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파워피플[30] - 웃음으로 치유하는 코미디 닥터

영국 영화감독 리처드 커티스(57)는 감성으로 세계인의 가슴을 지배하는 파워 인물이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인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커티스는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 그리고 영화·방송·음반 제작자로 활동하며 세계인을 울리고 웃겨왔다.
만능엔터테이너인 그는 특히 로맨틱 코미디 영화감독으로서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발상과 스토리, 그리고 감각적인 대사를 무기로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코미디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평가 받는다.
무엇보다 그는 로언 앳킨슨이 등장하는 방송 코미디 시리즈와 영화 ‘미스터 빈’의 공동창작자이면서 작가다. 이제는 전 세계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 ‘노팅힐’(1999) ‘브리짓 존스의 일기1,2편’(2001, 2004),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무게를 인정받는다.
거기에 2003년에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러브 액추얼리’(2003)의 연출을 맡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올해는 역시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맡은 영화 ‘어바웃 타임’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런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전 세계에 걸쳐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인류의 고통을 웃음으로 치유하는 코미디 닥터’라는 별명도 얻었다.
커티스의 출세작은 1994년 작인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이다. 그는 이 영화로 로맨틱 코미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을 듣는다. 사랑에 대해 편견이 있는 남녀가 네 번에 걸친 결혼식과 한 차례의 장례식에서 서로 만나 기막힌 상황 속에서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350만 달러의 비교적 저예산을 들인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관객몰이에 성공해 미국에서만 527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전세계적으로는 2억441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영화는 당시까지 나왔던 영국 영화 중 자국 내 흥행 실적 1위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로맨틱 코미디 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작품에 출연한 휴 그랜트와 앤디 맥도웰을 세계적인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올려놨다. 커티스 본인의 명성이 자자해진 것은 물론이다. 커티스는 이 작품으로 오스카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은 ‘펄프 픽션’을 쓴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는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상은 톰 행크스가 주연한 로버트 저메키스 작품 ‘포레스트 검프’가 받았다. 상대가 너무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영국 영화·배우·배경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계기도 됐다. 영국에선 이 작품을 ‘영국 영화 르네상스’를 부른 신호탄으로 여기는 영화 관계자가 적지 않다.
치밀한 시나리오, 정교한 연출, 언어의 매력이 살아 숨 쉬는 대사, 사실적인 연기, 매력적인 배우, 멋진 로케이션 장소가 곁들여진 영국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게 사실이다. 흔히 미국 영화로 알려진 영화 중 영국에서 제작된 게 한 둘이 아니다. 영국이 제작비가 할리우드보다 싸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90년대 이후 영화산업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게 됐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영국 배우 휴 그랜트가 공연한 ‘노팅힐’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을 수 있다. 커티스의 발상과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런던 서부 노팅힐 지역에서 여행 서점을 하는 청년이 갑자기 서점에 나타난 미국 유명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다는 발상부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임신한 할리우드 여배우가 영국 런던에 흔한 동네 공원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남편 무릎을 배고 미소 짓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팬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코미디에 이 같은 감성 마케팅의 날개를 달아 커티스가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영화의 실제 촬영은 그 지역을 그대로 재구성한 세트장에서 했음에도 런던 노팅힐 지역의 주말시장과 거리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원래부터 이 지역은 매년 8월 마지막 주말에 벌어지는 영국 거주 자메이카 등 서인도제도 출신 주민들의 카니발인 노팅힐 축제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43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노팅힐’은 전 세계적으로 3억6388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 세운 영국 영화 최대 흥행기록도 갈아치웠다. 이로써 커티스는 일약 세계 최고의 흥행 시나리오 작가 반열에 올랐다.

세상 울리고 웃기는 만능 엔터테이너‘러브 액추얼리’는 30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제작해 전 세계에 걸쳐 2억449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이 영화는 세계 영화사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룬 작품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모자이크한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다.
성탄을 앞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8명의 각기 다른, 그러나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커플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허를 찌르는 상황과 위트, 그리고 마음을 후비는 절묘한 대사로 그려낸 작품이다. 휴 그랜트, 엠마 톰슨, 콜린 퍼스, 리암 니슨 등 유명 영국(또는 아일랜드) 배우들의 명연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기막힌 연출솜씨를 목격할 수 있다.
예로 들어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포르투갈계 파출부와 사랑에 빠진 영국 작가가 그녀를 운전해 데려다 주며 “당신과 함께 차를 타는 이 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즐거워(It’s my best time of day, driving you)”라고 생각하자 여자는 “당신과 헤어지는 이 순간이 하루 중 최악이야(It’s my worst time of day, leaving you)”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은 언어 예술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그녀와 대화하려고 런던에서 포르투갈어를 배운 뒤 그녀가 일하는 식당으로 날아간 이 남자가 그녀의 모국어로 청혼하자 그녀는 영어로 “어려운 질문도 아니네요(Easy question)”라고 받아들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녀가 “이 때를 대비해서 (영어를) 배워뒀어요(Just in case)”라며 능청을 떠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눈물과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관객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친구의 신부를 사랑하지만 아무런 말도 못하는 남자가 그녀 집 문 앞에서 커다란 캔버스에 자신의 심정을 줄줄이 써서 하나하나 넘기는 장면도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자신이 마음에 둔 비서에게 바람둥이 미국 대통령이 억지로 키스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총각 영국 총리가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작지만 위대한 나라다. 셰익스피어의 나라이고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왼발, 아니 오른발도 가진 나라다”라며 영국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한 대목도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는 이후 로맨틱 코미디는 물론 성탄·사랑·고백의 상징으로서 온갖 광고와 코미디 등에 끊임 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군데에서 두고두고 인용할 수 있는 명장면을 이토록 많이 가진 영화도 드물 것이다. 리처드 커티스의 창의력과 감각, 그리고 깊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울러 이 영화에는 영국이 자랑하는 브리티시 팝이 시종 흐른다. 영화 대사와 장면의 재미에 더해 음악을 듣는 즐거움까지 함께 선사하는 것이다. 거기에 영화 배경인 런던 곳곳의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장면까지 곁들여지면 비로소 ‘커티스표’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런던 관광에 일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의 성공에 더해 전 세계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했다. 인간의 삶과 사랑을 진실하게 다룬 치밀한 스토리 구조, 인간 사랑에 대한 철학적인 바탕, 영국 런던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과 연결되는 국제적인 발상 등이 관객을 끌었다. 감동과 웃음, 철학과 즐거움을 한꺼번에 주는 수준 높은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를 연 것이다.
이 두 작품으로 그는 ‘로맨틱 코미디계의 셰익스피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됐다. 그러면서 전 세계 영화계를 바짝 긴장하게 했다. 글로벌 영상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스토리 구조나 영화 문법의 문턱을 바짝 높인 셈이다. 관객으로선 커티스 덕분에 한층 수준 높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커티스는 이로써 엎치락뒤치락 슬립 스틱 코미디, 스토리 라인이 허술한 코미디 영화를 퇴출시킨 주인공이 됐다. 그러면서 연말연시면 사람을 울리는 로맨틱 코미디 ‘러브 액추얼리’의 그 감동을 만든 사나이로 끊임 없이 기억되고 있다. ‘러브 액추얼리’는 연말 연시·성탄절 시즌에 텔레비전 영화나 영상물 다운로드 순위에 항상 오르고 있다. 게다가 올해 ‘러브 액추얼리’는 탄생 10주년을 맞아 12월 초 한국에서 재개봉 됐다. 커티스의 저력은 이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이 지나서도 변치 않은 것이다.
코미디에 감성 마케팅 날개 달아사실 커티스는 코미디의 007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 빈’을 공동 창작한 코미디 작가로 출발했다. 미스터 빈과의 관계에는 세계적인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 거목인 커티스를 만든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도 숨어있다. 유니레버사의 해외 영업 직원인 아버지가 근무 중이던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커티스는 어려서 스웨덴·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성장하다 11살 때 영국에 정착했다.
영국 런던의 명문 해로 스쿨을 나와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우등 졸업했다.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던 한 친구를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일생의 기회를 만들었다. 바로 나중에 영국 최고의 코미디 배우가 된 ‘미스터 빈’ 로언 앳킨슨(58)을 만난 것이다.
앳킨슨은 당시 뉴캐슬대를 마치고 옥스퍼드대 퀸스칼리지에서 전기공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대학원생 앳킨슨은 전기공학보다 연극, 특히 코미디에 더욱 열심이었다. 1885년 설립된 옥스퍼드대의 유서 깊은 옥스퍼드연극회(OUDS)와 1936년에 설립된 이 대학의 대안극단인 실험극클럽(ETC)의 멤버로서 1938년에 생긴 옥스퍼드 소극장에서 무대에 섰다. 그러다 옥스퍼드대 코미디 극단인 옥스퍼드 레뷔(시사풍자극단)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코미디에 전념했다.
옥스퍼드 레뷔는 1952년경에 생긴 동아리로 수많은 코미디 작가와 풍자작가를 배출한 전통의 동아리다. 단원들은 옥스퍼드 대학과 극장 등에서는 물론 지역 펍(영국 전통 선술집)에서도 공연하며 내공을 다진다. 옥스퍼드대 석사 과정 학생인 앳킨슨이 ‘영국판 영구’로 변신해 세계적인 바보 코미디언이 된 것은 단순히 개인의 끼나 재능 때문만이 아니고 그 재능이 꽃필 수 있도록 해준 이런 토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옥스퍼드대에서 ‘미스터 빈’ 로언 앳킨슨 만나커티스는 실험극클럽 내의 시사풍자극 극단인 에세트라 레뷔에서 희곡팀으로 활동하다 만나 일생의 친구이자 동료가 됐다. 에세트라는 ‘기타 등등’을 뜻하는 라틴어 약자 ‘etc’의 원래 발음인데 실험연극클럽의 머리글자를 따면 ETC가 되는 데서 착안한 이름이다. 학생 시사풍자극단다운 재치가 돋보이는 이름이다.
1976년에 커티스는 에세트라 레뷔가 옥스퍼드 소극장에서 공연한 ‘8시 이후’라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커티스와 앳킨슨은 옥스퍼드 레뷔와 에세트라 레뷔에서 작업하다 서로 의기투합했다. 앳킨슨은 옥스퍼드 레뷔 소속으로 1976년 에딘버러 축제 프란지에서 공연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당시 그 공연에 커티스도 작가 겸 배우로서 참가했다.
이 에딘버러의 성공은 두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앳킨슨은 BBC에 코미디언으로 스카우트됐으며 커티스는 BBC 라디오 3에서 그의 코미디 공연을 지원하는 작가가 됐다. 이후 방송 코미디 시리즈와 시트콤 등을 쓰던 커티스는 1990년부터 앳킨슨이 출연한 출세작 ‘미스터 빈’의 대본을 맡으면서 영국 코미디계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런 무대와 방송 경험을 쌓은 뒤 영화에 진출하면서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힐’ ‘러브 액추얼리’의 성공을 이끈 것이다. 재능에 더해 탄탄한 실력을 갖추기 위한 오랜 노력, 그리고 공동작업의 힘이 오늘날의 커티스를 만든 원동력으로 보인다. 앞으로 그의 창의력이 세계 영화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전 세계의 영화 팬들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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