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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까지 받은 그래핀, 많이 넣으면 오히려 망칩니다” 20년 연구한 KAIST 교수의 뜻밖의 답
- [일상을 바꾸는 KAIST의 유별난 과학자들③]
김상욱 KAIST 교수, '꿈의소재' 그래핀을 기존 소재의 성능 보완하는 기능성 소재로 활용
그래핀 항균 칫솔은 1000만개 판매 '대박'까지
산화그래핀 상용화 연구 이어가며 칫솔·의류·의료·로봇 소재로 적용 넓혀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그래핀은 양념입니다. 아주 조금만 넣어도 소재의 성질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게 그래핀의 장점이죠.”
김상욱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의 설명에는 그래핀을 둘러싼 거창한 기대보다 ‘그래서 이걸 어디에 쓸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먼저 묻어났다. 20년 넘게 그래핀을 연구해온 그는 ‘꿈의 소재’라는 수식어보다 칫솔과 옷, 의료용 소재와 인공근육처럼 실제 생활에서 작동하는 그래핀을 이야기했다.
2004년 처음 분리된 그래핀은 강철보다 높은 강도와 뛰어난 전기·열전도성을 가진 신소재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기대만큼 빠르게 산업에 안착하지는 못했다. 대면적으로 만들고 다른 소재에 균일하게 섞어 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이제 그래핀은 연구실 밖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그래핀의 산업화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넣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넣느냐라고 강조한다.
김 교수와 [이코노미스트]의 인터뷰는 지난 3월 이뤄졌다. 이후 예상치 못한 개편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시간만 흘렀다. 김 교수께도, 기다려주신 독자들께도 송구하다. 늦게나마 그래핀의 현재와 미래를 전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그래핀은 많이 넣을 필요가 없어요”
김 교수는 그래핀의 산업화를 이야기하면서 ‘양보다 쓰임’을 먼저 꺼냈다.
“나노 물질을 만드는 것과 원하는 곳에 분산시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핀을 많이 넣으면 오히려 점도가 올라가 공정이 어려워져요. 결국 적은 양을 얼마나 균일하게 넣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육각형 벌집 모양으로 연결된 2차원 물질이다. 아주 얇으면서도 강하고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때는 실리콘 반도체부터 디스플레이까지 기존 소재를 대체할 ‘차세대 물질’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연구실에서 성능을 확인하는 것과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순수 그래핀은 대면적으로 균일하게 만들기 어렵고, 만들어낸 뒤 원하는 기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손상되기도 한다. 다른 소재와 섞을 때는 입자끼리 뭉쳐버리는 문제도 있다.
“그래핀을 만드는 것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쓰려면 다른 소재 속에 잘 넣어야 하거든요.”
김 교수 연구팀이 산화그래핀에 주목한 이유다. 산화그래핀은 그래핀에 산소 작용기가 붙은 형태로, 순수 그래핀보다 물에 잘 분산되고 다른 소재와 결합하기도 쉽다.
그래핀 칫솔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칫솔모는 사용하면서 눕고 탄력이 떨어진다. 산화그래핀을 극소량 넣으면 칫솔모의 강도와 내구성을 높일 수 있다. 여기에 항균 기능까지 더했다. 그래핀 항균 칫솔은 1000만개 이상 판매됐다. 연구실에서 발견한 물질이 소비자가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 된 것이다.
김 교수는 ‘그래핀이 세균을 죽인다’는 결과를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왜 세균에는 효과가 있으면서 사람 세포에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적은지까지 파고들었다.
성과를 봤다. 지난 3월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터리얼스’에 게재된 연구에서 연구팀은 산화그래핀의 항균 원리를 분자 수준에서 확인했다. 산화그래핀 표면의 산소 작용기가 세균 세포막에 있는 특정 성분인 POPG와 선택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세균의 세포막에만 있는 ‘표적’을 찾아가는 셈이다.
“세균도 하나의 단세포라 세포막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세포와는 구성 성분이 달라요. 산화그래핀이 세균에만 있는 성분을 찾아가는 겁니다.”
연구팀은 세균을 모사한 인공 세포막 실험과 동물 실험을 통해 이 메커니즘을 확인했다. 산화그래핀을 적용한 섬유는 병원성 세균의 성장을 억제했고, 감염된 상처에서는 세균 증식을 줄이면서 상처 회복을 돕는 효과가 나타났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산화그래핀은 의류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원사에 산화그래핀을 분산시킨 ‘그래핀텍스(GrapheneTex)’는 항균성과 탄성, 복원력 등을 갖춘 기능성 섬유다. 2024년 파리올림픽 태권도 시범단 도복 등에 적용됐고, 올해는 대한체조협회와 공식 후원 계약을 맺고 대한민국 체조 국가대표 선수단의 유니폼과 훈련복에도 공급되고 있다.
운동선수에게 항균 기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세균이 증식하면서 냄새가 나지만 훈련할 때마다 옷을 세탁하기도 어렵다.
김 교수의 관심은 정적인 기능성 소재를 넘어 ‘움직이는 소재’로 향하고 있다. 그가 최근 몰두하는 분야도 그래핀을 탄성체에 분산시켜 빛을 받으면 수축하는 인공근육 소재다.
“기존 로봇은 터미네이터처럼 안에 기계가 들어 있는 형태였잖아요. 앞으로는 소재 자체가 움직이는 로봇이 나와야 합니다.”
특정 탄성체는 열을 가하면 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여기에 빛을 흡수해 열로 바꾸는 그래핀의 특성을 더하면 빛만으로 소재를 움직일 수 있다. 빛을 비추면 그래핀이 열을 만들고, 그 열이 탄성체를 수축시키는 방식이다.
“사람의 근육은 뼈 사이에서 수축하면서 힘을 냅니다.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힘을 만들 수 없어요. 강하게, 빠르게 수축하는 인공근육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미래는 단순히 ‘그래핀이 들어간 로봇’이 아니다. 사람의 근육처럼 소재 자체가 힘을 내고 움직이는 로봇이다. 그래핀을 웨어러블 기기나 재활·보조기기에도 적용해 기존 소재가 가진 수축 특성에 그래핀의 빛 흡수와 발열, 강도라는 기능을 더해 새로운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다.
2010년 노벨물리학상 이후 그래핀은 한동안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꿈의 소재’로 불렸다. 실리콘을 대체하고, 휘어지는 디스플레이를 만들고, 미래의 첨단산업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소재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연구실의 성능만으로는 부족했다. 대량생산 여부는 물론 원하는 소재에 섞을 수 있고, 공장에서 안정적으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김 교수는 산화그래핀 원천기술을 산업으로 연결하기 위해 교원창업기업 소재창조를 설립했다. 그래핀올과 협력해 섬유를 비롯해 반도체 장비용 플라스틱, 초경합금, 절삭공구 등으로 적용 분야를 넓히고 있다. 초경합금처럼 단단하지만 반복적인 충격에 깨지기 쉬운 소재에는 그래핀을 넣어 내구성을 높이고, 플라스틱에는 강도나 전기적 특성을 더하는 식이다.
“그래핀은 기존 소재를 완전히 바꾸는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새로운 성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김 교수의 연구는 거대한 미래를 말하면서도 출발점은 의외로 소박하다. ‘이 소재를 어디에 쓰면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 더 좋아질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하고, 만들어보고, 실제 제품에 넣어보고, 다시 부족한 점을 찾는다.
“연구 결과를 계속 쌓아가고 실증하면서 실용화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씩 제품이 나오고 일상에서 쓰이게 하는 것,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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