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트럼프 대선운동의 비밀병기였던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그는 소셜미디어를 십분 활용하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비밀스러운 데이터 시스템을 구축했다. 미국 현대정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승리를 거머쥔 트럼프의 ‘실세’ 쿠슈너를 알아본다.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현대정치 역사상 가장 뜻밖의 승리를 거두면서 뉴욕 시에 위치한 58층짜리 오닉스 유리 건물의 트럼프타워는 삽시간에 관심의 중심이 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기자 군단과 셀카를 찍으려는 관광객이 혹시라도 다음 미국 대통령이 지나가는 모습을 잡게 될까 희망을 안고 분홍색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걸 볼 수 있다. 한물 간 연예인들이 트럼프의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 에서 그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바로 그 건물의 26층으로 가면 대통령 당선인이 내각을 조각하는 회의실이 나온다. 내각 후보간 우열을 가리기 위한 이번 대회 또한 트럼프의 리얼리티 쇼처럼 온갖 우여곡절과 반전을 안고 있다.
승자가 누구인지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백악관 버전 어프렌티스’에서 가장 처참하게 패배한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Chris Christie)에 관심이 쏠려 있다. 정권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됐던 그는 얼마 전 자신과 연관된 다른 사람 대부분과 함께 해고됐다. 이 에피소드는 “스탈린식 숙청”으로 마무리 된 “칼싸움”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력 다툼 속에서 가장 눈을 뗄 수 없는 인물,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35)는 트럼프타워에 없다. 그는 트럼프타워에서 남쪽으로 3개 블록 떨어진 5번가 666번지 고층건물에 있다. 이 건물의 소유주인 그는 가문이 보유한 부동산 제국 ‘쿠슈너 컴퍼니’를 총괄한다. 흠 잡을 데 없이 말쑥한 그레이 맞춤 정장을 입은 트럼프의 사위는 역시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사무실의 브라운 가죽소파에 앉아 있었다. 매너 또한 흠 잡을 데 없이 정중했다. 35세의 청년은 자유세계를 이끄는 차기 지도자의 신뢰와 귀를 얻기 전에도 이렇게 깍듯한 매너로 영향력 있는 지인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얻을 수 있었다.
“6개월 전 크리스티 주지사와 나는 우리 사이 존재할지 모르는 간극보다 이번 대선이 훨씬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쿠슈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언론에서 추측이 무성한 걸 안다. 내가 언론과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크리스티 주지사)와 그의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와 맞먹는 반전이 있기 때문에 항간의 무성한 추측은 나름의 근거를 얻는다. 2005년 쿠슈너의 아버지를 탈세와 불법 선거자금 기부, 증인 매수로 수감한 사람이 당시 검사로 재직하던 크리스티다. ‘아버지를 위한 복수’ 이론은 제쳐 두더라도 쿠슈너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분명 지향성이 있고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 1년 전만 해도 쿠슈너는 정치 경험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세계 권력의 중심에 앉아 있다. 트럼프 진영 내부인들은 크리스티가 브리지 게이트로 물러났다고 주장하지만, 크리스티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 넣은 사람은 쿠슈너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그리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힘을 자기 능력으로 얻어냈다는 사실이다. 쿠슈너는 공적인 자리에서 발언을 한 적이 거의 없다. 포브스와의 만남은 그가 트럼프 선거본부와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 첫 인터뷰다. 그래도 그가 그나마 했던 소수의 인터뷰와 주변인 발언, 트럼프 선거본부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이 떠오른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세를 좋아하고 허세가 심한 대선 후보를 대통령 자리로 이끈 사람이 조용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 청년 거물이라는 사실이다.
“대선 운동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했던 재러드의 역할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다”고 실리콘밸리 거물 중 유일하게 트럼프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억만장자 피터 티엘은 말했다. “트럼프가 CEO라면, 재러드는 실질적 COO(최고운영책임자)다.”
“재러드 쿠슈너는 2016년 대선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변수”라고 클린턴 선거본부의 기술 시스템을 설계한 구글 전임 CEO 에릭 슈미트는 말했다. “내가 보기엔 실질적으로 어떤 자원도 없는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관리한 사람이 쿠슈너다.”
어떤 자원도 없다니, 처음에만 그랬을 거다. 그래도 대선 기간 내내 자금이 충분치 못했다는 점은 동감한다. 그래도 쿠슈너는 트럼프 대선운동(특히 선대본부의 비밀 정보작전)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처럼 경영하며 선거 결과를 뒤바꿀 경합주에서 전세를 역전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쓴 작전은 앞으로 다른 선거에서도 승패를 좌우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유권자를 정밀하게 파악해서 지지세력을 만들고 동기를 부여하는데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지난 8년간 많은 것이 변했다. 소셜미디어가 대표적이다.
신세대의 선거방식으로 승리를 거둔 그는 트럼프의 개인적 신뢰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런 만큼 적어도 4년 동안 쿠슈너는 권력의 꼭대기에서 ‘실세’라는 차별화된 입지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가 알았던 모든 대통령은 자신이 직감적으로, 또 정치 구조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한두 명 있었다”고 헨리 키신저 전임 국무장관은 말했다. 수십 년간 트럼프와 지인 관계였던 키신저는 현재 대통령 당선인에게 외교정책 자문을 주고 있다. “재러드가 그런 측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방카 트럼프의 남편’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게 없었던 쿠슈너는 도널드 트럼프 선거본부의 구원자로 차분히 부상했다. 사실 대선운동 초기에는 선거본부가 워낙 산만하고 허접해서 모두가 손을 모아 거들어야 했다. 처음 쿠슈너는 세금 및 무역에 관한 정책개발 조사를 도왔다. 그러나 지지자가 늘고 트럼프 열풍이 생기면서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트럼프와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창구로 쿠슈너를 의지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많은 사람과 관계를 쌓기 시작했다”고 말한 쿠슈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이 새어 나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할 말을 다 했다고 말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어떤 식이라도 트럼프 선거본부에 도움을 주거나 함께 일하면 공화당 정치판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래서인지 유능한 조세정책 전문가를 고용할 때 그가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자신이 우리 선거본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공개하면 안 된다. 둘째, 가격은 무조건 두 배로 낸다.”
트럼프 선거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쿠슈너의 역할은 커졌고, 그의 열정 또한 커졌다. 쿠슈너는 지난 11월 어느 월요일 밤,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트럼프 유세장이 지지자와 함성으로 꽉 찬 걸 보고 장인에게 ‘올인’할 것을 결심했다. “대중은 그의 메시지에서 진짜 희망을 얻었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대중은 뉴욕 미디어 종사자나 어퍼 이스트 사이드, 로빈후드 등의 자선재단 만찬에 나올 법한 사람들은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걸 원했다.” 특권층의 아들로 하버드를 졸업한 쿠슈너는 그렇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문구가 들어간 새빨간 모자를 쓰고 소매를 걷어 부쳤다.
당시 트럼프타워에 있는 선거본부는 권력공백 상태였다. 쿠슈너가 스프링필드에서 강렬한 운명의 손짓을 느끼기 몇 주 전 포브스가 트럼프타워 선거본부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거기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도 없었고, 직원들이 사용할 책상이나 의자, 컴퓨터도 없었다. 코리 르완도우스키 선거본부 매니저와 호프 힉스 대변인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전략이라고 해 봤자 TV 취재진을 불러서 헤드라인을 장식할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게 다였고, 일주일에 한두 번 유세장에 가서 기존 선거운동의 모양새를 흉내 낼 뿐이었다. 그래도 돈을 최대한 안 쓰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걸 보면 초경량 스타트업으로 볼 수 있었다. 쿠슈너는 제대로 된 선거본부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곧바로 연설 및 정책팀을 구성했고, 트럼프의 스케줄과 선거본부 재정을 관리했다. “장인은 ‘선거운동을 통해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사업을 할 때처럼 1달러라도 신중히 쓰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런 구조를 기반으로 선거본부가 구성됐지만, 주별로 시스템을 구축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본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트럼프에게 백악관 문을 열어준 결정은 지난 11월 스프링필드 유세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려졌다. 당시 둘은 ‘트럼프 포스 원’이라 불리는 그의 전용기 757기를 타고 있었다. 맥도널드 피시버거에 대해 한담을 나누던 장인과 사위는 대선운동에서 소셜미디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제로 넘어갔다. 트럼프는 사위에게 페이스북 활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트위터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트럼프는 기계치에 가깝다. 활자나 TV를 통해서만 뉴스를 접한다고 알려져 있고, 이메일을 보낼 때에는 그가 글로 남긴 쪽지를 비서가 스캔해서 첨부하는 식이다. 트럼프 측근 중 현대적 선거운동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 쿠슈너였다. 물론, 트럼프처럼 쿠슈너도 부동산 사업에만 종사해 왔다. 그러나 쿠슈너는 2006년 주간지 <뉴욕 옵서버> 를 인수하고 이후 고액부동산 거래 웹사이트 캐드리(Cadre)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미디어와 디지털 상거래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 전력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네트워크 안에는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다. 일단, 캐드리 공동투자자 중에는 피터 티엘과 마윈 알리바바 CEO가 있다. 남동생 조쉬 쿠슈너는 27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 받은 보험업계 ‘유니콘’ 오스카 헬스(Oscar Health) 공동창업자였다.
“실리콘밸리 친구들, 세계 최고의 디지털 마케터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우리 선거활동의 규모를 키울 방법을 물었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친구들은 디지털 마케팅을 수행하는 외주 계약업체를 소개해줬다.”
처음 쿠슈너는 일종의 베타 테스트 규모로 트럼프 모자 등의 선거 머천다이즈를 판매했다. “함께 일했던 기술기업의 직원을 불러서 페이스북 마이크로타겟팅(micro-targeting)에 관해 일대일 교습을 받았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트럼프의 단순한 돌직구에 소셜미디어를 접목하자 효과가 커졌다. 모자 등 선거 머천다이즈의 하루 매상이 8000달러에서 8만 달러로 급증했고, 그 결과 광고 효과도 배가됐다. 쿠슈너의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함께 입증됐다. 쿠슈너는 16만 달러를 투자해 트럼프가 카메라를 정면에서 응시하며 정책을 설명하는 간단한 동영상을 여러 편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들 동영상의 조회수는 총 7400만 회를 기록했다.
6월 공화당 공식 대선후보로 지명되면서 쿠슈너는 모든 데이터 기반 홍보전략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대선후보 지명 후 3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샌안토니오 외곽에 있는 밋밋한 건물에 선거자금 모집과 메시지 작성 및 전달, 유권자 타겟팅 등의 작업을 통합적으로 수행할 데이터 허브를 만들었다. 데이터 허브는 이후 100명의 직원을 둔 조직으로 커졌다. 비밀스러운 후방 지원조직은 트럼프 그룹(Trump Organization) 웹사이트를 만든 적이 있는 브래드 파스케일이 관리했다. 선거운동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면서 데이터 허브는 선거본부에서 내리는 모든 전략적 결정에 대해 방향을 잡아줬다. “우리 진영의 최고 능력자들은 대부분 나를 위해 무료로 봉사해준 사람들”이라고 쿠슈너는 말했다. “기업을 경영하던 사람들, 정치판에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쿠슈너는 투자 대비 수익을 최대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선거본부의 구조를 짰다. “선거인단 표를 얻기 위해 투자대비수익(ROI)을 최고로 올릴 수 있는 주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머니볼 전략을 짰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트럼프의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은 무엇인지 고심했다.” 10월 중순에 이루어진 연방선거관리 위원회(FEC) 제출 서류를 보면 트럼프 선거본부의 지출은 클린턴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트럼프가 자신만의 변칙적 스타일로 기존 방식을 고수한 경쟁자보다 훨씬 적은 돈을 쓰며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쿠슈너의 부족한 정치 경험은 오히려 그의 강점이 됐다. 기존의 선거운동 방식을 배운 적이 없었던 그는 실리콘밸리 벤처 사업가가 비대해진 산업의 한계를 파악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것처럼 정치라는 비즈니스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TV와 온라인 광고? 계속 줄여 나갔다. 대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한 선거운동이 펼쳐졌다. 쿠슈너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잠재적 지지자가 누구인지 파악했을 뿐 아니라 유권자에 관한 대량의 정보를 긁어 모으고 유권자 심리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했다.
“우리는 거침 없이 변화를 만들어 갔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장 저렴하게, 가장 빠르게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효과가 없는 작전은 바로 ‘킬(kill)’했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속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장 나면 신속히 고치고, 효과가 있으면 빠르게 키워나갔다.”
완전히 초보 스타트업은 아니었다. 쿠슈너팀은 공화당전국위원회의 데이터 관리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었고,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를 비롯한 타겟팅 전문 파트너를 고용해서 유권자집단 지도를 만들어 무역, 이민, 변화 등 트럼프 공약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미디어 분석기관 딥루트(Deep Root) 등을 활용해 오바마케어를 반대하는 사람은 드라마 를 많이 본다, <워킹데드(the walking dead)> 주요 시청자 층이 가장 우려하는 사안은 이민자 문제다 등, 특정 지역 특정 유권자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파악해 표적화된 광고를 하면서 TV 광고 지출 규모를 줄였다. 쿠슈너는 구글 지도 인터페이스에 유권자 유형 20가지의 인구밀도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맞춤형 위치 분석툴도 구축했다.
데이터 활동은 앞으로 지방 방문에서 모금 활동, 광고, 유세 장소, 심지어 연설문 주제에 이르기까지, 선거운동에 필요한 모든 결정을 좌우할 것이다. “그는 모든 조각을 하나로 모았다”고 파스케일은 말했다. “바깥 세상에서는 이런 저런 작은 조각에 집착을 하면서도 그 조각들이 아주 잘 조직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후원금 모집에는 기계학습을 이용했고, 디지털 마케팅 업체를 공개입찰 식으로 모집해 서로 경쟁하도록 했다. 효과가 없는 광고는 수 분 만에 중단시키고, 성공적인 광고는 바로 규모를 키웠다. 트럼프 선거본부는 목표 유권자에 맞춰 내용을 조금씩 바꾼 10만여 개 광고를 매일 내보냈다. 결국 역대 최고 부자 대통령인 트럼프는 2016년 초만 해도 조롱을 받았던 모금 활동으로 4개월 만에 2억500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대부분 소액 후원으로 얻은 돈이다. 선거가 막판을 향해 달려가면서 수익율이 좋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 유권자 데이터를 보유한 쿠슈너의 정보 시스템은 풍부한 자금과 함께 어디에 그 자금을 써야 할 지 알려주는 혜안을 제공했다. 미시건과 펜실베이니아에서 대세가 트럼프를 향해 간다는 사실을 확인한 쿠슈너는 이에 맞춤화된 TV 광고를 방영하며 막판 유세를 펼쳤다. 수천 명의 선거 봉사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운동을 했고, 유권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쿠슈너는 외부에 있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역할을 알리지 않은 채 모든 일을 다 해냈다. 힐러리 클린턴이 전체 득표수에서 200만 표 이상 앞서면서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허무하게 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기사에서 분명한 실마리를 얻게 될 지 모른다. 대선운동의 전반적 정서가 두려움과 분노였다면, 막판에 승패를 가른 변수는 모험을 시도하는 기업가정신과 데이터였다.
“재러드는 기존 미디어 종사자가 이해하지 못한 방식으로 온라인 세상을 이해했다. 그는 신기술을 이용해 아주 적은 자본으로 대선운동을 이끌었고, 결국 이겼다. 엄청난 일이다”라고 구글의 억만장자 에릭 슈미트가 말했다. “트럼프 선거본부가 자금이 없고, 사람도 없고,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수많은 기사를 기억하는가? 그런데 트럼프가 이겼다. 이를 이끈 사람이 바로 재러드다.”
침착하고 차분하며 자제력을 잃는 법이 없는 재러드 쿠슈너의 모습은 성격이나 스타일 면에서 그의 장인과 완벽히 대조된다. 트위터만 봐도 그렇다. 트럼프의 경우 1550만 명의 팔로워에게 즉흥적인 트윗을 보내는 걸로 유명하다 보니 대선운동 중 참모진이 그의 전화기를 압수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2009년 4월 트위터 계정을 연 걸로 확인된 쿠슈너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트윗을 올린 적이 없다.
트럼프 사무실에 가면 사방이 도널드 트럼프를 기리는 기념품으로 가득해서 마치 그의 신전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쿠슈너의 사무실은 별다른 장식품도 없고 수수하다. ‘조상의 가르침’을 뜻하는 유대교 서적 피르케이 애봇(Pirkei Avot) 가죽 양장본이 접견실 나무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신명기를 적은 은색 양피지 조각 메주자(mezuzah)가 모든 사무실 문을 장식하고 있다. 테라스가 딸린 널찍한 회의실에 있는 장식품이라고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민 온 조부모의 유화 그림뿐이다. 그러나 복도 끝에 위치한 대표 사무실에 들어가 보면 쿠슈너와 트럼프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당황하지 마라(Don’t Panic)”고 쓰여진 뉴욕 옵서버 페이지 액자 밑에 놓인 부동산 계약을 기념하는 여러 트로피와 액자 속에 곱게 모셔진 이방카의 여러 사진이다.
쿠슈너와 트럼프 안에서 일관되게 지속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가족’이다. 재러드와 이방카는 2007년 비즈니스 오찬에서 만나 데이트를 시작했다. 연애 초기만 해도 쿠슈너와 트럼프는 스쳐 지나가듯 한 두 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관계가 진지해지자 쿠슈너는 트럼프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따로 요청했다. (트럼프의 악명 높은 타코볼 트윗에 언급되어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던) 트럼프 그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은 이방카와 쿠슈너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방카와 진지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결혼까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입을 열었다”고 쿠슈너가 말하고 웃었다. “그러자 장인 어른이 ‘당연히 진심이어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재러드와 아버지가 처음 공감대를 이룬 계기는 나와 부동산”이라고 트럼프타워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방카 트럼프가 말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재러드는 아버지가 처음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닮은 점이 많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쿠슈너 또한 맨해튼 외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쿠슈너의 경우는 뉴저지, 트럼프는 퀸스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부동산 제국을 구축한 아버지를 가졌다는 점도 둘의 공통점이다. 재러드의 아버지 찰스 쿠슈너는 북동부 지역에서 아파트 2만5000채를 보유하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부동산을 가업으로 접하는 경험을 선사했다. “방학이 오면 아버지는 여름캠프 대신 당신의 사무실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건설현장에서 진행되는 작업을 구경했다. 실질적인 업무를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유대계였던 쿠슈너의 가족은 뉴저지 리빙스턴에서 살았다. 형제자매 3명과 함께 자란 쿠슈너는 유대계 사립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하버드에 입학했다. 이후 쿠슈너는 뉴욕대학교에서 법학 및 경영학 석사(JD/MBA) 복수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아버지는 민주당의 거액 후원자였다. 2002년에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고, 2000년에는 상원의원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9만 달러를 기부했다. 재러드 또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민주당 위원회에 6만 달러를 기부하고 클린턴에 1만1000달러를 후원했다. 대학원 시절, 쿠슈너는 맨해튼에서 오랜 시간 지방검사로 재직한 로버트 모겐타우 밑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때 가족이 스캔들에 휘말리며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2004년 아버지 찰스 쿠슈너가 조세 회피와 불법 선거자금 기부, 증인 매수로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증인 매수 혐의는 타블로이드의 먹잇감이 되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처남이 검사 측에 정보를 넘겨줬다는 사실에 화가 난 찰스 쿠슈너가 매춘부를 고용해 그를 유혹하게 만든 후 밀회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누이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24세에 불과했던 맏아들 재러드는 갑자기 가족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는 구심점 역할을 떠맡았다. 주중에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위로하고, 주말이 오면 앨라배마 교도소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스캔들을 계기로 당시 막 하버드에서 공부를 시작한 동생 조쉬와의 우애는 깊어졌다. 조쉬는 재러드를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형은 어떤 상황에서든 내게 길을 가르쳐주고 든든한 지지를 해주는, 내가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괜히 속을 끓일 필요가 없다는 걸 배웠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다만 그 일에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다음 번에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이런 원칙은 현재 쿠슈너가 이끌고 있는 가업에도 적용됐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는 맨해튼에 진출했다. 40년 전의 트럼프처럼, 쿠슈너도 미국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고 경쟁이 치열한 부동산 시장에서 놀기로 결심한 것이다. 타이밍은 최악이었다. 쿠슈너 기업의 CEO가 되어 처음 매입한 고액 부동산은 5번가 666번지였다. 무려 18억 달러를 주고 최고가를 경신하며 진행한 부동산 거래는 2007년 완료됐는데, 얼마 안 가 금융위기가 터졌다. 임대료는 급락하고, 임대차 계약이 깨지고, 자금이 증발했다. 파산을 면하기 위해 쿠슈너는 건물의 소매매장 중 49%를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 등의 기업에 매각하고 5억2500만 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운신의 폭을 얻기 위해 장기 상환금을 늘리는 대신 단기 상환금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능한 모든 대출계약 조건을 수정했다. 결국 그는 트럼프가 1990년대 선택했던 파산 전략을 쓰지 않으면서 고비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사태를 통해 쿠슈너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뉴욕에서도 가장 값비싼 블루칩 부동산을 노리지 말고, 앞으로 뜨게 될 ‘쿨’한 동네를 골라 수익을 내는 전략이었다. 이후 그는 맨해튼 소호와 이스트 빌리지, 브루클린 덤보 등에서 약 140억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을 인수하고 개발했다. 그는 아스토리아와 퀸스, 저지시티의 저널 스퀘어 등 새롭게 활기를 찾은 동네로도 사업을 확장시켰다. 프레드 트럼프와 찰스 쿠슈너가 각자 기반을 잡았던 근거지다.
재러드 쿠슈너가 이렇게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작스레 엄청난 영향력을 가져서, 미디어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나 그가 가진 모순도 큰 몫을 한다.
한 번 살펴보자. 그는 국경 폐쇄와 보호무역주의, 종교적 배타성을 외치는 후보의 선거운동에서 개방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는 실리콘밸리의 정신을 실현시켰다. 민주당에 거액을 기부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으면서 공화당 대선후보의 선거운동을 이끌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자인데 전쟁난민 입국 금지를 외친 남자를 위해 일한다. 팩트에 죽고 사는 변호사인데 지구 온난화는 사기이고,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 주장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시민권을 의심하며 물고 늘어지는 후보를 선택했다. 미디어 거물인데 거짓 뉴스로 동력을 얻은 선거 본부에서 일한다. 독실한 유대교인데 극우 세력과 KKK 지지를 받는 대선 후보에게 자문을 제공한다. 이런 모순점에 대해 쿠슈너는 자신의 마음 깊이 자리한 확신으로 답을 한다.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 선거본부에서 그의 역할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그는 10년 넘게 도널드 트럼프를 알아가며 축적한 ‘데이터’가 확신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이 욕한다면”이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경험적 데이터와 그를 겪으며 알게 된 사실을 생각한다. 쉽게 그 사람을 판단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정보와 데이터를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해서 그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스스로 알게 된 사실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기준으로 내 견해를 바꾸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트럼프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위한 선거에서 미국을 가장 우선시하고, 세계주의자(globalist)가 아닌 국가주의자(nationalist)가 되겠다는 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무슬림과 멕시코인, 여성, 전쟁포로, 군 장성에 대한 끊임 없는 모욕과 협박성 발언 등은? “사람들이 트럼프를 공격할 때 말하는 내용이 상당수 사실이 아니거나, 부풀려졌거나, 과장됐다는 걸 안다. 나는 그가 어떤 인격을 가졌는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지금과 다르게 그를 평가했다면 당연히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 거다. 트럼프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가 증오에 찬 주장이나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단언할 수 없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윤곽을 만들어가는 단계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민주당 정책 중에 공감하지 않는 것이 있고, 공화당 정책 중에도 공감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정치판은 현재 존재하는 범주에 사람들의 정치성향을 끼워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고 별로라고 생각하는 건 빼서 자신만의 범주를 따로 만들었다.” (그가 민주당의 전통적 명칭인 ‘Democratic Party’ 대신 공화당에서 민주당을 낮춰 부를 때 쓰는 ‘Democrat Party’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범주에 어떤 노선을 담았는지 은연 중 내비치기는 했다.)
반유대주의 혐의는 좀 더 뼈아팠다. 7월에 트럼프는 달러 뭉텅이를 배경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얼굴을 내세우고 유대교 다윗의 별에 “역사상 가장 부패한 후보”라고 적은 그림을 트위터에 올렸다. 백인 우월주의 웹사이트에서 나왔다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에 쿠슈너는 트럼프를 옹호하는 글로 답변을 대신했다. 논리는 한결같았다. 자신이 트럼프를 잘 안다는 것이었다. “엄격한 감독관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내세우는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발견됐다고 곧바로 ‘인종 차별주의자’ 프레임을 씌워 비난을 퍼붓는다면, 진짜 인종 차별주의자가 나타났을 때 남은 말은 무엇인가?”
쿠슈너는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최고위층부터 ‘증오’라는 요소를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69년 동안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갑자기 인종 차별주의자로 돌변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그는 말했다. “69년 동안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됐다고 갑자기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KKK나 백인 국수주의 극우파 등 극단적 비주류의 지지를 받는 건? “트럼프는 그들의 지지를 25번 거부했다. 그는 증오를 배격한다고 선을 그었고, 편견과 인종 차별주의도 거부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도대체 몇 번을 더 거부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이 했다는 말을 인용했다. “그들이 나를 지지한다 해서 나 또한 그들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쿠슈너는 트럼프의 전략 자문가 스티브 배넌(Steve Bannon)도 함께 지지하고 있다. 배넌의 전처는 그가 반유대주의 발언을 했다(배넌은 이를 부인)고 주장했으며, 그의 웹사이트 브레이트바르트(Breitbart)에는 인종 차별주의나 반유대주의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도그 휘슬(개에게만 들리는 호루라기, 표현만 보면 아무 문제 없지만 은유를 아는 사람에게는 의도를 전할 수 있는 정치 언어)’ 기사를 자주 올린다. “옵서버에서 출판한 모든 기사에 대해 내가 직접 쓴 것처럼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쿠슈너는 반박했다. “함께 일해봤기 때문에 스티브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는 대단한 시오니스트(Zionist)이고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이스라엘계 기업에 대한 투자철수 운동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이끌기도 했다. 함께 일하면서 내가 알게 된 스티브는 사람들이 그에게 덧씌운 이미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직접 본 걸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겠다.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를 믿는 대신, 그가 해낸 일을 보겠다.”
이는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공격한 트럼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를 보고 배신감을 느낀 그의 친구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지인 중 일부는 분을 참지 못해 그에게 비난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냥 한 꺼풀 벗겨진 거라고 보면 된다. 어떤 정치인을 지원하는가를 기준으로 상대와의 우정을 버리거나 사업을 중단하는 사람은 단편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사람들은 아주 변덕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걸 찾고,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지 검증해야 한다. 그 후에도 믿음이 변치 않았다면, 동조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
변덕스러웠던 친구 중 다수는 아마 쿠슈너에게 돌아올 것이다. 트럼프의 놀라운 대선 승리를 이끌어낸 쿠슈너는 차기 대통령에게 직접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난 1월9일 쿠슈너를 백악관 선임고문에 내정했다. 기술 대기업이나 재계 지도자들은 대부분 클린턴을 지지하고 입을 모아 트럼프를 비난했기 때문에 앞으로 쿠슈너를 중재인으로 내세울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도 그만큼 쿠슈너에게 많이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가 트럼프 임기 내내 백악관에 있을 거라고 본다”고 뉴스 코퍼레이션의 억만장자 루퍼트 머독이 말했다. “향후 4~8년 동안 그는 강력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부통령 다음으로 실세가 될 지도 모른다.”
- STEVE BERTONI 포브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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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가 누구인지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백악관 버전 어프렌티스’에서 가장 처참하게 패배한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Chris Christie)에 관심이 쏠려 있다. 정권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됐던 그는 얼마 전 자신과 연관된 다른 사람 대부분과 함께 해고됐다. 이 에피소드는 “스탈린식 숙청”으로 마무리 된 “칼싸움”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력 다툼 속에서 가장 눈을 뗄 수 없는 인물,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35)는 트럼프타워에 없다. 그는 트럼프타워에서 남쪽으로 3개 블록 떨어진 5번가 666번지 고층건물에 있다. 이 건물의 소유주인 그는 가문이 보유한 부동산 제국 ‘쿠슈너 컴퍼니’를 총괄한다. 흠 잡을 데 없이 말쑥한 그레이 맞춤 정장을 입은 트럼프의 사위는 역시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사무실의 브라운 가죽소파에 앉아 있었다. 매너 또한 흠 잡을 데 없이 정중했다. 35세의 청년은 자유세계를 이끄는 차기 지도자의 신뢰와 귀를 얻기 전에도 이렇게 깍듯한 매너로 영향력 있는 지인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얻을 수 있었다.
“6개월 전 크리스티 주지사와 나는 우리 사이 존재할지 모르는 간극보다 이번 대선이 훨씬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쿠슈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언론에서 추측이 무성한 걸 안다. 내가 언론과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크리스티 주지사)와 그의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와 맞먹는 반전이 있기 때문에 항간의 무성한 추측은 나름의 근거를 얻는다. 2005년 쿠슈너의 아버지를 탈세와 불법 선거자금 기부, 증인 매수로 수감한 사람이 당시 검사로 재직하던 크리스티다. ‘아버지를 위한 복수’ 이론은 제쳐 두더라도 쿠슈너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분명 지향성이 있고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 1년 전만 해도 쿠슈너는 정치 경험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세계 권력의 중심에 앉아 있다. 트럼프 진영 내부인들은 크리스티가 브리지 게이트로 물러났다고 주장하지만, 크리스티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 넣은 사람은 쿠슈너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그리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힘을 자기 능력으로 얻어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CEO라면, 재러드는 실질적인 COO
“대선 운동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했던 재러드의 역할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다”고 실리콘밸리 거물 중 유일하게 트럼프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억만장자 피터 티엘은 말했다. “트럼프가 CEO라면, 재러드는 실질적 COO(최고운영책임자)다.”
“재러드 쿠슈너는 2016년 대선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변수”라고 클린턴 선거본부의 기술 시스템을 설계한 구글 전임 CEO 에릭 슈미트는 말했다. “내가 보기엔 실질적으로 어떤 자원도 없는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관리한 사람이 쿠슈너다.”
어떤 자원도 없다니, 처음에만 그랬을 거다. 그래도 대선 기간 내내 자금이 충분치 못했다는 점은 동감한다. 그래도 쿠슈너는 트럼프 대선운동(특히 선대본부의 비밀 정보작전)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처럼 경영하며 선거 결과를 뒤바꿀 경합주에서 전세를 역전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쓴 작전은 앞으로 다른 선거에서도 승패를 좌우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유권자를 정밀하게 파악해서 지지세력을 만들고 동기를 부여하는데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지난 8년간 많은 것이 변했다. 소셜미디어가 대표적이다.
신세대의 선거방식으로 승리를 거둔 그는 트럼프의 개인적 신뢰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런 만큼 적어도 4년 동안 쿠슈너는 권력의 꼭대기에서 ‘실세’라는 차별화된 입지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가 알았던 모든 대통령은 자신이 직감적으로, 또 정치 구조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한두 명 있었다”고 헨리 키신저 전임 국무장관은 말했다. 수십 년간 트럼프와 지인 관계였던 키신저는 현재 대통령 당선인에게 외교정책 자문을 주고 있다. “재러드가 그런 측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세장 꽉 채운 지지자들 보고 장인에게 ‘올인’
트럼프 선거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쿠슈너의 역할은 커졌고, 그의 열정 또한 커졌다. 쿠슈너는 지난 11월 어느 월요일 밤,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트럼프 유세장이 지지자와 함성으로 꽉 찬 걸 보고 장인에게 ‘올인’할 것을 결심했다. “대중은 그의 메시지에서 진짜 희망을 얻었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대중은 뉴욕 미디어 종사자나 어퍼 이스트 사이드, 로빈후드 등의 자선재단 만찬에 나올 법한 사람들은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걸 원했다.” 특권층의 아들로 하버드를 졸업한 쿠슈너는 그렇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문구가 들어간 새빨간 모자를 쓰고 소매를 걷어 부쳤다.
당시 트럼프타워에 있는 선거본부는 권력공백 상태였다. 쿠슈너가 스프링필드에서 강렬한 운명의 손짓을 느끼기 몇 주 전 포브스가 트럼프타워 선거본부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거기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도 없었고, 직원들이 사용할 책상이나 의자, 컴퓨터도 없었다. 코리 르완도우스키 선거본부 매니저와 호프 힉스 대변인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전략이라고 해 봤자 TV 취재진을 불러서 헤드라인을 장식할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게 다였고, 일주일에 한두 번 유세장에 가서 기존 선거운동의 모양새를 흉내 낼 뿐이었다. 그래도 돈을 최대한 안 쓰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걸 보면 초경량 스타트업으로 볼 수 있었다. 쿠슈너는 제대로 된 선거본부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곧바로 연설 및 정책팀을 구성했고, 트럼프의 스케줄과 선거본부 재정을 관리했다. “장인은 ‘선거운동을 통해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사업을 할 때처럼 1달러라도 신중히 쓰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런 구조를 기반으로 선거본부가 구성됐지만, 주별로 시스템을 구축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본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트럼프에게 백악관 문을 열어준 결정은 지난 11월 스프링필드 유세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려졌다. 당시 둘은 ‘트럼프 포스 원’이라 불리는 그의 전용기 757기를 타고 있었다. 맥도널드 피시버거에 대해 한담을 나누던 장인과 사위는 대선운동에서 소셜미디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제로 넘어갔다. 트럼프는 사위에게 페이스북 활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트위터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트럼프는 기계치에 가깝다. 활자나 TV를 통해서만 뉴스를 접한다고 알려져 있고, 이메일을 보낼 때에는 그가 글로 남긴 쪽지를 비서가 스캔해서 첨부하는 식이다. 트럼프 측근 중 현대적 선거운동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 쿠슈너였다. 물론, 트럼프처럼 쿠슈너도 부동산 사업에만 종사해 왔다. 그러나 쿠슈너는 2006년 주간지 <뉴욕 옵서버> 를 인수하고 이후 고액부동산 거래 웹사이트 캐드리(Cadre)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미디어와 디지털 상거래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 전력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네트워크 안에는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다. 일단, 캐드리 공동투자자 중에는 피터 티엘과 마윈 알리바바 CEO가 있다. 남동생 조쉬 쿠슈너는 27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 받은 보험업계 ‘유니콘’ 오스카 헬스(Oscar Health) 공동창업자였다.
“실리콘밸리 친구들, 세계 최고의 디지털 마케터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우리 선거활동의 규모를 키울 방법을 물었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친구들은 디지털 마케팅을 수행하는 외주 계약업체를 소개해줬다.”
처음 쿠슈너는 일종의 베타 테스트 규모로 트럼프 모자 등의 선거 머천다이즈를 판매했다. “함께 일했던 기술기업의 직원을 불러서 페이스북 마이크로타겟팅(micro-targeting)에 관해 일대일 교습을 받았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트럼프의 단순한 돌직구에 소셜미디어를 접목하자 효과가 커졌다. 모자 등 선거 머천다이즈의 하루 매상이 8000달러에서 8만 달러로 급증했고, 그 결과 광고 효과도 배가됐다. 쿠슈너의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함께 입증됐다. 쿠슈너는 16만 달러를 투자해 트럼프가 카메라를 정면에서 응시하며 정책을 설명하는 간단한 동영상을 여러 편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들 동영상의 조회수는 총 7400만 회를 기록했다.
6월 공화당 공식 대선후보로 지명되면서 쿠슈너는 모든 데이터 기반 홍보전략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대선후보 지명 후 3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샌안토니오 외곽에 있는 밋밋한 건물에 선거자금 모집과 메시지 작성 및 전달, 유권자 타겟팅 등의 작업을 통합적으로 수행할 데이터 허브를 만들었다. 데이터 허브는 이후 100명의 직원을 둔 조직으로 커졌다. 비밀스러운 후방 지원조직은 트럼프 그룹(Trump Organization) 웹사이트를 만든 적이 있는 브래드 파스케일이 관리했다. 선거운동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면서 데이터 허브는 선거본부에서 내리는 모든 전략적 결정에 대해 방향을 잡아줬다. “우리 진영의 최고 능력자들은 대부분 나를 위해 무료로 봉사해준 사람들”이라고 쿠슈너는 말했다. “기업을 경영하던 사람들, 정치판에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에 소셜미디어 접목 주도
TV와 온라인 광고? 계속 줄여 나갔다. 대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한 선거운동이 펼쳐졌다. 쿠슈너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잠재적 지지자가 누구인지 파악했을 뿐 아니라 유권자에 관한 대량의 정보를 긁어 모으고 유권자 심리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했다.
“우리는 거침 없이 변화를 만들어 갔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장 저렴하게, 가장 빠르게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효과가 없는 작전은 바로 ‘킬(kill)’했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속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장 나면 신속히 고치고, 효과가 있으면 빠르게 키워나갔다.”
완전히 초보 스타트업은 아니었다. 쿠슈너팀은 공화당전국위원회의 데이터 관리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었고,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를 비롯한 타겟팅 전문 파트너를 고용해서 유권자집단 지도를 만들어 무역, 이민, 변화 등 트럼프 공약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미디어 분석기관 딥루트(Deep Root) 등을 활용해 오바마케어를 반대하는 사람은 드라마
데이터 활동은 앞으로 지방 방문에서 모금 활동, 광고, 유세 장소, 심지어 연설문 주제에 이르기까지, 선거운동에 필요한 모든 결정을 좌우할 것이다. “그는 모든 조각을 하나로 모았다”고 파스케일은 말했다. “바깥 세상에서는 이런 저런 작은 조각에 집착을 하면서도 그 조각들이 아주 잘 조직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후원금 모집에는 기계학습을 이용했고, 디지털 마케팅 업체를 공개입찰 식으로 모집해 서로 경쟁하도록 했다. 효과가 없는 광고는 수 분 만에 중단시키고, 성공적인 광고는 바로 규모를 키웠다. 트럼프 선거본부는 목표 유권자에 맞춰 내용을 조금씩 바꾼 10만여 개 광고를 매일 내보냈다. 결국 역대 최고 부자 대통령인 트럼프는 2016년 초만 해도 조롱을 받았던 모금 활동으로 4개월 만에 2억500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대부분 소액 후원으로 얻은 돈이다.
승패 가른 변수는 기업가정신과 데이터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쿠슈너는 외부에 있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역할을 알리지 않은 채 모든 일을 다 해냈다. 힐러리 클린턴이 전체 득표수에서 200만 표 이상 앞서면서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허무하게 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기사에서 분명한 실마리를 얻게 될 지 모른다. 대선운동의 전반적 정서가 두려움과 분노였다면, 막판에 승패를 가른 변수는 모험을 시도하는 기업가정신과 데이터였다.
“재러드는 기존 미디어 종사자가 이해하지 못한 방식으로 온라인 세상을 이해했다. 그는 신기술을 이용해 아주 적은 자본으로 대선운동을 이끌었고, 결국 이겼다. 엄청난 일이다”라고 구글의 억만장자 에릭 슈미트가 말했다. “트럼프 선거본부가 자금이 없고, 사람도 없고,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수많은 기사를 기억하는가? 그런데 트럼프가 이겼다. 이를 이끈 사람이 바로 재러드다.”
침착하고 차분하며 자제력을 잃는 법이 없는 재러드 쿠슈너의 모습은 성격이나 스타일 면에서 그의 장인과 완벽히 대조된다. 트위터만 봐도 그렇다. 트럼프의 경우 1550만 명의 팔로워에게 즉흥적인 트윗을 보내는 걸로 유명하다 보니 대선운동 중 참모진이 그의 전화기를 압수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2009년 4월 트위터 계정을 연 걸로 확인된 쿠슈너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트윗을 올린 적이 없다.
트럼프 사무실에 가면 사방이 도널드 트럼프를 기리는 기념품으로 가득해서 마치 그의 신전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쿠슈너의 사무실은 별다른 장식품도 없고 수수하다. ‘조상의 가르침’을 뜻하는 유대교 서적 피르케이 애봇(Pirkei Avot) 가죽 양장본이 접견실 나무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신명기를 적은 은색 양피지 조각 메주자(mezuzah)가 모든 사무실 문을 장식하고 있다. 테라스가 딸린 널찍한 회의실에 있는 장식품이라고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민 온 조부모의 유화 그림뿐이다. 그러나 복도 끝에 위치한 대표 사무실에 들어가 보면 쿠슈너와 트럼프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당황하지 마라(Don’t Panic)”고 쓰여진 뉴욕 옵서버 페이지 액자 밑에 놓인 부동산 계약을 기념하는 여러 트로피와 액자 속에 곱게 모셔진 이방카의 여러 사진이다.
쿠슈너와 트럼프 안에서 일관되게 지속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가족’이다. 재러드와 이방카는 2007년 비즈니스 오찬에서 만나 데이트를 시작했다. 연애 초기만 해도 쿠슈너와 트럼프는 스쳐 지나가듯 한 두 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관계가 진지해지자 쿠슈너는 트럼프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따로 요청했다. (트럼프의 악명 높은 타코볼 트윗에 언급되어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던) 트럼프 그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은 이방카와 쿠슈너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방카와 진지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결혼까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입을 열었다”고 쿠슈너가 말하고 웃었다. “그러자 장인 어른이 ‘당연히 진심이어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재러드와 아버지가 처음 공감대를 이룬 계기는 나와 부동산”이라고 트럼프타워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방카 트럼프가 말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재러드는 아버지가 처음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닮은 점이 많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쿠슈너 또한 맨해튼 외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쿠슈너의 경우는 뉴저지, 트럼프는 퀸스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부동산 제국을 구축한 아버지를 가졌다는 점도 둘의 공통점이다. 재러드의 아버지 찰스 쿠슈너는 북동부 지역에서 아파트 2만5000채를 보유하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부동산을 가업으로 접하는 경험을 선사했다. “방학이 오면 아버지는 여름캠프 대신 당신의 사무실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건설현장에서 진행되는 작업을 구경했다. 실질적인 업무를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유대계였던 쿠슈너의 가족은 뉴저지 리빙스턴에서 살았다. 형제자매 3명과 함께 자란 쿠슈너는 유대계 사립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하버드에 입학했다. 이후 쿠슈너는 뉴욕대학교에서 법학 및 경영학 석사(JD/MBA) 복수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아버지는 민주당의 거액 후원자였다. 2002년에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고, 2000년에는 상원의원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9만 달러를 기부했다. 재러드 또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민주당 위원회에 6만 달러를 기부하고 클린턴에 1만1000달러를 후원했다. 대학원 시절, 쿠슈너는 맨해튼에서 오랜 시간 지방검사로 재직한 로버트 모겐타우 밑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때 가족이 스캔들에 휘말리며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2004년 아버지 찰스 쿠슈너가 조세 회피와 불법 선거자금 기부, 증인 매수로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증인 매수 혐의는 타블로이드의 먹잇감이 되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처남이 검사 측에 정보를 넘겨줬다는 사실에 화가 난 찰스 쿠슈너가 매춘부를 고용해 그를 유혹하게 만든 후 밀회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누이에게 보낸 것이다.
쿠슈너와 트럼프의 공통 이데올로기는 ‘가족’
“그 일을 계기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괜히 속을 끓일 필요가 없다는 걸 배웠다”고 쿠슈너는 말했다. “다만 그 일에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다음 번에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이런 원칙은 현재 쿠슈너가 이끌고 있는 가업에도 적용됐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는 맨해튼에 진출했다. 40년 전의 트럼프처럼, 쿠슈너도 미국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고 경쟁이 치열한 부동산 시장에서 놀기로 결심한 것이다. 타이밍은 최악이었다. 쿠슈너 기업의 CEO가 되어 처음 매입한 고액 부동산은 5번가 666번지였다. 무려 18억 달러를 주고 최고가를 경신하며 진행한 부동산 거래는 2007년 완료됐는데, 얼마 안 가 금융위기가 터졌다. 임대료는 급락하고, 임대차 계약이 깨지고, 자금이 증발했다. 파산을 면하기 위해 쿠슈너는 건물의 소매매장 중 49%를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 등의 기업에 매각하고 5억2500만 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운신의 폭을 얻기 위해 장기 상환금을 늘리는 대신 단기 상환금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능한 모든 대출계약 조건을 수정했다. 결국 그는 트럼프가 1990년대 선택했던 파산 전략을 쓰지 않으면서 고비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사태를 통해 쿠슈너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뉴욕에서도 가장 값비싼 블루칩 부동산을 노리지 말고, 앞으로 뜨게 될 ‘쿨’한 동네를 골라 수익을 내는 전략이었다. 이후 그는 맨해튼 소호와 이스트 빌리지, 브루클린 덤보 등에서 약 140억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을 인수하고 개발했다. 그는 아스토리아와 퀸스, 저지시티의 저널 스퀘어 등 새롭게 활기를 찾은 동네로도 사업을 확장시켰다. 프레드 트럼프와 찰스 쿠슈너가 각자 기반을 잡았던 근거지다.
재러드 쿠슈너가 이렇게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작스레 엄청난 영향력을 가져서, 미디어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나 그가 가진 모순도 큰 몫을 한다.
한 번 살펴보자. 그는 국경 폐쇄와 보호무역주의, 종교적 배타성을 외치는 후보의 선거운동에서 개방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는 실리콘밸리의 정신을 실현시켰다. 민주당에 거액을 기부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으면서 공화당 대선후보의 선거운동을 이끌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자인데 전쟁난민 입국 금지를 외친 남자를 위해 일한다. 팩트에 죽고 사는 변호사인데 지구 온난화는 사기이고,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 주장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시민권을 의심하며 물고 늘어지는 후보를 선택했다. 미디어 거물인데 거짓 뉴스로 동력을 얻은 선거 본부에서 일한다. 독실한 유대교인데 극우 세력과 KKK 지지를 받는 대선 후보에게 자문을 제공한다.
“트럼프는 미국을 가장 우선시하는 국가주의자”
“내가 잘 아는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이 욕한다면”이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경험적 데이터와 그를 겪으며 알게 된 사실을 생각한다. 쉽게 그 사람을 판단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정보와 데이터를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해서 그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스스로 알게 된 사실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기준으로 내 견해를 바꾸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트럼프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위한 선거에서 미국을 가장 우선시하고, 세계주의자(globalist)가 아닌 국가주의자(nationalist)가 되겠다는 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무슬림과 멕시코인, 여성, 전쟁포로, 군 장성에 대한 끊임 없는 모욕과 협박성 발언 등은? “사람들이 트럼프를 공격할 때 말하는 내용이 상당수 사실이 아니거나, 부풀려졌거나, 과장됐다는 걸 안다. 나는 그가 어떤 인격을 가졌는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지금과 다르게 그를 평가했다면 당연히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 거다. 트럼프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가 증오에 찬 주장이나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단언할 수 없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윤곽을 만들어가는 단계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민주당 정책 중에 공감하지 않는 것이 있고, 공화당 정책 중에도 공감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정치판은 현재 존재하는 범주에 사람들의 정치성향을 끼워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고 별로라고 생각하는 건 빼서 자신만의 범주를 따로 만들었다.” (그가 민주당의 전통적 명칭인 ‘Democratic Party’ 대신 공화당에서 민주당을 낮춰 부를 때 쓰는 ‘Democrat Party’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범주에 어떤 노선을 담았는지 은연 중 내비치기는 했다.)
반유대주의 혐의는 좀 더 뼈아팠다. 7월에 트럼프는 달러 뭉텅이를 배경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얼굴을 내세우고 유대교 다윗의 별에 “역사상 가장 부패한 후보”라고 적은 그림을 트위터에 올렸다. 백인 우월주의 웹사이트에서 나왔다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에 쿠슈너는 트럼프를 옹호하는 글로 답변을 대신했다. 논리는 한결같았다. 자신이 트럼프를 잘 안다는 것이었다. “엄격한 감독관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내세우는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발견됐다고 곧바로 ‘인종 차별주의자’ 프레임을 씌워 비난을 퍼붓는다면, 진짜 인종 차별주의자가 나타났을 때 남은 말은 무엇인가?”
쿠슈너는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최고위층부터 ‘증오’라는 요소를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한다. “69년 동안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갑자기 인종 차별주의자로 돌변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그는 말했다. “69년 동안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됐다고 갑자기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트럼프와 재계 지도자들의 중재인 역할 가능성
쿠슈너는 트럼프의 전략 자문가 스티브 배넌(Steve Bannon)도 함께 지지하고 있다. 배넌의 전처는 그가 반유대주의 발언을 했다(배넌은 이를 부인)고 주장했으며, 그의 웹사이트 브레이트바르트(Breitbart)에는 인종 차별주의나 반유대주의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도그 휘슬(개에게만 들리는 호루라기, 표현만 보면 아무 문제 없지만 은유를 아는 사람에게는 의도를 전할 수 있는 정치 언어)’ 기사를 자주 올린다. “옵서버에서 출판한 모든 기사에 대해 내가 직접 쓴 것처럼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쿠슈너는 반박했다. “함께 일해봤기 때문에 스티브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는 대단한 시오니스트(Zionist)이고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이스라엘계 기업에 대한 투자철수 운동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이끌기도 했다. 함께 일하면서 내가 알게 된 스티브는 사람들이 그에게 덧씌운 이미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직접 본 걸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겠다.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를 믿는 대신, 그가 해낸 일을 보겠다.”
이는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공격한 트럼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를 보고 배신감을 느낀 그의 친구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지인 중 일부는 분을 참지 못해 그에게 비난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냥 한 꺼풀 벗겨진 거라고 보면 된다. 어떤 정치인을 지원하는가를 기준으로 상대와의 우정을 버리거나 사업을 중단하는 사람은 단편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사람들은 아주 변덕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걸 찾고,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지 검증해야 한다. 그 후에도 믿음이 변치 않았다면, 동조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
변덕스러웠던 친구 중 다수는 아마 쿠슈너에게 돌아올 것이다. 트럼프의 놀라운 대선 승리를 이끌어낸 쿠슈너는 차기 대통령에게 직접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난 1월9일 쿠슈너를 백악관 선임고문에 내정했다. 기술 대기업이나 재계 지도자들은 대부분 클린턴을 지지하고 입을 모아 트럼프를 비난했기 때문에 앞으로 쿠슈너를 중재인으로 내세울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도 그만큼 쿠슈너에게 많이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가 트럼프 임기 내내 백악관에 있을 거라고 본다”고 뉴스 코퍼레이션의 억만장자 루퍼트 머독이 말했다. “향후 4~8년 동안 그는 강력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부통령 다음으로 실세가 될 지도 모른다.”
- STEVE BERTONI 포브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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