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패권의 무게중심이 반도체에서 전력으로 옮겨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4년 약 415테라와트시(TWh)였던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늘어난다. 일본 한 해 전력 소비에 맞먹는 규모다. 데이터센터 전력 가운데 AI 몫은 현재 5~15%에서 2030년 35~50%로 뛴다. 전통 데이터센터가 10~25메가와트(MW)였다면 하이퍼스케일 AI 팜은 단일 사이트당 100MW를 넘는다. 기업의 AI 경쟁력은 파라미터 수가 아니라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값싸게 확보하느냐에서 갈린다. 모델 성능을 끌어올리는 한 단위의 추가 학습이 수십 MW의 추가 계약 전력을 요구한다.각국은 입법에서 먼저 움직였다. 미국 하원은 2025년 12월 AI 인프라 인허가 간소화 법안(SPEED Act)을 통과시켰다. 상원에서는 톰 코튼 의원의 ‘DATA Act 2026’이 AI 데이터센터에 연방 전력 규제를 우회한 오프그리드 자체 조달 경로를 제시한다. 반대편에서는 호울리·블루멘털 의원의 ‘GRID Act’가 데이터센터 비용이 가정 전기요금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차단한다. 더빈 의원의 ‘Data Center Water and Energy Transparency Act’(2026-03-25 발의)는 에너지·용수 소비 공시를 의무화한다. 유럽연합(EU)는 한층 엄격하다. AI법으로 범용 AI 모델의 에너지 소비 문서화를 의무화했고 개정 에너지효율지침(EED)과 위임규정 2024/1364로 데이터센터 공통 등급제와 연례 보고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2026년 2분기에는 데이터센터 최소 성능 기준 패키지 채택이 예고돼 있다. 입법 방향은 나뉜다. 미국은 속도와 예외를, EU는 공시와 표준을 앞세운다. 그 중간 어디에도 한국 기업은 진출 조건을 맞춰야 한다.한국의 이중 입법, 그 허술한 연결한국은 두 갈래의 제도 움직임이 겹친다. 하나는 지난 4월 6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국무회의에 보고한 ‘에너지 대전환 추진계획’이다. ▲2030년 재생에너지 100기가와트(GW)·발전비중 20% 이상 ▲2040년 석탄발전 60기 단계적 폐지 ▲수소환원제철 상용화 ▲분산·양방향 전력망 ▲지역별·시간대별 요금제 ▲HVDC 융통선로 구축이 골자다. 다른 하나는 22대 국회에 계류돼 있던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관련 법률안 6건이 4월 14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일괄 ‘대안반영폐기’돼 통합 대안으로 수렴한 흐름이다. 공급(에너지)과 수요(데이터센터) 양쪽에서 입법이 맞물리는 드문 국면이다. 다만 두 제도를 잇는 연결부가 허술하면 어느 쪽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재생 대전환이 공급을 늘려도 수요 측 AI 팜이 수도권에 쏠리면 송배전과 요금 체계가 먼저 무너진다. 통합 대안의 세부 조문이 분산 입지와 어떻게 접속하느냐가 남은 쟁점이다.정부가 보강할 정책은 크게 다섯 갈래다. 먼저 재생·원전·SMR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 공급이 필요하다. 재생 100GW 목표는 유지하되, 24시간 고부하가 특징인 AI 팜에는 무탄소 기저전원(CFE) 요건을 충족하는 SMR과 대형 원전이 병행돼야 한다. 다음은 송배전 병목 해소다. 국가 기간전력망 특별법과 서해안 HVDC 융통선로를 조기 가동하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 모델을 표준화해 AI 팜 단지에 적용해야 한다. 전력·용수·부지를 묶은 통합 입지제도 미뤄서는 안 된다. 미국이 연방 토지를 풀고 EU가 등급제로 묶는 이유는 같다. 전력·냉각수·통신이 한 묶음일 때 단지 단위 투자가 성립한다. 요금 설계도 더 정교해져야 한다. 지역별·시간대별 요금제는 방향이 옳다. 대규모 수요자에게는 장기고정 전력구매계약(PPA) 우선순위를 부여해 자본비용을 낮춰야 한다. 마지막은 국제 정합성이다. EU 데이터센터 등급제와 AI법 공시 의무, 미국 더빈 법안에 맞춰 한국도 에너지·용수 보고 체계를 선제적으로 표준화해야 수출과 글로벌 로케이션 경쟁에서 불이익을 피한다. 지표와 측정 방법을 EU 위임규정 수준으로 먼저 맞춰두는 것이 사후 대응보다 싸게 먹힌다.기업이 다시 짜야 할 전략기업의 전략은 한층 날카로워져야 한다. 전력은 이제 재무 리스크다. 장기 PPA와 RE100 조달을 비용이 아닌 헤지 수단으로 내재화하고, 원전 인접지와 재생 풍부 지역으로 입지 포트폴리오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 전력 내재화도 선택지에 들어온다. 자체 SMR 파트너십, 연료전지·가스 하이브리드, 대용량 ESS를 결합한 마이크로그리드는 오프그리드 법제화 흐름과 맞물려 가치가 커진다. 입지 다변화도 과제다. 수도권 전력 여유가 고갈되는 가운데 북유럽·중동·동남아의 저렴하고 청정한 전력 허브와 국내 거점을 이중화해 지정학·전력 리스크를 동시에 분산해야 한다. AI 자체의 에너지 효율도 경쟁력이다. 모델 경량화, 액침 냉각, 폐열 재활용, 전력사용효율(PUE) 1.2 이하 설계는 진입 조건이 되어간다. 공시 대응은 마지막 과제다. EU 등급제와 미국 공시 법안, 국내 ESG 공시가 수렴하는 만큼, 에너지·용수 데이터 관리 체계를 갖춘 기업이 2~3년 뒤 자본조달과 글로벌 고객 계약에서 앞선다. 공시 대응은 IR 문구가 아니라 설비 투자 의사결정의 출발점이다. 보고 체계가 없는 기업은 EU 계약 입찰 테이블에 앉지 못한다.‘AI 전력 전쟁’은 반도체 전쟁의 후속편이 아니다.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새로운 병목을 둘러싼 각축이다. 전력을 자국 내에 안정적으로 묶어둔 나라가 AI 기업의 투자처를 결정하고, 그 결정이 데이터·모델·응용 서비스까지 연쇄적으로 끌어당긴다. 재생 대전환과 AI 특별법이라는 두 제도를 ‘전력 중심 산업정책’으로 엮어낼 때, 한국은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선발주자 프리미엄으로 되돌릴 기회를 얻는다. 공급·입지·요금·공시, 네 축을 같은 설계도 위에 올려야 한다. 이 시점을 놓치면, 제조업 공동화를 넘어 ‘AI 공동화’가 다음 과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