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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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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고령군이 대한민국 다섯 번째 고도(古都)로 정식 지정됐다. 이번 신규 고도 지정은 경주·부여·공주·익산에 이어 20년 만이다.문헌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대가야는 중앙집권적 국가체계를 갖추었으며, 고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한 국가였다. 왕위 세습, 중국식 왕호 사용, 예악문화, 신화 및 매장 의례 등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지녔다. 5세기 후반 대가야의 영향력은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등 인접 지역까지 확장됐다. 고령에는 대가야의 도성 체계를 보여주는 궁성지, 왕궁 방어성, 수로 교통 유적 등 귀중한 문화재가 다수 남아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고분군의 일부인 '지산동 고분군'은 그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이번 고도 지정으로 고령 대가야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령군은 지역의 유·무형 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세계유산 탐방거점센터 건립 및 역사문화공간 조성 사업 등을 통해 관광 및 문화산업 활성화를 도모할 예정이다. 이남철 고령군수는 "고령 대가야 고도 지정은 고령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뜻깊은 결정이며, 고령군과 지역사회는 앞으로도 협력하여 고령 대가야의 유산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지역 발전을 이루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홍성철 기자 thor0108@edaily.co.kr

2025.02.1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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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결국 '역사 왜곡' 교재까지...

정책이슈

중국 정부가 올해 3월 발간·보급한 '중화민족 공동체 개론' 대학 교재가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변방 역사로 서술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고 있다.29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화민족 공동체 개론' 교재(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제작·이하 '개론')는 고구려와 관련해 "(당나라 시기) 동북방에는 고구려, 발해 등 변방(邊疆) 정권이 연속해 있었다"며 "그들은 모두 한문·한자를 썼고 역대 중앙(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다"고 명시됐다.중국은 공식적으로 2002∼2007년 시행한 '동북공정' 등을 통해 현재 중국 영토 내에 과거 존재했던 역사를 '중국 역사'로 왜곡 기술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고,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고구려 역사가 '중국 변방 정권'이었다는 주장을 체계화하고 있다.'개론'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주창해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지시에 따라 '중화민족 공동체'를 개념화한 최초의 통일적 교과서라고 중국 신화통신은 평가했다.총 377쪽 분량으로 선사시대부터 시 주석이 집권한 2012년 이후 상황까지 현재 중국 영토 내 여러 민족의 역사를 정리했다.이 교과서에서 '고구려'는 30여 차례 언급되는데, 일관되게 고구려 역사를 한반도와 분리해 중국에 귀속시키고 있다. 동북공정 이후 중국이 고구려에 대해 자주 써온 '변방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표현이 '변방 정권'으로 한층 명확해지기도 했다.'개론'은 "918년 왕건이 조선반도(한반도)에 신라인을 주체로 고려 왕조('왕씨 고려')를 세웠는데, 약칭이 마찬가지로 '고려'지만 이전의 고구려 정권('고씨 고려') 및 당나라 번속이던 발해국과는 전혀 계승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이런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간 한국 학계에서 여러 차례 논박됐다. 993년 고려를 침공한 요나라(거란) 장수 소손녕에게 서희가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명확하게 설명한 것 등 사료로도 반박된다.리다룽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연구소 국가·강역이론연구실 주임은 '개론'이 출판된 무렵인 올해 3월 발표한 '왜 고구려가 역사상 우리나라(중국) 동북 지방정권이고 다른 국가와는 계승 관계가 없는가'라는 글에서 중국 사서 '송사'(宋史)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표현한 대목을 '오류'로 규정하고 "이후의 사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잘못을 따라 기술됐다"며 중국 사료조차 부정한 바 있다.중국이 공식화한 교과서 '개론' 역시 고구려와 중국 왕조의 조공·책봉 관계와 외교문서 교환 등을 각주로 자세히 설명한 것과 달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는 대목에서는 별다른 근거를 내놓지 않았다.'개론'은 또 "중원과 동북 각 족군(族群)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의 세력이 장대해졌다"거나 "고고학적 발견 결과 위(魏)·진(晉) 이래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및 복희·여와 등 선명한 중화문화의 각인이 다수 남아있다"며 고구려가 '중화민족'의 일부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주중대사관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개론' 문제는) 올해 상반기에 확인했던 내용으로, 역사 왜곡과 관련해서는 중국에 계기가 있을 때마다 시정 요구를 해왔다"며 "요구하고는 있으나 시정이 충분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중국 당국은 이달 들어 '개론' 내용을 일반 대중에 공개하는 온라인 시리즈 강좌도 개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홈페이지를 통해 10여개 강의를 올리기도 했다.한편, 중국의 고구려사·발해사 왜곡 움직임은 최근 당국의 고고학 강조 흐름 속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2022년에는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베이징 국가박물관에서 연 고대 유물 전시회에서 한국 고대사를 소개하면서 고구려와 발해를 고의로 빼 한국 측 항의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작년에는 발해 도읍 팔련성(현 지린성 훈춘) 사찰 유적지에서 불교 유물이 출토됐다며 "중국의 통일 다민족 국가 형성 과정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24.10.29 09:30

3분 소요
유물 도면 작업 디지털로 혁신하다 [이코노 인터뷰]

CEO

2022년 5월 개장한 춘천 레고랜드가 들어선 의암호의 섬 중도에는 청동기 고인돌과 고구려 시대의 돌덧널무덤 등의 유적이 나왔지만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레고랜드는 이슈가 됐기에 일반인도 잘 알게 됐지만, 여전히 주위에는 경제 논리에 유물이 나와도 모르는 체하는 현장이 많다고 한다. 매년 동안 정부 기관에 신고된 유물이 10만개가 넘는다고 하니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유물이 얼마나 많을지 가늠이 안 된다. 전문가들은 “우리 땅 곳곳에 국보급 유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라며 “역사가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유물이기 때문에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매장문화재보호및조사에관한법률이 건축법보다 상위법이라는 이유를 대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 보존 vs 경제 개발’이라는 딜레마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다. 2017년 8월 고고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 신분으로 창업에 도전해 꾸준히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건우 캐럿펀트(carrotphant) 대표가 주인공이다. 포항공과대(포스텍)가 운영하는 스타트업 육성 공간 체인지업그라운드에서 만난 이 대표는 “건설 현장에서 유물이 나오면 실제로 측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자료 작업이 필수다”면서 “조그마한 유물을 실제로 그리는 데 4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실측 도면 작성에 수개월 이상 걸린다. 이 시간을 줄이면 건설 현장의 불만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4시간 도면 작업 20분으로 줄여그가 기자에게 실측 도면 작성 모습을 보여줬다. 정보통신(IT)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발굴된 유물을 자로 재고, 그 모양과 크기 등을 도면에 직접 그리는 방식이다. 모든 작업이 아날로그적으로 이뤄지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전공자만이 이 작업을 할 수 있다. 관련 전공자가 줄면서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유물 실측 도면 작업 관련 비용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고고학을 공부하던 학생 눈에도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아날로그 작업을 디지털 작업으로만 바꿔도 유물 실측 도면 작업에 혁신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표는 “고고학 교수님과 학생들이 아무래도 IT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빠르지 않기 때문에 작업 방식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17년 8월 대학생 신분으로 창업에 뛰어든 이유다. 스타트업 성장의 기본으로 꼽히는 ‘틈새시장’을 발견한 것이다. 창업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가 다니던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는 창업 관련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는 창업 관련 정보를 찾아서 서울과 경주, 포항 등 각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창업 관련 센터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 호의적으로 정보를 주고 사람을 소개했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캐럿펀트를 창업했다. 창업 후 개발자들과 솔루션 개발에 매달렸다. 아치쓰리디라이너(Arch3D Liner)라는 솔루션을 개발에 성공했다. 휴대용 스캐너로 스캔을 한 후 이 솔루션을 이용하면 유물 한 점의 도면을 만드는 데 20분이면 마무리할 수 있다. 이 대표는 “보통 건설 현장에서 유물을 발굴하고 도면 작업까지 하는 데 1년 여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 솔루션을 사용하면 수개월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솔루션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 국가기술표준원에서 인증까지 받아 성능도 인정받았다. 비즈니스 모델 확실…국내 시장 넘어 해외 진출하는 게 목표캐럿펀트는 구독형 비즈니스 모델을 내세우고 있다. 1개월에 190만원을 내거나 1년에 2200만원 정도의 구독료를 내고 이 솔루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는 “구독료가 비싸다고 생각하겠지만 도면을 그리는 업계나 문화재 관련 기관에서는 1년에 2200만원으로 1억원 이상의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물의 실측 도면은 글로벌 표준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글로벌 진출도 가능하다. 이 대표는 “얼마 전 우리 구성원들이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일본 시장에서도 우리 솔루션을 주목하고 있고, 일본 시장 진출에 도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캐럿펀트는 해외 관련 기관에서 다양한 수상을 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2019년 중국 베이징 대학교 IR 최우수기업으로 선정됐고, 2022년에는 두바이 문화예술청장상을 받기도 했다. 중국의 경우 심사위원에 진시황릉과 만리장성 발굴팀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2022년 두바이에서 ‘자이텍스’(GITEX)라는 글로벌 정보통신 박람회가 열렸는데 이곳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기업들의 발표 대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수상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상금은 크지 않았지만 언제든 두바이에 오갈 수 있는 골드 비자를 받았다”면서 “두바이에 사무실도 2년 동안 무상으로 내준다고 했는데, 비즈니스가 무르익지 않아서 그것은 거절했다”며 웃었다. 대신 두바이가 건설 예정인 ‘미래 박물관’과 협업을 계획하고 있다. 문화유산의 디지털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캐럿펀트는 아날로그 작업 방식을 디지털로 혁신했다. 틈새시장을 확실하게 공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대부분의 투자사도 공감한다. 다만 이 시장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 때문에 투자를 받지 못했다. 그는 창업 이후 정부 과제나 R&D 등을 통해서 20여 명이 일하는 조직으로 키워냈다. 이 대표는 “일용직으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다양한 경진대회에 나가서 받은 상금으로 임직원 월급을 마련하는 등 초기에는 고생했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다. 특히 솔루션 개발에 성공하면서 매출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 올해 매출 목표는 25억원이다”며 웃었다. 또한 “캐럿펀트는 문화유산 디지털 기록 시장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리더가 될 것이다”면서 “국내 시장 규모는 한계가 있어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고 설명했다.

2024.07.29 09:00

4분 소요
4대 종교의 위대한 족적…

여행

영광하면 '빼박' 굴비다. 그 맛에 취한 이가 한둘이 아니다. ‘굴비’ 원류는 추론이 난무해도, 맛은 두말이 필요 없다. 굴비는 왜 그리 불릴까. 돌아보니, 屈(굽을 굴)자가 여러 스토리를 엮어낸다. 조기란 놈이 품성이 강직한지 강직성 척수염인지 소금을 쳐도 굽어지지 않아 그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고려말 임금에게 선물하면서도 비굴해 선물 보내는 게 아니란 뜻으로 쓴 '정주굴비'가 보통명사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조기 두름을 말릴 때 매달아 놓으면 등이 굽게 되는 데, 그 모양이 산 '굽이'처럼 굽었다 하여 한자로 구비(仇非)라 썼는데, 이게 어의전성돼 굴비가 됐다는 말도 설도 있다. 근데 말이다. 굴비도 자기가 왜 굴비가 됐는지 모르는 마당에 머리 아프게 따지기보다, 굴비와 스킨십을 나눈 것으로 행복감에 빠져들면 어떨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듯, 조기로 배 채웠으면 영광 여행 제대로 떠나볼까!백제불교 최초도래지…인도승이 오셨네 마라난타는 인도승이다. 그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법성포다. 이를 기념해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는 23.7m 높이의 사면대불상이 서 있다. 그 뒤편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법성포다.중국에서 불교를 전래 받은 고구려·신라와 달리 백제는 이렇게 바다로 불교가 전래됐다. 이곳에는 간다라 불교 문화예술의 특징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간다라 유물관, 간다라 사원 양식의 대표적인 탑원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자체가 이채롭다.간다라 유물전시관의 유물들은 모두 파키스탄 대사관의 협력으로 전시됐다. 스와트, 페샤와르, 탁실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 불교문화에 대한 실명과 실제 2~6세기쯤 소조불상불두들과 전각 등이 있다.간다라 유물전시관을 나오면 108개의 계단이 보이고, 그 시작점에 부처님의 발자국 모양이 찍힌 ‘불족적’이 있다. 108번뇌를 하나하나 녹이며 108개의 계단을 올라 부처님과의 만남에 이른다는 말이 전해진다.족장부터 사면대불로 향하는 계단 가운데엔 부용루라는 이름이 붙은 법랑이 있다. 부용루 벽면에는 석장 이재순 장인이 23면에 걸쳐 부처님의 전생 인연담과 일대기를 부조 조각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다.불갑사…백제불교 중 갑이다 마라난타 존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전해진다. 침류왕 원년(364)에 인도 서북 지역의 간다라 마라난타 성인이 중국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법성포에 당도하며 불법이 시작됐다는 것이 그것. ‘부처 불(佛), 첫째 갑(甲)’이라는 말이 불갑사의 위세를 대변한다. 이렇듯 불갑사는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와 처음 세운 절이다. 모악산이라 불리던 산 역시 불갑사가 들어서며 ‘불갑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불갑사는 세 가지 간다라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대웅전 지붕 한가운데에 툭 튀어나와 있는 스투파, 소슬꽃무늬와 보리수문양, 보상화문의 문양이 조각된 화려한 색감의 대웅전 정문, 석가모니불을 북쪽에 놓고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해 대웅전의 정면과 우측면을 모두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불갑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 충정왕 3년(1350) 때다. 당시에는 31개의 암자에 1000여 명의 스님이 머물렀던 으뜸 사찰이었다고 한다. 각진 국사가 입적한 후 제자들이 사리함을 불갑사로 옮겨 왔으며, 왕명으로 비문을 썼다. 지금도 불갑사 경내에는 각진국사비가 모셔져 있다. 하지만, 정유재란과 6·25 한국 전쟁 등으로 사찰이 완전히 전소되면서 현재는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불갑사 일주문을 지나면 탑원과 108좌대가 있다. 마라난타의 출신지인 간다라 양식에 따라 조성된 탑원을 본뜬 것이다.불갑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3.5m 크기의 목조 사천왕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이 있다. 전북 무장 소요산 연기사에 있던 사천왕상은 연기사가 전소하면서 설두대사에 의해 1876년 불갑사로 옮겨졌다. 그 이후부터는 ‘사천왕의 보호 덕분’에 불갑사의 전각이 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원불교 영산성지…원불교 뿌리는 영광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영산성지는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을 양성한 원불교 발상지다.소태산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호기심 많던 소태산은 자신의 의문을 풀고자 11살부터 5년간 매일 삼밭재 마당바위에 올라 산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해도 산신은커녕 하물며 도사도 만날 수 없었다.소태산의 세상에 대한 의문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그러다 1916년 4월 28일 새벽, 26살의 소태산은 한순간 몸이 가벼워지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원불교가 탄생했다.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대각절’은 원불교의 가장 큰 명절이다.기독교ㆍ천주교인 순교지 영광에서는 6·25 한국전쟁 당시 194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북한군에게 기독교인들은 처단의 대상이었다. 염산교회와 야월교회에서는 학살 당시의 아픔을 엿볼 수 있다.염산교회에서는 교인 77명이, 야월교회에서는 전 교인 65명이 2~3개월에 걸쳐 목숨을 잃었다. 1937년 설립된 영광성당의 역사는 올해로 81년째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 시기에 총 여섯 명의 박해 받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 중 이화백과 양반 오씨의 참수터는 성당 앞 도동리 석장승(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1호)이 있는 자리로 추정한다.이에 영광성당은 이를 기억하기 위해 순교자기념관을 개관했다.백수해안도로…기러기 포토존 인기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백암리 석구미 마을까지 16.8㎞에 달하는 해안도로로, 서해안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다.특히 해안도로 아래 목재 데크 산책로로 조성된 3.5㎞의 해안 노을길은 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걷기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2006년 건설교통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2011년 국토해양부의 제1회 대한민국 자연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이곳의 괭이갈매기 서식지는 천연기념물 제389로 지정됐다. 노을전망대 갈매기상은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국내 유일의 노을전시관을 비롯하여 다양한 펜션과 음식점 등이 갖추어져 있다.

2023.05.3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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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30년’ 중국은 한반도에 어떤 의미인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30년이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1992년 8월 24일 한국의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중국의 첸치천(錢其琛) 당시 외교부장이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台) 국빈관 17호각에서 수교 문서에 서명하면서 공식 수교했다. 한국 측이 요구한 ‘평화적 남북통일’과 중국 측이 요구한 ‘하나의 중국’을 서로 인정했다. 한국은 대만과 단교했지만, 중국은 북한과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지속했다. 사실 한‧중 수교는 1988년 집권한 이래 활발한 북방외교를 펼치면서 공산권 수교에 주력했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 정부의 성과다. 북방정책은 공산권 몰락과 냉전 해체, 소련의 개혁‧개방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경제와 안보 효과를 동시에 노린 전략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헝가리‧폴란드를 시작으로 90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1992년 체코와 슬로바키아와 분리)와 소련(러시아로 승계)‧불가리아 등과 수교했다. 소련이 무너진 1991년 12월 26일 이후에는 분리 독립한 옛 소련의 공화국들과 활발하게 국교를 맺었다. 특기할 점은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91년 8월 8일 결의 제702호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별도의 국가 자격으로 유엔 가입 신청을 투표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일 것을 유엔 총회에 권고했다.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안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통과됐다. 1991년 소련 몰락과 동유럽 공산권 몰락, 그리고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 뒤이은 1992년의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 외교의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한‧중 수교의 글로벌적 배경이다. 수교한 뒤 30년간 한‧중은 서로 많은 실리를 얻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갈등도 동시에 나타났다. 가장 큰 실리는 경제에서 나타났다. 양국 교역은 국교를 수립한 1992년 63억8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015억4000만 달러로 약 47배로 증가했다. 한국에 중국은 수출 대상 1위 국가로, 중국에 한국은 수입 대상 1위로 자리 잡았다. 중국은 한국에서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 핵심 소재와 부품을 도입해 이를 가공해 완제품으로 만들 뒤 미국으로 수출해 거대한 흑자를 쌓아가는 글로벌 삼각 무역의 구도를 통해 고속 성장을 이뤘다. 이를 통해 한국도 대중 무역 흑자를 누렸지만, 올해 5~7월 1992년 8~10월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석 달 연속 적자를 나타냈다.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는 5월에 10억9000만 달러, 6월에 12억1000만 달러, 7월에 5억7000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중국 특수가 사라지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양국 수교 뒤인 1990년대 말부터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에 한류 열풍이 불었다. ‘한류’라는 용어도 사실상 당시 중화권의 한국 대중문화 바람에서 기인했다. 평가가 엇갈리는 게 중국의 한반도 평화‧통일 기여에 대한 기대다. 1992년 8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한 마지막 장애가 제거됐다”고 자평했다. 6‧25전쟁 때 정면으로 맞붙었던 적국 중국의 지지를 얻어 평화 통일을 추진한다는 전략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실제 중국이 얼마나 북한에 영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1956년 벌어진 ‘8월 종파 사건’이라는 권력 투쟁을 거치면서 김일성이 일본 강점기에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연안파와 소련에서 귀국한 소련파 등을 숙청했으며, 1953년 시작된 북한 내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도 1958년 마무리된 이래 중국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줄타기 외교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1956년 4월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원회의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죄상을 고발하고 격하 운동을 펼쳤다. 그러자 북한의 소련파와 연안파는 조선로동당 제3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자기비판을 요구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 밀려났다. 김일성은 개인 권력 공고화를 위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이를 ‘반당 반혁명적 종파 음모책동’으로 불렀다. 북한은 그 뒤 중국과 친한 인사를 외교 수장에 임명하지 않고 있다. 북핵 위기, 중국에 한반도 개입 빌미 제공해 하지만 북한이 핵 개발을 본격화하면서 한‧중 양국은 3자회담과 6자 회담 등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위해 함께 뛰었다. 성과 없이 북한의 6차에 걸친 핵실험과 수많은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로 이어졌지만 말이다.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한 중국의 개입을 살펴보면 중국이 북한에 영향을 미쳐 비핵화나 한반도 평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중 수교와 북한의 핵 문제는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기회의 문을 연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공식 통보하면서 ‘1차 북핵 위기’의 불을 댕겼다. 미국과 북한은 그해 6월 3일 1단계 고위급 회담을 시작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그해 6월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김 주석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김 주석이 1994년 7월 8일 숨지면서 무산됐다.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를 이뤘다. 북한의 흑연감속로 핵 개발 프로젝트를 무기용 핵물질 생산이 제한되는 경수로 원전 건설로 바꾸는 내용이다. 북한 원자력 개발시설의 봉인을 유도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국제사업체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2005년 3월 9일 설립했다. 2003년까지 발전용량 2000MW의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2000년 2월 3일엔 북한의 함경남도 동해안 중부에 위치한 신포에서 경수로 건설 공사를 착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고, 남북 각료회의가 발족했다. 2002년 9월 17일에는 김정일 북한 최고지도자 겸 조선노동당 총비서와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을 했다. 북일 정상회담에선 납치자 문제를 의논했으며, ‘조선반도의 핵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할 일은 국제적 합의를 준수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확인하는 북일 평양선언이 나왔다. 문제는 그해 10월 3~5일 미국의 제임스 케리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에 대한 우려를 밝히자 당시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차관이 10월 3일 해당 계획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2차 핵위기가 닥쳤다. 10월 16일 미 국무부는 HEU 계획을 확인했다는 성명을 밝혔고, KEDO 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중요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 하지만 북한이 2002년 10월 3일 핵탄두 개발을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북한은 2003년 1월 10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중국이 북핵 사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다. 미국‧북한‧중국은 2003년 4월 23~25일 베이징 댜오위타오 국빈관에서 3자 회담을 열고 타결을 모색했다. 당시 북한은 (핵물질 확보를 위해) 사용후핵연료봉 8000기를 재처리했다고 밝히며 핵 보유‧보유‧이전을 시사했고, 미국은 핵 개발의 항구적 폐기를 요구했다. 북한은 일괄 타결방식의 4단계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미국과는 단계별 방안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해 5월 23일 미‧일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총리는 대화를 위한 압박을 천명했다. 5월 27일에는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다. 6월 9일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대화와 압력’이라는 원칙에 의견 일치를 봤다. 7월 14일엔 다이빙궈(戴秉国) 외교 차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총비서와 회담했다. 다이빙궈는 이어 7월 18일 미국을 찾아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과 회담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7월 31일 뉴욕에서 미국과 북한이 접촉해 미국‧북한‧중국의 3자에 한국‧일본‧러시아까지 참석하는 6자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 중국의 암묵적 한류 제한 행태 수십년간 지속돼 남‧북한과 미국‧러시아‧중국‧일본 등 한반도와 주변국을 포함한 6개국이 모여 북핵 문제를 처음 논의하는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29일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오 국빈관에서 열렸다. 그 뒤 2004년 2월 25~28일 열린 2차 회담, 2004년 6월 23~26일 열린 3차, 2005년 7월 26일에서 8월 7일까지 열린 4차, 2005년 11월 9~11일 열린 5차, 2007년 3월 19~22일 열린 6차까지 6자회담은 베이징 댜오위타오에서 계속 열렸다. 중국은 회담 호스트가 됐다. 현재 중국의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외교부 장관)인 왕이(王毅) 당시 외교부부장과 한국의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1~3차에 계속 참가했다. 6자회담이 열리는 중에도 북한은 핵 개발을 멈추기는 커녕 오히려 가속해 2005년 2월 10일 핵 보유를 선언한 데 이어 2006년 10월엔 핵실험까지 했다.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인공지진 규모 3.9) 핵실험을 했다. 하지만 6자회담 결과 2007년 2월 13일 북한의 핵시설 폐쇄와 불능화, 핵사찰 수용, 중유 100만t 상당의 경제적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2·13 합의가 이루면서 성과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2차(4.5), 2013년 2월 12일 3차(4.9), 2016년 1월 6일 4차(4.8), 9월 9일 5차(5.04), 2017년 9월 3일 6차(5.7)까지 모두 6차례의 핵실험을 계속하면서 북핵 합의는 물 건너갔다. 중국이 대북 영향력을 확신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신 2000년의 마늘 파동에 따른 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 수입규제를 시작으로 2002년 고조선‧고구려‧발해를 부정하고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시도한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2005년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되자 중국이 수입 검역을 강화해 보복한 것과 2020년 중국 관영 매체가 김치는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주장한 것 등의 김치 전쟁도 벌였다. 압권은 2016년 사드 사태다.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가 북행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용으로 사거리 200㎞의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하자 중국은 자세한 설명 없이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한류를 제한하는 한한령을 암묵적으로 발동하고 단체관광객 송출을 막았다. 이는 문재인 정부 당시 3불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선 여기에 기존 배치된 경북 성주군 사드의 제한을 포함한 ‘3불 1한’까지 들고 나왔다. 이 때문에 반중 감정이 확산해 70%를 넘어서지만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유사시 중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미사일 비행로는 동북지방-시베리아-북극을 지나는 경로로 한반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게다가 사드는 사거리라 200㎞로 중국에는 미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중국은 이를 걸고 넘어진다. 여기에는 논리도 과학도 통하지 않는다. 중국은 그야말로 완강하다. 이는 한국에 덫이나 재갈을 단단히 물려 서방 진영의 일원이 되지 못하도록 잡아두려는 의도로밖에는 해석하기 힘들다. 중국이 그동안 키운 힘을 글로벌로 투사하는 경로에 한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가장 설득력 있는 이류로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8월 24일 양국 수교 30주년을 맞아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공개한 축하 서한에서 "양국이 이런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건 상호 존중과 신뢰를 견지하고 서로의 핵심 이익과 중대한 관심 사항을 배려하며 성실한 의사소통을 통해 이해와 신뢰를 증진해 왔기 때문"이라며 '핵심 이익'을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도 이날 화상 기념사에서 “양측은 평등을 지키고 서로의 핵심 이익과 중대한 사항을 배려함으로써 안전한 발전과 역내 평화를 추진하자”고 강조했다. 중국 권력 서열 1·2위가 이날 나란히 강조한 '핵심 이익'은 중국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익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 이익은 국가 주권과 안보, 영토 안정과 국가통일, 그리고 중국 정치제도·사회의 전반적인 안정과 경제·사회 지속 발전의 보장 등을 말한다. 하나라도 잃으면 책임론이 제기돼 권력이 위태로워지는 위험한 의제다. 게다가 시 주석을 비롯한 중국 5세대 지도자들은 그동안 국제 관계에서 핵심 이익의 존중과 보호를 유난히 강조해 왔다. 대만 문제는 국가 주권과 안보, 영토 안정과 국가통일에 해당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거론하는 것은 중국 정치제도·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에, 칩4를 비롯한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한 연대는 중국의 경제·사회 지속 발전의 보장과 연결된다. 30주년의 축하 메시지에서 한마디로 한국에 서방이 아닌 중국 영향권에 들어오라고 압박한 셈이다. 결국 한‧중 관계는 미‧중 관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지식재산권 다툼, 글로벌 공급망 등의 국제적인 구도 속에서 설정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어렵고 답답한 상황이다.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의 순기능적인 발전을 위해 지혜를 모을 때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2022.09.03 10:00

8분 소요
‘바람의나라’로 시작, 게임업계 맏형까지…공격적 M&A 통했다

게임

※지난 20년간 급속히 성장한 국내 게임 산업이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눈부신 외형적 성장과 달리 속을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점이 노출된다. 중국산 게임의 공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는 국내 게임 산업을 이끌고 있는 빅3의 경쟁력을 집중 분석했다. 첫번째는 게임업계 맏형 넥슨이다. 넥슨은 명실상부한 국내 1위 게임사다. 지난해 게임업계 최초로 매출 ‘3조원 시대’를 열었다. 2위인 넷마블과 비교해도 매출 부분에서 6000억원 가까이 차이가 난다. 넥슨은 그동안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해왔다. 특히 최근에는 모바일게임 시장에서도 높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넥슨이 항상 성공만 한 것은 아니다. 엔씨소프트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패배를 맛봤으며, 무리한 캐시 아이템 남발로 인해 ‘돈슨’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최근에는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등 대표 지적재산권(IP)의 확률형 아이템 논란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 상황이다. ━ 작은 오피스텔에서 시작한 넥슨온라인게임 전성시대 열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넥슨의 시작은 여타 스타트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정주 NXC(넥슨 지주회사) 대표는 송재경(현 엑스엘게임즈 대표)과 1994년 12월 넥슨을 창업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넥슨은 2년여 개발 기간을 거쳐 1996년 국내 최초의 그래픽 기반 온라인게임 ‘바람의나라’를 선보인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정벌담을 그린 원작 만화 를 기반으로 만든 이 게임은 지금의 온라인게임들을 있게 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당시 PC게임 일변도였던 게임 시장에 등장한 바람의나라는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겨준다. 이후 국내 게임 시장은 온라인게임 위주로 재편된다. 넥슨은 바람의나라 후속작으로 ‘어둠의 전설’ 뿐만 아니라 캐주얼 장르인 ‘퀴즈퀴즈’를 서비스했다. 퀴즈퀴즈는 유저들끼리 퀴즈를 풀어 대결하는 방식으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넥슨은 퀴즈퀴즈를 통해 전 세계 최초로 ‘부분유료화’ 모델을 도입했다. 부분유료화란 게임은 무료로 제공하고 게임 아이템 등을 유료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전까지는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는 유료화 방식이 주를 이뤘다. 넥슨의 부분유료화 모델은 국내 게임사들을 넘어 해외 게임사들로 퍼졌으며 이제는 게임업계 대표적인 과금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 2004년 넥슨은 게임업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지게 된다. 하지만 넥슨을 퇴사한 송재경은 엔씨에 입사해 ‘리니지’를 개발했고, 당시 엔씨는 리니지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상황이었다. 넥슨 입장에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에 넥슨은 ‘메이플스토리’의 개발사 위젯을 인수하기로 한다. 넥슨은 거금 400억원을 들여 위젯을 인수한다. 이후 메이플스토리는 넥슨의 현지화 및 서비스 노하우를 결합해 전 세계 110여 개국에서 약 1억80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글로벌 타이틀로 성장했다. ━ 몸집 키운 넥슨, 게임업계 강자로 부상 넥슨은 2008년 ‘던전앤파이터’를 개발한 네오플을 3852억원에 인수한다. 넥슨이 네오플을 인수할 당시 업계에서는 넥슨이 지나치게 비싼 값을 지불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현재 네오플 인수는 넥슨의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던전앤파이터가 중국에서 국민게임으로 떠오르며 넥슨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넥슨은 2010년에도 공격적인 M&A를 이어갔다. 넥슨은 ‘군주’를 개발한 엔도어즈와 ‘서든어택’을 개발한 게임하이를 잇따라 인수했다. 당시 서든어택은 국내 1인칭슈팅(FPS)게임의 절대강자였다. 106주 연속 PC방 점유율 1위를 달성한 인기 게임이었다. 넥슨은 서든어택 인수를 통해 캐주얼게임부터 역할수행게임(RPG)에 FPS까지 확보한 종합 게임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2010년대에 들어 넥슨은 명실상부한 업계 1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회사가 커진 만큼 넥슨을 비판하는 소리도 점차 커져 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슨’이라는 오명이다. 넥슨의 부분유료화 정책은 양날의 검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게임 아이템 판매를 통해 넥슨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돈만 밝히는 게임사라는 불명예 역시 안겨줬다. 이후 2014년 넥슨은 지스타에서 ‘돈슨의 역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돈슨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돈슨의 이미지를 탈피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넥슨은 엔씨와의 악연도 가지고 있다. 넥슨은 2012년 지분 인수를 통해 엔씨와 손을 잡았다. 당시 국내 게임업계 1위와 2위를 달리던 두 업체의 협업은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러 차례 합동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두 업체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이후 넥슨은 2015년 엔씨의 지분 보유 목적을 경영 참여로 변경하며 엔씨와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당시 여론은 넥슨에 불리했다. 공격적인 M&A로 성장해온 넥슨이 엔씨까지 집어삼키려 한다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넷마블이 엔씨의 백기사로 등장하며 상황은 엔씨의 경영권 방어로 끝을 맺게 된다. ━ 매각 이슈로 곤혹…확률형 아이템 논란 여전 넥슨은 지난 2019년 매각 이슈로 한바탕 곤혹을 치렀다. 매각설이 불거진 직후 김정주 대표는 “여러 방안을 놓고 숙고 중”이라며 넥슨 매각설을 부인하지 않았다. 게임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후 김 대표는 넥슨 매각을 보류했다. 업계에서는 최소 10조원으로 추정되는 높은 몸값이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을 내놨다. 넥슨은 매각을 철회한 이후 조직 개편에 나섰다. 신규 프로젝트를 비롯해 흥행에 실패한 게임들을 대거 정리했다. 넥슨의 개발 기조 역시 ‘다양성’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바뀌었다. 이후 자체 내부평가를 통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만 살렸다. 그렇게 출시된 모바일게임 ‘바람의나라:연’, ‘카트라이더:러쉬플러스’ 등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앞서 넥슨은 모바일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모바일게임 연타석 흥행 신화를 기록 중이다. 2019년 말부터 시작한 ‘선택과 집중’ 전략이 통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넥슨은 최근 다시 한번 악재로 시름하고 있다. 확률형 아이템 논란이 터진 것이다. 마비노기, 메이플스토리 등 넥슨 대표 게임에서 확률형 아이템과 관련해 논란이 발생했다. 유저들은 ‘트럭 시위’ 등을 통해 강하게 항의했다. 이에 넥슨은 서비스하고 있는 주요 온라인게임과 모바일게임의 확률형 아이템 확률을 단계적으로 공개해 나가기로 했다. 확률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도 연내 적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넥슨의 확률 공개에도 불구, 유저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위정현 게임학회장은 “진정어린 사과를 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넥슨은 방어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유저들은 넥슨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태영 기자 won.taeyoung@joongang.co.kr

2021.04.2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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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1) 왕건과 견훤] 라이벌이었던 견훤, 왕건의 킹메이커가 된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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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까지 내몬 견훤 덕분에 자신을 채찍질하고 강하게 단련시킨 왕건 창업군주로서 평탄하게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드물다. 앞선 왕조를 무너뜨리기까지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 강력한 적도 기다리고 있다. 기득권이든, 전 왕조의 충신이든, 그도 아니면 대권 경쟁자이든 간에 이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어떤 꿈도 이룰 수가 없다. 유방에게 항우, 조조에게 원소, 이성계에게 최영이 있었듯이 말이다.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의 라이벌 하면 흔히 궁예(弓裔, ?~918)를 떠올린다. 궁예는 왕건을 총애하여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시켜 준 은인이자 동시에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다. 왕건이 궁예의 의심과 견제를 뚫고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우리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왕건의 호적수는 견훤(甄萱, 867~936)이다. 왕건이 아직 궁예 휘하의 장수일 때부터 후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그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견훤과 관련 있었다.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라고 한다.(견훤의 모친이 아이를 잠시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물렸다는 기록도 있다) 견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 기술이니, 최소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 절치부심 왕건, 고창 전투에서 전세 뒤집어 당시 신라는 왕의 무능과 간신들의 전횡, 도둑의 창궐과 연이은 기근 등으로 나라가 뿌리 채 흔들렸다. 이를 틈탄 견훤은 진성왕 6년 무진주(武珍州, 광주)에서 무리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점점 영역을 넓혀 오늘의 전라 지역을 대부분 점거하고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했다. “백제의 600년 기업을 당과 신라가 무너뜨렸으니, 이제 내가 완산(完山, 전주)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을 것이다.” 견훤의 즉위 일성이다.그런데 이때 후백제의 북쪽에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토 확장을 꾀하는 두 신흥국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예의 군대를 거느리며 호남을 공략한 인물이 바로 왕건이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핵심 요충지 나주를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를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건이 수세에 몰린다. 궁예를 지지했던 일부 호족과 태수들이 후백제에 항복하면서 내부가 요동쳤고, 견훤과의 무력충돌에서도 연이은 패배를 당했다. 특히, 927년 경상북도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는 1만명이 넘는(삼국사기에는 5000명) 고려군이 전사하고 왕건의 최측근이자 개국공신 신숭겸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왕건은 장수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전투 직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그대는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이더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나의 강하고 그대의 약함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질지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리라.”한마디로 ‘너는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려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왕건은 발끈했겠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견훤에 의해 강주와 부곡성, 나주가 함락되고, 수비군이 전멸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견훤에게 투항했다.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이 아끼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기도 한다.절치부심하던 왕건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고려의 역량을 총 집중한 고창 전투에서였다. 왕건은 명장 유금필의 활약과 고창 지역 신라 호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견훤을 격퇴한다. 후백제군 8000여 명이 전사했고, 이 전투로 인해 견훤은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왕건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러나 이후에도 후백제의 수군이 경기도와 황해도를 공격하여 고려의 선박 1000여척을 불사르는 등, 견훤은 계속 왕건을 긴장시켰다. 승패가 기울게 된 것은 934년 운주전투에서였다.그런데 왕건과 견훤의 이 라이벌전은 다소 허탈하게 막을 내린다.(비장한 마지막 일전 같은 것은 없었다) 후백제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평소 넷째 아들 금강을 총애했던 견훤은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둘째 아들 양검과 셋째 아들 용검이 맏형 신검을 충동질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연금한다.권력을 노린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한 패륜임에는 분명하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다. 견훤과 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창업군주가 어떻게 그리 쉽게 무력화되었을까? 이찬 능환, 파진찬 신덕 등 후백제의 주요 대신들도 신검의 반란에 동참하였는데, 이는 견훤의 권위가 많이 손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금강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던 시도도 여론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아무튼 견훤은 분노했다. 화가 솟구치다 못해 이 분노는 급기야 자신이 세운 나라를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식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견훤은 후백제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한다. 견훤은 말했다. “노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을 저지른 자식을 주살하고자 함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해주시옵소서. 그리 된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얼마 후, 왕건과 견훤이 함께 후백제로 진군하니 견훤을 따르던 사위 왕규 등이 내응하였고, 신검 일파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비록 종장(終章)까지 치열하게 마무리되진 못했지만, 견훤은 왕건의 훌륭한 호적수였다. 무릇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어야 더욱 긴장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법이다. 견훤이 왕건을 벼랑 끝까지 내몬 덕분에 왕건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강하게 단련할 수 있었다. 는 궁예와 더불어 견훤을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자”라고 규정한다. 본인이야 의도치 않았겠지만, 왕건에게 시련을 주고 장애물이 되어 줌으로써 왕건을 제왕의 길로 나아가게 한 사람이 바로 견훤이다. 그러니 지금 강한 적과 마주하고 있다면 불행하다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니다. 그 적이 나의 킹메이커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2020.12.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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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10) 김부식과 정지상] 모차르트(鄭)를 질투한 살리에리(金)였나

전문가 칼럼

자신을 성장시켜 줄 호적수를 스스로 제거해버린 김부식 1135년(고려 인종 13년) 정월, 천재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참수됐다.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묘청과 내통했다며,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김부식(金富軾)이 그의 목을 벤 것이다. 연루된 직접적 증거가 없는 점, 먼저 죽이고 왕에게 사후 보고한 점, 심문 등 법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서 김부식의 사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김부식은 왜 정지상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에 따르면 정지상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시를 잘 짓기로 유명했다. 야사에 보면 5살(2살이라는 기록도 있다) 때, 대동강의 오리를 보고 “누가 흰 붓을 들어 강물 위에 을(乙)자를 써놓았을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이자 중국 문인들에게까지 찬사를 받은 시, ‘송인(送人)’도 과거에 합격하기 전 청년시절에 지은 것이다.비 개인 언덕에는 풀빛이 짙어 가는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르네(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의 물은 언제 다 마르려는가?(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구나(別淚年年添綠波) ━ 정지상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증거 없어 그가 문학적 재주만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경연에서 의 ‘무일편(無逸篇)’을 강론하고, 을 토론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 경전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127년(인종 5년)에는 전횡을 휘두르는 권신 척준경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는 등 서릿발 같은 기개를 과시하기도 했다.그런데 서경 출신이었던 정지상은 이즈음 조정에 등장한 묘청과 의기투합한다. 단재 신채호가 우리 역사상 가장 통탄할 만한(실패한 것이 아쉽고 분하다는 뜻) 사건으로 꼽았던 ‘서경천도 운동’의 주역 묘청은 당시 고려가 겪고 있는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개경의 기운이 쇠한 탓에 이처럼 위기가 계속되는 것이니 옛 고구려의 도읍이자 왕기(王氣)가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 나라를 일신하자는 것이다.묘청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태조 왕건이 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롭고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만한 곳이다. 왕은 3년마다 서경으로 가 100일을 머물러 태평을 이루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고려에게 서경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국가 안보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하지만 수도 개경의 귀족들은 서경을 천시하였고, 여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서경 출신들로서는 묘청의 비전이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군주인 인종을 위시하여 개경 기득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도 묘청을 지지했다. 정지상도 이러한 묘청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조정 내에서 서경천도 여론을 주도한다.한데 묘청이 조바심을 내어 섣부르게 행동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서경에 궁궐을 세워 천도하고 고려가 황제국을 칭하면 자연히 천하를 아우르게 되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주변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상서로운 징조를 조작하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묘청에 대한 왕과 사람들의 신뢰는 크게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천도가 지지부진해지자 묘청은 “개경 귀족들이 자신들의 고토(古土)만을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할 뿐 아니라 사업을 가로막고 방해한다”고 비난하며 왕명을 사칭해 반란을 일으켰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지상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지상도 서경천도를 주장하긴 했지만 강경파인 묘청에 비해 그는 온건파에 속한다. 고구려 계승 인식을 가졌고, 금나라에 자주적으로 대응하며 북방을 경략하자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서경을 전진기지로 삼자는 뜻에서 천도를 지지한 것이다. 물론 서경 출신이라는 지역적 성분도 작용했을 테고 말이다.김부식은 이러한 서경천도운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개경 귀족을 대표한다. 개경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골수 유학자로서 승려인 묘청이 풍수 운운하는 것도 혹세무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을 그렇게 처단한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를 보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함께 문장으로 명성이 가지런하였는데, 불만을 쌓아두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묘청과 내응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다’라고 하였다.” 김부식을 긍정적으로, 묘청과 정지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 기록이니만큼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판단된다.정지상의 뛰어난 글재주가 세상으로 알려질 당시, 고려의 문단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김부식이었다. 를 저술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문장 실력은 분명 탁월했다. 하지만 정지상이 한수 위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시기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랄까?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하루는 정지상이 “사찰의 염불 소리 그치니 새벽 하늘빛이 맑은 유리 같구나”라는 시를 지었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들은 김부식은 이것을 자신에게 주면 나머지 부분을 채워보겠다고 제안했다. 시를 망쳐놓을 거라는 생각에 정지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김부식이 모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또한 윤휴의 를 보면, 김부식이 “촛불이 다하자 날이 밝아 오려하고(燭盡天將曉),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구나(詩成句已香), 뜰안 가득히 사람으로 시끌벅쩍한데(滿庭人擾擾), 장원을 할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誰是壯元郞)”라는 오언절구의 시를 짓자, 이를 본 정지상이 즉석에서 ‘삼경(三更)·팔각(八角)·낙월(落月)·부지(不知)’를 각 행에 추가하여 칠언절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시가 훨씬 더 좋았기에, 자신의 재주로는 정지상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부식이 그를 모함하게 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믿거나 말거나지만 이러한 두 사람의 대립은 정지상이 죽은 후로까지 이어진다. 고려 후기의 명문장가 이규보의 을 보자. 어느 날 김부식이 “버들은 천개의 실로 푸르고(柳色千絲綠), 복숭아꽃은 만 점으로 붉다(桃花萬點紅)”라는 시를 지었다. 그러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천 실, 만 점을 누가 일일이 세겠는가?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柳色絲絲綠), 도화는 점점이 붉다(桃花點點紅)라고 고쳐야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 왜곡된 질투심이 호적수를 죽음으로 내몰아 김부식에게 정지상은 라이벌이자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그런데 끝내 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왜곡된 질투심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지상을 죽인 후, 김부식의 마음은 시원했을까? 질투심을 분투노력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는 없었을까? 정지상을 넘어서고자 계속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김부식은 자신을 성장시켜 줄 호적수를 스스로 제거해버린 것이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2020.11.28 12:15

4분 소요
[김준태의 호적수(8) 김춘추와 알천] 왕을 꿈꾸던 자 김춘추, 경쟁자 알천을 이긴 방법은?

전문가 칼럼

상대의 약점이자 자신의 강점인 외교 분야에 역량 집중 진골 신분 최초로 신라의 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반석을 놓은 김춘추(金春秋, 604~661). 연개소문, 의자왕 등 각국의 거물과 겨뤘던 그에게도 내부에 알천(閼川)이라는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었다.알천의 생몰연대나 가계는 알려진 바 없다. 왕위를 놓고 김춘추와 경쟁했다는 점에서 김씨 성을 가진 진골이었으리라 예측한다. 그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636년(선덕여왕 5)인데, 5월 백제군이 옥문곡으로 잠입해오자 이를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어 637년 알천은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638년에는 칠중성을 공격해온 고구려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연구자들은 선덕여왕 재위 초~중반기에 알천이 군권(軍權)의 정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무력도 매우 뛰어났는 ,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알천이 경주 남산 오지암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좌중으로 뛰어들었다. 참석자 모두 크게 놀랐을 것은 당연. 삼국유사에는 “오직 알천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서 죽였다”라고 쓰였다. 용력과 통솔력을 겸비한 명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 김춘추, 김유신과 손잡고 무력 확보 알천의 경력은 군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647년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그는 상대등이 되었다. 수석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하며, 최고 회의기구인 화백(和白)의 의장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전임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는 등 신라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이를 진정시킬 적임자로 알천이 선택된 것이다. 알천은 진덕여왕 재위 기간 내내 상대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국정의 중심을 잡았다.이러한 알천은 큰 꿈을 꾸던 김춘추에게는 장벽과 같았을 것이다. 본래 성골이었던 김춘추의 집안은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진골로 ‘족강’되었다.(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보통은 왕의 직계를 성골로 본다) 하지만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자라는 그의 출신성분은 진골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야망과 뛰어난 재주가 뒷받침되면서 김춘추는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게 된다. 조정엔 성골이자 미혼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만 남아 있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나 경륜과 인망 면에서 모두 자신보다 앞섰던 알천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답답했으리라. 더구나 알천은 문(文)에만 치중된 자신과는 달리 문무를 겸비했다. 군부와 귀족사회에 끼치는 영향력도 막강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버거운 상대, 김춘추에게 알천은 그런 존재였다. ━ 알천의 양보 얻어내 왕위에 오를 수 있어 김춘추가 김유신과 손을 잡은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선덕여왕 초·중반기 신라군의 총사령관이 알천이었다면, 선덕여왕 후반기에서 진덕여왕 시기의 신라군은 김유신이 총괄했다. 알천과 김유신은 신라 군부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주축인 것이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연합해 알천에 못지않은 무력을 확보하게 된다. 아울러 김춘추는 외교 분야에 주력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갔다.김춘추가 내치(內治)에서 알천과 승부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정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알천이었고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조정의 주요 포스트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춘추는 상대편의 본진에서 힘을 소모하기보다 상대의 약점이자 자신의 강점인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 경쟁력을 키운 것이다.더욱이 외교는 고구려-백제-왜에게 포위되어 있던 신라가 활로를 찾기 위한 필수적인 분야였다.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각각 고구려와 왜로 건너가 담판을 벌였고, 당나라와 외교협상에 성공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신라 조정에서 그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었다.이 밖에도 김춘추는 도전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주도면밀한 행보를 보여줬다. 궁극적으로 신라의 국익을 위한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왕위계승자로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자신이 알천보다 나은 선택지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보위는 김춘추에게 이어졌다. 여러 신하가 알천에게 섭정(攝政)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권력 공백기 동안 섭정을 맡은 후 정식으로 왕이 되어달라는 뜻이다) 알천이 “저는 늙었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로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입니다”라며 사양했고, 따라서 김춘추가 왕으로 즉위했다.이 기록만 보면 알천이 김춘추의 능력을 인정하고 양보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알천의 나이가 매우 많아서 왕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알천의 생몰연대를 모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서 엿보이는 알천 vs 김춘추·김유신의 긴장 관계로 볼 때, 정말 이렇게 평화적으로 결정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김춘추가 즉위한 후, 알천이 역사에서 전면 퇴장한 것을 두고 알천이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김춘추에게 제거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어찌 됐든 분명한 점은 김춘추와 알천의 경쟁이 김춘추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다.알천에게 대권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최소한 김춘추에게 알천은 강력한 라이벌이자 자신을 긴장시켜주는 존재였다. 만약 알천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자.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이 고만고만한 존재였다면? 김춘추가 그처럼 필사적으로 노력했을까? 더욱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을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왕이 될 수 있었다면 김유신의 손을 잡고, 김유신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을까? 그냥 놔둬도 자연스레 자신의 신하가 될 텐데? 또한 그랬다면 김유신이 김춘추를 위해 그처럼 헌신했을까? 알천이 없었다면 김춘추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것과 상당히 달랐을지도 모른다.무릇 적수가 뛰어날수록, 훌륭할수록 그와 벌여야 할 승부는 더욱 힘겨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이 나를 단련하고 성숙시켜 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모두 끄집어내 주는 존재가 된다. 그런 적을 이기려면 나는 더 뛰어나고 훌륭해져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거대한 적수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불평할 일이 아니다. 더욱더 철저해지고 더 노력하면 된다.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용감하게 응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2020.11.01 07:53

4분 소요
[김준태의 호적수(4) 성왕과 진흥왕] ‘정보전’에서 갈린 두 나라의 명군(名君)

전문가 칼럼

국익 위해 동맹 버린 신라 진흥왕… 백제 성왕, 매복에 지다 554년 음력 7월, 백제의 성왕(聖王, 재위 523~554)이 신라군에게 참수되었다. 신라가 빼앗아 간 한강 하류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백제는 왕자 부여창을 사령관으로 삼아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성왕이 아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백제군 진영으로 가던 길에 신라군의 기습을 받았고, 불행히도 붙잡혀 죽고 만 것이다. 이때 백제도 신라에 대패했는데, 에 따르면 백제의 최고위 관리인 좌평 네 사람을 비롯하여 백제군 2만96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그런데 이 성왕은 호칭에 ‘성스러울 성(聖)’자가 들어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제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 아버지 무령왕의 개혁정치를 이어받아 지방·군사·행정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다. 대중, 대일 외교를 통해 백제의 위상을 높였으며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사비(泗泌, 충남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하며 백제를 중흥한 군주가 바로 성왕이다.성왕은 고조할아버지 개로왕이 고구려에 처형당하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 당했던 원한을 갚고자 했다. 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략한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이른바 ‘나제동맹’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가 공격해올 때마다 양국은 구원병을 파병해 서로를 도왔다. 성왕은 나제동맹을 활용,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땅을 점령한다. 한강 상류의 10군은 신라가, 하류의 6군은 백제가 각각 나누어 가졌는데 바로 70여 년 전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은 것이었다. ━ 성왕의 기세를 꺾어야했던 진흥왕 하지만 성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개로왕의 원한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고구려는 돌궐의 침략으로 정신이 없었다. 왕위승계를 놓고 내전까지 벌어졌던 터라 대내외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성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며 신라에 북진을 제의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백제는 황해도→평안도로, 신라는 강원도→함경도로 양면에서 진군하자는 것이다. 성왕은 신라가 함께 출병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후방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백제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 말이다.한데 신라는 성왕의 제안을 거부했다. 심지어 백제가 북진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기도 했다. 에 보면,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라 하고, 백제의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가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국의 신뢰는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신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 6군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흔히 이 사건은 신라가 무력을 써서 탈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백제가 모종의 이유로 그 땅을 비워뒀고, 신라가 냉큼 점령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어느 쪽이든 신라가 백제 땅을 빼앗아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도대체 신라는 왜 백제를 배신한 것일까? 백제의 땅이 탐나서? 신라의 선택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다. 국익이 최우선인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신의란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 1, 2, 3등이 있으면 보통 동맹은 2등과 3등이 맺는다. 에서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나라와 촉나라가 연합했듯이 말이다. 1등과 동맹하면 손쉽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곧바로 1등의 매서운 칼날이 자신을 향해온다. 물론, 2등과 3등도 1등이 사라진 후에는 적으로 돌아선다. 다만 1등과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므로 손을 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역시 백제와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그러나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진흥왕은 신라의 국토를 비약적으로 넓힌 임금이다. 각 방면에서 나라를 크게 성장시켰다. 진흥왕은 신라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는 백제를 경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신라로서는 백제로부터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와야 국력을 도약시킬 토대를 마련할 수가 있다. 또한, 성왕의 기세를 꺾을 필요도 있었다. 여러모로 능력이 뛰어난 성왕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신라에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 국익 위해선 권모술수도 당연, 의리는 없다 더욱이 진흥왕이 보기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협공하는 것은 신라에 이득이 되질 않았다. 성왕의 제안을 따르게 되면 백제는 교통의 요충지나 곡창지대로 진군하지만, 신라의 진출로는 강원도와 함경도, 험준한 산악지대다. 군대가 나아가기 힘들 뿐 아니라 영토로서도 매력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의 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비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특별한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공존할 수 있는 처지였다. 1등이 무섭긴 하지만 2등이 주는 위협이 더 크다고 판단한 상황, 이에 진흥왕은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와 손을 잡은 것이다.성왕은 분노했다. ‘동맹국’의 결정을 낙관하고 있던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한 것이다. 이제는 고구려에 대한 북진을 꾀하기는커녕, 고구려와 연합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올 경우를 걱정해야 했다. 하여 성왕은 초기에 신라를 제압하고자 대가야, 아라가야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일본에도 전쟁물자와 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신라가 방심하도록 저자세를 보인다. 신라가 한강 유역의 백제 영토를 점령한 것에 대해 일체의 항의를 하지 않았고, 553년에는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신라와 계속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그런데 진흥왕은 이와 같은 성왕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성왕이 비밀리에 신라를 공격할 백제-가야-일본 연합군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만전술을 벌여 백제와 가야를 혼란에 빠트렸다. 성왕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554년, 관산성 일대에 총공세를 펼쳤는데, 대승을 거두는 등 초기 전황은 백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성왕의 움직임이 신라군에 노출되면서 매복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왕이 적군에게 참수되었으니, 충격을 받은 백제군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만다. (*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수되었다는 것은 에 근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죽임을 당했다고만 되어 있다.)성왕과 진흥왕의 대결은 각자의 국익을 도모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사람이 특별히 오판했다거나 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성왕과 진흥왕의 능력만 본다면 승패를 예측하기 힘든 싸움이었을 것이다. 한데 결과는 성왕의 실패와 진흥왕의 성공. 이를 가른 것은 정보전이었다. 백제가 진흥왕이 배신할 것을 알아차렸다면, 신라가 성왕의 연합군 조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성왕의 관산성행이 신라군에게 유출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비슷한 수준의 적수와 대결할 때는, 전장 이외의 요소들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2020.08.2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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