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1조 빅딜의 끝은 쪽박’ 글로벌 뷰티 공룡은 왜 실패했을까
- [글로벌 자본의 K뷰티 투자 변곡점]②
닥터자르트·AHC·3CE 등 글로벌 대기업 인수 후 실적 하락
고금리·소비 패턴 변화 속 M&A 효과 약화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통 큰 1조원 투자의 결실은 ‘쪽박’이었다. 에스티로더·유니레버·로레알 등 글로벌 뷰티 대기업들이 수조원을 들여 인수한 K-뷰티 브랜드들이 잇따라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뷰티 공룡들은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브랜드를 품으면 글로벌 시장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세계 뷰티 시장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브랜드를 사들이는 전략’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잭팟의 그늘
2010년대는 K-뷰티로 이른바 ‘1조원 잭팟’을 터뜨린 창업주들이 무더기로 등장한 시대였다. 더마코스메틱 브랜드 닥터자르트 운영사 해브앤비는 2019년 에스티로더에 약 11억달러(당시 약 1조3000억원)에 인수됐다. 당시 에스티로더가 내놓은 해브앤비의 가치는 약 2조원에 달했다. 이진욱 해브앤비 대표는 1조3000억원을 손에 거머쥐며 단숨에 ‘신흥 부자’ 대열에 올랐다.
잘 키운 브랜드를 해외 기업에 매각해 부자가 된 사례는 더 있다. 다국적 생활용품 기업 유니레버는 2017년 약 3조원을 들여 AHC 운영사 카버코리아를 인수했다. 유니레버는 이 거래를 통해 북아시아 스킨케어 시장 공략의 거점을 확보하고 해당 지역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카버코리아 창업주인 이상록 회장은 베인캐피탈과 골드만삭스 컨소시엄, 유니레버에 지분을 처분해 단숨에 1조2500억원을 손에 쥐었다. 이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신사동, 청담동, 경기도 화성시에 토지와 건물을 사들였다. 이 밖에도 엔터테인먼트·메타버스·벤처투자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인디 브랜드였던 3CE는 2018년 로레알에 브랜드를 넘겼다. 김소희 3CE 창업주 겸 운영사 난다 대표는 매각 대금인 6000억원으로 자수성가한 30대 여성 기업인에 올랐다. 매각 이후 김 대표는 서울 명동과 성북구 한옥 고택 등 알짜 부동산을 전액 현금으로 매입해 화제가 됐다. 현재 이들 부동산의 시세는 1000억원 중반대를 넘어선 상태다.
어느 한쪽만 이익을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미국과 유럽 외신은 에스티로더가 처음으로 아시아 기반 뷰티 브랜드를 품으며 K-뷰티 성장성을 확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북미와 유럽 유통망을 앞세워 닥터자르트를 글로벌 메가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기대도 컸다.
인수 당시 유니레버 퍼스널케어 부문을 맡았던 앨런 조프 사장은 인수 당시 “카버코리아는 우리의 퍼스널케어 사업 전략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면서 “북아시아 지역에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얀 르부르동 로레알코리아 대표이사도 인수를 통해 “그룹 최초로 한국의 뷰티 브랜드 3CE를 맞이하게 돼 기쁘며,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스타일을 전 세계에 선보일 수 있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할 것으로 예상됐던 인수전은 수년이 지난 현재 기대치를 밑도는 성적을 내고 있다. 해브앤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2025회계연도(2024년 7월~2025년 6월) 매출은 1788억원으로 전년보다 23% 감소했고, 영업손실은 232억원으로 확대됐다. 에스티로더도 연차보고서를 통해 닥터자르트의 성장 전망을 낮춰 반영하며 영업권과 무형자산 손상차손을 인식했다. 회사는 중국과 한국에서 예상보다 성장세가 둔화했고 여행 소매(트래블 리테일) 전략도 수정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화장품 기업 사상 최대 인수합병(M&A)으로 기록된 AHC도 마찬가지다. 빅모델을 기용해 광고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지만, 카버코리아 매출은 인수 이듬해인 2018년 6580억원에서 2025년 2320억원으로 떨어졌다.
왜 실패했을까
업계에서는 글로벌 대기업 편입이 더 이상 K-뷰티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는 글로벌 유통망에 올라타는 것만으로도 브랜드를 빠르게 키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장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는 이유에서다.
소비자들은 틱톡·인스타그램·유튜브 쇼츠를 통해 뷰티 제품을 접하고 온라인몰에서 구매한다. 유행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 뷰티 트렌드가 몇 달이 아니라 몇 주 단위로 바뀌면서 신제품 개발 주기도 크게 짧아졌다. 속도전이 중요한 뷰티 시장에서는 의사결정 속도가 곧 경쟁력이다.
그러나 글로벌 대기업은 품질 관리와 지역별 승인, 조직 간 협의 절차가 복잡해 신속하게 움직이기 어렵다. 시스템 자체도 신제품 출시와 마케팅 대응 속도가 느리다. 개성과 트렌디함으로 무장한 K-뷰티 인디 브랜드가 강점으로 내세워온 민첩성이 조직 안에서 희석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 업계에서는 글로벌 기업이 브랜드를 잘못 운영해서라기보다 대기업의 운영 방식 자체가 지금의 K-뷰티 시장 속도와 맞지 않는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한때 경쟁력이었던 글로벌 유통망보다 소비자 반응을 얼마나 빠르게 제품과 마케팅에 반영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특유의 무거운 의사결정 체계와 소비 패턴의 변화, 금리 인상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초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자금 조달 비용이 낮아 대형 M&A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금리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기업들의 투자 기조도 대형 인수를 꺼리는 분위기다. 패션·뷰티 전문 매체 ‘비즈니스 오브 패션’은 “브랜드를 곧바로 흡수하기보다 창업자의 실행력과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한 채 성장을 함께하는 방식이 글로벌 뷰티업계의 새로운 투자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글로벌 유통망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브랜드 가치가 크게 뛰었지만 지금은 소비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읽고 제품을 빠르게 내놓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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