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글로벌 경쟁 ‘최상위 포식자’의 자격 [CEO 110인 긴급진단]⑤
- 제품만 잘 만들면 팔리던 시대 끝나
시시각각 변하는 규제 등 대응해야
[이코노미스트 이지완 기자] 글로벌 시장의 룰이 재편되고 있다. 제품만 잘 만들면 팔리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다. 기업들은 이제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각국의 규제 장벽부터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공급망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환율과 금리까지 신경써야 한다. 기업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점유율 싸움이 아니다. 복잡한 지정학적 리스크 위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에 [이코노미스트]는 기업들의 해외 노출도 및 전략적 민첩성 등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포지셔닝 지수(GPI) 분석 결과를 토대로 기업을 총 4가지 유형(▲글로벌 설계자 ▲차세대 글로벌 ▲내수 강자 ▲위험 노출형)으로 분류했다. 이들 기업을 위한 최적화된 생존 전략을 강대준 인사이트파트너스 대표와 함께 제안한다.
글로벌 설계자(Global Shaper): 생태계 지배자
이미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최상위 기업에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은 경쟁사의 기술 혁신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강대국이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자국 우선주의 규제다. 이 단계에 진입한 기업은 단순한 시장 점유율 경쟁을 넘어 각국 정부의 이해관계라는 복잡한 체스판 위에서 승리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규제를 단순한 진입 장벽으로 인식하는 기업과 이를 시장 선점의 문(Door)으로 활용하는 기업 간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폐쇄적인 현지 규제의 문을 열기 위해 압도적인 기술력만 내세우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현지 이해관계 구조의 한복판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 당국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현지 파트너 확보가 필수적이다. 단순한 로비 대행사가 아니라 합작법인(JV) 설립이나 상호 지분 교환을 맺은 전략적 지분 파트너여야 한다. 이는 해당 국가에 현지 경제와 운명을 함께하는 우군이라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삼성SDI가 미국 스텔란티스와 손잡고 합작 배터리 공장을 설립한 사례는 지분 파트너십이 규제 돌파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재무 부서는 막연한 규제 리스크를 철저히 가격으로 환산해 관리하는 ‘규제 원가표’를 즉각 도입해야 한다. 이는 ▲관세율 변동 ▲현지 부품 조달 의무 비율 ▲탄소국경세 등 시시각각 변하는 규제 변수를 다각도의 시나리오별로 원가에 선반영해 두는 작업이다. 해당 원가표의 유무가 불확실성 속에서 최고경영자(CEO)의 판단 속도와 정확성을 결정짓는다.
글로벌 공급망 역시 철저한 효율성 중심에서 권역별로 독립 가동되는 형태로 재편돼야 한다. 핵심은 ‘무엇을 분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절대로 쪼개면 안 되는가’를 정하는 것이다. 원천 소재와 핵심 기술에 대한 통제권은 본사가 절대적으로 쥐고 있는 ‘코어 락’(Core Lock)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를 섣불리 분산할 경우 폭증하는 품질 리스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최종 조립과 물류 부문은 과감히 현지화해야 한다. 관세 장벽과 운임 상승이라는 직격탄을 최전선에서 맞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 갈등 심화 당시 단일 조립라인을 운영하던 한 중견 제조업체가 중국 라인을 베트남과 멕시코로 이원화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무려 14개월이었다. 늦었다고 판단한 시점에 즉시 실행에 옮겨야만 생존 시한을 맞출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10~20% 수준의 원가 상승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는 특정 공급망 마비 시 전체 매출이 증발하는 치명적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필수 보험료로 인식해야 한다.
평상시 ‘재무적 여유율’(Financial Slack)을 넉넉히 확보해 두는 것도 필요하다. 전쟁이나 전염병 등 돌발 변수가 터졌을 때 경쟁사가 무너지는 틈을 타 시장 지배력을 급격히 확대하려면 재무적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 직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M&A)에 나선 기업들이 2~3년 사이 시장 점유율을 급격히 확대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매출이 완전히 0으로 수렴하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고정비를 충당하며 최소 6개월, 권장 12개월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유동자산을 상시 비축하는 것을 추천한다. 위기 시 헐값에 나온 경쟁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인수·합병(M&A) 대상 목록도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차세대 글로벌(Next Global): 다크호스
해외 시장에서의 덩치와 매출 비중은 가파르게 커지고 있으나 여전히 글로벌 시장의 룰메이커로 자리 잡지 못한 그룹이다. 이들 기업이 겪는 가장 심각한 병목 현상은 덩치에 걸맞지 않은 본사 중심의 통제 구조에 있다. 본사와 해외 법인 간의 역할을 분담할 때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무엇을 현지에 위임할 것인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본사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핵심 기능만 철저히 규정하고 그 외의 기능은 전적으로 현지에 위임해야 한다. 핵심은 ‘통제’가 아니라 ‘실시간 감시’로의 전환이다.
본사에 요구되는 기능은 ▲자금 배분 ▲C-레벨 등 핵심 인사권 ▲브랜드 가이드라인뿐이다. 마케팅 전략이나 가격 정책 등은 현지 조직에 맡겨야 한다. 동남아 법인장에게 마케팅 예산 집행 권한을 전면 위임한 직후 6개월 만에 현지 매출이 40% 폭증한 소비재 기업의 사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본사는 전략을 설계하고 자원을 배분하기만 하면 된다. 실행은 현지 법인에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 본사는 월별 실적 리뷰를 통해 현지 법인을 평가·관리하는 실시간 모니터링 체제로 전환하면 된다.
또한 마케팅 전선에서의 스펙 비교 마케팅을 즉각 폐기해야 한다. 제품이 경쟁사보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 메시지는 스스로 후발주자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름만 보고도 지갑을 여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도약하려면 제품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는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 마케팅이 필요하다. K-컬처라는 강력한 자산을 단순 연예인 모델 기용에 소모하지 말고 한국 고유의 미감과 기술 철학을 브랜드 정체성에 내재화해야 한다. 동시에 브랜드 투자를 늘리면서 저가 물량 경쟁을 지속하는 재무적 모순을 끊어내고 판매 물량 감소를 감수하더라도 단가와 마진율을 끌어올리는 결단이 요구된다.
조직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가장 큰 주범인 ‘보고를 위한 보고’ 관행도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현지에서 기회를 포착해도 본사 팀장부터 최고경영자(CEO)까지 이어지는 4단계 결재 라인을 거치면 2~3주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 해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글로벌 의사결정 위원회를 신설하는 것이다. 위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해외 주요 안건을 주 1회 즉각 처리하고 현지 법인장의 결재 권한을 대대적으로 상향해야 한다.
시스템의 전환도 필요하다. 조직 구조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평가 시스템’의 전환이다. 본사 리더의 핵심성과지표(KPI)에 ‘글로벌 사업 성과’가 빠져 있으면 아무도 해외 안건에 속도를 내지 않는다. 본사 핵심 리더 몇 명의 KPI에 해외 성과 비중 목표를 넣는 것만으로도 의사결정 문화가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 구조를 바꾸기 전에 인센티브부터 바꾸는 것을 권장한다.
내수 강자(Local Stronghold): 안방 챔피언
국내 시장에서 확고한 시장 지배력을 갖추었으나 안방의 달콤한 성공 경험이 글로벌 진출의 발목을 잡는 기업군이다. 기존 주력 사업부 내부에 글로벌 신사업 부서를 편제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낭패를 본다. 내수에서 안정적 이익을 내는 사업부 임원에게 막대한 초기 투자가 요구되는 글로벌 사업은 자원을 빨아들이는 기생충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해외 투자 탓에 전사 영업이익률이 떨어지는 것을 기꺼이 용인할 리더는 드물다.
해법은 철저한 조직 분리다. 즉각적인 별도 법인 설립이 어렵다면 최소한 독립 손익 단위(P&L Unit) 체제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예산 편성권을 부여해야 한다. 보고 라인은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CEO 직속으로 직결시켜야 한다. 그래야 사내 정치적 견제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 기존 부서와 불가피하게 자원을 공유할 경우에는 엄격한 사내 거래 계약(SLA)을 맺어 숫자로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평가 체계 역시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글로벌 진출 초기 단계의 사업 조직에 국내 기준의 영업이익률을 들이대는 것은 사업을 고사시키는 행위다. 당장은 걸음마를 제대로 떼고 있는지 추적할 글로벌 전용 KPI가 필요하다. ▲타깃 국가 내 유통 채널과 고객 접점에 자사 제품이 얼마나 촘촘히 배치돼 있는지를 따지는 ‘시장 침투율’ ▲마케팅의 거품을 걷어내고 순수 제품력으로 시장에 안착했는가를 묻는 ‘재구매율’ ▲영업망 확충을 견인할 ‘현지 파트너 확보 수’에 집중해야 한다. 적자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연소되는 현금(Burn Rate) 대비 목표한 이정표(Milestone)를 제때 달성하고 있는지 철저히 점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런 전초기지를 이끌 A급 글로벌 인재를 영입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돈보다 권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막대한 연봉을 줘도 사소한 결정을 서울 본사에 물어봐야 하는 수동적 시스템이라면 최고급 인재는 금세 짐을 싼다. 모호한 자율경영 약속을 넘어 미 달러화 기준의 명확한 독자 전결 한도와 권한 범위를 고용 계약서와 내규에 구체적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또한 철저히 현지 성과에 연동되는 스톡옵션 등 글로벌 스탠더드의 보상 체계를 이식하고 현지 법인장이 본사 실무진을 거치지 않고 CEO나 C-레벨 경영진과 실시간으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위험 노출형(Exposed Runner): 폭풍 속 돛단배
특정 소수 국가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편중돼 있거나 단일 해외 부품 수급에 목을 매고 있는 가장 취약한 기업군이다. 관세 장벽 신설이나 환율 급변 등 외부 충격 한 번에 회사의 존립이 흔들릴 수 있다.
이들에게는 1년 이내에 실행 가능한 공급망 분산 시나리오 확보가 시급하다. 목표는 기존 공급망의 완벽한 대체가 아닌 붕괴를 막을 ‘생존 가능한 수준의 분산’이다. 1~3개월 차에는 무역관 네트워크 등을 동원해 기존 대비 80% 수준의 품질이라도 위기 시 즉시 납품이 가능한 업체를 국가별로 최소 3곳 이상 확보해야 한다. 3~6개월 차에는 발굴된 신규 업체에 핵심 부품 물량을 20~30% 할당하며 이중 공급(Dual Sourcing)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좋다. 이후 6~12개월 차에 접어들면 해당 부품의 3개월치 안전 재고를 비축하고 검증된 신규 파트너와 2~3년 장기 계약을 체결해 가격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15~25% 수준의 추가 비용 지출은 사전에 이사회 승인을 일괄적으로 받아둬 실행 속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자체 현금 창출력에 기반한 냉혹한 사업 구조조정에 돌입해야 한다. 상각전영업이익(EBITDA) 지표가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단기 턴어라운드 비전이 없는 사업부는 즉각 매각 절차를 밟아야 한다. CEO는 회사의 뿌리라거나 시너지가 있다는 식의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재무 조직은 매출채권 회수 기간을 단축하고 악성 재고를 털어내 현금흐름을 확보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재무 조직에 요구되는 것은 유휴 부동산과 비전략 자회사 지분 등 즉각 유동화가 가능한 자산 매각 리스트를 상시 관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 충격파를 사전에 감지할 조기 경보 체계의 이식이다. ▲원·달러 환율 및 변동성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 ▲자사 핵심 원자재 선물 가격 ▲주요 거래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해운 운임 동향(BDI) 등 5대 지표를 매일 모니터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손익분기 환율 등을 역산해 임계치를 벗어날 경우 재무팀장과 CEO에게 단계별로 알람이 울리는 트리거 기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또한 분기별로 ▲환율 폭등 ▲관세 폭탄 ▲원자재값 폭등이라는 최악의 복합 위기를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행해 기업의 재무적 인내 한계선을 수치로 산출해 둬야 위기 앞에서도 매뉴얼대로 생존의 길을 뚫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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