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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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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부산 공연 예매 할인

유통

매표소 앱이 23일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부산 공연(2023년 2월 3~5일) 관람권 예매를 시작한다. 이 뮤지컬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7일간의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50주년을 기념해 7년여 만에 열리는 공연이다. KCLD는 자사 매표소 앱 회원들에게 부산 공연에 한해 28일까지 예매하면 15%(BC카드 20%)의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예매 수수료 면제 이벤트도 진행하기로 했다. 박정식 기자 tango@edaily.co.kr

2022.12.23 14:55

1분 소요
[조지선의 심리학 공간] ‘라디오 공무원’ 배철수의 장수 비결은?

전문가 칼럼

일상에 내재된 소소한 기쁨… 그는 자신의 행복 지점을 알고 있다 영원한 DJ, 배철수(67)가 음악캠프를 진행한지 30년이 되었다. 1년만 넘기자고 시작한 일이 공무원보다 더 안정된 직업이 되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보다 더 빛나는 제2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배철수 음악 인생의 제1 전성기는 하드록밴드 ‘송골매’의 리더 시절이었다. 오늘 BTS가 있다면 1980년대엔 송골매가 있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앨범을 올린 이 밴드는 9집을 끝으로 1991년 해체했다.1990년 3월 19일에 첫 방송을 내보낸 MBC FM 팝 음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와 배철수는 서로의 상징이 되었다. 중년에 인기 전성기를 맞은 사람! 배캠 10주년 즈음 시작된 배철수의 별칭은 그 후 20년간 지속된다.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는 그의 농담이 사실이 돼버렸다. 배철수의 인기는 늘 현재가 최고다.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존재감, 전무후무한 기록과 대체 불가한 캐릭터로 국내 팝 음악의 기둥이 된 그의 모습에서 송해 선생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어른거린다.MBC라디오 PD는 두 종류로 나뉜다. 배캠을 맡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동안 PD가 30명 정도 바뀌었다. 방송 초기에 배철수와 함께 했던 조정선 PD는 음악캠프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형이 10년을 한 건, 정말 기적이야!” 처음 몇 년은 고전했다. 가요를 틀어야 일정 수준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었던 시기에 정통 팝으로 경쟁하려니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개편 때마다 프로그램이 폐지 대상 리스트에 오르곤 했다. 본인도 인정하는 바다. “오래하니까 이젠 좋게 봐주시지만 초반엔 방송과 안 맞는 진행자였습니다. PD는 내가 방송 사고라도 낼까 걱정했고 청취자들이 내가 1년을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로 내기를 했다고 해요.” ━ ‘배칸트’에게 없는 것은 술·담배·저녁약속 그런데 20주년을 보내고 다시 30주년을 맞았으니 놀랄 일이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다양한 인터뷰에서 그가 거듭 밝힌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운이 좋았고 건강했다. 덕분에 펑크를 낸 적도, 지각을 한 적도 없다. “그 다음에는 성실함이에요. 내 입으로 성실하다고 한다면 좀 그렇지만 지내고 보니 내가 성실한 사람이더라구요. 내 생활의 대부분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맞춰져 있습니다.”그는 다양한 별명을 얻었다. 배칸트, 라디오 공무원, MBC 직원. 배칸트는 시계처럼 규칙적인 그의 생활이 유명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사실 그의 하루 일과는 칸트를 비롯한 위대한 창작가들의 일상과 핵심적 특징을 공유한다.저널리스트 메이슨 커리의 저서 에 소개된 161명의 위대한 창작가들 일상을 살펴보면 창작가들이 일하는 방식은 그들의 얼굴 생김새만큼 제각각이지만 그 와중에도 다양성을 관통하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일을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루를 보내는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을 업(業)으로 삼은 자유로운 영혼들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단조로운 루틴으로 채워진 하루를 보냈다.다음은 배철수가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밝힌 하루 일과다. ‘배칸트’는 아침 9시에 일어나서 토스트 두 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뉴스를 검색한다. 11시30분이 되면 방송국 주변으로 가서 주로 20~30대 젊은 PD나 작가들과 점심식사를 한다. 커피까지 마신 후에 피트니스센터로 가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면서)목욕을 한다. 그는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생방송 스튜디오에 입장한다(대부분의 DJ들은 방송 직전에 녹음실로 들어간다). 방송이 끝나는 8시엔 곧장 집으로 간다. 책을 읽거나 쉬면서 저녁 시간을 보낸다(많은 독서량은 그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의 삶에 없는 것 세 가지는 술, 담배, 저녁 약속이다. 이 생활을 지난 30년 동안 반복했다.뛰어난 창작가들의 성취 비결은 새벽 기상도, 긴 작업 시간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중심으로 단순한 하루 루틴을 만들고 세상의 방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규칙적이고 예측가능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들이 얻은 것은 핵심 과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역설적 자유였다. 위대한 창작가들이 그랬듯이, 배칸트는 생활의 중심에 배캠을 놓았고 방해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항상 1순위에 두고, 프로그램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 DJ입니다. 더 이상 가수도 아니고 TV방송에 나갈 이유가 없어요.” TV 출연 요청을 숱하게 거절했고 출입국 기록의 직업란에는 라디오 DJ라고 적었다.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밴드 생활에 지쳐가고 있던 1990년 어느 날, 그는 친구였던 PD의 전화를 받았다. “라디오 DJ 해볼 생각 없어?” 흔쾌히 수락하고 달려든 프로그램이 음악캠프다.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음악 처음 할 때처럼요. 노래를 소개하는 것도 재밌고 청취자 사연 듣는 것도 재밌고요.” 이 초심은 30년 동안 유지되었고 현재진행형이다. 배캠이 방송 역사를 새로 쓸 때마다 그가 밝힌 소감을 들어보자.“언제까지 DJ를 할 거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제가 먼저 그만둘 일은 없을 겁니다. 15년간 한 번도 이 일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 배캠 15주년“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20년이 훌쩍 지나갔어요. 무척이나 행복하게 방송을 했기 때문에 ‘나만 혼자 행복해도 되나’라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해요.” - 배캠 20주년“제게 배캠은 삶 그 자체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죠. 제게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떼어내면 남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 배캠 25주년“음악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매일 행복하게 지냈는데, 30년이 됐다고 큰 축하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배캠 30주년이 일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매일 행복했다! 배철수의 DJ 30년, 그 단출한 일상엔 수많은 연구를 통해 학자들이 발견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 압축되어 있다.첫째, 행복은 기쁨의 강도(intensity)가 아니라 빈도(frequency)라는 점이다. 행복 연구의 전문가인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그의 책 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성취하는 순간 기쁨이 있어도, 그 후 소소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80년대 대중가요를 논할 때, 송골매는 당대 최고 스타였다. 가요 프로그램의 1위 자리를 밥 먹듯 차지하고, 록 밴드로서 유일하게 10대 가수상을 4년 연속 받았으니 배철수는 여러 차례 ‘큰 기쁨’을 누린 사람이다. 그러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가 행복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그 시절엔 밴드를 유지하려면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어요. 1년 중, 클럽이 문을 닫는 현충일을 제외하고 364일을 매일같이 연주했죠. 그런데 취객들이 무대 위로 뭘 그렇게 던져대는지. 수박이나 사과 같은 거요. 가끔 직장인들이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하듯이, 어느 날 무대에 올라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좋아했던 음악이 하기 싫은 일이 돼버렸다. 때마침 행복의 여신이 그에게 새 기회를 선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DJ 활동이 여러 번의 작은 기쁨을 가져다 줄 천직임을 알아봤다. 10년 동안 최고의 록밴드 지위를 누린 수퍼스타가 원한 것은 더 큰 인기와 명성이 아니었다. 판단의 기준은 심플했다. 라디오 스튜디오에 있으면 마냥 좋았다는 것.“저는 일상이 좋아요. 아무 것도 없는 일상이…”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이다. 생활이 너무 단순해 극적인 일은 생기지 않았다. 10주년, 20주년 마일스톤을 달성할 때마다 책을 내고 상을 받고 콘서트를 여는 특별한 일을 벌였지만 이 모든 행사들이 피곤했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있다.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에 내재된 소소한 기쁨.배철수의 30년이 증명해 보인 두 번째 행복의 진리는 행복해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엔 이런 공식이 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거야. 고진감래 (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고!”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배웠다. 그래서 오늘의 고통을 참고 내일의 성공을 위해 달린다. 그런데 거꾸로 관계도 사실일까? 행복해야 성공하는 것은 아닐까? 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Sonja Lyubomirsky) 연구팀이 무려 225개나 되는 관련 연구를 종합 분석한 후, 내린 결론은 이거다. 행복이 먼저 내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성공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고 자기 자신도 좋아한다. 자기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본인도 도움을 많이 받는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모두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들이다. ━ 성공해야 행복? 행복해야 성공 온다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청취자와 함께 레드 제플린, 이기 팝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청취자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막 떠오르고요.” 일터에서 행복한 사람은 성공의 토대를 매일 단단하게 다지고 있는 셈이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이상, 그가 30년을 내달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행복해야 성공이 온다.30년 장수는 좋아하니까, 행복하니까, 그리고 배캠을 중심으로 설계된 담백한 하루하루를 살았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더 단순한 그의 일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톱스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면 최고 아닌가요. 우등상은 못 타도 개근상은 탈 수 있어요.” 이 멋진 말을 곱씹다 보면 지난해보다 올해 더 멋있는 DJ의 오프닝 멘트가 듣고 싶어진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출발합니다!”- 조지선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심리과학 이노베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필자는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와 인간행동을 강의하고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2020.05.10 15:31

7분 소요
[조원경의 ‘IF’ㅣ부자를 꿈꾸는 당신에게(8)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난다면] 인간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위대한 유산

전문가 칼럼

의 핍, 의 주디, 프레디 머큐리 전 여인 오스틴 메리의 굴곡진 인생의 자산 “평민이라도 기꺼이 덕을 심고 은혜를 베풀면 문득 벼슬 없는 재상이 되고, 사대부라도 헛되이 권세를 탐내고 총애를 팔면 마침내 벼슬 잇는 거지가 된다.” 중국 명나라 때 홍자성이 쓴 의 한 구절이다. 돈이 최고라는 사람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이다. 하루하루 살기 고달픈 사람도 공자님 말씀이라고 치부하기 쉽다.통상적으로 상속세를 강화하면 세수를 거두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태어나면서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평등을 중시하게 되어 상속세는 정당화된다. 생전 증여는 고령자가 소유한 자산을 활용할 가능성을 키워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겠지만, 이미 한 번 부과된 소득에 다시 세금을 물려 이중과세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최고 55%최고)과 한국(최고 50%)의 상속세·증여세는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다. 특히 우리는 주식으로 자식(직계비속)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경우 최대주주에게 주식 할증(최대 30%)까지 적용하기에 이 경우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율(65%)를 물리게 된다. ━ 세계적으로 높은 상속세율 높은 상속세율이 기업 경영에 부담을 주기에 이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의 대물림 방지를 위해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 상충하고 있다. 중소·중견기업의 가업을 물려받게 하기 위해서는 상속세 감면 혜택을 주자는 것이 요즘 추세다. 증여세를 낮춰 생전 증여 활성화로 소비 증가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부의 대물림과 충돌한다. 부모가 보유했던 기업의 주식을 상속받게 되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아무리 큰 기업가 집안이라 하더라도 수백, 수천억원에 이르는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상속세 납부 재원을 마련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상속받은 주식을 처분한다면 경영권 확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혹은 주가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식을 처분하는 것도 어렵다. 상속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채 부모가 세상과 이별한 경우에는 사태가 복잡해진다. “평생 일군 사업이어서 사업 전망이 나빠도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가고 싶지만 ‘세금폭탄’까지 맞고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 경제가 어려울 때 필요하다면 중소·중견기업에 대해서는 가업 승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고용 유지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상속세를 부과하는 국가는 한국·일본·프랑스·영국·미국 등 절반이 훨씬 넘기는 하다. 반면 이스라엘·뉴질랜드·스웨덴·오스트리아 등은 상속세가 없다. 호주와 캐나다는 상속세를 폐지하는 대신 자본 이득세를 거둔다. 상속세를 폐지하자는 입장에서는 가족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상속세 대신 법인세를 걷는 게 합리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이런 논쟁을 지켜보며 누군가는 물려받을 돈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할 수 있겠다. 사농공상의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의 이야기는 철지난 과거가 아니라 아득한 역사가 됐다. 기업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 이는 이제 만천하의 진리가 됐다. 그런데 찰스 디킨스의 을 보더라도, 상인계급의 고뇌가 담겨 있다. 당시 중산계급(대체로 상인계급)은 금전적 지위에 걸맞은 품위를 갖지 못하고 그것을 돈으로 사려고 했다. 중산계급의 이상적 인간형이 오늘날 남자를 가리키는 ‘신사(gentleman)’이다. 에 나오는 런던에서 신사 수업을 받는 전직 촌놈 핍은 촌스러운 시골 친구이자 매형인 조를 만나는 게 부끄러워진다. 런던에서 핍은 몸에 허영이 가득 차고 속물적인 인간이 된다. 독지가의 도움으로 신사수업을 받는 그는 독지가가 실은 자신이 탈옥을 도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놀란다. 탈옥수는 자신을 호주로 유배시킨 신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가난한 핍에게 도움을 주어 신사수업을 받게 한 인물이었다. 독지가로부터 유산을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그 유산이 탈옥수의 유산이라니 신사의 품격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탈옥수는 끝내 죽게 되고 재산은 몰수돼 유산상속은 물거품이 된다. 뒤늦은 참회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핍은 친구 조와의 오래된 우정이 진정한 유산상속임을 깨닫는다.이 작품에서 진정한 신사는 시골 대장간에서 묵묵히 정직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핍의 매형인 조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려 의지할 곳이 없는 핍을 유일하게 간호해주는 사람은 조였다. 대장장이 조의 내면에는 진정한 신사만이 가질 수 있는 온화함이 넘쳐흐른다. 자신을 냉랭하게 대했던 핍이 런던에서 죄수, 허영기 있는 숙녀, 빚과 열병으로 고생할 때 그는 천사와 같은 마음으로 보살폈다.돈으로 셀 수 있는 유산을 생각했는데 그런 동화 이야기를 한다고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그러나 줄거리에 공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물론 오랜 우정을 새기는 신사의 품격이 과연 이 시대에 진정 있을까 궁금하다. 신사의 개념은 역사를 흐르며 더욱 속물화되어 갔고 이제는 개념 정의가 다르게 되었다. 신사가 갖춰야 할 내면적 덕성보다 물질적 외면성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사의 본질이 막대한 재산과 인위적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에 있음을 역설하더라도, 많은 사람의 눈은 신사의 값비싼 양복에 갈 수 있겠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신사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에 있다는 숭고한 이야기를 제대로 음미해보자. 서구권에서 연설할 때 대부분 ‘Ladies and Gentleman’이라고 운을 뗀다. 숙녀가 앞에 나온다. 그런데 누군가 농담을 한다. 한국에서는 신사 숙녀라며 남자가 앞에 나오는데 욕할 때는 ‘년 놈’이라고 여성이 앞에 온다고. 관습적인 말이지만 생각해볼 일이며, 시대가 바뀌었지만 신사의 품격은 격조 있는 유산으로 남아 있어야 할 듯하다. ━ 신데렐라에게 떨어진 행운의 입맞춤 요즘은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신데렐라 이야기가 한창 인기를 끈 적이 있다. 14살이나 차이나는 아저씨와 고아 소녀 주디의 사랑 이야기를 잠깐 생각해 보자. 정체 모를 독지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보내는 주디의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 만약에 나에게도 그런 독지가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아저씨도 아시겠지만, 대학 생활에서 힘든 건 공부가 아닙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지요. 오늘 아침에는 앨라배마에서 오신 주교님이 아주 감동적인 설교를 해주셨어요. ‘비판받고 싶지 않으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주제였죠. 타인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고, 지나친 비판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어요.”맞는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우면 그 또한 잘못이리라. “좋은 성격은 추위나 서리에 상처받으면 풀이 죽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살을 만나면 쑥쑥 자라난답니다. 저는 역경과 슬픔과 좌절이 정신력을 강하게 한다는 주장에 반대해요. 자신이 행복해야 비로소 상대방에게 친절도 베풀 수 있는 법이거든요. 어제의 괴로움은 어제로 족하니 사람은 누구나 가끔은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길 기대하죠. 그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기도 해요.”아하, 정말 사랑스러운 철학자 같은 말을 하는 주디를 생각하며 편지를 받아보는 아저씨는 얼마나 그녀가 예쁘게 보일까? 역경을 이겨내는 우리네 인생도 좋지만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는 캔디가 생각난다. 이런 류의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고, 가볼 곳도 많으니 자신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붙잡기만 하면 되는 거죠. 비결은 유연한 사고예요. 정작 중요한 건 엄청난 즐거움보다는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자세랍니다. 전 행복해지는 진짜 비결을 알아냈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에 얽매여 평생을 후회하며 산다거나 미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최대의 행복을 찾아내는 거죠.”당연한 말씀!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라는 명언이 그녀에 의해 재탄생한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Let by-gones be by-gones).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묻어버리고 작은 행복은 매일 있다는 걸 기억하려는 태도는 심신 건강한 사람을 키우는 기본이 된다. “사람이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못 느끼지만, 그것이 마땅히 내가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다음에는 그것 없이 지내기가 무척 힘든 법이거든요.”그렇다. 익숙함과 이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남보다도 많은 조건을 가지게 되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부자가 몰락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한없는 슬픔으로 세상을 등지기까지 한다. 그런 것을 깨달은 젊은 아가씨는 참 매력적이지 않나. 동화 속 이야기라고 치부하겠지만 이런 여성이 어디엔 가 있을 듯하다. “젊음은 나이보다는 마음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느냐와 관계가 있으니까.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는 다른 아이들이 누린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안 그래요.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한걸음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 걸요. 전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 아이들을 많이 알아요. 그 애들은 행복에 익숙해진 나머지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지만, 전 매 순간 제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느낀답니다. 그리고 아무리 속상한 일이 생겨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그 일을 재미있는 경험이라 여기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하늘을 이고 있든, 나에게는 모든 운명과 맞설 용기가 있다’라는 말처럼.”결정적으로 남자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랑스럽고 당찬 말이다. 범사에 감사할 줄 모르는 숙녀들보다 어려웠던 과거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그녀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감동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키다리 아저씨의 간단한 줄거리를 보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고아원의 주디에게 정체 모를 독지가가 나타난다. 훗날 주디는 편지를 주고받던 키다리 아저씨라 부른 그 남자가 알고 지낸 친구의 삼촌이란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만약에 내게도 그런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그러려면 당신은 삶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주디의 다음 편지가 답이 아닐까? “아저씨, 제 생각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상상력이 아닐까 싶어요. 상상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래야 친절한 마음과 연민과 이해심을 가지게 되니까요. 상상력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 줘야 해요. 하지만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는 상상력의 싹이 조금만 보여도 당장 짓밟아 버려요. 오로지 의무감만을 강요하지요. 전 아이들이 그런 단어의 뜻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의무감이란 불쾌하고 혐오스런 단어예요.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좋아서 해야 한다고요.”상상력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감능력의 원천이라는 주디의 말은 따뜻한 인간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의무감이 아니라 좋아서 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에서 순수한 인간미를 느껴본다. 키다리 아저씨의 이야기는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과 일맥상통한다. ━ 영화이자 현실 속의 소울메이트가 전하는 말 그룹 퀸의 존재를 재조명한 영화 에서의 여자 주인공 역시 이런 점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다. 메리 오스틴은 그룹 퀸의 멤버 프레디 머큐리를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헤어진 메리 오스틴에게 약 290억원에 이르는 저택과 함께 112억원이 넘는 재산을 남겼다. 더불어 자신이 사망한 후 발생하는 저작권 수입도 그녀에게 넘겼다. 실제로 메리 오스틴은 그의 재산을 받기를 거절하며 자선단체로 기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네가 내 아내였을 것이고, 이것은 네 집이야.”내 인생의 사랑이었던 여자는 한때 그를 떠났지만, 정신적으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프레디도 그녀에게 내 사랑을 받고 떠난다면서 ‘나를 모르시나요?’ 하고 절규했다. 그들의 속사정을 상상해 보자. 사랑하던 여자는 남자의 성 정체성을 알고 당황한다. 그녀가 떠난 텅빈 공간에서 세속에 찌든 많은 인간과 만나고 헤어진 프레디. 화려한 조명 속에서 오히려 그의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고독의 몸부림이 절정에 이른 어느 날, 사랑하는 여자는 꿈에서 그를 보았다며 찾아온다. 하지만 그녀에게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녀는 이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고 그의 아이를 가졌다.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헌신은 느껴지는 법. 둘은 서로에게 진정한 소울메이트로 남아 있는 것이다. 프레디의 연인 짐 허튼 역시 6년 간 그의 파트너로 지냈다. 프레디가 에이즈로 사망한 후 그 역시 세월이 흘러 에이즈로 사망한다. 프레디는 그에게도 메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약간의 유산을 남겼다. 프레디는 그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소울메이트였던 그녀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으니 그녀는 실존하는 행운의 숙녀이다. 프레디가 메리를 위해 만든 퀸의 ‘내 인생의 사랑(Love of my life)’를 들어 보는데 뜨겁고 애뜻한 사랑의 기운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장면이 오버랩돼 전율을 느낀다.‘내가 더 늙었을 때 당신 옆 거기에 있을게요. 아직도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며,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요(When I grow older, I will be there at your side, To remind how I still love you. I still love you)’. 이 대목을 듣는데 프레디의 메리를 향한 애정과 더불어 미안함을 엿볼 수 있다.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가 연상되며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떠나버린, 가질 수 없는 연인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면 느끼는 공감의 산물 아닐까 그런 내 인생의 사랑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남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우리도 헌신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될 자세를 갖추기 위해 몇 권의 러브 스토리를 읽어 보면 어떨까?‘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아버지에 프레디는 맞선다. 밴드를 결성해 미니 밴을 팔아 앨범을 만들고 기획사의 눈에 들어 ‘퀸’이라는 그룹이 결성된다. 영화에서는 솔로로 헤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시 뭉쳐 아프리카 기아 관련 기부 프로그램의 대형 이벤트를 하며 그룹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공이 돋보이지만 그들 4명은 한 이름이고 수익 역시 균등해야 한다는 영화 대사가 마음을 울린다. 영화가 아닌 실제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의 소개로 머큐리와 오스틴은 각각 24살, 19살에 처음 만난다. 머큐리가 수퍼스타가 되기 전이었지만, 메리는 그의 눈에서 엄청난 자신감을 느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순탄하게 만난다. 영화를 보면 머큐리는 만난 지 4년 째가 되던 해에 메리에게 반지를 주며 청혼을 한다. 실제 메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에 박스를 받았다. 박스에는 작은 박스가 연이어 있었고 최종 박스를 여니 반지가 있었다. 나는 결혼하겠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충격으로 서로를 떠났다. 여느 연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서로를 평생 지지했다. 프레디의 고뇌를 생각하며 ‘보헤미안 랩소디’의 일부를 들어 보며 그의 고백을 상상해 본다.‘Mama, just killed a man(엄마, 방금 남자를 죽였어요) / Put a gun against his head(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 Pulled my trigger, now he’s dead(방아쇠를 당겨, 이제 그는 죽었어요) / Mama, life had just begun(엄마, 인생을 막 시작했는데) / but now I’ve gone and thrown it all away(그러나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버렸어요) / Mama, oooh - Didn’t mean to make you cry(엄마, 우우우 ~ 엄마를 울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 If I’m not back again this time tomorrow(만약 내일 이 시간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 Carry on, carry on. as if nothing really matters(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세요)…’이 곡은 1989년까지 한국에서 금지곡이었다. 가사 때문이었다. 누군가 한 남자를 죽이고 나서 엄마에게 고백하는 내용의 가사가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곡의 내용에 대한 해석 논란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메리는 프레디와의 사이에서 낳길 원했던 아이를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얻었다. 아이와 고양이를 유달리 사랑했던 프레디 머큐리는 기꺼이 메리가 낳은 아이의 대부가 됐다. ━ 메리 오스틴 자녀의 대부가 된 프레디 머큐리 찰스 디킨슨의 위대한 유산과,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현실의 오스틴 메리를 생각하며 우리는 삶에서 공감능력과 배려가 얼마나 위대한 힘인지를 알아야 한다. 삶은 쉽지 않다. 적응하기가 어려운 순간은 누군가에게나 온다. 그러나 우리 생의 챔피언은 우리 자신이다. 프레디의 삶 역시 고단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난 내가 받아야 할 치욕과 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버텨왔지. 우린 승리자잖아. 우린 마지막까지 싸울 거잖아. We are the champions. 그래 우리는 우리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야 해.”※ 필자는 국제경제 전문가로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이다. 대한민국OECD 정책센터 조세본부장, 대외경제협력관 등을 지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19.01.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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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기업가가 전하는 경영 조언 & 아이디어

의료

포브스가 100주년을 맞아 100명의 기업가가 쓴 비즈니스 에세이를 모았다. 포브스코리아는 독자를 위해 10개를 추려 소개한다. ━ 마크 주커버그의 ‘동기 부여’ | 세계를 잇는 네트워크: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창업 자체를 목표로 삼은 적은 한 순간도 없다. 사람 사이를 잇고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페이스북을 창업하고 2년 후 여러 대기업이 인수를 제안했다. 경영팀 모두가 회사 매각을 원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미래가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팀은 분열됐고, 서로의 관계는 멀어졌다. 그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경영팀 전원이 페이스북을 떠났다. 페이스북을 이끌며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나는 여전히 페이스북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혼자라고 느꼈다. 게다가 그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혼자서 목적의식을 갖는 건 충분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이들도 목적의식을 가지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나는 페이스북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동료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단순 생존과 생계를 넘어서는 동기와 의미가 생긴다. 그래야 나와 동일한 목적과 관심을 가진 다른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다. 뜻하는 일을 계속 함께하기 위해 회사가 좋은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지만, 정말 우리를 움직이는 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픈 열망이다. 훌륭한 기업이라면 대부분 우리와 비슷하다고 믿는다. 페이스북 리더팀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우리 서비스를 제공해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도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페이스북의 지향점이자 목표다. 창업에 대해 사람들이 조언을 구할 때마다 나는 “창업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끌고 싶은 변화에 집중하고,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을 찾아라. 그럼 다른 이에게도 목적의식을 심어주고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 오프라 윈프리의 ‘경청’ | 토크쇼의 여왕: 방송 네트워크의 수퍼스타, 브랜드 제국의 주인, 오프라 윈프리 네트워크 설립자 넬슨 만델라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열흘간 머무는 일정이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덜컥 겁부터 났다. 그래서 배우자인 스테드맨에게 “10일 밤 낮을 만델라와 함께 지내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지?”하고 물었다. 그러자 스테드맨은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어때?”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만델라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니 5일쯤 지났을 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집을 방문할 때에는 선물로 뭘 가져갈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넬슨 만델라의 집에 향초를 들고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보다 무언가 가치 있는 걸 그 곳에 남기고 싶었다. 하루는 신문을 보다가 빈곤과 이를 극복할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교육만이 빈곤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남아프리카에 꼭 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내가 말하자 만델라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고요?”라고 묻더니 바로 일어나 교육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 설립을 위한 회의는 그날 오후 바로 시작됐다. ━ J.W. 메리어트 주니어의 ‘사람 경영’ | 미국 호텔리어: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회장 메리어트 호텔의 최고 성공비결은 쓰디쓴 인생 경험을 통해 얻었다. 해군에서 복무할 때 일이다. 항공모함의 장교식당 준위로 임명된 나는 조리 임무를 맡았던 군인들을 감독했다. 1950년대 초반이라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병들이었다. 음식 맛을 개선하고 싶었던 나는 새로운 조리법이 적힌 카드를 가져 가서 사병들에게 주며 적힌 대로 요리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던 나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생각하던 나는 그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변화를 요구했단 걸 깨달았다. 그들을 불러서 새로운 요리법대로 하면 음식 맛이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시간조차 가지지 않은 것이다.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세 어절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다. 이를 깨달은 나는 매년 200여 개 호텔을 직접 방문해서 메리어트 사람들을 만나 기술과 유통, 최근 일어나는 트렌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직원을 잘 보살피면, 직원은 고객을 잘 보살펴준다. 그럼 고객은 우리를 다시 찾을 것이다. 메리어트가 경영하는 건 사람이다. 물건을 생산하는 제조업체가 아니라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바로 우리 비즈니스의 요체다. ━ 하워드 슐츠가 말하는 직원 ‘복지’ | 커피의 황제: 스타벅스 회장, 전임 CEO 1987년, 단 11개 매장에 직원이 100명밖에 되지 않을 때부터 스타벅스는 기업 수익과 선행 사이 균형을 맞추겠다는 약속을 실행했다. 우리는 포괄적 의료보험과 스톡옵션 지분을 파트타임 직원에게도 제공할 것을 결정한 첫 미국 기업 중 하나다.파격적 직원복지 결정을 내렸을 때 주주들은 분노하며 지분의 가치 저하를 우려했다. 그러나 나는 직원에게 혜택을 주면 기업 수익과 생산성이 더 증가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수년 전 스타벅스가 대학 등록금을 무료로 하자고 결정했을 때에도 나는 자선행위가 아님을 강조했다. 스타벅스는 사람에게 투자하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일해보지 못했던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여러 블루칼라 직종을 옮겨 다닌 아버지는 직장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변하셨고, 나는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들이 아버지에게 어떤 정성도 기울이지 않았기에, 아버지 또한 어떤 고용주에게도 충성하지 않았다. ━ 리카싱의 ‘신중함’ | 아시아의 수퍼맨: 청쿵 허치슨·청쿵그룹 회장, 존경 받는 독지가 제조업을 운영하며 현금 유동성이야말로 기업의 생명선이자 미래를 확실히 보장하는 수단 중 하나라는 교훈을 얻었다. 1999년에서 2000년 유럽 3G 시장이야말로 금광과 다름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주파수 입찰이 시작됐을 때 우리 팀에 유동성 예상치를 유념하며 심사숙고 후 행동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내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팀원들이 생각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부는 내 지시에 반대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신중함 덕분에 우리의 이동통신 사업은 지금도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공격적으로 입찰에 나섰던 기업들은 경영난에 봉착했다. 100달러를 투자하라고 수표를 쓰는 건 쉽지만 주주에게 100달러 이익을 안겨주는 건 어렵다. 그래서 나는 행동에 나설 때마다 반드시 심사숙고한다. 불확실한 세상, 성공에 필요한 경쟁력을 얻기 위해서는 신중함과 기민함, 창의력과 혁신이 필요하다. ━ 마이클 블룸버그가 말하는 ‘위험과 보상’ | 행동가: 핀테크와 미디어 개척자, 문제 해결에 집중한 뉴욕 시장, 독지가 1981년 살로먼 브라더스에서 해고를 당했다. 컴퓨터로 금융 데이터 수집 및 분석을 수행해서 실시간으로 자료를 제공하자는 내 제안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컴퓨터 사용은 고사하고 금융 전문가의 책상 위에 아예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다.조직은 혁신에 저항한다. 인간은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그러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멀리 내다보고 위험을 감수하는 건 우리 기업문화의 핵심이었다. 나는 이런 문화를 뉴욕 시청에 도입했고, 뉴욕시 정부 전체에 이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힘썼다.민·관을 막론하고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똑똑하고 창의적이며 목적의식이 확고한 인재가 필요하다.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도록 필요한 권한을 주고,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도 확실한 지지를 해줘야 한다. 기업 및 정부 운영에 있어 최악의 실패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 일런 머스크가 내다본 ‘미래’ | 아이언맨: 최고의 기업가, 페이팔·테슬라·스페이스X 공동창업자 자율주행차와 의료진단 발전 등 인공지능(AI)이 우리 사회에 가져올 혜택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AI를 통해 악마를 소환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AI는 인류에 존재적 위협을 제기할 수 있다. 디지털 초지능이 인류를 해하는 행동에 의도치 않게 최적화된다면 엄청난 재앙이 생길 수 있다. 스팸 메일을 없애라고 만든 AI가 스팸 보내는 사람을 없애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결론을 내거나 수익 극대화를 위해 개발한 투자 프로그램이 방위산업 주가 폭등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정하는 식이다. 인류는 자기 멸망이 가능한 최초의 종이다. 때가 된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인류가 AI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까?’다. 우리는 AI에 대해 가능한 많은 걸 알아야 하며, AI를 규제할 정부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민간의 경우 인류에 혜택을 안겨줄 안전하고 유용한 기술 개발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 테리 구가 말하는 ‘단계’ | 전자기기 생산의 공룡: 폭스콘 창업주 일을 시작하고 첫 20년 동안은 돈을 벌기 위해 일했다. 돈이 없다면 내 이상을 실현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두 번째 20년은 내 이상을 위해 일했다. 이상과 소명을 좇아 일하며 근로정신을 바로 세우다 보니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견딜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다음 세 번째 20년은 내가 열정을 느끼는 일을 했다. 내가 흥미를 느끼고 우선순위를 둔 곳에 인생 경험을 활용한 도움을 주는 중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다음 세대가 기여하도록 청년 인재를 육성하는 중이기도 하다. 전문가로 일하면서 나와 같은 3단계를 고루 거치며 성공적 결과를 낸 사람이 가장 행운아가 아닌가 싶다. ━ 찰스 코크의 ‘가치’ | 파워 브로커: 재계 및 정계 유력인사, 코크 인더스트리 CEO 나는 우리 직원 모두가 수십 년 전 마련된 코크 인더스트리 가치체계에 합당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양심과 겸손,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 적극적인 정보 공유와 최고의 장기적 가치 창출 등으로 구성된 10대 행동방침이다. 경영을 하며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듣기 좋은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중역으로 승진시킨 결정이다. 그 때문에 잘못된 계약을 하고 우리와 가치를 함께한 사람들을 회사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냈다. (경영진을 개혁하고 잘못된 계약을 처리하는데 수 년의 시간이 걸렸다) 직원을 고용할 때 가치관과 능력 사이에서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가치관을 택하라. 아무리 인재라도 가치관이 잘못됐다면, 능력이 떨어져도 가치관이 바른 사람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회사에 끼칠 것이다. ━ 미우치아 프라다의 ‘명성’ |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프라다 공동 CEO 내 이름을 알리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대표하는 가치에는 많은 신경을 쓰는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을 믿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호기심을 잃지 말고 항상 연구하라. 매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고 제대로 반응하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2017.10.25 14:44

7분 소요
야오밍, 농구스타의 귀향

산업 일반

고국 중국을 등지고 떠나버릴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전설의 농구선수 야오밍의 마음 한 켠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명성과 재산을 자선사업에 활용하겠다는 계획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2009년에는 상하이 구석구석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야오밍을 볼 수 있었다. 고향 상하이 곳곳에 세워진 수백 개의 광고판에서 휴스턴 로케츠의 수퍼스타이자 중국 최고의 농구선수 야오밍이 등장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 광고는 농구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이번에 야오밍에게 주어진 미션은 상어를 구하는 것이었다.동물보호단체인 와일드에이드는 상어보호캠페인의 대변인으로 야오밍을 내세웠다. “샥스핀 요리에 ‘노’라고 말하세요!”라고 설득하는 야오밍의 말에 중국 대중은 귀를 열었다. 곧 샥스핀이 식당 메뉴에서 사라졌다. “60% 정도 감소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성적이지요.” 상어보호캠페인에 대한 야오밍 자신의 겸손한 평가이다.몇 년 후, 야오밍은 또다른 성전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상아무역을 반대하는 캠페인이었다. 상아무역이 지하경제로 숨어들자, 야오밍은 거구의 몸을 직접 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명성을 동물보호 캠페인에 활용했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진행되었고, 아기 코끼리 한 마리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키 7.6피트(231.6㎝)의 장신 농구선수 야오밍의 사진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야생동물보호단체들은 이 캠페인이 단기간에 코끼리 상아 채취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고취하는데, 그리고 중국정부로 하여금 상아시장에 더욱 강력한 규제를 가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인 야오밍이 누리는 인기의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36세의 야오밍은 중국 내에서 마오쩌둥 주석보다 더욱 높은 유명세를 자랑한다. 수년간 올스타 자리를 놓치지 않은 야오밍은 부상을 입으면서 2011년 북미 NBA 리그의 활동을 접어야 했지만, 본국 중국에서는 스포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상하이로 돌아온 야오밍은 10대 시절 몸담았던 농구구단 샥스를 인수했다. 지난 2월에는 중국농구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야오재단 설립해 오지의 농구 꿈나무들 지원 야오밍은 야오재단을 통해 이들 아동이 농구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농구코트, 농구화 그리고 농구훈련도 제공하며 이들 아동에게 성인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중국 오지에서 활동하는 야오재단(연간예산은 대략 250만 달러 정도이다)은 13세 이하의 아동에게 농구 장비 및 훈련을 제공한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코치교육을 시킨 후 체육교육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학교에 파견한다. 남학생 및 여학생으로 구성된 농구팀은 지역 및 지자체 경기를 치루며, 주말 동안 진행되는 플레이오프경기, 올스타 이벤트 그리고 ‘자상한 거인’ 야오밍을 직접 만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로 행사가 마무리된다. “저희 모두 어젯밤 잠자리에 들 수 없었어요.” 작년 청두에서 만난 마징이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쓰촨성 오지에 자리한 마을 판즈화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마징은 기차로 14시간을 여행해 학교의 농구팀을 끌고 행사에 참석했다. 학생들 대부분 대도시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고 놀이공원에 놀러갈 계획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이들은 온통 마음이 부풀어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야오밍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답니다!”올스타전에는 중국농구협회 및 미국농구협회인 NBA 선수들 모두 출전한다. 작년에는 유타재즈의 조지 힐이, 2015년에는 골든스테이트워리어스의 포워드 포지션인 드레이몬드 그린이 출전했다. “야오밍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출전할 겁니다.” 조지 힐의 말이다.도착하자마자 야오밍에게 모든 관심과 주목이 쏟아졌지만, 야오밍은 여느 수퍼스타와 달리 인내심 있고, 겸허하며 만면에 미소를 띄운 모습으로 시종 일관했다. 의자 하나를 가져와 자리에 앉은 야오밍은 그제서야 어느 정도는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이즈로 줄었지만,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치 올림픽 경기의 메달이 걸린 경기인 양 자신의 청소년팀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유의 유머를 선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아동이 사이드라인에서 3점슛을 시도하자, 야오밍은 마치 농구공을 막으려는 것처럼 거대한 팔을 뻗었고, 관중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나왔다.경기가 끝나고 사진을 찍는 시간이 시작되었고 야오밍은 몇 시간 동안 포즈를 취했다. “사람들을 돕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야오밍은 NBA의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며 말했다. 야오밍은 지역주민들의 집에 음식, 게임 혹은 한 번은 매트리스를 기부하러 방문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움을 받은 어떤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의 눈을 통해, 그분의 반응을 통해 침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어떤 이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이같은 경험은 야오밍의 삶에서 사회공헌이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오밍은 야오재단을 설립하고 장애인 올림픽 등의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제가 이같은 방식으로 사회공헌활동을 진행하는 이유는 직접 사람들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선수범의 힘을 믿습니다. 눈을 마주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이 진심으로 맞닿는 것, 이것만이 실제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야오밍은 “그리고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라고 덧붙였다.위대한 농구선수가 되는 것은 아마도 야오밍이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운명이었던 듯하다. 야오밍의 부모는 모두 스타 농구선수였다. 아버지 야오즈위안은 신장 6.10피트(208㎝)로 최고의 센터 포지션선수였으며, 어머니 팡펑디의 신장는 6.2피트(188㎝)였다. 야오밍은 장차 뛰어난 농구선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야오밍이 10살 되었을 무렵, 신장은 5.5(167㎝)피트가 넘었고 체육영재학교로 전학했다. 그리고 2002년 휴스턴팀이 야오밍을 1순위로 드래프트하면서 야오밍은 드래프트 우선순위로 지명된 최초의 외국인선수가 되었다. 야오밍의 데뷔전을 둘러싸고 중국 농구팬들은 뜨거운 기대감을 드러냈고 미국의 평론가들은 회의론을 펼쳤다. 찰스 바클리는 야오밍이 첫 시즌 출전경기에서 19점 이상을 득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야오밍이 8번째 게임에서 벌써 220점을 득점하면서 벌로 당나귀 엉덩이에 입맞춤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NBA 최고의 선수 샤킬 오닐은 야오밍을 무시하며 잘난 체 했다. 그러나 야오밍은 동요하지 않고 겸손함과 유머로 대처했다. 샤킬 오닐이 뛰는 마이애미 히트와 치룬 첫번째 경기에서, 마이애미 히트는 8000개의 포춘쿠키를 나누어주었다. 사실 중국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포춘쿠키였기에 이는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야오밍은 미국식 특별간식인 포춘쿠키를 맛있게 먹었다고 말하며 유머로 대처했다. 샤킬 오닐은 야오밍과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짓궂게 굴었으나, 중국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야오밍은 올스타 투표에서 샤킬 오닐을 제쳤다. ━ 상하이 샥스팀 인수, 중국농구협회장 맡아 야오밍은 NBA에서 활동하는 기간 게임당 평균득점 19.2점, 리바운드 9.2개의 기록을 남겼다. 야오밍이 거둔 성공은 고국 중국에서 농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고, 더 나아가 농구게임의 글로벌화를 촉진시켰다. 작년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을 때, 샤킬 오닐이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 쟈켓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제서야 전당에 입성했다는 것 자체도 야오밍의 성품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이다. NBA 선수들이 명예의 전당 후보로 고려되기 위해서는 5년 동안 은퇴한 상태여야 한다. 사실 야오밍은 이전에 중국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2012년 이미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하지만 그 당시 야오밍은 자신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대열에 합류하기에 아직은 시기가 너무 이르다며 고사했다.야오밍은 처음부터 이런 스타일을 견지했다. “야오밍은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리버 타운(River Town)』을 비롯해 중국을 주제로 한 여러 권의 베스트 셀러를 낸 작가 피터 헤슬러의 말이다. 지의 중국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피터 헤슬러는 첫 시즌 내내 야오밍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 누가 그런 압박을 견뎌내면서도 그토록 품위있게 대처할 수 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홍콩에서 오랫동안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팀 누난은 야오밍을 10대 시절부터 지켜보았다. “야오밍은 진짜배기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그것도 매우 잘 극복해냈지요.” 팀 누난의 말이다. “저는 수많은 운동선수들은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선수도 야오밍만큼 민낯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토록 편안해 하는 선수는 없었습니다.” 야오밍은 미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새로운 음식을 즐겼고, 비디오게임을 하고, 영어를 배웠으며 모든 것을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야오밍은 고국 중국에서 뜻깊은 일을 하겠다는 목표를 절대 잊지 않았다. 중국으로 돌아온 야오밍은 2009년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하이 샥스팀을 인수했으며 이후 팀의 운영을 개선했다. 야오밍은 선수 훈련 및 연봉 조건을 개선하고 팬층을 확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야오밍이 회장직을 맡은 이후 중국농구협회가 빠른 시일 내 규모를 확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야오밍은 현재 중국농구협회가 재무상태가 열악하고 강력한 팬층이 부족했던 10년전의 NBA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야오밍의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현재 기회의 문이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단주들이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야오밍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중국의 농구선수들은 형편없는 급여를 받으며 그렇다할 특전도 누리지 못했다. 체육관 시설은 노후하여 연기로 가득했으며, 선수들은 버스로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함께 방을 쓰거나 기숙사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피터 헤슬러는 보통 크기의 침대에 몸이 맞지 않았던 야오밍이 장신의 체구를 지탱하기 위해 침대 옆에 캐비닛을 붙이곤 했다고 기억한다. “야오밍은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야오밍은 소속팀과 모국을 위해 코트를 누비며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중국으로 돌아가 국가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이같은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와 대중은 야오밍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문을 제기하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야오밍은 17세 때 만난 최초이자 유일한 연애상대 그리고 마찬가지로 스타 농구선수였던 예리와 결혼했고, 부부가 딸인 야오친레이를 낳은 것은 중국 전역의 화제였다. 그러나 중국의 온라인 채팅 사이트에서는 딸을 미국 휴스턴에서 낳기로 한 부부의 결정에 대해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야오밍이 중국을 등지고 더 큰 스타덤과 보상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팽배해있었다. 하지만 야오밍은 NBA에서 활동하던 초창기부터 사회공헌가로서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오밍에게 이같은 영감을 불러넣어준 이는 같은 로케츠팀에서 활동했던, 그리고 그 역시 장애물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룩한 농구선수였던 디켐베 무톰보였다. 무톰보는 고국 콩고에서 병원을 짓고 장학금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무톰보는 제게 사회공헌이라는 아이디어의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사회공헌을 또 다른 차원에서 실행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야오밍의 말이다. “사회공헌도 결국 경영입니다. 경영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농구선수로 활약하면서 학업에 소홀했던 야오밍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부과정을 수료하는 중이다. 야오밍은 비즈니스 경영을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야오밍은 다양한 파트너십과 후원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스포츠매니지먼트사도 소유하고 있다. 야오밍이 중국농구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후, 많은 이들이 미국 NBA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데 일조한 데이비드 스턴에 야오밍을 비견하고 있다. 야오밍이 “국영기업인 중국농구협회를 민영화해 아시아 최대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프로 농구리그로 만들 것이다”라는 것이 나이키 중국사업부의 마케팅임원을 지낸 바 있고 현재 상하이에 기반한 ‘주스포츠’의 공동소유주인 테리 로즈의 말이다. ━ 중국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 리더로 부상 야오밍은 중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품고 있다. 바로 대중이 농구를 좋아하게 만들고, 천천히 차세대 농구선수들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야오밍은 이 같은 노력을 펼쳐왔다. 2012년 야오밍은 47개 학교에서 유소년 농구리그를 창설했다. 작년에는 380개 학교에서 농구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희망학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수천 명의 아동에게 농구를 소개했다. 야오밍이 말했다. “농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면서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스포츠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야오밍의 행보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야오밍은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른다’라는 원칙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야오밍을 옆에서 지켜본 테리 로즈의 말이다. “향후 10~20년 동안, 아마도 야오밍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 리더로서의 위상을 한층 공고히 할 것입니다.” - RON GLUCKMAN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017.07.25 12:04

8분 소요
지난해 돈 가장 많이 번 스타는?

산업 일반

션 콤즈가 1억3000만 달러로 1위, 비욘세와 J.K. 롤링, 드레이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5위 안에 들어 명성과 재산은 대체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다수 유명인사는 명성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그들은 매년 수입을 바탕으로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가 매겨진다. 지난 6월 초 포브스는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유명인사 리스트를 발표했다.1. 션 콤즈(영화배우 겸 가수) 1억3000만 달러. 2. 비욘세 놀스(가수) 1억500만 달러. 3. J.K. 롤링(작가) 9500만 달러 4. 드레이크(가수 겸 영화배우) 9400만 달러 5. 크리스타아누 호날두(축구선수) 9300만 달러 6. 더 위켄드(가수) 9200만 달러 7. 하워드 스턴(영화배우) 9000만 달러 8. 콜드플레이(가수) 8800만 달러 9. 제임스 패터슨(소설가) 8700만 달러 10. 르브론 제임스(농구선수) 8600만 달러영화배우 겸 가수 션 ‘디디’ 콤즈(47)가 수입 1억3000만 달러로 포브스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99년 포브스에 “난 허튼짓 안하고 열심히 재산을 모은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된 듯하다. 콤즈는 포브스의 ‘가장 부유한 힙합 아티스트’ 순위에서도 순자산 8억2000만 달러로 1위를 차지했다. 콤즈는 지난 한 해 동안만 1억30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비욘세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포브스는 콤즈가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을 꼽았다. 우선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의류 브랜드 ‘션 존’의 주식 3분의 1을 매각했고 ‘배드 보이 패밀리 리유니언 투어’ 콘서트를 시작했다. 게다가 세계적인 보드카 업체 디아조 시록과의 파트너십 계약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지난해 포브스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던 테일러 스위프트는 올해는 49위로 밀려났다. 반대로 지난해 34위였던 비욘세는 1억500만 달러를 벌어들여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포브스는 그녀의 신작 앨범 ‘Lemonade’와 ‘포메이션 월드 투어’의 성공을 요인으로 꼽았다. 비욘세는 2009년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업계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포메이션 월드 투어’로 2억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그 밖에 힙합 뮤지션 드레이크(9400만 달러)와 스페인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9300만 달러), ‘해리 포터’의 작가 J.K.롤링(9500만 달러)이 톱5 안에 들었다.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유명인사 100인이 지난 한 해(2016년 6월~2017년 6월) 벌어들인 세전 수입은 총 51억5000만 달러였다. 포브스의 평가는 IMDB와 NPD, 북스캔, 폴스타, 닐슨, 송킥, 박스오피스 모조 등이 발표한 수치와 업계 간부들의 인터뷰를 근거로 했다. 요즘은 음원 스트리밍이 음악업계에서 돈을 버는 정당한 방식으로 인정 받는다. 지난 한 해 동안 100인의 부자 유명인사들의 총 수입은 50억 달러를 조금 웃돌아 그 전해와 비슷했다. 하지만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수입은 2016년 1억7700만 달러에서 2017년 3억8700만 달러로 118% 증가했다. 스트리밍 부문의 1위는 더 위켄드(수입 9200만 달러, 6위)로 지난 2년 동안 55억 스트리밍을 기록했다.“요즘 아티스트들이 음악으로 돈 버는 방식은 1980년대 팝의 황금기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고 더 위켄드(본명 아벨 타스파예)는 말했다. 수입 8800만 달러로 8위에 오른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는 ‘헤드 풀 오브 드림스 투어’로 5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작가 제임스 패터슨(8700만 달러)과 NBA 수퍼스타 르브론 제임스(8600만 달러)는 각각 9위와 10위를 차지했다.- 앤드루 N. 화이트 아이비타임즈 기자

2017.06.26 20:26

3분 소요
[아놀드 파머가 현대 골프에 남긴 10가지] 골퍼로, 사업가로 뚜렷한 발자취

산업 일반

아멘 코너, 아니의 군대, 4색 우산... 최고의 성적 내지 못했어도 최고의 사랑 받아 아멘 코너, 아니의 군대(Arnie’s Army), 노랑과 초록·빨강·흰색의 4색 우산, TV시대 수퍼스타, 왕(the king)으로 불린 사내…. 지난 9월 25일 87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간 아놀드 파머(1929~2016)는 현대 골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그가 가져온 골프시장의 확대와 골프를 보는 시각의 변화, 그의 골프 철학을 소개한다. ━ ① 오거스타에 ‘아멘 코너’ 에 등장 아놀드 파머는 마스터스에서 1958년에 드라마틱한 첫 승을 올렸다. 대회 3라운드 후 비가 많이 내려 코스는 질척거렸고, 경기위원회는 볼이 땅에 박히면 무벌타 드롭을 하기로 정했다. 이튿날 파머가 파3 12번 홀에서 한 티샷이 그린 위 언덕의 흙에 박혔다. 파머는 거기서 볼을 드롭하고 벌타를 더해 5타를 적어야 했다. 파머는 선두인 켄 벤추리를 한 타차로 추격하는 상황이 됐다. 475야드인 파5의 13번 홀에서 티샷을 길게 보낸 파머는 고민에 빠졌다. 개울에 못 미쳐 레이업을 할까? 하지만 파머는 3번 우드로 낮게 날아가는 드로우 샷을 시도했고, 볼은 홀 5.4m 지점에 멈추면서 이글을 잡아냈다.그 기세를 이어 플레이를 마쳤다. 15번 홀에 이르렀을 때 12번 홀에서 드롭한 볼이 무벌타로 인정받자 파머는 부지불식 간에 ‘아멘'을 외쳤다. 파머는 12번 홀에서 파를 잡은 것으로 되었고, 당시 허버트 워런 윈드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는 그 내용을 쓰면서 11~13번 홀을 ‘아멘 코너’로 처음 이름 붙였다. ━ ② 선수 매니지먼트 사업의 시초 파머 이전까지 골프 선수와 팬과 대회와 업체는 별개였다. 하지만 파머 덕에 스타를 잘 활용하면 스포츠가 더 재미있고 흥행이 된다는 게 입증이 됐다. 그러면서 선수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정착됐다. 1960년에 마크 맥코맥이라는 클리블랜드 출신 변호사가 파머의 스타성을 포착했다. 그리고 계약서 대신 악수로 맺은 계약은 평생 이어졌다. 맥코맥은 IMG라는 스포츠마케팅 회사를 설립한다. 맥코맥은 아놀드 파머를 마치 영화 의 주인공 트루먼처럼 만든다.인간적이고 믿음직하며 솔직한 옆집 남자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이후 파머는 캐딜락, 롤렉스, 심지어 전립선암 예방 광고에도 출연했다.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음료수 ‘아놀드파머’까지 나와 미국에서 연 3억 캔 이상 팔린다. 맥코맥은 이후 파머와 함께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까지 묶어 이른바 ‘빅3’로 만드는 스타 마케팅까지 성공시켰다. 오늘날 중동·아시아에서 신규 골프 대회를 개최하려면 IMG 등의 선수들을 보유한 매니지먼트사를 통해야 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 ③ 아니의 군대 탄생 아놀드 파머의 팬클럽 ‘아니의 군대(Arnie’s Army)’가 만들어진 건 사연이 있다. 마스터스에서 고든 캠프(지금은 포트 고든)의 군인들이 그를 응원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 군대의 시작이다. 파머는 1959년에 마스터스에 디펜딩 챔피언으로 출전했다.당시 오거스타내셔널 회장이던 클리포드 로버츠는 골프장 근처 고든 캠프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을 데려다 스코어보드를 적게 하는 등 부족한 일손을 메웠다. 당시에는 누구도 마스터스가 그렇게 커질지 몰랐다. 입장료는 5달러였고, 초등학교 교사가 입장권을 박스째 들고서 홍보할 정도였다. 로버츠는 대회가 TV에 중계되는 것을 감안하고, 군인이 제복만 입으면 공짜로 입장시켰다. TV에 갤러리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공짜로 대회장에 들어온 군인들은 골프를 잘 몰랐다. 그래서 가장 잘한다는 선수를 따라다닌 것이 디펜딩 챔피언이던 파머였다. 물론 파머 역시 해안경비대 근무를 했었고, 경기를 호쾌하게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어서 군인들과 빠르게 교감할 수 있었다. 파머는 58년 우승을 시작으로 마스터스에서 2년 간격으로 64년까지 4번 우승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경기를 따라다니는 군인들이 늘어났다. 조니 핸드릭스 오거스타크로니클 기자가 ‘아니의 군대’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 ④ 체리힐스의 대역전극 1960년 6월 18일 덴버의 체리힐스 골프장에서 열린 US오픈 마지막 날이 아놀드 파머를 수퍼스타로 만든 대회였다. 파머는 그 해 4월에 마스터스에서 우승했다. 마지막 두 홀에서 버디를 하며 그린재킷을 쟁취했다. 당시에 하루 36홀을 치르는 US오픈의 마지막 날 전반 18홀을 마친 그는 선두인 마이크 수책에게 7타 뒤진 15위였다. 이전까지 후반 18홀 라운드에서 5타 이상의 격차를 뒤집은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파머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65타를 치면서 대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1번 홀부터 드라이버 샷을 원온시키는 놀라운 플레이를 선보이면서 타수를 줄여가더니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파머의 버디 행진으로 코스는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거칠게 질주하는 파머를 막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1만 명의 갤러리에게도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이던 벤 호건의 시대가 저무는 신호였다. 파머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선수는 오하이오에서 온 잭 니클라우스라는 아마추어였다. 우승을 확인하는 순간 파머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공중으로 던졌다. 팬은 파머의 그 같은 모습에 함께 열광하고 갈채를 보냈다. ━ ⑤ 디오픈을 메이저로 재조명 1860년에 시작돼 골프사에서 가장 전통있는 대회인 디오픈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광채를 많이 잃었다. 2차대전 이후 골프는 미국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급성장했지만 유럽은 아직 유러피언투어조차 결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디오픈 101주년을 맞아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1960년 디오픈 출전자 74명 중에 미국의 아놀드 파머가 있었다. 파머는 그해 마스터스와 US오픈을 연달아 우승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메이저를 정복할 목표를 세우고 죽어있던 디오픈을 찾은 것이었다. 그때까지 영국과 아일랜드만의 지역 대회이던 디오픈은 파머가 출전한 이후부터 메이저다운 대접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파머는 그 대회에서는 한 타 차이로 호주의 켈 네이글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듬해 로열버크데일에서 열린 디오픈과 로열트룬에서 열린 62년 대회를 연이어 석권하며 클라렛저그를 들어올렸다. 파머는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록밴드 비틀즈가 미국을 강타하기 4년 전에 골프에서는 미국의 파머가 영국을 먼저 강타했다. ━ ⑥ 4색 우산 로고의 탄생 TV시대의 스포츠 스타인 파머는 맥코맥을 만나 자신의 브랜드 사업을 일찍부터 시작했다. 1961년 아놀드파머엔터프라이즈를 세우면서 선수를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하지만 어떤 로고를 붙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펜실베이니아 리고니아 사무실에서 브레인스토밍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창 밖으로 예쁜 여인이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는 걸 본 아놀드 파머가 퍼뜩 우산을 제안했다. 생활 어디서나 있으면서도 로고로 쓰이지 않은 이미지를 고민하다가 얻은 아이디어였다. 파머가 제안한 우산 로고는 이후 골프장 설계, 패션 등 각 분야에서 파머를 상징하는 로고가 되면서 엄청난 가치를 만들었다. 세계 어디서나 누구나 한 번에 떠올리는 브랜드였다. 심지어 그가 죽기 전까지 샷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4색 우산 로고 덕택에 그는 연 4000만 달러를 벌었다. ━ ⑦ 손등이 타깃을 향하는 퍼팅 파머가 선수 생활 내내 지켰던 퍼팅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 스트로크 내내 왼쪽 손등이 타깃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폴로스루에서 왼쪽 손목을 구부리지 말고 편다. 스트로크를 하는 동안 왼손이 타깃에 대해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면, 백스트로크가 일관된다. 임팩트 이후에 왼쪽 손목을 컵처럼 구부리지 않으면, 볼이 홀 왼쪽으로 휘어지는 실수를 확실하게 피해갈 수 있다. 파머의 퍼팅은 손목 동작보다 팔과 어깨를 이용한 스트로크가 돼야 한다는 퍼팅의 교본이었다. 파머가 어렸을 적 골프장 그린키퍼로 일한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평생 바꾸지 않은 한 가지는 그립이었다. 왼쪽 검지가 오른쪽 손가락 위로 확실하게 올라가고 손잡이 끝에 닿는 리버스오버랩 방식이다. 이 방식은 양손의 힘을 균등하게 만들어서 스트로크 도중에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쥐지 않도록 했다. 파머는 항상 ‘나는 양손으로 퍼트한다’라고 말했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스트로크한다’는 퍼팅 이론은 파머 때 확립됐다. ━ ⑧ 메이저대회 7승 포함 총 62승 파머의 메이저 우승은 총 7번이다. 마스터스는 58년부터 격년 간격으로 4번, US오픈은 60년, 디오픈은 61, 62년이다. 메이저가 아닌 일반 우승 기록을 보면 총 62승을 하고 시니어투어 등에서 30승을 추가했다. 55년 캐나다오픈에서 PGA투어 첫 승을 거둔 이래 파머는 20년 동안 꾸준히 승전보를 들려주었는데, 극적인 우승일 때가 많았다. 심지어 패했을 때조차 극적으로 패할 때가 많아서 그의 경기는 항상 관심거리였다. 우승이 없는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은 64, 68, 70년에 2위만 세 번을 했다. US오픈 우승은 한 번이지만 연장전에서 세 번이나 졌다. 홀인원은 최단 거리 122야드에서 최장 245야드에 이르기까지 평생 21개를 했다. 모두 합치면 3305야드다. 65년 한 해에는 3,5,9월에 세 번을 했다. 가장 나중에 한 홀인원은 2011년 82세 생일을 7개월여 지나 올랜도에 소유한 베이힐클럽 7번 홀에서 기록했다. 파머는 특유의 파워와 과감함으로 골프 대회장을 마치 스포츠 경기장으로 변모시켰다. 이전까지 부유한 신사들의 레저였던 골프는 파머가 등장하면서 보통 사람의 액티브한 스포츠로 여겨졌다. 입에 담배를 물고, 셔츠자락은 삐져나오고, 샷을 할 때 장갑을 꽉 끼고, 바지를 추켜올려 성큼성큼 걷는 모습은 마치 링에 오르는 권투 선수였다.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의 별명은 ‘왕(the King)’이었다. ━ ⑨ 파머 제국 건설 파머는 자신의 이름을 딴 PGA투어 아놀드파머인비테이셔널이 열리는 베이힐을 가졌고,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페블비치골프링크스도 공동 소유했다. 전 세계 25개국에 300곳 이상의 골프장을 만들었는데 극지방을 제외하고 대륙마다 파머의 코스가 등장했다. 파머는 세탁체인과 자동차 대리점, 아시아 전역의 400곳에 달하는 패션과 구두 매장도 보유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던 꿈을 이뤄 55년 간 2만 시간 비행 기록을 남겼다. 그가 살던 펜실베이니아 라트로브의 공항은 ‘아놀드 파머 리저널’ 공항으로 불린다. 파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생일에 파머의 집을 찾아 축하인사를 했다. 존 F.케네디 대통령과 라운드 일정을 잡았지만 취소됐다. 조지 W. 부시와는 케네벙크포트에서 발발굽 던지기 놀이를 했지만, 골프 라운드는 하지 않았다. 함께 라운드한 대통령을 꼽자면 아이젠하워를 시작으로 닉슨, 포드, 레이건, 41대 부시와 빌 클린턴까지 6명이었다. ━ ⑩ 항상 핀을 향한 사나이 LA의 란초파크 골프클럽에서 열린 1961년 LA오픈 첫 라운드에서 파머는 파5 18번 홀에서만 12타를 쳤다. 내리막인 두 번째 샷부터 시작해서 네 번의 3번 우드 샷이 연속으로 OB가 났다. 그린의 왼쪽과 오른쪽에 모두 OB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샷이었지만, 과감하게 핀을 향하는 게 파머의 스타일이었다. 파머는 당시 ‘라이가 좋았기 때문에 도박으로는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돌풍이 불어서 좋은 샷을 망쳐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샷도. 세 번째 시도에서는 실수를 과도하게 바로잡으려다가 훅이 나면서 OB가 됐다. 그 다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한 번 더 했다. 나중에 그 홀 티박스 옆에는 당시 상황을 새긴 비석이 새겨졌다. 헨리 롱허스트는 ‘항상 핀을 공략했던 파머 여기 잠들다’를 파머의 묘비명으로 쓰자고 했다. 그 역시 평범한 골퍼처럼 많이 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탁월하지만 스스로 소박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낸 골퍼는 잭니클라우스였으나, 최고의 사랑을 받은 골퍼는 파머였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2016.11.2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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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총액 100대 기업에서 탈락한 25개사] 조선·중공업·해운 천문학적 적자행진

산업 일반

글로벌 경기 침체, 중국 추격, 저유가에 고전 … 전통의 굴뚝산업 휘청 활력 잃은 한국 경제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에서 이탈한 기업은 화려한 과거를 자랑한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STX조선·한진해운·현대상선 등등. 한 때 글로벌 조선·해운업계의 리딩컴퍼니로 승승장구했다. 200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글로벌 경기 침체 이후로는 업황 부진과 실적 하락에 시달렸다. 구조조정의 수모를 겪으며 시가총액도 급감했다. 한국의 중후장대(重厚長大)산업은 수명을 다했다고 평가 받듯, 주식시장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시가총액 100대 기업에서 탈락한 기업은 총 25개다. 산업별로는 조선·플랜트·중공업이 10개로 가장 많고, 유통·상사 4개, 전기·전선 3개, 해운·물류 3개, 금융·증권 2개, 철강·건설·소재·통신 각각 1개씩이다. LS·두산 등 지주사의 경우 주력 산업군에 포함해 분류했다. 상장 폐지된 2곳(SK브로드밴드·STX조선)을 제외한 23개 기업의 평균 순위는 127단계 하락했다. 조선·중공업·플랜트 분야의 몰락이 도드라진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해운 물동량이 줄자 선박의 신규 발주가 감소한 영향이다. 여기에 매출 증대를 위한 무리한 플랜트 사업 확장과 저가 수주 경쟁이 제살을 깎아먹는 결과로 이어졌다. ━ 96위 STX, 1015위로 수직 추락 조선업 가운데에서도 하락폭이 가장 큰 기업은 STX다. 96위에서 919단계 하락하며 1000위 밖(1015위)으로 밀려났다. STX는 2012년 5031억원, 2013년 1조5956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후 2014년 3806억원의 반짝 흑자를 냈다. 그러나 2015년 490억원, 올 상반기까지 3647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내며 부진한 모습이다. 2008년 STX의 주가가 지나치게 고평가됐던 영향도 있다. 2007년 1월 1만8000원대이던 STX의 주가는 같은 해 11월 15만원대로 치솟았다. 그러다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차익실현 매물이 쏟아지며 2008년 4만원대로 떨어졌다. 주가 거품 붕괴와 함께 찾아온 경영난으로 투자금 이탈에 속도가 붙었다.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 무상감자는 STX 주가 하락을 부채질했다.결정타는 세계 4위 조선사였던 주력 계열사 STX조선의 상장 폐지다. STX조선은 2012년 7820억원, 2013년 4조5737억 원의 막대한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석유·액화석유가스(LPG)·컨테이너선 등 특수선박에 주력했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와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3년 STX조선이 자율 협약에 들어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한 덕에 2014년 1조 3619억원의 흑자를 내며 회생의 가능성을 엿보였다. 그러나 2015년 7245억원, 올 상반기까지 1조2519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내며 희망의 끈을 놓쳤다. 채권단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은 자율협약 기간 중 STX조선에 약 4조원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채권단은 자율협약을 거치며 STX조선을 ‘특화 중소형 조선사’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조선업 부진 속에 공허한 메아리만 남겼다. 결국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지난 5월 자율협약을 중단하고 법정관리 처분하며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STX조선의 2008년 시가총액 순위는 89위였다.STX를 비롯한 조선·중공업·플랜트 업종은 경기 침체 이후 업황이 반등하는 ‘수퍼 사이클’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생산능력을 감축해야 하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치킨 게임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승자 독식’의 시장 구조상 제살 깎아먹기가 불가피하다. 중국은 2012년부터 시장점유율 1위(수주량 기준)를 지키고 있으며 올 1~8월에는 시장점유율을 66%나 점하고 있다. 한국이 저가 수주를 통해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시장을 잠식했던 것과 유사한 양상이다. 지난 4월 불거진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에 큰 기대가 들지 않는 이유다.이런 관측이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삼성중공업(30→101위)·대우조선(49→162위)·현대미포조선(66→132위)·한진중공업(99→342위) 등 대부분 기업이 순위표에서 미끄러졌다. 이제 시가총액 100위 안에 드는 조선·중공업 회사는 현대중공업(25위)과 두산중공업(83위) 뿐이다. ━ 대우조선, 13년 번 돈 3년 만에 허공으로 삼성중공업은 올해 357억원의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예상이 현실화한다면 지난해(1조2121억원 적자)에 이어 2년 연속 적자다. 삼성중공업은 수주 잔량을 소진하고 있어 당장은 큰 문제가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2018년 수주 절벽에 부딪힐 것이란 비관적인 관측이 제기된다. 2015년 10월부터 11개월 동안 이어진 수주 실적 ‘0’의 고리를 끊고 지난 9~10월 유조선 9척을 신규 수주했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1조 2000억원대의 순손실을 메울 만한 수준이 아니란 것이다. 특히 삼성그룹 지배구조 재편 과정에서 삼성엔지니어링과의 합병 가능성도 열려있으며, 지분구조상 다른 계열사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독자생존’ 구조라는 점도 불확실성을 키운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삼성엔지니어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가 총액 순위는 2008년 56위에서 올해 105위로 떨어졌다. 플랜트 저가 수주와 저유가 탓에 실적이 악화되며 지난 3년 간 누적 적자는 1조9566억원. 올해 당기순이익은 814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경영재편 시나리오 탓에 사업재편은 요원한 실정이다. 삼성엔지니어링 관계자는 “경직된 사업 구조 속에서 업황 변화에 맞춰 상시적 인력감축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설명했다.대우조선 역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대우조선은 2012년 2219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이래로 2013~2015년 3년 내리 적자를 기록했다. 3년 누적 적자만 4조8532억원에 달한다. 올해도 2000억원 안팎의 순손실이 예상된다. 2000년 산업은행에 편입된 후 2012년까지 벌어들인 3조8465억원(당기순이익 기준)보다도 많다. 13년 간 벌어들인 것보다 1조원 많은 돈을 단 3년 만에 허공으로 날렸다. 대우조선은 세계 1위 현대중공업과 어깨를 견주는 회사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무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산업은행 산하에서 경영정상화에 나선 터라 꾸준한 수주와 흑자 경영을 요구받았다. 이 때문에 시장환경 악화에도 무리한 수주에 나섰다. 낙하산 경영진의 모럴해저드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특히 저가 수주 경쟁을 촉발해 조선업 전체에 피해를 입혔다는 평가도 있다.현대미포조선과 한진중공업도 고난의 행군 중이다. 이들 회사는 극심한 경영난에도 2조~4조원대 연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골병을 앓고 있다. 지난 5월 채권단과 자율 협약을 체결한 한진중공업은 수주 부진으로 부산 영도조선소 등 생산설비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대륜 E&S·대륜발전·별내에너지 등 주요 계열사를 매각할 계획이다. 자산 매각을 통해 현재까지 약 2조원의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2014년 6793억원 적자의 실적 쇼크를 기록한 현대미포조선 역시 비핵심 자산을 매각해 주머니를 튼튼하게 하고 있다. 모회사인 현대중공업과 더불어 비교적 회생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 속에 반등을 준비 중이다. ━ 한진해운 청산, 현대상선 회생 가능성 조선·중공업 부진의 배경이 된 물류·해운 업종도 상황이 나쁘다. 양대 해운사인 현대상선(137위)과 한진해운(467위)은 각각 108·387단계 하락했다. 해운업계의 뜨는 별이란 평가를 받던 STX팬오션은 57위에서 106위로 밀려났다. 현대상선이 경영위기에 놓이며 자회사인 현대증권도 120위로 떨어졌다. 물류·해운업은 경기 민감 업종이지만, 정기선 노선을 많이 확보하면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호황기에는 투자금이 몰린다. 그러나 더 이상은 주식시장의 수퍼스타가 아니다. 1985년 지수 1000으로 시작한 발틱운임지수는 7월 707로 떨어졌고, 컨테이너 정기선 운임료도 1년 전에 비해 50% 가까이 떨어지는 등 업황이 냉각됐다.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는 한진해운은 청산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회생 가능성이 작다고 보고 있다. 민간 기업의 손실을 막는 데 국민 혈세를 쓸 수 없다는 입장이다. 10여년 전 고가에 맺은 용선료 계약이 걸림돌이다. 업황이 좋을 때 정기선 노선을 뺏기지 않으려고 비싼 돈을 주고 빌린 선박 이용료가 지나치게 불어났다. 빚더미에 짓눌린 한진해운은 지난 6월 선주들과 용선료를 인하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채무 조정도 못했다.현대상선도 마찬가지 문제로 고난을 치렀지만 상황은 한결 낫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권을 포기하고 사재를 출연하면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냈다. 여기에 용선료를 21% 낮추는데 성공하면서 회생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글로벌 해운사의 합종연횡과 선박의 대형화, 경쟁 심화, 경기 부진, 운임료 하락 등 악재가 겹쳐있어 상황을 낙관하기는 이르다. 현대상선의 자회사인 현대증권도 모기업의 경영난을 함께 겪으며 시가총액 순위가 76위에서 120위로 내려왔다가, 현재는 KB투자증권과 합병을 앞두고 상장 폐지됐다.STX팬오션의 경우 양대 해운사에 비해 홍역을 일찍 앓았다. 2012년 4653억원, 2013년 1조9101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며 2013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후 강도 높은 재무구조 개선 노력으로 2014년 7861억원, 2015년 455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지난해 7월 거래정지도 풀렸다. 그러나 업황 부진과 STX계열사라는 디스카운트 탓에 주가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규모가 큰 조선·해운의 부진은 기계·철강·전선 등 연관산업에도 악영향 미치고 있다. 이들 업종은 전자·자동차·건설 등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에 부진이 꼭 조선·해운 탓만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 중후장대산업의 분위기 침체를 대략적으로 읽을 수 있다.굴삭기·로더 중장비와 디젤 엔진 등을 만드는 두산인프라코어는 시가총액 순위 72위에서 147위로 고꾸라졌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세계적인 중장비 회사인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2000년대 중반 관심종목으로 떠올랐다. 공격적인 투자로 앞으로 성장 가능성을 주목받았다. 그러나 글로벌 경기 침체로 각종 개발·건설 사업에 차질이 생기며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지난해 8595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250% 넘는 부채비율을 기록하는 등 재무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 영향으로 올 3월 공작기계 부문을 1조1308억원에 매각하는 등 재무건전성 강화에 힘 쓰고 있다. 핵심 계열사의 부진 탓에 지주회사인 두산의 시가총액 순위도 62위에서 102위로 떨어졌다. 주류·의류·유통 기업이던 두산의 변신은 높게 평가받고 있지만, 성과를 내기까진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 중장비·철강·전선 등 연관 산업에도 악영향 주가가 2007년 고점 대비 10분의 1가량으로 하락한 동국제강은 83위에서 227위로 크게 밀렸다. 2000년대 중반 호황기 때 수익성 제고를 위해 열연공장 등에 뛰어든 것이 발목을 잡았다. 고철값 하락과 중국의 증산 등 악재가 뒤섞였다. 연간 매출은 6조원에 달하지만 2012~2015년 4년간 누적 적자가 8704억 원에 달한다. 그만큼 수익성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동국제강을 비롯해 동부제철 등 중견 제철사들이 대부분 열연 등 투자 확대에 나섰다가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해저케이블 등 대형 전선을 생산하는 LS(68→114위)와 LS산전(87→159위), 대한전선(97→126위) 등도 주가가 부진했다. 지난 4년 간 1조4363억원의 당기순손실 등 실적 부진과 경영권 불안에 시달리던 대한전선은 자본잠식 문제로 지난해 5대 1 감자와 액면분할을 벌인 여파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상장폐지를 가까스로 면한 수준이다. LS와 LS산전은 구리 등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한 때 실적 불안에 시달린 사례다.한편 신세계(15→108위)·SK네트웍스(54→124위)·하이트진로(69→142위)·농심(91→121위) 등 일부 유통·상사 기업도 시가총액 순위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신세계는 2011년 사업부 형태이던 이마트를 인적분할해 상장하면서 시가총액 순위가 많이 하락했다. SK네트웍스는 렌터카 업종의 경쟁 심화와 면세점 특허 취득 실패 등 악재가 겹치며 주가가 급락했다. 하이트진로와 농심은 매출 부진과 업종 내 경쟁 심화 등의 영향으로 시가총액 순위가 꺾였다.

2016.11.0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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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무버 노리는 글로벌 기업은 지금] 신사업 속도전, M&A가 지름길

산업 일반

IT기술을 필두로 세계 산업 지형도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정보기술의 총아였던 PC는 30년 이상 최대 성장산업으로 영광을 누렸지만, 그 뒤를 이은 스마트폰은 세상에 나온 지 10년 만에 쇠퇴기를 걱정해야 할 정도다. 이제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게 아니라 빠른 자만이 살아 남는다. 지금까지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에서는 활용형 연구(Exploitative research), 지속성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을 위해 기업 중앙연구소를 통한 자체 R&D가 적합했다. 하지만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전략으로 선회해야만 하는 지금은 탐색형 연구(Explorative research)와 파괴적 혁신(Drastic innovation)이 필수다.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발 빠른 M&A인 것이다. 국내외 모든 기업이 신사업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뚜렷한 성공 사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템 발굴부터 인큐베이팅에 이어 실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생각만큼 순탄치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나 경쟁 여건이 급변하는 경우도 다반사고, 기술 개발도 기대했던 것만큼 용이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허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기업 인수합병(M&A)을 고려해 볼 수 있다. M&A는 주로 기존 사업의 규모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왔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시장과 기술의 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유용한 신사업 개척 수단이 될 수 있다. 자체 연구개발(R&D)만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글로벌 공룡 기업들은 이미 M&A에서 답을 찾고 있다. 미래의 유망 스타트업 쇼핑으로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 유망 스타트업 쇼핑으로 미래 대비 미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IT업체 시스코의 역사는 곧 M&A의 역사다. 지난 1993년 이후 진행한 M&A 거래만 무려 120여 건이고, 1993년 이후 약 7년 간 70배 급등한 주가는 신기술 벤처 인수 후 역량을 높이는 시스코의 A&D(Acquisition & Development) 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을 방증한다. 인터넷 라우터 사업으로 출발했던 시스코는 크레센도·그랜드저션 등 스위치 업체들을 연이어 인수하면서 라우터에서 스위치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이후 웹엑스·스타렌트·머라키·누오바 등을 인수하면서 네트워크 장비 기반의 화상회의 시스템을 제공했고, 인터넷프로토콜(IP)을 사용한 네트워크 연관 사업 전분야로 영역을 확대했다.시스코는 2015년에도 사물인터넷(IoT) 실시간 분석회사 파스트림, 네트워크 보안 회사 랜코르, 화상회의 소프트웨어회사 아카노 등을 잇따라 M&A했다. 지난 2월에는 IoT 플랫폼회사 재스퍼테크놀로지를 14억 달러에 전격 인수했으며, 연이어 클라우드 스타트업인 클리커와 네트워크 장비용 반도체 회사인 리에바를 인수했다. 시스코의 혁신 원천은 M&A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구글도 빼놓을 수 없다. 1998년 설립된 이래 130여 개 기업을 M&A하며 성장해온 구글의 경우 특히 세 번의 홈런성 M&A가 관심을 끈다. 첫 번째 홈런은 2005년에 ‘안드로이드의 아버지’ 앤디 루빈으로부터 인수해서 2007년 본격 출시한 모바일 OS ‘안드로이드’이다. 현재 안드로이드의 세계 모바일 OS 시장 점유율은 86.2%에 이른다. 두 번째 홈런은 2006년 인수한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이다. 인수 당시만 해도 16억5000만 달러라는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회의론이 무성했지만, 현재 유튜브는 사용자수 10억 명과 기업가치 700억 달러를 넘기며 세계 동영상 플랫폼의 정점에 올라섰다. 세 번째는 최근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바둑 대결로 화제를 낳은 인공지능(AI) 컴퓨터 ‘알파고’이다. 구글이 약 6억2500만 달러를 주고 인수한 영국 벤처기업 딥마인드의 작품이다. ━ 잠잠하던 애플도 M&A 늘릴 태세 페이스북도 뒤지지 않는 빅딜을 성사시킨 회사다. 페이스북은 2014년 메시징 애플리케이션(앱) 선두주자 왓츠앱을 190억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했다. 무리수가 아니냐는 일부의 걱정에도 왓츠앱은 페이스북보다 빠른 속도로 월간 사용자 수를 늘려왔다. 특히 브라질·인도·멕시코·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2014년 성사된 ‘오큘러스 VR’ 인수도 눈여겨볼 사례다. 이를 통해 페이스북은 단번에 가상현실(VR) 시대를 이끌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페이스북은 오큘러스를 게임과 영상 감상, 스포츠 중계, 원격학습, 원격진료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페이스북은 인공지능(AI) 관련해서도 2015년에 음성인식 통합 플랫폼인 윗에이아이, 동작인식 기술을 가진 페블스인터페이스 등을 인수했다.이에 비해 현금 2330억 달러를 쥐고 있는 애플은 그동안 M&A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11년 이후부터 2016년 2분기까지 애플의 M&A는 49건에 불과했다(같은 기간 구글은 133건). 규모를 봐도 2014년 30억 달러에 사들인 헤드폰 제조 업체 비츠일렉트로닉스 정도가 눈에 띈다. 그 외에는 모두 신규 분야보다는 본업을 보완하는 측면의 M&A에 집중했다. 그러나 애플도 최근의 매출 정체를 돌파하기 위해 대규모 M&A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인공지능(AI)에 대한 애플의 행보가 눈에 띈다. 애플은 업계 최초로 지능형 음성비서 서비스인 시리(siri)를 2011년에 공개한 바 있는데, 최근에 스웰·톱시·보컬IQ·퍼셉티오 등의 관련 스타트업을 인수해서 AI 역량을 대폭 강화했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시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물론 향후 자율주행차에 적용할 기술도 선보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아시아로 눈을 돌려보면 한발 앞선 M&A로 성장을 구가해 온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있다. 소프트뱅크는 1995년 미국 야후에 150억엔을 투자해 지분 37%를 인수한 이래, 2000년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에 2000만 달러를 투자(현재 가치 650억 달러)해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2006년에는 보다폰 일본 법인을 인수(인수가 150억 달러)했고, 2010년 간이 휴대폰 업체 윌컴, 2012년 일본 4위 이동통신업체 이액세스를 거쳐 2013년에는 미국 통신업체 스프린트를 인수(인수가 220억 달러)하면서 통신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2013년에는 핀란드 모바일 게임업체 슈퍼셀을 인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영국 반도체 회사 ARM 홀딩스를 234억 파운드(약 35조 1800억원)에 전격 인수키로 해 화제가 됐다. ARM은 생산시설 없이 칩 설계와 개발만 담당하는 팹리스 업체인데, 칩의 지적 재산권(IP)을 퀄컴이나 삼성전자 등 칩 제조사에 판매해 로열티를 받고 있다. 세계 스마트폰 중 95%가 ARM 기술을 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탑재 중이다. 전문가들은 소프트 뱅크가 이번 인수를 통해 IoT·로봇·커넥티드카 등 차세대 사업에서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세계 M&A 시장 거래 규모 갈수록 커져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딜로직(Dealogic)에 따르면 2015년 세계 M&A 시장 거래 규모는 5조 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0년 대 중반 증가했던 M&A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크게 위축됐지만, 2014년을 기점으로 활기를 되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엔 인수 규모가 100억 달러 이상의 ‘메가딜’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의 컴퓨터 조립업체 델이 스토리지 기업인 EMC를 67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해외 업체들을 중심으로 시장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으려는 M&A 시도가 확산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 기업의 신사업·신기술 M&A 실적은 신통치 않다. 특히 지금과 같은 불황기는 M&A의 최적기임에도 우리 기업들은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우리나라의 해외 M&A 규모는 389억 4000만 달러(347건)에 그쳤다. 같은 기간 일본의 3019억 5000만 달러(1779건), 중국의 2808억 3000만 달러(1275건)에 크게 못 미친다. 건당 M&A 규모도 중국이 2억2000만 달러, 일본이 1억7000만 달러인데 비해 한국은 1억1000만 달러에 그쳤다.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를 필두로 서서히 M&A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2014년 8월 IoT 개방형 플랫폼을 개발하는 미국의 스마트 싱스를 인수했다. 이 플랫폼을 이용하면 사용자들이 모바일 앱을 통해 원격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이나 사무실도 제어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스마트싱스 인수를 통해 IoT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완전한 개방형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방침도 세우게 됐다. 삼성전자는 향후 4년 간 미국 IoT 분야에 약 12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추가 M&A 방침도 밝혔다.또한 2015년 2월에는 미국의 모바일 결제 솔루션 스타트업인 루프페이를 2억5000만 달러에 전격 인수했다. 이 업체의 마그네틱보안전송(MST) 기술을 이용해서 삼성전자는 인수 6개 월 만에 간편결제 서비스인 삼성페이를 출시했고, 모바일 결제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삼성페이가 1년가량 앞서 있던 ‘애플페이’를 편리성에서 뛰어 넘었다고 평가했다.앞으로도 삼성의 M&A 투자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최종 인수에 이르기 전에 유망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를 하고 추후 인수 여부를 저울질하는 방안도 병행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에 대비해서 삼성의 벤처투자 전문 계열사인 삼성벤처투자는 미국 자율주행차 개발 스타트업인 누토노미와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하는 레이더 개발회사 쿼너지시스템즈에 투자했다. 또한 이디본·익스펙트랩스·비캐리어스 등 7개의 AI 기업에 투자했고, VR 콘텐트를 만드는 바오밥스튜디오에도 투자했다. 또한 미국 실리콘밸리에 이어 이스라엘 스타트업 18곳에도 투자를 단행했다. ━ 삼성전자, 해외 기업 인수로 영역 확대 중 한국인의 대표 플랫폼 카카오도 M&A를 통해 성장을 모색하고 있다. 캐시카우 역할을 했던 카카오 게임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M&A로 신사업 동력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2014년 12월 어린이집 스마트 알림장을 서비스 중이던 ‘키즈노트’를 66억 7000만원에 인수했고, 2015년에는 지하철 노선도를 제공하는 ‘지하철 내비게이션’, 기업 투자 전문 회사 케이큐브벤처스를 55억6000만원에 인수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내비게이션 ‘김기사’를 서비스하는 록앤롤 지분 100%를 626억원에 사들였다. 올해 초에는 멜론 운영사 로엔엔터테인먼트의 지분 76.4%를 1조8740억원에 인수했다. 카카오는 2015년 5월, 미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패스’와 ‘패스 톡’의 자산을 인수하는 등 해외 M&A도 본격화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현재 글로벌 M&A 시장에서 가장 큰 손은 중국 기업들이다. 자국 정부의 든든한 지원과 자금력을 앞세워 세계 유망 기업과 벤처를 싹쓸이하면서 ‘M&A 굴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중국 기업의 해외 M&A 규모는 올해 1~6월까지 134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였던 작년의 1068억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세계 M&A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7%로 독일(18%)과 미국(12%)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올해 연간으로 중국 기업의 해외 M&A 규모가 2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인수 대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호주나 중남미 지역의 자원이나 에너지 부문에 집중됐지만, 최근에는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가 있는 미국·유럽의 IT·제조업·소비재 기업으로 다변화하는 모습이다. 특히 IT 분야의 M&A가 급증하고 있는데, 우선 중국을 대표하는 가전 업체인 메이디는 올해 3월부터 일본 도시바 백색가전 사업 부문, 이탈리아 가전기업 클리베, 독일 산업용 로봇 1위 쿠카의 지분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영향력을 높였다. 메이디와 함께 중국 양대 가전사로 꼽히는 하이얼도 올해 초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가전 부문을 54억 달러에 사들였다. 그 외 중국판 넷플릭스로 불리는 러에코는 미국 2위 TV 제조 업체 비지오를 20억 달러에, 알리바바는 싱가포르 전자상거래 업체 라자오를 10억 달러에 각각 인수하는 등 영토 확장을 지속하고 있다.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중국이 한국 업체들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5년도 기업 결합 동향과 특징’을 보면 지난해 외국 기업이 국내 기업을 인수한 데 따른 기업결합 신고는 모두 32건(5조1000억원 규모)인데 이 중 중국 기업의 한국 기업 인수가 10건(1조6000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2014년의 4건(6000억원)에 비해 건수로는 150%, 금액으로는 167% 급증한 수치이다.글로벌 업체들의 M&A 행보는 미래를 읽는 나침반이다. 업체마다 주력 분야의 차이로 인해 다양한 분야의 M&A가 진행되고 있지만, 공통 분야 세 가지를 든다면 드론, 가상현실(VR), 인공지능(AI)을 꼽을 수 있다. ━ 글로벌 기업의 행보는 미래 읽는 나침반 드론은 가장 많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분야다. 구글은 2013년 열기구를 이용, 오지에서도 와이파이 신호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 룬’을 시작한 데 이어 2014년 태양광 드론 제작사 타이탄 에어로스페이스를 인수해 ‘프로젝트 타이탄’을 가동했다. 드론으로 와이파이 신호를 발생시켜 인터넷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페이스북은 타이탄 에어로스페이스를 놓고 벌인 구글과의 인수 경쟁에서 실패한 후 어센타라는 새로운 드론 업체를 인수해서 ‘프로젝트 아퀼라’를 개발 중이다.VR은 구글·페이스북 외에도 애플·인텔·알리바바와 같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단순히 하드웨어가 아닌 근본적인 플랫폼과 콘텐트 확보 등 생태계 구축이 목표다. 특히 애플은 지난해 4월 이스라엘 듀얼 카메라 업체 링스컴퓨테이셔널이미징을 인수하면서 VR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이후 VR 관련해 2015년 6월 메타이오, 11월 페이스시프트를 M&A했고, 올해 들어서도 표정인식 기술 업체인 이모션트와 플라이바이미디어 등을 연이어 인수하고 있다.AI는 구글이 앞서가고 있다. 2014년 1월 인수한 영국의 딥마인드는 스스로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머신러닝 업체다. 현재 딥마인드는 알파고와 DQN을 보유하고 있는데 알파고는 바둑, DQN은 각종 비디오 게임에서 활약하고 있다. 애플도 개발자와 데이터 분석자를 위한 머신러닝 플랫폼 업체 투리를 약 2억 달러에 인수했다. 인텔은 최근 딥러닝 분야 스타트업 너바나시스템스를 3억5000만 달러에 매입했고, 이에 앞서 세일즈포스의 메타마인드, 아마존의 오비어스, 트위터의 매직포니, MS의 완드랩스, 구글의 우드톡스 등 인수도 AI 관련 M&A로 주목받고 있다.IT기술을 필두로 세계 산업 지형도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정보기술의 총아였던 PC는 30년 이상 최대 성장산업으로 영광을 누렸지만, 그 뒤를 이은 스마트폰은 세상에 나온 지 10년 만에 쇠퇴기를 걱정해야 할 정도다. 이제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게 아니라 빠른 자만이 살아 남는다. 지금까지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에서는 활용형 연구(Exploitative research), 지속성 혁신(Sus taining innovation)을 위해 기업 중앙연구소를 통한 자체 R&D가 적합했다. 하지만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전략으로 선회해야만 하는 지금은 탐색형 연구(Explorative research)와 파괴적 혁신(Drastic innovation)이 필수다.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발 빠른 M&A인 것이다.M&A(혹은 그 전 단계의 지분 투자)를 통해 신사업·신기술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큰 흐름을 읽고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다. 관련 기술과 핵심 인력을 한꺼번에 확보해 자체 개발에 따르는 사업상·기술상의 실패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시장 선점을 통해 중국 등 경쟁자의 도전을 사전 차단하는 것 외에도 우리 기업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할 수 있는 원천기술 부족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도 있다. ━ 실패만 남긴 야후의 전방위 M&A 하지만 자금력만 가지고는 안 된다. 실제 M&A의 70~90%는 실패한다는 게 정설이다. M&A의 목적이 분명하고, 이를 전담할 역량이 있어야 하며, 이후 통합 과정까지 순조롭게 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때 인터넷 업계의 수퍼스타에서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한 야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야후는 2012년부터 모바일, 비디오, 내이티브 광고와 소셜 분야로의 확장을 위해 무려 53개의 기업을 인수했지만, 인수 기업 대부분이 원래 서비스를 중단하고 야후 내부의 팀으로 흡수되면서 그 자체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수 목적 자체가 불분명한 것도 많았다.M&A 성공을 위해서는 탐색(Searching), 가치평가 (Valuation), 통합(Integration) 과정에 치밀한 노력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 우선 탐색 단계에서는 최적의 인수대상을 선별하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사전에 필요한 쇼핑 리스트를 작성하고 여기에 맞춰 매물을 찾아야 한다. 충동 구매는 후유증이 크다. 가치평가는 최적 가격을 산정하고 인수 타이밍을 결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소문이 무성하면 인수 프리미엄이 높아지게 되고 결국 인수하더라도 승자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통합은 피인수 기업에 대한 위압적 태도를 지양하고 개방적 자세로 역량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기업 간 문화와 관행의 차이를 좁히려는 세심한 노력이 필수다.끝으로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M&A에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일반 대중의 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우선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나 공정거래법 등이 기업의 M&A 의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 나아가 국가의 성장동력 회복을 위해 각종 제도 개선과 규제완화, 세제 지원 등의 유인책이 마련돼야 한다.M&A에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M&A 앞에 흔히 ‘적대적’ 혹은 ‘공격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처럼 M&A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있다. 물론 돈을 앞세운 문어발식 확장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사는 측과 파는 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M&A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M&A를 통해 신기술에 목마른 대기업과 IPO(기업공개) 외에 조기 출구전략이 필요한 중소·벤처기업 간에 자연스런 상생의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다.

2016.09.03 10:17

12분 소요
[주목받는 남자 골프 3인방] 21세기판 ‘위대한 빅3’로 기록될까

산업 일반

호주의 제이슨 데이, 미국의 조던 스피스, 북아일랜드의 로리 매킬로이. 지난 2014년 8월 3일부터 번갈아 가며 세계 랭킹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는 선수들이다. 이들도 골프 역사상 시대별로 각축전을 벌인 ‘빅3’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이들이 기억할 만한 빅3로 기록될지는 아직 두고 볼 단계지만, 이 기간 열린 7번의 메이저에서 세 명이 들어올린 우승 트로피만 5개에 이른다.영국의 ‘위대한 3인방’: 1860년 브리티시오픈이 시작된 이래 157년 간 빅3는 네 번 등장한다. 아무 선수나 잘하면 빅3가 되는 게 아니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로는 빅3가 다른 선수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서로 우승 경쟁을 펼칠 것. 둘째는 세 명이 메이저를 휩쓸면서 당대의 트렌드를 주도할 것.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매력을 가져 골프팬의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할 것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빅3는 영국이 세계 골프계의 중심이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다. 당시는 골프가 스포츠로 자리잡아 가던 시기였다. 프로 골퍼도 새로운 직업으로 여겨졌다. 이전까지 프로라 하면 대개 클럽장인이거나, 골프장 매니저거나 캐디 출신이었다. 처음 빅3는 후대에 ‘위대한 3인방(The Great Triumvirate)’으로까지 칭송받는 존 H. 테일러, 해리 바든, 제임스 브래이드다. 이들은 1894년부터 1차 세계대전 전인 1914년까지 21년 동안 무려 16차례의 브리티시오픈 우승을 독차지했다. 당대 최고의 대회에서 빅3가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우승하니 사람들의 관심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17세의 나이로 프로 데뷔한 존 테일러가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존은 당시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에게 대결장을 보내 한 명씩 정복하더니 1894, 95년 브리티시오픈에서 2연패하는 등 총 5승을 거뒀다. 해리 바든은 1896년 브리티시오픈에서 3연 패를 노리던 당대 최고의 존 테일러를 물리치면서 이름을 알렸다. 바든은 1898, 99년, 1903, 11, 14년 등 5차례나 우승을 더 거둬 브리티시오픈에서만 6승을 거둔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부드럽게 클럽을 잡는 이른바 ‘바든 그립’ 스타일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인터로킹그립이 정석이던 시대에 왼손 검지 위에 오른손 새끼를 올리는 바든의 오버래핑그립은 오늘날에는 또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마지막으로 185cm의 장신인 제임스 브래이드는 서른에 프로에 데뷔했고, 나중에는 각종 유럽의 명문 코스 설계가로 이름을 남긴다. 브래이드 역시 1901년부터 5차례 브리티시오픈 타이틀을 차지했다. 하지만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심화되면서 영국의 3인방이 이끈 골프 제국은 서서히 사라진다.미국 ‘클래식 시대’의 3인방: 1차 대전이 끝난 후 골프의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과 같은 대규모 건설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 전역에 골프장 신설 붐이 일었다. 코스 설계사에서는 이 기간을 ‘클래식 시대’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새로운 빅3가 등장했다. 최초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은퇴한 보비 존스, 내기 골프의 고수이자 멋쟁이로 프로의 위상을 높인 월터 하겐, 샌드 웨지를 일반에 보급시킨 진 사라센이 미국 최초의 3인방으로 불린다.이들 세 선구자들이 미국 골프와 스포츠계의 이슈 메이커였다. 게다가 세 명 모두 멋진 신사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골프가 들판에 불이 번지듯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보비 존스는 오거스타내셔널을 세워 오늘날 마스터스를 만들었다.50년대 풍미한 동갑내기 3인방: 2차 대전이 끝나고 베이비붐이 일던 시기와 맞물려 새로운 빅3 시대 열린다. 1949년 2월 2일, 당대 최고의 골퍼이던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호건이 만신창이가 된 뉴스는 미국 전역을 경악시켰다. 담당 의사는 “골프는커녕 걸어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그의 골프 인생은 끝나는가 싶었지만, 6개월 후에 기적이 일어났다. 호건의 초인적인 의지와 끈질긴 재활 덕에 골프 스윙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US오픈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 우승은 20세기 스포츠사에 기록되는 이변의 하나다. 부활의 상징인 호건은 샘 스니드, 바이런 넬슨과 함께 50년대를 풍미했다. 이들 세 명은 공교롭게도 1912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였다. 월터 하겐과 바비 존스, 진 사라센이 미국에 골프를 뿌리 내린 3인방이었다면, 이들 삼총사는 현대 골프의 맥을 이어나가는 데 공헌했다. 각각 경제 공황과 2차 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빅3는 미국 골퍼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한 명의 스타가 시대를 이끈 게 아니라 세명이 물고물리는 경쟁을 벌이면서 팬층을 광범위하게 확보해갔다.샘 스니드는 PGA투어의 최다 81승(메이저 7승)이란 기록으로, 바이런 넬슨은 1945년 한 해에 18승에 11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은퇴했다. 넬슨은 브리티시오픈을 뺀 5번의 메이저와 통산 54승의 PGA투어 우승 전적을 쌓았다. 인간 승리의 상징인 벤 호건은 PGA투어 통산 63승에 메이저 9승을 기록했고 사상 두 번째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60~70년대 TV시대의 스타 3인방: ‘미국의 3인방’으로 불리던 빅3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던 50년대 말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등장한 골프 선수가 아놀드 파머였다. 그는 매스 미디어와 함께 대중 속에 파고들었다. 파머는 TV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골퍼이자 미국 골프의 대중화에 기여한 스타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프 실력, 귀여운 동안, 타고난 입담과 유머감각, 파머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스타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애칭은 ‘아니’였고 그를 따르는 갤러리는 ‘아니군단(Arnie’s Army)’이라고 불렸다. 파머는 통산 60승의 PGA투어 우승에 메이저 7승을 달성했지만 그중에 PGA챔피언십 우승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잭 니클라우스는 1960년 20살에 프로 데뷔했는데, US오픈에서 파머와 겨루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파머의 적수라는 것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언론조차 그를 놀림감으로 다뤘다. 1962년 파머의 텃밭인 펜실베이니아 오크몬트에서 열린 US오픈은 그 절정이면서 새로운 빅3 시대의 서막이었다. 아니군단은 골프장 전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니클라우스에 대한 야유는 하늘을 찔렸다. 매치플레이처럼 피 말리는 타수 싸움을 하던 두 선수는 동타로 경기를 마쳤다. 다음 날 플레이오프 18홀을 마치고 마침내 니클라우스가 우승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우승을 이어나가면서 언론은 파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니클라우스를 주목했다. 불과 26세인 잭 니클라우스는 1966년에 4대 메이저를 모두 차지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됐다. 이후 1986년까지 마스터스 6번, US오픈 4번, 브리티시오픈 3번, PGA챔피언십 5번 등 모두 18차례 메이저 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남아공의 게리 플레이어는 파머와 잭 사이에 생긴 격차를 깨고 삼각 구도를 형성한 또 하나의 축이었다. 1961년에 마스터스에서 파머를 이겼고, 1968년에는 브리티시오픈에서 니클라우스를 물리쳤다. 비행기도 흔치 않던 시절, 세계를 돌며 각종 대회에서 184승이라는 경이적인 승수를 올린 선수는 없었다. 플레이어는 남아공에서 세계 어디든 대회가 열리는 곳은 찾아다녀서 ‘가장 여행을 많이 한 선수’로도 기록됐다. 메이저 9승으로 진 사라센과 벤 호건에 이어 세 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되었다.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는 그렇게 60~70년대 TV시대의 골프 빅3로 자리잡았다. 혼자일 것 같지만 경쟁자가 나서고 다시 제 3의 선수가 나타나 어우러지는 일종의 ‘정-반-합’ 이 빅3의 생성 방식이었다.우즈 이후 빅3 체제의 필요성: 1985년에 세계 6대 투어가 공동으로 세계골프랭킹이란 시스템을 만들었을 때는 독일의 베른하르드 랑어가 3주 간 세계 1위였다. 그러나 이내 호주의 백상어 그렉 노먼이 왕좌를 차지했다. 노먼은 무려 331주를 세계 최고의 골퍼 자리에 올랐다. 노먼 외에도 잉글랜드의 닉 팔도, 스페인의 세베 바예스테로스, 미국의 프레드 커플스 등이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지만 어느 누구도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그 무렵인 1997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가 바로 타이거 우즈였다. 그는 1997년 6월 22일 세계 랭킹 1위에 처음 오른 후 어니 엘스, 데이비드 듀발과 제위 쟁탈전을 하는가 싶더니 1999년 8월 15일부터 2004년까지 264주 간, 결혼과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의 기간을 거쳐 다시 2005년 6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281주간을 세계 최고의 골퍼로 군림했다.우즈가 부상으로 투어를 쉬던 기간은 군웅할거 시대였다. 메이저 우승이 없는 리 웨스트우드, 루크 도널드가 우승하기도 했고, 호주의 비제이 싱과 독일의 마틴 카이머와 호주의 애덤 스콧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계 1위로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14년 8월 13일부터 로리 매킬로이가 다섯 번째로 세계 1위에 재입성한 뒤로는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매킬로이는 1년 간이나 제위를 지키면서 브리티시 오픈과 PGA챔피언십을 잡았다. 지난해는 새로 떠오른 조던 스피스가 마스터스와 US오픈을 연달아 쟁취하면서 세계 1위에 올랐고, 하반기에는 제이슨 데이가 PGA챔피언십을 우승했다. 세계 랭킹 선두 경쟁은 이 세 선수 간의 선두 바뀜만 일어나고 있다.지난해 스피스와 데이는 각각 5승씩을 올렸다. 매킬로이는 발목 부상으로 두 달여를 쉬었지만 이후 유러피언투어 파이널에서 우승하면서 유럽의 상금랭킹 1위에 오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올해 초까지는 스피스가 앞섰다. 스피스는 지난 1월 열린 현대토너먼트에서 역대 최소타인 30언더파로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 가진 빽빽한 스케줄로 지친데다 마스터스 마지막 날 12번 홀 쿼드러플 보기로 충격의 역전패를 당했다. 한동안 주춤하던 스피스는 지난 5월 말 딘&델루카인비테이셔널에서 4개월 만에 우승 레이스에 시동을 걸었다.매킬로이는 이번 시즌 내내 들쭉날쭉했다. 지난해 유러피언투어 최종 전 DP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반년 간 우승이 없었다. 지난 3월 WGC캐딜락챔피언십에서 선두로 출발했으나 대회를 마칠 때는 3위로 내려갔다. 노던트러스트오픈에서도 3일 내내 선두권이다가 20위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5월 23일 본인이 주최한 유러피언투어 아이리시오픈에서 우승하면서 메이저 사냥 준비를 가다듬고 있다. 현재 가장 앞선 이는 제이슨 데이다. 제5의 메이저로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거두는 등 올 시즌에만 벌써 3승을 거뒀다. 지난 3월 말부터 11주 간 세계 랭킹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세 선수가 압도적인 1~3위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 최근 2년 간 빅3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후대에도 빅3로 기록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잭 니클라우스는 최근 자신이 주최하는 메모리얼토너먼트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세 명을 빅3라고 부르기엔 이른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니클라우스는 “리키 파울러나 버바 왓슨, 마쓰야마 히데키 등 다른 선수들도 잘하는데 미리 빅 3라고 못을 박는 것은 성급하다”면서 “우즈도 다시 우승할 수 있는 선수로 돌아올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그의 마지막 말에 방점이 찍힌다. 결국 타이거 우즈라는 수퍼스타가 없으니 그를 이어 골프붐을 이끌 대체할 체제가 필요한 것이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로 시들고 있는 골프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존재가 절실하다. 따라서 ‘빅3’는 뛰어난 선수들이 형성한 체제의 이름인 동시에 골프계가 외부 환경을 극복하려고 만들어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즈 만한 영향력과 골프붐을 ‘빅3’라는 스타가 발휘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남화영 편집장

2016.06.1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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