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파워피플[42]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

바야흐로 러시아의 시대다. 블라디미르 푸틴(62) 러시아 대통령이 시대를 주도한다. 푸틴은 3월 18일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 절차를 강행했다. 그는 이날 상하 양원에서 1954년 이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 특별시를 러시아 연방에 편입시키는 협정에 서명했다.
푸틴의 행동은 거침이 없다. 그는 서명에 앞서 행한 의회 연설에서 “크림반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로 남아 있었다”면서 “크림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고 합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에게 1999년 당시 신유고슬라비아 연방 산하 코소보를 유고에서 떼서 준독립구역으로 만든 것을 상기시켰다. 당시 러시아가 항의했음에도 서방 진영이 이를 무시하고 이 지역에 사는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 중앙정부의 탄압을 받고 인권유린을 당한다는 이유로 코소보 전쟁을 거쳐 분리절차를 진행했음을 내세웠다.
거침없는 푸틴에 허 찔린 오바마코소보는 세르비아 군대가 14세기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한 지역으로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와 다름없는 곳이다. 하지만, 소수민족인 알바니아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높은 출산율로 세르비아계보다 인구가 많아지자 분리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자 당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대통령이 알바니아계를 탄압하자 이를 명분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가 유고를 폭격한 뒤 코소보를 점령했다. 푸틴은 이를 지적하며 서방의 이중 잣대를 비난한 것이다.
푸틴의 당당한 태도와 거침없는 행보에 대한 외신들의 평가는 ‘푸틴의 완승’ ‘속전속결로 상황 종료’ 등 긍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다. 미국 내에서는 머뭇거리다 푸틴에게 허를 찔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푸틴이 통치 철학으로 내세워온 ‘푸틴 독트린’이 이번에 힘을 발휘했으며 그가 외쳐온 ‘강한 러시아의 부활’도 가시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푸틴 독트린이란 1991년 소련 붕괴 뒤 추락한 러시아의 위상을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 되돌려놓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대등한 핵 전력을 보유한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양축의 하나로 복귀해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겠다는 뜻이다. 러시아국영방송 RT에 따르면 크림반도 합병에 대한 러시아 내 여론조사에서 90% 이상이 찬성했다. 푸틴의 대중적 인기가 더욱 높아진 것이다.
이런 푸틴의 ‘강한 러시아’ 건설을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하는 인물이 바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49) 러시아 총리다. 메드베데프는 지난해 9월 포브스가 발표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순위에서 53위를 차지했다. 2005년 11월부터 2008년 5월까지 제1부총리를 지낸 메드베데프는 43세였던 2008년 5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제3대 러시아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총리에 지명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푸틴이 2000년 5월부터(사임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 이어 1999년 12월 31일부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음) 2008년 5월까지 대통령을 연임한 뒤 3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지킨다며 출마를 포기한 푸틴을 사실상 대신해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되자 4년 임기만 채우고 푸틴에게 양보한 것이다. 메드베데프의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푸틴이 총리를 맡았으며, 푸틴이 다시 대통령이 되면서 메드베데프가 총리를 맡은 것이다. 이 기묘한 정치적 커플은 푸틴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내내 계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메드베데프는 부총리·대통령·총리로서 푸틴과 함께 일하는 동안 환상의 정치적 궁합을 과시했다. 푸틴이 마초 이미지를 내세우며 ‘강한 러시아’를 외치는 동안 메드베데프는 러시아 국력의 원천인 에너지 자원을 관리하고 행정·경제·사회의 현대화를 맡으며 든든한 ‘정치적 내조자’ 역할을 했다. 메드베데프는 제1부총리를 맡는 동안 러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인 가스프롬 회장을 겸임하면서 에너지 산업의 체질 강화와 전략적 활용에 주력했다.
2005년 10월부터는 국민의 보건·교육·주택·농업의 4개 분야에 초점을 맞춰 국민 복지를 향상하는 ‘국민 최우선 프로젝트’의 제1 부위원장(위원장은 당시 푸틴 대통령)을 맡아 이를 주도했다. 그는 이 분야 종사자의 임금을 현실화하고 장비를 현대화하는 일련의 개혁 작업을 통해 러시아의 사회복지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자신과 푸틴이 높은 인기를 누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재임 중에는 러시아의 경제와 사회를 현대화하는 ‘메드베데프 현대화 프로그램’을 가동해 러시아의 면모를 일신했다. 이 프로그램은 가스와 석유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를 다양화·하이테크화·혁신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에너지 효율 제고 기술’ ‘핵 기술’ ‘정보 기술’ ‘의학과 약학 기술’ ‘통신기술과 결합한 우주 기술’의 5개 분야 기술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러시아의 잠재적인 기초과학 기술력을 최대한 활용, 이를 산업으로 연결해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메드베데프는 “경제 현대화 없이는 러시아의 미래도 없다”며 이 계획을 밀어붙였다. 과거 냉전 기간 중 소련은 사활을 걸고 핵·우주·생명과학 분야의 기술 개발에 투자했다. 여기에서 비롯한 러시아의 과학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해 기술집약 산업 중심으로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평가 받는다.
예를 들어 항공 분야에선 2011년 31억 달러를 기술개발에 쏟아 부었는데 이는 2007년의 3배에 이른다. 그 결과 러시아는 우주 관련 기술에서 서방에 비해 우위를 지키고 인공위성 발사 대행 사업과 우주비행장 사업 등 우주산업에서 선두 주자로 나서고 있다.
특히 제약산업에서 메드베데프는 “국내 의약품 수요의 20%만 자체 공급하고 나머지는 수입에 의존하는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며 “내수를 충족하는 것은 물론 이를 기회로 바이오 기술, 핵 의학, 나노 기술 등 첨단기술 개발에 주력해 러시아를 생명과학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푸틴이 강한 러시아를 외치며 국제사회에서 큰 소리를 치는 데는 메드베데프가 이뤄낸 ‘내실’이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러시아 헌법에서 대통령은 외교국방을 책임지는 국가원수이며 총리는 행정부의 수장이다. 헌법대로 메드베데프 총리는 러시아 내정을 실질적으로 꾸려가고 있다.

과학 잠재력 활용해 경제 부흥 도모푸틴은 1952년 생, 메드베데프는 1965년 생으로 13살 차이다.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 지연·학연·인맥에서 공통점이 한둘이 아니다. 두 사람은 동향이다. 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과거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출신이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일치한다. 대학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옛 레닌그라드 대) 법과대학 동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는 이 두 사람 사이를 잇는 또 하나의 강력한 끈을 제공했다. 바로 아나톨리 소브착(1937~2000)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소브착 교수는 러시아 페레스트로이카 기간 중 정치인으로 변신해 이름을 날렸다. 그는 레닌그라드의 첫 직선 시장선거에 출마해 1991년 6월 선거에서 당선했다. 시장선거 당시 도시의 이름을 러시아 혁명 이전에 불리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꾸는 안건에 대한 찬반투표도 함께 진행해 통과시켰다.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이 과정에서 서로 처음 만났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으로 동독에서 활동했던 푸틴은 대학 시절 법대 교수이던 소브착의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일했다. 메드베데프는 소브착의 제자로 1990년 소브착 교수의 지도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그의 정치활동을 돕고 있었다.
소브착은 시장이 된 뒤인 1991년 6월부터 이 두 사람을 최측근으로 활용했다. 푸틴에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실 국제관계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겼다. 당시 푸틴은 여전히 KGB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일은 소브착 아래에서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혼란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KGB 고위 간부를 포함한 공산당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해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옐친을 비롯한 정치지도자와 국민의 반발로 무산될 무렵 푸틴도 KGB를 떠났다.
소브착은 메드베데프에게는 국제관계 위원회의 법률 담당을 맡겼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함께 일했다. 이 위원회는 소브착의 보좌관이던 블라디미르 야코블레프와 푸틴의 주도 아래 인프라 건설 등과 관련된 많은 이권을 주무른 것으로 알려졌다. 메드베데프는 이 위원회에서 푸틴을 보좌하다 1994년 푸틴의 보좌관이 됐다. 1993년 목재 회사에 이어 제지 회사의 법률 이사로 이름을 걸고 1999년까지 급료를 받았다.
그러다 중앙정계에 진출해 총리가 된 블라디미르 푸틴의 부름을 받고 1999년 가을 모스크바로 떠났다. 행정부 차관을 거쳐 대통령실(대통령 비서실에 해당) 제1부장관에 올랐으며, 2000년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의 당선에 일조했다. 그 결과 그는 같은 해에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 프롬 회장도 함께 맡았다. 2003년에는 대통령실 장관(비서실장)이 됐으며 2005년 11월엔 제1부총리에 올랐다. 그리고 2007년 12월 10일 푸틴은 메드베데프를 이듬해 3월 2일 실시될 대통령 선거의 여당 후보로 지명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듯 메드베데프는 ‘푸틴이 키운 사람’이다. 사실 그는 2008년 대선 전까지 단 한 번도 선출직 공무원에 취임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선거운동은 잘 했지만, 전문 관료나 참모로서만 일했을 뿐 자신을 내세워 유권자에게 팔아 표로 바꾸는 그런 대중 정치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상왕 노릇을 하려던 푸틴이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배신 난무한 러시아 권력사에서 메드베데프는 예외사실 소련은 후임자가 전임자를 부정하거나 배신한 전통이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측근과 혁명 동지들을 거의 말살했다. 스탈린은 후임자 격인 니키타 흐루쇼프로부터 격하운동을 당했다. 흐르쇼프는 자신이 키운 2인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전임자들을 부정하고 개혁개방을 추구했다.
그런 고르바초프도 보수파의 쿠데타 와중에 정치적 동지로 여겼던 보리스 옐친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으며 자신이 첫 대통령을 맡았던 소련이 눈앞에서 와해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옐친도 2인자인 푸틴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여기는 관측통이 적지 않다. 이런 배신의 세계에서 메드베데프는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올랐음에도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다.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과거 소브착과 함께 일하면서 뼈에 새길 만한 큰 사건을 함께 경험했다. 소브착이 측근의 배신으로 1996년 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것을 함께 목격했다. 당시 재선을 노리던 소브착은 시장 선거에서 보좌관 출신의 부시장 블라디미르 야코블레프에게 패배한다. 야코블레프는 “소브착이 문화의 수호자와 중앙정치무대 지도자로서 맹활약하느라 정작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을 소홀히 했다”며 그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우크라이나와 크림 사태가 두 사람을 더욱 끈끈하게 연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푸틴의 정치적 인기가 높아질수록 메드베데프의 지위도 더욱 안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푸틴의 힘이 곧 메드베데프의 권력인 것이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어로 곰이라는 말에서 파생됐다. 메드베데프야말로 곰처럼 묵직하게 러시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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