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집안 출신 탈북자 이성주씨의 실화 출간…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 식량 찾아 다니는 어른들 잡아가는 상무대 얘기 등 담아 중국 지린성 북·중 접경 지역의 탈북자 수용소. 중국내에서 잡힌 탈북자가 강제송환 전까지 수용되는 시설로 알려졌다.“우리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갔어. 중국으로 간다고 했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지.” 영범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고모 댁에 먹거리를 구하러 가신댔어.”
오랜 침묵 끝에 내가 말을 다시 이었다. “한 주 정도 걸릴 거라면서 돌아올 때까지 소금과 물을 먹으라더군. 그때가 한 열흘 전이었지, 아마.” 이번에는 날짜를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일이 있은 뒤 두려웠던 것 같다.
영범은 유감이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모든 유성, 북한에서 살아남아 탈출한 나의 실화 / 이성주, 수전 매크럴랜드 지음, 애뮬렛 북스 펴냄“나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거야?” 내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내 새 주방이 병원이야?”
영범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병원에 가봤자 이젠 약도 없어. 필요한 게 있으면 사거나 훔쳐서 의사에게 가져가야 해. 그러면 의사는 얼마나 복용할지 알려주곤 진료비를 받지. 시간 낭비야. 여기선 병 들면 스스로 알아서 해야 돼. 평양과 다르거든. 평양에선 아마 미래의 장군들이 절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겠지. 분명 평양의 병원들은 은으로 만들어졌을 거야. 지하철 승강기처럼.”
그 말에 나도 웃고 말았다. 영범의 말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승강기가 은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 빼고는.
“우리 외할아버지가 의사야.” 내가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도와주면 어쩌면 평양으로 돌아가 외할아버지를 찾아갈 수도 있겠는데.”
영범은 갑자기 발길을 멈추더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농담하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그래, 어쩌면 약간은. 아니, 정말이야.”
“철호하고 나는 우리가 조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줬을 때 네가 그냥 멍청한 척하는 줄 알았더니, 너 정말 모르는구나! 너희 잘난 가족은 평양에서 쫓겨났어. 평양 사람들은 정부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는 한 여기 살려고 오진 않아. 그리고 정부는 잘난 평양 사람들을 내보낼 때는 빈털터리로 만들지.”
“네 가족이 그 기차역에 도착한 순간 모두가 금방 알아봤어. 모두 평양 지하철의 번쩍이는 금속 승강기처럼 윤기가 흘렀거든. 모두가 네 아버지 등 뒤에서 정권의 큰 별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런 쓰레기 더미로 굴러 들어오겠지 하고 수군거렸지.”
뭔가가 목에 걸려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런 것들까지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 아버지를 배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영범의 말이 옳았다. 나는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불이 깜박거리다가 나가는 순간부터였다.
“너는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영범이 마치 진정으로 나를 위로하려는 듯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돌아갈 길을 찾아낸다고 해도 네 할아버지는 더는 거기 안 계셔. 누군가 정부 눈 밖에 나면 보통은 온 가족이 처벌을 받아. 네 의사 할아버지도 쫓겨났어. 쫓겨나지 않았다 해도 모든 걸 빼앗기고 홀로 거리로 나앉았을 걸. 절대 만나지 못해….”
나는 몸에서 모든 희망이 빠져나가는 듯해 고개를 떨구었다. 어느 찌는 듯 더운 날 구멍 난 컵에 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가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생각해?”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피하고 싶은 또 하나의 질문이었지만 알아야 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야. 네 어머니는 농사꾼들 차를 얻어 타야 하거든. 당연히 네가 상무에게 잡힐까봐 두려웠던 거지.”
“상무?”
“9.27 상무 얘기 못 들어봤어?”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물었다. 나는 신음하듯 그렇다고 말했다.
“정부가 9월 27일 상무를 결성했지. 집이나 학교에 없는 사람들을 수색해 보호소로 데려가는 경찰 집단이야. 아마 평양만 빼고 어느 도시에나 이들 9.27 상무대가 있을걸. 평양은 모두 집을 갖고 있고 어떤 잘못도 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인간들이 사는, 상상 속의 완벽한 이상향 같은 도시니까.”
“그러나 다른 곳에는 어디나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 식량을 찾아 다니는 어른들이 숱하게 많아. 이런 사람들을 거리에서 쓸어내는 게 상무의 일이야. 상무는 사람을 찾아내면 이른바 보호소로 보내. 어른과 아이들을 구분해 수용하지. 하지만 있을 만한 곳이 아냐. 구호소, 감방이야. 거리에선 상무를 청소부라고 불러. 하는 일이 그렇거든. 조선 땅에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쓸어내는 일이야.”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퍼뜩 나를 감방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겁나 내가 물었다. 어쩌면 영범도 그런 청소부 중 하나일지 모른다. “여기.” 그가 발길을 멈추며 말했다. 우리는 시장 언저리에 서 있었다.
“이봐,” 마치 내가 아니라 자신이 고통 받는 사람인 듯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나는 … 못하겠어.”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뭘 못하겠다고?”
“너를 돌봐줄 수 없어. 이젠 여기가 너의 부엌이야.” 영범이 시장 쪽으로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따라 상인들의 지친 눈, 광채가 사라진 눈들을 바라봤다. 남자들은 주름지고 퀭한 얼굴에 오다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콧물을 흘리고, 튀어나온 배에,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고운 자태와 우아한 몸동작으로 볼 때 어머니처럼 한때 백조처럼 아름다웠으리라. 하지만 이젠 영양부족으로 핏기 없는 피부에 흙먼지를 덮어쓰며 파리해지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넌 살아 있잖아.” 영범이 속삭였다.
“그런가?” 내가 내뱉듯 말하며 덧붙였다. “할아버지, 나를 돌봐주지 않는 그 할아버지가 내 어렸을 때 악몽은 항상 사실처럼 느껴진다고 말해주셨지. 어쩌면….”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영범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나는 하던 말을 마쳤다. “어쩌면 난 오래 전에 죽었을지 몰라. 그리고 이건 그냥 나의 악몽에 불과할 거야.”
- 이 성 주, 수전 매크럴랜드
[ 이 기사는 ‘모든 유성, 북한에서 살아남아 탈출한 나의 실화’에서 발췌했다. 저자 이성주 씨는 12세에 부모와 헤어진 뒤 구걸과 도둑질을 하며 탈북에 성공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서강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영국 워릭대학에서 유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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