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사라진 이건희의 ‘삼각축’…이재용은 삼성을 어떻게 움직이나
- [‘이재용의 삼성’을 움직이는 힘]①
미전실 해체·전문경영인 전면에…총수 의사결정 방식도 변화
HBM 고전이 드러낸 조직의 숙제…“새 기술·인재에 힘 실어야”
그렇게 성장한 삼성전자가 올해 3분기 사상 처음으로 분기 영업이익 100조원을 넘어섰다. 삼성의 몸집은 이건희 시대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지만 이를 움직이는 방식은 달라졌다. 경영의 한 축이던 미래전략실은 2017년 해체됐고 과거와 같은 강력한 컨트롤타워는 사라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22년 10월 취임해 올해로 4년을 맞았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사실상 삼성을 이끌어온 기간을 따지면 ‘이재용 시대’는 이미 10년을 훌쩍 넘겼다.
10여 년 사이 삼성은 더 커지고 사업과 기술은 복잡해졌다. 이건희 시대의 ‘총수-컨트롤타워-전문경영인’이라는 삼각축도 달라졌다.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지금의 삼성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이재용의 삼성’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성공의 삼각축’ 대신 ‘경청 리더십’
두 사람의 리더십 차이를 흔히 ‘카리스마와 경청’으로 설명한다. 이건희 회장은 강한 메시지로 방향을 정하고 조직을 한곳으로 움직였다. 이재용 회장은 공개적인 메시지를 자주 내놓기보다 주요 사안을 놓고 관련 경영진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판단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만 볼 수는 없다. 이건희 시대 삼성은 일본과 미국의 선두기업을 추격하던 회사였다. 목표가 정해지면 자원과 인력을 집중해 빠르게 따라붙는 것이 중요했다. 강력한 총수와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한 수직적 의사결정은 당시 삼성의 ‘패스트 팔로어’ 전략과 잘 맞았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삼성은 이미 세계 정상권 기업이 됐다. 반도체만 해도 D램 설계뿐 아니라 공정·설비·패키징 등 다양한 기술의 중요성이 커졌고 AI를 만나 산업의 경계까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총수 한 사람이 “어느 기술로 가라”고 정답을 제시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회장의 경청과 숙의는 거대해진 삼성에 맞는 리더십일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관련 임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여러 선택지를 검토하는 스타일”이라며 “돌발적인 발언이나 지시로 논란을 만드는 다른 오너들과 비교하면 오너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다.
다만 ‘이재용식 경영’이 무엇인지 여전히 선명하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 회장은 2022년 회장에 오른 뒤에도 자신을 상징하는 경영 메시지를 거의 내놓지 않았다. 사법리스크라는 특수성도 있었지만 회장 취임 4년이 지나도록 이건희의 ‘신경영’처럼 조직 구성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언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이건희 회장 때보다 조직이 너무 커져 과거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어렵다면 시스템적 경영으로 가야 하는데 현재는 그것도 명확하지 않다”며 “이재용 회장만의 경영 특징이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시대 삼성의 의사결정 구조는 비교적 선명했다. 이 회장이 큰 방향을 정하면 이학수·최지성 등 이른바 ‘2인자’와 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이어지는 컨트롤타워가 이를 구체화했다. 각 계열사의 전문경영인은 정해진 전략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재용 시대에는 이 구조가 달라졌다. 미래전략실은 2017년 해체됐고 이후 사업지원TF가 주요 현안을 조율했지만 과거처럼 그룹 전체를 강하게 지휘하는 컨트롤타워와는 거리를 뒀다. 대신 삼성전자에서는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부문과 스마트폰·TV·가전 등을 맡는 DX부문 등 각 사업을 책임지는 전문경영인의 역할이 커졌다.
이 같은 변화에는 산업 환경의 변화도 자리 잡고 있다. 이건희 시대에는 선두기업이 가진 기술과 제품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반면 삼성 스스로 선두권에 올라선 지금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모바일 등에서 새로운 기술의 방향을 먼저 판단해야 한다. 기술도 세분화돼 총수 한 사람이 특정 기술을 선택하고 조직 전체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겪었던 부진은 기존 성공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전송 대역폭을 높인 AI 반도체용 핵심 메모리다. AI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에 HBM을 공급한 SK하이닉스가 시장을 선점했고, 삼성전자는 차세대 제품의 상용화와 고객사 확보에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도체업계에서는 기존 D램 중심의 경쟁력에 안주한 나머지 패키징 기술과 고객 맞춤형 제품 개발의 중요성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준영 산업인류학연구소장은 이를 이재용 회장 개인의 기술적 판단 실패로만 보는 데는 선을 그었다. 박 소장은 “이건희 회장 시대의 수직적인 위계 방식은 패스트 팔로어로 성장하는 데 잘 맞았다”며 “지금은 기술이 다방면으로 고도화돼 그룹 총수가 특정 기술을 정해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대신 이재용 시대 총수에게 요구되는 역할로 조직 내부의 자원 배분을 꼽았다. 직접 기술의 정답을 정하기보다 어떤 기술과 인재에 권한과 투자를 집중할지 결정하는 역할이다. 박 소장은 “삼성 내부에는 뛰어난 인적 자원이 많다”며 “새로운 산업과 기술 변화에 맞춰 기존 조직의 권력관계를 조정하고 인사와 투자를 통해 새로운 기술과 인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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