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45

코스피 개인 매수에 상승…삼성전자 2%대 강세 [개장시황]

증권 일반

31일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25.35포인트(1.12%) 오른 2293.75에 거래를 시작했다. 이날 오전 9시 20분 현재 개인은 961억원 순매수 중이고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535억원, 472억원 순매도를 기록하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 10개 종목 중 5개 종목은 상승 중이다. 대장주 삼성전자는 전일 대비 2.62%(1500원) 오른 5만8800원에 거래되고 있고 삼성바이오로직스(0.57%), SK하이닉스(1.44%), 삼성전자우(1.94%), 셀트리온(2.13%) 등도 강세다. 반면 LG에너지솔루션(-2.26%), 삼성SDI(-0.28%), LG화학(-0.49%) 등은 하락세다. 러시아의 곡물 협정 참여 중단 선언에 곡물·사료주는 동반 강세다. 코스피의 샘표(11.44%), 고려산업(10.39%), 대한제당(5.75%)과 코스닥의 한일사료(18.08%), 팜스토리(14.44%) 등도 급등하고 있다. 코스닥 지수는 7.06포인트(1.03%) 오른 694.69에 출발했다. 개인은 485억원, 기관은 1억원 각각 순매수 중이고 외국인은 462억원 순매도하고 있다. 코스닥 시총 상위 10개 종목 중 8개 종목은 상승 중이다. 코스닥 대장주 에코프로비엠은 전일 대비 0.26%(300원) 오른 11만4700원에 거래 중이고 셀트리온헬스케어(2.81%), HLB(0.63%), 카카오게임즈(1.68%), 펄어비스(0.25%) 등도 강세다. 허지은 기자 hurji@edaily.co.kr

2022.10.31 09:26

1분 소요
외인·기관 ‘사자’에 코스피 상승 마감…LG화학 8%↑ [마감시황]

재테크

20일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46.95포인트(1.81%) 오른 2639.29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시장에선 외국인과 기관이 각각 1940억원, 8374억원 순매수하며 지수를 끌어올렸다. 반면 개인은 1조391억원 순매도했다. 시가총액 상위 종목은 대부분 상승 마감했다. 우선 코스피 대장주 삼성전자가 0.74%, SK하이닉스가 1.35% 각각 올랐다. ICT 대장주 네이버(1.29%)와 카카오(3.23%)도 상승했다. 카카오뱅크(3.36%)와 카카오페이(7.38%) 등 카카오 그룹주도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2차전지 관련주 LG에너지솔루션은 4.45%, 모회사인 LG화학은 8.57% 각각 뛰었다. 게임주인 크래프톤도 8.02% 올랐다. 이외 SK이노베이션(3.43%), 현대모비스(3.85%), HMM(3.08%), 하나금융지주(3.64%), 한화솔루션(6.57%) 등이 3% 이상 상승했다. 반면 S-Oil(-0.93%), KT&G(-0.12%), KT(-1.10%) 등은 하락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시장에서 가장 많이 오른 종목은 고려산업이었다. 반면 가장 많이 떨어진 종목엔 에이프로젠제약, QV S&P500 VIX S/T 선물 ETN C 등이 이름을 올렸다. 코스닥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16.08포인트(1.86%) 오른 879.8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닥시장에선 외국인과 기관이 1073억원, 1074억원 순매수했다. 반면 개인은 2055억원 순매도했다. 시가총액 상위 기업은 상당수가 빨간불을 켰다. 코스닥 대장주 에코프로비엠이 3.92% 올랐고, 같은 2차전지 관련주인 엘앤에프(1.60%), 천보(0.04%), 에코프로(4.92%)도 상승 마감했다. 카카오게임즈(5.18%), 펄어비스(4.69%), 위메이드(6.17%), 넥슨게임즈(4.55%), 컴투스(4.99%) 등 게임주는 4% 이상 강세를 보였다. 셀트리온 3형제로 불리는 셀트리온헬스케어(5.71%)와 셀트리온제약(3.52%)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 진단키트주 씨젠 역시 6.01% 올랐다. 반면 LX세미콘(-1.14%), 동화기업(-0.58%), 심텍(-0.59%), 티씨케이(-1.31%), 에스에프에이(-0.12%) 등은 하락 마감했다. 이날 코스닥시장에서 가장 많이 오른 종목은 자이언트스텝이었다. 반면 가장 많이 떨어진 에스에이치엔엘, 세영디앤씨 등이 이름을 올렸다. 강민혜 기자 kang.minhye1@joongang.co.kr

2022.05.20 16:14

2분 소요
코스피·코스닥 하락, LG엔솔·삼바 1~2%대↓ [마감시황]

증권 일반

4일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2.89포인트(0.11%) 내린 2677.57에 마감했다. 개인이 979억원, 외국인이 325억원 순매수했으나 기관이 1500억원 순매도로 맞서며 지수 하락을 이끌었다.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종목의 주가 향방은 엇갈렸다. 대장주 삼성전자는 전일보다 0.59%(400원) 오른 6만7900원에 거래를 마치며 이틀째 상승세를 이어갔다. 우선주 삼성전자우도 1.00%(600원) 오른 6만600원에 마감하며 지난 29일 이후 4거래일 연속 상승세로 마감했다. 5일(현지시간)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앞두고 은행주가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KB금융은 2.22%(1300원) 올라 5만9900원에 마감했고, 신한지주(2.04%), 하나금융지주(2.27%), 우리금융지주(0.99%) 등 4대 금융지주가 모두 상승 마감했다. 전기료 인상 가능성이 재점화하면서 한국전력(3.61%)도 강세를 보였다. 반면 LG에너지솔루션(-1.47%), SK하이닉스(-0.45%), 삼성바이오로직스(-2.04%), 삼성SDI(-1.92%), 셀트리온(-1.74%), SK(-0.19%) 등은 하락 마감했다. LG생활건강(-3.54%), 아모레퍼시픽(-2.32%) 등도 실외 마스크 해제 재료가 소멸되면서 이날도 하락세를 이어갔다. 코스피 상승률 1위엔 코오롱플라스틱이 이름을 올렸다. 퍼스텍(16.83%), 부산주공(15.60%), 세우글로벌(15.44%), 한전기술(9.50%) 등은 상승했고 대성에너지(-14.25%), 고려산업(-14.21%), 샘표(-10.20%), 키다리스튜디오(-10.09%), SH에너지화학(-9.60%) 등은 급락 마감했다. 코스닥 지수는 전일보다 7.51포인트(0.83%) 내린 900.06으로 거래를 마쳤다. 코스닥 시장에선 개인이 1466억원 순매수에 나섰으나 외국인과 기관이 각각 1248억원, 177억원 순매도에 나서며 900선 턱걸이로 마감했다.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종목은 대부분 파란불을 켰다. 셀트리온헬스케어는 전일보다 1.93%(1200원) 내린 6만900원에 거래를 마쳤고 셀트리온제약(-2.11%)도 하락 마감했다. 카카오게임즈(-1.02%), 펄어비스(-0.30%), 넥슨게임즈(-3.74%), 컴투스(-2.67%) 등 게임주도 대부분 약세로 마쳤다. 반면 에코프로비엠(1.78%), 엘앤에프(2.23%) 등 코스닥 2차전지 대장주들은 각각 5거래일, 4거래일 연속 상승 마감했다. 에코프로비엠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411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130.3% 증가했다고 밝혔다. 원재료 수급과 전방 수요 증가로 2분기에도 호실적이 전망된다. 코스닥에선 에코플라스틱, 코드네이처, 투비소프트, 에프알텍 등 4개 종목이 상한가를 달성했다. 대주산업(-13.14%), 한탑·에스아이리소스(-12.00%), 광무(-10.67%), 대동기어(-10.36%) 등은 하락 마감했다. 허지은 기자 hur.jieun@joongang.co.kr

2022.05.04 16:19

2분 소요
코스닥 900선 붕괴, 삼성전자·LG엔솔 모두 하락 [마감시황]

증권 일반

25일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47.58포인트(1.76%) 내린 2657.13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코스피시장에선 외국인이 7335억원, 기관이 3481억원 어치를 팔아치우며 지수 하락을 주도했다. 개인은 나홀로 1조648억원 순매수에 나섰지만, 하락을 막진 못했다. 시가총액 상위 종목 대부분은 하락세로 마감했다. 깜짝 실적을 발표한 현대차(1.11%), 코로나19 백신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한 SK바이오사이언스(6.67%) 등을 제외하면 삼성전자(-1.04%), LG에너지솔루션(-0.80%), SK하이닉스(-2.26%), 삼성바이오로직스(-1.00%) 등 대부분의 종목이 파란불을 켰다. 특히 네이버(-3.83%), 카카오페이(-4.24%), 크래프톤(-3.00%), 엔씨소프트(-2.37%), 넷마블(-3.70%) 등 성장주들은 이날 일제히 장중 신저가를 기록했다.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기준금리 인상 보폭을 확대할 거란 우려가 커지면서 성장주 투자심리가 위축된 결과로 풀이된다. 반면 인도네시아의 팜유 수출 중단 소식에 식품주는 강세를 보였다. 이날 코스피 상한가 종목엔 샘표, 대상홀딩스우 등 식품주와 고려산업·신송홀딩스 등 사료·곡물 관련 테마주가 이름을 올렸다. 코스피 하락률 상위 종목엔 ‘대신 2X 철광석 선물 ETN(H)’ ‘TRUE 레버리지 천연가스 선물 ETN(H)’ ‘삼성 레버리지 천연가스 선물 ETN B’ ‘신한 레버리지 천연가스 선물 ETN’ 등 천연가스 관련 ETN(상장지수증권)이 다수를 차지했다. 코스닥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22.94포인트(2.49%) 하락한 899.84에 마쳤다. 종가 기준 코스닥지수가 900선 밑으로 내려온 건 지난 3월 16일(891.80) 이후 28거래일만이다.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종목 대부분은 하락 마감했다. 코스닥 대장주 에코프로비엠이 전 거래일보다 3.91%(1만8500원) 내린 45만5200원에 거래를 마쳤고, 목표주가 35만원이 제시된 엘앤에프는 8.42%(2만700원) 급락한 22만5000원에 마감했다. 셀트리온헬스케어(-3.9%), 펄어비스(-2.35%), 카카오게임즈(-2.41%), 셀트리온제약(-4.92%), HLB(-0.51%), 천보(-0.69%), 리노공업(-1.71%), CJ ENM(-2.13%) 등 코스닥 시총 상위 10개 종목 모두 내림세로 마쳤다. 코스닥에서도 팜스토리, 제이씨케미칼, 하인크코리아, 케이씨피드, 한탑 등 사료·곡물 관련주가 상한가를 기록했다. 이중 웨어러블 액세서리 제품 제조사인 하인크코리아는 3거래일 연속·4일 누적 상한가를 기록했다. 상장폐지를 하루 앞둔 현진소재는 전 거래일 대비 50%(7원) 내린 7원에 거래를 마쳤다. 현진소재는 지난 15일부터 이날까지 정리매매를 마치고 26일 상장폐지된다. 허지은 기자 hur.jieun@joongang.co.kr

2022.04.25 16:13

2분 소요
코스피 하락 출발, 곡물가 상승에 식품주 강세 [개장시황]

증권 일반

25일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28.04포인트(1.04%) 내린 2676.67에 출발했다. 이날 오전 9시 24분 현재 코스피시장에서 개인투자자는 1461억원을 순매수 중이다. 반면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625억원, 844억원 순매도에 나서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종목 대부분은 하락세다. 반도체 대장주 삼성전자는 0.75%(500원) 내린 6만6500원에 거래되고 있으며 LG에너지솔루션(-0.69%), SK하이닉스(-1.81%), 삼성바이오로직스(-0.62%), 삼성전자우(-0.66%) 등도 내림세다. 네이버는 이날도 전일 대비 2.17%(6500원) 내린 29만3500원에 거래되면서 3거래일 연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 시각 네이버 시총은 48조1484억원으로 코스피 시총 6위로 떨어졌다. 시총 7위 카카오(-0.76%), 8위 삼성SDI(-2.18%), 9위 현대차(-1.39%), 10위 LG화학(-1.44%) 등 시총 상위 10개 종목 모두 파란불을 켰다. 이날 시장에선 국제 곡물 가격 상승에 따라 식품주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곡물 판매 무역업을 영위 중인 신송홀딩스가 3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달성한 가운데 대상홀딩스우(24.20%), 팜스코(20.57%), 샘표(20.36%), 사조대림(18.94%) 등 식품주 대부분이 20%대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코스닥지수는 전거래일대비 13.25포인트(1.44%) 하락한 909.53에 장을 시작했다. 코스닥에선 개인이 643억원을 순매수 중인 반면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337억원, 243억원 어치를 팔아치우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종목 대부분은 내림세다. 코스닥 대장주 에코프로비엠은 전 거래일보다 1.12%(5300원) 내린 46만8400원에 거래되고 있으며 펄어비스(-0.32%), 카카오게임즈(-0.96%), 위메이드(-1.22%) 등 게임주도 일제히 약세다. 셀트리온헬스케어(-2.33%)와 셀트리온제약(-3.09%), 코스피 시장의 셀트리온(-1.26%) 등 ‘셀트리온 3형제’는 이 시각 모두 하락하고 있다. 현재 코스피 시장에선 고려산업과 신송홀딩스가 장중 상한가를 달성했고 코스닥시장에선 제이씨케미칼, 한탑이 상한가를 기록 중이다. 허지은 기자 hur.jieun@joongang.co.kr

2022.04.25 09:44

2분 소요
[영욕의 두산그룹 120년] 4代 이으며 또 다른 100년 준비

산업 일반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기업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많은 부(富)를 쌓아도 급격하게 바뀌는 경영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대(代)를 이어 매번 훌륭한 경영자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이런 가운데 4대를 이어온 기업이 있다.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 꼽히는 두산 이야기다. 8월 1일은 두산 창업주인 매헌 박승직이 1896년 서울 종로 4가에 면포를 판매하는 ‘박승직 상점’을 연 지 1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박승직 창업자는 1915년 국내 최초의 화장품으로 알려진 ‘박가분’을 개발해 판매하면서 많은 부를 쌓았다. ━ 차근차근 쌓아 올려 산같이 커져라 1940년대 창업자의 아들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이 경영권을 넘겨받으면서 ‘두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두산은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커져라’는 의미로 박승직이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며 지어준 이름이다.박두병 회장 아래서 두산은 승승장구했다. 1950년대 무역업·맥주 등의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 1960년대에는 건설·식음료·기계·출판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두산 그룹의 기반을 다졌다. 1981년에는 박두병 회장의 장남 박용곤(현 명예회장)이 회장직을 물려받으면서 3세 경영 시대의 출발을 알리기도 했다.물론 그룹 성장 과정에서 크고 작은 위기도 있었다. 1991년 경북 구미에 있는 두산전자 공장에서 유해물질인 페놀이 낙동강으로 유출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으로 두산전자 관계자 6명이 구속되고 회사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전국적으로 두산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일어난 게 더 큰 문제였다. 소비자와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OB맥주의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룹 주력 사업의 부진으로 두산의 부채비율은 600% 수준으로 치솟았고, 결국 식음료 사업과 OB맥주를 매각하는 어려움을 겪었다.OB맥주 매각은 두산에 전화위복이 됐다. 1998년 ㈜두산을 출범시키며 분위기 쇄신에 나선 두산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연이어 인수하며 그룹 체질 개선에 나섰다. 소비재 기업에서 건설·중공업 중심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3년 3조원 수준이었던 두산그룹의 매출은 2013년 23조원으로 뛰었다.그러던 두산은 2005년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박두병 회장의 차남인 박용오 전 회장에서 3남인 박용성 전 회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형제의 난’이라 불리는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밀려난 박용오 회장이 2009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결론을 맺었다. 하지만 이후 두산의 경영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올 3월엔 두산가(家)의 직계 장손인 박정원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며 4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최근 두산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글로벌 건설 경기 침체로 두산의 주력인 중공업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인력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20대 신입사원에게까지 희망퇴직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두산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룹의 알짜 자산을 매각하는 강도 높은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방산업체인 두산DST의 지분 50%(3500억원), 한국항공우주(KAI) 지분(3000억원),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사업부(1조1300억원)를 연이어 매각하며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크고 작은 자산을 매각해 최근 2년 간 3조3000억원가량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기업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두산밥캣의 기업공개(IPO) 작업까지 순조롭게 마무리 되면 지난해 11조원 정도인 차입금 규모를 8조원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게 두산 관계자의 설명이다.재무구조 개선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해 사업권을 따낸 면세점,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한 연료전지와 수처리 사업 등에 투자하며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고 있다. ━ 특별한 행사 없이 ‘내실 다지기’ 주력 올 3월 부임해 두산의 4세 경영시대를 연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창업 120주년보다 기업 내실 다지기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박 회장은 특별한 행사 없이 7월 31일 사내 포털에 기념사를 올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120주년 기념식을 대신했다. 박 회장은 글에서 ‘지금까지 어려운 고비를 맞아서도 단순히 버티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이 두산의 저력’이라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기업의 자세로 또 다른 100년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016.08.06 07:43

3분 소요
한국 10대 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6] 두산그룹

산업 일반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특별기획 ‘한국 10대 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9월호는 가장 역사가 오래됐지만 가장 젊은 기업, 두산그룹이다. 박승직 창업주와 박두병 초대회장, 그리고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사회공헌에 노력하고 있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집중 조명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난 8월 15일,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가 주목할 만한 성명을 하나 냈다. 상공회의소는 “선배기업인의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열악한 환경에도 근면과 성실로 힘을 보탰던 근로자와 국민들의 희생정신, 국가주도의 치밀한 정책인프라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었기에 오늘날 풍요로운 사회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며 “민관 팀플레이를 강화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경영관행과 기업문화를 과감히 벗어던지는 혁신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기업이 정부, 국민과 삼각편대를 이뤄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당찬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역동성이 엿보이는 시의적절한 성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성명을 주도한 대한상의 회장이 바로 박용만(60) 두산그룹 회장이다. 대한상의는 전경련과 함께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박용만 회장은 지난 3월 대한상의 회장 연임에 성공하면서 개별 그룹의 회장을 뛰어넘어 재계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펄펄 날고 있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이태명 기자는 최근 5월호 기사에서 박용만 회장의 탄탄한 입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2014년 7월 제주도 롯데호텔 1층.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제주하계포럼 마지막 날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방상공회의소 회장단과 함께 출입기자단을 만났다. 2시간가량 이어진 술자리에선 ‘어디가 재계 대표단체냐’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전경련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재계 대표단체다”, “이제 대한상의가 재계 대표단체가 됐다고 봐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다. 그때 박용만 회장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대한상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데 어떻게 전경련과 비교해. 상대가 안돼….” 물론 웃자고 한 얘기였다. 그러나 박 회장의 농담 속에는 이제 대한상의가 전경련을 제치고 재계 대표단체로 올라섰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기업인 박용만 이태명 기자는 이 기사를 정리하며 “대한상의가 급속도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재계 차원의 주요 행사를 대한상의가 독식하다시피 한다....재계 권력의 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썼다. 박용만 회장이 이미 재계의 대표성을 획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포브스코리아가 재계 10위의 두산그룹을 10대 기업 기업가정신 시리즈의 6번째로 기획한 것도 기업 규모보다 박용만 회장의 재계 대표성과 기업가정신을 중요하게 봤기 때문이다. 두산그룹은 역사가 깊은 기업이다. 올해로 설립 119년을 맞은, 한국 기업들 중에서 보기 드문 장수기업이자 지속성장 기업이다. 두산의 성장세는 현재진행형이다. 경영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구한 말부터 2000년까지 자본금총액 기준으로 두산은 1926년 재계 17위, 1935년에 재계 14위였다. 현재는 30대 기업군 중 10위다. 지금이 두산그룹 역사상 가장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두산의 이 새로운 100년을 지금 한국 재계의 거물로 성장한 박용만 회장이 주도해가고 있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를 건너 뛰어보자. 두산그룹의 창업주는 매헌(梅軒) 박승직(1864~1950)이다. 매헌은 경기도 광주 태생이다. 매헌은 33세 때인 1896년 8월 1일 서울 배오개(현 종로 4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 상점’을 개설한다. 두산그룹의 뿌리다. 매헌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해 신학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릴 적부터 향리에서 20여 리 떨어진 송파장을 왕래하며 장터 상거래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남의 땅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발전이 없다고 판단해, 1880년대 초에 본격 상인으로 나섰다. 창업의 배경에는 1894년 갑오개혁이 있었다. 육의전이 폐지되면서 시전(市廛)상인들이 관으로부터 특권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일반 상인도 상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던 것. 18세기 전반부터 배오개는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리상으로도 한반도 동북방의 상품과 삼남 지방의 상품이 모이는 교차 지역이었다. 당시 매헌이 배오개에 점포를 개설한 것은 이같은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헌은 박승직 상점을 운영하면서 근면성실함과 장사 수완으로 ‘배오개 거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의 상인기질과 서비스 정신은 타고났던 모양이다. 매헌은 상점을 운영하면서 종업원과 집안 식구들에게 “손님이 뺨을 때리거든 그 손을 붙잡으며 ‘손님, 손이 얼마나 아프십니까?’라고 말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역발상이자 ‘고객경영’의 원형이라고 할만하다. 매헌은 사회활동에도 열성이었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한성상업회의소(후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으로 재임하면서 면포업계 상인들의 권익옹호와 사업신장에 헌신한다. 1905년 7월에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최초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한인상계 리더로서 활약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바로 현재 대한 상공회의소의 뿌리다. 그러고 보면 창업주인 매헌과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연강 박두병, 그리고 박용만 회장이 대를 이어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매헌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상을 받은 일이다. 매헌은 1907년,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 환의 차관을 갚기 위해 거족적 국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 70여 원을 모금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대구 광문사에 기부해 서상돈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두산그룹이 그로부터 94년 후인 2001년 2월, 대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회 서상돈상 시상식에서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창업주로부터 이어진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이 3세 경영인에게 면면히 이어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박승직 상점엔 ‘박가분’이라는 이색적인 제품이 있었다. 박가분은 1915년 4월부터 매헌의 부인 정정숙 씨가 사업 내조의 일환으로 수공으로 제조한 화장품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제공했으나 반응이 좋아 여성들에게 판매해 인기를 끌었다. 박승직상점은 1925년,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된다. 매헌이 사장을 맡으면서 근대적인 기업으로 발전하는데, 가장 큰 변화는 감각상각비 계상과 대손처리 실시, 금전등록기 설치 등 회계처리를 근대화한 것이다. 수입 면직물뿐만 아니라 인조견 등 국내 직물류까지 판매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꾀했다. 또 상점의 홍보를 위해 달력을 제작·배포했고, 신문에 광고도 게재했다. 요즘 기업들이 하는 마케팅과 홍보전략의 시초인 셈이다. 매헌은 이후 1933년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주주가 된다. 당시 대주주는 일본 기린맥주로, 매헌 등 2명의 조선인이 소주주로 참여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매헌의 장남인 박두병이 소화기린맥주의 지배인이 되었고, 동양맥주로 발전하게 된다. 두산의 초창기 사업을 대표했던 OB맥주의 시초다. 1946년, 박승직은 경제난으로 휴업 중이던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해 현재 두산그룹의 여명기를 열게 된다. 경영사학자들에 따르면, 매헌이 박승직 상점을 통해 보여준 기업가정신은 인화, 근검, 정직과 신용이다. 이같은 기업가정신이 담긴 매헌의 좌우명 ‘근자성공(勤者成功)’은 지금도 대를 이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경영사학자들은 특히 매헌의 기업가정신 중에서도 인화와 인재경영에 주목한다. “점원 없이는 상점이 상점이 될 수 없으며, 좋은 점원은 곧 그 상점의 보배올시다. 10년 또는 15년, 인생의 일생 중 가장 존귀한 청춘 시절을 포목상 점두에서 자질과 주판질로 보내고 지내온 그네들의 공로를 생각하면 눈물이 돕니다...” 매헌이 1929년 5월, 에 직원들의 근속표창을 하면서 발표한 담화문의 한 대목이다. 매헌이 직원들을 얼마나 아끼고 구성원간의 인화에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연강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을 거쳐 현재의 박용만 회장대에까지 핵심가치로 이어진다. 인재경영을 중시하는 두산의 ‘사람이 미래다’ 슬로건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은 인화와 근검, 신용 매헌의 뒤를 이은 연강(蓮崗) 박두병(1910~1973) 회장은 오늘날 두산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나가는 데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두산그룹의 실질적 창업자로 불린다. 연강은 1951년 ‘주식회사 두산상회’를 설립했고,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동양맥주를 설립해 두산의 성장가도를 이끌었다. 연강은 1960년 건설회사인 동산토건주식회사(두산건설 전신)를 설립한 데 이어 1967년 국가의 기간산업인 기계공업 분야로 진출한다. 1963년에는 OB맥주를 미국에 첫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1968년엔 코카콜라와 환타를 생산해 시판했다. 합동통신사를 인수해 한국 언론의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등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모두 13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해 두산그룹의 매출액을 무려 349배로 성장시킨 탁월한 경영자였다. 연강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의 전신)을 졸업한 후 은행에서 4년간 실무를 익힌 뒤 매헌이 하던 가업을 계승했다. 매헌의 개척자적 창업정신을 이어받은 연강은 1936년 박승직 상점의 상무로 경영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연강의 색깔을 입힌 지금의 두산이 만들어진다. 해방이 되자 연강은 박승직상점을 무역업체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두산 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두산은 박두병의 가운데 자인 두(斗)에다 산(山)이라는 글자를 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매헌이 새 사업을 시작하는 연강에게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커져라”는 의미로 지어주었다. 요즘 말로 한다면 근검절약해서 부자가 되라는 메시지다. 이를 깊이 가슴에 새긴 연강은 “인생에서 과욕과 무리는 절대 금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순리대로 시대의 흐름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처세술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정도경영과 내실경영이 그의 기업가적 신념이 된다. 연강의 청렴함과 정도경영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연강은 1967년 이후 외자도입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경제의 현대화에 이바지했다. 한국경제의 도약기였던 1970년대 초 연강은 경제 문제에 관련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자문에 자주 응했다고 한다. 그 무렵은 국내자본 축적이 미흡했던 때라 외자도입으로 거의 모든 공장을 건설하던 시기였다. 외자도입 심의위원으로 있는 동안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외자를 빌려 국가 기간산업에 진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연강은 공인의 청렴한 자세를 굳게 지켰다. 연강의 이러한 철학과 자세는 현재 박용만 회장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기업인으로서 연강의 삶은 한 갈피 한 갈피가 기업가 정신의 보고다. 연강은 1970년 자신이 창립한 OB그룹의 경영을 정수창 회장에게 맡겨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실천한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당시 한국기업계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기업경영사에 큰 획을 그은 결단이었다. 연강의 이런 기업풍토 쇄신 노력은 당시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한국기업 혁신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연강은 또한 창조성이 뛰어난 경영자였다. “일을 맡기고 맡는 것은 그 일을 추진한다는 것으로서 ‘갑(甲)’이란 상태에 있던 일을 맡고 나서 “갑(甲) 더하기 무엇”이란 상태로 해 주고 해 받는 것으로서 동(動)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여기에서 더 큰 가치가 창조되는 것을 봅니다. 무게가 더 큰 일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 또 같은 무게의 일이면 그것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64년 1월 연강의 OB뉴스 권두언 중에서) 지금 시각으로 보면 영락없는 ‘창조경영’이다. 일을 창조적으로 해야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이같은 사고는 연강의 뒤를 이은 두산의 CEO들과 박용만 회장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상공회의소는 재계의 총의(總意)다” 연강은 이처럼 부친인 매헌이 축적한 상업자본을 산업 자본화해 지금의 두산을 일으켜 세웠고, 기업활동을 통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으로 사업보국의 신념을 펼쳐나갔다. ‘나’라는 개인보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기업 경영에 임했으며, 우리 가족, 우리 회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와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애국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연강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것도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사실 연강의 기업인 삶에서 대한상의를 떼어놓고 말하기는 힘들다. 연강은 “상공회의소는 재계의 총의(總意)다”는 신념으로 한국 상공업계 발전에 온 힘을 쏟은 기업가다. 연강은 타계하기 한 달 전까지도 대한상의 일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재계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3년 7월에 투병 중인 박두병 회장이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각 지방 상의 회원들과 회의를 할 때였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가 “왜 이렇게 무리를 하십니까? 일일이 챙기시지 않아도 다 될 텐데요. 좀 쉬십시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연강은 마지막 순간까지 상공업계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 다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고 한다. “내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기업과 우리나라 상공업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7월 11일, 대한상공회의소 8대 회장으로 연임된 연강이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다음 달인 8월 4일, 그는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업과 나라경제를 위해 몸 바쳐온 경제계 거목의 타계에 많은 기업인들이 숙연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연강이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하던 격동의 시대였다. 연강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회장에 피선돼,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의 대표적 재계 리더로 존경을 받기도 한다. 연강이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태평양경제위원회, 한일민간경제협력위원회에 뿌린 씨앗들은 이후 한국 상공업계와 나라경제 발전에 큰 기둥이 되었다. 두산그룹은 연강이 타계한 지 5년째 되던 해인 1978년 기업이윤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하고 ‘국가 발전의 원동력은 교육’이라는 연강의 의지를 기려 ‘연강재단’을 설립한다. 연강재단은 순수 기초학문과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환경연구 및 의료연구 등을 하는 학자들에게 학술연구비를 지원하고, 장학사업, 문화재보존관리사업, 교사들에게 해외견문의 기회를 제공하는 해외학술시찰사업, 중국학 연구 지원사업, 해외동포 도서 보내기 사업 등을 전개했다. 두산 창립 111주년을 기념해 2007년 10월 새단장해 문을 연 두산아트센터는 ‘연강홀’을 확대해 개관하고, 소극장 Space111과 두산갤러리를 통해 전시, 공연, 음악 등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연강이 강조한 사회공헌은 박용만 회장 체제에서 ‘Doosan Day of Community Service’(두산인 봉사의 날) 행사로 계승되고 있다. 이 행사는 두산이 사업을 영위하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임직원들이 각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공헌 활동을 펼치는 실천적인 봉사활동으로 유명하다. ━ 위기를 두산 특유의 창조와 혁신으로 돌파 연강은 슬하에 박용곤(83) 두산그룹 명예회장, 고 박용오 회장, 박용성(75) 중앙대 이사장, 박용현(72)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박용만(60) 두산그룹 회장, 박용욱(55) 이생그룹 회장 등 6남 1녀를 뒀다. 연강의 사후 두산그룹은 전문경영인 정수창 회장에 이어 박용곤·박용오·박용성· 박용현 회장 등 재계에서 보기드문 ‘형제경영’을 거치면서 그룹의 도약기를 맞는다. 1980년대에는 맥주·건설·전자·유리·기계·무역 부문을 중심으로 해외시장을 폭넓게 개척했고, 1990년대에는 각 부문의 기술 고도화에 중점을 두고 국제경쟁력 강화에 매진했다. 두산은 박용곤 회장 시절인 1991년 이른바 ‘낙동강 페놀사건’으로 큰 위기를 맞았지만 이후 특유의 돌파력으로 그 후유증을 극복해낸다. 두산그룹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김 신 경희대 명예교수는 “두산은 페놀사건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모범 환경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위기를 특유의 창조와 혁신으로 돌파하는 특성이 있다”며 “1990년대 후반 IMF체제 이후 그룹의 위기를 맞았지만 한국중공업 등 10여 건의 M&A를 성공시키며 100년 기업의 새로운 기반을 조성했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까지 주로 소비재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두산은 창업 100주년인 1996년을 전환점으로 그룹의 사업구조를 수출 중심의 중공업으로 재편하기로 한다. 새로운 100년의 경영활동의 근간이 될 2G 전략(Growth of People, Growth of Business)을 수립하고, 글로벌 ISB(인프라 지원산업)기업으로의 사업 전환을 추진한 것. ISB는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가 융합해 고도화된 엔지니어링 및 금융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거대사업으로 막대한 자본 동원력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걸출한 M&A(인수·합병)능력을 보인 박용만 회장의 역할이 컸다. 2001년 한국중공업, 2003년 고려산업개발, 2005년 대우종합기계, 2006년 건설장비 업체 밥캣(Bobcat) 인수 등 10여 건의 M&A에 성공하면서 두산은 중공업그룹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에 성공했다. 대규모 M&A와 기업구조 변화를 추진한 중심에 ‘박용만 파워’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연강의 다섯째 아들이다. 경기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 보스턴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1977년 외환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해 1983년 두산건설 뉴욕지사, 1990년 두산음료, 두산식품, 동양맥주를 두루 거치며 경영 실무를 두루 익힌 그는 오너 경영인이면서도 특출한 전문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경영능력은 실적으로 나타난다. 1995년 두산동아 부사장,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경영 일선에 뛰어든 이후 박 회장은 크고 작은 M&A를 진두 지휘했다. 오죽하면 ‘미스터 M&A’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김 신 경희대 명예교수는 “2006년 밥캣 인수는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격이라고 할 정도로 M&A 당시 세간의 우려가 컸는데, 지금 건실하게 경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박용만 회장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두산은 현재 두산중공업의 해수 담수화 플랜트 등 세계 일류상품 총 19개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독보적 기술 역시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영국 수처리 전문업체 엔퓨어를 인수해 역삼투압(RO) 방식 담수화 기술을 보유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박용만 회장은 또 사고가 유연한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기업과 근로자들이 구조조정을 ‘인력 재배치’나 ‘해고’로 받아들일 때 박 회장은 ‘구조조정은 기업의 미래가치를 끌어올리는 기업활동’이라고 단박에 정의했을 정도다. 박 회장은 이런 혁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두산이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그룹으로 변신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M&A와 합리적인 구조조정, 인화경영을 바탕으로 두산은 모기업 (주)두산을 비롯해 두산중공업, 두산 인프라코어, 두산건설, 두산엔진 등 계열사 21개를 보유, 자산 총액 31조3693억원으로 재계 10위(공기업 제외)를 고수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지난해 매출액 20조4682억원, 영업이익 1조81억원, 순이익 332억원을 달성했다. 두산그룹은 현재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이다. 두산의 해외 매출 비중은 1998년 12%에 불과했지만 2013년 기준 64%로 5배 이상 커졌다. 두산그룹에서 일하는 4만2600여 명의 임직원 가운데 2만1000여 명이 해외사업장에 소속돼 있다. 그룹의 중심인 두산중공업은 해외 수주 비중이 70%가 넘을 정도로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확대했다. 박용만 회장은 이런 글로벌 기업의 오너인만큼 글로벌 소통에 아주 능하다. 박 회장 본인이 IT 기술에 관심이 많고, 한 때 ‘트위터하는 CEO’로 불릴만큼 SNS를 통해 젊은 세대들과 소통해 인기가 높았다. 원탁회의에서 격의 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수십년 나이 차이의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유연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의 SNS 소통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11년 1월 2일, 서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출근길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오전 10시에 시무식을 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그러자 9시께 박용만 회장이 사내 트위터인 야머(Yammer)에 시무식을 늦춘다고 올렸다. 젊은 직원들은 즉각 이 통보를 접수했지만 임원들 다수는 시무식이 연기된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나중에 젊은 직원들에게서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안도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간 대한상의 회장을 맡아 박 회장의 SNS 소통이 과거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세대와 국적을 초월해 글로벌 소통에 대한 의지는 여전하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는 한국의 경영구루이기도 하다. “저는 리더들에게 4가지 덕목을 갖추라고 주문합니다. 첫째, ‘자기 사업처럼 일하는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야구팀의 코치같이 적절한 수준의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목소리로 이끌지 않고 가르치고 육성하는 코칭 리더십(Coaching Leadership)입니다. 세 번째, 혁신성입니다. 자기 자신이 혁신적이거나 최소한 밑에 사람이 제시하는 혁신을 일단 거부감 없이 들어줄 수 있는, 혁신에 대해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열정을 가지라고 주문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보일러에 불이 안타는 사람이니, 열정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가 리더십 강의를 할 때면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다. ━ 가장 역사가 오래됐지만 가장 젊은 기업 두산그룹의 특징은 형제경영이다. 2012년 박용만 회장이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다른 형제들은 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3세의 자녀들인 4세가 각 계열사에 들어가 경영을 맡으면서 3세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박용만 회장 이후는 누가 될까? 재계에서는 두산그룹 4세들 가운데 지분 보유에서 가장 앞서 있는 박정원(53) 두산건설 회장을 주목한다. 두산가의 장손이기에 미래의 두산 4세 경영을 주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3세 경영이건 4세 경영이건 그룹의 전통인 인화경영은 여전히 그룹 경영을 관통하는 핵심가치다. 초대회장인 연강 박두병은 “반목은 결국 파멸을 가져오고, 화목은 영원한 발전을 의미한다”며 형제간, 임직원간 인화를 늘 강조했다. 하지만 인화의 전통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2005년 이른바 ‘형제의 난’이라는 경영권 분쟁을 겪었고, 박용오 전 회장은 그 분쟁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최근에도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은 학교 구조조정과 관련해 교수들과의 인화에 실패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박용만 회장은 흔들리지 않는 정도경영과 사회공헌에 묵묵히 매진하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두산그룹에 그치지 않고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나라 경제의 주춧돌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평가다. “우리는 하나의 단계에 집착하지 말고 다음, 다음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생성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만 안주해서는 적응력을 잃어버린다. 항상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는 인간만이 안이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은 헤르만 헤세가 남긴 이 말을 자주 임직원들에게 인용하곤 했다. 박용만 회장도 연강의 이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용만 회장은 올해 환갑이다. 하지만 그의 사고방식과 경영스타일은 여전히 젊다. 119년 역사의 한국 최고령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두산의 조직도 굉장히 젊다. 바로 그룹의 수장이 박용만 회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박 회장은 “누군가 ‘두산은 어떤 기업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두산은 강력한 사람들의 따뜻한 집단이자 사람을 키우는 방식과 열정이 남다른 기업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박용만 회장의 열정이 있는 한 두산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두산그룹은 이처럼 3~4세가 조화롭게 그룹을 책임지면서 예측 가능한 후계구도 속에 오늘도 탄탄한 장수기업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2015.08.25 15:04

14분 소요
Issue | 백화점 업계 연봉 1위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경영 10년

산업 일반

주력인 백화점·홈쇼핑 부진 ... 인수한 리바트·한섬 시너지 효과 기대 이하 45억1100만원. 현대백화점그룹이 3월 31일 공시한 정지선 회장의 지난해 연봉이다. 정 회장은 현대백화점에서 39억400만원(급여 13억5699만원, 상여금 13억7800만원, 성과금 11억7000만원), 현대그린푸드로부터 6억700만원(급여 3억100만원, 상여 3억600만원)을 각각 받았다.참고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백화점 업계 1위 롯데백화점이 포함된 롯데쇼핑에서 15억5000만원을 받았다. 신 회장이 롯데제과·롯데케미컬에서 받은 연봉을 모두 더하면 총 44억4000만원이다. 정 회장은 신 회장보다 많은 돈을 받아 백화점 업계 연봉 1위를 기록했다(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등기임원이 아니어서 연봉이 공개되지 않았다).현대백화점은 3월 21일 주주총회에서 정지선(42) 현대백화점 그룹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했다. 기존 사내이사였던 현대백화점 경청호 부회장과 하병호 전 사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신 현대백화점 김영태 사장과 이동호 기획조정본부 사장이 사내 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이번 선임 결과에 대해 업계에서는 세대교체가 본격화됐다고 평가한다. 경 부회장은 1975년 현대그룹으로 입사해 2002년 그룹 기획조정본부장, 2005년 그룹 기획조정본부 사장,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정 회장을 보좌해 그룹 부회장직을 수행했다.이번 세대교체는 실적 부진을 만회하고 조직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백화점과 현대홈쇼핑 등 35개 계열사를 둔 매출 6조원(2012년 기준) 규모의 회사다. 그러나 주력 사업인 백화점의 시장점유율이 계속 떨어지고, 홈쇼핑의 영업이익은 하락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3년 29.7%이었던 현대백화점의 시장점유율은 2012년 19.1%로 10%포인트 넘게 떨어졌다.2003년 1월 그룹 총괄 부회장에 오른 정 회장은 2007년 회장에 취임해 현대백화점그룹을 이끌고 있다. 세간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업계에서는 “지난 10년 간 차별화하지 못한 사업전략의 실패”라는 평가가 많다. 한 대형 증권사 연구원은 “유통업은 경기에 따라 소비패턴이 바뀌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며 “롯데나 신세계는 경기 침체로 중저가 유통채널인 프리미엄 아울렛이나 쇼핑몰 등에 집중 투자하며 사업을 확대했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현대백화점은 변화에 늦게 대응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려고 시작한 신규 사업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점유율 10년 사이 10% 넘게 떨어져현대홈쇼핑도 홈쇼핑 상위 3사 중에 유일하게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448억원. 전년 대비 5.3% 줄었다. 이와 달리 GS홈쇼핑과 CJ오쇼핑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13.3%, 15.5% 늘었다. 그간 업계 1위를 놓치지 않던 현대홈쇼핑은 영업이익이 줄면서 3위로 쳐졌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고객 혜택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사은 행사와 무이자 할부 등 각종 프로모션 진행으로 영업이익이 하락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업계에서는 다른 분석이 나온다. CJ오쇼핑과 GS홈쇼핑은 수익성 높은 패션 사업을 확대하고 있지만 현대홈쇼핑은 여전히 주방이나 식품 등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박유미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지난해까지 상품 등에서 차별화를 꾀하지 못한 게 실적부진의 이유”라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올해도 이익 개선 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정 회장은 그동안 ‘은둔의 CEO’로 불릴 정도로 외부 행사에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행보가 달라진 건 2010년 전후다. 정 회장은 그 해 ‘현대백화점그룹 비전 2020’을 발표하면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백화점·미디어·식품 등 기존 사업을 키워나가고, 동시에 인수합병(M&A)으로 신성장동력을 찾아 2020년까지 매출 20조원, 경상이익 2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경쟁사인 롯데나 신세계의 적극적인 행보에 보수적인 경영을 했던 그가 ‘긴 침묵’을 깨면서 당시 관련 업계에선 화제가 됐다.실제로, 2012년 2월 현대백화점은 가구업체인 리바트를 204억원에 인수했다. 리바트의 전신은 1977년 현대건설 가구사업부에서 현대그룹 계열사로 독립한 ‘금강목재공업’이다. 현대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 차원에서 현재의 리바트를 고려산업개발에 매각했다. 이를 정지선 회장이 10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같은 해 3월에는 국내 여성복 1위 업체인 한섬을 4200억원에 사들였다. 정 회장이 직접 한섬 회장을 만나 단판을 지었다는 후문이다. 백화점과 홈쇼핑 등 패션사업을 위주로 한 시너지 효과 확대를 위해서다.하지만, 인수한 두 회사 실적이 신통치 않다. 인수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섬은 여성 의류 부문에서 업계 1위로 그룹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고 있는 패션사업의 중심축이 돼야 할 회사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매출과 영업 이익이 하락 일로에 있다. 해외 브랜드인 ‘지방시’와 ‘셀린느’ 등의 판권을 신세계인터내셔널에 뺏기면서 수입 계약 연장에 실패한 때문이다. 이 여파로 인수 직전인 2011년 매출 4970억원, 영업이익 983억원을 기록했던 한섬은 2년 내리 실적이 하락했다. 지난해 매출은 4689억원, 영업이익은 566억원이다.리바트도 백화점과 연관성이 높은 가구업체로 중요한 계열사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리바트는 정 회장이 인수한 후 2012년 매출 5049억원, 영업이익 32억원을 냈다. 이는 전년도 대비 매출 3.1%, 영업이익 64%가 감소한 수치다. 정 회장이 경영진 교체라는 초강수를 꺼내든 이후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매출 9.8%, 영업이익 299% 증가했다. 실적이 개선됐지만 영업이익률은 2%대에 불과하다. 여기에 국내 가구시장이 경기 침체로 장기 부진에 빠진데다 글로벌 가구업체인 이케아가 상륙을 앞두고 있어 향후 전망이 별로 밝지 않다. 이케아는 올 연말에 경기도 ‘광명 1호점’을 시작으로 국내에 본격 진출한다.미래 성장동력 아울렛 투자 롯데의 10분의 1 수준현대백화점그룹의 계열사는 2010년 29개에서 지난해 35개사로 늘었다. 계열사는 늘었지만 실적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특히 주력 계열사인 현대백화점의 지난해 매출은 1조1126억원으로 전년 대비 0.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주가도 하락세다. 2011년 중순 20만원대를 돌파했던 주가는 4월 10일 현재 14만원대로 하락했다. 올해에도 실적 개선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영상 한국투자증권 연구원 “실적 부진 여파와 신규점 출점으로 인한 부담이 올해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매출 2.5%, 영업이익 3.6%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정 회장은 한섬과 리바트의 실적 개선을 위해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정 회장이 2조원 대의 국내 핸드백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도 이런 이유다. 그는 현대백화점그룹의 패션 계열사인 한섬을 통해 3월 20일 핸드백 브랜드인 ‘덱케(DECKE)’를 출시했다. 5년 안에 연 매출 1000억원대로 성장시킨다는 목표다.덱케는 올해 백화점과 편집숍 등 10곳 이상에 매장을 열고 오는 4월에는 자체 온라인 몰도 열 계획이다. 한섬이 독자적으로 잡화 브랜드를 선보이는 건 1987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또 조만간 현대백화점 본점인 압구정점 지하 2층에 있는 ‘타임’ 매장을 명품 매장이 들어서 있는 3층으로 옮길 예정이다. 타임은 한섬에서 만든 여성 브랜드다. 타임을 수입 명품 브랜드처럼 파워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현대백화점은 앞으로 주요 경쟁력 있는 의류 브랜드를 중심으로 해외 진출 계획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아울렛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현대백화점은 5월 서울 금천구 하이힐 아울렛의 위탁 운영을 시작하고, 9월에는 서울 송파구 가든파이브 매장을 일괄 임대해 아울렛으로 바꿀 예정이다. 12월에는 경기 김포시에 프리미엄 아울렛 매장을 연다. 정 회장은 프리미엄 아울렛을 신성장 사업으로 키우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실화될 지는 미지수다.이미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일찌감치 시장에 진출한 때문이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프리미엄 아울렛 3곳을 개장한 데 이어 올해도 경기 고양시·구리시·광명시 등에 추가로 열 계획이다. 신세계도 2017년까지 경기 하남시와 인천 청라지구, 고양 삼송지구 등 6곳에 복합쇼핑몰을 건설할 계획이다. 투자 규모만 비교해도 불리하다.롯데는 지난해에 이어 프리미엄 아울렛 시장에 7조원 가량을 투자키로 했지만 현대백화점은 10분의 1수준인 7000억원에 불과하다. 김준영 현대백화점 부장은 “현대백화점은 외형 경쟁이 아니라 고객들이 편리하고 실속 있게 쇼핑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더 치중하고 있다”고 말했다.소중 중인 코엑스몰 운영권 문제도 악재현재 소송 중인 코엑스몰 운영권도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지난해 2월 무역협회가 직접 운영하겠다며 재계약을 하지 않자 현대백화점이 반발하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동안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사인 한무쇼핑이 코엑스몰의 일부 음식점과 식음료 코너를 위탁 운영했다. 그러나 무역협회가 코엑스몰 매장관리 협약의 종료를 현대백화점 측에 통보했다. 현대백화점은 1986년 체결한 출자약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위법행위라고 맞서고 있다.코엑스몰은 한 해 유동인구만 5000만명에 이르는 만큼 유통업계에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 현재 코엑스몰은 리모델링 중이다. 무역협회 박성경 차장은 “당시 계약은 2010년 5월에 기간 만료가 됐지만 3년 간 연장했고 지난해 2월 공식 계약이 종료됐다”고 말했다. 김준영 부장은 “위탁운영으로 1년에 버는 돈은 3억원에 불과하다”며 “돈이 아니라 계약서에 있는 권리에 대해 소송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2014.04.14 10:56

6분 소요
먼저 치고 나가야 하나라도 더 건진다

산업 일반

아모레·두산, 알짜 회사 선제적 매각으로 선택과 집중 … 웅진의 뒤늦은 매각 기업은 나름의 주기를 두고 호황과 불황을 오간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그 순간, 앞으로 닥칠 위기를 내다봐야 하는 이유다. 독감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리 맞는 예방주사다. 대내외적인 환경 변화가 예상되고, 수익 감소와 성장 축소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미리 유동성을 마련하고, 효율이 낮은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이 때의 판단이 기업의 생멸(生滅)을 결정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기아와 해태는 좌고우면 하다 시간만 보냈다. 현재 위기에 몰린 동양·STX 등도 살아날 타이밍을 놓쳤다. 뒤늦게 자산 매각 카드를 꺼냈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갑다.선제적 자산 매각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은 그룹도 있다. 1990년대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지금도 대표적인 구조조정 성공 사례로 꼽힌다. 다른 산업에 비해 외국 기업과의 경쟁이 일찍부터 시작된 화장품 업계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위기론이 불거졌다. 로레알을 비롯한 외국 기업의 고품질 제품이 들어오면서 소비자의 눈 높이가 높아졌고, 시장에선 출혈경쟁까지 벌어졌다.1945년 설립해 국내 화장품 업계 부동의 1위를 달리던 태평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1년 24개에 달하던 계열사의 실적 부진과 재무 건전성 악화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빠르게 악화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태평양은 가장 자신 있는 화장품 분야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한다.유사 업종은 통폐합하고, 화장품과 무관한 계열사는 미련 없이 팔았다. 주변에선 알짜 기업을 왜 파느냐고 했지만 서성환 전 회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구조조정 당시 그가 했던 말은 아직도 재계에 회자된다. “기업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작은 풍파에도 쉽게 흔들린다. 태평양은 오직 화장품으로만 커나갈 것이며, 앞으로도 다른 업종은 생각하지 않겠다.”서둘러 실탄 마련해 사업 재편1991년 태평양증권을 선경(현 SK)에 매각했고, 야구단과 여자 농구단은 현대와 신세계에 각각 매각했다. 패션 부문은 거평에, 동방상호신용금고는 개인 투자자에 넘겼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장기적인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확 바꾼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외환위기를 무난히 넘기고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계열사는 24개에서 9개로, 직원은 1만3000여명에서 4500명으로 줄었다. 매각으로 확보한 자금은 부채를 줄이는 데 썼다. 1997년 약 300%에 달하던 부채비율은 2001년 50%대로 내려갔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의 부채비율은 지금도 20~30% 수준이다.성장세도 꾸준하다. 지난해 매출은 2012년보다 약 10% 늘어 3조8735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해외 매출이 효자 노릇을 했다. 해외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6000억원을 돌파했다. 2016년 1조원을 넘긴다는 목표다.외국 화장품 기업에 밀려 구조조정에 돌입한 토종 회사가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글로벌 화장품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지난해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자산 5조원 이상)에 새로 편입됐다. 1980년대 말 순위(34위)보다 떨어진 62위지만 속은 더 건강해졌다. 선택과 집중의 결과다.2000년대 들어서는 두산의 변신이 돋보였다. 두산그룹은 설립 120년을 맞는 대표적인 장수기업이다. 창업자 박승직부터 박용곤 회장까지 3대를 거치면서 고속 성장했다. 주력 사업인 맥주와 식자재 등을 바탕으로 건설·전자·기계 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 기간 매출과 종업원 수는 100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창업 100주년을 맞은 1996년 두산은 위기를 직감했다.당시 투자자본수익률(ROIC)은 4.9% 정도였는데 이는 실질이자률(약 10%)보다 훨씬 낮았다. 이런 상황이 몇 년간 지속되면서 현금 유동성이 급격히 나빠졌다. 고민 끝에 두산은 1996년 2월 미국 맥킨지와 경영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사업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두산은 우선 3M·코닥·네슬레 지분을 매각하고, 을지로 본사 사옥을 팔아 유동성부터 확보했다. 이 덕분에 외환위기 삭풍을 무난히 비켜간 두산은 2단계로 유사 업종 통합에 나섰다. 17개 계열사를 4개로 정리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꿨다. 주력이던 동양맥주를 벨기에 기업에 넘기고, 음료사업은 코카콜라에 양도했다. 이 과정에서 688%(1996년)에 달했던 부채비율은 151%(2000년)로 낮아졌고, 수익성은 개선돼 영업이익이 매년 30% 이상 늘었다.유명한 ‘걸레론’이 등장한 것도 이맘때다. 당시 구조조정을 지휘하던 박용성 전 회장은 “왜 주류사업을 매각하려 하느냐”는 반발이 일자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라는 말로 일축했다. 부실기업만 매각해서는 제대론 된 구조조정을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박용곤 명예회장 역시 “두산이라는 이름이 사라질 위긴데 업(業)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로 힘을 실었다.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든든한 실탄을 바탕으로 두산이 선택한 것은 중공업이었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3년 고려산업개발,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을 잇따라 인수해 중공업 기업으로 변신에 성공했다.현재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는 그룹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계열사가 됐다.2007년 소형 건설장비 부문 세계 1위 기업인 밥캣을 인수한 데 이어, 목시엔지니어링(현 두산 ADT), 인도 첸나이 웍스(발전소용 보일러 제조업체), 독일 렌체스(친환경 발전설비 제조업체) 등을 인수했다. 인수 과정에서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지분을 팔고, 테크팩과 버거킹, 주류 사업 등도 과감히 매각했다. 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였다.약 15년에 걸친 구조조정을 통해 두산은 중공업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했고, 내수 전문 기업에서 매출의 60%를 해외에서 거두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외환위기 발생보다 2년 앞선 선제적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두산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최근 건설경기 불황에 따른 실적 악화로 재무 건전성이 다시 나빠져 위기 기업 리스트에 오르내리지만 급격히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두산그룹은 지난해 12월 두산중공업의 자사주 매각(3023억원)과 두산인프라코어의 해외주식예탁증권(GDR) 발행(4207억원), 두산건설의 전환상환우선주(RCPS) 발행(4000억원) 등으로 1조1000억원 규모의 자본 확충에 성공했다. 특히 위기의 출발점이었던 두산건설은 RCPS 발행으로 부채비율이 150%로 낮아지고, 금융비용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 계열사 토지 재평가를 통해 부채비율을 추가로 낮추기로 한 것도 전망을 밝게 한다.기업은 미래의 수익을 기대하고 빚을 낸다. 갚으려면 현금이 필요한데 생각처럼 돈을 벌지 못했을 때가 문제다. 유동성의 중요성은 불황기에 더 커진다. 전문가들은 최근 동양·STX·동부 등 굵직한 대기업 집단이 우후죽순 무너지는 것을 두고 “적극적인 자산 매각으로 유동성을 확보하지 않고, 금융권에만 기댔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사옥까지 내놓아야 할 만큼 궁지에 몰린 뒤에는 매각 카드를 써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너도 나도 위기일 땐 매물이 쏟아지고, 매물이 많으면 값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파는 쪽의 형편이 어려우면 흥정의 여지도 줄어든다. 더 받고 싶어도 혹시 안 팔릴까 ‘이거라도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다. 제값을 받기 힘든 이유다.자산 매각은 가격보다 시기가 중요태평양과 두산의 성공에는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부에서 위기를 진단하고 남들보다 빨리 대처했다. 과감히 자산을 정리해 유동성을 확보하고, 주력 사업에 재투자해 사업체질을 바꿨다. 2011년 주력 사업 중 하나인 하드디스크(HDD)를 시케이트에 매각해 1조원 이상의 시세 차익을 거둔 삼성전자나 2008년 금융위기 직전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매각한 이랜드도 선제적 매각의 우수 사례로 꼽힌다.법정관리 중인 웅진그룹의 뒤늦은 대처도 눈 여겨 볼 만하다. 법정관리 전 위기를 수습했다면 최선이었겠지만 그나마 ‘알짜’ 계열사를 빨리 팔아 그룹 전체가 공멸하는 화는 면했다. 윤석금 회장이 1980년 설립한 헤임인터내셔날(현 웅진씽크빅)에서 출발한 웅진그룹은 교육·출판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뒤 1988년 코리아나화장품, 1990년 한성물산(현 코웨이)을 설립해 영역을 넓혔다.코웨이를 중심으로 고속 성장했고, 외환위기 때는 당시 업계 2위던 코리아나화장품을 매각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살아남았다. 재계 30위권까지 올라서며 승승장구했지만 2006년 시작한 태양광 사업 부진과 2007년 인수한 극동건설 부실이 누적되면서 2011년 말부터 급격히 재무구조가 나빠졌다.위기에 처한 윤 회장은 극동건설과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의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수습에 나섰다. 웅진그룹은 지난해 1월 주력 계열사인 웅진코웨이를 매각한 데 이어, 웅진식품과 웅진케미칼도 팔았다. 이 세 회사 매각 대금만 약 1조7500억원에 달하는데 웅진식품과 웅진케미칼은 시장의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팔렸다.덕분에 웅진홀딩스는 지난해 말 채무 중 3770억원을 더 변제해 전체 채무의 82%를 갚았다. 앞으로 갚아야 채무 약 2700억원은 회생 계획에 따라 10년 동안 분할 상환이 가능하다. 이르면 1월 중 법정관리를 졸업할 것으로 보인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다.물론 법정관리가 끝나도 윤 회장에게 남는 계열사는 웅진씽크빅, 북센, 렉스필드 골프장 정도다. 하지만 “학습지(웅진씽크빅)와 출판(북센)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포기한다”는 윤석금 회장의 선언과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이 정도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빠른 채무 변제 덕에 올해 매각하려던 웅진에너지와 웅진플레이도시를 팔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윤 회장에겐 호재다.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기회는 잡았다.

2014.01.08 14:45

6분 소요
[CEO] 박용만 두산 신임회장

산업 일반

“사람이 변신할 수 있으면 사업을 바꿔가면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두산은 원하든 원치 않든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된 한국 기업입니다. 앞으로 국내 기업들에게 롤 모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박용만(58) 두산그룹 회장이 4월 5일 기자 간담회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사람은 시스템과 기반 없이 역량만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며 “지금은 사람으로 승부를 내는 게 가장 확실하고 지속 가능한 길”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이 직접 만든 광고 문구처럼 결국 두산은 ‘사람이 미래’라는 이야기다. 그는 “업종을 잘 모르면 업종 쇠태기 때 기업 역시 쇠태 하지만, 사람이 자산인 기업은 업종이 바뀌어도 살아남는다”면서 “두산이 바로 그 대표기업”이라고 덧붙였다.하버드대 강연이 첫 해외 출장사람을 강조한 것은 4월 2일 밝힌 취임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박 회장은 당시 ‘따뜻한 성과주의’를 그룹의 핵심 전략으로 꼽았다. 그동안 국내 대기업을 비롯해 많은 글로벌 기업이 개인간의 경쟁을 유도해 상위 위주로 끌고 가고 하위는 도태시키는 전략을 취한 게 사실. 박 회장은 “구성원 간의 끝없는 경쟁과 기계적 도태를 반복하는 환경에선 조직이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없다”며 “리더는 차가운 평가의 눈이 아니라 따뜻한 육성의 눈으로 구성원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뜻함과 성과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박 회장이 취임하자마자 연이어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달라진 그룹 DNA와 무관치 않다. 소비재 중심 회사였던 두산은 1990년대 중반 네슬레·한국코닥 등을 매각한 데 이어 2000년대부터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 고려산업개발(두산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 밥캣을 잇따라 인수하며 중공업 기업으로 거듭났다. 박 회장은 간담회에서 “지금까지 (인수합병에서) 24건을 팔았고, 18건을 샀다”며 “모두 42건의 M & A를 하면서 금액으로 보면 4조4000억 팔았고 9조원 정도 샀다”고 설명했다.이를 통해 1998년 당시 3조4000억원이었던 두산의 매출은 지난해 26조2000억원으로 급증했다. 국내와 해외 매출 비중도 1998년 9대 1에서 지금은 4대 6으로 뒤바뀌었다. M & A를 통해 그룹 외형이나 사업 부문만 바뀐 게 아니었다. 박 회장은 “2000년 이후 그룹이 급격한 속도로 변하면서 구성원도 많이 바뀌었다”며 “지금 구성원을 보면 대부분이 두산 명함을 쓴지 10년이 안 된 분들이고 3만9000여 임직원 중 절반이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116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최고령 회사가 10년도 안된 젊고 글로벌 한 직원들을 거느린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기업 문화였다. ‘그룹 변신에는 성공했지만 그에 걸맞은 기업문화가 없다’는 것. 박 회장은 “젊은 조직이라 역동적이고 배타성이 없지만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기업문화와 철학이 뿌리내리는 것”이라며 “올해는 강력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문화를 구축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역량을 키워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박 회장이 사람을 중시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무리 바빠도 인재 발굴은 직접 챙긴다. 대학 신입사원 채용설명회에 직접 참석해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내세우며 회사의 경영 실적과 비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기본. MBA 졸업생을 스카우트하기 위해선 직접 미국에 건너가 개별 인터뷰를 진행한다. 나아가 매년 열리는 신입사원 환영회엔 빠지지 않고 참석해 사원들과 술잔을 부딪히는 것으로 유명하다.박 회장이 그룹 회장 취임 후 처음 갖는 해외 출장지도 다름아닌 미국 하버드 대학이다. 그는 4월 14일 하버드 대학의 비즈니스스쿨·로스쿨·케네디스쿨 학생회가 공동 주최하는 ‘아시아 비즈니스 콘퍼런스’에서 기조 연설자로 참석해 두산의 성공 배경을 설명할 예정이다.실제 박 회장은 좋은 인재에 남들보다 더 투자하고 더 육성하는 게 기업의 경쟁력 강화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2004년 두산 전략기획실 사장으로 ‘동대문 야전사령관’을 자청할 당시에도 기자를 만나 “구조조정과 M & A 역시 결국은 사람으로 귀결되더라”며 “좋은 인재를 더 많이 육성할 수 있는 체력 좋은 기업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회장의 중시하는 ‘사람 경영’은 과거 이건희 삼성 회장이 강조한 ‘천재론’과는 거리가 있다. 박 회장은 성적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능력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대신 그 사람이 두산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박 회장이 중시하는 ‘두산맨’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두산의 경영이념인 ‘인화’에 어울려야 한다. 그는 “두산에서 인화는 화목과 다르다. 화목을 위해 억지로 가다 보면 화목이 안 이뤄지더라“며 ”진정으로 인화를 이뤄 하나가 되려면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조직 운영이 공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두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유연성 있고 끈기 있는 두산맨 강조수많은 인수합병을 통한 기업 변화를 겪으며 박 회장이 터득한 인재 평가 기준도 남다르다. 그중 하나가 유연성이다. 박 회장은 과거 인수한 기업의 임직원들을 평가하는 자신의 잣대를 기자에게 설명한 적이 있다.“기업을 인수한 후 인수한 회사의 인력을 평가할 때는 제 나름대로 몇 가지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변화에 대한 태도입니다. 먼저 능력이 좋고 경험이 풍부한데 변화에 느린 사람들이 있죠. 이들은 반드시 포용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데 변화를 발 빠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존 조직에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역량을 보고 판단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능력과 경험이 많으면서 의도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감하게 내보내야 합니다. 조직의 안정성을 해치기 때문이죠.”투지도 빼놓을 수 없다. 박 회장은 “사람을 평가할 때 끈기를 중요시 여긴다”며 “끈기는 인내심이 아니라 주어진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가가는 투지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유연성과 투지는 누구보다 박 회장 본인에게 어울리는 덕목. 일례로 박 회장은 단기 승부를 내는 도박이나 내기 골프를 좋아하지 않지만 한번 목표를 정하면 끈질기게 노력한다. 기업을 인수할 때나 인재를 발탁할 때도 유연하다.박 회장은 “과거 두산동아 출판사에서 눈 여겨 보던 영업직원이 있었는데 중공업으로 보냈더니 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더라”며 “그 사람의 지금 업무와 상관없이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현재 두산의 핵심 전략도 2G(Growth of People, Growth of Business)다. ‘사람에 의해 기업이 성장하고 다시 기업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박 회장의 경영 철학 때문이다. 박 회장은 “사람은 업무나 사업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지 강의실에서 성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며 “그런데 회사가 어려우면 사내에서 성장을 하기 힘들다”고 말해 왔다.‘따뜻한 성과주의’의 밑거름은 소통박 회장은 유연하고 끈기 있는 인재들이 두산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인사 제도 개선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잭 웰치 전 GE 회장 아래서 인사 제도를 실제 운용한 경력이 있는 전문가인 빌 클라인을 고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룹의 최고경영층과 각 계열사의 대표들이 핵심인재를 1대 1 또는 2대 2로 직접 만나 그룹경영 전반을 리뷰하는 ‘피플세션(People Session)’도 GE의 인사 시스템을 벤치마킹 한 것. 박 회장은 “글로벌 기업의 인사제도를 보고 바꾸는데 처음엔 과연 한국에서 가능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며 “하지만 다른 체제가 들어오자 한 두 달 만에 사람들도 (거기에 맞게) 바뀌더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직원 평가를 인건비 비중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모자란 역량을 붙여 제도화하는 쪽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따뜻한 성과주의가 나온 배경이다.박 회장에 따르면 ‘따뜻한 성과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적인 소통이다. 박 회장은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팀워크를 올려야 조직의 성과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리더의 역할에서도 소통은 절대적이다 .박 회장은 “기업의 의사결정은 고독한 영웅이 밤을 지새며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며 “여건, 자원 등 모든 요소가 투명하게 논의될 때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때 포토 저널리스트를 꿈꿨다는 박 회장은 재계에서 ‘소통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13만명의 팔로워(followers)를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으로 트위터에선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와 파워를 누렸다. 페이스북을 통해선 자신의 직접 쓴 글과 찍은 사진을 통해 세상과 자유롭게 소통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SNS를 한 것은 기업 철학과 무관하게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며 “메신저를 좋아하는데, 출장이 잦다 보니 시차가 안 맞아 트위터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이야기 할 때 웃어주면 제일 행복한데, 몇 번 웃기니 팔로어가 늘어나더라”면서 “지금은 준개그맨이 돼 있는데, 요새는 어떡하다 보니 좀 뜸해졌다. 시간이 없어 안 하는 건 말이 안되고 정신적 여유가 없어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SNS 이외에도 박 회장의 소탈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는 다양하다. 박 회장은 사내 젊은 사원들과도 ‘번개’를 통해 스스럼없이 저녁 자리를 갖는 편이다. 최근에는 SBS 연예프로그램 ‘짝’에 출연했지만 파트너를 찾는 데 실패한 자사 직원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평소 의전 없이 경영활동을 해 많은 에피소드도 낳고 있다. 지난해 말 박태준 전 총리의 빈소에 수행비서 없이 홀로 나타나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사내는 물론 세상 사람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벌이며 국내 기업인들에 대한 경직된 이미지를 깼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제가 회장이 언제 되리라는 건 생각을 안 해 봤습니다. 제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실무를 쭉 하면서 일을 하면서 전문 경영인처럼 일을 해 왔기 때문에 그룹을 대표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은 해 봤습니다.”박 회장이 기자 간담회에서 내놓은 답변처럼 그는 오너보다는 전문경영인에 가까운 인생을 걸어왔다. 박 회장은 “두산 사장 시절엔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다른 회사 CEO 자리를 제의 받은 적도 있다”고 말할 정도다.고 박두병 회장의 5남인 박용만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생활 동안 용돈이 넉넉지 않아 자취 생활을 하면서 직접 음식도 해먹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얼리어답터 기질은 이 때도 발휘됐다. 1980년대 초반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동생 박용만에게 소원이 있으면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한 것. 그러자 동생 박용만은 컴퓨터를 사달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컴퓨터라면 사무실 한 켠을 가득 채우는 ‘슈퍼 컴퓨터’를 떠올리던 때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이미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개인용컴퓨터(PC)가 유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박용만 회장은 아이패드3 등 새로운 디지털 기기가 나오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개봉기를 올리는 얼리어답터로 유명하다.한국에 돌아온 박 회장은 사회생활을 1977년 외환은행에서 시작했다. “남의 눈칫밥을 먹어봐야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는 두산가의 철학 때문이다. 1883년 두산건설에 사원으로 입사한 박 회장은 두산음료·두산식품·동양맥주·두산동아 등에서 다양한 실무경험을 쌓았다. 박 회장은 1995년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부사장)으로 임명되며 경영 전면에 나서며 그룹의 구조조과 M & A를 진두지휘 했다.박 회장의 들려주는 M & A의 목적은 영토 확장이 아니다. 그는 “기업 M & A의 기준은 성장 잠재력,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업종, 인수의 용이성 등 3가지”라며 “영토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사들임으로써 경영의 구조적인 스피드를 높이는 수단이 바로 M & A”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M & A 계획에 대해선 “지금도 (M & A 대상 기업) 리스트를 놓고 끊임없이 검토하고 있다”며 “단순한 지분 참여나 영토 확장을 위한 M & A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다른 회사 CEO 제의 받기도박용만호가 본격 출범했지만 두산그룹의 사업구조 자체가 급격히 변하진 않을 전망이다. 박용만 회장이 이미 그룹 실무 전반을 실질적으로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룹 체질 개선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두산그룹은 수입차 사업에서 손을 뗐다. KFC 등 남아있는 외식 사업도 털어낼 예정이다. 박 회장의 전문 분야인 해외 진출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 회장은 해외 최대 법인인 밥캣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다. 박 회장은 “유로존 문제나 유가 등 글로벌 경제가 불안하지 않다”며 “밥캣의 경우 7분기 째 흑자를 내고 있고 올해는 20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낼 것”이라고 자신했다.박 회장은 8년 전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던진 말이 있었다. “2015년엔 두산을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의 회사로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당시만 해도 두산은 매출 5조원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박 회장은 “5조원짜리 회사 사장이 말하니까 웃을지 모르겠다”며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어느새 매출 25조원의 글로벌 그룹 총수가 됐다. 박용만 회장이 이끄는 두산호가 기대되는 이유다.

2012.04.09 15:24

9분 소요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1781호 (2025.4.7~13)

이코노북 커버 이미지

1781호

Klout

Kl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