 1875년에 개발됐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냉장고가 선보였다. 우리나라에는 1910년 부산을 필두로 제물포·원산 등지에 제빙공장이 세워졌다. 초창기 생선 보관용으로 주로 쓰이던 얼음은 평안도 지방 겨울 음식인 냉면과 만나면서 유행의 첨단 서울의 여름별미로 재탄생됐다. 1920년대 서울 거리의 냉면집은 여유 있는 모던보이가 즐겨 찾던 최신 음식점이었다.
뒤이어 1930년대 ‘아지노모도’는 냉면 대중화의 물꼬를 텄다. 일본 화학자 이케다 키쿠나에(池田菊苗)는 1907년 다시마 국물의 감칠 맛을 내는 인공조미료 글루타민산 합성에 성공했다. 1909년 회사를 세워 사업을 확장하고 우리나라에도 진출하면서 대량 수요처로 당시 고가 유행 음식이던 냉면집에 주목했다. 냉면 육수에 사용하면 비용이 절약되고 맛도 좋아진다는 광고로 급속히 시장을 확대했다. 육수를 간편하게 만들 수 있게 되자 냉면 가격도 떨어졌다.
냉면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남한 각지로 흩어진 평안도 피난민 중에서 냉면집을 시작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부산에서는 원조받은 밀가루로 면을 빚은 밀면이라는 퓨전 음식도 나타났다. 어린 시절 선친을 따라 드나들던 냉면집의 주인장이 평안도 피난민이었다.
향수에 젖은 실향민의 모임 장소는 으레 냉면집이었다. 비단 냉면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대표적 음식으로 손꼽히는 김치도 마찬가지다. 원산지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고추는 16세기 임진왜란 즈음에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포기김치의 재료인 속이 꽉 차는 결구배추는 19세기 중반 중국에서 전래됐다. 고추와 배추가 특유의 발효기술과 결합하여 탄생한 포기김치도 따지고 보면 개방성의 산물인 것이다.
먹기 편하게 가위로 잘라달라는 옆 테이블의 손님을 보면서, 냉면 제대로 먹는 법을 이야기하던 선친 말씀이 떠오른다. “냉면은 모름지기 나온 그대로 먹어야 한다. 냉면에 쇠를 대면 면 맛이 달라진다. 국물에 겨자와 식초도 치지 마라. 식당의 내공인 육수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달걀은 가장 나중에 먹어라. 음식을 다 먹고 입을 깨끗하게 청소하면서 양념냄새를 없애는데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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