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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 >> 반월·시화 산업단지 업그레이드 현장

Repo >> 반월·시화 산업단지 업그레이드 현장

#1.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일대. 반월·시화 국가산업단지의 중심부다. 이곳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11월 9일 오전 8시15분. 도로 양쪽에는 근로자들의 차량이 줄지어 서있다. 공장 돌아가는 소리가 벌써 귀청 따갑게 울린다. 도로에선 대형 트럭이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5대 중 1대 꼴로 트럭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단지 답다. 1976년 조성되기 시작한 반월·시화단지에는 1만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다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이 공장이나 저 공장이나 똑같다. 공장을 구분하는 건 딱 하나, 칙칙한 담벼락뿐이다.



공장 담벼락이 도화지 되다안산시 성곡동 668번지의 비철금속 압출업체 국일신동 담벼락은 좀 다르다. 1987년 창업한 이 회사는 2년 전 반월·시화단지에 입주했다. 연 매출은 300억원, 임직원은 65명이다. 국일신동의 분위기는 다른 입주업체와 비슷하다. 1만5000㎡ 규모의 공장에는 비철금속을 나르는 덤프트럭이 수시로 들락날락했다. 근로자들도 아침부터 바쁜 듯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총 100m에 이르는 이 공장의 담벼락에는 요즘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서울과기대·삼육대·서울여대·서울시립대 학생 100여 명이 이곳에 화려한 벽화를 그리고 있다. 칙칙했던 공장 담벼락에서 소녀가 웃고, 비둘기가 날고, 코끼리가 뛰놀고, 고래가 헤엄친다.

대학생들이 재미 삼아 벽화를 그리는 건 아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QWL(Quality of Working Life)’ 사업, 이른바 행복산업단지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QWL사업은 근로자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근무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생산공장 위주의 노후산업단지를 ‘일터·놀이터·배움터’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겠냐’는 비아냥거림도 있다. 고작 100m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봤자 ‘공장은 공장일 뿐’이라는 거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벽화를 그리는 대학생도, 벽화를 보는 근로자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서울여대 공예학과 김민영(4학년)씨는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땐 분위기가 삭막했는데 벽화작업을 하면서 주변환경이 부쩍 밝아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국일신동 김맹년 관리차장은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벽화를 보고 즐거워한다”며 “담벼락만 살짝 꾸몄을 뿐인데 회사 이미지까지 좋아지는 것 같다”고 전했다.

#2. 시화단지 동쪽 끝 동부정밀 사거리. 이곳에서 골안말공원 방면으로 나있는 샛길로 들어가면 대규모 ‘청정표면처리센터’ 공사현장이 나온다. 규모는 1만㎡가 넘고 사업비는 460억원에 이른다. 공정률은 86.3%. 이미 공사가 마무리된 부분도 있다. 지금은 대형 센터가 건설 중이지만 불과 2년 전만 해도 이곳은 한국산업단지공단(산단공) 소유의 나대지였다.

산단공은 QWL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청정표면처리센터를 짓기로 했다. 반월·시화단지에 있는 중소 인쇄회로기판(PCB) 및 도금업체들에게 제안을 했다. ‘계약금 10%만 먼저 받고 잔금은 18개월에 걸쳐 받겠다’는 파격적 토지매각조건을 내걸었다. 삼신화학공업·스카이전자·연일하이피·유니웨어 등 7개 업체가 참여를 결정했다. 이들은 400억원이 넘는 센터건립비용을 댔다. 성공적인 민간투자 유치였다.

▎경기도 반월·시화단지에 있는 국일신동의 공장 담벼락에 대학생들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경기도 반월·시화단지에 있는 국일신동의 공장 담벼락에 대학생들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센터 내부는 초현대식으로 건립되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된 공장(연일하이피)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고 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 악취가 나고 폐수가 흘러나오는 영세 PCB 및 도금업체의 공장과는 딴판이다. 연일하이피 김태규 대표는 “산단공이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덕분에 깔끔하고 쾌적한 표면처리공장을 갖게 됐다”며 “이제는 바이어가 찾아와도 부끄럽지 않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김인순 사원은 “11월 9일부터 공장을 가동했는데 악취가 나지 않고 폐수 때문에 바닥이 질척거리지 않아 일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낡고 초라했던 산업단지가 옷을 갈아 입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10월 27일 시작한 QWL사업의 결과다. QWL사업의 시범대상지역은 반월·시화, 구미, 군산·새만금 산업단지 3곳이다. 예산은 1조2600억원에 이른다. 정부 및 산단공·지자체·민간이 공동 모금했다. 3곳의 QWL시범단지에는 지식산업센터·기숙형 오피스텔·비즈니스센터·자전거 출퇴근 도로·인공수로하천조성 등 29개 사업이 진행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생산유발효과 2조원, 고용창출효과 3만명을 기대하고 있다.

QWL사업의 핵심지역은 반월·시화단지다. 전체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5605억원이 이곳에 쓰인다. 반월·시화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산업단지다. 1만4434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22만7000여 명이 근무한다. 지난해 생산액은 60조원, 수출액은 62억 달러다. 국내총생산(GDP)의 5.1%, 국내 수출액의 2%가 이곳에서 나온다.

하지만 반월·시화단지는 높은 실적 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되레 낙후단지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산업시설 위주로 조성돼 근로자의 편의·복지시설이 턱없이 부족해서다. 실제로 반월·시화단지의 지원시설 용지는 전체의 2.5%에 불과하다. 그 결과 3194만㎡ 규모의 단지 안에 주유소가 4개밖에 없다. 현장에서 만난 한 근로자는 “강남 주유소보다 가격이 비싼 곳도 있다”고 말했다.

식당도 거의 없다. 바이어와 식사를 하려면 단지 밖으로 나가거나 구내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도 찾기 어렵다. 반월·시화단지에 불법으로 조성된 간이컨테이너식당이 50개가 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석 산단공 이사장은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는 반월·시화단지는 청년이 일하고 싶어하는 공간, 근로자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일터로 탈바꿈해야 한다”며 “지금은 우리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QWL사업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다. 회색굴뚝지대 반월·시화단지에는 변화의 바람이 깃들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천의 변화다. 안산시·시흥시 등 지자체는 반월·시화단지를 관통하는 하천 16.2㎞를 200억원을 들여 재정비했다. 잡초와 오물이 뒤섞여 흉물스러웠던 이곳 하천은 외벽이 조성되면서 깔끔하게 변했다. 하천 옆에는 자전거 출퇴근길이 조성되고 있다.



나대지에 초현대식 센터 건설주유소·오피스텔 등 편의시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올 11월 주유소 2개가 추가 착공된다. 전자부품업체 네오지텍은 1000억원을 들여 도시형 생활주택 및 오피스텔을 건립할 예정이다. 지하 4층·지상 20층 규모다. 근로자 오피스텔(656실)·근로자 쉼터·운동시설·보육시설이 들어선다. 사업승인을 기다리는 오피스텔 건립사업도 2개다. 만약 사업이 승인되면 반월·시화단지에는 15층이 넘는 대형 빌딩이 2개 더 생긴다. 산단공 구조구도화추진센터 노용석씨는 “구로동단이 지금의 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대형 빌딩이었다”며 “각종 편익시설을 갖춘 대형 빌딩이 대박을 터뜨리자 너나 할 것 없이 현대식 빌딩을 짓겠다고 나섰다”고 했다. 그는 “대형 오피스텔이 속속 건설되면 반월·시화단지도 초현대식 단지로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 근로자의 고용을 확대하기 위해 직장 공동 보육시설도 설치될 예정이다. 산단공 산업입지연구소 조혜영 입지정책팀장은 “QWL사업을 통해 기업과 근로자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과 근무여건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월·시화단지에 건설 중인 청정표면처리센터. 2년 전 이곳은 나대지였다.

▎반월·시화단지에 건설 중인 청정표면처리센터. 2년 전 이곳은 나대지였다.

반월·시화단지의 또 다른 변화는 대학에서 시작된다. 반월·시화단지에 있는 한국산업기술대(산기대) 캠퍼스 안에는 연면적 2만9000㎡ 규모의 ‘QWL캠퍼스’가 건설되고 있다. QWL캠퍼스는 근로자들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반월·시화 QWL캠퍼스는 산기대·건국대·신안산대·안산대 등 4개 대학의 연합 커리큘럼을 운영해 맞춤형 산업인력을 양성할 방침이다. 단지 근로자를 위한 ‘선취업·후진학’ 프로그램이다. 마이스터·특성화 고교생의 취업과 진학을 지원하는 ‘영 마이스터-7’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된다. 200개가 넘는 기업연구소가 입주할 수 있는 기업연구관도 만들어진다. 여기선 산학 공동 연구개발(R&D)이 진행될 예정이다. 산기대 기획처 송영승 팀장은 “QWL캠퍼스가 대학교 안에 조성되는 것은 반월·시화단지가 유일하다”며 “반월·시화 QWL캠퍼스를 일터·배움터·놀이터로 꾸미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재학생들의 관심도 많다. 산기대 e-비즈니스학과 안지훈(1학년)씨는 “QWL캠퍼스가 완공되면 취업이나 직업교육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1년 지났지만 QWL 모르는 사람 “80%”이런 성과에도 QWL사업은 해결할 과제가 아직 많다. 사업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지만 QWL사업의 내용과 취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산단공 자체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0%가 “QWL사업을 모른다”고 밝혔다. 민간투자 유치도 현재로선 쉽지 않다. 정부는 QWL사업을 촉진하기 위해 연내 600억원 규모의 ‘QWL밸리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지만 성사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정부는 지난해 QWL밸리 펀드조성에 실패했다. 민간참여를 유인하기 위해 바꿔야 할 법도, 풀어야 할 규제도 많다. 산단공 하권찬 민간유치센터장은 “취등록세·양도소득세·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감면해야 기업투자가 확대되고 QWL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QWL과 비슷한 성격의 사업이 각각 다른 명칭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문제”라며 “이런 사업들을 효율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선 관련 법을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간도 QWL사업을 자체 추진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서울반도체는 올 7월 반월·시화단지에 있는 회사건물 옆에 사내 복지관 ‘비타민홀’을 준공했다. 모두 20억원을 투입했다. 4층 규모의 비타민홀에는 초현대식 운동시설을 갖춘 헬스클럽이 있다. 직원들은 원하는 시간에 운동을 할 수 있다. 24시간 개방한다. 대학강의도 이곳에서 열린다. 서울반도체는 산기대·경기과학기술대학과 협약을 맺고 비타민홀에서 전문학사·학사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올해 14명의 학사가 배출된다. 서울반도체 인사 담당 김태흥 섹터장은 “비타민홀이야 말로 QWL사업의 취지인 일터·배움터·놀이터가 아니겠는가”라며 “정부의 QWL사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은 민간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낙후된 산업단지에 자금을 투입해 성공적으로 변신하게 만든 예는 많다. 영국 맨체스터시에 있는 ‘트래포드 파크’는 대표적이다. 트래포드 파크는 1896년 조성된 세계 최초 산업단지다. 한때 군수물자의 요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단지가 노화되면서 슬럼화 현상을 겪었다. 그러자 영국 의회는 1985년 ‘프래포드 파크 개발공사(TPDC)’를 설립하고 이 단지의 현대화에 힘을 쏟았다. 특히 낙후된 곳에는 상업 및 업무시설을 유치해 활력을 불어넣었다. TPDC가 1998년까지 진행한 이 사업으로 트래포드 파크는 900개 기업을 신규 유치하고 2만9000개의 일자리 창출에 성공했다. 낡은 산업단지를 개선하면 이처럼 근로자 의욕이 고취될 뿐만 아니라 나라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회색굴뚝단지도 얼마든지 금맥이 될 수 있다.

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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