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좋은 기술이 왜 연구실에서 끝나야 합니까" 이해신 KAIST 교수의 '질문'
- [일상을 바꾸는 KAIST의 유별난 과학자들④]
폴리페놀 접착 기술 적용한 그래비티, 출시 27개월 만에 판매 돌파
PDRN 신제품까지 출시해 헤어케어 넘어 기술 확장
후배들 향한 새로운 사명감도
이해신 교수 “좋은 기술이 왜 연구실에서 끝나야 하나”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예상과 다르게 나오면 오히려 재미있어요. ‘왜 이렇지?’ 하고 또 생각해보는 거죠.” 20년 가까이 폴리페놀 하나를 파고든 이해신 KAIST 화학과 석좌교수에게 연구는 답을 찾는 일보다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일에 가까워 보였다.
홍합의 접착 원리를 연구하다 시작한 폴리페놀 연구는 어느덧 글로벌에서 가장 '핫'한 샴푸가 됐다. 이 교수가 대표로 있는 폴리페놀팩토리는 폴리페놀 기반 기술을 적용한 헤어케어 브랜드 ‘그래비티’를 선보였고, 2024년 4월 출시 이후 올해 8월까지 누적 270만병 이상을 판매했다. 미국·일본에 이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해외 시장으로도 판매망을 넓히고 있다.
이 교수에게 그래비티는 여전히 ‘사업’보다 ‘연구’에 가까웠다.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는 과정도 그에게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연구실에서 시작한 기술이 시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또 다른 연구인 셈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이 교수의 인터뷰는 지난 3월 이뤄졌다. 푸릇한 봄에 이뤄진 귀한 인터뷰를 가을에서야 내보내게 돼 송구하다.
홍합이 샴푸가 되다
이 교수와 폴리페놀 인연은 2002년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홍합의 접착력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당시 지도교수가 보여준 것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위에 붙어 있는 홍합 사진이었다. 이 교수는 홍합이 바위에 붙어 있는 힘의 크기, 특히 분자 하나가 만들어내는 접착력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그 질문을 직접 풀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박사과정 첫 연구가 됐다.
연구를 이어가면서 주목한 물질이 폴리페놀이다. 와인과 커피, 녹차 등에 들어 있는 폴리페놀은 다양한 표면에 잘 달라붙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 교수는 이 특성을 단순한 원료의 기능으로 보지 않았다. 분자 구조를 바꾸고 서로 연결하면 전혀 다른 물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비티의 핵심 성분인 ‘LiftMax 308™’도 이 연구에서 나왔다. 폴리페놀을 단순히 샴푸에 섞는 것이 아니라 분자를 연결해 원하는 성질을 갖도록 화학적으로 변형한 것이다.
“콩으로 콩물을 만들 수도 있고 두부를 만들 수도 있잖아요. 둘 다 콩이지만 성질은 완전히 다르죠. 폴리페놀도 그냥 넣는다고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샴푸에 적용하면 폴리페놀 복합체가 모발의 케라틴과 결합해 세정 후에도 일부 성분이 남는다. 한 번 사용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감을 때마다 다시 코팅되는 구조다.
“다음에 머리를 감으면 일부는 내려가고 다시 코팅됩니다. 계속 누적되는 거죠. 물론 두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비티의 성장은 연구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제품 출시 초기에는 핵심 원료를 대량으로 생산할 설비가 없어 연구원들이 직접 원료를 만들기도 했다. 1000병 분량을 만드는 데 하루가 걸렸고, 접착력이 강한 원료를 손으로 다루다 피부가 벗겨지는 일도 있었다.
좋은 기술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비티는 이제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로 무대를 넓히고 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프랑스·이탈리아·대만 등으로 판매처를 확대했고, 프랑스 쁘랭땅 백화점에도 입점했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에서는 약 1평 규모의 부스로 참가해 글로벌 바이어와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해외 진출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오프라인 유통은 입점 이후 일정 기간 판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매대에서 빠질 수 있어 브랜드가 충분히 준비된 뒤 진입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오프라인이 굉장히 까다로워요. 3개월 정도 매출이 안 나오면 매대에서 빠지고, 그러면 다시 들어가기 어렵죠.”
올해 6월에는 폴리페놀 기술의 또 다른 확장판인 ‘그래비티 PDRN 헤어 리커버리 샴푸’도 출시했다. 해양 미세조류 유래 PDRN에 폴리페놀 기반 전달 기술을 적용해 두피와 모발에 성분이 머무를 수 있도록 설계했다. 회사 측 인체적용시험에서는 2주 사용 후 세정 시 모발 탈락수가 73.6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의 활용 범위를 헤어케어에만 묶어두지 않을 계획이다. 피부와 두피는 물론 난연 소재 등 다른 분야에서도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제품의 성공보다 하나의 원천기술이 얼마나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연구실을 넘어 창업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2025년 ‘세계 상위 2% 연구자’에 선정됐고, 과거에도 홍합 접착 원리와 폴리페놀 코팅 기술을 연구해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연구 성과를 논문과 특허로 끝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비티는 2028년 말~2029년 기업공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단순히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술과 회사의 가치를 시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다.
“좋은 기술이 있는데 왜 그걸로 끝나야 하나요.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같이 해보자는 거죠. 연구실에서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다른 과학자들의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도 관심을 두고 있다. 과학자가 직접 회사를 만들어 성공하는 사례가 늘어나야 후배 연구자들도 연구실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구실에서 발견한 과학이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고, 다시 새로운 연구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 그것이 20년 연구 끝에 그가 그리고 있는 가장 큰 꿈이다.
“과학자가 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야 후배들이 ‘나도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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