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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부도 위기…러시아 경제 어디로 갈까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서방 제재로 루블화 가치 폭락, 채무불이행 우려
산업 구조 열악하고 에너지 부문에 과도한 의존
사치재 수입 제한은 민심에 영향 끼칠 수 있어
서방 경제제재는 러시아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져

 
 
러시아 루블.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경제잡지 포춘은 16일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가 이웃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러시아에서 철수한 글로벌 기업의 명단을 정리해 보도했다. 148개 업체가 러시아에서 기업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BP(영국국영석유회사, The British Petroleum)나 엑손, 쉘 같은 거대 다국적 에너지 기업이 여기에 속한다. 
 

맥도널드·펩시·코카콜라·스타벅스…러시아 떠나는 기업들

2022년 3월 13일 러시아 모스크바 푸시킨 광장의 맥도날드 매장. [AP=연합뉴스]
 
174개 업체는 복귀 옵션을 남겨둔 채 러시아에서의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72개 업체는 부분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거나 투자를 연기했다. 32개 기업은 떠나거나 활동을 줄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아서 계속 활동하기로 한 것이다.
 
당장은 활동을 중단하지만, 기회가 되면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서방의 청바지 브랜드인 리바이스, 식품 업체인 맥도널드, 펩시, 코카콜라, 스타벅스 등이 해당한다. 이는 탈냉전과 자유화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러시아 경제가 서방 경제가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 심볼이었다.
 
한마디로 과거 소련이 무너지고 들어선 러시아가 시장경제화를 추구할 때 러시아가 추구했던 새로운 글로벌화의 상징으로 간주했던 브랜드의 기업들이다, 이들 브랜드의 철수는 러시아가 서방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을 추구하는 시대가 비록 일시적이라고 해도 저물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번에 러시아에 있던 847개의 맥도널드 매장이 문을 닫은 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맥도널드 매장이 있는 나라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신화’도, 시장경제의 확장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믿음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맥도널드가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영업한 3월 8일 모스크바를 비롯한 각지의 매장에는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드라이브 스루 매장에도 차들이 몰려 길게 줄을 섰다. 유로뉴스의 코멘트 요청에 응한 모스크바의 고객은 “슬프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맥도날드는 옛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이던 1990년 1월 모스크바 중심지에 있는 푸시킨 광장에 1호점이 개장했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주도해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즉 개혁·개방을 한참 추구하던 시절이었다.
 
개업 첫날 약 450m 정도의 긴 줄이 늘어섰을 정도였다. 크리스 켐프친스키 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는 영업 중단 전날인 7일 이를 공개하고 “러시아 매장을 언제 다시 열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달 3일 러시아 서부 힘키(Khimki) 쇼핑 센터 근처의 이케아(IKEA) 매장 밖에서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타스=연합뉴스]
부분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거나 투자를 연기한 기업들은 그야말로 철수 시늉만 한 것으로 보인다. 철수한다고 연막만 피우거나 눈속임을 한 셈이다. 미래 이익은 포기할 수 없지만 당장 날아오는 총탄은 피해야 하니까 일단 엎드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애벗이나 클락소스미스클라인, 존슨앤존슨, 머크, 화이자 같은 제약회사들이 대부분 여기에 들어간다.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의약품과 생산품을 러시아에 계속 공급하는 것은 비즈니스적인 목적에서는 물론이고 인도주의적인 이유에서도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화학·생물학 연구소가 푸틴 정권을 위한 생물학적 무기 생산 등에 쓰일 가능성도 있어 계속 논란이 될 수 있다.
 
소비자 제품을 생산하는 칼스버그, 다논, 제네랄 밀스, 켈로그, 크래프트-하인츠, 마르스, 네슬레 등도 이유식이나 기저귀, 초콜릿 등 유아용 제품은 그대로 생산하고 유통할 예정이다. 하지만 오레오 쿠키나 배드버리 초컬릿, 다논의 치크케익 요거트 등은 가정에서 흔한 제품이지만 생활필수품인지는 논쟁이 따를 전망이다.
 
던킨 도너츠나 파파존스 피자, 얌!브랜즈 등 식품 프랜차이즈는 서방의 본사가 지원을 중단했음에도 러시아의 프랜차이즈 기업이 전체 매장의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847개 매장의 85%를 미국 본사가 직영해온 맥도널드와는 사정이 다르다.
 
미국의 거대 농업·식료품 기업인 번지나 카길, 상품과 에너지 무역업체인 트라피구라는 러시아에서의 영업 중단이 글로벌 공급망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이들이 취급하는 밀, 옥수수, 니켈 같은 1차 상품은 러시아와 서방 모두에 필요하며, 공급망이 흔들릴 경우 러시아를 압박하는 효과와 서방이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6400억 달러 들고도 서방 제재에 채무 상환 발 묶여

미국 달러 지폐와 러시아 루블 지폐. [로이터=연합뉴스]
 
루블화 가치도 추락하고 있다. 한국 원화와 비교하면 루블화는 지난 1년간 1원에 0.60~0.66루블을 오가다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3월 9일 1원에 0.087루블까지 떨어졌다가 17일 0.08루블로 약간 회복됐다.
 
이를 알아보기 쉽게 한화 기준의 루블화 가치로 살펴보면 지난 1년간 1루블 값은 15~16원을 오갔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급격히 하락했다. 3월 7일 1루블은 8.87원까지 떨어졌다가 17일 12.3루블로 약간 회복됐다.
 
달러화와 비교한 루블화 가치는 지난 1년간 1달러에 73~79달러를 오갔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급격히 떨어져 3월 9일 1달러에 138.75루블까지 하락했다. 17일 달러당 98.50루블로 약간 회복됐다. 달러화 대비 루블화 가치는 지난달 40% 하락했다.
 
다급해진 러시아 중앙은행은 러시아 내에서도 루블화와 다른 외화 간 환전을 일시 중단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보유 외환도 동결해 환율을 방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배경에는 푸틴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실책이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름반도 합병 이후 서방의 제재가 강화되자 그때부터 금융 부문에서 단단히 준비를 해왔다. 특히 에너지를 판 돈으로 보유 외환을 6400억 달러까지 높여왔다.
 
주요국의 보유 외환을 보면 지난해 가을 기준으로 중국이 3조2176억 달러, 일본이 1조4045억 달러, 스위스가 1조862억 달러에 이른다. 러시아는 6242억 달러로 6404억 달러의 인도와 5, 6위를 다툰다. 대만이 5467억 달러, 홍콩이 4980억 달러, 한국이 4600억 달러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미국유럽을 상징화한 스패너와 러시아 화폐 루블화. [DPA=중앙포토]
마이클 번스탬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은 러시아의 전체 보유 외환의 절반 이상인 4000억 달러가 뉴욕·런던·베를린·파리·도쿄 등 외국의 중앙은행이나 상업 은행에 예치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당당 쓸 수 있는 외화는 제한돼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은 러시아의 대형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배제했다. 러시아 금융업체나 기업이 자금을 해외에서 가져오거나 내보낼 수 없게 한 것이다.
 
러시아가 발권하는 루블화는 이제 국경 밖에선 사실상 가치 없는 종이로 변하고 있다. 러시아 금융 당국은 서방 제재에 대응해 비우호국 채권자에 부채와 이자를 루블화로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국제 금융 계약상 루블화로 채무를 상환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계약에 표시된 달러화 등 외화로 이를 갚을 수 없게 되면 ‘디폴트(채무상환 불능상태)’에 빠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러시아 경제 후퇴 우려…경제 제재 가한 EU에 수출 의지해

러시아 원유 시설. [리아노보스티 연합뉴스]
 
이에 따라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대대적인 경제 제재로 개혁·개방을 시작하기 전인 약 30년 전 옛 소련 수준으로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CNBC 방송은 3월 14일 미국 싱크탱크인 외교정책연구소(FPRI)의 중앙아시아 담당 막시밀리안 헤스의 말을 인용해 “앞으로 5년간 러시아인들은 1990년대나 그보다 더 열악한 수준의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서방 제재로 글로벌 기업이 앞 다퉈 떠나고, 루블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는 상황이 러시아 경제에 일시적인 타격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상당 기간 내상을 입힐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사실 러시아에 더욱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 수입을 중단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이다. 원유와 수출은 러시아 수출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제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잠시 러시아의 경제 현황을 살펴보다. 냉전 시절 미국과 대결했던 패권 분할국이던 러시아는 현재 경제적으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2021년 국제금융기구(IMF) 예상치 명목 금액 기준 국내 총생산(GDP)가 1조7107억 달러로 세계 11위다.
 
1조8067억 달러로 10위를 한 한국보다 한 단계 뒤진다. 1조6175억 달러의 호주와 1조4917억 달러의 브라질, 1조 4615억 달러의 스페인이 뒤를 잇는다.
 
러시아의 1인당 GDP는 더욱 초라하다. 2021년 IMF 전망치 명목 금액 기준으로 1만1654달러로 세계 64위다. 중국(1만1819달러·61위), 코스타리카(1만1806달러·62위), 몰디브(1만1654달러·63위)보다 조금 적고 말레이시아(1만1604달러·65위), 불가리아(1만1321달러·66위), 나우루(1만125달러·67위), 카자흐스탄(9828달러·68위)보다 약간 많다.
 
산업 구조는 열악하다. 러시아는 3530억 달러(2017년 추정치)를 수출하지만, 상당 부분이 석유와 천연가스, 금속과 광물, 그리고 목재와 목재 가공품이다. 우주항공과 원전·에너지·바이오 분야에서 세계적인 과학기술 수준을 자랑한다.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가스관 노드스트림2. [AP=연합뉴스]
하지만 러시아산 자동차나 휴대전화, 반도체나 선박의 수출은 기대하기 어렵다.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이 발달해 우주로켓을 쏘아 올리고 대륙간탄도탄(ICBM)을 발사하는 나라지만, 이를 제품화해 수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1차 산업인 에너지 수출에 국가 경제가 지나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다가 수출의 45.8%가 경제 제재 주체인 EU에서 나오기 때문에 서방의 경제제재는 러시아에 상당한 상처를 줄 수 있다. 러시아의 주요 수출 상대를 보면 EU가 1위이고 뒤를 이어 중국(9.3%), 벨라루스(4.9%), 터키(4.8%), 한국(3.5%), 인도(2.1%) 등이 차지한다. 주요 수입 상대도 EU(38.2%)가 1위이며, 중국(20.9%), 미국(6.1%), 벨라루스(5.2%), 일본(3.7%)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에너지의 해외 판매를 차단하면 한마디로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틀어막는 것이나 진배없다. 다만 한계는 있다. 가스 등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서유럽 국가들이 어디까지 견딜지가 관건이다.
 
이는 서유럽과 러시아가 기차 레일 위에서 벌이는 치킨 게임과 비슷한 상황이다. 다만 미국은 에너지를 자급하고 있는 데다 국제 유가가 올라가면 셰일 가스 채굴을 재개할 수 있어 사정이 다르다. 러시아로선 엄청난 압박이지만, 여기에는 미국과 서유럽이 서로 동상이몽을 꿀 수도 있는 지점이다.
 
첨단기술 제품과 사치재의 대러시아 수출을 막은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는 사실 미사일이나 항공기, 전자장비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러시아 산업은 물론 방위산업에도 문제가 번질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 부유층엔 치명적인 사치재의 대러시아 수출 제한

지난달 28일 수도인 모스크바 시내의 한 백화점에 설치된 스베르뱅크 ATM기 앞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 [타스=연합뉴스]
 
사치재의 대러시아 수출 제한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러시아의 민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러시아의 부유층에게 사치재는 이미 생활필수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여론이나 투표로 흘러가는 국가가 아니지만, 중산층이 푸틴에게 등을 돌릴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에 따른 서방의 대러시아 대응은 경제 제재가 한 국가와 사회에, 그리고 지도자에게 얼마나 큰 압박을 가할 수 있느냐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경제 제재를 해야 푸틴이 마음을 바꾸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러시아에서 푸틴은 누구도 직언할 수 없는, 권위주의 체제의 유일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직된 정치 체제가 결국 지도자의 오판과 전쟁이라는 불행으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 러시아 경제가 고통을 받는다고 푸틴 체제가 바뀔 수 있다고 판단하는 서방 지도자는 많지 않다.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러시아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나거나, 궁정 쿠데타가 벌어져 푸틴을 대체하는 지도자나 체제가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는 서방의 꿈일 뿐, 현실적인 상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러시아 부유층은 대부분 푸틴의 경제 공동체이거나, 공모자이거나, 충성파이거나, 낙수 효과를 본 계층이기 때문이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건 결국 러시아의 기층 민중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아울러 경제제재는 국제경제 네트워크에 어느 정도 편입이 된 나라에만 적용 가능하다는 것이 한계일 것이다. 경제제재가 북한에 도저히 먹히지 않는 이유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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