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빛과 그림자
쿠바의 빛과 그림자
미국 마이애미에서 쿠바 아바나로 가는 비행기 여행은 결코 깔끔하지 않다. 인내심, 잔꾀, 유머, 그리고 새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모함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나는 알베르토 마냥(53)과 동행했다. 그가 ‘힘깨나 쓰는 사람’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마냥은 쿠바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그곳을 떠났다. 이후 스페인에 잠시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뉴욕에 살았다. 그와 아내 다라 메츠는 맨해튼 남서부 첼시에서 마냥메츠 화랑을 운영한다. 주로 해외 화가, 특히 쿠바 화가가 전문이다.
비행기 이륙 90분 전 우리는 2시간 전부터 줄을 늘어선 승객들을 느긋하게 지나쳐 탑승권 발행 카운터로 직행했다. 거기서 마냥은 직급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한 여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여성은 내 여권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 마냥은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마냥은 나를 아바나 항공의 마크 엘리아스 사장을 소개했다. 엘리아스 사장은 마이애미-쿠바 전세기의 경우 수년 전부터 긴 줄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탑승권을 받으려면 체크인 포인트를 서너 차례나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한 시간 반 안에 탑승을 완료할 수 있다.”
다행히 내 여권을 가져간 여성은 약 20분 뒤 다시 나타나 내게 직사각형 폴더를 건넸다. 탑승권, 돌아오는 비행기표, 여권, 쿠바 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맨 뒤에 휴지처럼 보이는 빛 바랜 청색 종이가 끼어 있었다. “그걸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 여성이 말했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 여성과 마냥이 거의 한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니까요.”
이륙 후 1시간도 채 안 돼 아바나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비행기 바퀴가 닿자마자 조종사가 기내 방송을 했다. “아바나에 도착해서 기쁘다면 박수를 치세요!” 객실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호텔에 짐을 풀자 저녁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하고 야윈 택시기사 라파엘(50)을 고용했다. 원래 의사였지만 4년 만에 그만두고 택시를 몬다고 했다. 그는 우리를 아바나 구시가의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광장 입구에 내려줬다. 서너 발짝을 걷자 택시기사 대여섯 명이 우리를 에워쌌다. 택시 필요해요? 미국인이세요? 어디 가세요? 나는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고는 밝은 조명 아래 사람들로 가득한 넓은 조약돌 광장으로 향했다.
유적지와 건축을 구경하려고 관광객이 밤낮으로 찾는 곳이다. 길 건너 아바나의 해변도로 말레콘이 보였다. 그곳 역시 밤낮으로 젊은이들이 바글거린다. 한 달 월급으로 팔라다르(paladar, 자영업 식당으로 정부가 보조하고 영업과 임금을 결정하는 수많은 관영 식당과 구분된다)에서 한끼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 나라 쿠바에서 말레콘은 주민에게 뭔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광장을 가로질러 한 건물의 아담한 로비에 들어섰다. 문 옆의 경비원을 지나 안쪽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마냥은 스페인어로 그 여성과 이야기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설득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여성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냥, 그의 친구 몇 명과 함께 작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군가 마냥에게 무슨 사건에 관해 물었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천장을 가리켰다. 누군가 엿들을지 모른다는 제스처였다. 우리 모두 입을 다물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2층짜리 고급 아파트의 옥상이 나타났다. 아바나 구시가가 내려다보였다. 마치 마이애미 일류호텔인 듯했다. 세련된 하얀 의자와 소파, 우아한 꽃꽂이, 모든 술과 음료가 완비된 바. 한쪽에선 인근 건물 벽면을 스크린 삼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30분 뒤 손님들이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갔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넓고 호화로운 거실이 나타났다. 두꺼운 벨벳으로 만든 대형 해먹, 공들여 장식한 바닥 카펫. 돌출 촛대와 미술품으로 장식된 벽면 앞엔 거대한 화초가 서 있었다. 옆 방에는 당구 테이블이 놓여 있고 뷔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복도 아래에는 자연 그대로인 듯한 목욕탕이 마련돼 있었다. 샤워기 옆의 선반에 놓인 뭉툭한 조각상은 영락없는 남근의 형태였다.
손님들은 모두 옷을 잘 차려 입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은 가운, 젊은 모델은 몸에 딱 붙는 드레스, 남성은 각 세운 정장과 모자, 반짝이는 구두 차림. 이곳엔 나이도 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나이 든 손님들이 젊은 무리와 어울렸고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바로 쿠바의 지식인과 문화 엘리트였다.
쿠쿠 디아만테스(유명한 쿠바계 미국인 가수 겸 배우)와 남편 안드레스 레빈(베네수엘라 태생으로 줄리아드 음대를 나온 미국인 음반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을 만났다. 레빈은 지난해 11월 TEDxHavana(아바나에서 열린 기술, 오락, 디자인 강연회)를 처음 개최했다. 그는 디아만테스와 함께 퓨전 밴드 예르바 부에나를 만들어 2003년 데뷔 앨범으로 그래미상 후보작에 올랐다. 레빈은 유명한 쿠바 배우와 음악가들을 소개해줬다. 심지어 카스트로 가문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담배와 시가 연기가 가득했다.
1960년대 초 시작된 미국의 금수 조치로 미국인의 쿠바 투자가 금지됐다. 그러나 미술품, 책, 음악은 금수 조치에서 면제돼 예술가들은 정부의 감시 아래서 약간의 돈을 벌고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부동산 재벌도 헤지펀드 큰손도 없는 쿠바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1%’ 부유층을 형성했다.
사실 그건 대다수 관광객이 보는 아바나가 아니다. 대다수 쿠바인이 아는 아바나도 아니다. 그런 사교모임에 관해 글을 쓰는 것조차 쿠바 정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보낸 나머지 시간에 대다수 외국인이 마음 속에 그리는 아바나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테일핀(날개 모양의 자동차 꼬리 부분)이 녹슨 고색창연한 쉐보레 컨버터블, 건물 벽에 빛 바랜 붉은 색 글자로 ‘혁명은 무적’이라고 적은 선전 포스터, 허물어져 가는 저택과 부서질 듯한 자전거 택시, 피한객(겨울철 추위를 피해 쿠바에 온 노인 관광객)들이 가득한 시가 상점, 관광객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디서 왔는지 묻고 뉴욕에서 왔다고 하면 “뉴욕 양키!”라고 외치는 아이들.
그처럼 수 세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쿠바지만 확실히 달라진 면도 눈에 띄었다. 아바나 곳곳에 있는 건설공사 현장의 기중기들. 거의 매주 생겨나는 새로운 팔라다르 식당과 작은 피자 가게. 관광객으로 가득한 호텔. 내가 묵은 멜리아 코히바에선 뉴욕시 거리를 걸으며 듣는 것보다 더 많은 미국식 영어가 들렸다.
쿠바가 50여 년 만에 처음 문호를 개방하면서 희망과 투지, 돈이 공중에 떠다니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가 될 수 있다. 부동산, 건설, 통신, 관광 등. 자전거·자동차 수리점부터 배관공사, 식당, 택시까지 소규모 비즈니스가 전부 성장할 태세다. 2012년 프리덤하우스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쿠바인이 인구의 5%에 불과한데도 (쿠바인 중 23%는 정부가 허가한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최근 쿠바 진출을 발표했다. 지난 2월 코넌 오브라이언은 1962년 이래 쿠바에서 심야 TV토크쇼를 찍은 첫 미국 연예인이 됐다. 그 다음은 어떤 대형 미국 브랜드가 진출할까? 홈데포? 베스트바이? 맥도널드? 로열 캐리비언 인터내셔널? 도널드 트럼프?
잠들어 있던 쿠바에 갑자기 잠재력이 넘치는 듯하다. 과도 정부가 억누르곤 있지만 쿠바인은 근면하며 희망에 차 있다. 그 상황에서 과연 누가 수혜자가 되고 누가 뒤처질까? 쿠바의 미래는 새로운 자메이카일까? 체게바라 T셔츠와 카스트로식 군모 차림의 봄철 휴가객과 미혼 남녀가 가득한 곳 말이다.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일까 최악의 시나리오일까? 마냥은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 때 방과 후 어머니가 날 데리러 와서는 ‘24시간 안에 떠나야 해. 여행가방을 꾸려. 해외로 나갈 거야’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겁이 더럭 났다.”
46년 전 마냥의 어머니(미술 교수)와 아버지(담배공장 회계사)는 자동차, 가구, 보석 등 아바나에서 소유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당시에도 마냥은 수집가였다. 야구 카드, 우표, 동전, 스티커를 모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미술을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쿠바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냥은 결국 미술품 거래상이 됐다.
마냥은 쿠바 화가들의 작품 전시로 유명하다. 인종, 종교,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뿌리를 탐구하는 화가 로베르토 디아고, 쿠바 출신의 전시 작가로 구성된 현대미술 그룹 로스 카르핀테로스의 창립 회원인 알렉산드레 아레체아, 201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쿠바 대표 화가 글렌다 레온 등.
1997년 마냥은 쿠바를 다시 찾았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시작된 초유의 경제위기(쿠바인은 ‘특별한 시기’라고 부른다)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교통, 식량, 전기, 자동차, 교체 부품, 치약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호화롭던 주택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화가들에게 빠진 것은 그 어려운 시기에 그들이 아주 특별한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제대로 된 물감도 없었다. 금속, 천, 자루걸레 등 닥치는 대로 캔버스로 사용했다. 그들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 미국 수집가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즘 마냥은 쿠바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논란 많은 미술 행사를 주최한다. 2009년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아바나를 방문한 첼시’ 전시회가 대표적이다. 혁명 이래 쿠바에서 열린 미국 화가들의 첫 전시회였다. 제10회 아바나 비엔날레의 일환이었다. ‘비엔날레’라고 하지만 2000년부터 3년에 한 번씩 열린다. 마냥은 “그 행사가 쿠바-미국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미술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쿠바인과 쿠바계 미국인 몇 명이 드러내지 않고 문화대사로 활동했다. 미술에 초점을 맞춰 양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중 한 명이 마냥이다. “아바나는 건재하다”고 그는 말했다. “화가들이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들은 쿠바에 남아서 계속 활동한다. 미술과 문화를 통해 일어난 변화가 다른 분야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바나에서 이틀째 우리는 쿠바인 큐레이터 후아니토 델가도를 찾아갔다. 그의 아파트에서 말레콘이 내려다 보였다. 그는 “좋은 작품을 만들면 정치적인 문제가 숱하게 제기된다”고 말했다. “정치를 미술로 만들지 말고 미술을 정치화해야 한다. 그러면 대화가 이뤄진다.”
2012년 델가도는 말레콘을 11회 아바나 비엔날레의 전시회장으로 활용했다. 아를레스 델 리오의 ‘날아가다’라는 작품은 방파제 끝자락에 쳐진 대형 직사각형 철책선에서 비행기 그림자 모양을 잘라낸 것이었다. 라첼 발데스 카메요는 강물을 마주보는 대형 거울을 설치하고는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 1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미술이 사회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인다”고 델가도가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 문화계를 도와주면 좋겠다. 책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고 화가들이 작품을 알릴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해주기 바란다. 또 아바나의 극장이 관객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
쿠바와 미국 사이의 거리는 약 145㎞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게릴라 부대를 이끈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타도한 1959년 이래 쿠바에선 사실상 시곗바늘이 멈춰섰다.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통치 아래 교육과 의료는 무료였지만 경제가 무너지고 빈곤이 확산됐으며, 쿠바인은 해외 여행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는 오랫동안 비판자들을 처벌하고 탄압했다. 쿠바 인권재단에 따르면 2013년 임의구금된 인권운동가가 6000명을 넘었다. 표현의 자유는 아예 없었고, 국가가 모든 공식 미디어를 소유했다. 정부는 블로거를 위협했고 언론인을 구금했다.
1982년 이래 쿠바는 미국 정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2013년 미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쿠바는 스페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대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미국이 수배한 탈주자들을 숨겨줬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서 쿠바인은 미국과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 지위를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화당은 그런 조치에 완강히 반대한다.
2008년 쿠바 정권은 피델 카스트로에게서 동생 라울로 넘어갔다. 지난 몇 년 동안 라울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쿠바인이 해외 여행을 더 쉽게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하고, 자동차와 주택 매매를 허용하고, 100여 가지 자영업을 합법화하고, 쿠바인의 국제호텔 숙박을 허용했다. 그동안 쿠바인의 고급 호텔 숙박이 불허된 것은 호텔에서 외국인용 화폐(CUC)만 받았고, 호텔이 정부가 마약과 매춘의 온상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라울의 개혁이 칭찬을 받긴 했지만 대다수 쿠바인의 경제적 현실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는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2000~2004년 미국 정부의 라틴아메리카 정보 관리를 지냈고 현재 아메리칸대학 라틴아메리카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인 풀턴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개혁이라고 하지만 열의가 없었고 걸핏하면 중단됐으며 국소적으로 이뤄졌을 뿐이다. 새로운 자본의 유입과 무역이 없으면 기회가 있다고 해도 그런 기회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없다.”
쿠바인의 월 평균 소득은 20달러(약 2만2000원)도 채 안 된다. 지난해 몇몇 의사의 경우 월급이 26달러에서 67달러로 올랐다고 알려졌다. 내가 들어가본 가전제품 상점에선 전자레인지 한 대가 72.60달러, 커피메이커가 30달러에 팔렸다. 내가 먹은 식사는 대부분 1인당 약 30달러였다.
이제 미국에서 쿠바로 연간 8000달러를 송금할 수 있게 됐다(지난해 12월 오바마 대통령의 관계 정상화 발표 전에는 2000달러가 송금 상한선이었다). 그러면서 흑백 인종 사이의 격차가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쿠바의 백인이 해외 친척의 재정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흑인의 2.5배다. 그만큼 백인이 사업을 시작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반면 시골에 사는 쿠바의 백인은 흑인처럼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암스트롱은 설명했다.
쿠바 인구는 1100만 명이다. 그중 다수는 미국-쿠바 관계의 해빙으로 혜택을 볼 듯하다. 상인, 농민, 해외 거주 친척의 송금을 받아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쿠바의 비공식 경제는 그 규모가 거대하다. 사회의 많은 부문이 거기서 기업가 정신을 연마할 수 있다. 화가 등 일부는 수십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수완이 아주 좋다. 그러나 성격 때문이든 당과 기관의 엄격한 감시 때문이든 바른 길만 걸어온 사람은 암시장을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은 출발이 약간 늦을 수 있다.”
패자는 언제 어디서나 잘 패하는 사람들이라고 암스트롱은 말했다. 학력이 낮고 나이가 많으며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쿠바의 관영 여행사 산크리스토발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일린 베르날(32)은 “변화는 언제나 어떤 사람에겐 좋고 어떤 사람에겐 나쁘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갖고 그 소득에 따라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누가 기뻐하지 않겠나. 고생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택시기사 라파엘은 아바나 시내를 통과하면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이름을 외쳤다. “저건 러시아제! 저 검은색 차는 쉐보레 1953년도 모델. 나도 과거 저런 차를 몇 대 몰았지요. 저기 녹색 차는 쉐보레 52년 모델이고 저건 머큐리 51년 모델이네요. 저건 네덜란드제 58년 모델이고… 저곳은 혁명 전엔 셸 주요소였죠.”
우리는 교외에 있는 달동네 파라가로 향했다. 차로 약 30분 거리였다. 시간을 떼우려고 라페엘에게 왜 의사를 그만뒀느냐고 물었다. “벌이가 좋지 않아서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라파엘은 의사로 월급 12~15달러를 받았다고 말했다(요즘 의사는 그 4배를 번다고 그는 강조했다). 하지만 택시를 몰면서 한 달에 약 200달러를 번다. “처음엔 의사 일이 그리웠지만 오랫동안 택시기사를 하다 보니…”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후안 카를로스가 지난해 7월에 치대를 졸업했어요.” 라파엘이 배다른 동생(24)을 두고 한 말이다. “후안은 날 위해 일주일에 이틀씩 일하고 하루 30달러를 벌었죠. 치과의사 월급보다 많아요. 후안은 미국에 가고 싶어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그가 미국에 가면 돈을 좀 부쳐 주려고 해요. 여기선 미래가 없거든요.”
우리는 조용한 거리에 차를 대고 나를 안내해주기로 한 아바나대학 심리학 교수인 산드라 소카 로자노(28)를 태웠다. 로자노는 역시 심리학자인 어머니, 은퇴한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한 번도 쿠바를 떠난 적이 없다고 로자노는 말했다.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내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떠나고 싶지 않아요.”
로자노는 대학에서 수업이 없으면 어린이와 청소년 암환자를 돕는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하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를 지키는 쿠바인처럼 월급은 쥐꼬리만하다(30달러). (암스트롱은 “모든 쿠바인은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 돈을 번다. 월급 30달러가 유일한 소득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로자노는 차를 사고 친구들과 살사춤을 추러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두 가지 다 그에겐 사치다. 동료들이 해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진다. “해외에 간 친구가 많은데 그들은 4개월만 지나면 차를 사요. 집도 있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가요. 우리 부모는 뼈 빠지게 일하느라 그런 여행은 꿈도 못 꿔요. 어머니는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를 구경할 수 없어요.”
우리는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버려진 주유소, 사람들이 바글대는 버스 정류장, 배도 없는 옛 항만을 지나쳤다. 로자노에게 가족을 제외하고 쿠바의 어떤 측면 때문에 떠나지 않는지 물었다. “사람과 장소죠. 물론 거리는 형편없고 거물은 낡아빠졌어요. 하지만 바다 내음이 너무 좋아요. 난 언제나 바다 근처에 살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냄새죠. 이곳은 태양도 달라요. 또 도움을 주고 무엇이든 함께 나눌 사람을 언제든 찾을 수 있어요.”
“저건 올즈모빌 1955년 모델!” 라파엘이 다시 자동차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루야노 동네를 통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관 계단에 앉아 있거나 보도에 서서 공동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리 위에는 ‘고마워요 피델!’이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갈수록 길이 험해졌다. 몇 차례 더 우회전 좌회전을 한 뒤 움푹 패인 곳이 많은 넓은 거리에 도착했다. 차는 다니지 않았고 군데군데 쓰레기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고 개들이 보도를 어슬렁거렸다. 서로 겹쳐진 작은 집 주변에 알루미늄판 담이 쳐졌다. 달동네 파라가였다. 관광객도 이곳은 찾지 않는다. 수돗물도 가끔씩 공급된다. 한 친구가 아바나 빈민촌 삶의 단면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후스티나 코르데로 메사(90)가 현관에서 주름진 야윈 손을 내게 내밀며 볼에 입을 맞췄다. 날염된 흰색 원피스, 짙은 녹색 양말, 검은 샌들 차림이었다. 흰머리를 아무렇게나 말아 올렸고 솜털 같은 하얀 눈썹이 눈꺼풀 위에 걸려 있었다.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한 메사가 소파와 의자를 가리켰다. 로자노, 마냥, 내가 앉았다. 좁은 거실이었다. 밝은 갈색 벽과 타일 바닥은 금이 가고 얼룩이 져 있었다. 한쪽 구석의 작은 테이블 위엔 조그만 크리스마스 트리와 대형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다른 테이블엔 피델 카스트로의 액자가 있었다.
메사는 쉰 목소리로 얼마 전 창문 넘어 들어온 도둑이 TV를 가져갔다고 말했다. 도둑을 잡았는지 묻자 메사는 그냥 씩 웃었다.
메사의 집은 작고 어둡고 파리가 들끓었다. 거실 뒤에는 나무 식탁과 냉장고를 갖춘 작은 주방이 있었다. 더 작은 부엌엔 임시 조리대 위에 우그러진 양동이, 컵, 사발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조리용 철판 부근에 닭뼈를 담은 접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조리기구 몇 개가 걸려 있었다. 천장은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낮았다. 부엌의 작은 문은 뒷골목으로 연결됐다. 메사는 그곳에서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한다.
“손자가 나와 함께 살려고 자기 집과 이 집을 합쳐 더 큰 집과 바꾸고 싶어하지만 잘 될지 모르겠다.” 60년 이상 이곳에서 산 메사가 말했다. 경찰이었던 남편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쿠바에 살고, 동생과 조카는 미국에 산다. “동생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 때문이었다.”
이제 미국의 쿠바 금수 조치가 해제됐기 때문에 파라가의 생활이 더 나아지리라 생각하는지 메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바뀐 건 없다. 매일 더 나빠진다. 물가가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난 귀도 눈도 어둡다. 난 진짜 아주 늙었다. 이미 볼 건 다 봤다.”
뉴욕으로 돌아간 뒤 로자노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로자노는 메사의 삶을 보는 게 힘들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메사는 쿠바인의 전형이다. 어려운 조건에서 살면서도 쿠바를 떠나려 하지 않고, 조국을 사랑하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가진 것이 없고 늙어도 독립적이며 가족을 끔찍이 생각한다. 난 그게 쿠바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늘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언제나 굴하지 않고 잘 모르는 사람도 도우려고 애쓴다.”
아바나의 도심 베다도는 파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쿠바계 미국인 사업가 우고 칸시오(50)는 베다도에서 서서히 미디어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상업, 미디어, 통신, 부동산, 여행 사업을 하는 푸에고 엔터프라이즈의 설립자 겸 CEO다. 몇 년 전 그와 아내는 미국인 약 40명과 함께 마이애미에서 아바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미국인 탑승객들이 쿠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쿠바는 군국주의 국가인가?” “거리에 기관총을 든 군인이 있을까?” “그들이 피델 카스트로를 헐뜯는 사람을 구타할까?”
칸시오 CEO는 이렇게 돌이켰다. “아내는 ‘쿠바가 어떤 나라인지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라’고 했다. 나도 화가 났다. 쿠바가 카스트로와 반체제 인사만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그들에게 다가가 쿠바에 관해 자세히 알려줬다.” 20분 뒤 그가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쿠바 안내책자를 만들어 아바나행 비행기 탑승객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뭐라도 해보자”고 아내가 말했다고 칸시오 CEO가 돌이켰다.
칸시오 CEO는 안내책자 대신 쿠바에 관한 최초의 이중언어 잡지 ‘온 쿠바(On Cuba)’를 창간해 미국과 쿠바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 웹사이트 방문자는 한 달에 60만~120만 명이다. 그와 함께 지난해 6월엔 자매지 ‘쿠바의 미술(Art On Cuba)’도 창간했다.
칸시오는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모니카 레티시아는 유명한 가수였고 아버지 미겔 칸시오는 1960년대 쿠바의 비틀스로 알려진 4인조 밴드 ‘로스 자피로스’를 공동 조직했다. 1980년 카스트로가 미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선언한 그 유명한 ‘마리엘 난민탈출 사건’으로 쿠바인 12만5000명이 작은 배 1700척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16세였던 칸시오는 어머니, 13세 여동생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그 얼마 전 그는 일류 고등학교에서 카스트로에 관한 농담을 하다가 퇴학당했다. 칸시오 CEO는 이렇게 돌이켰다. “어머니는 ‘이곳에선 네 미래가 없어. 우린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마이애미에 도착했지만 친척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그들은 오렌지볼 스타디움에 마련된 임시 수용소에서 3주를 지낸 뒤 사우스비치의 작은 단칸방으로 옮겼다. “3년 동안 어머니는 소파에서 주무셨고 나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어머니는 수년 동안 쿠바를 떠난 걸 후회했다.”
쿠바에서 칸시오의 아버지는 문화부 산하 기관에서 일했지만 가족을 떠나보냈다는 이유로 실직당했다. 그 후 거리 청소부로 일하다가 공사판에서 일했다. “나는 정장을 입은 유일한 공사장 일꾼”이라고 아버지가 편지에 썼다고 칸시오는 돌이켰다. 몇 년 뒤 아버지도 쿠바를 떠났다.
지금 칸시오 CEO는 미국, 특히 마이애미에서 쿠바 음악과 미술을 전파하는 문화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는 콘서트 약 140건, 뮤직 투어 30건을 기획했다. 그의 이력서는 쿠바-미국 문화전쟁의 입문서처럼 보인다. 1999년 칸시오는 유명한 쿠바 밴드 로스반반의 마이애미 콘서트를 기획했다. “우익 쿠바인들이 밖에서 달걀과 깡통을 던지는 동안 그들의 아들 딸은 안에서 춤을 췄다”고 칸시오는 돌이켰다.
칸시오는 영화 ‘자피로스, 푸른 광기’도 제작했다. 아버지가 만든 밴드 로스 자피로스의 부상을 소재로 한 영화로 쿠바계 미국인이 쿠바에서 찍은 사상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 영화는 1997년 아바나 영화제에 출품돼 호평을 받아 6개월 동안 아바나의 극장에서 상영됐다. 그 영화를 마이애미로 가져오자 수천 명이 극장 밖에서 상영 반대 시위를 벌였다. “어머니는 내가 더 자유롭고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나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칸시오 CEO는 말했다. “쿠바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다줬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진 일을 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막을 수 있나?”
미국-쿠바 관계가 변하면서 칸시오 CEO는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쿠바 건축과 지역 정보에 초점을 맞춘 부동산 잡지가 곧 발간될 예정이다. 그 외 여행 잡지와 웹사이트, 송금 서비스 사업도 시작할 생각이다. 미국의 대형 통신회사 두 곳과 제휴해 쿠바인에게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보급할 계획도 있다.
칸시오 CEO는 “쿠바계로서 미국의 쿠바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오랫동안 투쟁해왔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말했듯이 미국의 쿠바 정책은 비인도적이며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하는 모든 사업으로 과연 누가 혜택을 볼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심리학 교수 로자노와 메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미래가 어떨지 물었다.
“물론 연줄이 좋은 사람이 가장 먼저 혜택을 볼 것이다. 아주 긴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기가 달라졌다. 우리 잡지를 만드는 직원들에게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처음 우리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은 아주 다르다. 더 행복해졌다. 그들은 살 집도 다시 짓고 멕시코나 온두라스로 여행 가려고 돈 모을 생각도 한다.”
토요일 아바나에 있는 잡지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편집장 타히미 아르볼레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볼레야는 컴퓨터 몇 대가 둘러싼 책상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에선 G메일과 페이스북이 펼쳐져 있었다. 쿠바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웹사이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작동되는 컴퓨터도 거의 보지 못했다.
아르볼레야는 이렇게 말했다. “쿠바인과 미국인에게 쿠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주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중요하다. 쿠바인의 현실이 어떤지 정확한 정보를 줘야 한다. 미국에서 접하는 쿠바 정보는 양극화를 초래하지 않는가?”
아바나에서 보낸 마지막 밤 우리는 저녁식사에 로자노를 초대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은 듯했다. 친구들과 살사춤을 추러 가기로 돼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살사 클럽에 도착해서 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식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택시기사 라파엘이 우리를 아바나 미라마르 구역의 강가에 내려줬다. 웅장한 흰색 건물로 들어가는 통로 끝에 기도가 서 있었다. 마냥이 그와 이야기를 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곧 우리는 알멘다레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산물 식당 리오 마르로 들어갔다.
짙은 푸른색 차양이 쳐진 테라스의 긴 테이블에 앉았다. 주변 테이블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미국인, 프랑스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발코니의 밝은 조명이 맑은 잔과 아콰 파나 생수병을 비췄다. 로자노는 생수 맛이 너무 깨끗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블루치즈를 먹어본 적이 없다며 블루치즈 소스를 얹은 닭가슴살 요리를 주문했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 로자노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웨이터 한 명과 사진을 찍었다.
로자노는 나중에 내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적었다. “그 식당은 마치 마법의 세계 같았다.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로 옮겨 간 듯했다. 내 미래, 부모님, 가족, 조국이 생각났다. 하지만 보건과 교육 같은 공공시스템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우리 나라 경제의 현 상황에선 교육 분야에서 일하면 나 혼자선 그런 식당에 갈 수 없다. 다른 누군가 초대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로자노는 “쿠바에선 어디를 가나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덧붙였다. “빛과 그림자 중 어느 것을 보여줄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 둘 다를 보여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번역 이원기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마냥은 쿠바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그곳을 떠났다. 이후 스페인에 잠시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뉴욕에 살았다. 그와 아내 다라 메츠는 맨해튼 남서부 첼시에서 마냥메츠 화랑을 운영한다. 주로 해외 화가, 특히 쿠바 화가가 전문이다.
비행기 이륙 90분 전 우리는 2시간 전부터 줄을 늘어선 승객들을 느긋하게 지나쳐 탑승권 발행 카운터로 직행했다. 거기서 마냥은 직급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한 여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여성은 내 여권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 마냥은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마냥은 나를 아바나 항공의 마크 엘리아스 사장을 소개했다. 엘리아스 사장은 마이애미-쿠바 전세기의 경우 수년 전부터 긴 줄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탑승권을 받으려면 체크인 포인트를 서너 차례나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한 시간 반 안에 탑승을 완료할 수 있다.”
다행히 내 여권을 가져간 여성은 약 20분 뒤 다시 나타나 내게 직사각형 폴더를 건넸다. 탑승권, 돌아오는 비행기표, 여권, 쿠바 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맨 뒤에 휴지처럼 보이는 빛 바랜 청색 종이가 끼어 있었다. “그걸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 여성이 말했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 여성과 마냥이 거의 한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니까요.”
이륙 후 1시간도 채 안 돼 아바나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비행기 바퀴가 닿자마자 조종사가 기내 방송을 했다. “아바나에 도착해서 기쁘다면 박수를 치세요!” 객실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호텔에 짐을 풀자 저녁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하고 야윈 택시기사 라파엘(50)을 고용했다. 원래 의사였지만 4년 만에 그만두고 택시를 몬다고 했다. 그는 우리를 아바나 구시가의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광장 입구에 내려줬다. 서너 발짝을 걷자 택시기사 대여섯 명이 우리를 에워쌌다. 택시 필요해요? 미국인이세요? 어디 가세요? 나는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고는 밝은 조명 아래 사람들로 가득한 넓은 조약돌 광장으로 향했다.
유적지와 건축을 구경하려고 관광객이 밤낮으로 찾는 곳이다. 길 건너 아바나의 해변도로 말레콘이 보였다. 그곳 역시 밤낮으로 젊은이들이 바글거린다. 한 달 월급으로 팔라다르(paladar, 자영업 식당으로 정부가 보조하고 영업과 임금을 결정하는 수많은 관영 식당과 구분된다)에서 한끼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 나라 쿠바에서 말레콘은 주민에게 뭔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광장을 가로질러 한 건물의 아담한 로비에 들어섰다. 문 옆의 경비원을 지나 안쪽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마냥은 스페인어로 그 여성과 이야기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설득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여성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냥, 그의 친구 몇 명과 함께 작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군가 마냥에게 무슨 사건에 관해 물었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천장을 가리켰다. 누군가 엿들을지 모른다는 제스처였다. 우리 모두 입을 다물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2층짜리 고급 아파트의 옥상이 나타났다. 아바나 구시가가 내려다보였다. 마치 마이애미 일류호텔인 듯했다. 세련된 하얀 의자와 소파, 우아한 꽃꽂이, 모든 술과 음료가 완비된 바. 한쪽에선 인근 건물 벽면을 스크린 삼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30분 뒤 손님들이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갔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넓고 호화로운 거실이 나타났다. 두꺼운 벨벳으로 만든 대형 해먹, 공들여 장식한 바닥 카펫. 돌출 촛대와 미술품으로 장식된 벽면 앞엔 거대한 화초가 서 있었다. 옆 방에는 당구 테이블이 놓여 있고 뷔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복도 아래에는 자연 그대로인 듯한 목욕탕이 마련돼 있었다. 샤워기 옆의 선반에 놓인 뭉툭한 조각상은 영락없는 남근의 형태였다.
손님들은 모두 옷을 잘 차려 입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은 가운, 젊은 모델은 몸에 딱 붙는 드레스, 남성은 각 세운 정장과 모자, 반짝이는 구두 차림. 이곳엔 나이도 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나이 든 손님들이 젊은 무리와 어울렸고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바로 쿠바의 지식인과 문화 엘리트였다.
쿠쿠 디아만테스(유명한 쿠바계 미국인 가수 겸 배우)와 남편 안드레스 레빈(베네수엘라 태생으로 줄리아드 음대를 나온 미국인 음반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을 만났다. 레빈은 지난해 11월 TEDxHavana(아바나에서 열린 기술, 오락, 디자인 강연회)를 처음 개최했다. 그는 디아만테스와 함께 퓨전 밴드 예르바 부에나를 만들어 2003년 데뷔 앨범으로 그래미상 후보작에 올랐다. 레빈은 유명한 쿠바 배우와 음악가들을 소개해줬다. 심지어 카스트로 가문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담배와 시가 연기가 가득했다.
1960년대 초 시작된 미국의 금수 조치로 미국인의 쿠바 투자가 금지됐다. 그러나 미술품, 책, 음악은 금수 조치에서 면제돼 예술가들은 정부의 감시 아래서 약간의 돈을 벌고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부동산 재벌도 헤지펀드 큰손도 없는 쿠바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1%’ 부유층을 형성했다.
사실 그건 대다수 관광객이 보는 아바나가 아니다. 대다수 쿠바인이 아는 아바나도 아니다. 그런 사교모임에 관해 글을 쓰는 것조차 쿠바 정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보낸 나머지 시간에 대다수 외국인이 마음 속에 그리는 아바나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테일핀(날개 모양의 자동차 꼬리 부분)이 녹슨 고색창연한 쉐보레 컨버터블, 건물 벽에 빛 바랜 붉은 색 글자로 ‘혁명은 무적’이라고 적은 선전 포스터, 허물어져 가는 저택과 부서질 듯한 자전거 택시, 피한객(겨울철 추위를 피해 쿠바에 온 노인 관광객)들이 가득한 시가 상점, 관광객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디서 왔는지 묻고 뉴욕에서 왔다고 하면 “뉴욕 양키!”라고 외치는 아이들.
그처럼 수 세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쿠바지만 확실히 달라진 면도 눈에 띄었다. 아바나 곳곳에 있는 건설공사 현장의 기중기들. 거의 매주 생겨나는 새로운 팔라다르 식당과 작은 피자 가게. 관광객으로 가득한 호텔. 내가 묵은 멜리아 코히바에선 뉴욕시 거리를 걸으며 듣는 것보다 더 많은 미국식 영어가 들렸다.
쿠바가 50여 년 만에 처음 문호를 개방하면서 희망과 투지, 돈이 공중에 떠다니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가 될 수 있다. 부동산, 건설, 통신, 관광 등. 자전거·자동차 수리점부터 배관공사, 식당, 택시까지 소규모 비즈니스가 전부 성장할 태세다. 2012년 프리덤하우스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쿠바인이 인구의 5%에 불과한데도 (쿠바인 중 23%는 정부가 허가한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최근 쿠바 진출을 발표했다. 지난 2월 코넌 오브라이언은 1962년 이래 쿠바에서 심야 TV토크쇼를 찍은 첫 미국 연예인이 됐다. 그 다음은 어떤 대형 미국 브랜드가 진출할까? 홈데포? 베스트바이? 맥도널드? 로열 캐리비언 인터내셔널? 도널드 트럼프?
잠들어 있던 쿠바에 갑자기 잠재력이 넘치는 듯하다. 과도 정부가 억누르곤 있지만 쿠바인은 근면하며 희망에 차 있다. 그 상황에서 과연 누가 수혜자가 되고 누가 뒤처질까? 쿠바의 미래는 새로운 자메이카일까? 체게바라 T셔츠와 카스트로식 군모 차림의 봄철 휴가객과 미혼 남녀가 가득한 곳 말이다.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일까 최악의 시나리오일까?
미술이 불러온 변화
46년 전 마냥의 어머니(미술 교수)와 아버지(담배공장 회계사)는 자동차, 가구, 보석 등 아바나에서 소유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당시에도 마냥은 수집가였다. 야구 카드, 우표, 동전, 스티커를 모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미술을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쿠바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냥은 결국 미술품 거래상이 됐다.
마냥은 쿠바 화가들의 작품 전시로 유명하다. 인종, 종교,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뿌리를 탐구하는 화가 로베르토 디아고, 쿠바 출신의 전시 작가로 구성된 현대미술 그룹 로스 카르핀테로스의 창립 회원인 알렉산드레 아레체아, 201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쿠바 대표 화가 글렌다 레온 등.
1997년 마냥은 쿠바를 다시 찾았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시작된 초유의 경제위기(쿠바인은 ‘특별한 시기’라고 부른다)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교통, 식량, 전기, 자동차, 교체 부품, 치약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호화롭던 주택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화가들에게 빠진 것은 그 어려운 시기에 그들이 아주 특별한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제대로 된 물감도 없었다. 금속, 천, 자루걸레 등 닥치는 대로 캔버스로 사용했다. 그들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 미국 수집가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즘 마냥은 쿠바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논란 많은 미술 행사를 주최한다. 2009년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아바나를 방문한 첼시’ 전시회가 대표적이다. 혁명 이래 쿠바에서 열린 미국 화가들의 첫 전시회였다. 제10회 아바나 비엔날레의 일환이었다. ‘비엔날레’라고 하지만 2000년부터 3년에 한 번씩 열린다. 마냥은 “그 행사가 쿠바-미국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미술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쿠바인과 쿠바계 미국인 몇 명이 드러내지 않고 문화대사로 활동했다. 미술에 초점을 맞춰 양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중 한 명이 마냥이다. “아바나는 건재하다”고 그는 말했다. “화가들이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들은 쿠바에 남아서 계속 활동한다. 미술과 문화를 통해 일어난 변화가 다른 분야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바나에서 이틀째 우리는 쿠바인 큐레이터 후아니토 델가도를 찾아갔다. 그의 아파트에서 말레콘이 내려다 보였다. 그는 “좋은 작품을 만들면 정치적인 문제가 숱하게 제기된다”고 말했다. “정치를 미술로 만들지 말고 미술을 정치화해야 한다. 그러면 대화가 이뤄진다.”
2012년 델가도는 말레콘을 11회 아바나 비엔날레의 전시회장으로 활용했다. 아를레스 델 리오의 ‘날아가다’라는 작품은 방파제 끝자락에 쳐진 대형 직사각형 철책선에서 비행기 그림자 모양을 잘라낸 것이었다. 라첼 발데스 카메요는 강물을 마주보는 대형 거울을 설치하고는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 1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미술이 사회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인다”고 델가도가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 문화계를 도와주면 좋겠다. 책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고 화가들이 작품을 알릴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해주기 바란다. 또 아바나의 극장이 관객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
쿠바와 미국 사이의 거리는 약 145㎞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게릴라 부대를 이끈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타도한 1959년 이래 쿠바에선 사실상 시곗바늘이 멈춰섰다.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통치 아래 교육과 의료는 무료였지만 경제가 무너지고 빈곤이 확산됐으며, 쿠바인은 해외 여행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는 오랫동안 비판자들을 처벌하고 탄압했다. 쿠바 인권재단에 따르면 2013년 임의구금된 인권운동가가 6000명을 넘었다. 표현의 자유는 아예 없었고, 국가가 모든 공식 미디어를 소유했다. 정부는 블로거를 위협했고 언론인을 구금했다.
1982년 이래 쿠바는 미국 정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2013년 미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쿠바는 스페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대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미국이 수배한 탈주자들을 숨겨줬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서 쿠바인은 미국과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 지위를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화당은 그런 조치에 완강히 반대한다.
2008년 쿠바 정권은 피델 카스트로에게서 동생 라울로 넘어갔다. 지난 몇 년 동안 라울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쿠바인이 해외 여행을 더 쉽게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하고, 자동차와 주택 매매를 허용하고, 100여 가지 자영업을 합법화하고, 쿠바인의 국제호텔 숙박을 허용했다. 그동안 쿠바인의 고급 호텔 숙박이 불허된 것은 호텔에서 외국인용 화폐(CUC)만 받았고, 호텔이 정부가 마약과 매춘의 온상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라울의 개혁이 칭찬을 받긴 했지만 대다수 쿠바인의 경제적 현실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는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미진한 개혁과 지하경제
쿠바인의 월 평균 소득은 20달러(약 2만2000원)도 채 안 된다. 지난해 몇몇 의사의 경우 월급이 26달러에서 67달러로 올랐다고 알려졌다. 내가 들어가본 가전제품 상점에선 전자레인지 한 대가 72.60달러, 커피메이커가 30달러에 팔렸다. 내가 먹은 식사는 대부분 1인당 약 30달러였다.
이제 미국에서 쿠바로 연간 8000달러를 송금할 수 있게 됐다(지난해 12월 오바마 대통령의 관계 정상화 발표 전에는 2000달러가 송금 상한선이었다). 그러면서 흑백 인종 사이의 격차가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쿠바의 백인이 해외 친척의 재정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흑인의 2.5배다. 그만큼 백인이 사업을 시작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반면 시골에 사는 쿠바의 백인은 흑인처럼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암스트롱은 설명했다.
쿠바 인구는 1100만 명이다. 그중 다수는 미국-쿠바 관계의 해빙으로 혜택을 볼 듯하다. 상인, 농민, 해외 거주 친척의 송금을 받아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쿠바의 비공식 경제는 그 규모가 거대하다. 사회의 많은 부문이 거기서 기업가 정신을 연마할 수 있다. 화가 등 일부는 수십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수완이 아주 좋다. 그러나 성격 때문이든 당과 기관의 엄격한 감시 때문이든 바른 길만 걸어온 사람은 암시장을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은 출발이 약간 늦을 수 있다.”
패자는 언제 어디서나 잘 패하는 사람들이라고 암스트롱은 말했다. 학력이 낮고 나이가 많으며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향수를 일으키는 바다 내음
택시기사 라파엘은 아바나 시내를 통과하면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이름을 외쳤다. “저건 러시아제! 저 검은색 차는 쉐보레 1953년도 모델. 나도 과거 저런 차를 몇 대 몰았지요. 저기 녹색 차는 쉐보레 52년 모델이고 저건 머큐리 51년 모델이네요. 저건 네덜란드제 58년 모델이고… 저곳은 혁명 전엔 셸 주요소였죠.”
우리는 교외에 있는 달동네 파라가로 향했다. 차로 약 30분 거리였다. 시간을 떼우려고 라페엘에게 왜 의사를 그만뒀느냐고 물었다. “벌이가 좋지 않아서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라파엘은 의사로 월급 12~15달러를 받았다고 말했다(요즘 의사는 그 4배를 번다고 그는 강조했다). 하지만 택시를 몰면서 한 달에 약 200달러를 번다. “처음엔 의사 일이 그리웠지만 오랫동안 택시기사를 하다 보니…”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후안 카를로스가 지난해 7월에 치대를 졸업했어요.” 라파엘이 배다른 동생(24)을 두고 한 말이다. “후안은 날 위해 일주일에 이틀씩 일하고 하루 30달러를 벌었죠. 치과의사 월급보다 많아요. 후안은 미국에 가고 싶어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그가 미국에 가면 돈을 좀 부쳐 주려고 해요. 여기선 미래가 없거든요.”
우리는 조용한 거리에 차를 대고 나를 안내해주기로 한 아바나대학 심리학 교수인 산드라 소카 로자노(28)를 태웠다. 로자노는 역시 심리학자인 어머니, 은퇴한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한 번도 쿠바를 떠난 적이 없다고 로자노는 말했다.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내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떠나고 싶지 않아요.”
로자노는 대학에서 수업이 없으면 어린이와 청소년 암환자를 돕는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하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를 지키는 쿠바인처럼 월급은 쥐꼬리만하다(30달러). (암스트롱은 “모든 쿠바인은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 돈을 번다. 월급 30달러가 유일한 소득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로자노는 차를 사고 친구들과 살사춤을 추러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두 가지 다 그에겐 사치다. 동료들이 해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진다. “해외에 간 친구가 많은데 그들은 4개월만 지나면 차를 사요. 집도 있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가요. 우리 부모는 뼈 빠지게 일하느라 그런 여행은 꿈도 못 꿔요. 어머니는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를 구경할 수 없어요.”
우리는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버려진 주유소, 사람들이 바글대는 버스 정류장, 배도 없는 옛 항만을 지나쳤다. 로자노에게 가족을 제외하고 쿠바의 어떤 측면 때문에 떠나지 않는지 물었다. “사람과 장소죠. 물론 거리는 형편없고 거물은 낡아빠졌어요. 하지만 바다 내음이 너무 좋아요. 난 언제나 바다 근처에 살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냄새죠. 이곳은 태양도 달라요. 또 도움을 주고 무엇이든 함께 나눌 사람을 언제든 찾을 수 있어요.”
“저건 올즈모빌 1955년 모델!” 라파엘이 다시 자동차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루야노 동네를 통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관 계단에 앉아 있거나 보도에 서서 공동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리 위에는 ‘고마워요 피델!’이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갈수록 길이 험해졌다. 몇 차례 더 우회전 좌회전을 한 뒤 움푹 패인 곳이 많은 넓은 거리에 도착했다. 차는 다니지 않았고 군데군데 쓰레기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고 개들이 보도를 어슬렁거렸다. 서로 겹쳐진 작은 집 주변에 알루미늄판 담이 쳐졌다. 달동네 파라가였다. 관광객도 이곳은 찾지 않는다. 수돗물도 가끔씩 공급된다. 한 친구가 아바나 빈민촌 삶의 단면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후스티나 코르데로 메사(90)가 현관에서 주름진 야윈 손을 내게 내밀며 볼에 입을 맞췄다. 날염된 흰색 원피스, 짙은 녹색 양말, 검은 샌들 차림이었다. 흰머리를 아무렇게나 말아 올렸고 솜털 같은 하얀 눈썹이 눈꺼풀 위에 걸려 있었다.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한 메사가 소파와 의자를 가리켰다. 로자노, 마냥, 내가 앉았다. 좁은 거실이었다. 밝은 갈색 벽과 타일 바닥은 금이 가고 얼룩이 져 있었다. 한쪽 구석의 작은 테이블 위엔 조그만 크리스마스 트리와 대형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다른 테이블엔 피델 카스트로의 액자가 있었다.
메사는 쉰 목소리로 얼마 전 창문 넘어 들어온 도둑이 TV를 가져갔다고 말했다. 도둑을 잡았는지 묻자 메사는 그냥 씩 웃었다.
메사의 집은 작고 어둡고 파리가 들끓었다. 거실 뒤에는 나무 식탁과 냉장고를 갖춘 작은 주방이 있었다. 더 작은 부엌엔 임시 조리대 위에 우그러진 양동이, 컵, 사발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조리용 철판 부근에 닭뼈를 담은 접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조리기구 몇 개가 걸려 있었다. 천장은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낮았다. 부엌의 작은 문은 뒷골목으로 연결됐다. 메사는 그곳에서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한다.
“손자가 나와 함께 살려고 자기 집과 이 집을 합쳐 더 큰 집과 바꾸고 싶어하지만 잘 될지 모르겠다.” 60년 이상 이곳에서 산 메사가 말했다. 경찰이었던 남편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쿠바에 살고, 동생과 조카는 미국에 산다. “동생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 때문이었다.”
이제 미국의 쿠바 금수 조치가 해제됐기 때문에 파라가의 생활이 더 나아지리라 생각하는지 메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바뀐 건 없다. 매일 더 나빠진다. 물가가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난 귀도 눈도 어둡다. 난 진짜 아주 늙었다. 이미 볼 건 다 봤다.”
뉴욕으로 돌아간 뒤 로자노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로자노는 메사의 삶을 보는 게 힘들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메사는 쿠바인의 전형이다. 어려운 조건에서 살면서도 쿠바를 떠나려 하지 않고, 조국을 사랑하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가진 것이 없고 늙어도 독립적이며 가족을 끔찍이 생각한다. 난 그게 쿠바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늘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언제나 굴하지 않고 잘 모르는 사람도 도우려고 애쓴다.”
아바나의 도심 베다도는 파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쿠바계 미국인 사업가 우고 칸시오(50)는 베다도에서 서서히 미디어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상업, 미디어, 통신, 부동산, 여행 사업을 하는 푸에고 엔터프라이즈의 설립자 겸 CEO다. 몇 년 전 그와 아내는 미국인 약 40명과 함께 마이애미에서 아바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미국인 탑승객들이 쿠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쿠바는 군국주의 국가인가?” “거리에 기관총을 든 군인이 있을까?” “그들이 피델 카스트로를 헐뜯는 사람을 구타할까?”
칸시오 CEO는 이렇게 돌이켰다. “아내는 ‘쿠바가 어떤 나라인지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라’고 했다. 나도 화가 났다. 쿠바가 카스트로와 반체제 인사만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그들에게 다가가 쿠바에 관해 자세히 알려줬다.” 20분 뒤 그가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쿠바 안내책자를 만들어 아바나행 비행기 탑승객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뭐라도 해보자”고 아내가 말했다고 칸시오 CEO가 돌이켰다.
칸시오 CEO는 안내책자 대신 쿠바에 관한 최초의 이중언어 잡지 ‘온 쿠바(On Cuba)’를 창간해 미국과 쿠바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 웹사이트 방문자는 한 달에 60만~120만 명이다. 그와 함께 지난해 6월엔 자매지 ‘쿠바의 미술(Art On Cuba)’도 창간했다.
칸시오는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모니카 레티시아는 유명한 가수였고 아버지 미겔 칸시오는 1960년대 쿠바의 비틀스로 알려진 4인조 밴드 ‘로스 자피로스’를 공동 조직했다. 1980년 카스트로가 미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선언한 그 유명한 ‘마리엘 난민탈출 사건’으로 쿠바인 12만5000명이 작은 배 1700척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16세였던 칸시오는 어머니, 13세 여동생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그 얼마 전 그는 일류 고등학교에서 카스트로에 관한 농담을 하다가 퇴학당했다. 칸시오 CEO는 이렇게 돌이켰다. “어머니는 ‘이곳에선 네 미래가 없어. 우린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마이애미에 도착했지만 친척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그들은 오렌지볼 스타디움에 마련된 임시 수용소에서 3주를 지낸 뒤 사우스비치의 작은 단칸방으로 옮겼다. “3년 동안 어머니는 소파에서 주무셨고 나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어머니는 수년 동안 쿠바를 떠난 걸 후회했다.”
쿠바에서 칸시오의 아버지는 문화부 산하 기관에서 일했지만 가족을 떠나보냈다는 이유로 실직당했다. 그 후 거리 청소부로 일하다가 공사판에서 일했다. “나는 정장을 입은 유일한 공사장 일꾼”이라고 아버지가 편지에 썼다고 칸시오는 돌이켰다. 몇 년 뒤 아버지도 쿠바를 떠났다.
지금 칸시오 CEO는 미국, 특히 마이애미에서 쿠바 음악과 미술을 전파하는 문화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는 콘서트 약 140건, 뮤직 투어 30건을 기획했다. 그의 이력서는 쿠바-미국 문화전쟁의 입문서처럼 보인다. 1999년 칸시오는 유명한 쿠바 밴드 로스반반의 마이애미 콘서트를 기획했다. “우익 쿠바인들이 밖에서 달걀과 깡통을 던지는 동안 그들의 아들 딸은 안에서 춤을 췄다”고 칸시오는 돌이켰다.
칸시오는 영화 ‘자피로스, 푸른 광기’도 제작했다. 아버지가 만든 밴드 로스 자피로스의 부상을 소재로 한 영화로 쿠바계 미국인이 쿠바에서 찍은 사상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 영화는 1997년 아바나 영화제에 출품돼 호평을 받아 6개월 동안 아바나의 극장에서 상영됐다. 그 영화를 마이애미로 가져오자 수천 명이 극장 밖에서 상영 반대 시위를 벌였다. “어머니는 내가 더 자유롭고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나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칸시오 CEO는 말했다. “쿠바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다줬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진 일을 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막을 수 있나?”
미국-쿠바 관계가 변하면서 칸시오 CEO는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쿠바 건축과 지역 정보에 초점을 맞춘 부동산 잡지가 곧 발간될 예정이다. 그 외 여행 잡지와 웹사이트, 송금 서비스 사업도 시작할 생각이다. 미국의 대형 통신회사 두 곳과 제휴해 쿠바인에게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보급할 계획도 있다.
칸시오 CEO는 “쿠바계로서 미국의 쿠바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오랫동안 투쟁해왔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말했듯이 미국의 쿠바 정책은 비인도적이며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하는 모든 사업으로 과연 누가 혜택을 볼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심리학 교수 로자노와 메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미래가 어떨지 물었다.
“물론 연줄이 좋은 사람이 가장 먼저 혜택을 볼 것이다. 아주 긴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기가 달라졌다. 우리 잡지를 만드는 직원들에게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처음 우리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은 아주 다르다. 더 행복해졌다. 그들은 살 집도 다시 짓고 멕시코나 온두라스로 여행 가려고 돈 모을 생각도 한다.”
토요일 아바나에 있는 잡지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편집장 타히미 아르볼레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볼레야는 컴퓨터 몇 대가 둘러싼 책상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에선 G메일과 페이스북이 펼쳐져 있었다. 쿠바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웹사이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작동되는 컴퓨터도 거의 보지 못했다.
아르볼레야는 이렇게 말했다. “쿠바인과 미국인에게 쿠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주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중요하다. 쿠바인의 현실이 어떤지 정확한 정보를 줘야 한다. 미국에서 접하는 쿠바 정보는 양극화를 초래하지 않는가?”
아바나에서 보낸 마지막 밤 우리는 저녁식사에 로자노를 초대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은 듯했다. 친구들과 살사춤을 추러 가기로 돼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살사 클럽에 도착해서 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식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택시기사 라파엘이 우리를 아바나 미라마르 구역의 강가에 내려줬다. 웅장한 흰색 건물로 들어가는 통로 끝에 기도가 서 있었다. 마냥이 그와 이야기를 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곧 우리는 알멘다레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산물 식당 리오 마르로 들어갔다.
짙은 푸른색 차양이 쳐진 테라스의 긴 테이블에 앉았다. 주변 테이블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미국인, 프랑스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발코니의 밝은 조명이 맑은 잔과 아콰 파나 생수병을 비췄다. 로자노는 생수 맛이 너무 깨끗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블루치즈를 먹어본 적이 없다며 블루치즈 소스를 얹은 닭가슴살 요리를 주문했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 로자노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웨이터 한 명과 사진을 찍었다.
로자노는 나중에 내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적었다. “그 식당은 마치 마법의 세계 같았다.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로 옮겨 간 듯했다. 내 미래, 부모님, 가족, 조국이 생각났다. 하지만 보건과 교육 같은 공공시스템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우리 나라 경제의 현 상황에선 교육 분야에서 일하면 나 혼자선 그런 식당에 갈 수 없다. 다른 누군가 초대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로자노는 “쿠바에선 어디를 가나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덧붙였다. “빛과 그림자 중 어느 것을 보여줄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 둘 다를 보여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번역 이원기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코오롱 ‘인보사 사태’ 이웅열 명예회장 1심 무죄
2‘코인 과세유예·상속세 완화’ 물 건너가나…기재위 합의 불발
3최상목 “야당 일방적 감액예산…결국 국민 피해로”
4日유니클로 회장 솔직 발언에…中서 불매운동 조짐
5최태원은 ‘한국의 젠슨 황’…AI 물결 탄 SK하이닉스 “우연 아닌 선택”
6서울지하철 MZ노조도 내달 6일 파업 예고…“임금 인상·신규 채용해 달라”
7인천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억 준다”…출생아 증가율 1위 등극
8경기둔화 우려에 ‘금리 인하’ 효과 ‘반짝’…반도체 제재 우려↑
9얼어붙은 부동산 시장…기준금리 인하에도 한동안 ‘겨울바람’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