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야망 있어 보이나?” 후계 경쟁 속 확장의 시대 재편하는 LVMH
- 공격적 M&A 대신 선택과 집중에 방점
명품 산업 구조 변화에 후계 구도 ‘출렁’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후계 구도를 둘러싼 경쟁으로 주목받고 있는 세계 최대 명품그룹 LVMH(루이 비통, 모엣 & 샹동, 헤네시)가 성장 전략 재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LVMH는 지난 수십 년간 대형 인수합병(M&A)을 통해 글로벌 럭셔리 제국을 구축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명품산업의 구조적 변화와 실적 둔화가 본격화하면서 핵심 브랜드 중심의 선별 경영으로 무게추를 옮기는 분위기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슬하 다섯 자녀에게 주요 사업 영역을 나눠 맡기고 있다. 업계에서는 그룹의 전략 변화와 맞물려 차기 후계 구도에도 새로운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왕좌를 향한 소리없는 전쟁
“오늘 제 자녀들을 모두 보셨습니다. 야망이 있어 보였나요?”
4월 2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LVMH 그룹 연례 주주총회는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의례적인 실적 보고와 아르노 회장의 비전 설명 중심으로 흐르던 과거와 달리 이날은 그의 다섯 자녀가 모두 연단에 올랐다.
장녀 델핀(51)을 비롯해 앙투안(49)·알렉상드르(33)·프레데릭(30)·장(27)까지 차례로 무대에 올라 사업 현황과 전략을 발표했다. 아르노 일가가 처음으로 주총 무대에 총출동하자 프랑스 현지 언론은 “LVMH의 차기 권력 지형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라며 앞다퉈 보도했다.
다섯 자녀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데는 아르노 회장의 강한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롭스(L’Obs)는 LVMH의 후계 경쟁 구도를 분석한 기사에서 ‘계승 전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올해 77세인 아르노 회장의 나이를 고려할 때 LVMH의 차기 권력 지형을 가늠하는 일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다.
오너 일가의 사생활 역시 호사가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다. 아르노 회장의 다섯 자녀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태어났다. 장녀 델핀과 장남 앙투안은 첫 결혼에서 얻은 자녀다. 반면 알렉상드르·프레데릭·장 형제는 현 부인인 피아니스트 출신 엘렌 메르시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재계와 현지 언론에서는 이들 사이의 미묘한 권력 구도를 두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승계 리스크를 둘러싼 긴장감은 주총 현장에서도 감지됐다. 일부 주주는 아르노 회장에게 은퇴 시점과 불확실한 승계 계획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LVMH는 지난해 주총에서 정관 변경을 통해 최고경영자(CEO) 재임 가능 연령을 85세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섯 자녀 모두가 핵심 사업 전면에 등장하면서 시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포스트 아르노’ 체제로 향하고 있다.
아르노 회장은 “지난해 여러분은 향후 10년간 저를 99% 지지로 재신임했다. 괜찮다면 이 문제는 7~8년 뒤 다시 이야기하자”며 주주들의 질문 공세를 노련하게 피해 갔다. 그러나 ‘캐시미어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그를 바라보는 명품업계의 시선은 다르다. 철저한 성과주의와 공격적인 M&A로 세계 최대 명품그룹을 일궈낸 만큼 후계자 선정 역시 냉정한 기준 아래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명품 제국의 변곡점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후계 경쟁이 단순한 오너 일가의 권력 다툼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키우던 과거 전략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앞으로는 누가 새로운 성장 공식을 만들어내느냐가 후계 경쟁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시각이다.
최근 2~3년 사이 명품산업은 구조적 변화 국면에 들어섰다. 단순 경기 침체를 넘어 소비 공식 자체가 바뀌면서 한때 ‘명품 입문템’으로 통했던 펜디·셀린느·디올의 카드지갑이나 로고 플레이 제품의 성장세는 둔화하고 있다. 젊은 소비층 사이에서는 대형 럭셔리 하우스보다 개성과 희소성을 앞세운 인디 브랜드를 찾는 흐름도 강해졌다.
여행 소비 패턴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중국·한국 관광객들이 유럽 여행에서 면세점을 중심으로 명품을 쓸어 담았다면 최근에는 현지 로컬 경험 소비에 더 집중하는 분위기다. 이른바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트렌드까지 확산하면서 과시형 소비도 예전 같지 않다.
LVMH는 지난해 매출 808억유로(약 140조2568억원)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5% 감소했다. 순이익은 109억유로로 13% 줄었다. 올해 전망도 녹록지 않다. LVMH는 올해 1분기 매출 191억2100만유로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203억1100만유로) 대비 6% 감소한 수치다. 중국 소비 회복 지연과 중동전쟁 리스크까지 겹친 탓이다.
LVMH는 최근 비핵심 브랜드 정리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LVMH가 마크 제이콥스와 펜티 뷰티의 지분, 미국 와인 브랜드 조셉 펠프스 등 일부 자산 매각을 검토 중이다. LVMH가 본격적인 ‘선택과 집중’ 전략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업계는 LVMH의 향후 전략 방향을 최근 방한한 아르노 회장의 일정에서 엿보고 있다. 아르노 회장은 5월 11일 장녀 델핀 크리스챤 디올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리저브’를 찾았다. 더 리저브는 세계 최대 규모의 루이 비통의 체험형 매장 ‘루이 비통 비저너리 저니 서울’이 들어선 곳으로, LVMH가 한국 시장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삼는 공간이다. 글로벌 명품 시장 둔화 속에서도 한국이 유일하게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자 아르노 회장이 직접 점검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섯 자녀의 입지 역시 아르노 회장의 전략 재편 방향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핵심 브랜드 수익성과 초고가 고객 관리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각자 맡은 사업 부문의 성과가 후계 구도의 핵심 변수로 떠오를 것이란 관측이다.
글로벌 명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LVMH가 맞닥뜨린 변화는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명품 소비 공식 자체가 바뀌는 흐름”이라며 “후계 경쟁도 결국 누가 변화의 시대에 최대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를 검증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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