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0대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3)현대자동차그룹
한국 10대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3)현대자동차그룹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특별기획 ‘한국 10대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6월호는 현대가의 적통을 잇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의 기업가정신을 게재한다. 2015년은 굴지의 현대가를 일군 기업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탄생 100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에 정주영 창업주-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으로 이어지는 기업가정신을 조명했다. 포브스코리아의 이번 기획이 국내외 기업인들과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기획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올해는 아산(峨山) 정주영(1915~2001)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전 세계인이 방문하는 ‘아산 정주영닷컴’에는 아산의 기업가정신을 도전, 창의, 희망이라는 3가지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현대가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해온 경영사학자들도 아산이 보여준 기업가정신의 첫째가는 덕목으로 도전정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찍이 송자(79) 전 연세대 총장은 아산을 두고 ‘자본주의 교실의 최우등생’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미국이 포드, 카네기, 록펠러를 내세워 그들의 자본주의를 이끌어간다면 우리도 아산 정주영을 앞세우고 우리의 자본주의를 성숙시켜 나갈 수 있다”며 아산을 나라의 지도자로 극찬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첫 번째로 하는 것은 위험부담을 과감히 짊어지고 도전해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실제 아산이 창업한 자동차산업이 그렇다. 아산은 자동차산업의 토대가 전무했던 한국에서 자동차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 하나로 자동차 수리 공장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해 사업경험을 쌓은 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그 뒤를 이어 아산의 아들 정몽구 회장이 지금의 세계 5위의 자동차생산 대국을 일궈냈다. ‘하면 된다’는 캔두이즘(can-doism)과 도전정신을 몸소 보여준 사례다.
미국의 저술가 노만 필(Norman Vincent Peale)은 “성공은 신념의 산물이며, 신념을 가진 사람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산 정주영이 바로 그 산 증인이다.
현대가 사람들에 따르면, 생전의 아산은 성장기 때 주위 사람들에게 “큰물에 나가야 커다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돈 벌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 같은 서울로의 탈출을 4번씩이나 시도했다. 그가 난생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쌀가게였던 복흥상회의 배달원 자리였다.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한 자세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그 가게를 물려받는 수완을 발휘한다. 이후 잘 알려진 것처럼 뚝심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지금의 현대가를 창업했다. 아버지가 소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한 그가 소떼 1000마리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거쳐 고향을 찾은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아산의 기업가정신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례가 바로 “해봤어?”로 상징되는 도전정신이다. 현대가 사람들에 따르면, 아산은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성이 낙천주의자였던 그는 “안 된다”거나 “어렵다”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했다.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과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신격호 회장이 아산과 골프 약속을 한 날, 공교롭게도 눈이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많이 왔다. 신 회장은 “골프는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아산이 이미 골프장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차나 한잔 해야겠다”며 골프장으로 갔다고 한다. 웬걸? 아산은 이미 골프복장을 하고 신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와서 그렇지 골프 치기에는 좋은 날씨입니다.” 나이 70의 아산이 기운차게 말을 건네더란다. 신 회장이 골프장 주위를 둘러보니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있었다.
“아, 이런 날 운동이 되겠습니까?” 신 회장의 퉁명스런 반응을 접한 아산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염려 마세요. 그래서 내가 눈 위에서도 잘 보이도록 빨간 공을 가져왔거든요.” 아산은 주머니 속에서 빨간 칠을 한 골프공을 꺼낸 뒤 그 눈 속에서도 20대 청년처럼 하루 종일 박력 넘치게 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아산보다 8살 아래인 신격호 회장은 당시 이같은 일화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아산을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인이자 ‘결단력과 추진력의 화신’이라고 평가했다.
기업가정신 연구자들은 이 대목에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창조경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산은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늘 창의적으로 궁리해 해결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한겨울 눈이 덮인 골프장에서 빨간 칠을 한 골프공으로 골프를 친 것은 지금은 대중화된 칼라골프공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한 겨울에 잔디를 구할 수 없자 새파란 보리를 떠다가 심어 부산 유엔군 묘지의 잔디밭을 조성했던 1952년의 유명한 일화 역시 창조경영의 사례로 볼 수 있다.
19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이 부산 유엔군 묘지를 찾기로 하자 미국은 황량한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고 했다. 아산의 자서전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아주 재미있는 주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라 뗏장 한 조각 입힐 겨를도 없이 흙바닥 그대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유엔군 묘지를 어떻게 파랗게 단장해 줄 수 없느냐는 기상천외한 주문이었다. 나는 참으로 당황했다. 참배는 닷새 후였다. 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콜럼버스 달걀이 별 거냐.’ 나는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아이디어 값 포함해서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했다. 그 길로 나는 김영주를 시켜 트럭 30대를 사방에서 끌어 모아 낙동강 연안 남지, 모래질 벌판의 보리밭을 사서 파란 보리 포기들을 떠다 묘지에 심었다. 깊은 겨울에도 모래질 보리밭 보리 포기는 잘도 떠졌다. 어쨌거나 파랗게 단장만 하면 목적 달성이었다. 유엔 사절 일행이 와봤자 각국 사병 묘지에 꽃만 바치고 돌아갈 텐데 파란 풀을 보고 이것이 보리냐 잔디냐 따질 것인가. 미군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라며 큰 눈을 휘둥그레 더 크게 벌려 뜨고 감탄했다. 그 이후 미8군 공사는 손가락질만 하면 다 내 것이었다.” 아산이 보여준 창의성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건설업자들이 새파란 ‘잔디’에만 초점을 맞추고 겨울에는 잔디를 구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아산은 잔디가 아닌 ‘새파란’에 초점을 맞춰서 보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생전에 “뭐든지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게 일이고 인생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는 그 자신이 경험을 통해 수차례 확인했기 때문에 했던 말일 것이다. “고정관념에 갇힌 사람은 아무리 배워도 멍텅구리다.” 아산이 생전에 현대그룹 직원들에게 늘 했다는 이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아산의 기업가정신의 핵심으로 평가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옥스퍼드 유머로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조선소의 건립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산 특유의 도전정신과 뚝심에 창의성이 결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건립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아산은 런던의 A&P 애플도어사에 현대의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사진만을 가져온 아산에게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은 회의적인 태도로만 일관했다.
이때 아산은 특유의 기지를 발휘한다.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놓고는 “여기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이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는 대략 180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300년이나 앞선 셈입니다. 그동안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들의 능력과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선박 건조에 대한 잠재력은 결코 적지 않다고 자부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에 찬 아산의 설득에 감동한 롱바톰 회장은 바클레이스 은행의 부총재를 만날 수 있도록 직접 주선해 주고 아산이 완벽한 사업계획서를 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토목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조선공법(서산A지구 방조제 물막이 공사 때 아산이 활용했던 폐유조선공법을 지칭)도 아산만이 할 수 있었던 뚝심의 산물이자 특허상품이었다. 당시 폐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아 물막이 공사에 성공한 ‘정주영 공법’에 세계가 놀랐음은 물론이다. 초대형 건설프로젝트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도 마찬가지다. 아산이 아끼던 아우 정인영과 다른 참모들 모두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산은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밀고나가 대성공을 거둔다. 특히 1975년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 무게 550톤의 철 구조물 89개를 울산항에서 주베일항까지 바지선으로 끌고가는 기상천외한 발상도 아산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아산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현대건설을 세계 굴지의 회사로 발전 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아산이 현대를 통해 이뤄낸 대역사들, 이를테면 1970년대 해외 건설과 중공업 체제 구축, 1980년대 사업 구조 고도화와 자동차·반도체의 수출산업화, 1990년대 북방시장의 개척, 1998년 말부터 시작한 금강산 관광사업 등등 그 어느 것 하나 도전과 개척주의가 아닌 것이 없는 사업들이다.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에 선도적으로 나선 것도 아산의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아산은 현대건설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신의(信義)를 지켜 정부 공사를 많이 수주한 것을 놓고 업계에서 근거 없는 소문들에 휩싸이자 해외 진출을 결심하고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수주하는데 성공한다. 이 공사는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최초의 해외 진출로 현대는 물론 국가경사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아산의 도전정신은 자동차·조선·반도체·북방경제협력 사업 등에서 큰 성과를 내며 현재 한국 재계의 양대산맥인 굴지의 현대가를 일구게 되었다. (43쪽 현대가 가계도 참조)
도전정신과 함께 아산을 특징짓는 단어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산의 브랜드라고 할 정도로 아산을 상징하는 말로 꼽힌다. 아산은 시련을 겪을 때마다, 좌절과 위기의 늪에 있을 때마다 자신이 그리운 고향 통천을 왜 탈출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가출한 뒤 쌀가게에서 자전거를 수없이 연습하던 때를 떠올리며 견뎌냈다고 한다. 이처럼 아산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시련의 시기를 새로운 학습과 비약의 기회로 삼아 도전과 성장의 시기로 역이용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아산의 말처럼 그의 인생에는 시련은 있었지만 실패는 없었다.
아산의 기업가정신 DNA 핵심인 도전정신은 정몽구(77)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경영사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사례를 거론한다. 하나는 정 회장이 아산의 트레이드마크인 “해봤어?”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 “해봐!”라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경영사학자들은 도전정신과 뚝심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낸 MK리더십의 성공사례로 지난 2000년 미국 시장에서 현대자동차 ‘10년, 10만마일 보증’이라는 파격 서비스를 도입해 성공한 사례를 꼽는다. MK의 당시 승부수는 예상을 초월한 경영성과로 나타나 지금의 현대차를 있게 한 견인차가 되었다.
잠시 15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2000년 9월 25일, 계열분리된 현대차그룹이 양재동에 마련한 신사옥에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대표이사 회장은 임직원들 앞에서 절체절명의 비상한 각오로 현대차의 비전을 제시한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합병을 통해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홀로서기에 나선 정몽구 회장은 출범식에서 “2005년까지 세계 5위의 품질을 확보하고 2010년에는 세계 5대 자동차업체로서 거듭나도록 노력하자”는 GT5 비전을 천명한다. 정 회장이 이같은 비전을 발표했을 때 당시 곧이곧대로 이뤄질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현대차는 시련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우선 계열 분리로 현대가의 또 다른 모태인 현대그룹이 떨어져나갔다. 정몽구 회장은 오직 자동차만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2000년 계열분리 당시 현대차그룹 10개사의 자산총액은 34조393억원, 연간 매출액은 27조1049억원이었다. 계열 분리 전 현대그룹 자산 총액이 88조였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현대차의 미국시장 개척도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현대차는 ‘바텀 피더’(Bottom Feeder)로 불렸다. 큰 고기에게 잡혀 먹힐까봐 깊은 바닥에 사는 물고기를 빗댄 말로 저가브랜드 자동차라는 의미였다. 1986년 저가브랜드로 미국 시장에 처음 진출한 당시 현대차는 이미지를 쇄신할 특별한 모멘텀을 차지 못하고 있었다. 정몽구 회장은 치밀한 준비 끝에 승부수를 던졌다. 정 회장이 1998년 현대자동차를 맡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선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병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한 것이었다. 정 회장은 이후 2000년에 전격적으로 ‘현대차 10년, 10만마일 보증’ 서비스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국 자동차시장의 경쟁업체들은 경악했다. 보증 비용 부담이 만만찮았기에 여차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러나 정 회장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아버지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보였다. “해봐!”, “할 수 있어!”라는 불굴의 도전 정신이었다. 그는 기업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쟁사를 모방만 하는 전략으로는 절대 앞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기업인이었다.
당시 MK의 혁신적인 고객 서비스 발표는 아산 정주영의 고객 최우선 정신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아산은 고객 중심 경영을 일찍이 터득한 기업가였다. 아산은 1980년대 현대자동차의 캐나다와 미국 수출 당시에도 고객 최우선 정신을 강조했다.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인 포니를 개발한 뒤 북미 지역 수출을 위해 광고와 고객서비스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캐나다에서는 수출 16개월 만에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1986년 2월에는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미국 전역에 엑셀 브랜드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기업 광고와 제품 광고를 병행하며 서비스 제일주의를 표방했고, 역량있는 딜러를 모집한 뒤 캘리포니아, 조지아, 뉴저지 등에 서비스센터를 구축하고 고객만족주의 판촉을 추진했다. 자동차를 수출하기 전에 대고객 서비스를 먼저 추진하는 이같은 전략은 아산이 창업 당시 미군과 관계한 공사에서 터득한 미국식 고객만족주의를 활용한 것이었다. 당시 이같은 철저한 준비로 현대차는 수출 4개월만에 5만2천여 대를 판매해 단시간 내 최대판매 기록을 세웠던 성공의 경험이 있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의 이런 역사를 잊지 않고 미국 시장 공략 때 이를 적용해 더 발전시킨 것이다.
기업가로서 MK의 장점은 불도저 같은 뚝심도 있지만 꼼꼼한 경영자의 자질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MK는 ‘10년, 10만마일 보증’을 도입하고 난 뒤 수차례에 걸쳐 내구성과 품질을 파악한 정밀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관련 부서에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결단이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수행되고 있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후속조치를 꼼꼼히 챙겼다. 지금은 정몽구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현장 경영’과 ‘품질경영’이 뒤따른 것은 물론이다. 이는 현대차 그룹 이전부터 현대정공을 이끌어온 정 회장이 엔지니어 못지 않게 자동차기술에 해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는 재계의 거물들이 다 인정하는 바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정몽구는 현장경영, 품질경영의 대명사다. 30대 초반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이래 40여년 간 현장을 지키면서 늘 ‘품질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미국 시장에서 저가브랜드 이미지였던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회장이 제시한 목표를 달성했다. 2005년에 판매량 세계 5위를 달성했고, 이제는 세계 자동차 생산 4위를 넘보고 있다. 현대차는 경영학의 산실인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서 케이스스터디 대상이 됐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국산 고유모델 개발을 통한 국내 자동차산업의 탄탄한 기초를 다졌다면 정몽구 회장은 한국 자동차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0년대 고유모델 개발, 1980년대 미국 첫 진출, 1990년대 엔진 자체개발이란 역사를 바탕으로 현대자동차는 자체개발엔진이 세계 최고의 엔진으로 인정받고 있고, 고유모델이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 한해에 한대만 선정되는 ‘올해의 차’로 수 차례 선정되는 성과를 달성하는 등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했다.
판매량도 늘어 지난해에는 현대차가 496만 대, 기아차가 304만 대를 판매하여 통합 연 판매 800만 대 시대를 열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로써 세계 자동차업체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어 오며 세계 5위 수준의 자동차메이커로 우뚝섰다.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급성장은 정몽구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글로벌 기업을 향한 지속적인 품질경영과 혁신경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 품질경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품질은 제품의 근본적인 경쟁력인 동시에 고객의 안전과 감성적 만족에 직결되는 요소이며 우리의 자존심이자 기업의 존재 이유”라며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품질만큼은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져 달라”고 당부했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경영의 결과는 현대·기아차 임직원들에 스며들어 품질 및 내구품질의 향상으로 나타났고 판매호조로 이어졌다.
품질경영과 함께 정몽구 회장은 세계 곳곳을 돌며 글로벌 현장을 직접 챙기는 글로벌 현장경영에도 앞장서고 있다. 정 회장은 해마다 국내는 물론 해외 각 사업장을 방문,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각 시장상황을 점검하며 글로벌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현재 국내 생산 기지를 중심으로 중국 공장, 인도 공장, 터키 공장, 체코 공장, 슬로바키아 공장, 미국의 앨라배마 공장과 조지아 공장 등 주요 대륙에 생산기지를 완공하며, 전 세계에서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글로벌 메이커로서 자리매김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창저우에 중국 4공장을 착공했고 올해 충칭에 중국 5공장을 착공할 예정이다. 현대·기아차는 국내 공장과 해외 현지 공장을 포함해 2018년(현재 진행중인 공장 완공 시기)까지 총 연산 933만 대 생산규모를 갖출 예정이다.
현대·기아차는 생산공장과 별도로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 주행시험장, LA 인근에 디자인센터를 갖추고 있고, 디트로이트 시에 자동차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럽 자동차 업계 동향을 살피고 유럽 전략 차종을 개발하는 유럽 기술 연구소, 인도의 IT 인력을 활용하는 인도 기술 연구소까지 확보해 전 세계 주요 거점에 글로벌 R&D센터를 운영해 생산기지와 더불어 유기적으로 협업,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글로벌 R&D 체제를 구축했다. 한국의 현대·기아차가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경영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인 것이다.
경영학자들은 앞서 정몽구 회장의 승부수와 뚝심이 통한 또 하나의 사례로 한전부지 낙찰 사례를 거론한다. 10조5500억원이라는 상상초월의 승부수를 던졌던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 낙찰 스토리는 지금도 재계의 화제거리다. 현대차그룹은 낙찰 이후 삼성동 한전 부지에 115층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 회장은 한전 부지 인수와 관련해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투자고 100년을 내다보고 하는 일”이라며 “더러 금액이 과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기업이나 외국기업으로부터 사는 거라면 고민을 했겠지만 국가에 기여한다고 생각해서 큰 금액을 써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15층 마천루가 완공되면 국내 최고 고층건물이 될 전망이다. ‘승부사’ 정몽구 회장의 통큰 경영이 아니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사건’ 이었다는 평가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이 자신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도전정신과 뚝심 있는 승부수로 놀랄만한 성과를 일궈낸 MK의 성공스토리는 아버지 정주영을 그대로 빼닮았다. 우선 부자가 모두 체격이 좋다. 흔한 말로 ‘통뼈’다. 어지간해서는 도무지 지치지 않는 강철같은 체력의 소유자들이다.
경영자로서 가진 자질도 비슷하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카리스마가 강하다. 현대가는 삼성가에 비해 형제들이 많다. MK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정몽구 회장은 학창 시절에 럭비선수였다. 어린 나이에 주장을 맡았는데, 말수는 적었지만 몸으로 부대끼고 싸우면서 인내심을 키웠고 리더십을 익혔다. 그의 몸 속에 잠자고 있던 경영자로서의 DNA가 현대차그룹을 맡은 이후 본격적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다.
정몽구 회장은 범 현대가의 적통으로서 현대가의 재건이라는 과업도 우직하게 실천하고 있다. 아산이 생전에 그렇게 열망하던 제철소 건설도 현대제철 당진 일관 제철소 준공을 통해 2010년에 실현해 아버지의 유훈을 완성했다. 한때 현대그룹으로 낙점됐던 현대건설을 다시 찾아오는데도 성공했다. 현대가를 재건하며 아산의 기업가정신의 적통을 잇고 있는 정몽구 회장은 MK리더십으로 선대의 꿈을 더 크게 키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몽구 회장은 강력한 글로벌 리더십으로 경제성장률을 능가하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성장을 주도했고,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현대자동차그룹을 국가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기여하는 국민 기업,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몇몇 경영학자들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B2B시장을 중심으로 능력을 발휘한 반면 정몽구 회장이 소비자의 평가로 생존하는 자동차산업, B2C시장에서 인정받은 점을 근거로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기업 DNA를 바꾸고 확장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현대가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다보면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흔히 아산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것만을 보고 아산의 지성과 능력을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취재과정에서 만난 다수의 경영학자들은 아산이 아주 뛰어나고 창의적인 인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산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서당을 다닌 것과 강원도 통천의 송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지만 인생의 고비 때마다 뛰어난 창의력과 역발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을 이뤄냈다.
아산의 탁월한 창의성의 배경에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3년 동안 갈고 닦은 『소학』과 『대학』, 한시(漢詩)에 대한 풍부한 경험, 그리고 고 박경리 선생 등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뛰어난 예술가들과의 폭넓은 교류가 있었다. 또 하나, 아산은 대단한 부자였지만 실제로는 돈에 대한 집착이나 소유에 대한 욕심은 적었던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산은 재벌이나 기업가로 불리기 보다는 노동자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삶 속에서 적극 실천했던 ‘부유한 노동자’로 남길 원했다. 그가 현대맨들에게 즐겨 사용했다는 “나는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다”라는 말의 진의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밝혀진 바 있다. 아산이 떠난 후 미국의 GE사나 일본의 도요타와 같은 초일류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를 호령하던 아산의 청운동 자택이 공개됐다. 주인이 떠난 그의 집에는 10년 이상은 족히 신었을 것 같은 낡은 구두, 구멍 난 면장갑, 카펫 대신 깔았던 흰 광목 천, 낡은 금성사의 텔레비전이 주인을 잃은 채 남아 있었다. 대그룹을 일군 창업자이자 한국 경제 발전의 선봉장 역할을 한 거물의 살림 치고는 너무 소탈했고 서민적이었다.
신기하게도 아산의 근검절약의 정신과 부지런함은 정몽구 회장에게서 그대로 발견된다. 생전의 아산은 청운동에 살던 시절, 정몽구 회장 등 아들들과 새벽에 식사를 함께 하고는 계동 현대사옥까지 걸어갔다. 3.5㎞. 10리에 가까운 먼 거리였다. 정몽구 회장이 지금도 아침 7시 전후에 출근하는 부지런함과 뚝심은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익힌 바가 크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은 꼭 가야할 상갓집도 새벽에 들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지런한 사람은 세상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게 지금도 정몽구 회장의 좌우명이라고 한다.
2015년 5월 현재 현대자동차는 수입차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계속되면서 국내 시장 점유율 유지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특유의 도전정신과 낙천주의, 부지런함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더 성장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다수다. MK의 리더십, 정몽구 회장의 뚝심이 다시 빛을 발할 때가 됐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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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송자(79) 전 연세대 총장은 아산을 두고 ‘자본주의 교실의 최우등생’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미국이 포드, 카네기, 록펠러를 내세워 그들의 자본주의를 이끌어간다면 우리도 아산 정주영을 앞세우고 우리의 자본주의를 성숙시켜 나갈 수 있다”며 아산을 나라의 지도자로 극찬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첫 번째로 하는 것은 위험부담을 과감히 짊어지고 도전해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실제 아산이 창업한 자동차산업이 그렇다. 아산은 자동차산업의 토대가 전무했던 한국에서 자동차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 하나로 자동차 수리 공장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해 사업경험을 쌓은 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그 뒤를 이어 아산의 아들 정몽구 회장이 지금의 세계 5위의 자동차생산 대국을 일궈냈다. ‘하면 된다’는 캔두이즘(can-doism)과 도전정신을 몸소 보여준 사례다.
미국의 저술가 노만 필(Norman Vincent Peale)은 “성공은 신념의 산물이며, 신념을 가진 사람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산 정주영이 바로 그 산 증인이다.
현대가 사람들에 따르면, 생전의 아산은 성장기 때 주위 사람들에게 “큰물에 나가야 커다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돈 벌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 같은 서울로의 탈출을 4번씩이나 시도했다. 그가 난생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쌀가게였던 복흥상회의 배달원 자리였다.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한 자세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그 가게를 물려받는 수완을 발휘한다. 이후 잘 알려진 것처럼 뚝심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지금의 현대가를 창업했다. 아버지가 소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한 그가 소떼 1000마리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거쳐 고향을 찾은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결단력과 추진력의 화신 정주영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신격호 회장이 아산과 골프 약속을 한 날, 공교롭게도 눈이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많이 왔다. 신 회장은 “골프는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아산이 이미 골프장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차나 한잔 해야겠다”며 골프장으로 갔다고 한다. 웬걸? 아산은 이미 골프복장을 하고 신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와서 그렇지 골프 치기에는 좋은 날씨입니다.” 나이 70의 아산이 기운차게 말을 건네더란다. 신 회장이 골프장 주위를 둘러보니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있었다.
“아, 이런 날 운동이 되겠습니까?” 신 회장의 퉁명스런 반응을 접한 아산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염려 마세요. 그래서 내가 눈 위에서도 잘 보이도록 빨간 공을 가져왔거든요.” 아산은 주머니 속에서 빨간 칠을 한 골프공을 꺼낸 뒤 그 눈 속에서도 20대 청년처럼 하루 종일 박력 넘치게 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아산보다 8살 아래인 신격호 회장은 당시 이같은 일화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아산을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인이자 ‘결단력과 추진력의 화신’이라고 평가했다.
기업가정신 연구자들은 이 대목에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창조경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산은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늘 창의적으로 궁리해 해결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한겨울 눈이 덮인 골프장에서 빨간 칠을 한 골프공으로 골프를 친 것은 지금은 대중화된 칼라골프공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한 겨울에 잔디를 구할 수 없자 새파란 보리를 떠다가 심어 부산 유엔군 묘지의 잔디밭을 조성했던 1952년의 유명한 일화 역시 창조경영의 사례로 볼 수 있다.
19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이 부산 유엔군 묘지를 찾기로 하자 미국은 황량한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고 했다. 아산의 자서전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아주 재미있는 주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라 뗏장 한 조각 입힐 겨를도 없이 흙바닥 그대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유엔군 묘지를 어떻게 파랗게 단장해 줄 수 없느냐는 기상천외한 주문이었다. 나는 참으로 당황했다. 참배는 닷새 후였다. 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콜럼버스 달걀이 별 거냐.’ 나는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아이디어 값 포함해서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했다. 그 길로 나는 김영주를 시켜 트럭 30대를 사방에서 끌어 모아 낙동강 연안 남지, 모래질 벌판의 보리밭을 사서 파란 보리 포기들을 떠다 묘지에 심었다. 깊은 겨울에도 모래질 보리밭 보리 포기는 잘도 떠졌다. 어쨌거나 파랗게 단장만 하면 목적 달성이었다. 유엔 사절 일행이 와봤자 각국 사병 묘지에 꽃만 바치고 돌아갈 텐데 파란 풀을 보고 이것이 보리냐 잔디냐 따질 것인가. 미군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라며 큰 눈을 휘둥그레 더 크게 벌려 뜨고 감탄했다. 그 이후 미8군 공사는 손가락질만 하면 다 내 것이었다.”
고정관념을 깨부순 창조적 경영자
이는 아산의 기업가정신의 핵심으로 평가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옥스퍼드 유머로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조선소의 건립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산 특유의 도전정신과 뚝심에 창의성이 결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건립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아산은 런던의 A&P 애플도어사에 현대의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사진만을 가져온 아산에게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은 회의적인 태도로만 일관했다.
이때 아산은 특유의 기지를 발휘한다.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놓고는 “여기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이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는 대략 180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300년이나 앞선 셈입니다. 그동안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들의 능력과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선박 건조에 대한 잠재력은 결코 적지 않다고 자부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에 찬 아산의 설득에 감동한 롱바톰 회장은 바클레이스 은행의 부총재를 만날 수 있도록 직접 주선해 주고 아산이 완벽한 사업계획서를 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토목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조선공법(서산A지구 방조제 물막이 공사 때 아산이 활용했던 폐유조선공법을 지칭)도 아산만이 할 수 있었던 뚝심의 산물이자 특허상품이었다. 당시 폐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아 물막이 공사에 성공한 ‘정주영 공법’에 세계가 놀랐음은 물론이다. 초대형 건설프로젝트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도 마찬가지다. 아산이 아끼던 아우 정인영과 다른 참모들 모두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산은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밀고나가 대성공을 거둔다. 특히 1975년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 무게 550톤의 철 구조물 89개를 울산항에서 주베일항까지 바지선으로 끌고가는 기상천외한 발상도 아산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아산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현대건설을 세계 굴지의 회사로 발전 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산의 꿈을 더 크게 키워나간 정몽구 회장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에 선도적으로 나선 것도 아산의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아산은 현대건설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신의(信義)를 지켜 정부 공사를 많이 수주한 것을 놓고 업계에서 근거 없는 소문들에 휩싸이자 해외 진출을 결심하고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수주하는데 성공한다. 이 공사는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최초의 해외 진출로 현대는 물론 국가경사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아산의 도전정신은 자동차·조선·반도체·북방경제협력 사업 등에서 큰 성과를 내며 현재 한국 재계의 양대산맥인 굴지의 현대가를 일구게 되었다. (43쪽 현대가 가계도 참조)
도전정신과 함께 아산을 특징짓는 단어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산의 브랜드라고 할 정도로 아산을 상징하는 말로 꼽힌다. 아산은 시련을 겪을 때마다, 좌절과 위기의 늪에 있을 때마다 자신이 그리운 고향 통천을 왜 탈출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가출한 뒤 쌀가게에서 자전거를 수없이 연습하던 때를 떠올리며 견뎌냈다고 한다. 이처럼 아산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시련의 시기를 새로운 학습과 비약의 기회로 삼아 도전과 성장의 시기로 역이용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아산의 말처럼 그의 인생에는 시련은 있었지만 실패는 없었다.
아산의 기업가정신 DNA 핵심인 도전정신은 정몽구(77)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경영사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사례를 거론한다. 하나는 정 회장이 아산의 트레이드마크인 “해봤어?”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 “해봐!”라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경영사학자들은 도전정신과 뚝심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낸 MK리더십의 성공사례로 지난 2000년 미국 시장에서 현대자동차 ‘10년, 10만마일 보증’이라는 파격 서비스를 도입해 성공한 사례를 꼽는다. MK의 당시 승부수는 예상을 초월한 경영성과로 나타나 지금의 현대차를 있게 한 견인차가 되었다.
잠시 15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2000년 9월 25일, 계열분리된 현대차그룹이 양재동에 마련한 신사옥에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대표이사 회장은 임직원들 앞에서 절체절명의 비상한 각오로 현대차의 비전을 제시한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합병을 통해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홀로서기에 나선 정몽구 회장은 출범식에서 “2005년까지 세계 5위의 품질을 확보하고 2010년에는 세계 5대 자동차업체로서 거듭나도록 노력하자”는 GT5 비전을 천명한다. 정 회장이 이같은 비전을 발표했을 때 당시 곧이곧대로 이뤄질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현대차는 시련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우선 계열 분리로 현대가의 또 다른 모태인 현대그룹이 떨어져나갔다. 정몽구 회장은 오직 자동차만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2000년 계열분리 당시 현대차그룹 10개사의 자산총액은 34조393억원, 연간 매출액은 27조1049억원이었다. 계열 분리 전 현대그룹 자산 총액이 88조였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현대차의 미국시장 개척도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현대차는 ‘바텀 피더’(Bottom Feeder)로 불렸다. 큰 고기에게 잡혀 먹힐까봐 깊은 바닥에 사는 물고기를 빗댄 말로 저가브랜드 자동차라는 의미였다. 1986년 저가브랜드로 미국 시장에 처음 진출한 당시 현대차는 이미지를 쇄신할 특별한 모멘텀을 차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10만마일 보증’ 승부수 통하다
당시 MK의 혁신적인 고객 서비스 발표는 아산 정주영의 고객 최우선 정신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아산은 고객 중심 경영을 일찍이 터득한 기업가였다. 아산은 1980년대 현대자동차의 캐나다와 미국 수출 당시에도 고객 최우선 정신을 강조했다.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인 포니를 개발한 뒤 북미 지역 수출을 위해 광고와 고객서비스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캐나다에서는 수출 16개월 만에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1986년 2월에는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미국 전역에 엑셀 브랜드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기업 광고와 제품 광고를 병행하며 서비스 제일주의를 표방했고, 역량있는 딜러를 모집한 뒤 캘리포니아, 조지아, 뉴저지 등에 서비스센터를 구축하고 고객만족주의 판촉을 추진했다. 자동차를 수출하기 전에 대고객 서비스를 먼저 추진하는 이같은 전략은 아산이 창업 당시 미군과 관계한 공사에서 터득한 미국식 고객만족주의를 활용한 것이었다. 당시 이같은 철저한 준비로 현대차는 수출 4개월만에 5만2천여 대를 판매해 단시간 내 최대판매 기록을 세웠던 성공의 경험이 있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의 이런 역사를 잊지 않고 미국 시장 공략 때 이를 적용해 더 발전시킨 것이다.
기업가로서 MK의 장점은 불도저 같은 뚝심도 있지만 꼼꼼한 경영자의 자질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MK는 ‘10년, 10만마일 보증’을 도입하고 난 뒤 수차례에 걸쳐 내구성과 품질을 파악한 정밀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관련 부서에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결단이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수행되고 있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후속조치를 꼼꼼히 챙겼다. 지금은 정몽구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현장 경영’과 ‘품질경영’이 뒤따른 것은 물론이다. 이는 현대차 그룹 이전부터 현대정공을 이끌어온 정 회장이 엔지니어 못지 않게 자동차기술에 해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는 재계의 거물들이 다 인정하는 바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정몽구는 현장경영, 품질경영의 대명사다. 30대 초반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이래 40여년 간 현장을 지키면서 늘 ‘품질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MK리더십 핵심은 품질경영과 글로벌경영
판매량도 늘어 지난해에는 현대차가 496만 대, 기아차가 304만 대를 판매하여 통합 연 판매 800만 대 시대를 열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로써 세계 자동차업체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어 오며 세계 5위 수준의 자동차메이커로 우뚝섰다.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급성장은 정몽구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글로벌 기업을 향한 지속적인 품질경영과 혁신경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 품질경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품질은 제품의 근본적인 경쟁력인 동시에 고객의 안전과 감성적 만족에 직결되는 요소이며 우리의 자존심이자 기업의 존재 이유”라며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품질만큼은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져 달라”고 당부했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경영의 결과는 현대·기아차 임직원들에 스며들어 품질 및 내구품질의 향상으로 나타났고 판매호조로 이어졌다.
품질경영과 함께 정몽구 회장은 세계 곳곳을 돌며 글로벌 현장을 직접 챙기는 글로벌 현장경영에도 앞장서고 있다. 정 회장은 해마다 국내는 물론 해외 각 사업장을 방문,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각 시장상황을 점검하며 글로벌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현재 국내 생산 기지를 중심으로 중국 공장, 인도 공장, 터키 공장, 체코 공장, 슬로바키아 공장, 미국의 앨라배마 공장과 조지아 공장 등 주요 대륙에 생산기지를 완공하며, 전 세계에서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글로벌 메이커로서 자리매김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창저우에 중국 4공장을 착공했고 올해 충칭에 중국 5공장을 착공할 예정이다. 현대·기아차는 국내 공장과 해외 현지 공장을 포함해 2018년(현재 진행중인 공장 완공 시기)까지 총 연산 933만 대 생산규모를 갖출 예정이다.
현대·기아차는 생산공장과 별도로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 주행시험장, LA 인근에 디자인센터를 갖추고 있고, 디트로이트 시에 자동차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럽 자동차 업계 동향을 살피고 유럽 전략 차종을 개발하는 유럽 기술 연구소, 인도의 IT 인력을 활용하는 인도 기술 연구소까지 확보해 전 세계 주요 거점에 글로벌 R&D센터를 운영해 생산기지와 더불어 유기적으로 협업,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글로벌 R&D 체제를 구축했다. 한국의 현대·기아차가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경영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인 것이다.
경영학자들은 앞서 정몽구 회장의 승부수와 뚝심이 통한 또 하나의 사례로 한전부지 낙찰 사례를 거론한다. 10조5500억원이라는 상상초월의 승부수를 던졌던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 낙찰 스토리는 지금도 재계의 화제거리다. 현대차그룹은 낙찰 이후 삼성동 한전 부지에 115층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 회장은 한전 부지 인수와 관련해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투자고 100년을 내다보고 하는 일”이라며 “더러 금액이 과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기업이나 외국기업으로부터 사는 거라면 고민을 했겠지만 국가에 기여한다고 생각해서 큰 금액을 써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15층 마천루가 완공되면 국내 최고 고층건물이 될 전망이다. ‘승부사’ 정몽구 회장의 통큰 경영이 아니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사건’ 이었다는 평가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이 자신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도전정신과 뚝심 있는 승부수로 놀랄만한 성과를 일궈낸 MK의 성공스토리는 아버지 정주영을 그대로 빼닮았다. 우선 부자가 모두 체격이 좋다. 흔한 말로 ‘통뼈’다. 어지간해서는 도무지 지치지 않는 강철같은 체력의 소유자들이다.
경영자로서 가진 자질도 비슷하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카리스마가 강하다. 현대가는 삼성가에 비해 형제들이 많다. MK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정몽구 회장은 학창 시절에 럭비선수였다. 어린 나이에 주장을 맡았는데, 말수는 적었지만 몸으로 부대끼고 싸우면서 인내심을 키웠고 리더십을 익혔다. 그의 몸 속에 잠자고 있던 경영자로서의 DNA가 현대차그룹을 맡은 이후 본격적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다.
정몽구 회장은 범 현대가의 적통으로서 현대가의 재건이라는 과업도 우직하게 실천하고 있다. 아산이 생전에 그렇게 열망하던 제철소 건설도 현대제철 당진 일관 제철소 준공을 통해 2010년에 실현해 아버지의 유훈을 완성했다. 한때 현대그룹으로 낙점됐던 현대건설을 다시 찾아오는데도 성공했다. 현대가를 재건하며 아산의 기업가정신의 적통을 잇고 있는 정몽구 회장은 MK리더십으로 선대의 꿈을 더 크게 키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몽구 회장은 강력한 글로벌 리더십으로 경제성장률을 능가하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성장을 주도했고,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현대자동차그룹을 국가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기여하는 국민 기업,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몇몇 경영학자들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B2B시장을 중심으로 능력을 발휘한 반면 정몽구 회장이 소비자의 평가로 생존하는 자동차산업, B2C시장에서 인정받은 점을 근거로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기업 DNA를 바꾸고 확장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현대가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다보면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흔히 아산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것만을 보고 아산의 지성과 능력을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취재과정에서 만난 다수의 경영학자들은 아산이 아주 뛰어나고 창의적인 인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산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서당을 다닌 것과 강원도 통천의 송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지만 인생의 고비 때마다 뛰어난 창의력과 역발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을 이뤄냈다.
아산의 탁월한 창의성의 배경에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3년 동안 갈고 닦은 『소학』과 『대학』, 한시(漢詩)에 대한 풍부한 경험, 그리고 고 박경리 선생 등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뛰어난 예술가들과의 폭넓은 교류가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신기하게도 아산의 근검절약의 정신과 부지런함은 정몽구 회장에게서 그대로 발견된다. 생전의 아산은 청운동에 살던 시절, 정몽구 회장 등 아들들과 새벽에 식사를 함께 하고는 계동 현대사옥까지 걸어갔다. 3.5㎞. 10리에 가까운 먼 거리였다. 정몽구 회장이 지금도 아침 7시 전후에 출근하는 부지런함과 뚝심은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익힌 바가 크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은 꼭 가야할 상갓집도 새벽에 들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지런한 사람은 세상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게 지금도 정몽구 회장의 좌우명이라고 한다.
2015년 5월 현재 현대자동차는 수입차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계속되면서 국내 시장 점유율 유지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특유의 도전정신과 낙천주의, 부지런함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더 성장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다수다. MK의 리더십, 정몽구 회장의 뚝심이 다시 빛을 발할 때가 됐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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