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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많은 올림픽의 골프 역사] 유명 선수 보이콧에 올림픽 종목 탈락 우려

[우여곡절 많은 올림픽의 골프 역사] 유명 선수 보이콧에 올림픽 종목 탈락 우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상공에서 바라본 올림픽 골프코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골프가 112년(여자 기준으론 116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골프를 즐기는 나라가 늘고 골프 인구도 증가하면서다. 다만 올림픽 종목으로 연착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만 한시적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려는 세계적인 남자 선수들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나왔다. 세계 골프랭킹 1위인 제이슨 데이부터 4위 로리 매킬로이까지 빅4가 빠졌다. 출전 가능한 랭킹 상위권 60명 중에 호주의 애덤 스콧, 마크 레시먼이나 남아공의 루이 웨스트호이젠, 찰 슈웨첼과 같은 인기 선수 20여명이 출전을 고사했다. 북아일랜드의 로리 매킬로이는 “지카바이러스 때문에 출전하기 두렵다”면서 “올림픽에서도 육상·수영·다이빙이나 보지 골프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시니컬하게 말해 올림픽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지카바이러스를 불참 이유로 든다. 그러나 실은 1년 내내 빡빡하게 돌아가는 투어 스케줄을 잘라서 상금도 없는 대회에 출전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토마스 바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내년에 골프의 정식 종목 유지 여부를 다시 고민하겠다”고 경고했다.

골프와 올림픽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여곡절이 많았다. 올림픽에서 골프는 공식적으로는 두 번 열렸다. 처음은 남녀 선수가 모두 출전한 1900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이었고, 두 번째는 남자 선수만 출전한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었다.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처음 시작된 올림픽의 당시 위상은 오늘날처럼 세계 스포츠인들이 열광하는 축제가 아니었다. 올림픽을 주창한 쿠베르텡 남작은 처음부터 골프도 포함시키려 했으나, 아쉽게도 당시 아테네에 골프장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치러지지 못했다.
 투어 스케줄 빡빡해 올림픽 출전 꺼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의 골프 금메달과 은메달.
가장 오랜 골프대회인 디오픈은 1860년에 시작되었고, 미국의 최대 메이저인 US오픈 역시 올림픽보다 한 해 앞서는 1895년에 시작했으니 골프는 자존심을 내세울 만했다. 그러나 당시 올림픽에서 골프는 주요 종목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두 번의 골프대회 모두 세계박람회의 부속 이벤트처럼 열렸다. 파리에서는 오늘날 엑스포 개념인 파리 만국박람회와 함께 열렸고,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루이지애나상품박람회와 더불어 개최됐다. 미국이 루이지애나주를 획득한 100주년을 기념한 루이지애나 박람회는 올림픽보다도 더 큰 이벤트였다.

1900년의 파리 올림픽의 대회 방식은 지금과는 달랐다. 파리 북쪽 80마일 거리의 꼼파니엔 골프장에서 남자 12명, 여자 10명이 출전해 열렸다. 남자부는 10월 2일 하루 36홀 스트로크 플레이를 펼쳤는데, 1895년 US아마추어선수권에서 준우승을 한 미국의 찰스 샌드가 82-85타로 스코틀랜드의 월터 루터포드를 한 타 차로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영국의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동메달을 차지했다.

다음 날은 여자부 경기가 9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치러져 역시 미국의 마가렛 에보트가 47타로 금메달을 땄고, 폴린 휘트(은메달), 다리아 프렛(동메달)까지 미국이 휩쓸었다. 인도 캘커타에서 태어난 에보트는 모친(7위)과 함께 모녀가 출전했고, 트로피로는 도자기를 받았다. 애석하게도 에보트는 1955년 78세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올림픽에서 우승한 첫 번째 미국인이란 사실조차 몰랐다. 이벤트처럼 열린 이 대회는 여성이 출전한 첫 공식 골프 경기로 기록된다. 그래서 올해 올림픽에서 여자 부문은 116년 만에 재개되는 대회가 된다. 대회 3일째인 4일에는 18홀 스트로크 경기가 핸디캡 방식으로 치러졌는데 올림픽과는 상관없는 관계자들의 이벤트 경기였다. 이날 우승자는 워너람버트 제약의 대표인 알버트 람버트였다. 람버트는 4년 후 올림픽에는 정식 선수로 다시 출전한 아마추어 고수였다.

4년 후인 1904년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글랜애코골프클럽에서 열렸다. 캐나다인 3명에 미국인 74명으로 북미 대륙의 남자 선수들만 출전했다. 정식 경기는 개인·단체전 두 개였으나 퍼팅 컨테스트 등 다양한 이벤트 시합도 함께 열렸다. 9월 17일 열린 팀매치에서는 10명으로 구성된 6개 팀이 출전했는데 미국의 웨스턴골프협회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36홀 매치플레이로 열린 개인전은 9월 19일 월요일부터 24일 토요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캐나다의 43세 조지 리온이 스무살의 미국 골퍼 핸리 C.이건을 2홀 남기고 3홀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리온은 화재보험사 세일즈맨으로 38세에 골프를 시작했으나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우승했다. 나중에 캐나다선수권에서 5번이나 우승했다. 이건은 금메달은 놓쳤으나 이듬해인 1905년 US아마추어선수권에서 우승했고, 나중에 코스 설계가가 됐다. 동메달은 미국의 버트 메키니와 프랑크 뉴튼이 차지했다.

1908년 영국 런던 올림픽에서는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컸지만 결국 자존심 대결 탓에 무산됐다. 런던올림픽조직위원장인 데스보로 경이 대회를 주선했고 메달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골프계는 스코틀랜드의 영국 왕립골프협회(R&A)가 주도하고 있었다. 올림픽위원회는 영국의 모든 골프 단체에 올림픽에 출전해줄 것을 요청하는 협조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골프룰을 관장하는 R&A는 이를 받은 적이 없다고 우기면서 처음부터 신경전이 불꽃 튀었다.

경기 진행과 종목에 대한 논의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R&A는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는 국제 경기여서 매사에 시큰둥했다. 반면 시간에 쫓긴 올림픽위원회는 잉글랜드의 로열세인트조지스 등 3개 코스에서 3일 간 36홀씩 스트로크 경기로 대회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팀경기는 출전 선수의 타수를 합산해서 내리기로 했다. 각 국은 6명씩을 출전시키고, 그중 성적이 좋은 4명의 스코어만 발췌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영국은 4개 팀(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이 모두 출전토록 했다.

하지만 발표 직후부터 불평이 쏟아졌다. 일정을 짧게 하라거나 영국은 왜 4개 팀이 출전하는가라는 비판이 나왔다. 애초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들어있지도 않던 골프를 왜 올림픽에서 하느냐는 불만까지 나왔다. 비방전이 이어지면서 결국 영국의 모든 골프클럽은 올림픽을 외면했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보다 참가하는 전체 선수 규모는 200명으로 3배나 늘려 잡았으나 정작 출전 선수는 단 한 명에 그쳤다. 4년 전의 금메달리스트인 조지 리온뿐이었다. 타이틀 방어를 노렸던 리온은 경기를 하지 않고도 우승컵을 지킬 수 있었지만 금메달을 거절했다. IOC에서도 정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올림픽과 1920년 벨기에 앤드워프 올림픽에서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북유럽에서 골프를 하는 나라와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개최국에서 선수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독일 선수 패배에 트로피 수여 거부한 히틀러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았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영국 선수들과 히틀러의 트로피.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정치적으로 이용된 스포츠 제전이었다. 당시 독일의 지배자는 히틀러였다. 그는 독일의 국위를 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제전에서 세계 만방에 과시하려 했다. 거액을 들여 베를린 교외 그루네발트에 10만 명을 수용하는 웅장한 스타디움을 건설했고,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를 1500여 명의 주자들이 이어 달려 대회장으로 운반하는 오늘날의 성화 봉송 방식도 시도했다. 그리고는 “베를린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스포츠 종목이 다 치러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치러지게 된 골프는 시기나 절차상 문제가 있었으나 각국에서 2명이 한 팀으로 출전해 72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열렸다. 한 팀은 감독과 코치 그리고 예비선수 한 명까지 총 5명으로 구성됐다. 대회 장소는 프랑스 국경 근처의 휴양지 바덴바덴의 18홀짜리 골프장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은 49개국에서 총 4000여명이 참가한 엄청난 규모였으나, 뒤늦게 추진된 골프는 36개국을 초청했으나 최종적으로 유럽 7개국만 출전했다.

히틀러는 실제 골프를 즐기지 않았지만 다른 종목과는 달리 귀족적인 스포츠라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큰 은쟁반에 8개의 호박석이 박힌 우승 트로피를 독일 총통 이름으로 특별 제작하기까지 했다. 바덴바덴에 결집한 각국 선수단은 이틀 간의 연습라운드를 마치고 추첨에 의해 두 팀 4명을 한 조로 묶어 경기를 펼쳤다. 8월 26~27일 이틀간 하루 36홀씩 72홀 스트로크 플레이 방식이었다. 주최국 독일은 19세의 레오나드폰베커라트와 헬머가 첫날 요크셔 사우스포트의 헤스켓 골프클럽 대표 선수인 영국팀 아놀드 벤틀리, 토미 터스크에 3타차로 앞서 선두를 달렸다. 외무상인 폰 리벤트롭이 그 내용을 보고하자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다음 날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하지만 베를린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외무상으로부터 ‘9번 홀을 마친 상태에서 독일이 영국과 비기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히틀러는 차를 세우고 결과를 다시 확인하도록 했다.

결국 독일이 3타차로 졌다는 속보를 전해들은 히틀러는 화를 내면서 길을 돌려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당시 우승 트로피는 폰 헨켈 독일골프협회장이 대신 수여했다. 영국이 금메달이었고, 독일은 프랑스에 이어 동메달에 그쳤다. 히틀러가 무시한 골프는 이벤트 대회로 평가절하되었다. 그 트로피는 떠돌다가 잉글랜드골프협회에 잠시 진열되더니 지난 2012년 런던의 체스터 백화점에서 경매로 나왔다. 원래 주인인 영국 사우스포트의 헤스켓골프클럽이 1만8750파운드에 사들여 오늘날까지 벤틀리룸에 보관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올림픽은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로 발전했다. 이와 달리 골프는 세계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시장 규모를 키우려면 미국·유럽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유리하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미국 PGA투어뿐만 아니라 세계 각 골프투어와 선수들 역시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IOC가 골프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2009년만 해도 타이거 우즈, 안니카 소렌스탐, 미셸 위 등 당대 최고의 골프 스타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다투게 됐으며 적극 참여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개최가 현실이 되자 입장이 달랐다. 지카바리어스와 함께 대회 방식과 스케줄, 보상 등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탓에 골프가 내년 IOC 총회에서 살아남을지 미지수다. 최근 스포츠 종목이 올림픽에 들어올 때는 상당한 당위성과 흥행 요소를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명 스타들이 출전해 올림픽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게 재도입의 이유였으나 그런 점에서 타격을 입었다.
 테니스의 ‘골든슬램’에 담긴 의미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안병훈(왼쪽)과 박인비.
골프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스포츠 종목이 있다. 야구는 최정상급 선수가 올림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올림픽에서 퇴출된 바 있다. 올림픽 기간에도 페넌트레이스 경기를 계속한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올림픽에 선수를 내보내지 않으면서 결국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탈락했다. 1992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됐지만 한국이 금메달을 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퇴출되었고,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다시 시범종목에 도전한다.

올림픽 재진입의 연착륙을 꿈꾸는 골프가 본받아야 할 종목은 테니스다. 1924년을 마지막으로 없어진 지 64년 만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테니스는 무성한 반대 여론을 뚫고 프로 선수에게 올림픽 문호를 개방했다. 28년이 지난 오늘날 테니스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대부분 출전한다. 남녀 단식과 복식, 혼합 복식까지 5개의 메달을 걸고 싸운다. 테니스에서는 4대 메이저를 석권하는 ‘그랜드슬램’에 올림픽 금메달을 더한 ‘골든슬램(Golden Slam)’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슈테피 그라프가 1988년에 4개의 메이저와 금메달을 함께 획득하면서 만들어졌다. 이밖에 1988년 미국의 팜 슈리버 이래 안드레 아가시, 라파엘 나달, 세레나 윌리엄스까지 총 19명이 커리어 골든슬램을 달성했다. 테니스에서 올림픽 금메달은 메이저 대회 이상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골프계에서도 선수들이 올림픽을 메이저 대회만큼 소중하게 여기도록 할 필요가 있다. 국제골프연맹(IGF)은 금메달 수상자에게 내년 메이저 대회 출전권을 특전으로 주기로 했으나 이는 메이저 대회에 모두 출전 가능한 상위 랭커에게는 의미가 없다. 라이더컵이나 월드컵 이상의 명예를 올림픽에서 찾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박스기사] 리우올림픽의 골프 출전국과 선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의 연결 통로인 국제골프연맹(IGF)이 밝힌 남녀 60명씩 120명의 명단을 보면 120명 중에 유럽 52명, 아시아 29명, 남미 12명, 북미 11명,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각각 8명이 출전한다.

경기 방식은 남녀 각각 60명이 참가해 컷 탈락 없이 개인전 72홀로 치러진다. 컷 탈락이 없는 스트로크 플레이를 택한 이유는 최대한 많은 나라 선수들이 마지막까지 경기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게 올림픽 취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세계 랭킹 15위 이내 상위 국가에서는 최대 4명까지 출전할 수 있고 60위 이내면 2명까지 출전하도록 했다.

8월 11일부터 4일 간 펼쳐지는 남자 경기에서 미국은 출전을 고사한 세계 랭킹 2위 더스틴 존슨, 3위 조던 스피스를 빼고도 15위 매트 쿠차까지 4명이 출전한다. 세계 랭킹 51위인 스위스의 번트 비스베르거는 함께 출전할 선수가 없어서 혼자 출전한다. 한 명만 출전하는 나라는 모두 11개국이다. 피지의 비제이 싱과 콜롬비아의 카밀로 비예가스가 출전을 고사하면서 그 나라의 출전권은 사라졌고, 멕시코의 루돌포 카주본이 행운을 얻었다.

호주의 경우 세계 1위 제이슨 데이뿐만 아니라 세계 8위 아담 스콧과 45위인 마크 레시먼이 고사하면서 81위인 스콧 헨드, 86인 마커스 프레이저가 출전권을 물려받았다. 남아공도 세계 랭킹 10위 브렌든 그레이스를 비롯해 루이 우스투이젠(14위), 찰 슈웨첼(21위)까지 3명이 불참하면서 세계 랭킹 67위 자코 반 질과 90위인 브랜든 스톤이 출전한다.

일본에서는 세계 17위로 가장 순위가 높은 히데키 마쓰야마와 함께 69위이자 상금랭킹 1위인 히데토 타니하라도 불참하면서 이케다 유타(93위), 가타야마 신고(107위)가 출전하고 한국에서는 안병훈과 왕정훈이 출전한다. 아시안게임에서 병역면제를 이미 받은 김경태가 후배를 위해 출전권을 양보하면서 왕정훈이 출전권을 이어 받은 것이다.

17일부터 4일 간 열전을 펼치는 여자 경기에서 한국은 4명(박인비·김세영·양희영·전인지), 미국은 3명이 출전하며, 11명은 각 나라에서 한 명씩 출전해 총 34개국의 경합이 펼쳐진다. 한국에서는 메달 연금에 특별 장려금, 남자의 경우 병역 혜택까지 주어지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금메달이 단순 명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호주와 미국의 경우 금메달 보상금이 3000만원을 넘지 않는다. 한국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연금 상한액인 100만원을 매월 받는다. 특히 대한골프협회는 금메달 3억원, 은메달 1억5000만원, 동메달은 1억원을 특별 포상금으로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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