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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은 PTSD 아니다…폭력이 낳는 ‘복합 PTSD’ [이코노 헬스]

정서조절장애·부정적인 자기 개념·대인관계 장애
한국인, 복합 PTSD 환경에 오랜 기간 노출
6·25 전쟁·민주화 운동 당시 겪은 어려움도

복합 PTSD(complex PTSD, C-PTSD)는 2018년 개정된 국제 질병 분류(ICD-11)에서 독립적 진단 범주로 분리됐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상욱 원장] 트라우마(Trauma)를 굳이 번역한다면 심적 외상(外傷)이다. 구체적으로는 ▲죽음 ▲심각한 질병 ▲신체·정신적 위협이 되는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발생한 마음의 상처다. 외부적 요인에 의한 손상이라는 점에서 외상이 맞지만,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점에서 선뜻 외상이라 말하기 꺼려진다. 트라우마를 단어 그대로 원용하는 맥락일 것이다.

트라우마가 원인이라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은 결과에 가깝다. 이름부터 트라우마 이후에 나타나는(Post-Traumatic) 스트레스 장애(Stress Disorder)다.

통상 PTSD의 대표적 증상으로 ▲재경험(re-experience) ▲회피(avoidance) ▲과각성(hyperarousal)을 꼽는다. 재경험은 트라우마 사건에 관한 기억이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증상을 가리킨다. 불쾌한 기억이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온다는 점에서 침습(intrusion)이라고도 한다. 회피는 트라우마 사건을 연상시키는 대상이나 사물을 피하려는 증상이다. 과각성은 신경과 근육이 지나치게 긴장해 말 그대로 각성 상태가 과한 것이다. 작은 자극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거나, 날카로운 신경 탓에 잠들지 못할 수 있다.

30대 교사 A씨가 그랬다.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A씨는 불안으로 인한 수면 부족으로 병원을 찾았다. 상담이 한창이던 중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났다. 그러자 열심히 증상을 설명하던 A씨가 흠칫 놀라서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 문을 연 다음 바깥 상황을 두리번거리며 연신 확인했다. 상담실 밖에 있는 환자와 간호사 모두 안전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살핀 다음에야 문을 닫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던 그였다.

그리고 A씨는 그가 겪었던 트라우마 사건에 대해 입을 뗐다. 교무실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와장창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고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하니 유리 파편 위로 학생이 쓰러져 있었는데, 목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남학생끼리 장난을 치다가 누군가 한 학생을 밀쳤고, 그 학생이 유리로 된 교무실 문을 들이받으면서 깨진 유리가 목에 박힌 것이었다.

학생은 A씨의 응급처치로 다행히 문제없이 학교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큰 소리만 들으면 당시 상황이 생각난다고 했다.(재경험) 다친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였다. 잠자던 와중에도 큰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게 되니, 평소 답답해서 쓰지 않던 귀마개까지 착용하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든다고 그는 한탄했다.(회피)

A씨 같은 상황 외에도 다양한 사건이 누군가의 마음에 충격을 줄 수 있다. A씨처럼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 예컨대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그리고 지진 등 자연재해도 트라우마 사건이 될 수 있다. 심지어 타인에게서 발생한 사건을 보고서도 충분히 PTSD를 겪을 수 있다. 일회적 혹은 불연속적으로 발생한 외상 사건의 결과라는 점에서 단순 PTSD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반복적으로(repeated, chronic) 대인 폭력을 경험했을 때(interpersonal violence) 발생하는 PTSD도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신체·성폭력, 고문이나 전쟁 등의 복합 트라우마(complex trauma)로 발생하는 PTSD, 이른바 복합 PTSD(complex PTSD, C-PTSD)다. 2018년에는 개정된 국제 질병 분류(ICD-11)에서 독립적 진단 범주로 분리됐다. 학계 논의를 넘어 의료계 전반에서 복합 PTSD를 별도로 진단해야 한다고 받아들인 셈이다.

복합 PTSD가 단순 PTSD와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는 일은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다만 복합 PTSD가 단순 PTSD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에 더해 자아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는 듯 보인다. 구체화하자면 ▲정서조절장애 ▲부정적인 자기-개념(self-concept) ▲대인관계 장애다. 이른바 자기조직 장애로,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데 중대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는 증상들이다.

복합 PTSD는 평생유병률이 높다. 평생유병률은 평생 한 번 이상 병이 발생한 비율을 지칭한다. 복합 트라우마가 여타 경우보다 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치료에서도 차이가 있다. PTSD의 재경험·회피·과각성 증상은 약물치료, 인지치료를 통해 호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복합 PTSD는 자기조직 장애와 함께 우울증, 알코올 의존증 등의 문제를 동반하곤 한다. 치료에서 섬세한 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상담하면서 내담자들에게 살아온 내력을 듣다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복합 PTSD에 취약한 환경에 오랜 기간 노출됐음을 새삼 느끼곤 한다. 이른바 전쟁 세대로 불리는 어르신들은 6·25 전쟁을, 586세대라 불리는 중장년층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간혹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X세대 이후 한국 출생자에게선 전쟁과 고문으로 인한 복합 PTSD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체·성폭력으로 인한 복합 PTSD는 아직 근절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안타까우면서도, 최소한 사회적 차원의 복합 PTSD는 줄어든 것 같아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일련의 해프닝은 중장년층 이상의 PTSD를 자극할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대한민국의 청년층까지 복합 PTSD로 인한 위험성에 노출되려던 찰나, 모두가 힘을 합쳐 상황을 긍정적으로 반전시킨 게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최소한 정신건강의 관점에서라도 앞으로 복합 PTSD를 걱정해야 할 문제가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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