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경험의 멸종시대’가 만든 새로운 욕망[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 기업과 브랜드에게 위기이자 기회
“역설적이게도 진짜 경험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해져”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모두가 타이핑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잉크와 종이가 주는 감각적 경험, 손글씨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제 영어 필기체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미국 청소년은 드물어졌다. 중국도 '제필망자’(提筆忘字·펜을 들었는데 글자가 생각나지 않는다)란 말이 보편화됐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저서 '경험의 멸종'에서 이러한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손글씨는 인쇄된 글자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이 사람의 경험을 대신해주는 시대다. 우리는 여행을 가지 않아도 유튜브로 세계를 누비고, 요리를 하지 않아도 레시피 영상으로 요리사가 된 기분을 느낀다. 콘서트에 가지 않아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메신저로 대화한다. 간접 경험이 실제 경험보다 더 우선시되는 시대, 로젠이 말한 '경험의 멸종'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직접 경험에 대한 갈증이 새로운 욕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제품과 브랜드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
술자리마저 심심해진 시대의 역설
친구들과 술자리에 모였지만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풍경.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됐다. 하이네켄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보링모드’(Boring Mode) 캠페인에서 하이네켄은 특별한 스마트폰 케이스 ‘플립퍼’(Flipper)를 개발했다. '건배'라는 말이 나오면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뒤집어지는 장치다. 강제로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만들어 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진짜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친구들과 ‘치어스’를 외치며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진짜 관계를 만드는 소중한 시간임을.
21세기 최고의 록밴드로 불리는 콜드플레이의 공연에서도 직접 경험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콘서트에서 관객들에게 스마트폰을 끄도록 요청하고, 대신 LED(발광 다이오드) 자이로밴드 팔찌를 나눠줬다. 노래에 맞춰 관객의 위치에 따라 다른 색의 조명이 팔찌에서 빛을 발했다. 관객들은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공연을 보는 대신, 자신이 직접, 공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했다. 수만명의 관객이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가 돼 빛의 향연을 만들어냈다. 영상으로 남기기 위한 관람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진짜 경험이었다.
요즘 도심 곳곳에서 팝업스토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제품을 파는 공간이 아니다. 향기를 맡고 질감을 느끼고, 사진을 찍고 때로는 직접 만들어보는 복합 체험 공간이다. 온라인 쇼핑이 편리함의 극치를 달리는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프라인 공간을 찾는다. 왜일까. 클릭 한 번으로 얻을 수 없는 감각적 경험, 그 '진짜' 느낌을 원하기 때문이다.
런닝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게임 속 아바타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두 발로 땅을 밟고 달리는 것. 땀이 흐르고, 심장이 뛰고,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그 생생한 감각. 디지털을 통한 간접 체험의 대명사인 온라인 게임 열풍에 대한 반작용이 런닝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국내 마라톤 대회 참가 인원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러닝 크루 문화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마스터카드가 있다.” 20년 이상 이어진 이 슬로건만큼 마스터카드를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MO(최고 마케팅 책임자)’로 알려진 마스터 카드의 라자만나르는 “소비자는 더 이상 브랜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죠. 그래서 우리는 스토리텔링에서 스토리메이킹으로 전환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브랜드 혼자 떠들지 말고, 소비자가 브랜드 스토리를 직접 경험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유명한 ‘프라이스리스’(Priceless) 캠페인을 경험 플랫폼으로 발전시켰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시' '값을 매길 수 없는 놀라움' '값을 매길 수 없는 대의명분' '값을 매길 수 없는 특별함'이라는 네 가지 경험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시'는 그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코코 샤넬의 파리 탐험'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샤넬 부티크와 창시자 코코 샤넬이 살았던 동네를 둘러보는 투어다. 오직 마스터카드 소지자만 예약할 수 있다. 폐장 후의 루브르 박물관 투어, 미쉐린 셰프의 프라이빗 디너 같은 콘텐츠도 독점 제공한다.이런 경험 속에서 고객들은 자신이 브랜드의 일부가 되어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브랜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조 러브스(Jo Loves)는 붓으로 바르는 향수로 유명하다. 18ml 용량의 얇고 긴 병을 손에 쥐고 아래쪽을 펌핑하면, 반대편 끝에 달린 검은색 붓에 젤 형태의 향수가 묻어 나온다. 수채화를 그리듯 팔목과 귀밑에 쓱쓱 바르면 된다. 요가 매트 같은 곳에도 발라 향을 남길 수 있다.
조 러브스는 영국의 향수 디자이너 조 말론이 만든 두 번째 브랜드다. 그는 이미 '조 말론 런던'이라는 거대한 성공을 이뤄낸 인물이다. 하지만 2013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처음 2~3년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 러브스를 조 말론의 아류라고 생각했다. 말론은 전략을 바꿨다. 조 말론 런던의 주요 고객이 30대 여성이었다면, 조 러브스는 Z세대를 공략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제품과 흥미로운 고객 경험을 기획했다.
그리고 런던 매장에 '향기 타파스 바’를 만들었다. 타파스는 스페인음식으로 작은 접시에 담긴 맛보기 음식이란 의미인데, 향기를 경험하게 하는 바인 셈이다. 매장 안 작은 바 자리에서 고객은 3단계 향기 타파스를 체험한다. 타파스지만 먹는 게 아니다. 모두 향을 맡는 것이다. 원하는 향을 고르면, 먼저 타진(향수를 따뜻한 증기로 시향하는 특별한 시향 프로그램)으로 증기를 내 향을 맡게 해준다. 그 다음엔 칵테일 셰이커에 향을 넣고 흔들어 '향 거품'을 낸다. 이 거품은 마티니 잔에 담아 고객이 향을 맡도록 한다. 붓으로 거품을 찍어 고객의 손에 발라주기도 한다.
타파스 바를 경험한 고객의 제품 구매율은 거의 100%라고 한다. 고객들은 "생애 처음 접하는 브랜드 경험", "후각을 최대로 느낄 수 있는 환상적 경험"이라고 리뷰를 남겼다.
‘경험의 멸종시대’ 브랜드 전략
이러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몸을 움직이거나, 손을 쓰고, 맛을 보거나, 향기를 맡는 것처럼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에, 오히려 '불편한' 직접 경험이 새로운 가치가 됐다.
손글씨가 그러했듯, 우리는 디지털의 편리함 속에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실이 새로운 갈망을 만들어낸다. 화면 너머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다는 욕망. 기록하기보다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
기업과 브랜드에게 이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아무리 인공지능이 똑똑해져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발로 땅을 밟는 감각,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경험, 직접 맡는 향기, 눈을 마주치며 나누는 대화. 이러한 원초적 경험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이 앞으로의 시장을 이끌어갈 것이다. '경험의 멸종' 시대, 역설적이게도 진짜 경험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희소성이야말로 새로운 시장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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