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 캠퍼스로 옮겨간 이-팔 분쟁
미국 대학 캠퍼스로 옮겨간 이-팔 분쟁
1960년대 급진주의의 온상이던 UC 버클리에서 학생의 팔레스타인 과정 개설 문제로 반유대주의 갈등 심화돼 폴 하드웨(22)는 이스라엘을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한 팔레스타인 전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언행과 차림새는 자신이 다니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의 평범한 급우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가 멀리 내려다 보이는 캠퍼스 건물의 옥상에서 만났다. 회색 컨버스 운동화에 최신 유행 진바지와 청록색 티셔츠, 이어폰이 꼽힌 스마트폰과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값 등 겉모습은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그에게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9월 하드웨는 ‘이스라엘의 적’으로 지목됐다. 이스라엘 정부가 개입할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잠시 베이 에어리어의 전망을 즐겼다. 우리가 있는 곳은 하드웨가 10세까지 살았던 센트럴밸리 차우칠라에서 약 220㎞ 떨어져 있었다. 의사인 그의 아버지가 2003년 가족을 데리고 이주한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거주지 베이트 잘라 마을(베들레헴에서 멀지 않다)에선 약 1만1265㎞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우린 1964년 UC 버클리 학생들이 정치활동 제한에 항의하는 자유언론운동을 시작한 곳에선 겨우 몇 발짝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드웨에겐 그런 사실과 자신의 현재 처지가 대비되는 것이 이스라엘 정치보다, 심지어 그가 받은 살해 협박보다 더 화가 났다. 그는 팔레스타인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대학 당국을 두고 “그들은 학생들을 배신했다”고 말했다.
UC 버클리는 학생들이 교단에 서서 가르치는 프로그램의 전통이 깊다. 1965년 교내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조셉 터스먼 철학 교수는 학생과 교수 모두 학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책을 읽고 토론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실험적인 프로그램은 ‘디캘(DeCal) 과정’으로 불렸다. ‘캘리포니아대학의 민주적인 교육(Democratic Education at Cal)’이라는 뜻이다. 학생은 후원하는 교수와 학사위원회의 승인만 받으면 누구라도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과정을 개설해 가르칠 수 있다. 2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되는 디캘 과정은 지금도 상당히 인기 있다. 이번 학기에 UC 버클리가 제공하는 디캘 과정은 195개로 ‘제빵 입문 과정’부터 ‘수술 입문 과정’ ‘버클리 시평’까지 학부생 2만7000명의 다양한 호기심을 반영한다.
디캘 웹사이트는 그 과정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절차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며 독자적인 과정을 개설하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하드웨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2003년 미국을 떠난 하드웨의 가족은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무장 봉기)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서안에 도착했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서 잇따라 발생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자폭테러, 이스라엘군의 급습 등 피비린내 나는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평화협상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끝났을 때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가자 지구에서 날아오는 팔레스타인의 로켓포 공격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계속 ‘나라 없는 국민’으로 남았다.
하드웨의 가족은 기독교인이고 비교적 잘사는 편이다. 그런데도 하드웨는 2002년 이스라엘이 서안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한 이래 더욱 커진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서안 점령은 우리 삶에 큰 타격을 줬다”고 그는 돌이켰다. 이스라엘인 동년배들과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지 묻자 그는 냉소를 지었다. “8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이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아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 장벽은 재질과 높이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많은 이스라엘인은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선 장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드웨는 베들레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려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먼저 새크라멘토시티칼리지에 들어갔다가 미국 공립대학 순위에서 단골로 1위를 차지하는 UC 버클리에 편입했다. 대개는 대학에 진학하면 학문과 경험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평화와 분쟁을 전공으로 선택한 하드웨는 자신의 시야가 좁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난 팔레스타인에 관해 배우려고 이곳에 왔다. 다른 학문엔 관심이 없다.”
그는 UC 버클리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공정한 시각으로 다루는 과정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새 과정을 개설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을 학교가 제공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 공간을 만들겠다”고 그는 반항조로 말했다. 그 공간을 마련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사하는 눈빛이었다.
하드웨는 지난해 이슬람 학자인 하템 바지안 교수에게서 아랍어 과정을 들었다. 바지안 교수는 이스라엘을 불법국가로 비방하는 정치 행동주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름 방학 동안 바지안 교수는 하드웨가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지 분석’이라는 디캘 과정을 개설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드웨가 승인을 받기 위해 제출한 수업계획서에 따르면 그 과정의 목표는 ‘시온주의와 정착민 식민주의 사이의 연관성,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정의가 실현되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필독서 목록은 시온주의 프로젝트(이스라엘을 가리킨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에드워드 사이드(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컬럼비아 대학의 석좌교수를 지낸 비교 문학자이자 문명비평가)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저서가 대표적이다. 시온주의는 자주 언급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드웨에게 그의 과정이 유대인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없애버리는 것을 추구하는지 물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유대인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땅에서 그들을 내쫓으려는 생각은 없다. 근본적으로 나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부른다.” 하드웨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관해선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바지안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이 평등하게 대우 받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이 돌아올 수 있는 단일 국가를 꿈꾸는 듯했다. 그러나 인구 성장 추세가 압도적으로 팔레스타인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런 단일 국가는 사실상 이스라엘의 종말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드웨는 그런 점이 긴급히 논의돼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 과정은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라는 게 아니다. 목표는 역사 탐구다.” 하드웨가 제안한 과정은 바지안 교수의 후원과 근동학 학과장·학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그는 캠퍼스 곳곳에 자신의 과정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붙였다. 포스터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의 윤곽을 보여주는 지도 4개가 나란히 인쇄됐다. 첫 지도는 1918년의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거의 전부가 청록색(팔레스타인 영토를 뜻한다)이고 지중해 해안 부근에 검은 점(시온주의자 정착지)이 몇 개 보일 뿐이다. 1947년 지도는 이스라엘 건국 당시를 나타낸다. 1960년의 지도는 검은색이 압도적이다. 마지막 지도에선 청록색이 두 개로 분리된 줄모양으로만 남았다. 가자 지구와 서안이다.
학생 24명이 하드웨의 과정에 신청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학생도 6명이나 됐다. 지난 9월 6일이 개강일이었다.
최근 들어 미국의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베트남’으로 논란의 초점이 됐다. 올해 초 캘리포니아대학 전체 이사회는 ‘UC 캠퍼스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사건이 증가하는 추세’라며 ‘반유대주의와 반시온주의 등의 유대인 차별은 우리 대학에서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대인 단체들은 이것을 중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모든 대학에 이스라엘 거부를 촉구해온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학생들’(바지안 교수가 공동 창설자다) 같은 운동단체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하드웨의 과정과 관련된 언론의 첫 기사는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유대인 신문’으로 선전되는 알게마이너 신문 9월 8일자에 났다. ‘UC 버클리,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을 없애버리고 유대인 국가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교육과정 개설’이 제목이었다.
그 기사가 나가자 여러 유대계 미국인 단체들이 UC 버클리에 거세게 항의했다. 유대인 단체 앰차 이니셔티브는 총장에게 43개 단체가 서명한 서한을 보내며 그 과정의 폐지를 촉구했다. ‘하드웨와 바지안 교수가 유대인 국가를 혐오하고 제거하도록 학생들을 세뇌시키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UC 버클리의 정치학 교수 론 해스너도 그런 평가에 동의했다. 종교 분쟁에 관해 가르치는 그는 그 과정에 관해 듣고 섬뜩했다고 말했다. “야비할 정도로 편견이 지나치다.” 대학 당국도 동의했다. 교내 신문 데일리 캘리포니안은 지난 9월 15일 하드웨의 과정이 “잘못 승인돼” 취소됐다고 전했다. 그러자 불똥이 다른 쪽으로 튀었다. 친팔레스타인 웹사이트는 이스라엘 정부가 대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UC 버클리의 대변인 댄 모굴로프는 그 주장을 “간악한 소문”으로 일축하면서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또는 비공식 대표와 어떤 접촉도 없었다”고 밝혔다.
과정이 취소되자 하드웨는 친이스라엘 로비의 표적이 되는 학생을 변호하는 법률단체 팔레스타인 리걸의 도움을 받았다. 그를 담당하는 변호사는 UC 버클리 법학대학원을 나온 유대인 리즈 잭슨이다. 그녀는 몇 년 전 미국 유대인에게 제공되는 무료 여행 ‘생득권 이스라엘’에 참여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의 시각을 ‘반유대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미국의 시민권 투쟁이나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관한 연구를 ‘반백인주의’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옹호단체와 이스라엘 정부가 손잡고 미국 캠퍼스 내의 팔레스타인 문제 토론을 막으려는 시도가 이전에도 있었다.”
하드웨와 바지안 교수는 UC 버클리 문리·과학대의 칼라 헤세 학장을 만났다. 9월 19일 헤세 학장은 학사위원회와 사회과학과 과장들에게 ‘당사자들과 과정 심사와 자문에 관한 절차 문제를 합의했다’고 전했다. 과정의 명칭은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지 분석’에서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지 탐구’로 변경됐지만 하드웨가 가르치려는 내용과 방식은 그대로다. 그러자 당사자 모두가 불만족스러웠다. 하드웨와 지지자들은 대학이 정치적 압력과 언론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비판자들은 대학이 반유대주의를 용인했다고 주장했다. 학문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 자유가 왜곡됐다는 비난도 일었다. 하버드대학 법학대학원 교수로 이스라엘 옹호자인 앨런 더쇼위츠는 “이중 잣대의 문제”라며 “그에 상응하는 반팔레스타인주의 과정이 과연 용납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학문의 자유는 중립적인 단일 평가 기준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드웨의 변호사 잭슨은 더쇼위츠 교수의 견해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미국 전역에서 매일 반팔레스타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그녀는 시온주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진’ 이스라엘 역사 과정이 지난봄 UC 버클리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시온주의 관점의 교육과정을 반팔레스타인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 그의 말대로 학문의 자유는 정치적 관점과는 상관없이 중립적 단일 평가 기준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하드웨의 과정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UC 버클리에선 그런 중립적인 잣대가 적용되지 않았다.”
잭슨 변호사는 지난해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가 티나 마타르를 옹호해준 것처럼 UC 버클리가 하드웨를 지지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타르는 ‘팔레스타인인의 목소리’라는 과정을 개설하려 했다. 앰차 이니셔티브는 반대했지만 대학은 과정을 허용키로 결정했다. 몇 달 후 발표된 보고서는 ‘반대와 우려는 결정을 번복할 근거가 되지 못했다’며 대학의 결정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잭슨 변호사는 리버사이드 캠퍼스도 그랬는데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UC 버클리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여기엔 학문의 자유를 넘어서는 문제가 있다. 정치학 교수인 해스너는 하드웨의 과정을 둘러싼 소동이 반유대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져 “캠퍼스 내부의 유대인 학생들에게 아주 큰 심적 피해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의 과정이 부활했지만 UC 버클리에선 ‘유대인 세력’이 언론의 자유를 짓밟는다는 포스터가 캠퍼스에 나붙었다.
하드웨는 그런 포스터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을 변호하느라 기력이 빠졌다. 과정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번 사건으로 팔레스타인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어쩌면 이 모든 소동으로 하드웨는 어떤 과정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을지 모른다. 중동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은 언제나 분노와 비난, 긴장 고조, 격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결국엔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그 자리로 되돌아간다.
- 알렉산더 나자리안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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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시 베이 에어리어의 전망을 즐겼다. 우리가 있는 곳은 하드웨가 10세까지 살았던 센트럴밸리 차우칠라에서 약 220㎞ 떨어져 있었다. 의사인 그의 아버지가 2003년 가족을 데리고 이주한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거주지 베이트 잘라 마을(베들레헴에서 멀지 않다)에선 약 1만1265㎞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우린 1964년 UC 버클리 학생들이 정치활동 제한에 항의하는 자유언론운동을 시작한 곳에선 겨우 몇 발짝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드웨에겐 그런 사실과 자신의 현재 처지가 대비되는 것이 이스라엘 정치보다, 심지어 그가 받은 살해 협박보다 더 화가 났다. 그는 팔레스타인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대학 당국을 두고 “그들은 학생들을 배신했다”고 말했다.
UC 버클리는 학생들이 교단에 서서 가르치는 프로그램의 전통이 깊다. 1965년 교내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조셉 터스먼 철학 교수는 학생과 교수 모두 학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책을 읽고 토론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실험적인 프로그램은 ‘디캘(DeCal) 과정’으로 불렸다. ‘캘리포니아대학의 민주적인 교육(Democratic Education at Cal)’이라는 뜻이다. 학생은 후원하는 교수와 학사위원회의 승인만 받으면 누구라도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과정을 개설해 가르칠 수 있다. 2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되는 디캘 과정은 지금도 상당히 인기 있다. 이번 학기에 UC 버클리가 제공하는 디캘 과정은 195개로 ‘제빵 입문 과정’부터 ‘수술 입문 과정’ ‘버클리 시평’까지 학부생 2만7000명의 다양한 호기심을 반영한다.
디캘 웹사이트는 그 과정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절차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며 독자적인 과정을 개설하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하드웨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2003년 미국을 떠난 하드웨의 가족은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무장 봉기)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서안에 도착했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서 잇따라 발생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자폭테러, 이스라엘군의 급습 등 피비린내 나는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평화협상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끝났을 때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가자 지구에서 날아오는 팔레스타인의 로켓포 공격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계속 ‘나라 없는 국민’으로 남았다.
하드웨의 가족은 기독교인이고 비교적 잘사는 편이다. 그런데도 하드웨는 2002년 이스라엘이 서안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한 이래 더욱 커진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서안 점령은 우리 삶에 큰 타격을 줬다”고 그는 돌이켰다. 이스라엘인 동년배들과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지 묻자 그는 냉소를 지었다. “8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이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아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 장벽은 재질과 높이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많은 이스라엘인은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선 장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드웨는 베들레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려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먼저 새크라멘토시티칼리지에 들어갔다가 미국 공립대학 순위에서 단골로 1위를 차지하는 UC 버클리에 편입했다. 대개는 대학에 진학하면 학문과 경험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평화와 분쟁을 전공으로 선택한 하드웨는 자신의 시야가 좁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난 팔레스타인에 관해 배우려고 이곳에 왔다. 다른 학문엔 관심이 없다.”
그는 UC 버클리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공정한 시각으로 다루는 과정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새 과정을 개설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을 학교가 제공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 공간을 만들겠다”고 그는 반항조로 말했다. 그 공간을 마련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사하는 눈빛이었다.
하드웨는 지난해 이슬람 학자인 하템 바지안 교수에게서 아랍어 과정을 들었다. 바지안 교수는 이스라엘을 불법국가로 비방하는 정치 행동주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름 방학 동안 바지안 교수는 하드웨가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지 분석’이라는 디캘 과정을 개설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드웨가 승인을 받기 위해 제출한 수업계획서에 따르면 그 과정의 목표는 ‘시온주의와 정착민 식민주의 사이의 연관성,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정의가 실현되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필독서 목록은 시온주의 프로젝트(이스라엘을 가리킨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에드워드 사이드(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컬럼비아 대학의 석좌교수를 지낸 비교 문학자이자 문명비평가)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저서가 대표적이다. 시온주의는 자주 언급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드웨에게 그의 과정이 유대인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없애버리는 것을 추구하는지 물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유대인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땅에서 그들을 내쫓으려는 생각은 없다. 근본적으로 나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부른다.” 하드웨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관해선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바지안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이 평등하게 대우 받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이 돌아올 수 있는 단일 국가를 꿈꾸는 듯했다. 그러나 인구 성장 추세가 압도적으로 팔레스타인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런 단일 국가는 사실상 이스라엘의 종말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드웨는 그런 점이 긴급히 논의돼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 과정은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라는 게 아니다. 목표는 역사 탐구다.” 하드웨가 제안한 과정은 바지안 교수의 후원과 근동학 학과장·학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그는 캠퍼스 곳곳에 자신의 과정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붙였다. 포스터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의 윤곽을 보여주는 지도 4개가 나란히 인쇄됐다. 첫 지도는 1918년의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거의 전부가 청록색(팔레스타인 영토를 뜻한다)이고 지중해 해안 부근에 검은 점(시온주의자 정착지)이 몇 개 보일 뿐이다. 1947년 지도는 이스라엘 건국 당시를 나타낸다. 1960년의 지도는 검은색이 압도적이다. 마지막 지도에선 청록색이 두 개로 분리된 줄모양으로만 남았다. 가자 지구와 서안이다.
학생 24명이 하드웨의 과정에 신청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학생도 6명이나 됐다. 지난 9월 6일이 개강일이었다.
최근 들어 미국의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베트남’으로 논란의 초점이 됐다. 올해 초 캘리포니아대학 전체 이사회는 ‘UC 캠퍼스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사건이 증가하는 추세’라며 ‘반유대주의와 반시온주의 등의 유대인 차별은 우리 대학에서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대인 단체들은 이것을 중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모든 대학에 이스라엘 거부를 촉구해온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학생들’(바지안 교수가 공동 창설자다) 같은 운동단체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하드웨의 과정과 관련된 언론의 첫 기사는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유대인 신문’으로 선전되는 알게마이너 신문 9월 8일자에 났다. ‘UC 버클리,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을 없애버리고 유대인 국가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교육과정 개설’이 제목이었다.
그 기사가 나가자 여러 유대계 미국인 단체들이 UC 버클리에 거세게 항의했다. 유대인 단체 앰차 이니셔티브는 총장에게 43개 단체가 서명한 서한을 보내며 그 과정의 폐지를 촉구했다. ‘하드웨와 바지안 교수가 유대인 국가를 혐오하고 제거하도록 학생들을 세뇌시키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UC 버클리의 정치학 교수 론 해스너도 그런 평가에 동의했다. 종교 분쟁에 관해 가르치는 그는 그 과정에 관해 듣고 섬뜩했다고 말했다. “야비할 정도로 편견이 지나치다.” 대학 당국도 동의했다. 교내 신문 데일리 캘리포니안은 지난 9월 15일 하드웨의 과정이 “잘못 승인돼” 취소됐다고 전했다. 그러자 불똥이 다른 쪽으로 튀었다. 친팔레스타인 웹사이트는 이스라엘 정부가 대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UC 버클리의 대변인 댄 모굴로프는 그 주장을 “간악한 소문”으로 일축하면서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또는 비공식 대표와 어떤 접촉도 없었다”고 밝혔다.
과정이 취소되자 하드웨는 친이스라엘 로비의 표적이 되는 학생을 변호하는 법률단체 팔레스타인 리걸의 도움을 받았다. 그를 담당하는 변호사는 UC 버클리 법학대학원을 나온 유대인 리즈 잭슨이다. 그녀는 몇 년 전 미국 유대인에게 제공되는 무료 여행 ‘생득권 이스라엘’에 참여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의 시각을 ‘반유대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미국의 시민권 투쟁이나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관한 연구를 ‘반백인주의’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옹호단체와 이스라엘 정부가 손잡고 미국 캠퍼스 내의 팔레스타인 문제 토론을 막으려는 시도가 이전에도 있었다.”
하드웨와 바지안 교수는 UC 버클리 문리·과학대의 칼라 헤세 학장을 만났다. 9월 19일 헤세 학장은 학사위원회와 사회과학과 과장들에게 ‘당사자들과 과정 심사와 자문에 관한 절차 문제를 합의했다’고 전했다. 과정의 명칭은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지 분석’에서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지 탐구’로 변경됐지만 하드웨가 가르치려는 내용과 방식은 그대로다. 그러자 당사자 모두가 불만족스러웠다. 하드웨와 지지자들은 대학이 정치적 압력과 언론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비판자들은 대학이 반유대주의를 용인했다고 주장했다. 학문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 자유가 왜곡됐다는 비난도 일었다. 하버드대학 법학대학원 교수로 이스라엘 옹호자인 앨런 더쇼위츠는 “이중 잣대의 문제”라며 “그에 상응하는 반팔레스타인주의 과정이 과연 용납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학문의 자유는 중립적인 단일 평가 기준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드웨의 변호사 잭슨은 더쇼위츠 교수의 견해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미국 전역에서 매일 반팔레스타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그녀는 시온주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진’ 이스라엘 역사 과정이 지난봄 UC 버클리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시온주의 관점의 교육과정을 반팔레스타인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 그의 말대로 학문의 자유는 정치적 관점과는 상관없이 중립적 단일 평가 기준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하드웨의 과정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UC 버클리에선 그런 중립적인 잣대가 적용되지 않았다.”
잭슨 변호사는 지난해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가 티나 마타르를 옹호해준 것처럼 UC 버클리가 하드웨를 지지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타르는 ‘팔레스타인인의 목소리’라는 과정을 개설하려 했다. 앰차 이니셔티브는 반대했지만 대학은 과정을 허용키로 결정했다. 몇 달 후 발표된 보고서는 ‘반대와 우려는 결정을 번복할 근거가 되지 못했다’며 대학의 결정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잭슨 변호사는 리버사이드 캠퍼스도 그랬는데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UC 버클리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여기엔 학문의 자유를 넘어서는 문제가 있다. 정치학 교수인 해스너는 하드웨의 과정을 둘러싼 소동이 반유대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져 “캠퍼스 내부의 유대인 학생들에게 아주 큰 심적 피해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의 과정이 부활했지만 UC 버클리에선 ‘유대인 세력’이 언론의 자유를 짓밟는다는 포스터가 캠퍼스에 나붙었다.
하드웨는 그런 포스터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을 변호하느라 기력이 빠졌다. 과정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번 사건으로 팔레스타인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어쩌면 이 모든 소동으로 하드웨는 어떤 과정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을지 모른다. 중동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은 언제나 분노와 비난, 긴장 고조, 격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결국엔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그 자리로 되돌아간다.
- 알렉산더 나자리안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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