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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손대지 않는다’ 이제는 옛말

‘가족은 손대지 않는다’ 이제는 옛말

지난 3월 6일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모스크바의 구치소를 떠나고 있다. 그는 지하철에서 전단을 돌리다가 체포돼 15일 동안 구금된 뒤 풀려났다(왼쪽 사진). 런던에서 망명을 신청한 아슈르코프(왼쪽)와 마르크보는 러시아 보안기관에 반체제 인사 살생부가 있다는 소문을 우려한다.
러시아 반체제 인사를 표적으로 한 크렘린의 전쟁이 갈수록 흉포해진다. 이젠 스스로 만든 규칙까지 무시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반기를 드는 러시아 반체제 인사는 과거엔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신했다. 보안요원들이 자신에게 총질하지 않는다, 또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아슈르코프는 알렉세이 나발니 다음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다. 하지만 그는 반체제 세력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도덕주의자나 거리 시위대와는 다르다. 아슈르코프는 러시아의 선도적인 투자 전문가다. 부유하고 성공했으며 서방에서 교육 받은 경영인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상냥한 태도와 기업가적인 효율성으로 나발니를 일개 블로거에서 범국가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나발니가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하고 중대한 정책 제안으로 진지한 정치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슈르코프 덕분이었다. 그는 나발니에게 모스크바 최고의 정책 전문가와 엘리트적 품위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슈르코프는 이제 러시아 당국이 자신을 뒤쫓는다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파트너로 모스크바 예술계의 주요 인물인 알렉산드리나 마르크보를 정치적 동기로 박해함으로써 가족에게도 고통을 주려 한다. 아슈르코프와 마르크보 사이엔 9개월 된 아기가 있다.

아슈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당국이 우리를 본보기로 만들려 한다. 그들은 나발니를 지원한다고 나를 벌주려 한다. 그런 일을 하려는 다른 사람에게 겁주려는 의도다. 그래서 그들은 나뿐만 아니라 마르크보도 괴롭히려고 한다. 이건 새로운 현상이다. 이전까지 크렘린은 정적의 가족은 손대지 않았다. 푸틴이 러시아 최고 갑부였던 호도르코프스키를 체포해 10년 동안 옥살이를 시켰을 때도 그의 아내와 자녀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 호도르코프스키는 푸틴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규칙도 없다. 러시아 당국은 최근 경제위기와 우크라이나 사태 후 탄압 수위를 계속 높이고 있다. 나발니의 동생을 구속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동생은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다. 이제 그들은 내 파트너에게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한다.”
 크렘린이 선호하는 전술 ‘적색수배서
크렘린은 나발니에게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슈르코프를 다루고 있다. 재갈을 물리고 꼼짝할 수 없도록 하려고 날조된 소송을 무기로 사용하는 ‘사법전쟁’을 말한다. 푸틴 정권은 2012년 이래 반체제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먼저 크렘린은 폭력으로 번진 2012년 5월 반푸틴 시위에 참석한 인사들을 상대로 10여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 다음 나발니를 고발했다. 지금 나발니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무니없는 재판을 받고 있다. 반체제 운동에 기부한 사람 다수도 괴롭힘을 당했다. 대부분 1000루블(약 2만원) 정도 소액을 기부한 사람들이다.

“우리 동지 중 일부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고 아슈르코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정부 자문역인 세르게이 구리에프도 나발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가 박해를 받았다. 이제는 그들이 가족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나발니와 나를 벌하려고 한다.”

나발니는 여론조작용 재판이라고 해도 모스크바에서 받기로 결심했다. 최근 재판에서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는 동생이 유죄판결로 수감됐다. 이 재판은 너무도 조작이 심해 나발니 형제로부터 횡령당했다고 검사측에서 주장하는 화장품 회사 이브로셰 러시아 지사조차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반면 아슈르코프는 가족과 함께 런던에서 정치 망명을 신청한 후 계속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망명 승인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슈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런던에 있다고 마음이 편한 건 절대 아니다. 우리의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최근 법원 결정은 러시아 법집행 당국이 마르크보의 송환 절차를 개시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비용이 많이 드는 장기 법정투쟁에 직면했다. 우리가 모스크바를 떠나도 그들은 우리 삶을 망치려 한다. 내가 러시아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러시아는 마르크보에게 ‘적색수배서(Red Notice)’를 발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인터폴을 통해 190여 개국에 해당 인물의 구금을 권고하는(강제는 아니다) 수단을 말한다. 이제는 그런 방식이 망명한 반체제 인사를 괴롭히는 싸움에서 크렘린의 선호하는 전술이 됐다. 러시아인 정치인과 환경운동가를 대상으로 이미 적색수배서가 발부됐다. 인터폴은 러시아의 이런 시스템 남용을 막으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슈르코프는 바로 이런 조치가 가족이 직면한 주된 위험이라고 말했다. “불확실하고 느린 망명 절차가 끝나기 전에 러시아 당국이 적색수배서를 발부할 수 있다면 러시아가 결국 영국에서 마르크보를 구금시켜 송환을 요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크렘린의 노림수다. 그들은 생후 9개월짜리 아기의 어머니인 무고한 여성을 해외에서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정적 압박엔 한계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잔인함과 부조리로 겁주려는 의도다.”

마르코보는 자신의 삶이 심리 스릴러의 시작 장면을 닮아간다고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말한다. 마르크보는 “내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바쁘게 만들 줄 몰랐다”고 말했다. “크렘린이 수많은 수사관을 동원해 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애쓴다. 그들은 70대인 우리 부모를 조사했다. 또 그들은 내가 운영하는 소규모 홍보회사의 금융거래를 샅샅이 조사한다. 그들이 적색수배서를 발부하면 어느 나라에서든 나를 구금할 수 있다.”

크렘린은 날조된 정치 소송의 대가가 됐다.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꾸미지도 않는다. 심문으로 괴롭힐 수 있는 관련자 수를 최대한 늘리려는 심산일 뿐이다. 마르크보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이 하나의 예술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아슈르코프와 마르크보는 말했다.

마르크보는 TV 진행자였다. 크렘린의 손쉬운 표적이다. 러시아 문화 엘리트를 위한 예술행사 플래너였기 때문이다. 크렘린에 충성하는 미디어는 마르크보의 회사가 크렘린의 사주를 받고 나발니에게 불법으로 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됐다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폈다(크렘린이 은밀하게 나발니를 도울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동시에 그 회사가 거의 10년 동안 계약으로 일해온 모스크바 당국에 사기를 치고 자금을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저속한 정권은 오래 못간다”
러시아 반체제 운동가 일랴 야신(왼쪽)과 크세니아 소브차크. 소브차크는 ‘당신이 다음 표적’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말했다(왼쪽 사진).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러시아 최고의 석유 거부로 푸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10년 동안 옥살이를 한 후 2013년 풀려났다 (오른쪽 사진).
마르크보는 모스크바 당국의 의뢰로 도서전시회와 문학축제를 주최한 인물로 잘 알려졌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배우, 과학자들과 함께 그런 행사를 주최했다. 이제 그들 중 누구라도 심문을 받거나 용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마르크보는 말했다.

“그들은 진보적인 지식인을 괴롭히려고 사건을 조작했다. 이런 정치적 동기로 날조된 소송으로 그들은 모스크바의 어떤 작가든 불러다 조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우리는 작가들이 1937년처럼 음침한 건물에 조사 받으러 불려갔다 나오는 것을 지켜봤다. 러시아의 주요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들 중 다수는 70대다. 그렇게 조사 받다가는 심장마비에 걸릴 수 있다. 특히 러시아에선 조사를 받으러 불려간 사람이 때로는 갑자기 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크렘린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아슈르코프는 크렘린이 그처럼 잔인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13년 9월에만 해도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의 모스크바 시장 선거 출마를 허용했다. 물론 국영 TV 출연이 금지돼 컴퓨터와 지지자들의 도움으로만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28%의 득표율을 올렸다. 표를 조금만 더 얻었다면 결선투표까지 갈뻔했다.

“돌아보면 당국이 투표 결과에 충격 받아 대처 방법을 두고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고 아슈르코프는 말했다. “그들은 정확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박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류도 있었지만 그들이 영향력을 잃은 게 분명하다.”

마르크보는 아슈르코프와 살게 됨으로써 정치적 표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정권이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과 교류한 적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보는 “모스크바 시위가 벌어지기 전인 2011년 아슈르코프를 만났다”고 밝혔다. “시위가 시작됐을 때 우리는 지인들 모두가 그 즐겁고 축제 같은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희망과 낙관론이 널리 퍼졌다. 우리는 러시아의 새로운 중산층이 제 목소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러시아를 위한 변화가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보가 임신 8개월이던 지난해 3월 어느날 이른 아침 그들의 모스크바 아파트에 검은 유니폼을 입은 남자 10명이 카메라를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그때서야 아슈르코프와 마르크보는 위험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 받았다. 그날 밤 아파트 급습 장면이 국영 TV로 방영됐다. 곧 당국은 아슈르코프를 상대로 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당국은 탄압 쪽으로 급선회했다. 2013년 모스크바 시장 선거 때만 해도 변화가 가능하며 갈수록 세력이 커지고 전문화돼 가는 반체제 운동이 러시아를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심지어 선거에서 권력의 일부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나 싶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해 7월 영국 런던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했다. 마르크보는 “우리가 정치 난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친구와 친척을 만날 수 없고 우리 둘 다에게 중요한 일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난민 지위를 얻는다고 해도 여행은 언제나 제한될 것이다. 러시아 당국이 인터폴의 국제 메커니즘을 이용해 우리를 송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푸틴의 정적으로 크렘린 비판에 앞장섰던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의 피살 이래 러시아 야권 인사 중 누구도 신변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넴초프 다음 표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아슈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넴초프 장례식에서 조문객 수백 명 사이에서 몇몇 사람이 알렉세이 베네딕토프(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자주 내보내는 모스크바 라디오 방송사 에코 모스크비 대표)와 크세니아 소브차크(반체제 운동에 관여한 유명 TV 언론인)에게 다가가 ‘당신이 다음 차례’라고 나지막히 말하며 겁줬다.”

아슈르코프는 지난해 4월 이스라엘에서 넴초프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당시 러시아의 우크리이나 내전 개입을 조사한 보고서를 만들고 있던 넴초프는 크렘린이 자신을 암살할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우려했다. 또 그는 체첸 자치공화국 수반 람잔 카디로프가 망명한 호도르코프스키를 없애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경고하며 아슈르코프에게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넴초프는 자신이 곧 기소될 것으로 예상하지만 해외로 탈출할지 감옥행을 받아들일지 마지막 순간에 가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아슈르코프는 “보안기관의 개입 없이 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그 몸통이 푸틴까지 거슬러올라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살해와 그 여파는 시스템 내부의 병리현상과 압박을 드러냈다. 불화와 마찰, 두려움의 조짐이 있다. 견제와 균형의 옛 시스템이 이젠 통하지 않는다.”

아슈르코프와 마르크보는 자신들의 망명이 임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슈르코프는 “러시아라는 국가 자체를 납치해 거대한 정치적·경제적 부패 기계로 만든 세력은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의 반부패 시민 행동주의와 나발니의 선거 데뷔 성공으로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푸틴의 시스템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 기초가 얼마나 불안한지 그들도 잘 안다는 표시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러시아로 돌아갈 것이다. 10년 후가 될지 그보다 훨씬 빠를지는 잘 모르겠다. 돌아가면 러시아 국가운영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이런 저속한 정권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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