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시대의 슬픈 자화상

이 영화에는 담배 이외에도 냉전시대의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공산당에 가입했거나 동조했다고 의심되는 영화계 인사들의 명단)와 관련된 재미있는 특징들이 등장한다. 꽃과 과일 모형을 잔뜩 얹은 요란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던 헤다 호퍼(배우 겸 칼럼니스트)의 모자, 의회 청문회에서 바보 같은 말을 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 영상, 1940년대 재즈를 삽입한 사운드트랙 등이다. 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이 영화가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했으며 그래서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꼭 봐야 할 영화로 인식돼 많은 미국인이 감기는 눈꺼풀을 치켜뜨면서 어쩔 수 없이 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논의해야 할 역사물을 보는 걸 고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트모(Gitmo, 테러 용의자들을 구금·심문하는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의 포로 학대와 애국법에 따른 대량감시(mass surveillance)가 국제적 논란 거리가 되고 미국 공화당 하원 의원들은 국무부의 모든 이메일과 기후변화에 관한 보고서 뒤에 좌파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의심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국방력을 갖춘 미국이 집단히스테리에 걸렸을 때마다 내부의 적을 찾아 마녀사냥에 나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40년대의 마녀사냥꾼들은 영화계 내에 국가전복 음모가 도사린다고 주장했다.
국무부와 군부 내에 숨어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 데 열을 올리던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는 한동안 할리우드를 예의주시했다.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HUAC에서 공산주의 연루 혐의에 대해 증언할 것을 거부한 ‘할리우드의 10인(Hollywood Ten)’ 중 한 사람이다. 트럼보를 비롯한 몇 사람은 한동안 감옥에 갇혔었고 10인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가명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60년 오토 프레밍거 감독과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각각 영화 ‘영광의 탈출’과 ‘스파타커스’에서 트럼보가 각본을 썼다고 용감하게 밝힘으로써 그 블랙리스트를 깼다.
이건 우리가 꼭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주인공 역을 맡은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는 TV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마약을 제조하는 화학 선생님 역할로 잘 알려졌다. ‘트럼보’에서 크랜스턴은 또 다른 종류의 괴짜 캐릭터를 실감나게 그린다. 콧수염을 기르고 보타이를 맨 품위 있는 작가로 영화 속 한 캐릭터의 말마따나 “마치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위에 새겨지기라도 할 것처럼” 신중하게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다. 욕조 안에 앉아 담배와 위스키, 벤제드린(각성제)에 취해 글을 쓰는 모습이 특히 재미있다.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존 굿먼은 제작비를 절약하려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트럼보에게 시나리오를 맡기는 싸구려 영화 제작자를 연기한다. 헬렌 미렌은 로널드 레이건과 존 웨인을 부추겨 영화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게 만든 독사 같은 가십 칼럼니스트 헤다 호퍼로 나온다. 루이스 C K는 트럼보의 조수로 나오는데 폐암에 걸려 한쪽 폐를 절제한 뒤에도 줄담배를 피워 결국 죽음에 이른다. 다이앤 레인은 트럼보의 똑똑하고 헌신적인 아내로 나온다. 트럼보가 할리우드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1940년대 일주일에 4000달러면 엄청난 액수였다) 시나리오 작가에서 멕시코 시티(영화에서는 LA)에 파묻혀 가명으로 글을 쓰며 푼돈밖에 벌지 못하는 신세가 되면서 그의 가족 모두 고통 받는다.
허구의 인물 알란 허드(루이스 C K) 같은 캐릭터는 재미있고 위트가 넘친다. 그는 HUAC에서 공산당에 가입했는지 여부를 말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한다. “있다. 하지만 먼저 내 주치의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가 내 양심을 수술로 제거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헬렌 미렌(왼쪽)은 공산주의 연루 혐의를 받은 트럼보 같은 인물들을 영화계에서 퇴출시킨 가십 칼럼니스트로 나온다.
다 좋다. 하지만 이런 주제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티켓을 구입해서 끝까지 앉아 볼 만한 영화는 아니다. 할리우드의 자기애와 과거의 영웅적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편협한 느낌을 준다. 미국이 위협을 느낄 때마다 시민의 자유를 제한해 왔던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보통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을 듯하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꼭 할리우드의 몇몇 작가와 배우일 필요는 없다. ‘트럼보’는 지난해 개봉된 ‘버드맨’처럼 영화계 내부에서나 공감을 자아낼 만한 작품이다. 미국의 평범한 영화 관객이 욕조 안에 앉아 위대한 영화 대본을 쓰는 남자에게 뭘 그리 공감하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핵심은 제대로 찔렀다. 트럼보는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는 성나고 무지한 사람이 많다. 그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듯하다.” 맞는 말이다.
트럼보와 그의 가족은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통 받던 세월을 견뎌내고 할리우드에서 다시 성공 가도를 달린다. 그는 70세가 되던 1976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11년 미국 작가협회(WGA)는 트럼보가 가명으로 집필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로맨틱 코미디)의 원작자임을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트럼보’의 뉴욕 시사회를 앞두고 맨해튼에서 열린 영화감독과 배우들의 오찬 회동에서는 194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작가 월터 번스타인(96)이 패널에 합류했다. 그는 “안 좋은 일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오랫동안 일자리를 얻지 못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뒤를 밟고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뒤졌다고 말했다. “미국에는 특이한 역사가 있다. 나라가 위협을 느낄 때마다 시민의 자유를 공격했다.”
이 영화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미국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 권리를 침해 받았던 일을 늘 기억해야 한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 니나 벌레이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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