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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표상' 제주 거상 김만덕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⑱]

구휼미 560섬 기부, 천인(賤人)임에도 전기 [만덕전] 나와
유언으로 전 재산 제주도민에게 환원

 
 
거상 김만덕 [사진 문화재청]
 
1796년(정조 20년) 11월 25일, 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제주의 기녀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렸다고 목사가 장계로 보고하였다. 상을 내리려고 하자 만덕이 사양하면서 금강산을 유람하길 원하니 허락하고, 인근의 고을이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제주도에 사는 만덕이라는 사람이 재산을 내놓아 백성 구호에 이바지한 공을 기려 금강산 여행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당시 제주도민은 나라의 허락이 없으면 육지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조정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실록 기록은 너무 간략하다. 만덕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 소식이 조정에까지 알려진 계기가 무엇인지, 더는 나와 있지 않다. 대신 정조가 직접 쓴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에 관련 내용이 있다. 같은 해 6월 6일 자에 실린 제주 목사의 장계다. “노기(老妓) 만덕이 스스로 백미 60섬을 바쳤습니다. 만덕은 사리상 진실로 구할 것이 없는데도 재물을 가볍게 여길 줄 아니, 비천한 무리가 그리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노기란 은퇴한 늙은 기녀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기녀를 천한 신분으로 여겼는데, 그런 기녀 출신이 무려 백미 60섬을 구휼미로 자진 헌납하니(만덕은 추가로 500섬을 구휼미로 내놓았다고 한다. 560섬이면 동등비교는 어렵겠지만 3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목사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전현직 관리를 제외하면 가장 큰 기부액이었다. 자신들만이 윤리 도덕을 이해하고 공공의 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양반사대부의 시각에서 “아니, 비천한 자가 어찌 이런 기특한 생각을?”이라 여겼다고 보면 된다.
 

굶주리고 궁핍한 백성 살린 ‘대가없는 기부’

아무튼 장계를 받아 본 정조는 “노기 만덕은 무엇을 원하기에 이렇게 면 100포에 가까운 백미를 마련하여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 것인가? 면천해 주든지 별도로 보상해 주든지 간에 그가 원하는 대로 시행해 준 뒤에 진행 상황을 장계로 보고하라”라고 지시했다. 훌륭한 일을 하였으니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덕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제주 목사가 후속 조치를 보고한 7월 28일자 [일성록]의 기록이다. “신이 삼가 전하의 뜻을 받들어 만덕에게 알리니, 만덕이 고하길 ‘저는 늙고 자식도 없으니 면천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죽기 전 소원이 있다면 한양과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그가 바라는 바에 따라 육지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정조는 감탄했다. 많은 재산을 기부했기에 무언가 바라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지 금강산 구경을 한번 하고 싶을 뿐이라니. 정조는 “만덕이 비록 천인(賤人)이기는 하나 의로운 기상은 옛날의 정의로운 협객에 못지않다. 지금은 겨울이니 봄이 올 때까지 양식을 주어 내의원 차비대령 행수(行首, 우두머리) 의녀로 머물게 하고 각별하게 돌보아 주라. 그리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가는 연로에 있는 수령들에게 분부하여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라”(일성록 11월 25일)고 하교했다.
 
만덕에게 내의원의 수석 의녀라는 명예직을 하사한 것은 궁궐에 들어와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하고(실제로 알현한 것은 중전과 세자빈이다) 한양 체류 경비를 지급하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금강산 여행 비용까지 넉넉히 지원해주었으니, 그야말로 최상으로 예우한 것이다. 이는 조선 역사상 전례 없던 일로 당시 지식인들로부터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정조가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만덕’에 대해 서술하라는 시험문제를 냈고, 이가환, 박제가, 정약용이 만덕을 추켜세우는 글을 지었으며, 재상이었던 채제공이 만덕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 [만덕전]을 집필했을 정도다.
 

전 재산 사회환원으로 ‘부자의 사회적 책임’ 모범  

그런데 안타깝게도 만덕에 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금씩 전해지는 흔적을 모아 연결해보면, 그는 양인(良人)으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잃고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제주 관아의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기녀 시절에 근검절약하여 돈을 모았는데, 심노숭이 남긴 글을 보면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노숭은 만덕을 싫어한 사람이니 그의 말을 모두 믿을 것은 없겠지만, 만덕이 돈을 악착같이 모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만덕은 기녀를 그만두고 장사에 눈을 돌렸다. 처음 시작한 사업은 객주(客主)였는데, 육지와 제주를 오가며 돈을 버는 상인들을 보고 물류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본래 제주는 물류, 유통과 운송이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우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육지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가 힘들다. 특히 땅이 척박하여 쌀 등 곡식이 상시 부족했다. 반면에 최상 등급의 말을 키우는 곳으로, 자연히 최고품질의 양태(涼臺)와 총모(驄帽), 즉 갓을 만드는 두 핵심 재료의 독점적 공급지이기도 했다. 감귤과 같은 특산품, 양질의 해곽(海藿)도 생산했다. 그러니 제주로 들여오는 것이든, 제주 밖으로 나가는 것이든 물류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이윤을 얻을 기회도 많았다. 만덕은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만덕은 육지 상인과 연계하여 안전하고 신속한 유통망을 구축하고, 소규모 생산자를 규합하여 제주 특산물의 우월적 공급자의 위치를 확보했다. 그리고 양쪽 물가의 차이를 이용하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둔다. 육지에서 온 장사꾼이 만덕으로 인해 패가망신한 이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공격적인 사업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만덕은 그를 시기한 다른 상인들의 허위 신고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한데 만덕이 이 단계에서 머물렀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축적했든 간에 사업이 위태로워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업방식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데다가 기녀 출신이라며 깔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힘을 합쳐 공격했다면 만덕이라도 당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덕이 대규모 재산을 희사하여 백성 구휼에 나선 것은, 물론 순수하고 선한 의도였겠지만, 바로 이러한 공격을 막아주는 효과도 가져왔다. 왕과 재상이 직접 만덕을 칭찬하고, 만덕에게 도움받은 백성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니, 이후론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만덕은 1812년 눈을 감으면서 양아들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기부하였는데,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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