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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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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이슈

미국에서 수십 개 학교가 학생들이 크록스를 신고 넘어져 다치는 일이 많아지나 크록스 착용을 금지했다. 30일 포춘·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미국 12개 주(州) 이상에서 수십 개 학교가 학생들이 크록스를 신는 것을 금지했다.플로리다주 라벨 중학교는 복장 규정에 "항상 안전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 앞이 트인 신발, 침실 슬리퍼, 샤워용 슬리퍼는 금지된다. 모든 신발은 뒤꿈치에 끈이나 뒷부분이 있어야 한다"며 "크록스는 절대 안 된다"고 밝혔다. 조지아주의 레이크 시티 초등학교도 크록스를 금지하고 학생들에게 앞이 막힌 신발을 신도록 하는 복장 규정을 마련했다.사회관계망서비스(SNS) 틱톡에는 청소년들이 크록스를 신고 미끄러지거나 학교 복도에서 넘어지는 모습을 재현한 밈이 다수 올라왔다. 시장 추적 기관인 제인 할리 앤 어소시에이츠의 수석 연구 분석가인 제시카 라미레스는 최근 몇 년간 크록스의 인기가 젊은 층 사이에서 급증하면서 다른 신발에 비해 크록스 관련 사고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크록스는 Z세대와 알파 세대(2010년부터 현재까지 태어난 가장 어린 세대)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 증권사 파이퍼 샌들러가 미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크록스는 Z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신발 브랜드 10위 안에 항상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크록스는 올해 초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으며, 주가도 지난 12개월간 55% 상승했다.그러나 부모들과 의료 전문가들은 크록스의 인기에 우려하는 반응을 보인다. 크록스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과 활동량이 많은 초중등 학생에게 안전상의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정형외과 의사 메건 리히 박사는 허프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뒤꿈치 지지대가 더 단단하고 앞이 막힌 신발을 신었을 때보다 크록스를 신었을 때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더 자주 넘어진다"고 밝혔다. 한편 크록스 측은 블룸버그에 "금지 조치가 증가했다는 실질적인 데이터를 알지 못한다"라며 "학교에서 신발을 금지하는 것은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2024.10.30 08:30

2분 소요
회사에 어떤 옷 입고 가야 할까

산업 일반

출근 복장은 왜 중요한가 그리고 절대 입어서는 안 되는 옷 등은 무엇인지 살펴본다근래 들어 회사에 출근할 때 패션은 복잡한 문제가 됐다. 지난 30여 년 사이 ‘테크 캐주얼(tech casual)’이 부상했다. 애플의 고(故) 스티브 잡스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이 즐겨 착용했던 티셔츠·터틀넥·운동복 등이 업계에 광범위하게 캐주얼 복장 문화를 촉발했다는 의미다. 자신들도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뛰어난 두뇌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과시하려는 시도다.한 세대 전의 복장 규정은 지극히 단순했다. 대다수 직장에서 남자들은 정장과 타이를 착용했고 여자들은 바지나 스커트 정장 또는 조심스런 콤비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형화된 스타일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권과 함께 사라졌다.은행들이 캐주얼 복장 도입에 앞장섰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금요일에는 캐주얼 복장을 허용했다. 하지만 거기서 비즈니스 포멀(business formal, 비즈니스 상황에 요구되는 정장)과 스마트 캐주얼(smart casual, 와이셔츠에 진 바지 등 일정한 복장규정에 따르는 캐주얼 복장) 등 온갖 변형 스타일이 파생됐다. 디자인·출판·광고 같은 창조산업 종사자들의 경우엔 거의 완전한 자유가 허용됐다.글로벌 Q&A 네트워크 ‘쿼라’를 통해 직장인의 복장 예절에 관해 대표적인 조언들을 정리했다.- 출근 복장은 중요하다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 외모를 중시하지 않는다(It is only the shallow who do not judge by appearances).”동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사들은 당신의 복장으로 얼마나 일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판단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첫인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애틀에 있는 휼렛-패커드 엔터프라이스의 과학기술책임자 마크 뉴하우젠은 “혹여라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 자신의 기회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며 “적어도 반듯하게 차려 입을 만큼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회사의 복장규정을 알아보자무엇보다도 회사 인사 핸드북 확인이 지름길이다. 그 뒤 같은 부서 동료들의 옷차림을 살피며 회사 가이드라인이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지 확인한다.- 돈을 아끼지 말라인력채용 업체 마이클 페이지의 법률 분야 담당 상무 데이비드 포스다이크는 “캐주얼 차림보다 근무복을 입고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며 “그에 맞게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상적인 옷차림이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직장에선 “현재의 내 자리가 아니라 원하는 자리에 맞게 옷을 입으라”는 격언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관리자들은 복장·태도, 사회적 측면에서 자신들과 눈에 띄게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을 승진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그러나 이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회사 내 자신의 수준에서 스마트 드레서로 꼽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면바지와 셔츠 차림이 소속 부서의 관행인데 자신만 정장을 입는다면 상사에 잘 보이려 애쓰는 신뢰 못할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비즈니스 포멀이란?‘매드맨’(1960년대 미국 광고업계를 그린 드라마) 같은 TV 시리즈나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The Apartment)’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근무 복장이다. 남자는 정장과 넥타이, 여자는 정장 또는 공식 콤비다. 남녀 모두 튀지 않는 색상을 선택해야 한다.- 직장인 패션을 이해하라기업 전반에 걸쳐 표준으로 자리 잡은 직장인 패션을 살펴보면 남성은 넥타이 없이 정장을, 그리고 종종 자켓 대신 비즈니스 점퍼나 카디건을 입는다. 여성은 드레스·블라우스 또는 스웨터를 걸치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으로 개성을 뽐내기도 한다.- 비즈니스 캐주얼 드레스도 알아야남녀 모두 정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자는 셔츠에 스마트 팬츠나 면바지를 받쳐 입어도 된다. 여자는 짧은 소매나 민소매 상의를 입고, 길이가 무릎 몇㎝ 위까지 올라가는 스커트를 착용할 수 있다.더 나아가 창조산업의 직장에선 청바지도 허용되고(적절하게 재단돼야 하며 찢어지거나 헤진 것은 금물), 적당한 형태의 티셔츠도 괜찮다. 여성의 경우 7부 바지(cropped pants, 상의는 예외), 화려한 무늬,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간 스커트도 좋다. 그러나 창조업종이라도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들의 복장은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3가지 철칙항상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아라. 남자는 항상 양말을 신어야 한다. 남녀를 막론하고 핫팬츠는 금물이다.

2017.05.25 14:53

3분 소요
회사에 어떤 옷 입고 가야 할까

산업 일반

출근 복장은 왜 중요한가 그리고 절대 입어서는 안 되는 옷 등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근래 들어 회사에 출근할 때 패션은 복잡한 문제가 됐다. 지난 30여 년 사이 ‘테크 캐주얼(tech casual)’이 부상했다. 애플의 고(故) 스티브 잡스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이 즐겨 착용했던 티셔츠·터틀넥·운동복 등이 업계에 광범위하게 캐주얼 복장 문화를 촉발했다는 의미다. 자신들도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뛰어난 두뇌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과시하려는 시도다.한 세대 전의 복장 규정은 지극히 단순했다. 대다수 직장에서 남자들은 정장과 타이를 착용했고 여자들은 바지나 스커트 정장 또는 조심스런 콤비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형화된 스타일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권과 함께 사라졌다.은행들이 캐주얼 복장 도입에 앞장섰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금요일에는 캐주얼 복장을 허용했다. 하지만 거기서 비즈니스 포멀(business formal, 비즈니스 상황에 요구되는 정장)과 스마트 캐주얼(smart casual, 와이셔츠에 진 바지 등 일정한 복장규정에 따르는 캐주얼 복장) 등 온갖 변형 스타일이 파생됐다. 디자인·출판·광고 같은 창조산업 종사자들의 경우엔 거의 완전한 자유가 허용됐다.글로벌 Q&A 네트워크 ‘쿼라’를 통해 직장인의 복장 예절에 관해 대표적인 조언들을 정리했다. ━ 출근 복장은 중요하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 외모를 중시하지 않는다(It is only the shallow who do not judge by appearances).”동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사들은 당신의 복장으로 얼마나 일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판단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첫인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애틀에 있는 휼렛-패커드 엔터프라이스의 과학기술책임자 마크 뉴하우젠은 “혹여라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 자신의 기회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며 “적어도 반듯하게 차려 입을 만큼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 회사의 복장규정을 알아보자 무엇보다도 회사 인사 핸드북 확인이 지름길이다. 그 뒤 같은 부서 동료들의 옷차림을 살피며 회사 가이드라인이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지 확인한다. ━ 돈을 아끼지 말라 인력채용 업체 마이클 페이지의 법률 분야 담당 상무 데이비드 포스다이크는 “캐주얼 차림보다 근무복을 입고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며 “그에 맞게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인상적인 옷차림이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 직장에선 “현재의 내 자리가 아니라 원하는 자리에 맞게 옷을 입으라”는 격언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관리자들은 복장·태도, 사회적 측면에서 자신들과 눈에 띄게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을 승진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그러나 이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회사 내 자신의 수준에서 스마트 드레서로 꼽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면바지와 셔츠 차림이 소속 부서의 관행인데 자신만 정장을 입는다면 상사에 잘 보이려 애쓰는 신뢰 못할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 비즈니스 포멀이란? ‘매드맨’(1960년대 미국 광고업계를 그린 드라마) 같은 TV 시리즈나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The Apartment)’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근무 복장이다. 남자는 정장과 넥타이, 여자는 정장 또는 공식 콤비다. 남녀 모두 튀지 않는 색상을 선택해야 한다. ━ 직장인 패션을 이해하라 기업 전반에 걸쳐 표준으로 자리 잡은 직장인 패션을 살펴보면 남성은 넥타이 없이 정장을, 그리고 종종 자켓 대신 비즈니스 점퍼나 카디건을 입는다. 여성은 드레스·블라우스 또는 스웨터를 걸치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으로 개성을 뽐내기도 한다. ━ 비즈니스 캐주얼 드레스도 알아야 남녀 모두 정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자는 셔츠에 스마트 팬츠나 면바지를 받쳐 입어도 된다. 여자는 짧은 소매나 민소매 상의를 입고, 길이가 무릎 몇㎝ 위까지 올라가는 스커트를 착용할 수 있다.더 나아가 창조산업의 직장에선 청바지도 허용되고(적절하게 재단돼야 하며 찢어지거나 헤진 것은 금물), 적당한 형태의 티셔츠도 괜찮다. 여성의 경우 7부 바지(cropped pants, 상의는 예외), 화려한 무늬,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간 스커트도 좋다. 그러나 창조업종이라도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들의 복장은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 반드시 지켜야 할 3가지 철칙 항상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아라. 남자는 항상 양말을 신어야 한다. 남녀를 막론하고 핫팬츠는 금물이다.- 아이비타임즈 편집부

2017.05.08 12:13

3분 소요
사무실에서 여름 백배 즐기기

산업 일반

여름이 왔다. 그래도 직장인은 여전히 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 컴퓨터 화면에 배경으로 깐 해변 사진만 쳐다볼 수 있을 뿐이다. SNS에는 친구들의 휴양지, 여가활동, 구릿빛 피부 사진이 오른다. 다음 휴가를 꿈꿀 수도 있지만 실내에서 여름을 즐기는 법도 있다. 실제 여름을 즐기는 것과는 천양지차겠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는 데 도움이 될 비결 15가지를 소개한다. 1. 과일생수를 만들어 마시자.창밖에 강렬한 태양이 비치면 사무실에서 별나 보이지 않게 과일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핑계거리가 된다. 수영장 옆에서 마시는 칵테일이 아니라 여름철에 어울리고 직장에서 마셔도 안전한 음료를 말한다. 액체음료 증강제(비알코올성 농축액) 같은 풍미증진제만 있으면 즉석에서 만들어 마실 수 있다. 아니면 레시피를 찾아보고 집에서 만들어와 사무실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마셔라.2. 즐겨 듣는 음악 목록을 바꿔라.여름 인기 애창곡으로 새로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시점이다. 캘빈 해리스의 ‘Summer’ 같은 흘러간 노래도 좋고 다른 사람과 상관 없이 자신에게만 과거의 해변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도 좋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에서 지난 20년 동안 나온 ‘여름 음악’을 전부 올려도 좋다. 사무실 동료에게 음악을 추천 받으면서 모두를 참여시켜라. 그래도 무슨 곡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면 빌보드 추천곡으로 시작하라.3. 책상을 여름 분위기 나게 꾸며라.색상이 우리의 기분과 환경, 근로의욕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자리에 해변 풍광을 도입하면 어떨까? 해변 포스터를 벽에 붙이거나 책상용 모래놀이통을 갖다 놓거나 경제적·공간적 사정이 허락한다면 예쁜 어항으로 책상을 꾸미는 것도 괜찮다.4. 아이스크림 해피아워를 계획하라.회사가 여름철 금요일 조기 퇴근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금요일엔 1시간씩 해피아워를 실시해 술 대신 아이스크림 파티를 열자고 건의하라. 녹아 떨어져 지저분해지지 않는 아이스크림 샌드위치가 제격이다. 1시간 일하지 않는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 휴식은 생산성을 높인다. 그러니 노트북을 덮어두고 아이스크림 콘을 들자.5. 간편한 스포츠를 즐겨라.여름철 스포츠를 회사에 도입하라. 물론 사무실 안에서 프리스비를 던지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료와 주차장에 나가 10분 정도 프리스비를 던지고 받는 건 강력 추천한다. 사무실에 빈방이 있다면 잠시 콩주머니 던지기 놀이를 즐길 수 있다.요점은 이렇다. 여름철 휴가를 떠나는 친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여름철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사무실에서 흉내라도 내면 실내에 갇혀 있어도 마음만은 즐겁다.6. 옷장을 다시 정리하라.옷장에 든 옷만큼 계절의 변화를 잘 나타내는 건 없다. 여름철에 밝은 원피스나 반바지를 좋아한다면 옷장에 그런 옷을 넣어두고 어떤 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라. 물론 회사의 복장규정에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겨울처럼 옷을 입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7. 점심 메뉴를 바꿔라.여름철엔 바비큐가 제격이다. 따분한 샌드위치는 집에 두고 점심에 핫도그나 햄버거를 먹어보자. 동료들과 실내 바비큐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그릴에 불을 지피자는 게 아니라 각자가 번빵, 핫도그, 케첩 같은 재료를 가져와 함께 만들어 먹으면 된다.8. 매일 낮 밖에 나가 걸어라.잠시라도 신선한 공기를 쐬면 몸과 마음이 달라진다. 낮에 짬을 내 밖으로 나가라. 비타민D도 보충하면서 일의 능률도 높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윈-윈이라고 할까?9. 얼음과자를 사무실에 가져가라.사무실 냉장고를 얼음과자로 채워 당길 때마다 하나씩 즐기자. 동료들에게 권하면서 더 친해질 수도 있다. 시간이 난다면 하나를 들고 밖에 나가서 먹으면 더 좋다.10. 화분을 갖다 놓아라.사무실 책상에 작은 화분을 가져다 놓고 야외 분위기와 약간의 신선한 산소를 즐겨라. 밖에 나갈 수 없다고 해도 녹색 화초를 보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수 있다.11. 일정을 여름친화적으로 만들어라.가능하다면 1시간 일찍 출근해 조금 일찍 퇴근하라. 겨울철엔 아무리 일찍 퇴근해도 어둡겠지만 여름철엔 늦은 오후의 햇빛을 즐길 수 있다. 중요한 업무나 회의 일정을 주중에 일찍 잡으면 금요일 오후엔 마음 가볍게 일찍 퇴근할 수 있다.12. 점심시간을 잘 활용하라.사무실 밖에서 점심을 먹자. 도시락을 싸서 점심 시간을 절약하면 간단히 손발 관리를 받거나 인근 공원에서 30분 정도 독서를 즐길 수 있다. 그보다 꿈이 크고 시간이 더 있다면? 운동을 하라. 회사 부근을 크게 한바퀴 빨리 걷거나 근처 체육관에서 30분 수영 강습을 받아도 좋다. 마음만 먹으면 업무도 제시간에 하면서 낮에 여가 활동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13. 여름철 금요일에 만나는 친구를 만들어라.사실 금요일에 일하는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 좋아하는 식당에서 매주 금요일 점심을 함께하는 약속을 정하라. 아니면 적어도 세상이 조용한 오후 2시에 채팅할 상대를 찾아라.14. 출근 방식을 바꿔라.자가 운전을 하거나 기차를 타고 출근한다면 시간을 더 할애해 걷거나 자전거로 출근하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노선을 택하라. 수년 동안 매일 똑같은 노선을 이용하다가 가는 길만 조금 바꿔도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새로워진다.15. 조명을 밝게 하라.탁상용 램프를 바꾸든 ‘해피 라이트’를 구입하든 일자리를 밝게 하면 야외에 있는 기분이 어느 정도 든다. 특히 좁은 공간에 갇혀 햇빛이 그리울 때는 반드시 밝은 분위기가 필요하다. 창문이 보이지 않더라도 햇빛 효과를 내는 조명으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라.- KAITLYN RUSSELL NEWSWEEK 기자, 번역 이원기

2015.07.13 12:06

4분 소요
NB reporter at large - 키부츠 시대의 종말

산업 일반

이스라엘 정신의 바탕을 이뤘던 공동체가 퇴조하고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부상한다압샬롬 빌란의 이력을 보면 옛날 이스라엘 엘리트의 전형이다(once exemplified the Israeli elite). 이스라엘 생활공동체 키부츠에서 태어나 군에서는 최고 정예 대(對)테러 부대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 진전을 위해서도 힘썼다. 따라서 1999년 좌파 성향 메레츠 당 소속으로 총선에 첫 출마했을 때 무난히 당선됐으며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해 메레츠 소속 의원 10명 중 3명이 키상징적인 생활공동체 키부츠 구성원들이 이스라엘 정치의 밑바탕을 이루던 시절이 끝나간다. 부츠 출신이었다. 키부츠는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시온주의 운동의 밑바탕을 이루는 상징적인 공동체 마을이다. 1999년 전체 의원 120명 중 키부츠 출신이 8명에 달했다. 인구 전체 비중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61세의 빌란은 카우보이 영화 등장인물처럼 거칠고 억센 외모를 가졌다(has the rugged good looks). 다음 주 새 의회를 선출하는 이스라엘 총선에 다시 입후보한다(will be on the ballot). 하지만 이번에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이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나눠 갖는 예루살렘 의회 건물에 키부츠 출신은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희망은 버리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그가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스라엘이 많이 변했다.”1950년대와 60년대의 이스라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변화는 거의 불가해 한 일이다. 수십 년 동안 키부츠 출신들이 군부와 정계 등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을 좌지우지했다. 그때도 전체 인구 중 그들의 비율은 결코 6%를 넘지 않았었다.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와 전쟁영웅 모셰다얀으로부터 이스라엘 대표 작가 아모스오즈와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위인(towering figures) 중 다수가 키부츠 태생이거나 성인이 되어 그 공동체에 합류했다.그러나 그들의 이스라엘 정계 퇴장(their disappearance from the political scene)은 지금까지 그 나라에서 한동안 전개돼온 더 광범위한 추세의 정점을 이룬다. 기존 엘리트로부터 새로운 엘리트로의 권력이동이다. 1월 말 마지막 키부츠니크(kibbutzniks, 키부츠 출신)가 의회를 떠날 때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 출신의 초선 또는 재선 의원(either as newly minted lawmakers or returning ones) 최대 16명이 의회건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은 1967년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공동체 건설에 착수했다.그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의 의원이 정착촌 주민을 대변하게 되는 셈이다(That’s a larger representation for the settlers). “키부츠 운동의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더 민족주의적이고 종교적인 또 다른 그룹이 부상한다.” 바르-일란 대학의 BESA 전략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정치학자 에프라임 인바르의 말이다. “그들이 새로운 귀족계급이다(are the new aristocracy).”이념적으로 두 그룹은 더 없이 다르다(couldn’t be more different). 키부츠니크 대다수는 대단히 세속적이며 정치적 온건파다. 대부분 노동당과 메레츠당 같은 중도 및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 이들 정당은 팔레스타인 측과 평화협상을 지지했다. 반면 정착민들은 정치지형의 오른쪽에 치우친 정당들에 표를 주는 경향을 띤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리쿠드당을 비롯한 의회 내 종교 정파들이다. 여론조사가 정확하고 네타냐후가 차기 정부를 구성한다면 집권연합의 최대 25%가 정착민으로 구성될 가능성도 있다.이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칠 소지가 있다. 이스라엘은 올해 건국 65주년을 맞는다. 국가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핵심 문제 중 다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요르단강 서안의 지위다. 팔레스타인 측은 자신들이 앞으로 수립하는 국가의 일부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요즘 이스라엘 정계에선 합병을 공개 거론하는 주류 인사가 갈수록 늘어난다. 정교 분리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시급하다. 이를 둘러싸고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종종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요즘엔 이스라엘의 기본이념으로서 민주주의의 위상조차(Even the preeminence of democracy as the country’s guiding principle) 논쟁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적어도 이스라엘이 향후 10년 사이 이 같은 문제 중 일부를 결정짓기 시작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 기간은 정착민의 시대가 되리라고 내다보는 분석가가 갈수록 늘어난다. 정착민들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동질적인 그룹은 아니다. 요르단강 서안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인 중 다수는 집을 싸게 얻기 위해서였지 반드시 우파 이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지도자들은 모든 이슈에 관해 대단히 뚜렷한 정견을 보이는 편이다(tend to have sharply delineated ideas on all the issues). 키부츠니크는 거의 또는 전혀 발언권을 얻지 못할 듯하다.그렇다면 키부츠니크들이 어떻게 영향력을 잃게 됐을까? 수십 년 전까지 키부츠는 그 젊은 유대국가의 가장 흥미롭고 화제가 됐던 실험 중 하나였다. 이 농촌 공동체에서 통상 200~300명이 공동작업을 하고 소득을 공유하며 준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생활해 왔다. 구성원들은 (그 운동의 표현을 빌리자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것을 얻었다(give what they could and get what they needed).” 이민자와 난민들의 나라에서 키부츠니크는 모델 집단(the status group)이었다. 오픈 칼라 셔츠, 카키색 바지, 성서에 등장하는 트윈 스트랩 샌들 차림을 한 이들은 금방 눈에 띄었다. “우리는 자칭 시온주의 사회주의자였다(called ourselves Zionist socialists)”고 아하론 야들린이 말했다. 1946년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모래밭 위에 키부츠 하체림을 세운 인물이다. “모두가 우리처럼 되고 싶어했다.”86세의 야들린은 그 시대 키부츠 리더십의 표본이다. 국가수립 전 팔마크(Palmach)로 알려진 최정예 군사조직의 전투원이었다. 그 뒤 19년 동안 의원생활을 했다(1949년 이스라엘의 첫 민선 의회에서 키부츠니크는 모두 26명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 이스라엘 교육장관을 역임했다. 최근 야들린의 안내를 받아 키부츠를 둘러봤다. 그는 1946년 하룻밤 새 지어 올린 최초의 막사들을 가리켰다. 예정된 팔레스타인 분할 때 네게브를 유대인들에게 배정하도록 유엔 현장조사단을 설득하기 위한 벼락공사의 일환이었다(part of a construction blitz designed to help persuade U.N. fact finders).벽면에 책이 가득한 그의 집은 작고 소박하다. 그는 매달 8000달러가량의 의원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이스라엘 기준으로 상당한 액수다. 그 돈이 고스란히 키부츠로 들어간다. 그리고 훨씬 적은 봉급이 그를 비롯한 다른 구성원들에게 똑같이 분배된다.야들린은 키부츠의 위상이 실추된 주된 이유가 나라의 이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산공유(shared wealth)와 사회평등을 강조하던 이스라엘이 1970년대 언젠가부터 서방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됐다. 1980년대 경제위기로 키부츠 다수가 파산위기에 몰렸을 때 구성원들조차 공동체 시스템의 자생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레이건 경제학과 대처리즘의 시대였다”고 다니 자미르가 말했다. 키부츠 운동을 연구하는 하이파 대학 사회학자다. “따라서 이들 대단히 우세한 자유시장 이론이 키부츠까지 파고 들었다.”몇 년 안돼 대다수 키부츠는 집산주의의 핵심 강령을 포기했다(had jettisoned the main tenets of collectivism). 대신 더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택했다(하지만 하체림은 변함없이 원래 모델을 고수한다). 공동식당, 의도적으로 격식을 없앤 복장규정(the deliberately unceremonious dress code) 등 키부츠의 상징들도 사라져 갔다(went out of fashion). 2007년에는 의회에서 샌들 착용도 금지됐다. 더 큰 추세전환을 상징하는 작은 변화 중 하나였다. 벤구리온이 알았다면 분명 격노했을 조치였다.그러나 그건 변화의 일부에 불과했다. 키부츠니크 쇠퇴의 또 다른 원인은 90년대 말에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평화진영과 동격으로 간주돼 왔다. 1990년대 팔레스타인 측과 오슬로 협정(the Oslo accords,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와 이스라엘의 평화 공존을 모색)을 체결하고 계속해 후속 협약들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대규모 폭력사태로 합의가 무산되자 협정의 산파역을 맡았던 평화진영과 노동당의 신뢰가 크게 실추됐다. 노동당은 한때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정당이다. 그리고 키부츠 운동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주로 노동당 편에 섰다. 하지만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19년 사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건 단 한번뿐이었다. “키부츠는 두 가지, 평등주의와 평화 이슈를 상징했다”고 정치학자 인바르가 말했다. “이스라엘인들은 두 문제 모두에 흥미를 잃었다.”

2013.01.2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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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한 소년의 슬픈 최후

산업 일반

15세의 로렌스 킹은 신장이 155㎝에 불과했지만 어디서나 금방 눈에 띄었다. 캘리포니아주 옥스나드의 E O 그린 중학교에 다니는 그는 지난 1월부터 여성용 액세서리를 온몸에 치렁치렁 매달고 등교했다. 어떤 날은 자신의 곱슬머리에 젤을 발라 가수 프린스처럼 크게 부풀리기도 했다. 때로는 손톱에 야한 핑크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볼에다 흰색이나 반짝이 파운데이션을 바르기도 했다. “나보다 화장을 더 잘했네”라고 같은 반 여자 친구인 마리사 모레노(13)가 말했다. 그는 대형 할인점 타깃에서 구입한 하이힐을 신고 학교 미식축구팀 운동복 상의를 입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웠다. 그 옷을 입고 몸을 뒤뚱거리며 운동선수들을 뒤쫓아 다니면서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러나 2월 12일 아침, 래리(로렌스의 별명)는 모든 액세서리와 하이힐을 벗어놓고 집을 나섰다. 여느 남학생들과 다름없는 테니스화, 헐렁한 바지, 그리고 칼라가 있는 셔츠 위에 넉넉한 스웨터 차림으로 등교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듯했다. 전날 밤 잠을 제대로 못 잤고, 이날 아침에도 먹은 것을 토했다고 한 교직원에게 말했다. 체중변화에 극도로 민감해 토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래리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뭔가에 쫓기는 듯 계속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한 학생에게 목격됐다. 1교시 영어수업을 맡고 있는 돈 볼드린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방을 챙겨 컴퓨터 랩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리포트를 작성하게 할 생각이었다. 래리는 교실 가운데쯤에 앉았다. 바로 뒷자리엔 브랜든 매키너니(14)가 자리 잡고 있었다. 브랜든은 리포트 작업을 이미 끝냈다고 선생님에게 보고했다. 그러곤 역사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읽는 시늉을 했다. “계속 래리를 쳐다봤다”고 그날 아침 같은 교실에 있던 한 학생이 말했다. “책 한 번 보고 래리를 쳐다보고 다시 책을 들여다보다가 래리를 보곤 했다.” 오전 8시 30분, 수업 시작 후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브랜든이 슬며시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도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학교 안으로 어떻게 들여왔는지 모를 권총을 꺼내 래리의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교실 저편에서 다른 학생의 리포트를 살펴보던 볼드린 교사는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리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브랜든, 도대체 무슨 짓이야!” 브랜든은 다시 한 번 래리를 향해 총알을 발사하고 권총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조용히 교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7분도 안 돼 학교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래리는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이틀 뒤 뇌손상으로 숨졌다. 이 사건은 10년 전 매튜 셰파드의 피살(동성애자 대학생이던 그는 남자 두 명에게 구타당한 뒤 숨졌다) 이후 게이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가장 유명한 범죄가 됐다. 그러나 모든 관심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래리가 숨진 이유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그리 간단치 않다.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최근 동성 간 결혼을 인정했다. 그리고 ‘가십 걸’과 ‘어글리 베티’ 같은 인기 TV 프로그램에 게이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요즘은 별다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따라서 래리 같은 청소년들이 게이의 공개적인 노출에 너무 익숙해져 ‘커밍아웃’하는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한 조사에서는 청소년들이 자신이 게이라고 판단하는 평균연령이 13.4세로 내려갔다. 부모는 보통 그 1년 뒤에나 알게 된다. 게이의 이 같은 노출증가 추세가 어쩌면 래리의 죽음을 부른 주된 요인일지도 모른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고는 해도 중학교에서 게이의 공개적인 노출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면서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교사와 부모들은 종종 그렇게 어린 청소년들의 성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것을 거북해 한다. 학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이다. 어떻게 하면 부적절하고 때로는 피해를 주는 행위를 제지하면서 합법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을 보호할 수 있을까? 래리 킹은 확실히 많은 문제를 내포한 시범 케이스였다. 그는 자신의 성적 경향을 자랑 삼아 떠벌리고 마치 무기처럼 휘둘렀다. 그것은 종종 자신을 보호하는 첫째 방어막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관용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선을 긋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E O 그린 중학교의 사태가 보여주듯 그 균형점을 찾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래리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생모는 마약중독자였고 아버지가 누군 줄도 몰랐다. 두 살 때 그레그와 돈 킹 부부에게 입양됐는데 당시 규칙적인 식사를 못해 영양결핍이 있었다. 래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언어장애로 이해력이 떨어졌고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해 1학년 땐 유급을 했다. 자연과 뜨개질을 좋아하던 온순한 아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마트에 데려가기만 하면 항상 물건을 훔쳤다”고 그레그가 말했다. “방 청소도 하지 않고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땐 드라이버로 벽에 구멍을 뚫곤 했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약을 처방 받아 복용했으며 반응성애착장애 진단을 받았다고 그레그가 밝혔다. 어린이가 보호자나 부모와 정상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희귀 질환이다. 래리가 해서웨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이 그를 두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전교생이 700명인 학교에서 래리를 모르면 간첩이었다”고 부교감이었던 새라 란지바르가 말했다. “약간 계집애처럼 행동했지만 개성이 뚜렷했다.” 마침내 그와 가장 친한 에이버리 래스키가 어느 날 수업이 끝날 무렵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래리, 너 게이니?’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응, 왜?’라고 대답했어요.” 이때 그의 나이 열 살이었다. 에이버리는 “그래도 난 상관 없어”라고 말했지만 래리는 딴 친구들에게도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들의 반응은 에이버리와 사뭇 달랐다. 그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쉬는 시간엔 그를 ‘왕따’시켰다. 할로윈 데이엔 누군가 그의 집에 발연탄(發煙彈)을 던져 잭 러셀 테리어종 애완견이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6학년 때는 한 여학생이 래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로부터 그에 관한 악성 루머를 받아 적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책은 래리가 어떻게 동성애자가 됐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가 괴기스러운 차림과 여장을 한다는 거짓 주장을 했다. 그리고 위협으로 끝을 맺었다. 그 책을 본 한 부모의 기억에 따르면 “나는 래리 킹이 싫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교장이 아내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고 그레그가 말했다.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한 교장이 뭔가 래리를 보호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는 래리를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시키면서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새 출발하길 바랐다. E O 그린은 핑크색과 노란색 주택들 속에 자리 잡은 하얀색 콘크리트 슬래브 건물이다. 오후엔 SUV 차량들이 쏟아져 나와 힙합 음악을 쿵쾅거리며 거리를 쏘다닌다. 학생들이 모두 귀가하면 두 개의 푸른 색 문이 잠기고 어두워진 뒤에는 갱단의 폭력이 두려워 교사들도 학교에 접근하지 못한다. 정문 앞엔 푸른 색의 낡은 안내판이 손님을 맞는다. 1994년에 캘리포니아주 모범교육기관이었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다른 교육청 소속이다. 래리는 E O 그린에 입학한 뒤 7학년(중학교 1학년) 때는 마음 편히 학교 생활을 했다. 그가 어울렸던 여학생들은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도 아니었다. 몇몇 친구에 따르면 체육시간이면 탈의실에서 남학생 여럿이 그를 밀쳐대곤 했다. 여장을 하기 시작한 뒤론 놀림이 더욱 심해졌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남학생들이 그의 하이힐 한 짝을 집어 들고 미식축구공처럼 서로 패스하며 그를 곯렸다. “아무나 그에게 다가가서 이유 없이 웃어대곤 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고 모레노가 말했다. 어느 날 과학시간엔 래리가 ‘Somewhere Over the Rainbow’(Rainbow는 동성애를 상징) 노래를 흥얼대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게이라고 놀려댔다. “래리는 ‘상관없어’ 라고 내게 말했다”고 같은 반 친구였던 바네사 카스틸로가 떠올렸다.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 거야. 그때는 내가 유명해져 있을 테니까.” 래리의 가정생활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12세 때 면도칼로 남의 트랙터에 흠집을 내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에 따르면 정기적인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다. 한 심리치료사는 래리가 자폐증일지 모른다고 진단했다. 14세 때 래리는 아빠에게 자신이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고 그레그가 말했다. “우리가 아이를 이해해 주면 몇몇 문제는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는 래리가 단지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것 같으며 게이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레그에게 귀띔해 줬다. 래리는 선생님들에게 아빠가 자기를 때린다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레그는 결코 아이에게 손을 댄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사법당국은 2007년 11월 래리를 부모와 격리해 옥스나드에서 8㎞ 떨어진 카마릴로의 그룹 홈 겸 요양 센터인 카사 퍼시피카에 맡겼다. 래리는 스페인말로 ‘평화로운 집’이라는 뜻의 카사 퍼시피카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여러 채의 통나무집, 농구장, 수영장을 갖춘 9만3000㎡의 시설은 대형 캠프장 같았다. 45개의 침상을 갖추고 임시 거처가 필요한 불우 청소년들을 수용했다. 운전기사가 매일 래리를 학교에 태워다 줬으며 몇 주간은 인근 벤추라로 가서 게이 청소년 그룹 모임에 참석했다.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말했다”고 그 센터의 비키 머피 사무국장이 말했다. 성탄절 때 센터에서 그에게 75달러짜리 타깃(대형 할인점) 상품권을 선물로 줬다. 그는 그걸로 갈색 하이힐을 구입했다. 카사 퍼시피카에서 몇 달을 지낸 뒤 1월이 됐을 때 래리는 여장을 하기로 결심했다. 액세서리로 온몸을 치장한 채 등교했으며 이미 튀는 개성 표현의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한 여학생의 면전에서 유방 확대수술을 했다고 면박을 주는가 하면 다른 여학생이 그의 구두를 보고 싫은 소리를 하자 “나는 네 목걸이가 마음에 안 들어”라고 쏘아붙였다. 래리는 카사 퍼시피카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성전환 수술을 받게 해 달라고 졸랐다. 한 교사에겐 레티시아라고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의 절반은 흑인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 교사는 “래리, 내가 너를 레티시아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못을 박았다. 그는 군말 없이 물러섰다. E O 그린의 교직원들은 래리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골머리를 앓았다. 어떻게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기표현의 권리를 보장하느냐는 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캘리포니아주 검찰청에 따르면 법적으로는 래리의 여장을 막을 수 없었다. 주의 증오범죄법에서 성차별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래리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이용했다. 점심 시간에 인기 있는 남학생의 테이블로 다가가 날카로운 고음으로 “여기 앉아도 되니?”라고 묻곤 했다. 종종 놀림을 받던 탈의실에서는 남학생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몸매 죽인다”고 말하는 식으로 앙갚음을 했다고 한 학생의 어머니가 증언했다. 래리는 결국 다른 탈의실을 쓰도록 격리됐지만 학교 당국은 그가 다른 남학생들과 어느 정도까지 마찰을 빚었는지는 모르는 듯하다. 한 교사는 그 격리조치가 “예방”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설명했다. 한 학생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래리가 호소했기 때문이다. 다른 수업의 교사들은 래리가 그렇게 다른 학생들의 관심을 끌도록 놔둬야 하는지 당혹스러워 했다. “모든 교사가 수업 진행이 어렵다며 불평했다”고 한 교사가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복장 규정이 큰 문제다. 그것을 두고 매일 티격태격한다.” 일부 교사는 래리가 복장규정을 명백히 위반했다고 생각했다.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다고 간주되는 의류의 착용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래리가 처음 립스틱과 아이라이너를 바르고 등교한 날은 한 교사가 모두 닦아내라고 명령하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나 다음날은 화장을 더 짙게 바르고 등교했다. 래리는 화장을 하든 말든 그것은 자기의 권리라고 그 교사에게 말하면서 엡스타인 선생님이 그렇게 알려줬다고 덧붙였다. 조이 엡스타인은 그 학교의 교감 세 명 중 한 명이었으며 래리가 갈수록 거침없이 행동하면서 일부 교사가 엡스타인에게 느끼는 혼란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갈색 머리에 이중초점 안경을 착용한 차분한 성격의 엡스타인은 동료들에게 동성애자임을 공공연히 밝혔다. 학생들에게는 대체로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파트너 사진을 몇몇 학생이 목격했다. 7학년을 담당했지만 당시 8학년이던 래리와 각별한 관계였다. 래리는 그녀의 방에 자주 들러 상담하거나 잡담을 나누곤 했다. 그녀는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밝히려 하지 않았다. “내가 특별히 래리 문제에 나설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엡스타인이 말했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 몇몇 교사는 그녀가 일부의 표현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래리의 튀는 행동을 부추겼다고 본다. 한 교사는 엡스타인이 게이임을 공개하고 자신의 여자친구 이야기를 늘어놓아(아마도 남편 이야기였다면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 문제를 교정에 끌어들였다고 비난했다. 엡스타인은 브랜든 재판의 증인으로 소환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래리에게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밝히지 않지만 그것이 핵심 쟁점 중 하나가 될 게 확실하다. 브랜든의 국선 변호인인 윌리엄 퀘스트는 변호전략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래리와 브랜든 간의 긴장이 고조될 때 학교 당국이 개입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퀘스트는 엡스타인을 가리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레즈비언 교감”이라고 불렀다. 래리의 아버지도 엡스타인을 비난한다. 그도 변호사를 선임했으며 고의성 여부를 따지는 불법치사 소송(wrongful-death lawsuit)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중학교 교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혼동하기 시작했다”고 그레그 킹은 말했다.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앞세웠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극에서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하고 그 책임을 물을 사람을 찾으려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엡스타인은 이번 사건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하지 않으며 그녀가 재판정에 나가 증언할 때까지는 래리의 죽음을 부른 사건에서 그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엡스타인이 래리에게 무슨 말을 했든 커밍아웃 과정이 종종 그렇듯 래리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트윈스(보통 사춘기 직전 8~12세 어린이)가 게이라고 말할 때는 실제로 섹스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연구원 캐이틀린 라이언에 따르면 10세가 되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의식할 수 있지만 그런 감정이 주된 동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모호하고 생소하다(실제로 래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와도 키스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 교사에게 말했다). 이런 아이들은 사실상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 “젖먹이 땐 배가 고파도 그것을 말로 표현할 줄 몰라서 우는 것”이라고 8학년 때 커밍아웃한 앨런 아체베도(19세, 샌디에이고 거주)가 말했다. “사람들이 어린 나이에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게이’라는 단어의 존재다. 그 단어가 자신들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대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트윈스는 속마음을 친구들에게 먼저 털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더 잘 받아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령대의 아이들은 종종 지극히 사적인 정보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며 중학교 교직원들도 자신의 성적 경향에 의문을 갖는 청소년들에 대한 대응 방법을 거의 교육받지 못했다. 동성애자인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연결을 후원해 게이 학생들을 포용하도록 장려하는 고등학교는 3600개교가 넘지만 그런 장치를 갖춘 중학교는 110개교에 불과하다. 동성애자 당사자나 교직원이 관심과 반발에 대한 준비를 갖추기 전에 학교 전체에 알려지는 경우도 많다. “내 이름이 순식간에 웃음거리가 됐다”고 8학년 때 커밍아웃한 그레이디 키프(19세, 코네티컷 주 브랜퍼드 거주)가 말했다. “상담 지도교사는 내가 상처를 받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하지 말아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E O 그린의 교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실험을 하는 래리를 도우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큰 소리로 떠벌리고 싶어 했다. 한 교사가 래리에게 복도에서 남학생들한테 짓궂게 구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애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요.” 그러나 브랜든 매키너니는 달랐다. 래리는 정말로 브랜든을 좋아했다. 래리가 종종 브랜든에게 다가가 그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고 한 학생은 기억했다. 래리는 브랜든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해 한번은 그의 팔에 언제 긁힌 상처가 났는지도 알았다. 심지어 둘이 같이 있을 때 자신이 실수로 상처를 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래리는 가까운 친구 한 명에게 자신과 브랜든이 한동안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말했다. 브랜든이 자신에게 더 잘해 주지 않으면 자신들의 관계를 학교 전체에 소문 내겠다고 위협했다고도 했다. 브랜든의 변호인인 퀘스트는 래리와 브랜든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래리의 교사 중 한 명도 래리가 아마 관심을 받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래리와 마찬가지로 브랜든도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 부모인 빌 매키너니와 켄드라는 불화가 극심했다. 법원에 기록된 켄드라의 주장에 따르면 1993년 어느 날 저녁 빌이 만취상태로 귀가해 그녀에게 45구경 권총을 겨눠 팔에 총상을 입혔다고 한다. 두 사람은 브랜든이 6세 때인 2000년 파경을 맞았다. 9월의 어느 날 아침 켄드라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 한 명이 복용하는 ADHD 약을 훔쳐갔다며 남편을 몰아세운 뒤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법원에 접수된 켄드라의 진술서에 따르면 빌은 “나의 머리채를 붙잡고 내가 거의 의식을 잃을 때까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빌은 배우자 상해죄를 자인해 10일 구류형을 받았다. 2001년 12월에는 빌이 켄드라를 상대로 접근 금지명령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있던 그녀가 집을 ‘마약 소굴’로 만들었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아주 멀쩡했다”고 훗날 한 지역 신문에 실린 메탐페타민(일명 히로뽕) 중독 관련 기사에서 켄드라가 설명했다. 그녀는 2004년 중독자 재활 센터로 보내졌고 브랜든은 아버지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몇 년 동안을 전쟁 속에서 보낸 셈이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브랜든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8학년에 올라가면서 잠재됐던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아버지의 직장이 96㎞나 떨어진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일단의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려 해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좋았지만 학교 공부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로지 히틀러에만 관심을 보였다. 뉴렘버그 재판(나치 전범재판을 말함)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며 히틀러의 부하들 이름을 모두 알아맞혔다.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아느냐고 물으면 “히스토리 채널도 안 보느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그의 아버지는 브랜든이 제 2차 세계대전에 흥미를 보였지만 엉뚱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1학기 말 그의 성적평균이 3.3에서 1.9로 떨어지면서 공부를 하지 않고 수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영어 우수반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볼드린 교사의 영어반으로 옮겨 래리를 만나게 된다. 래리의 성적도 떨어지고 있었다. 11월 1.71이었던 평균성적이 2월에는 1.0으로 떨어졌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관심을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성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뺨 쳤다”고 래리를 잘 알았던 한 교사가 말했다. “모두 그가 다음엔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 했다.” 여학생들은 그의 모습을 카메라폰에 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그를 화제로 올렸다. “우리 반에선 래리가 화젯거리에 오르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그를 가르친 적이 없는 한 문과 교사가 말했다. 래리는 플레이보이지의 버니걸 목걸이를 착용하다가 한 교사로부터 여성에 대한 모욕이라는 꾸지람을 들은 뒤 벗었다. 그러나 타깃에서 구입한 갈색 하이힐은 계속 뒤뚱거리며 신고 다녔다. 래리의 차림새를 둘러싼 소동이 계속되자 학교당국이 마침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1월 29일 학생의 권리라는 제목의 e-메일이 모든 교사에게 전달됐다. 8학년 학생 주임 수 파슨스가 보낸 것이었다. “교내에 메이크업으로 자신의 성적 경향을 표현하려는 학생이 있습니다.” 메일은 래리를 직접 지목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권리입니다. 재미있어 하는 학생도 있는 반면 못마땅해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것은 그의 권리입니다. 교양인다운 자세로 그를 야유하지 않도록 학생들에게 일러주시길 당부합니다. 학생들이 그를 억지로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그에게 설 자리를 줘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밖에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저나 엡스타인 교감에게 연락 바랍니다.” 제리 대넌버그 교육감은 래리 문제로 교육청에 접수된 민원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러 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최소 두 명의 교사가 그 문제와 관련해 공식적인 항의를 시도했다. 첫 번째는 래리에게 얼굴 화장을 지우라고 명령했던 교사다. 그 교사가 맡은 반의 남학생 여럿이 찾아와 래리가 복도에서 자신들을 곯리는 탓에(“네가 나를 원하는 걸 다 알아”) 친구들로부터 게이라고 놀림 받는다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그 교사가 몇몇 동료 교사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교감실을 찾아가 조사요청서를 제출하려 하자 엡스타인이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래리 문제인데요”라고 그 교사가 말했다. 그러자 엡스타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엡스타인은 그 교사가 자신을 찾아온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며칠 뒤에도 또 다른 교사가 조엘 로브스테트 교장을 찾아갔다고 주장한다. 그 교사는 래리가 걱정이 된다며 위험을 자초하는 것 같다고 교장에게 보고했다. 8㎝ 높이의 하이힐을 신고 발을 삐끗해 부상을 당할까 봐 걱정스럽다는 얘기였다. 교장은 어디라고 밝히진 못하지만 상부로부터 래리의 성적 표현에 간섭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교사에게 답변했다(교장은 뉴스위크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특이한 학생 민원도 있었다. 래리의 동생 로키(12)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1월 래리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짙은 핑크색 부츠를 신고 등교한 날부터 친구들이 그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로키는 엡스타인을 포함해 여러 명의 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엡스타인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래리가 계집애 옷차림을 못하게 해 주세요. 래리가 게이니까 동생인 나도 분명 게이일 거라고 친구들이 숙덕거려요.’”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수가 래리의 입장을 지지하려 했지만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블루칼라와 이민자가 많이 사는 옥스나드엔 변변한 게이 공동체 하나 없으며 대체로 동성애 문제는 거의 공론화되지 않는다. 최소한 래리가 피살되기 전까지의 상황은 그랬다. 그의 영어 교사인 볼드린은 정성을 다해 래리를 보호하려 애썼다. 래리가 새 집인 카사 퍼시피카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그에게 선물을 하나 줬다. 자신의 딸이 입던 녹색 이브닝 드레스였다. 래리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그 옷을 입어 보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몇몇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졸업식 때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밸런타인 데이 사건도 있었다. 총격사건 며칠 전 래리가 한 무리의 여학생들과 운동장에서 벌이는 게임 이야기로 학교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자신이 찍어둔 남학생을 찾아가 밸런타인 데이 파트너가 돼 달라고 요청하는 게임이었다. 여러 명의 여학생이 좋아하는 남학생의 이름을 댄 뒤 파트너를 찾아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래리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브랜든을 거명했다. 브랜든은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래리는 곧장 경기가 진행 중인 농구코트 안으로 들어가 브랜든에게 밸런타인 데이 파트너가 돼 달라고 요청했다. 옆에 있던 브랜든의 친구들이 그와 래리가 함께 ‘게이 베이비’를 낳을 것이라는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브랜든은 복도에서 래리의 한 여자친구 곁을 지나쳤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래리를 보지 못할 테니 미리 작별인사를 하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 친구는 래리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냥 농담이려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총격사건 전날인 2월 11일 래리와 브랜든 간에 또 다른 다툼이 있었다는 설도 많다. 둘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실제로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고 여러 명의 학생과 교사가 증언했다. 다음날 아침 카사 퍼시피카의 한 상담교사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래리는 막연하게 “이젠 지겨워요”라고 대꾸했다. 그가 학교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눈에 띄게 평범해진 그의 외모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화장품과 헤어 젤이 떨어졌고(사실이 아니다) 발목에 물집이 생겼다고 대답했다(사실이다. 최근 부츠를 새로 샀다). 래리는 볼드린 교사와 나란히 컴퓨터 랩으로 걸어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 분 뒤 한 상담교사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호출했다. 성적이 너무 나빠 유급될 위험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래리는 그 뒤 다시 랩으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리포트에 자신의 이름을 레티시아 킹이라고 적었다. 총성이 학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문을 부셔져라 닫는 소리 같았다고 누군가 말했다. 3월 7일 학교에서 래리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엡스타인과 학생들이 연단에 올라 래리에 관한 좋은 추억을 담은 카드를 읽었다. “그는 다정하고, 독특하고, 용감했다.” 악대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했다. 20여 마리의 비둘기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에이버리가 시 한 편을 낭독했다. 친구는 정원에 뿌린 씨앗처럼 싹을 틔우던 중 변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앞줄에 앉은 래리의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방청석 뒤쪽에서 한 8학년생이 브랜든의 친구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게이스럽다.” 이 시점에서 제기되는 명백한 의문은 래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물론”이라고 대넌버그가 말했다. “왜 총기가 청소년들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는가? 왜 충분한 예산지원으로 학교에 사회복지사를 배치해 학생들이 언제든 이용하도록 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사회의 문제다.” 하지만 많은 교사와 부모들은 그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문제는 래리가 게이였느냐 아니었느냐가 아니라(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아들이 게이였다는 말을 믿지 못한다) 그가 도를 넘는 행동을 하도록 허용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래리의 사망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탓하는 게 아니라(어떤 식으로든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다) 그의 살인자에게 동정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반응이다. “브랜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우리 탓”이라고 한 교사가 말했다. “폭력이 반대방향으로 행사된다는 것을 몰랐다. 래리가 주목 받길 좋아했기 때문에 도를 넘는 행동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레그 킹은 브랜든에 대한 동정심은 없지만 자기 아들이 그를 성적으로 괴롭혔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는 동성애자 사회가 자신들의 더 큰 명분을 강화할 목적으로 아들의 피살을 이용했다는 점을 불쾌하게 여긴다. “동성애자 권익 운동가들은 내 아들의 죽음이 갖는 선정성 때문에 그것을 동성애자 권익 문제의 쟁점으로 만들려 한다”고 킹은 말했다. “그런 점이 못마땅했다. 내가 게이에게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게이 동료와 친구들이 많다.” 올여름 엡스타인이 한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분노가 더욱 커졌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레그가 말했다. 래리가 숨진 뒤 그녀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됐기 때문에 교육청이 그녀를 전근시킨 게 아닌가 생각하는 교사가 많다. 대넌버그 교육감은 새 교장 자리에 그녀가 가장 적임자였다고 말한다. 학교 측도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만 학교 측 변호사는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브랜든의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크다. 브랜든은 1급살인과 증오범죄로 기소됐으며 7월 중순 법정에 소환됐다. 학교 친구 수백 명이 소년법정에서 재판 받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지방검사는 성인 자격으로 재판을 받도록 할 계획이며 그렇게 되면 짧게는 51년, 길게는 종신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브랜든은 테러를 당하고 있었다. 거의 스토킹 수준이었으며 당초 학교 측이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빌이 말했다. 그는 아들의 이름으로 공적 변호 기금을 설립했다. 래리와 브랜든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 극단적인 사건이지만 미국 전체의 학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일이 다시는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고 48년간 그 학교 이사회의 임원을 지낸 일레인 가버(81)가 말했다. 래리 킹에 관한 이야기와 논란은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E O 그린 중학교의 연감은 한 페이지를 그에 관한 이야기로 채웠다. 그는 인터넷에서 게이 순교자가 됐으며 동성애자 혐오증 문제의 공론화를 위해 만들어진 연례행사인 ‘전국 침묵의 날’은 올해 래리에게 헌정됐다. 그리고 에이버리 래스키는 래리가 총격을 당한 날 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직접 만든 자주색 카드를 아직도 침실에 보관하고 있다. 당시엔 래리가 살아날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자 의사들은 좋은 징조라고 말했다. 에이버리는 쉬는 시간에 수십 명의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격려 메시지와 서명을 받아냈다. 볼드린은 파란색 펜으로 “래리, 보고 싶어. 회복하길 바라”라고 썼다. 교장은 “힘내. 많은 사람이 너를 응원하고 있어”라고 적었다. 반 친구 중 몇몇은 그를 놀린 것을 사과했다. 일부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기기도 했다. 누군가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전화하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그날 에이버리는 귀가했을 때 래리가 치명적인 뇌졸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래리는 그날 오후 뇌사 판정을 받았고 가족은 그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날인 2월 4일, 의사들이 그의 췌장·간·폐를 떼어냈고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은 이제 한 10세 소녀의 가슴 속에서 고동치고 있다. 래리 킹은 밸런타인 데이에 자신의 ‘하트’를 선물했지만 그가 고대하던 방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With ANDREW MURR and JENNIFER ORDONEZ

2008.08.05 10:40

19분 소요
친디아가 미국을 따라잡기엔 역부족

산업 일반

이공계 졸업생 아무리 많아도 자원 부족과 교육제도 미비, 관료주의와 부패 등 질적으로 떨어져 올해 초, 인도 웨스트벵갈의 잘파이구리 기술학교 학생들은 매일 등교했지만 교사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전자, 컴퓨터 공학, 정보기술과의 전업교사가 단 한 명(정원은 20명)이다.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시험을 치르게 생긴 학생들은 마침내 지난 5월 거리로 나갔다. 정부는 마침내 다른 학교에서 교사를 데려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당국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인 벵갈 공대(콜카타)에서 교사를 뽑으려 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대학 역시 인력을 내놓을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잠깐. 그림이 이래서는 곤란하다. 몇 해 전부터 식자층과 언론에서는 인도와 중국이 해마다 엔지니어와 과학자 수백만 명을 배출해, 곧 미국의 기술 우위를 위협한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불과 몇 달 전 런던의 두뇌집단 데모스는 보고서를 내고 “기술혁신 중력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2050년이면 중국이 “과학 초강대국”이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사실 숫자만 놓고 보면 대단하다. 중국은 2005년에만 60만 명 이상의 엔지니어를 양산했고, 인도는 해마다 50만 명에 가까운 공대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런 통계만으로는 실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졸업생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양국 기업의 채용 담당자들은 제대로 배운 응시생이 부족하다고 한탄한다. “인도가 배출하는 수많은 이과 졸업생 중에서 합격 판정을 받을 만한 사람은 25~30%에 불과하다”고 전국 소프트웨어&서비스 기업협회의 키란 카르니크가 말했다. 이유가 뭘까? 지원 부족과 기타 여러 요인이 인도와 중국에서 심각한 교육위기를 불렀다. 이런 문제들이 조만간 양국 경제에 큰 피해를 줄 전망이다. 양국이 초고속 경제성장을 지속하려면 양질의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양국 모두 그들을 생산할 믿을 만한 대학이 충분치 않다. 명망 있는 인도 공대(칸푸르)에서 교편을 잡았던 M A 파이는 “과학과 엔지니어링 양 분야의 박사급 수준에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도의 지식경제화가 발목을 잡힐 전망”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경우 문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문화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급진적인 마오쩌둥 추종자들이 대학을 마비시켰다. 많은 학생과 교수가 “재교육” 캠프행을 면할 경우 농장으로 보내졌다. 고등교육의 부활은 1980년대에 시작됐다. 1990년대 들어와 중국 정부는 대학 입학생을 늘리는 야심 찬 계획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준이 떨어졌다. “들어가기만 하면 졸업은 쉽다”고 런민(中國人民)대학의 마오서우롱 교수가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중국의 학교는 기계식 암기만 강조한다고 불평한다. 그것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마오는 말했다. 그는 중국의 교육제도가 실용적 응용법을 가르치거나 창의성을 주입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미국 대학생들이 학교 성적은 신통치 않아도 효율적인 미사일을 만들어내는데 중국 대학생들은 학교 성적은 좋아도 썩 훌륭한 미사일을 만들어낼 능력이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중국 대학들은 또 하나의 보편적 문제에 직면했다. 지원 부족이다. 많은 대학이 대체로 등록금에 의존해 자립해야 한다. “그래서 일부 대학은 입학자격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칭화(淸華)대의 추슈롱 교수가 말했다. 이 제도가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미국 대학의 경우 등록금은 1만 달러 대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은 기껏해야 그 12분의 1”이라고 마오가 말했다. 따라서 많은 미국 대학생이 안락한 기숙생활을 즐기는 데 비해 중국 대학생들은 비좁고 유지보수도 형편없는 시설을 공동으로 써야 한다. 장비·실험실·교실이 부족한 대학도 많다. 인도 대학들도 그 비슷하게 적자 신세다. 대학 교수들의 봉급이 처량할 정도로 낮으며(초임이 월 400달러), 민간분야에서 벌 수 있는 수준(월 1만 달러 이상)에 비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그 결과 “기업들이 두둑한 제의로 유능한 사람을 빼간다”고 카일란 대학의 경제학 교수 마드후수단 다타가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인도의 교육제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엄격하다. 벵갈 공대의 최근 사례가 전형적이다. 몇 해 전 그 대학의 과학 교수들은 열성적인 학생이 언제든 들르도록 실험실 문을 24시간 개방했다.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반응하면서 좀 더 편안한 분위기가 확산됐다. 반바지 차림으로 오는 학생도 있었다. 인도 서부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이쪽 지역에서는 비교적 보기 힘든 모습이다. 몇 해 동안 이런 실험이 계속된 뒤 대학 당국은 갑자기 실험실을 전처럼 정규 스케줄대로 운영하고, 학생은 캠퍼스 안에서 바지·셔츠·신발을 착용하라고 지시했다. “복장규정이 공부보다 더 중요했던 모양”이라고 컴퓨터 공학과의 조교수 비플랍 쿠마르 시크다르가 말했다. 관료사회의 미래의식 부족과 각계 각층의 부패가 인도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 모든 게 기술교육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시크다르가 말했다. 인도가 해마다 수많은 대졸자를 배출함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공학의 박사는 약 50명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미국의 일개 공립대학이 배출하는 평균치와 맞먹을 정도다. 교육받은 전문인력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제는 양국에서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문제 해결에 나서는 기업이 점점 늘어난다. 기업들은 사내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몇 해 전 마이크로소프트가 그 유행을 선도했다. 인도에서는 인포시스가 종업원 1인당 약 5000달러를 들인 16주 종합연수코스로 앞장섰다. “현재와 앞으로 인도의 최대 숙제는 숙련된 인력의 양성”이라고 인력자원에 초점을 맞추는 인포시스의 중역 T V 모한다스 파이가 말했다. “정부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실은 인도와 중국 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천천히 가는 중이다. 인도 재계와 학계는 최근 정부를 설득해 두 국가교육기관에 이 나라의 고급기술과 과학 프로그램을 향상시킬 방안을 추천하도록 의뢰하게 했다. 중국 당국은 기술교육학교들의 영향권과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운동에 착수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바람직한 수준에 도달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서양이 적어도 당분간은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소리다. 조만간 인도나 중국이 앞으로 치고 나갈 전망은 없다.

2007.08.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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