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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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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이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기간 강조했던 ‘우크라이나 전쟁 24시간 내 종결’ 발언에 대해 “비꼬는 표현이었다”고 해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휴전에 동의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밝혔다.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사전 공개된 ‘풀 메저(Full Measure)’ TV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대선 당시의 공약과 취임 후 현실을 비교하는 질문을 받자, “솔직히 말하면 그 말(24시간 내 전쟁 종식)을 했을 때 약간 비꼬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면서 “진짜 의미는 전쟁을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었고, 나는 여전히 성공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명했다.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2023년 5월 CNN 타운홀 행사와 2024년 9월 당시 부통령이었던 카멀라 해리스와의 TV 토론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키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취임 후 전쟁이 지속되면서, 당시의 발언이 현실과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후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러시아와 고위급 회담을 가지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진행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다만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최근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으며, 푸틴 대통령도 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며 세부 사항 조율이 필요하다는 입장도 전했다. 현재 스티브 위트코프 미국 중동특사가 러시아를 방문 중이며,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이 예상된다.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질문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나쁜 소식이 될 것”이라며 “하지만 나는 그(푸틴 대통령)가 결국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나는 그를 꽤 잘 알고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향후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을 위해 어떤 추가 조처를 할지, 푸틴 대통령과의 협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025.03.1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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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우크라-러시아 특사에 軍 출신 켈로그 지명

국제 경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문제를 전담할 특사로 군 장성 출신인 키스 켈로그(80) 전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명했다.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키스 켈로그 장군을 대통령 보좌관이자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로 지명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트럼프 당선인은 이어 "키스는 나의 1기 행정부(2017~2021년)때 고도로 민감한 국가안보 부문에서 일한 것을 포함해 군과 업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이어 "우리는 함께 '힘을 통한 평화'를 이루고, 미국과 세계를 다시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베트남전쟁 참전용사 출신의 퇴역 육군 중장인 켈로그 지명자는 트럼프 집권 1기때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총장을 맡았다.트럼프 당선인의 집권 1기 종료 후에는 친트럼프 싱크탱크인 미국우선주의연구소(AFPI) 미국안보센터장을 맡아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 고문 역할을 담당하고, 외국 당국자들에게 트럼프의 안보 정책을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트럼프 당선인이 측근 그룹의 일원인 켈로그를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로 발탁한 것은 우크라이나전쟁을 조기에 종결한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행보로 읽힌다.

2024.11.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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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런 미 재무장관 “중국의 디커플링 추진하지 않는다”

국제 이슈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9일 나흘간의 중국 방문 일정을 정리하며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라는 의미로 한 나라 경제가 특정 국가 혹은 세계 전체의 경기 흐름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옐런 장관은 중국 방문 일정을 마무리하며 베이징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과의 협의에 대해 “실질적이고 생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옐런 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경제 및 국가 안보, 기후 변화 등의 문제를 다뤘다. 옐런 장관은 미국은 중국과 디커플링이 아닌 공급망 다양화를 추진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중국 경제를 분리하려는 게 아니다”며 “(디커플링은) 미·중 양국에 모두 재앙이 될 것이고 세계 경제를 불안정하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미국은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계속할 것이라며 “건전한 경제 경쟁이 있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라고 밝혔다. 또한 “미국이 국가 안보를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외신에 따르면 이번 방문에 대해 미국과 중국의 경제팀이 문제를 논의하고 생산적인 대화 채널을 만드는 기회였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다만 “미국과 중국은 의견 차이가 있다”면서도 “바이든 대통령과 나는 강대국 갈등의 틀로 미·중 관계를 보지 않는다. 양국이 발전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양국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 기업이 러시아에 전쟁 지원을 제공하거나 제재를 회피하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옐런 장관은 이번 중국 방문의 목적에 대해 ▲중국의 새로운 경제팀과 관계 구축 ▲기후 변화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어느 정도 진전을 이뤘고, 전 세계에 모두 이익이 되는 건전한 경쟁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양국의 문제를 하룻밤에 해결할 수는 없다”면서 회담 성과를 정리하기도 했다. 옐런 장관은 지난 6일 중국을 방문해 리창 국무원 총리, 허리펑 부총리, 류허 전 부총리, 류쿤 재정부장 등과 10여 시간의 회담을 가졌다. 지난달에는 안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바이든 미 최고외교관으로는 처음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바 있다. 존 케리 기후특사는 곧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2023.07.0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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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포럼 16일 개막…저성장·기후 위기 속 협력 방안 찾는다

국제 이슈

세계 정·재계와 학계의 유명 인사가 모이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차총회가 16일(현지시각)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린다. 다보스포럼은 정치인과 기업인, 학자 등이 스위스 동부 그라우뷘덴주에 있는 다보스에 모여 세계가 당면한 현안을 토론하는 연례행사다. 매년 1월 말 개최됐으나 코로나19가 유행하며 2021년 행사가 취소됐고 지난해에는 1월 행사를 미루고 5월에 진행됐다.다보스포럼 주최 측에 따르면 올해 다보스포럼의 주제는 ‘분열된 세계에서의 협력’이다. 포럼 참석자들은 감염병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악화한 보건 문제와 일자리 문제, 안보와 경제 위기 등과 관련한 협력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특히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두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계획이다.이번 총회에는 52개 국가의 정부 대표와 600여 명의 최고경영자(CEO) 등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한다. 각국 중앙은행 총재 19명과 재무장관 56명, 외교장관 35명, 무역장관 35명을 포함해 정·재계 및 학계 인사 2700여 명이 모여 세계 현안을 논의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 국제기구의 대표급 인사 39명도 행사장을 찾을 예정이다.윤석열 대통령도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특별 연설을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직접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것은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 이후 9년 만이다. 윤 대통령은 공급망 강화와 청정에너지 전환, 디지털 질서 구현을 위한 협력과 연대 방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다보스포럼 일정에 동행해 해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경제 현황과 투자 환경을 소개할 것으로 알려졌다.재계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회의장에 나올 예정이다. 재계 총수들은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여론전에도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행사 기간에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한국의 밤’ 행사는 최 회장을 비롯한 재계 인사들이 부산 엑스포 유치를 지원사격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한편 올해 행사에는 미국과 중국 정상이 참석하지 않는다.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존 케리 기후 특사와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장, 마티 월시 노동부 장관, 캐서린 타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국가주석을 대신해 류허 부총리가 행사장을 방문한다.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의 정상들이 불참할 것으로 예상돼 주목도가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2023.01.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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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아베’ 일본 정치 행보 어디로 향하나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아베 신조(安倍晉三·1954.9.21.~2022.7.8.) 전 일본 총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 정치가 어떻게 변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아베 총리는 전직 총리이지만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과 일본 정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망 직전까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일본 정계의 개편이나 혁신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최소한 세력 균형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아베 전 총리는 2022년 7월 8일 오전 11시 30분, 나라(奈良)에서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를 하다가 전 해상자위대원인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1)의 사제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아베 전 총리는 7월 10일 참의원 선거 이틀 앞둔 8일 더위 속에서 정장 차림으로 역 앞에서 거리 유세 중이었다. 총격을 당한 아베 총리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폐 정지 선언을 받았으며, 헬기로 큰 병원으로 이송되고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도쿄에서 달려온 다음 사망 선고를 받았다. 총격이 알려지자 야마가타(山形)에서 유세 중이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헬기를 타고 급히 도쿄로 달려와 총리 관저에서 긴급회견을 열었다. 체포된 범인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1)는 인터넷에서 사 모은 부품으로 총기를 제작해 기회를 노렸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야마가타는 통일교 신자인 어머니가 교단에 거액을 기부한 뒤 파산하면서 원한을 품었는데, 아베 전 총리가 통일교 관련 행사에 동영상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 아베는 단순히 ‘전 총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군림해왔다. 우선 일본 최장 재임 기록을 세운 총리라는 점에서 집권 자민당과 정계에서의 정치력과 영향력, 그리고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베는 90대 총리로서 2006년 9월 26일~2007년 9월 26일의 1년간 재임한 뒤 물러난 단명 총리였다. 당시만 해도 정치를, 특히 자민당 내부 정치를 잘 모르는 인물로 평가됐다. 하지만 2012년 9월 26일 야당이던 자민당 총재에 올라 그해 12월 26일 총선에 승리해 민주당(2009년 9월 16일~2012년 12월 26일 집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으면서 다시 총리에 올랐다. 자민당 총재와 내각 총리를 두 번째로 맡으면서 아베는 변했다. 92대 총리를 지내고 자민당 내 3위 파벌의 수장인 아소 다로(麻生太朗)를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정치적으로 결합했다. 일본 정계와 자민당에서 우파 중의 우파로 분류되는 두 사람은 자위대를 헌법에 올리는 등 이른바 일본의 ‘정상국가화’에 의기투합했다. 아베는 그 뒤 세 차례의 총선을 연속 승리로 이끌면서 96~98대 총리를 지내고 2020년 9월 16일 물러났다. 아베 전 총리는 총리로서 총 재직기간 3188일(약 8년 9개월)과 연속 재임 기간 2822일(약 7년 9개월)에서 일본 총리로서 각각 최장 기록을 세웠다. 아베는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1924~1991년) 전 외상의 야마구치(山口) 지역구(1구에서 4구로 바뀜)를 물려받아 연속 10선(1993년 7월 19일~2022년 7월 8일)을 기록했다. 1957~1960년 56~57대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년)가 외할아버지이고 1964~1972년 61‧62‧63대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1975)가 작은 외할아버지다. 두 사람은 사토(佐藤) 집안 출신의 형제지간으로, 기시 전 총리는 어려서 기시 집안에 양자로 가면서 사토 대신 기시를 성으로 사용했다. 아베 총리의 동생인 기시 노부오(岸信夫房) 방위상은 어려서 외가에 양자로 가면서 기시 성을 쓴다. ━ 전‧현직 총리 7명 피살, 일본 정계 수난의 역사 아베는 일본 전‧현직 총리 중 암살 당한 일곱 번째 인물이다. 1889년 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고 1890년부터 시행된 이래 일본 총리 중 현직 세 명과 전직 네 명이 암살로 숨졌다. 19대 하치 다카시(原敬) 총리는 현직에 있던 19921년 11월 4일 도쿄 역에서 철도 직원인 18세의 나카오카 곤이치(中岡艮一)의 단도에 찔려 사망했다. 나카오카는 제1차 세계대전 뒤 군축에 나선 하치 수상에 반감을 품은 상사가 “잘못한 정치인은 할복해야 한다”고 말한 데 영향을 받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4년 특사로 풀려났다. 27대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는 1931년 8월 26일 도쿄역에서 극우단체 애국사 직원인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격을 받고 1년간 치료를 받다 숨졌다. 하치 총리 이래 일본 총리는 별도 출입구를 통해 기차를 탔지만 하마구치 총리는 “승객들에게 폐를 끼친다”며 일반 통로를 이용하다 변을 당했다. 당시 일본은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하마구치 총리는 만주 침략에 반대해 군부의 반감을 샀다. 범인 사고야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됐고, 1940년 가석방됐다. 하마구치 총리는 총격 1개월 뒤 총리에서 사임해 사망 당시에는 전 총리였다. 29대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총리는 1932년 5월 15일 해군을 중심으로 한 극우청년 장교들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누카이 총리의 군축정책에 불만을 품고 총리를 살해한 11명의 주동자는 재판에 회부됐으나 전국적인 사면 청원 서명으로 풀려났다. 일본 전직 총리의 암살은 아베에 앞서 3건이 있었다. 최초는 초대‧5‧7‧10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동북지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사건이다. 20대 총리를 지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와 30대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는 1936년 2월 26일에 군국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벌인 2‧26 사건이라는 쿠데타로 자택에서 숨졌다. 하루에 두 명의 전직 총리가 목숨을 잃은 정변이다. 특히 사이토는 해군 제독 미국 유학을 거쳐 해군 대신(장관)을 지내다 3‧1운동 뒤인 1919년 조선 총독에 임명돼 1927년까지 문화정치를 편 인물이다. 1929~193년 조선 총독을 한 차례 더 지냈으며 1932~1934년 총리를 지냈다. 사이토는 육군 중심의 쿠데타 군인들에게 친영파이자 친미파로 분류돼 잔혹하게 살해됐다. 쿠데타 군인들은 원로 정치인들을 죽이고 일본 덴노가 직접 정치를 맡으면 농촌의 가난이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까운 중신인 사이토가 살해되자 덴노인 히로히토는 화를 내며 28일 군대에 복귀 명령을 내렸다. 부대로 돌아간 쿠데타 주동자 2명이 자살했으며, 17명은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중 15명의 형이 집행됐다. 일본에선 제2차 세계대전 뒤 좌우 이념대결로 야당의 좌파 정치인이 암살된 경우도 있다. 1960년 10월 12일 친중 성격의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사회당 서기장이 도쿄 히비야 의 공회당에서 열린 삼당대표 합동 연설회에 참석해 연설하다가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에 찔려 살해됐다. 범인은 만 17세 반공청소년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였다. 평소 “사회당이 일본을 적화하려고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건 직후 도쿄 소년감별소(소년원)에 갇혔으나 지급받은 치약으로 벽에 ‘천황폐하만세, 칠생보국(天皇陛下万才 七生報国)’이라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칠생보국은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으로 일본의 극우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1970년 11월 25일 자위대 주둔지를 찾아 할복할 당시 이마에 멨던 띠에도 적힌 ‘군국주의’ ‘천황숭배’의 상징인 문구다. ━ 아베 사망으로 구심점 잃은 자민당 파벌 구도에 균열 칠생보국은 14세기 일본 고전 역사문학인 태평기(太平記)에 등장하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라는 무장의 일화에 나온다. 마사시게는 14세기 초 고다이고(後醍醐) 덴노를 위해 싸웠다. 고다이고 덴노는 미나모토노 요리모토(源賴朝)가 세워 150년간 이어졌던 가마쿠라(鎌倉) 막부(1185~1333년)에 대항하려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라는 무장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디고 무로마치(室町) 막부(1336~1573년)를 세웠으며 대항하는 고다이고 세력을 눌렀다. 마사시게는 다카우지에 대항해 싸우다 동생 마사스에(正季)와 함께 잡혔다. 그는 이런 대화를 마치고 서로 찔러 자결한 것으로 소설에 묘사된다. “죽어서 구계(九界‧불교에서 말하는 지옥도‧아귀도‧축생도‧수라도‧인간도‧천상도 등 육도(六道‧중생의 세계)와 성문계‧연각계‧보살계 등 깨달음의 세계를 합한 아홉 세계) 중 어디에 가고 싶은가?” “일곱 번이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이 손으로 조적(朝敵‧조정의 적)을 멸하고 싶다.” 이렇게 죽은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덴노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 됐다. 현재 도쿄 황거 입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메이지 유신 이휴에 들어섰다. 천황주의를 앞세운 일본의 극우 정치 활동에는 과거 문학의 일화가 광신적인 모습으로 인용된다. 하지만 아베 총격에는 이런 극우적인 배경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통일교라는 종교와 관련한 외톨이 청년의 황당한 계획 살인으로 정리되고 있다. 아베 사망으로 일본 자민당 내부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자민당은 특유의 파벌 정치 때문에 수장을 잃은 최대 파벌 아베파부터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본 자민당에는 6대 파벌이 있다. 파벌의 영수는 공천과 정치 자금, 그리고 유세 지원 등을 통해 회원을 모집하고 정치인으로 키우며,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거나 유지한다. 자민당 소속 중의원 263명 중 60명을 제외한 전원, 참의원(이번 선거 이전 기준) 111명 중 22명을 제외한 전원이 파벌에 소속됐다. 전체 374명의 의원 중 6대 파벌에 소속하지 않은 의원은 82명뿐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은 의원들도 크고 작은 모임으로 서로 연결하고 결속한다. 아베가 사망 직전까지 회장으로 있던 세이와(淸和) 정책연구회는 59명의 중의원과 35명의 참의원 등 모두 94명의 의원을 회원으로 둔 자민당의 최대 파벌이다. 2위 파벌인 헤이세이(平成) 연구회는 모테키 도시미츠(茂木敏充) 전 외상(현 간사장)이 회장이다. 3위 파벌인 시코카이(志公會)는 아소 다로(麻生太郎) 전 총리(재무상 겸 부총리)가 회장이다. 아베는 아소와 정치적으로 긴밀히 결합하고 있으며 둘의 연합체는 AA로 불리며 2020년 9월 아베의 총리 사임 뒤 스가 요시히데(管義偉)와 기시다 총리의 인선을 좌우한 것으로 관측된다. 세이와 정책연구회와 시코카이는 아베가 추진한 개헌 등에서 서로 정책적으로 유사한 지향점을 보여왔다. 하지만 아베의 사망으로 아베와 아소 간의 결합으로 이뤄졌던 연합의 강도와 성격이 변화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4위 파벌은 고치카이(宏池會)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가 회장이다. 통상 파벌 수장이 총리에 오르면 다른 인물에게 회장직을 넘기는데 기시다는 중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이를 유지해왔다. 5위 파벌인 시스이카이(志師會)는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전 경제산업상이 회장을 맞고 있다. 니카이는 막후에서 한일 관계 등 다양한 업무를 맡아온 자민당의 거물이다. 6위 파벌인 근미래정치연구회는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전 농림수산상이 회장이다. ━ 미·러·중 대립 심화에 일본 전쟁 개헌 의지 가열 아베의 사망으로 그의 필생의 숙원인 개헌과 자위대의 헌법 명문화 등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일본 중의원은 전체 465석으로 233석 이상이면 과반이 되며, 310석을 차지하면 개헌안 발의를 위한 3분의 2를 확보하게 된다. 현재 자민당은 과반인 261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연립을 하고 있는 공명당의 32석을 합하면 연립여당이 293석이다. 여기에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 41석과 국민민주당 11석까지 합치면 모두 345석으로 3분의 2인 310석을 훌쩍 뛰어넘는다. 개헌 반대세력은 입헌민주당 97석과 일본공산당 10석 정도다. 이번 선거 전 245석(이번 선거에선 248석)이 정원인 참의원은 123석이 넘으면 과반이며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는 166석이 필요하다. 참의원은 7월 10일 선거 전에는 자민당 111석과 공명당 28석 등 연립여당이 139석으로 과반을 차지했으며, 국민민주당+신록풍회 16석, 일본유신회 15석까지 합치면 개헌 찬성 세력이 170석으로 3분의 2를 넘었다. 입헌민주당+사회민주당 45석과 일본공산당 13석이 개헌 반대 세력이다. 7월 10일 전체 의원의 절반과 보궐 1명을 포함해 125명을 새로 뽑은 참의원은 선거 뒤 정당별 전체 의석이 자민당 119석, 공명당 27석으로 연립여당이 146석을 차지했다. 21석으로 세를 불린 일본유신회와 10석을 확보한 국민민주를 합치면 개헌 세력이 177석이 된다. 개헌 세력이 입지를 더욱 넓힌 것이다. 입헌민주 39석과 일본공산당 11석이 개헌 반대 세력이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의 가능성이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1889년 제정된 일본제국헌법이 태평양 전쟁 종전 뒤 폐지되면서 1947년 새로 제정된 일본국 헌법은 제정 이래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일본의 개헌 절차는 일본국 헌법 96조에 따른다.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3분의 2가 찬성하면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다. 그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얻으면 헌법 개정이 이뤄진다. 아베가 총격으로 숨진 지 이틀만인 7월 10일의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기시다 총리의 자민당은 헌법 개정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참의원 선거 다음 날인 7월 11일 기자회견에서 “헌법 개정은 자민당의 오랜 과제이며 이번 선거의 대표 공약이기도 하다”며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회에서 활발한 논의를 이끌어가겠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뜻을 이어가라는 국민의 뜻을 새기겠다”며 “개헌을 위한 정당 간 논의와 국민 설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3년 뒤인 2025년까지 선거가 없어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기시다가 개헌의 깃발을 올림으로써 일본에서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물꼬를 틀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경쟁 가열 등으로 글로벌 안보 불안이 커지자 일본의 개헌파들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며 분위기를 띄어왔다. 여기에 아베 전 총리의 뜻을 계승한다는 명분까지 내세우면서 개헌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자민당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하면 개헌 일정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가까운 시일 안에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헌법심사회를 개회한다. 그런 다음 2024년쯤 개헌안을 발의하고 2025년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는 시나리오다. 자민당과 개헌 세력이 이미 지난 선거 때부터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했음에도 개헌을 강하게 추진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개헌 추진 세력 간의 의견 차이와 여론의 향배다. 여론은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지난 5월 교도통신이 헌법의 날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헌법 9조를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에 ‘있다’와 ‘없다’가 50%대 48%로 맞섰다. 전쟁 금지를 명문화한 헌법 9조에 굳이 한정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헌법을 개정할 필요를 묻는 말에는 ‘있다’가 68%, ‘없다’가 30%로 나타났다. 묵은 조항을 고치는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민감한 헌법 9조에는 손대고 싶지 않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시기와 관련해서도 기시다 총리의 임기 중 개헌이 가능할 만큼 ‘개헌 기운이 무르익고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이 70%에 이르렀다. 참의원 선거 직전인 7월 6일 아사히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기시다 정권에서의 개헌에 대해 ‘찬성’ 의견이 36%로 ‘반대’ 의견 38%와 팽팽한 양상을 보였지만 반대가 조금 많았다. 개헌하자는 의견이 상당하지만 서두르거나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임을 보여준다. 일본 자민당의 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하고, 야당이 지리멸렬해 견제구를 날릴 여력을 확보하지 못해도 헌법 9조를 포함한 개헌이 큰 힘을 받기는 쉽지 않은 이유를 보여준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7.16 15:00

10분 소요
취임 8개월만에 정치 위기에 몰린 바이든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시한을 앞둔 30일 심야(현지시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미 육군 제18공수군단 제82공수사단장인 크리스 도나휴 소장이 단독군장 차림으로 C-17 수송기에 올랐다. M-16 자동소총의 총신을 짧게 개량한 M-4 카빈을 오른손에 들고 소송기에 오른 도나휴 장군은 아프간에서 철수한 마지막 미군이 됐다. 그는 1992년 웨스트포인트를 마치고 임관해 주한미군 제2사단 소총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미군 특수부대인 델타포스와 레인저에서 근무했으며 이라크전과 중동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퇴치전투에 참전한 무골이다. 도나휴 장군이 82공수사단 부대원들과 함께 빽빽하게 탑승한 C-17 수송기가 카불 공항을 이륙하면서 20년 가까이 진행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끝이 났다. 아프간은 20년 만에 탈레반이 통치하게 됐다. 아프간이 탈레반에 넘어가면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 뒤 최대의 정치적인 위기에 처하게 됐다. 사실 아프간의 미군 철군은 여러모로 불가피했다는 평가다. 미군이 영원히 아프간에 주둔할 수는 없다는 바이든의 말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방식이다. 그중에서도 무질서하고 허술하며, 수많은 사람을 뒤에 남긴 불완전한 철수가 비난을 불렀다. 미국의 이미지에 흠집을 안긴 것은 물론, 전 세계에 미국에 대한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다. ━ 바이든, 별장서 회의하고 아프간인 비난도 8월 15일 카불이 신속하게 탈레반에 함락되고 카불 공항에 탈출하려는 사람이 몰리면서 대혼란이 벌어지던 때 바이든은 주말을 맞아 메릴랜드주 캠프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그는 캠프 데이비드에 있는 회의실에서 백악관 안보팀과 화상회의를 열었다. 지쳐 보이는 바이든이 회의실의 넓은 탁자에 홀로 앉아 거대한 멀티모니터를 보며 회의하는 모습은 전 세계에 ‘준비하지 못한 미국’ ‘대처하지 못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각인했다. 바이든은 하루 뒤 워싱턴에 나와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철군의 당위성만 역설하고 자신의 철군 결정을 옹호했다. 함께 피를 흘렸던 아프간인을 향해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고 대놓고 비난했다. 아프간 정부군은 미군과 함께 작전하며 5만여명의 탈레반과 수천 명의 테러조직원을 사살했는데 이 과정에서 6만~7만명의 아프간 정부군의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전사자는 2420명이었다. 단순한 숫자로 말할 수 없는, 함께 피를 흘린 사이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정작 문제는 철군이 아니라 비계획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위태로우며, 어설픈 철수 작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미숙한 철수작전인데도 바이든은 이에 대해 어떤 사과도 없이 철군 당위성만 강조하면서 동문서답을 한 셈이다. 바이든은 첫 연설에서 자기 합리화와 아프간인 비난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비난이 일자 다시 연설을 자청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 위험한 발언을 이어갔다. 바이든은 모든 미국인과 조력자를 대피시키겠다고 말했다. 미 중부사령부의 케네스 매켄지 사령관은 언론 브리핑에서 “미군 역사상 최대의 민간인 대피 작전”이라고 자평하면서도 “탈출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이송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앞 부분의 발언은 대통령에 기분을 맞추기 위한 보고일 뿐이고 발언의 무게는 뒷부분에 실릴 수밖에 없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비극적이다. 아프간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미국 국적자는 100~200명으로 추정된다. 로이터통신은 전시동맹협회(AWA) 자료를 인용해 지난달 25일 기준 미국 특별이민비자(SIV) 신청자와 그 가족 6만5000명이 아프간을 떠나지 못했다고 전했다. 제2 우선순위(P-2) 자격자와 그 가족 19만8000명 이상도 현지에 남았다. P-2 자격은 미 언론사나 비정부기구(NGO) 등에서 일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미국을 위해 일한 조력자다. 이들은 서방의 일원은 될 수 있지만, 탈레반과 함께 살기 힘들 수밖에 없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지원으로 설립된 카불 아메리칸대학의 학생과 가족 등 6만 명도 서류를 얻지 못해 잔류했다. 추정에 따라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떠나지 못하고 아프간에 남게 됐다. 이는 개인에게 슬픔이요 비극이지만 바이든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다가올 운명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군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남기고 철수한 것은 “도덕적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 더 힐도 “’모든 미국인을 대피시키겠다’고 약속했던 바이든 대통령이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바이든에 대해 미국 내에선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아직 무르익은 단계는 아니지만, 탄핵 이야기도 거론된다. 지난 1월 취임한 바이든으로선 정치적으로 위기일 수밖에 없다. ━ 해외 각국, 바이든 대처에 거센 비난 쏟아내 해외에선 말할 것도 없다. 독일·영국 등 동맹국의 실망도 커지고 있다. 트럼프 때는 동맹과 외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에 체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원 외교 위원장을 지냈다며 외교를 최대 경쟁력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한 바이든을 보는 서구 동맹의 눈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뒤늦게 국무부 등이 나서 한국과 대만, 유럽 등과 관련해 “다르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바이든이 보여준 무사안일, 정보실패, 그리고 과거 함께 싸웠던 아프간인에 대한 비난은 돌이킬 수 없는 신뢰 추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사실상 글로벌 일극 세계를 이끌어왔던 미국의 신뢰가 21세기에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의 비아냥 공세도 거세지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9월 1일 새 학기 첫날인 ’지식의 날‘을 맞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의 공립 청소년 수련센터인 ‘오케안(대양)’에서 수련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20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주둔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타스통신을 비롯한 러시아 관영 매체에 따르면 푸틴은 이날 작심한 듯 미국을 비난했다. 푸틴은 “미군은 지난 20년간 아프간에 머물면서 현지 주민들을 문명화시키고 정치 체제를 비롯해 자신들의 규범과 표준을 옮기려고 시도했지만, 결과는 미국과 아프간 주민 모두에게 비극과 손실만 가져왔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소련은 1979~89년 10년간 아프간에 주둔하면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봤으며 이로 인한 충격으로 1991년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 분열됐다. 미국이 소련의 사례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아프간을 침공해 서구의 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하려다 막대한 손실만 보고 물러난 것을 비난한 것이다. 푸틴은 7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 고별 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외부에서 제삼자의 가치를 강요하려는 무책임한 정책과 낯선 잣대에 기준을 둔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들에 건설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 등을 상대로 인권·민주주의·언론자유 등을 내세우거나 요구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내놓고 말한 것이다. 1일 블라디보스토크 발언도 아프간에서 봤듯이 미국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힘으로 다른 나라에 자국의 가치를 강요할 수 없으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간섭하지 말라는 주문을 아프간에 빗대서 한 셈이다. 바이든은 국내외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국격 추락에 대한 대책부터 고민해야 할 처지다.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발언이나 요청·요구가 힘이 빠질 가능성이 우려될 수밖에 없다. 바이든은 8월 말로 잡은 철군 시한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수많은 아프간인 조력자는 물론 미국 국적자까지 모두 데려오지 못하는 ‘잔류 참사’를 빚었다.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8월 23일 카불로 날아가 카타르에서 귀국한 탈레반 최고지도자 압둘 가니 바르다르와 만나서 회담했지만, 탈레반에 시한을 연장하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탈레반의 축포로 끝난 아프간 전쟁을 되새김질해보면 바이든이 느끼는 정치적 부담을 상상할 수 있다.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그해 10월 7일 시작된 아프간 전쟁은 스웨덴 웁살라대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UCDP)에 따르면 21만2191명의 인명 손실을 내고 끝났다. 브라운대 왓슨 연구소에 따르면 민간인 희생자가 5만1613명에 이른다. 전투원 희생자도 아프간 군경 7만668~6만7558명, 전쟁 초기 북부 동맹 200여명에 미국 2420명, 영국 456명, 캐나다 159명, 프랑스 89명, 독일 62명, 이탈리아 53명, 한국 1명 등 모두 3576명에 이른다. 부상자도 미국 1만9950명, 영국 2188명, 캐나다 635명 등 2만2773명에 달한다. 여기에 미국 노동부 등의 조사에 따르면 민간군사기업(PMC)에 소속된 요원(사실상 용병)도 3939명이 숨지고 최소 1만5000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최소한 미국 69명, 네팔 19명, 영국 17명에 캐나다·필리핀·러시아·우크라이나 국적이 각각 13명이다. 한국 국적자도 2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웟슨연구소에 따르면 탈레반은 5만1191명이 사망했으며, 미 국방부는 알카에다 테러리스트가 200명 정도 숨진 것으로 본다. 미국의 소리(VOA)는 아프간 당국자를 인용해 중동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아프간 지부 격인 ‘이슬람국가 호라산(IS-K)’ 무장대원도 2400명 정도 숨졌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 비용은 현재 화폐가치로 전체 2조2610억 달러가 들었다는 것이 웟슨연구소의 추산이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미군의 2020년 군사비 지출이 나토 기준으로 7850억달러였으니 지난 20년간 2.88년치, 거의 3년치 미국 국방예산을 아프간에 쏟은 셈이 된다. 일본(2조3626억 달러)이나 독일(2조382억 달러)의 2020년 한해 정부 지출과 비슷하다. 한국의 2020년 정부지출(4144억 달러)의 5.5배에 가깝다. ━ 미국 아프간 전쟁 비용, 2조2610억 달러 추산 이런 희생과 비용을 치렀음에도 탈레반은 소탕되지 않았다. 여전히 4만~6만의 병력을 유지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공감대는 미국은 물론 서방 세계 전체에서 힘을 얻었다. 철수는 쉽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1년 미국은 2014년까지 미군을 아프간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9800명의 미군이 계속 남아 나토의 안정화 지원 임무를 맡았다. 미군과 다른 나토 회원국 군대를 합쳐 1만3000명이 군사 고문과 안정화 작업, 그리고 대테러 임무를 위해 계속 주둔했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인 2020년 미국은 아프간 정부를 배제하고 탈레반과 직접 협상했으며 그 결과 2020년 2월 29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미국의 아프간 특사 잘마이 칼릴자드와 탈레반 대표 압둘 가니 바르다르가 ‘도하 합의(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합의)’에 서명했다. 탈레반은 알카에다 퇴치에 협조하기로 했으며, 미국과 나토 동맹국은 탈레반이 합의 조건을 지키면 14개월 안에 모두 철군한다는 내용이었다. 2021년 1월 취임한 조 바이든은 4월 미군의 철수를 발표했다. 그러자 5월부터 탈레반의 공세가 시작됐다. 1996~2001년 아프간을 지배할 당시에도 차지하지 못한 북부 지역을 시작으로 공세에 나서 주요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했다. 아프간은 서울 지하철 2호선처럼 전국을 고리 모양으로 도는 순환도로가 있다. 아프간에는 이 고리를 장악하는 세력이 나라를 차지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1979~89년 이 나라를 침공했던 소련도 완전 장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이 고리 도로를 거의 장악한 데 이어 8월 초에는 수도 카불을 포위했다. 카불 남부의 가즈니와 동부의 잘랄라바드를 점령해 탈출구를 막았다. 8월 15일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카불을 빠져나가면서 미국이 세우다시피 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무너졌다. 2001년 이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가 나라를 다시 차지했다. 서구 세력은 이슬람주의 극단세력인 탈레반을 막지 못했다. 탈레반의 승리로 아프간 이슬람 공화국과 미국의 20년 공든 탑만 무너진 게 아니다. 이번 카불 사태로 바이든이 그동안 누려왔던 유능한 ‘국제외교통’ 이미지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상원 외교위원장 출신으로 문외한인 도널드 트럼프를 압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대신 고집불통에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기성정치인의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정치적인 위기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바이든은 1977~81년 재임하면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겪은 데 이어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을 겪으면서 인기가 폭락해 결국 재선에 실패했던 지미 카터에 비교되는 분위기다. 더 큰 문제는 바이든이 자신의 위기를 돌파하려고 무리하게 동맹들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거나 대중국 압박이나 러시아 회유에서 무리수를 둘 수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이 만회 외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경우 대북이나 대한반도 정책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민에 최악의 국가로 인식되는 북한과 관련해서 어떠한 돌파구를 열든지, 아니면 반대로 꼼짝 못 하게 옭아맬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빚든지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 관계는 과일을 키우듯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당장의 정치적 위기 만회나 인기 회복, 치적 쌓기를 노리든지 지도자의 고집을 받쳐주기 위한 정책을 펼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 카불 사태로 정치적 위기에 빠진 바이든을 바라보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눈이 동시에 초조해지는 이유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09.0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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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대통령은 왜 미소 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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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미국이 남긴 공백을 러시아가 메우기 시작하면서 지역 정세가 요동친다 지난 1월 11일 아침, 육군 원수 칼리파 하프타르(73)는 리비아의 항구 도시 토브룩 인근 지중해 바다에 떠 있는 항공모함의 계단 위를 오르고 있었다. 해군 군악대의 음악, 의장대의 사열과 함께 하얀 제복을 입은 제독이 이 리비아의 독재자를 맞이했다. 하프타르는 2011년 미군의 지원을 받고 독재자 무아마드 알 카다피를 축출한 리비아 반정부군의 수장이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거주한 미국 시민이기도 하다.의례가 끝난 뒤 하프타르는 갑판 아래로 내려가 중동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유력 인사와 철저한 보안 속에 화상회의를 가졌다. 공식적인 회의 주제는 테러리스트 격퇴였지만, 양쪽 모두 비공식 주제가 따로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유엔이 지원하는 허약한 리비아 정부를 무너뜨리고 하프타르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지가 바로 그 주제였다. 하프타르는 미국 정부 인사들과 가깝지만 이때 그가 비밀리에 회의를 가진 인물은 미국인이 아니었다. 하프타르가 탑승했던 것은 러시아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쿠즈네초프 제독호였다. 그 안에서 하프타르가 만난 인사는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었다.중동의 다른 여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하프타르도 러시아와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지난 30년 동안 변두리에 머문 끝에 비로소 다시 한번 중동의 주요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6개월 동안만 해도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의 향방을 바꿔놓았고, 시리아 평화협상을 주도했으며, 터키의 독재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고,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 심지어 이스라엘에까지 손길을 뻗쳐 왔다. 지난 2년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동 지역 지도자들을 25번이나 맞이했다. 뉴스위크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보다 5배 많은 횟수다.지난 10년 동안 미국 정부는 중동 지역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오바마 정부와 도널드 트럼프 정부 하에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나마도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달성한 튀니지를 제외하면 6년 전 아랍의 봄은 중동 지역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대신 불안정성과 극단주의가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같은 국가에서 번성한다. 리비아와 예멘에 대한 서구 사회의 개입은 아직도 내전에 시달리는 파탄국가를 만들어내는 데 그쳤다.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면서 시리아 반정부군을 지원하는 서방의 전략은 시리아 내전을 오히려 악화시킨 것은 물론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세력을 키우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미국의 오랜 외교적 과제였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2국가 해법은 그 어느 때보다 요원해 보인다. 중동 지역에서 오바마 정부 8년 동안 남은 성과라곤 2015년 타결된 이란 핵 협상뿐이다. 그마저도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위태로워졌다.레오니드 슬러츠키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회 의장은 “오바마의 중동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했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성과도 없었다.”미국의 후퇴를 지켜보면서 러시아는 기회를 포착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소련 시절 중동에 행사했던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은 여러모로 이익이다.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군사력도 늘릴 수 있다. 외교적으로는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부과된 서방의 제재를 약화시키는 등 여러 사안에서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가장 중요한 건 전략적 영향력을 되찾는 것”이라고 러시아 상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올렉 모로조프 의원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모스크바 카네기센터 이사장인 드미트리 트레닌은 “푸틴 외교 정책의 목적은 국제적인 패권 국가로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에게 있어 중동에서 미국과 경쟁한다는 것은 패권의 상징과도 같다. 시리아에서 러시아가 한 일들이 바로 그렇다.”그러나 어쩌면 이 목적들보다 더 중요한 건 극단적 이슬람 테러리즘을 막고자 하는 러시아의 욕구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 러시아 북캅카스에서 잔혹한 전쟁이 벌어지는 사이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승계하도록 해준 것이 바로 이 같은 공포다. 러시아의 자생적 반정부 세력들은 러시아 정부와 대다수 러시아인이 인권이나 자유보다 질서를 중시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미국이 이라크와 리비아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려다가 오히려 내전이 격화된 것을 보면서 푸틴 대통령은 분명한 선택지를 깨닫게 된다. 설령 잔인하더라도 힘 있는 정권으로 외세를 굴복시키거나 “국가 체제의 분열과 테러리즘의 부흥”을 맞이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 가장 중요한 건 러시아의 안보 IS가 시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IS를 격퇴한다는 서방의 노력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의구심도 커져갔다. 2015년 9월 중순 러시아 정보기관은 최소 2500명의 러시아인이 IS에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이 보기에 이는 아사드 정권의 유지와 성공을 러시아의 국익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시리아에서 러시아의 주된 목적은 IS에 가담하기 위해 그곳에 간 러시아인들을 절대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아체시아프 니코노프 러시아 하원의원은 말했다. “러시아의 중동 개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러시아의 안보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방어적이든 아니든 러시아의 중동 복귀는 놀랍고도 갑작스런 성공을 거뒀다. 동시에 미국의 패권과 위신은 크게 실추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동에서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적수가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IS를 격퇴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임기를 시작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시리아에선 하늘에 러시아 전투기, 지상엔 러시아 육군이 있고 리비아 해안엔 러시아 전함이 있다. 친러 성향 지도자들이 리비아와 시리아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앞으로 트럼프는 중동에서 뭘 하든 항상 푸틴 대통령이 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고려해야 한다. 그동안 어떤 미국 대통령도 겪지 못한 일이다.냉전 기간 동안 중동은 미국과 러시아의 텃밭이었다. 소련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표를 자부했다. 반서구적·사회주의적 성향인 아랍 민족주의를 이끈 가말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러시아를 이 지역으로 불러들여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줬다. 나세르가 1956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분쟁에서 영국·프랑스 등 북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하던 국가들을 물리친 이후 러시아의 무기와 돈이 이 지역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소련 공학자들은 이집트 아스완에 댐을 지었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도시들을 현대화하는 것을 도왔다. 그와 동시에 아랍 지역의 관료, 의사, 전문가들이 한 세대에 걸쳐 러시아에서 공부했다. 향후 이집트 대통령이 되는 호스니 무바라크나 벵가지 군사학교 졸업 후 1970년대 소련에서 훈련받은 하프타르도 그중 하나였다. 러시아 국가보안위원회(KGB)는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등 국가들의 정보기관 설립을 도왔다.중동의 공산화 도미노를 막는 데 혈안이 된 미국 정부는 돈을 투입했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나세르 사망 이후 이집트가 미국 군사지원금의 주요 수혜자였다.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한 터키는 미국의 군용기와 전함, 그리고 가장 논란이 됐던 중거리 핵 미사일 주피터까지 배치를 허가했다. 주피터가 터키에 배치되자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1962년 10월엔 거의 핵 전쟁 직전까지 긴장이 고조되는 일도 있었다.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리비아부터 시리아까지 러시아의 우방들은 루블화 지원이 끊어졌음에도 강한 반서방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미국의 지원을 받다가 2003년 미국에 의해 축출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었다. 러시아는 이를 미국의 명백한 침략이라고 주장했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발생하면서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튀니지의 지네 엘 아비딘 벤 알리가 권좌에서 밀려났다.이 기간 동안 구소련 국가들에선 ‘색깔 혁명’이라 불린 일련의 반정부 운동으로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즈스탄, 조지아의 친러 성향 정부도 축출됐다. 2011년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러시아에까지 밀려들며 시민 1만 명이 거리로 나와 푸틴의 세 번째 대선 출마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미국인이 보기에 이 같은 시위들은 민주주의와 시민의 힘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그러나 러시아인에게 아랍의 봄은 푸틴 대통령을 포함해 미국의 패권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을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계략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인 63%까지 하락했고 유럽식 진보 이념과 미국과의 화해를 주장한 시위 지도자들이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는 듯했다.푸틴 대통령은 “이집트나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시위는 러시아를 겨냥한 계략”으로 생각했다고 러시아 주재 서구 외교관은 말했다. “우리는 이를 과대망상증이라고 무시했다. 실제로 과대망상증이지만, 러시아인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이 시기에 걸쳐 러시아는 유엔에 주기적으로 저항했다. 1999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폭격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막으려는 시도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두 사건 모두에서 미국이 러시아를 누르고 뜻을 관철시켰다. 러시아가 미국의 주목을 받은 일이라곤 이란과의 밀착 정도가 전부였다.1990년대 후반 러시아는 이란이 샤하브3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이후 이란이 첫 원자력 발전소 부셰르를 건설하도록 도왔다. 2008년 미국이 이란에 핵 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때 러시아가 중개인 역할을 맡았다. “미국은 이란을 상대할 때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세르게이 키리옌코 전 러시아 총리는 말했다. 키리옌코는 러시아와 이란의 협상 당시 러시아국영원자력공사(ROSATOM)의 사장을 지냈다. “이란인은 우리를 신뢰했다. 우리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그와 동시에 러시아는 소리 없이 서서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협상에 침투했다. 러시아의 주요 동맹은 70년대에 러시아민족우호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팔레스타인 지도자 마무드 압바스였다. 이스라엘 연구자들은 KGB 기록담당관 바질리 미트로킨이 1991년 유출한 문서를 근거로 압바스가 소련에 의해 암호명 ‘크로토프’로 불리며 조종받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측은 이 같은 주장을 부인했다.러시아 측 요원이든 아니든 압바스는 “러시아인을 좋아했으며 그들을 만족시키려 했다”고 협상가 출신인 지아드 아부 자야드 전 팔레스타인 장관은 말했다. 푸틴 대통령이 2012년 서안지구를 거쳐 베들레헴으로 향할 때 압바스는 그에게 약간의 토지를 선물로 줬다. 지금 러시아 문화센터가 세워진 땅이다. 그해 압바스는 베들레헴과 예리코의 도로에 푸틴 대통령과 그의 후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이처럼 눈에 띄는 공개적인 제스처와 함께 조용하고 지속적인 외교 활동도 이어졌다. 러시아의 팔레스타인 지원 계획을 진두지휘한 것은 아랍어가 유창하고 안경을 쓴 64세의 외교관 미하일 보그다노프였다. 푸틴 대통령은 보그다노프를 2012년 중동 특사로 임명했다. 시리아, 이집트, 이스라엘 주재 대사를 지냈던 보그다노프는 이집트의 독재자 압델 파타 엘시시부터 리비아의 하프타르까지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오바마 정부 하에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점차 멀어진 것도 보그다노프에겐 큰 기회였다. 미국 정부엔 중동에서 발을 뺄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군사 개입을 줄이고 싶어 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은 셰일가스 혁명으로 에너지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면서 중동의 석유에 상대적으로 덜 의존하게 됐다. 그러나 보그다노프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리비아와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러시아 외교 정책의 핵심은 극단적 실용주의다. 이념에 상관없이 각 지역의 주요 국가들과 교류한다”고 이란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니콜라이 코자노프는 말했다. 현재 코자노프는 미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에서 일한다. “이는 러시아 전략의 주요 원칙이자 중동 지역에서 갖는 주된 강점이다.”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이집트와 시리아에 민주주의나 인권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러시아는 미국이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에서 개혁을 밀어붙일 때 기회를 포착했다”고 미국 국무부에서 근무했던 스티브 세시 전 예멘 주재 미국 대사는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중동 유력 인사들에게 무기를 싼 값에 팔 준비 또한 돼 있었다. 러시아는 2012년 이후 이집트에 40억 달러에 달하는 양의 무기를 팔아치우고 지난해 11월부터는 이란과 100억 달러 규모의 거래를 추진하고 있다.중동이 러시아 외교 정책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급부상하게 된 배경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2014년 2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서방과 직접적인 갈등을 빚게 됐다. 둘째는 그로부터 1년 뒤 푸틴 대통령이 시리아 내전에서 중동의 최대 중재자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잡게 된 일이다. ━ 러시아는 시리아의 구세주 2015년 9월 30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전투기 편대를 시리아 친정부 세력의 거점인 라타키아 근처 흐메이밈 공군기지에 배치했다. 이는 1979년 참패를 겪었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로 러시아가 구소련 경계 바깥에 군대를 파견한 첫 사례였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30여 대의 러시아 전투기가 아사드 편에서 참전했다. 파견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러시아 외교 정책에 있어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러시아 군용기들이 IS를 격퇴 중이던 미국 및 그 우방들과 같은 영공을 비행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 코메르산트 라디오는 시리아 국민이 푸틴 대통령을 ‘황제’라 부르며 칭송한다고 보도했다. TV 뉴스에선 일기예보를 내보내면서 시리아를 폭격하기 좋은 날씨라는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러시아 국방부는 지난해 말까지 자신들의 전투기가 3만 번 출격해 6만2000개의 목표물을 타격했다고 자랑했다. 2014년부터 지난 1월까지 시리아와 이라크의 IS에 대항해 13만5000번 출격하고도 3만2000개 미만의 목표물을 파괴하는 데 그친 미국 주도 연합군과 대조되는 성과였다.연합군은 이 차이가 자신들이 민간인 사상자를 막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애시튼 카터 미 국방장관은 러시아의 공습이 IS를 격퇴하는 데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공습이 미군이 지원하는 반군을 무력화하고 아사드 정권이 전략적 요충지 알레포를 수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본다.모로조프 의원은 “푸틴은 개입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사드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시리아에 어떤 형태로든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사드가 패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중동에서 러시아가 행사하는 영향력도 사라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푸틴 대통령의 시리아 전략은 1년 전 러시아를 “안쓰러운 일개 지역 패권국”이라 부른 데 대한 상징적 반격이 됐다고 트레닌 이사장은 말했다.러시아가 자칭 시리아의 구세주 역할을 가장 상징적으로 수행했던 사건은 지난해 5월 러시아 특수부대와 공습지원에 힘입은 아사드가 IS로부터 고대 도시 팔미라를 되찾은 일이었다. 비록 러시아의 공습 대부분은 미국이 지원하는 시리아 반군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러시아는 자국의 가장 훌륭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와 마릴린스키 교향악단을 보내 IS가 처형 장소로 쓰던 팔미라의 고대 극장에서 세계 각국 기자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했다. 물론 여론을 의식한 쇼였지만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팔미라에서 러시아가 거둔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러시아 교향악단이 공연을 벌인지 7개월 뒤인 12월, 기자들과 군대가 팔미라를 떠나자 IS가 이 도시를 다시 차지했다. 러시아 정부는 패배의 탓을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로 돌렸다. 이후 러시아는 팔미라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그러나 알레포가 아사드 정부의 수중에 떨어지고 러시아가 평화 협상을 주도하는 지금 미국의 새 행정부는 외교와 군사 양면에서 시리아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한 국무부 고위 관료가 익명을 전제로 뉴스위크에 말했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에서라면 전쟁범죄라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기로 결정한 덕분에 시리아에서 그만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 적과의 동침 지난 18개월에 걸친 러시아의 성공적인 시리아 개입은 중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러시아의 오랜 적이자 나토 회원국인 터키가 예상치 못한 러시아의 새 친구가 됐다. 1년 전 터키 영공을 17초 간 침범한 러시아 군용기를 터키가 격추했을 때 푸틴 대통령은 격노했다. 보복 조치로 푸틴 대통령은 터키행 러시아 관광 전세기 운항을 중단시키고 터키산 제품 제재를 개시했다.그 이후로 두 가지 사건이 러시아와 터키의 관계를 바꿔놓았다. 아사드의 알레포 승리와 실패로 끝난 터키의 쿠데타였다. 지난해 7월 발생한 쿠데타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적 숙청에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샀다. 한때 동지였던 이들의 비판에 터키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으로 응수했다.“러시아 없이는 시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푸틴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말했다. “러시아와 터키의 우정의 축은 복구될 것이다.”그와 동시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바마와의 관계가 “실망스럽다”고 인정했다. 오바마 정부는 시리아 북부에서 IS에 맞서 싸우는 쿠르드족 전사들에게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적인 미국 거주 성직자 펫훌라흐 귈렌을 인도하라는 터키 측 요구도 거부했다.그 결과 터키 고위 관료들은 미국에 내줬던 시리아 국경 근처 인시리크 공군기지 이용 권한에 공개적으로 회의감을 드러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 정치인들에게 EU를 향한 집착을 버리고 그 대신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경제협력기구(SCO) 가입을 고려하라고 주문했다. SCO는 푸틴 대통령도 선호하는 기구다. 지난 1월엔 사상 최초로 러시아와 터키 공군이 IS를 겨냥해 합동 공습을 실시했다.이 새로운 친선관계는 “계산적”일 수도 있으나 양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채텀하우스 터키프로젝트를 이끄는 파디 하쿠라는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와 미국의 거리를 떨어뜨리고 싶어 한다.” 러시아가 오랜 기간 갈고 닦은 원칙인 ‘적의 적은 나의 친구’에 해당하는 상황이다.중동의 또 다른 주요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는 낙오된 국가들 간의 동맹처럼 보였으나 이젠 매우 견고해졌다. 이란은 러시아가 주도하는 시리아 평화협상에 참가해 1월 카자흐스탄에서 열릴 회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이 회담에서 평화 협상 절차와 시리아의 새 헌법이 논의됐지만, 이는 불가피하게 현재 지상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아사드 정권에 유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S-300 방공 미사일 시스템 등 러시아가 공급하는 무기들은 이란이 경쟁 국가인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군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해줬다. 그 대가로 이란은 러시아에 하마단 공군기지 이용 권한을 제공해 러시아의 시리아 공습을 돕고 자국 영해인 카스피해에서 러시아 군함들이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도록 허가했다. 가장 중요한 건 러시아가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면서 이란이 “이스라엘과 미국에 맞선 저항의 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라고 리처드 달튼 전 이란 주재 영국 대사는 말했다. 이란은 수십년 동안 미국의 동맹국이 아니었지만 이집트는 군사·정보·외교 부문에서 미국의 주요 우방이었다. 미국의 군사지원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받은 이집트는 오바마가 2013년 엘시시의 집권 이후 이 지역에서 발을 빼고 있음에도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했다.한편 이집트는 지난해 러시아 공군 훈련을 지원하면서 지역 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의 입지를 확인했다. 러시아군이 아프리카에서 가진 첫 훈련이었다. 지난해 11월 이집트는 유엔에서 러시아의 시리아 관련 결의안을 지지한 4개국 가운데 하나가 되면서 푸틴 대통령에 지지를 보냈다. 러시아는 그 대신 엘시시 대통령의 동맹인 하프타르가 권력을 독점하려 애쓰는 리비아에 대한 유엔 제재를 해제하도록 손을 쓰고 있다. “푸틴이 제제 해제에 착수할 것”이라고 하프타르는 지난 1월 쇼이구 국방장관와의 화상회의 이후 기자들에게 말했다.푸틴 대통령은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우방인 이스라엘과도 친분을 쌓는 데 성공했다. 이제 러시아 전투기는 이스라엘이 1967년 시리아로부터 점령해 분쟁 지역이 된 골란고원까지도 운항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015년 9월 이후 러시아를 세 차례나 찾아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오바마를 만난 횟수보다 더 많다. 네타냐후와 오바마는 사이가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메드베데프 총리는 지난해 11월 양국의 수교 25주년을 기념하고 무역 거래를 늘리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러시아가 이스라엘의 두 적인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와 이란을 상대하는 데 협력해주길 기대한다.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염려도 있다. 오바마는 이란 핵 협상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대를 무시하고 네타냐후 총리에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가로막는 서안지구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지난 2월 2일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현 국경을 넘어 정착촌을 확대하거나 새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오바마 정부 때의 기조를 되풀이했다.반면 러시아는 이스라엘에 미국처럼 피곤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미국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경제 제재를 가하자 푸틴 대통령은 “제2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지역 내에서 가능한 모든 이들을 친구로 삼으려 한다고 즈비 마겐 전 러시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에 대한 레버리지가 더 많이 필요하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협상은 그 레버리지 중 하나다.”푸틴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해 6월 모스크바에서 세 번째로 만났을 때 러시아는 네타냐후 총리와 압바스의 평화 협상을 모스크바에서 갖도록 주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무조건적” 동맹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실용주의에 기반을 둔 이 우호적 관계에서 두 지도자는 기회를 포착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오바마 정부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이처럼 중동엔 현재 수많은 윈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불행히도 그중에 미국에 해당되는 사례는 하나도 없다. ━ 아군인가 적군인가 오바마는 부시가 중동이나 다른 지역에서 펼쳤던 미군의 실력 행사 전략에서 후퇴했지만, 트럼프는 70년째 이어지는 민주주의 전파자로서 미국의 역할을 완전히 버리려는 듯하다. 미국의 ‘개입과 혼돈’ 정책은 이제 멈춰야 한다고 지난해 12월 트럼프는 말했다.러시아가 보기에 미국의 태도 변화는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서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위험한 힘의 공백을 만들게 된다. 서방에선 러시아의 부상을 잃어버린 제국의 위신과 영향력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여기지만 러시아 고위 관료 다수는 러시아의 중동 정책이 안보 문제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극단주의자들이 중동에서 체첸으로 건너왔는지 기억한다”고 레오니드 칼라슈니코프 러시아 하원 의장은 뉴스위크에 말했다. 90년대 북캅카스에선 외국에서 온 성전주의자들이 반군이 일으킨 분리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 지역은 중앙아시아와 인접해 있다. 러시아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테러리즘이 이곳으로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면 우리는 시리아에 개입해야만 한다.”러시아 연방보안국 국장을 지냈던 니콜라이 코발레프 러시아 하원의원은 “우리 국민 수천 명이 그곳에 가서 IS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의 악인들이 시리아로 모여들고 있다. 이슬람교는 핑계일 뿐이다. 이 사람들은 남을 굴복시키고 여성을 성 노예로 삼는 걸 즐기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건 국가 안보의 문제다.”러시아는 중동에서 확보한 지배력을 지키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이 지역 지도자들은 미국과 러시아 양쪽에 협력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를 백악관으로 초청하고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 정착촌에 우호적 견해를 가진 대사를 이스라엘에 파견했다. 이는 모두 네타냐후 총리와 푸틴 대통령의 관계를 저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한편 팔레스타인은 그 어느 때보다 러시아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트럼프에 아무런 기대도 없다”고 1994년 오슬로 평화협정 당시 팔레스타인 측 협상가를 맡았던 아부 자이드는 말했다.이스라엘이 러시아와 미국 모두에 우호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이집트 역시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모두에게 협력을 기대한다. 엘시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트럼프의 당선을 전화로 축하한 첫 해외 정상이 됐다. 그는 트럼프의 유세 기간 동안 트럼프를 만난 첫 아랍계 지도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주한 이래 더 깊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취임 후 아랍 지역에 보낸 첫 번째 제스처는 엘시시 대통령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밖에도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를 워싱턴으로 초청하고 여러 아랍 지도자들에게 전화해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했다.“트럼프와 엘시시 대통령은 세상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유럽외교협회의 중동·북아프리카 정책 연구원 휴 로버트는 말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정 등 중동 문제에서 “러시아와 이집트, 미국이 협력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런 3자 협력은 비밀리에 이집트와 외교안보적 협력을 강화해왔던 이스라엘에도 매력적인 선택지다.미국 입장에서 이는 아주 새로운 전략이다. 지난 중동 평화 협상에선 미국이 항상 주도적인 중개인 역할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려야 한다. 평화협정을 성사시키고 테러리즘을 박멸해 미국의 국익을 지키려면 지난 8년간 미국 대통령을 그토록 괴롭혔던 인물에 계속해서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진실 말이다.- 오웬 매튜스, 잭 무어, 대미언 샤코브 뉴스위크 기자

2017.03.05 15:56

16분 소요
푸틴의 야심적인 외교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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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떠나거나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를 내쫓고 무정부 상태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1·13 파리 테러를 두고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테러리스트를 용서할지 말지는 신이 결정하겠지만 그들을 신에게 보낼지 말지는 내가 결정한다.” 터프한 어법으로 잘 알려진 푸틴다운 표현이다. 실제 그의 행동도 터프했다. 러시아 공군은 시리아의 수니파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거점 공습을 강화했다. 하루 120회 이상 출격하며 Tu-95 전략폭격기까지 동원해 IS의 돈줄인 밀수 석유를 운반하는 트럭 500대 이상과 훈련시설을 파괴했다. 더구나 사상 최초로 러시아가 프랑스·미국과 공습을 조율했다.2개월에 걸친 논의에도 공동의 적인 IS에 맞서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옛 동맹국들을 단합시키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IS가 파리를 공격하고 이집트에서 러시아 여객기를 추락시키자 연합전선이 곧바로 구축됐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도 군사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한 러시아의 시리아 개입이 “형세를 바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러시아와 서방의 ‘정보 교환 강화’를 높이 사며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정부군과 반군(IS 제외) 사이의 휴전이 ‘앞으로 3∼5주 안에’ 성사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란과 러시아는 준비가 돼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와 이란이 시리아의 정치 과정을 신속히 되살릴수록 폭력사태가 빨리 줄어들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하던 푸틴 대통령이 순식간에 중동의 필수적인 파워 브로커로 등장했다. 일부 서방 국가가 IS 격파라는 목적을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그가 저지른 죄를 덮어두려는 듯한 태도도 그런 부상을 가속화했다.러시아의 개입은 3가지 극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사면초가에 처했던 시리아 정부군과 아사드 정권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둘째, 외교 전선에서 러시아의 전면적인 압박으로 평화 정착 계획의 초안이 마련됐다. 모든 ‘온건’ 반군 단체들이 교전을 중단하고 IS를 격파한 뒤 총선을 치른다는 계획이다(물론 지금까진 아사드 정권만 그 안을 지지하며 미국은 시라아의 쿠르드족을 비롯한 일부 반군 단체에 군사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셋째, 러시아의 시리아 개입에 대한 보복으로 IS가 러시아 여객기를 폭파해 224명이 숨졌다.그러나 러시아는 현재의 혼돈 상황에서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낼까? 또 러시아의 입장에선 승리가 어떤 것일까?러시아의 중동 정책을 담당하는 고위 외교관은 “붕괴가 임박한 아사드 정권을 살리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8월 이란 혁명수비대 고위 간부의 ‘긴급한’ 모스크바 방문이 러시아 개입의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또 시리아 정부군이 와해 직전이며 자유시리아군과 연계한 반군 단체가 곧 정부를 접수할 기세라고 러시아에 경고했다.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수도 다마스쿠스와 홈스·하마를 거처 시리아 북부를 연결하는 M5 간선도로 주변으로 퇴각한 상황이었다. 그곳을 빼앗기면 아사드 대통령의 알라위파가 지배하는 해안 지역이 다마스쿠스로부터 차단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9월 시리아 동북부의 반군을 겨냥한 러시아의 공습으로 전선이 안정됐다(미국에 따르면 공습의 85∼90%는 IS가 아니라 ‘온건’ 반군단체를 표적으로 했다). 11월 중순이 되자 러시아 공군의 폭격기와 시리아군이 조종한 러시아제 Mi-24 하인드 공격용 헬기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알레포주의 크웨이리스 공군기지를 둘러싼 IS의 2년에 걸친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의 전략은 공세를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자문역을 지낸 시리아 전문가 조슈아 랜디스는 “알레포 탈환이 목표”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이 그럴 듯한 국가의 모양을 갖출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영토의 탈환을 도우려 한다. 주요 항구도시인 알레포와 이드리브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시리아 지도부는 3개월 안에 알레포를 탈환하고 1년 안에 시리아 서북부를 통합할 계획이다.”그러나 대다수 관측통은 전투에 지친 시리아 정부군이 러시아 공군력와 이란 혁명수비대의 지원을 받더라도 그처럼 넓은 지역을 단시일에 탈환하긴 어렵다고 본다. 정부군은 알레포의 인구 밀집 구역에 원시적이지만 위력이 대단한 통폭탄을 떨어뜨렸고 2012년엔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린 신경가스를 사용하는 등 필사적으로 나섰지만 군사적 대치가 계속되면서 전력을 소진했다.또 수니파가 대다수인 그 지역의 반군 지지자들이 러시아에 맞서 지원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모스크바의 군사 분석가 파벨 펠겐하우어는 “점진적인 전투의 격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정부군이 약진하면 반군은 터키와 카타르 공군의 직접 개입 같은 형태로 지원 받을 것이다. 또 사우디가 미국에서 구입한 스팅어·어벤저 미사일 같은 정교한 대공 무기도 지원받을 수 있다.”랜디스는 “러시아로선 아사드 정권의 공세를 지원하는 전략으로 카타르와 사우디, 터키가 반군의 무장을 돕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러시아는 아사드 대통령만이 시리아의 안정을 되찾고 난민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서방을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러시아의 계획을 둘러싼 외교적 논의에서 표면상의 핵심은 시리아 총선 준비에 필요한 최소 18개월 동안 아사드 대통령이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러시아의 주장이다. 지난 10월 아사드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은 4년만의 첫 해외 나들이였다. 그가 러시아 군용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푸틴 대통령이 그를 개인적으로 강력히 지지한다는 뜻으로 비쳤다.그러나 러시아에 진정 중요한 것은 시리아의 국가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아사드 대통령의 부친 하페즈가 건설하고 소수파인 이슬람 알라위파의 지배를 바탕으로 한 45년 정권을 보존한다는 뜻이다. 러시아 외교 소식통은 “아사드 대통령이 떠나거나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누가 통치자가 될지는 시리아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사드를 내쫓고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러시아는 시리아가 제2의 이라크나 리비아가 되는 걸 두고 보진 않을 것이다.”그러나 아사드 대통령이 시리아 반군에만 제거 대상인 건 아니다. 케리 국무장관은 지난 10월 29일 시리아 위기 해결을 위한 오스트리아 빈의 관계국 회담에서 “미국을 비롯해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터키, 카타르, 요르단, 이집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수십 개국이 아사드 대통령을 시리아 평화 정착의 장애물로 본다”고 말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고위 미국 정책 전문가들도 러시아의 판단이 옳을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한다. 아사드 축출은 즉시 시리아의 붕괴와 대학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랜디스는 “아사드를 축출하면 알라위파의 지배권이 무너진다”고 설명했다. “서방은 지난 10여 년 동안 국가 붕괴 없이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현지 실정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라크에서 봤듯이 정권을 무너뜨리면 국가도 무너진다. 시리아는 종파 정권이다. 군과 경찰 등 주요 기관은 위부터 아래까지 알라위파 아사드 지지자로 구성됐다. 수니파 인사를 수장으로 앉히면 그 아래 전원을 파면해야 한다. 보복이 아니라 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사드 아니면 누굴 내세워야 하나 2013년 누스라 전선(알카에다 지부) 같은 이슬람주의 극단주의 단체의 존재가 전투에서 주요 요인으로 부상했을 때 일부 미국 관리는 아사드 축출이라는 미국의 공식 입장이 과연 현명한지 회의를 품었다. 미국 연방의회의 한 고위 간부는 “아사드 축출과 대체 인물에 관한 우려가 크다는 외교 전문을 봤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시리아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포드는 정부의 시리아 정책에 항의하며 사임했다.동시에 러시아도 장기적으로 아사드보다 온건한 인물이 화해 과정을 더 잘 이끌 수 있다고 인정한다. 시리아 반정부세력 연합체 시리아국민연합(SNC)의 칼레드 코자 대표는 빈 회의 참가 직전 지지자들에게 “이란과 러시아는 다르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아사드가 대통령으로 머물든 축출되든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다. 반면 이란은 철저히 아사드 대통령 편이다. 다른 누구도 그처럼 이란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러시아가 직면한 문제는 아사드 대통령을 대체할 인물을 찾는 일이다. 러시아와 미국은 지난 수 년 동안 그럴 듯한 인물을 물색했다. 포드 전 대사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군에서 가장 유능한 야전 사령관으로 평가 받는 수헤일 하산 대령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알 니므르(아랍어로 호랑이라는 뜻)로 불리는 그는 IS의 크웨이리스 공군기지 포위망을 푸는 공훈을 세웠다. 러시아 외교 소식통은 시리아 정계와 군 양쪽에서 괜찮은 인물 여러 명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우린 시리아와 수십 년 간 교류했다. 하페즈 아사드 전 대통령은 소련에서 미그 전투기 조종술을 배웠다. 고위 장교들도 우리와 함께 훈련했다. 우린 그들을 잘 안다.”그러나 미국의 시리아 전문가들은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랜디스는 “러시아가 미국보다 시리아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친했던 고위 장교는 오래 전에 숙청되고 없다.”랜디스는 내전 발발 전 어느 시리아군 준장과의 대화를 돌이켰다. “누군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을 묻자 그는 ‘군 최고위 인사 12명 전부 자신이 아사드보다 나라를 더 잘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유지할 순 없다’고 대답했다. 아사드의 축출은 알라위파의 허약함으로 비친다. 지역의 매파들이 알라위파 인프라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다.”시리아를 지배하는 알라위파의 ‘포식자 정치 문화’는 지난 4년의 내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9월 시리아 정부군이 군사기지 4곳을 빼앗기고 타브카 공군기지에서 병력 250명이 사살되자 알라위파는 홈스의 거리로 뛰쳐나가 주지사의 사퇴를 요구했다. 위기에 직면한 아사드 대통령은 사촌인 하페즈 마클루프를 안보국 간부직에서 파면했다. 마클루프와 동생 이하브는 가족과 함께 벨라루스로 피신했다. 지난 4월 아사드 대통령은 다른 조카인 문터 아사드를 국가전복 음모로 체포했다. 그 직후 알리 맘루크 정보국장은 아사드의 망명한 삼촌과 짜고 정부전복 음모를 꾸민 혐의로 가택연금됐다. 5월 이래 시리아 정부군 기갑사단장 등 여러 장성이 체포됐다.그들이 제거된 원인이 전투 패배인지 정치적 범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랜디스는 평화적 선거로 시리아 지도자를 교체한다는 러시아의 발상은 헛된 꿈이라고 말했다. “알라위파가 민주적 절차를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아사드가 없으면 알라위파의 고위 간부들이 서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일 것이다.” ━ 소시오패스인가 사이코패스인가 아사드 대통령이 유일한 대안이라면 그게 무슨 뜻일까? 최근 그를 만난 외교관과 언론인들은 아사드가 심하게 자기부정을 한다고 지적했다. 유엔의 시리아 담당 특사를 지낸 라크다르 브라히미는 “아사드 대통령과 측근들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외부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아사드 대통령은 지난 2월 영국 BBC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부와 국가기관은 국민을 위해 의무를 수행한다”며 내전을 “외부 테러리스트들의 침공” 탓으로 돌렸다. 또 그는 통폭탄 사용도 부인했다. 포드 전 대사는 그가 품위 있고 상냥하며 거만하지 않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유창한 영어로 농담도 잘한다고 말했다.그러나 시리아 정부의 인권침해를 따지자 그는 곧바로 화냈다. 지난 1월 아사드 대통령을 인터뷰한 외교 잡지 포린어페어스의 조나선 테퍼먼 편집장은 “시리아 대통령은 아주 뛰어난 거짓말쟁이(소시오패스에 불과하다는 뜻)거나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결론 내렸다. “후자의 경우 편집증적 사이코패스처럼 훨씬 위험하다.”한편 러시아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 관리들은 지난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아사드 대통령을 보고 때 “침착하고 명료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인들로부터 온건 반군단체와 권력을 나눠 IS와 싸우는 ‘대테러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양보의 뜻을 밝혔다.그 이래 러시아 공군이 시리아 반군을 공습하는 동안에도 러시아 요원들은 반군들과 접촉했다. 자유시리아군의 간부 무스타파 세이자리는 지난 10월 말 러시아가 자신을 포함해 여러 간부를 회담에 초청했다고 밝혔다. 무기를 내려 놓고 선거에 참여할 반군 지도자를 찾은 것이 회담의 목표였다. 협상을 거부하면 러시아의 무자비한 공습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도 따랐다. 2000년대 초 체첸에서도 러시아의 그런 전략이 먹혀 들었다.러시아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는 SNC 대표를 지낸 3명과 현 코자 대표를 포함해 반군단체에서 협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38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프랑스로 망명한 마나프 틀라스 장군이 제시한 11개 ‘국가 프로젝트’(휴전과 IS 협동 공격 계획 등)도 지지했다.더 중요한 점은 러시아가 중동 지역에서 아사드 정권의 최대 적대국과 자주 접촉했다는 사실이다. 푸틴 대통령은 아사드 대통령이 시리아로 돌아간 직후 걸프 국가와 요르단의 주요 수니파 지도자들과 대화했다. 또 최근 사우디의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푸틴 대통령이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수니파 국가에 자신이 정직한 중재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특히 그는 사우디 측에 이란과 러시아의 우호관계가 새로운 지역 동맹이 아니라는 점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지난 11월 23일 푸틴 대통령이 테헤란을 방문했지만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불신은 상당히 깊다. 11월 초 무함마드 알리 자파리 이란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은 “러시아가 우리처럼 아사드 정권의 보전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며 불만을 표했다.그의 생각이 옳다. 러시아는 시리아를 뛰어 넘는 외교 게임에 몰두한다. 혁명을 추구하는 이란이나 중동에서 거의 불가능한 정권 교체를 추진하는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현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특히 시리아에서 자국의 경제적·안보적 이익을 보존하고 마지막 중동 동맹국인 시리아의 붕괴를 막으려 한다.터키·사우디·요르단·카타르는 아사드 정권이 사라지고 시리아에서 이란이 물러나기를 원하지만 러시아는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리아에서 이란보다 러시아가 지배적인 외세로 부상하고 아사드 대통령은 실권 없는 의전 수반으로 남는 시나리오가 그 예다. 러시아는 사우디를 비롯한 수니파 동맹국이 그런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물론 사우디는 아직도 아사드 정권의 잔류에 완강히 반대한다).그러나 뉴욕대학의 국제문제 전문가 마크 갈레오티 교수는 “현대전이 사전 계획된 공습 등 하이테크 추리극처럼 시작은 아주 멋지고 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전쟁은 지저분해진다. 예측 불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세력이 필사적인 항전을 벌인다. 러시아도 머지않아 시리아 개입의 주도권을 잃고 수렁에 빠질 수 있다.”특히 시리아의 수많은 분파가 장기적인 내전의 여파로 평화 과정의 핵심인 상호이해와 용서를 수용하기 힘들다. 랜디스는 “시리아엔 민병대가 1500개나 되며 그들 모두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말했다.펠겐하우어 분석가는 “대다수 시리아인이 아사드 대통령을 지지하며 소수파가 외세를 등에 업은 민병대의 탄압을 받는다는 게 러시아 지도부의 믿음”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민병대를 공습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완전 착각이다. 중동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그러나 러시아가 그렇게 믿는 데는 오랜 배경이 있다. 1985년 9월 30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소련 외교관 4명이 복면 괴한들에게 납치됐을 때 소련은 협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납치범들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 헤즈볼라 소속이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베이루트 지부장 유리 페르필례프 대령은 레바논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 아야톨라 무함마드 파들랄라에게 즉시 연락했다. 그는 소련 핵미사일이 테헤란이나 쿰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협박했다. 페르필례프 대령은 2001년 러시아 TV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강대국의 인내심이 바닥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련은 예측 불가한 결과를 초래할 중대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곧 KGB의 정예 알파부대 팀이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그들은 납치범 두목의 친척을 찾아내 그를 거세하고 사살한 뒤 시신을 난도질해 헤즈볼라 본부에 보냈다. 다른 친척이 다음 차례라는 경고였다. 러시아 외교 소식통은 “납치범들이 잘못 짚었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상대는 친절한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KGB는 헤즈볼라보다 훨씬 잔혹했다.”그 얼마 전 헤즈볼라는 납치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베이루트 지부장 윌리엄 프랜시스 버클리를 살해했다. 5개월에 걸친 협상도 소용없었다. 이제 소련도 똑같은 악몽에 직면한 듯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KGB 알파부대 팀의 작전 이틀 뒤 생존한 소련인 외교관 인질 3명이 풀려났다. 그 이래 중동에서 납치된 러시아인은 없다.KGB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푸틴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가 미국보다 한 수 위이며 중동 정치를 다루는 수완이 뛰어나다고 확신한다. 당시 이스라엘 신문 예루살렘포스트의 외교 담당 특파원이었던 역사가 베니 모리스는 “베이루트 사건이 소련의 특성을 잘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행동한다. 헤즈볼라가 겁먹을 정도였다.”그처럼 초강력 폭력수단과 냉철한 프로페셔널리즘에다 대수롭지 않게 핵위협을 가하는 방법이 요즘 러시아의 중동 정책 담당자에게 매력적으로 비칠 만하다. 그러나 시리아를 위한 푸틴 대통령의 계획은 가식적인 것만이 아니다.지난 9월 유엔 총회에서 그가 말했듯이 논리는 명확하다. 미국이 중동에서 정권 교체를 추구하다가 실패하면서 국가기관이 붕괴됐고 권력 공백이 생겼으며, 그 공백을 즉시 극단주의자와 테러리스트들이 메웠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개입은 “시리아 국가의 기능을 보존함으로써” 사담 후세인(이라크)과 무아마르 카다피(리비아)의 몰락에 따른 것과 같은 무정부 상태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다.물론 푸틴 대통령의 휴전 계획에 따르면 이란부터 미국, 사우디까지 모든 관련국이 기대치를 수정해야 한다. 또 서방은 무자비한 독재자를 적어도 한동안 그대로 두는 게 IS의 지속적인 존재를 견디기보다 더 낫다는 아사드 대통령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너무도 굴욕적이다. 그러나 IS의 야심이 모스크바와 파리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의 계획이 유일한 해결책일지 모른다.- OWEN MATTHEWS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2015.11.3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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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수단 구하기 ’ 나선 조지 클루니의 좌절 … 스타 인도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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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어느 날 오전 나일 강변의 술집에선 종업원이 바닥을 닦고 빈 병과 잔들을 치우고 있었다. 조지 클루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가 앉은 테이블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클루니는 북쪽 교전지역으로 가기 전에 두어 시간 정도가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나일 강변의 구호요원용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녹색으로 흐르는 넓은 나일강이 장관이었지만 클루니는 경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술집 위의 잔디 지붕과 벽에 부착된 빈 술병들, 아직도 작은 원 모양으로 모여 있는 빈 의자를 둘러봤다. “밤중에 여기 온 적이 있나요?” 클루니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열광의 도가니라는 걸 잘 알겠군요. 나도 여기서 아주 열띤 밤을 몇 번 보냈죠.” 클루니는 수단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운동가 존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 방금 도착했다. 몇 시간 뒤 그들은 전투지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곳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새로 생긴 수단 국경 바로 아래의 비포장 활주로에 내린 다음 바닥에 철판을 깐 낡은 SUV로 갈아타야 한다.그 SUV는 라이언 보이옛이 운전한다. 보이옛은 미국인 구호요원으로 수단에서 결혼한 뒤 그곳에 정착했다. 그 역시 인도주의 운동가로 수단 정권의 누바족 박해 만행을 폭로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클루니와 프렌더가스트를 태우고 수단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 그들을 누바 산악지대로 데려다 주기로 자원했다.그곳 반군 지역에 보이옛이 아내와 함께 살려고 손수 지은 집이 있다. 몇 달 전 수단 공군이 그 집을 폭격하려 했다. 그들 세 명이 가야 하는 길도 거의 매일 폭격을 받는다. 수단 공군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석유를 담은 통에 폭약을 붙여 고도 1.6㎞ 이상의 상공에서 떨어뜨린다. 클루니는 그런 공습을 직접 목격하러 그곳에 간다.“그들은 1.8㎞ 상공에서 그 폭탄을 떨어뜨려요”라고 클루니가 말했다. “따라서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기보다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겁니다. … 더 큰 문제는 지상의 폭력이죠. 일부 괴한들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죽이고, 흉기로 목을 그어요. 그러니 아주 조심해야 하지요.”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 물었다. 클루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 경험은 충분히 했어요. 또 현지 사정과 요령을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문제없어요. 아무튼 내가 해야 할 일이죠.”스타 인도주의 운동가이런 일에 유명인사가 꼭 필요하다면 클루니가 적격인 듯하다. 그때가 클루니의 일곱 번째 수단 방문이었다. 그는 그 일을 하느라 사재 수십만 달러를 썼다. 그가 아프리카의 전쟁 지역에 간다고 발표했을 때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사 간부들과 에이전트들이 성난 목소리로 말렸을 게 뻔하다. 그의 세대에서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클루니가 이제 오지 중의 오지로 향하는 위험천만한 길을 가려고 한다. 클루니는 수단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을 목격했다. 수단은 2011년 7월 남과 북으로 공식 분단되기 전만 해도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경계선에 위치한 아프리카 최대의 국가였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유럽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이곳에선 아랍인들이 수세기 동안 이교도 아프리카인들을 계몽시킨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노예로 삼고, 정복하고, 착취했다.1956년 독립한 후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들어선 정권은 그런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독재 국가를 세웠다. 그들은 석유를 착취해 축재와 낭비를 일삼았다.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 해방 물결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런 행동이었다. 독립으로 식민지에서 탈피했지만 수단 정권은 제국주의와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또다시 나라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시달렸다. 특히 좀 더 기독교적이고 아프리카적인 남부 지역에서 투쟁이 심했다. 정부는 탄압으로 대응했다.또 198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급진적인 이슬람주의를 실천했다(1990년대에 오사마 빈 라덴은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하르툼에서 5년을 지냈다). 반세기 동안 거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새천년 초 수단은 젊은 미국인 인도주의 운동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수단 내전의 희생자가 너무도 많고, 9·11 후 이슬람주의자들이 미국의 공적 1호가 됐으며, 건국 신화가 노예무역과 얽혀 있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수단이 노예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클루니가 그 대의에 앞장섰다.클루니는 먼저 2003년 수단 서부 지역 다르푸르에서 자행된 수단 정부의 만행을 규탄했다. 수단 정부의 아랍화 정책에 비아랍인들이 반기를 들고 정부군을 상대로 투쟁한 유혈사태였다. 2004년 미국 정부가 그 내전을 집단학살로 규정하자 클루니를 비롯한 인도주의 운동가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탄원해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기소하도록 했다.2005년 미국은 수단 정부와 남부의 최대 반군인 수단인민해방군(SPLA) 사이의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그 협정에는 분리독립 주민투표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후 클루니는 인터뷰, TV 출연, 미 의회와 유엔 안보리에서의 증언, 오바마 대통령 면담 등을 통해 휴전이 남부의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첫 단계가 돼야 한다고 세계를 설득했다.2011년 1월 남부 수단 주민 98.8%가 분리독립 투표에 참여해 최신생 국가를 탄생시켰을 때 클루니는 주바에 있었다. “그때는 정말 대단했다”고 클루니가 돌이켰다. “평생 투표를 해보지 못한 아흔 살 할머니가 몇㎞나 걸어 투표소에 가서 난생처음 자유를 선택하는 투표를 했다. 내 눈으로 직접 봤다. 투표율이 98%가 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 투표를 의무이자, 명예, 특권으로 생각했다.”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단 정부는 남부인들, 그리고 새로 생긴 국경선 안에 남은 누바족 같은 반정권 세력을 계속 공격했다. 2010년 10월 클루니는 수단에서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그런 유혈사태를 막을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 누워 별을 쳐다보면서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것보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독자적인 첩보 위성을 띄우는 발상이었다. 클루니는 이렇게 돌이켰다. “구글 어스로 개인의 집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는 판에 전쟁 범죄가 저질러지는 현장을 구글 어스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프렌더가스트도 어쩌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클루니와 프렌더가스트는 미국으로 돌아가 구글맵스와 위성사진 전문 업체 디지털 글로브(Digital Globe)에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디지털 글로브가 소유한 위성 중 수단 상공에 위치한 세대를 특정 시간대에 한해 임대한 뒤 그 이미지들을 처리해 구글맵스에 덧씌웠다. “이미지를 단순히 확보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실시간으로 확보해서 신속하게 분석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클루니가 말했다. “그래야 ‘닷새 전에 이곳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이틀 전에는 이렇게 변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죠. 병력 15만 명을 국경에 배치할 때 위성으로 정밀하게 사진이 찍힌다면 발뺌을 하기 힘들거든요.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가 어렵죠. 그럴 경우 유엔 안보리가 수단 정부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불가능하죠. 수단 정부가 우리의 일을 터무니없다고 매도하고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동원하면 매우 효과적이죠.”클루니는 말을 잠시 멈추고 웃었다. “공평하지 않다고요? 좋은 이야기잖아요? 바로 그들이 제 발등을 찍는 꼴이죠.”스타로서 늘 파파라치에게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클루니가 이제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이 파파라초가 되어 독재 정권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근사한 반전이 아닌가? 클루니는 자신이 없었다면 훨씬 더 암울한 상황이 됐을 곳을 바꿔 놓으려고 명성과 재산을 쏟아 부었다. 그는 일반적인 유명인사보다 덜 방종한 모델을 제시했다. 그가 할리우드에서 갖는 지명도와 영향력으로 ‘명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클루니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그의 목표는 명확하다. 사람들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도 잘 안다. “내가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거나 군인이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단지 이곳의 실상을 TV와 신문에 전하는 게 내 역할이죠. 사람들은 늘 ‘실상을 알면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르완다나 보스니아에 관해 잘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는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곳의 가해자들은 얼마든지 그럴 듯하게 둘러댈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이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큰 목소리로 외치며 실상을 알릴 겁니다.”물론 클루니의 인도주의 운동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더 이상했다. 클루니는 매력적이고 잘 생겼고 유명하고 부자였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거대한 새 국가의 탄생을 도울 수 있었다. 영화와 고급 시계, 커피를 광고하던 할리우드의 주연급 배우 중 한 명인 그가 기막힌 솜씨로 수백만 명의 삶과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클루니로선 용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그게 서방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면 터무니없어 보인다.클루니에게 수단 북부에 있는 정부 인사들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수단의 미래는 미국 배우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가 아무리 ‘쿨’해도 말이다. 클루니는 하르툼에 한번 갔지만 실망만 했다고 대답했다. 수단 정부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그를 더욱 분투하게 만들었다. 클루니는 수단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회의를 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고 명확한 도덕적 의무도 인식했다. 클루니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일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문제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본다. 멀리 떨어진 외국 땅에서 할리우드 배우가 그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뭔가? 어떤 외부인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독립을 어떻게 대신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자유와 독립이란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게 아닌가? 뼈의 도시그로부터 21개월 뒤 남수단은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2013년 12월 15일 남수단 육군의 파벌 중 누에르족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에르족 일파는 딩카족 일파가 살바 키이르 남수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을 강제로 무장해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병영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시가전으로 확대되면서 군인 500명이 사망했다.딩카족 군인들은 누에르족 군인과 민간인들을 색출해 학살하기 시작했다. 누에르족 군인들이 반격했다. 각각의 민병대가 가가호호 수색하며 누에르족과 딩카족을 서로 색출했다. 수천 명이 처형돼 거리에 그대로 버려졌다. 도망가던 어린이들도 총에 맞아 숨졌다. 아버지들은 가족 앞에서 목이 잘렸다. 여성들은 납치돼 성폭행당했다. 그 사건으로 세계는 20년 전 르완다에서 100일 동안 거의 100만 명이 학살당한 기억을 되살렸다. 르완다에서처럼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했고 교회, 병원, 학교, 유엔기지 외곽으로 피신한 여성과 어린이는 집단 학살됐다.올해 4월 15일과 16일 누에르족 민병대가 북부 도시 벤티우를 공격해 수백 명을 학살했을 때 유엔은 현지 라디오 방송의 선동이 도화선이었다고 발표했다. 르완다 사태 당시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다음 날 딩카족 민병대가 보르의 유엔 기지를 습격해 누에르족 난민 58명을 살해했다. 20년 전 세계는 다짐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지금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은 묻는다. 그게 빈말이었는가? 제2의 르완다 사태가 올까?2014년 4월 중반 내가 주바에 도착했을 때 남수단의 폭력사태는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도 세 곳이 폐허가 됐다. 약 4만 명이 희생됐다.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고, 그중 25만 명이 나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렸다. 유엔은 남수단인 700만 명에게 식량 구호가 필요하며 어린이 4만 명이 몇 달 안에 기아로 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 수치로 볼 때 남수단의 붕괴 속도와 심도는 시리아보다 더했다. 그러자 클루니는 위성의 초점을 남부에 맞췄다. 특히 주바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국경 도시 말라칼이 그 표적이었다. 누에르족 반군들이 말라칼을 세 차례 점령했고, SPLA가 세 차례 탈환했다. 지난 2월 반군들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 피해가 가장 컸다. 클루니가 제시한 이전과 이후의 위성사진들은 이전에 양철집과 초가집 수백 채가 있었던 곳에 검은 자국밖에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말라칼과 그 주변에서 추가적인 전투가 임박한 듯했다. 남수단 정부는 국고 수입의 98%를 말라카 부근의 유전에 의존한다. 남수단의 최초 부통령인 리에크 마차르 테니 두르곤은 그 유전과 주바를 점령한 뒤 키이르를 타도하겠다고 선언했다. SPLA가 그를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유엔 비행기로 말라칼로 갈 계획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남수단의 기자 마딩 응고르가 SPLA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1시간 안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운용하는 흰색 일류신 76 수송기의 화물칸에 올라탔다.그 전날 밤 주바에서 응고르와 나는 말라칼에서 방금 돌아온 정부 관리를 만났다. 그에게 그곳 상황을 물었다. “대부분 뼈뿐이죠. 그들이 거리와 교회, 병원에서 양민을 학살을 하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어요. 개와 새들이 뼈가 있는 곳에 몰려들었어요. 이제 말라칼은 없습니다.”아니나 다를까 말라칼에 도착한 뒤 우크라이나인들이 수송기의 옆문을 열어젖히자 즉시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말라칼이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1.6㎞ 떨어진 유엔 기지에 머물기로 했다. 기지의 도로에는 로프로 만든 침대 수백 개가 야외 기숙사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엔 비닐 봉지, 양철 접시, 자동차 바퀴 커버, 대나무 막대기가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판자, 함석 조각, 플라스틱 의자를 계속 갖다 쌓았다. 대머리황새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응고르는 다른 SPLA 친구에게 연락했다. 지프 한 대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지프가 도시로 향하는 간선도로로 들어서자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고 조용히 시작됐다. 여기엔 박살 난 출입구, 저기엔 불에 탄 오두막집. 작은 가판대에서 비닐 봉지와 종이가 거리로 날아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라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검게 탄 땅과 무너진 벽, 구부러진 함석판뿐이었다. 초강력 태풍이 지나간 듯했다. 응고르와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걸었다. 재에 발이 푹푹 빠졌다. 양쪽 벽은 다 사라지고 금속 대문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벽돌집이 아직 서 있었지만 창은 전부 부서졌고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화장터와 다름없었다.우리는 나일 강변에 있는 말라칼 항구로 차를 몰았다. 지난 1월 초 수용인원을 초과한 페리가 이곳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폭력사태를 피해 탈출하려던 난민 200명 이상이 익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다수는 어린이였다. 일부는 페리를 타지도 못한 것 같았다. 항구 정문 부근에 작은 두개골이 작은 정강이뼈 곁에 놓여 있었다. 항구 안에는 뼈가 더 많았다. 팔뼈, 다리뼈, 또 다른 작은 두개골 곁에는 검은 실크 머리띠가 놓여 있었다. 걸어가던 내 발에 뭔가가 걸렸다. 아주 작은 꼬리뼈가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갔다.응고르와 나는 유엔 기지로 돌아와서 난민들을 취재했다. 청록색 유니세프 모자를 쓴 에르네스트 우루아르(52)는 영어를 좀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직후 병원에 있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살기 위해 그곳으로 피신했어요. 열여섯 살, 열네 살짜리 두 아들은 크리스마스 날에 카누를 타고 탈출하려다가 익사했고요. 남은 가족은 아내와 장모, 그리고 나뿐이었어요. 우리가 그 병원에 있을 때 반군이 세 번째로 그곳을 공격했어요.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였어요. 부상자들도 장모도 그들의 손에 죽고 말았어요. 그들은 ‘누가 딩카족인가? 누가 누에르족인가? 누가 실루크족인가?’라고 물었어요. 딩카족은 그 자리에서 쏴 죽였어요.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어요"소수 부족인 우루아르는 아내를 데리고 다른 난민 수백 명과 함께 성당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반군이 도시를 약탈했어요. 그 다음 그들은 여자들을 찾으려고 성당에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여자들을 성폭행했어요.” 그런 만행이 얼마나 오래 진행됐는지 내가 물었다. “반군이 도시를 점령한 두 달 내내 그랬어요.”“두 달 동안이라고요?” 내가 다시 물었다. “반군이 두 달 동안 성당을 성폭행 캠프로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10분 거리에 평화유지군이 가득한 유엔 기지가 있는데 말이에요?”“예, 두 달 동안 그랬어요.” 그가 대답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젊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들은 ‘너, 너, 너 나와’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그 여자들을 데리고 가서 성폭행했어요. 어느 날 밤 그들은 일곱 명을 데려갔는데 두 명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 누이와 다른 식구들도 전부 살해됐어요.”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혼자 도망쳤어요.” 그러고는 불쑥 떠나버렸다.우루아르는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요. 그들이 여자들을 데려갈 때 남자라고 나서서 항의하려고 하면 그들은 구타하고 죽였어요. 두 달 동안 그랬죠. 죽이고 구타하고 성폭행했어요. 그 다음 유엔군이 들어왔어요. 반군이 떠난 뒤에 말이에요. 그들은 상황이 조용해질 때까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들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기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우루아르에게 유엔이 제공하는 보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이런 파괴행위에 일조했어요. 그들은 너무 늦게 우리를 구했어요.”그날 오후 응고르와 나는 말라칼을 탈환한 존슨 고니 빌리외 SPLA 장군을 만나러 갔다. 거리에는 SPLA 군인 수백 명이 빈 집에서 가구를 들고 나와 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언급하자 장군은 즉시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부하 중 약탈자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장군에게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그는 정확한 수치가 없다며 수천 명이라고 말했다. 개들이 시신들을 많이 물고 갔고, 두개골이 쪼개지고 수백 구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게 유엔의 민간인 보호 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대처가 느리죠”라고 그가 대답했다.오후 늦게 기지로 돌아가면서 흙더미가 많은 곳을 지나쳤다. 곧 그게 뭔지 깨닫고 SPLA 운전병에게 차를 돌려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곳은 공동묘지였다. 묘지 정문 바로 안쪽에 최근에 파낸 거대한 흙더미가 있었다. 가로와 세로가 20m쯤 됐다. 그 뒤와 양쪽으로 그런 흙더미가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흙더미를 세어 보았다. 큰 흙더미가 13개, 중간 크기가 24개, 작은 흙더미가 100개 이상이었다. 공항에서 그랬듯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 흙더미 위에는 반쪽만 남은 두개골이 얹혀 있었다. SPLA 운전병에게 각 흙더미에 시체 몇 구가 묻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약 이삼십 구”라고 그가 대답했다.응고르가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은 SPLA가 그 묘지를 판 게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때쯤 우리는 알았다. 땅바닥에는 유엔기지 입구에 있던 것과 같은 중장비의 넓은 바퀴 자국이 찍혀 있었다. 세계가 남수단인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했지만 2년 반 뒤 세계는 그들의 시신을 불도저로 집단 묘지에 파묻고 있었다. 백인 구원자들1994년 4월 르완다 대학살 뉴스가 전해졌을 때 미국과 국제사회는 두 손 놓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일하던 젊은 관리 수전 라이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중에 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맹세했다. 필요하다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다.”르완다 사태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9년 전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는 코소보에서 유엔 특사로 활동했다. 그때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세르비아계를 표적으로 공습을 단행했다. 당시 그곳에는 젊은 기자 사만 사 파워도 있었다. 파워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데 멜로의 전기 ‘지옥에서 비롯된 문제: 미국과 대량학살의 시대(A problem from Hell: America and the Age of Genocide)’를 써서 200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 책에서 파워는 서방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도덕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1999년 데 멜로는 동티모르에서 유엔 행정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인 동티모르인들을 공격하는 인도네시아 보안군과 무슬림 민병대를 적극 저지했다. 2003년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레비는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지했다. 당시 영국 정부 외에는 그 전쟁을 지지하는 유럽인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급진 이슬람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도주의적 대의라고 외쳤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를 창설해 199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베르나르 쿠시네르는 2007년 프랑스 외무 장관이 된 뒤 프랑스의 대테러전 반대 입장을 뒤집었다. 이라크전과 뒤이은 유혈 종파분쟁은 서방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데 멜로도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유엔 특사로 활동하다가 2003년 유엔 사무소를 공격한 폭탄테러로 직원 20명과 함께 숨졌다. 그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 분파는 데 멜로가 동티모르에서 이슬람주의 민병대의 활동을 차단한 데 대한 복수라고 선언했다.세계에서 으뜸가는 인도주의자였던 데 멜로의 죽음으로 동료들의 결의는 더 굳어졌다. 2005년 유엔 세계정상회의는 인도주의적 개입을 유엔의 공식 원칙으로 채택했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이유와 의무를 국제법화한 것이다. 그 원칙에 따르면 한 국가가 자국에서 극단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하거나 그런 행동을 막을 능력이 없을 때는 주권을 몰수당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외부 세계가 외교와 제재,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동원해 재앙을 막는 행동을 취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취해야 한다.교수가 된 파워는 같은 해 서부 수단의 다르푸르 반군과 수단 정부 사이의 내전에 관해 젊은 미국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에 자문을 제공했다. 다르푸르 사태는 또 다른 인도주의의 시금석이었다. 수단은 오랫동안 인도주의자들의 초점이었지만 9·11 사태 후 수단 내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수단의 남북 분쟁을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싸움으로 규정한 미국의 우익 기독교인들이 그 주류를 이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남수단을 돕는 구호단체를 설립했다.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돈가방을 들고 가서 무슬림 주인들로부터 기독교인 노예들의 자유를 사주었다. 곧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남북 수단 사이의 평화협상을 중재했다.파워는 다르푸르와 수단에서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일했다. 프렌더가스트 역시 미국의 아프리카 개입을 지지했다. 그는 수단에서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를 위해 남수단 내부의 경쟁 민병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잔혹한 폭력행위에 관해 보고서를 쓰면서 인도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프렌더가스트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아프리카 문제 책임자로 일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 장관의 보좌관을 지냈다. 그후 국제위기그룹(ICG)에서 일하다가 ‘이너 프 프로젝트(Enough Project, 집단학살과 반인도주의 범죄 방지 프로젝트)’를 공동 설립했다. 거기서 프렌더 가스트는 할리우드 엘리트층과 인도주의 운동가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아 클루니(수단), 앤절리나 졸리(난민), 매트 데이먼(물), 벤 애플렉(콩고), 돈치들(집단학살과 환경) 등의 인도주의 활동을 돕기 시작했다.오바마가 대통령에 선출되자 인도주의자들은 정부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바마는 사만사 파워를 국무부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가안보회의 선임국장으로 발탁했고, 수전 라이스를 유엔 대사로 임명했다. 2011년 라이스와 파워는 백악관에서 리비아 공격을 주장했다.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2013년 오바마는 라이스를 힐러리 클린턴 국무 장관 후임으로 앉히려 다가 결국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기용했고, 파워는 라이스 후임으로 유엔 대사를 맡았다.1960년대 운동권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목표로 시작된 인도주의가 50년 뒤 서방 외교정책의 초석이 된 것이다. 사전에 실패한 국가인도주의자들을 향한 가장 흔한 비난은 그들의 노력이 종종 구제 받는 쪽보다 구제하는 쪽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를 추구하는 외국인들을 수없이 받아 들였다. 개성화란 넓은 세계로 나가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을 가리킨다.서방에서는 칭찬 받을 만한 통과의례이지만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조역이 돼버린다. 남수단인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자유를 얻었지만 그후의 사태 발전 대부분을 만들어낸 쪽은 외국인들이었다. 이론상으론 남수단은 독립으로 번창하는 미래를 약속받았다.수단의 유전 대부분이 남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 남부는 거대한 수드 습지를 둘러싼 넓고 비옥한 땅으로 축복 받았다. 두당 250~400달러인 소가 사람보다 더 많다. 인도주의자들에겐 가장 순수하고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무에서 시작해 멋지게 이뤄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을 말한다.나는 2009년 초 처음 남수단을 찾았다. 그때도 국가 건설 계획을 두고 너무도 이상적이고 지나치게 야심적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5년 전이었지만 주바는 사하라 사막 남부 변방의 특징인 바 위 언덕과 텅 빈 평지에 비닐 봉지로 지붕을 씌운 움막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회사 몇 개, 경찰 몇 십 명, 학교 몇 개, 낡은 병원 하나, 공무원 수백 명이 있었다. 구호요원 수천 명이 그곳에 도착하면서 주바의 포장도로에서 가끔씩 흰색 SUV들로 교통체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외국인들의 돈을 노리는 매춘부들이 가득한 술집 몇 개가 생겨났다. 하지만 하나의 국가가 되기엔 무리였다. 기반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외교관들은 대부분 새 국가 건설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특이한 상태를 일컫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사전에 실패한 국가(pre-failed state)’였다. 미국 이 남수단에서 최대의 단일 주자였다. 다름 아닌 키이르 대통령이 미국의 영향력을 상징했다. 그는 부시가 선물 한 카우보이 모자를 어디서나 쓰고 다녔다. “남수단은 미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당시 주바의 한 서방 외교관이 내게 말했다.새로 구성된 내각의 주된 관심사는 석유 판매수입을 자신들이 나눠 갖는 것이었다. 2011년 나는 여러 외교관들로부터 남수단 정부가 2005년 이래 석유 판매수입 140억 달러를 착복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남수단은 2012년 북부 수단을 공격해 그곳에 남아 있는 석유를 훔치려 했다. 기자들이 구타당하고 투옥되고 살해됐다. 키이르가 새 국가를 위해 제정한 헌법은 그에게 독재 권력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남수단 지도자들이 서로 반목했다. 딩카족과 누에르족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도 매년 토지와 가축 소유권을 두고 부족간의 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의 중요성과 선례의 필요성을 생각할 때 인도주의자들은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들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런 결과는 없었다. 자유는 속성상 다른 사람을 대신해 얻어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남수단 지도부는 새로 얻은 자유를 서로 죽이는 자유로 해석했다. 세계는 경악했다. 그러자 키 이르와 남수단 지도자들은 세계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그들에게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수단 정부만이 아니라 과거의 친구들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다고 그들은 해석했다. 키이르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주장에 특히 참지 못했다. 2012년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키 이르 남수단 대통령에게 북부 수단 침공을 중지하라고 촉구하자 키 이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의 수반입니다. 병력을 철수하지 않겠습니다.”2014년 9월까지 외국 구호기관들은 닥쳐오는 기아를 몇 달 동안 경고했다. 그러나 키이르 정부는 외국인들이 남수단에서 떠나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 달 안에 남수단 의 모든 기관과 사업체의 임원직 중 80%가 남수단인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포기하고 철수?지난 4월 주바에서 프렌더가스트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 자체가 폭력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에 남수단이 새로운 국가로 순조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기대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의 인도주의적 개입 방식이 “크게 잘못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남수단이라고 덧붙였다.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남수단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지금까지 유엔은 남수단의 살육을 막으려고 작전을 펼치기는커녕 그곳에 있는 자체 기지마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유엔은 전쟁이 아니라 국가 건설을 위해 파견됐다”고 프렌더가스트는 말했다. “따라서 유엔보다는 전투를 마다 하지 않는 군대가 필요하다.” 긴급구호 노력도 마찬가지로 미흡했다. 지난 9월 기준으로 집을 잃은 남수단 주민이 약 170만 명이었다. 지난 5월 우기가 닥치면서 주바에 콜레라가 퍼져 130명 이상이 사망 하고 약 6000명이 감염됐다. 그중 다수는 주바의 유엔기지 외곽에 텐트를 치고 기거하던 난민들이었다. 콜레라 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곧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구호기관들은 영양실조와 기아가 늘어나고 있 으며 몇 달 안에 전면적인 기근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연말까지 남수단 인구 1200만 명 중 절반이 국내에서 난민이 되거나 해외로 탈출하거나 굶주리거나 사망할 것”이라고 안보리에 경고했다.따라서 그냥 철수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고 주바의 몇몇 고참 외교관들은 말했다.수단에서 수십 년을 지낸 한 고참 서방 외교관은 남 수단에서 세계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많은 생명을 구했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세대에 걸친 외국의 노력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 않았는지 물을 수도 있 다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요?”라고 그는 되물었다. “만약 우리가 20년 전에 철수 했더라면 이 나라가 지금쯤 정치적으로 더 성숙했을까요?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몇 분 뒤 그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담 높은 저택의 철문까지 응고르와 나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곳 외교관들은 더는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그러나 그 모든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자들 이 노력을 중단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 외교관들, 유엔 관리들, 구호요원들, 운동가들은 전부 책임을 통감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실패했다고 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의에 회의를 가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2012년 나일 강변에서 클루니를 만났을 때 왜 남수단을 계속 방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시작했을 때 잘 되지 않는다고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다고 느낀다. 그런 잘못을 안고 살아갈 순 없다. 따라서 계속할 수밖에 없다.”클루니는 자신과 특히 가까웠던 남수단 관리가 주미 대사를 지낸 에제키엘 롤 가트쿠오스라고 말했다. 내가 주바에 있을 때 그는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후 풀려났다). 가트쿠오스는 지난해 12월의 유혈 사태를 부추겼다고 지목된 정부 인사 4명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법정에 출두할 때를 제외하고는 교도소에서 지냈다.응고르와 내가 주바에 있을 때 그 재판 중 하나가 열렸다. 우리는 일찍 도착해 법정 입구에 자리 잡았다. 그 네 명이 차로 도착해 군인과 보좌관들에 둘러싸여 지나 갈 때 응고르는 내가 준비한 몇 가지 질문을 적은 쪽지를 가트쿠오스의 변호사 손에 슬쩍 집어주었다.내 질문은 이랬다. “어떤 사람은 외국인들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국제사회의 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가?” 그 변호사가 다음 날 쪽지를 돌려주었다. 가트쿠오스의 답변이 내 질문 아래 흘려진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남수단의 위기를 해결할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보탬이 되도록 조지 클루니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2014.10.13 11:05

20분 소요
[world view] 골프의 정치경제학

산업 일반

지난 8월 중순에 열린 PGA 챔피언십의 최종 라운드는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됐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랭킹 1위인 미국인 타이거 우즈가 선두 자리를 내주고 2위로 떨어져 실망감을 안겼다. 전년도 챔피언이자 유럽 최고의 골퍼로 불릴 만한 파드리그 해링턴은 8번 홀(파3)에서 무려 5타를 잃어 우승권에서 밀려났다.그리고 세계 110위의 다크호스인 한국의 양용은이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와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쇠퇴하고 유럽이 몰락했으며 아시아가 떠올랐다. 익히 들어본 소리 아닌가? 아시아는 비교적 큰 상처 없이 경제위기를 벗어나고 있다. 아시아 전체적으로 올해 5% 성장이 예상되는 한편 중국은 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다.반면 미국 경제는 계속 쪼그라들어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플러스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려우며 회복한다 해도 미미한 수준일 듯하다. 2008년 미국에서는 새로 문을 연 골프장보다 문을 닫은 곳이 더 많았다. 유럽은 더 큰 시름에 빠졌다. 몇몇 국가는 간신히 플러스 성장을 유지하지만 나머지는 경제의 하락세를 면치 못한다.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의 몰락은 더 두드러진다. 유럽은 20세기 역사의 주역이었지만 21세기엔 조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해링턴의 최근 성적이 이를 상징하는 듯하다. 골프는 실상 의외로 정치와 경제에 관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몇 년 전 ‘갈등 예방의 황금 아치 이론(Golden Arches Theory of Conflict Prevention)’을 제시했다.맥도널드 체인점이 있는 나라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이론이다(러시아와 그루지아, 이스라엘과 레바논 등 싸우는 나라도 일부 있지만 프리드먼의 관측은 여전히 유용하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표는 빅 맥뿐이 아니다. 다수의 골프장을 둔 나라들은 미국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다.골프장을 폐쇄하는 정부들은 가장 반미적인 경향을 띤다. 이를 역사의 페어웨이 이론이라고 불러두자. 못 믿겠다면 베트남과 베네수엘라만 비교해봐도 안다. 오랫동안 미국과 원수지간이었던 베트남은 지금은 우방이 됐다. 상황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호찌민 골프 트레일일 성싶다.예닐곱 곳의 고급 골프코스와 리조트를 연결하는 이 루트는 전쟁 중 남북 베트남을 연결했던 통로 호찌민 트레일에서 이름을 따왔다(하지만 남과 북을 연결한다는 점 외에 다른 공통점은 없다). 반면 미국에 적대적인 지도자 우고 차베스가 이끄는 베네수엘라는 여러 곳의 골프 코스 문을 닫고 다른 곳들도 폐쇄하겠다고 큰소리친다.차베스는 최근 전국 TV에 등장해 골프가 ‘부르주아’ 운동이라는 등 골프를 비판하는 장광설을 늘어놨다. 그의 억압적인 정책과 일치하는 시각이다. 그런 정책 탓에 베네수엘라의 많은 중산층이 조국을 등진다. 또 남북한을 봐도 그렇다. 폐쇄적인 북한에는 골프 코스가 세 곳뿐이라고 알려졌다.반면 미국의 우방으로 민주국가인 한국은 234곳이나 된다. 차베스의 관점 중 한 가지는 옳다. 골프가 경제와 정치 개방의 확대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차베스가 가장 높이 평가한다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그런 방향으로 가까워지는 듯하다. 쿠바는 골프 코스를 개발하는 중이다.아마도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해제돼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이 자유로워지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인 듯하다. 페어웨이 이론이 옳다면 쿠바가 문호를 더 개방하고 미국에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시간문제다. 그 밖에도 과거 공산주의였던 (또는 전보다 공산주의 색깔이 엷어진) 여러 국가가 대대적으로 골프 코스를 건설하는 중이다.중국엔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인 클럽의 12개 코스를 포함해 모두 300곳을 넘는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골프 코스가 적은 점은 걱정스럽다. 골프는 정상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카슈미르는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꼽혔다. 과거 전쟁으로 얽혔던 두 핵무장 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을 가르는 분쟁지역이다.그 아름다운 계곡에 지금은 다섯 개의 골프 코스가 들어섰다. 평화가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조금씩 올바른 방향으로 진전되는 듯하다. 골프는 왜 이렇게 많은 발전적인 추세와 연관될까? 관광객을 환영하는 국가에서 골프가 번창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관광객들은 골프백과 함께 새로운 사고를 들여온다).골프 코스가 많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토대인 중산층의 부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국민이 여가를 즐길 뿐 아니라 기본적인 안정을 당연시하는 사회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 모두는 워싱턴에 어떤 의미일까? 오바마 대통령은 중동·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란 같은 분쟁지역을 담당할 고위 특사직을 신설했다. 그러나 자신의 골프 실력을 키우는 데도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9.09.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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