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의 ‘심장’ 엔진 정비 한 우물만 ‘34년’ [대한민국 명장]
정경남 항공 명장
국산 전투기부터 위그선 엔진 개발 도전
“항공산업 발전 위해 후학 양성에 힘쓸 것”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699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편집자주>
[이코노미스트 송현주 기자] 오래 전부터 인류는 하늘을 나는 꿈을 꿔왔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도전을 해왔다. 높은 지형에서 낙하해 보거나, 새의 날갯짓 원리를 따라 기구를 만들어 보는 등 다양한 도전들이 이어진 가운데, 마침내 인류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사례가 등장하게 된다. 1783년 11월 프랑스에서 열기구로 비행에 성공한 ‘몽골피에 형제’와 1891년 글라이더를 이용한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 등이 그중 하나다.
그러나 이는 자연 현상과 물리학적 법칙을 활용한 짧은 시간의 비행이었다. 안정적이고 완벽한 비행을 위해서는 날씨나 바람 등 외부 요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했다. 인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없는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고, 마침내 오늘날의 비행기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 비행기는 ‘추진 장치를 갖추고, 고정 날개에 생기는 양력을 이용해 비행하는 항공기’를 말한다. 즉, 비행기는 스스로 하늘로 날아올라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엔진’이라는 뜻이다.
항공기 ‘엔진’ 정비의 선구자
항공 정비 분야에서 국내 처음으로 군인 출신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정경남 명장은 항공기의 ‘엔진’을 책임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8월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경남도립남해대학교와 아론비행선박에서 정경남 명장을 만났다.
정 명장은 “쉬지 않고 박동하는 사람의 심장처럼 비행 중 쉬지 않고 작동하면서 비행기를 운항하게 하는 ‘엔진’이야말로 항공기의 심장”이라며 본지 인터뷰 내내 엔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34년간 항공 정비 분야에서 엔진 장비 개발을 담당해왔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독자 개발한 군용 항공기 KT-을 포함해 T-37, T-33, T-59 등에 부착된 엔진을 개발·수리한 정 명장은 베테랑 ‘항공기 엔진 정비사’다.
정 명장은 1983년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2월 공군제3훈련비행단 배속 하사로 임관했다. 임관하자마자 항공 정비 부문 실무를 시작했다. 그의 주전공은 엔진이다. 이렇게 시작된 항공기 엔진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는 “엔진은 겉보기에 투박한 금속 같지만,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 정도의 세밀한 공정이 필요하다”며 “부품의 품질이 엔진의 수명에 영향을 주는 만큼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늘 대형 사고는 엔진 때문에 발생한다”며 “사람도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엔진에 이상이 발생하면 항공기에 불이 붙는다든가 아니면 프레임 아웃된다든가 출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명장은 항공기 엔진세척 보조장치와 엔진 점화계통 시험장비 등 수많은 방안들을 개발해 왔다. 엔진 검사뿐 아니라 기본 엔진을 가져와 실험하고 장착해 시스템을 완성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엔진을 설계하고, 조종석에서 조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통합하는 작업을 완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KT-1’부터 ‘M-80’까지…개발 직접 참여
대표적인 게 국내 최초의 공군조종사의 비행훈련을 위한 기본훈련기인 KT-1이다. 공군에서 KT-1은 임관한 지 1년 정도의 소위~중위 계급의 초급교육생의 비행교육에 사용한다. KT-1 훈련기는 노후화한 미국산 공군 중등훈련기(T-37)를 대체하기 위해 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항공우주산업이 1990년대부터 개발한 국내 최초 양산 군용기다.
지난 2000년부터 실전 배치되기 시작한 KT-1 훈련기는 뛰어난 스핀회복 능력과 높은 연료 소비율로 학생 조종사 비행 훈련에 쓰인다. KT-1은 단발 터보프롭 항공기로 편대비행·야간비행·계기비행·중고도항법 비행뿐만 아니라 기본훈련에서 요구하는 기동비행을 한다. 최고 속도는 시속 574㎞, 기체 무게는 1910kg, 최대 무장 시 3311kg, 엔진 추력은 950마력이다. 탑승 인원은 2명이다. 일반적인 명칭은 웅비다.
그는 “그간 국산 항공기 개발에 참여를 많이 했지만 KT-1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KT-1은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탐색개발을 시작으로 선행개발 4년, 실용개발 2년 등 약 11여 년의 개발기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KT-1 항공기 엔진세척장비를 창안한 정 명장은 항공 분야의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기능인으로 인정받아 오며 수많은 표창장도 수상했다. 군 생활을 통해 총 14회의 표창 수상, 2009년 4월 이달의 공군인으로 선정되는 등 사회봉사와 기여, 포상금 장학금 기탁 등을 수행하며 ‘모범적인 항공 직종 기술인’으로도 불린다.
2017년 공군준위를 전역한 정 명장은 2008년 일명 ‘비행선박’으로 불리는 세계 최초의 위그선(WIG·Wing In Ground effect Craft)을 개발하는 아론비행선박에 입사해 ‘인생 2막’을 열기 시작한다. 위그선 ‘M80 기종’ 개발에 참여하면서다.
위그선은 바다에서 선박처럼 운항하다 고도 150m 미만의 높이로 비행이 가능한 차세대 해양 모빌리티로, 국제법상 선박으로 분류된다. 1대당 가격만 30억원에 달한다. 1회 주유로 650㎞ 거리를 비행할 수 있으며, 순항속도는 시속 200㎞, 최고속도는 시속 250㎞이다. 연료비 역시 기존 선박이나 헬리콥터보다 20~50% 적게 들고, 정박지(계류장) 등 인프라 비용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는 1호기(8인승)까지만 개발이 완료된 상태다. 2, 3호기 상용화도 앞두고 있다.
“한국은 수출과 수입 물동량 대부분이 해상운송 수단인 선박을 통해 이뤄져요. 선박은 대형 화물을 운반하는 데 유리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죠. 수면 비행 선박인 위그선이 최근 새로운 해상운송 수단으로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위그선 개발에만 총 10년, 600억원이 들었어요. 저는 개발 마지막 단계인 엔진 부문 자문을 2년여간 맡았죠. 기존 베이직 엔진을 가져와 M80 기종에 맞도록 하나하나 설계하고, 그 설계물을 가지고 장착하는 과정을 거쳤죠. 물 위에서 전복되지 않는 삼동선(중앙 선체 양 옆에 2개의 작은 선체가 추가되는 구조) 디자인을 적용, 엔진에 고장이 발생해도 물 위에 안전하게 착수할 수 있게 한 것이죠.”
하지만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고 정 명장은 지적했다. 국내 위그선 산업은 아직 초기 단계로 생산업체 수가 많지 않다. 다양한 업체의 진출로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위그선은 주요 핵심 부품인 엔진, 프로펠러 등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국산화도 필요하다.
군 전역 이후에도 항공산업 발전 위해 이바지
정 명장은 이를 위해서는 엔진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제트엔진 제작 이력만 9800여 건이 있지만, 자체 개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엔진의 자체 생산능력을 갖춰야만 국가안보에 이바지하고, 전투기 가격의 10~20%를 차지하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명장은 독자적인 항공엔진을 보유하려면 천문학적인 시간과 돈을 투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사격이 필요하다고 했다. “항공엔진은 돈이 되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한국 기업은 면허생산 등으로 항공용 가스터빈 엔진을 조립하고, 일부 관련 부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국내 항공엔진 기술력은 선진국의 70% 수준이죠. 엔진의 라이선스가 국내에 없다 보니 개발 과정에서도 여러 제약이 잇따르는 게 현실입니다. 한 국가가 자체적인 항공엔진을 갖기 위해서는 수십년간의 기술 축적, 이를 뒷받침하는 고숙련 인재 공급, 막대한 자본 투입 등 삼박자를 갖춰야 하는데, 항공엔진 산업이 대표적인 선진국 산업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산 전투기인 FA-50, KF-21에는 미국산 엔진이 들어가는데, 미국이 제품 수출을 막으면 한국의 공군 전략자산 생산이 막히게 되는 현실입니다.”
자체 개발한 항공엔진은 국방 선진국들의 핵심 전략자산이다. 전투기 성능을 좌우하는 부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산 전투기인 FA-50, KF-21에는 미국산 엔진이 들어가는데, 미국이 제품 수출을 막으면 한국의 공군 전략자산 생산이 막히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영공 자주국방을 위해선 항공엔진 독자기술이 필요하다.
정 명장은 “중국이나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치열한 연구개발과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과 대조되는 현실”이라며 정부의 장기적이면서 저리의 정책자금 지원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한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정 명장은 항공산업에 대한 발전을 위해 늘 고민하고, 이바지하려고 노력한다.
명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더니 평범한 대답이 나왔다. “연구·노력하고 한 우물만 팠더니 그렇게 됐더라”고 답했다. 이러한 비결은 자기계발에서도 비켜가지 않는다. 군대를 전역한 이후 학점은행제를 이용해 항공정비공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 경상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공학석사학위를 받았다. 항공정비사 등 다수의 항공 관련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4호 항공명장이 나오길...마지막 목표 ‘후학 양성’
마지막 자신의 목표인 ‘후학 양성’을 위해서다. 아무리 정비기술이 우수하다 해도 일정 수준의 학력과 이론적 뒷받침이 없으면 대학에서 정식교수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까닭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평소 해 놓았다는 정 명장은 그래서 ‘기회의 문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열리더라’는 평소의 지론을 지금도 신봉한다.
그는 2019년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로 임명되며 자신의 노하우를 많은 후배들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 명장은 “명장이 되고 나니 자부심보다는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이 분야이다 보니 이거라도 학생들에게 물려줘야죠. 그래서 대학에 온 것이고, 후배들에게 자신의 현장 경험을 전수하고 싶다”고 했다.
후학 양성을 위해 은퇴한 퇴역 항공기를 학교에 들여와 학생들에게 직접 교육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항공기 정비교육용으로 사용되는 항공기는 수명이 다한 항공기였죠. 그것도 중요한 수리부속을 빼내고 남은, 외형만 유지한 죽은 항공기였습니다. 그런 항공기로는 항공기 소개나 모션 스터디 정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군대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퇴역항공기 도입으로 기존 정비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학생들이 직접 배울 수 있는 뭔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늘 학생들에게 ‘기본’을 중시하라고 조언한다. “엔진 정비를 하면서 늘 마음에 새겼던 게 ‘기본’이었어요.” 그동안의 군 생활을 통해 제아무리 기량이 훌륭하더라도 기본이 좋지 못하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저의 경험과 지식 전파를 통해 또 다른 항공 명장이 나오길 바랍니다. 2012년 제533호로 항공 분야 3번째 명장이 된 이후 10년 넘게 또 다른 명장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동안 기술 숙련자들이 명장에 도전했지만 계속 실패했죠. 앞으로도 재능기부, 기술강의, 후학 양성 등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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