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달러 넘치는데 원화만 ‘뚝’… 외환 수급의 역설에 갇힌 韓경제
- [신임 한은 총재의 과제]②
수입 의존·서학개미·기업 해외투자…국내 달러 수급 불안 부추겨
시장은 우려…당국은 “외환 유동성 충분”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뚫고 치솟으면서 우리 경제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인한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에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지만, 원화 가치가 특히 떨어졌다. 우리 경제는 경상수지는 흑자인데 원화 가치는 떨어지는 이른바 ‘외환 수급의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재정정책만으로는 환율을 안정시키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 속에 신현송 신임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의 어깨가 무거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됐기 때문이다.
17년 만에 1500원 돌파… 주요국 중 ‘하락률 최상위권’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지난 3월 31일 원·달러 환율은 장중 1536.9원까지 치솟으며 시장에 충격을 줬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10일(1561원)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4월 들어서도 환율은 1500원대 중반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인 시대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원화 가치의 하락 속도는 주요국 통화 중에서도 유독 가파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한 달간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원화의 고립된 약세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동 전쟁 직후인 3월 2일과 같은 달 28일 국제 환율을 비교해보면 달러인덱스(DXY)는 2.6% 상승하며 강달러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원화 가치는 4.72% 하락했다. 달러 가치가 오른 것에 비해 원화 가치는 두 배 가까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해외 주요 통화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 명확하다. 같은 기간 중국의 역외 위안화는 0.84% 하락하는 데 그쳤다. ▲영국의 파운드(-1.64%) ▲캐나다의 달러(-1.81%) ▲대만의 달러(-2.11%) 등도 원화보다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일본의 엔화(-2.58%) ▲유럽연합(EU)의 유로화(-2.62%)마저도 하락률이 2%대에 머물렀다. 원화보다 하락 폭이 큰 국가는 ▲러시아(-5.08%) ▲칠레(-5.48%) ▲남아프리카공화국(-6.90%) 등 일부 국가에 불과했다.
환율 불안으로 금융당국이 시장안정화 조치를 확대하면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도 줄어들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6년 3월 말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236억6000만달러로, 전월(4276억2000만달러) 대비 39억7000만달러 감소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 순위도 두 계단 하락한 12위로 집계됐다.
수입 의존·반도체 쏠림… 한국형 경제 체력의 한계
문제는 환율 급등이 단순히 숫자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경제 지표와 서민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도 거세지고 있다. 전쟁으로 원유 가격이 높아진 가운데 환율 충격이 더해지면서 도입 단가는 더 높아질 전망이다. 국내 유가와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 압박이 커지고, 이는 결국 취약계층의 생계비 부담으로 직결된다.
원화 가치가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거론되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기초체력의 한계가 주로 지적된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가량을 중동산에 의존한다. 중동 분쟁으로 유가가 꿈틀대면 수입 결제 대금인 달러 수요가 급증하고, 이는 즉각적인 원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진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율도 위험 요인이다. 반도체 투톱으로 불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비중이 40%에 달하는데,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은 증시 약화로 이어진다.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제조업의 기초체력이 허약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증시에서 빠져나가는 외국인 자금이 달러 수요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내 기업들이 달러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해외 현지 공장 증설이나 자산 투자에 바로 활용하는 점도 달러 수급 불안정성을 가중시킨다는 해석이 있다. 기업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국내 시장으로 들여오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가 해외에 직접 투자(ODI)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인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투자 열풍도 원화 약세의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연간 조 단위의 자금이 달러로 환전돼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외환시장의 달러 유동성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신현송 한은 총재 후보자 “달러 자금 상당히 풍부”
정부와 금융당국은 현재의 고환율이 경제 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에는 선을 긋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4월 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거시재정금융간담회를 처음으로 주재하면서 “외환시장과 관련해 원화가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이고 있으나, 펀더멘털과 괴리된 과도한 원화 약세는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구 부총리는 “올해 들어 수출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고 오늘부터 국고채도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된다”며 “국회에서도 환율 안정 세제 3법이 통과됨에 따라 향후 국내시장복귀계좌(RIA)를 통한 해외증권투자 자금의 환류가 본격화되고 해외법인으로부터의 배당이 증가하게 되면 환율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는 “달러 자금이 상당히 풍부하다”며 금융불안정 우려를 진정시키는 발언을 했다. 신 후보자는 “비록 환율은 높지만 달러 유동성은 상당히 양호하다”며 “예전처럼 환율과 금융불안정을 직결시킬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환율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와 같은 금융 시장의 혼란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원화 약세가 당분간 더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민경원 우리은행 선임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지정학적 긴장이 재차 고조되면서 아시아 증시 전반의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국내 증시 역시 외국인 자금 순매도와 맞물려 약세를 보일 경우 원화 약세 압력이 확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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