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승계 원칙'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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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승계 원칙으로 경영권 분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LG그릅에서 상속 분쟁이 터진 가운데 한 투자사가 거론되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주인공은 LG그룹 맏사위 윤관 대표가 활동하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의 블루런벤처스다. 뒤늦은 상속 분쟁에 재계 일각에선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구광모 LG그룹 회장 여동생)의 남편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가 소송에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블루런벤처스의 투자 포트폴리오 일부가 유동성 위기에 놓이며 윤 대표 측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발생한 사태라는 것.투자은행(IB) 업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블루런벤처스는 일찍이 국내외 투자로 상당한 차익을 남긴데다 현재 보유한 국내 포트폴리오 중 기업공개(IPO) 대어로 꼽히는 회사를 비롯해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보유 중이기 때문이다. 성장성 측면에서 투자한 일부 스타트업의 경우 자금난을 겪고는 있지만, 추가 투자를 유치하고 있어 극에 달한 상황은 아니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LG 상속 분쟁서 ‘갑툭튀’한 이 투자사16일 LG그룹 등에 따르면 구광모 LG 대표의 어머니인 김영식 여사와 여동생 구연경(LG복지재단 대표)·구연수 씨는 최근 구 대표를 상대로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상속회복청구권은 상속권이 없지만 사실상 상속 효과를 보유한 사람에 대해 진정한 상속인이 상속 효과를 회복할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쉽게 말해 구 회장을 상대로 상속 재산을 다시 분할하자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구 회장 별세 이후 5개월간 상속 비율에 대해 가족 간 합의가 이뤄졌었다’는 LG 측 입장과 ‘상속 절차상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 여사·구 자매 측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갑툭튀) 회사가 한 곳 있다. 구연경 대표의 남편인 윤관 씨가 공동 창업 파트너 및 글로벌 공동 대표로 재직하고 있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의 투자사 ‘블루런벤처스’다.핀란드 노키아가 설립한 노키아벤처파트너스를 모태로 하는 블루런벤처스는 미국 간편 결제 플랫폼 ‘페이팔’에 초기 투자했고, 실시간 교통 상황 안내 회사 ‘웨이즈’를 지난 2013년 구글에 매각, 20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이름을 알렸다.블루런벤처스는 지난 2010년부터 BRV 로터스 펀드를 앞세워 국내 기업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했다. 대표 포트폴리오로는 직방과 오늘의집, 번개장터, 에코프로GEM, 에코프로머티리얼즈, 쓱(SSG)닷컴, 그린랩스, 넥스트챕터, 슈퍼메이커스, 핏펫, 네오사피엔스 등이 있다.
초대박 포트폴리오 속 고민거리도일각에선 블루런벤처스의 일부 포트폴리오사들의 경영 상황이 악화한 탓에 윤 대표가 소송전에 개입했다고 주장하지만, IB 업계에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분위기다. 이미 부동산 정보업체 ‘직방’과 게임 개발사 ‘엔터메이트’ 엑시트(투자금 회수)로 상당한 차익을 남긴 이력이 있고, 현재 보유 중인 포트폴리오사들도 IPO 대어로 꼽히는 등 유망하기 때문이다.블루런벤처스의 포트폴리오 중 엑시트 기대감이 큰 곳으로는 에코프로머티리얼즈와 쓱닷컴이 꼽힌다. 블루런벤처스는 양극재 핵심 소재인 전구체 생산 계열사 에코프로머티리얼즈에 초기 투자해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에코프로머티리얼즈는 이달 중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하고 연내 공모를 마칠 계획으로 알려졌다. 올해의 코스닥 대어로 꼽히는 만큼, 블루런벤처스가 이를 통해 수 천억 원 이상의 차익을 남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경쟁력 확보 및 수익구조 개선에 박차를 가하며 IPO를 준비하는 쓱(SSG)닷컴에 대한 기대감도 큰 상황이다. 블루런벤처스는 지난 2018년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와 함께 쓱닷컴에 1조 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했다. 쓱닷컴은 지난 2021년 총거래액(GMV) 5조 1600억 원의 목표를 달성하며 주식매수청구권 조항을 충족한 상태다.블루런벤처스는 성장성이 높은 분야에도 투자했다. 대표적으로 회사는 지난해 2월 인공지능(AI) 음성 합성 기술 개발사 네오사피엔스의 시리즈B 라운드 투자를 주도했다. 네오사피엔스는 AI 가상인간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 서비스 ‘타입캐스트’를 출시한 곳으로, 100만 명 이상의 누적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동성 위기로 윤 대표의 고민을 키우는 포트폴리오사도 있다. 우선 국내 농업기술(애그테크) 스타트업 그린랩스는 자금난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약 1700억 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한지 1년 만이다. 채권 시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농산물 도매 유통 시장에서 수백억 원대의 미수 채권이 발생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블루런벤처스는 창업자 지분을 차등 감자하는 조건으로 스카이레이크와 함께 500억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으나, 기존 주주사들과 세부조건을 두고 치열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2023.03.16 16:47
3분 소요![[구광모 취임 3년, LG가 변했다②] LX그룹 독립...진정한 '구광모 체제' 완성](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6/18/ecnc64adfbe-2ff4-4463-9f88-cd20a9d658c9.353x220.0.jpg)
구광모 LG 회장에게 2021년은 더욱 뜻깊다. 취임 3주년이자 LX그룹의 계열 분리로 LG그룹의 '구광모 체제'가 완성된 해이기 때문이다. 4대째 이어져 온 ‘장자승계·형제독립’ 원칙에 따라 지난 5월 구본준 LG 전 고문이 5개 계열사를 분리해 LX그룹을 출범했다. 3년 전 닻을 올린 ‘구광모 호’는 구 회장이 그린 ‘뉴 LG’를 향해 순항하고 있다. LG家 4세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셈이다. ━ 경영권 분쟁 없이 '아름다운 이별' LG그룹은 경영권 분쟁 한 번 없이 4대째 경영 승계를 이어왔다. 장자에게 세대교체가 이뤄질 때마다 경영권 갈등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친인척들은 물러나거나 계열 분리를 했다. LG그룹의 계열 분리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지금까지 4대에 걸친 사업 분가를 통해 LIG그룹·LB인베스트먼트·아워홈·GS그룹·LF그룹 등이 차례로 계열 분리했다. 깔끔한 승계와 함께 지주사를 정점으로 계열사들이 수평계열화 돼 있는 지배구조 또한 LG그룹의 특징이다. LG그룹은 우리나라 기업 중 지주사 체제를 사실상 처음 도입했다. 정부가 IMF 외환위기 후 지주사 설립을 허용하자 2000년 7월 '21세기형 경영체제로의 개편 방안'을 발표했고 2003년 지주사 체제를 완성했다. 이번 LX그룹 계열 분리에도 지주사 체제가 도입됐다. 지난 5월 LX홀딩스 출범에 따라 LG상사, LG하우시스, 실리콘웍스, LG MMA가 자회사로, LG상사의 자회사 판토스가 손회사로 편입됐다. 5개사의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은 16조248억원, 영업이익은 4025억원이다. 자회사의 사명도 LG상사는 LX인터내셔널, LG하우시스는 LX하우시스, 실리콘웍스는 LX세미콘 등으로 변경했거나 변경을 추진 중이다. LG그룹은 LX홀딩스 공식 출범에 앞서 인적분할 방식의 분할을 택했다. 이를 통해 기존 지주사인 ㈜LG와 신설 지주사인 LX홀딩스 모두 지주회사 및 상장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 LX홀딩스의 최대주주는 구본준 LX 홀딩스 회장이 아닌 구광모 LG 그룹 회장이다. 인적분할은 주주들이 보유 지분대로 신설회사를 보유하기 때문이다. 구광모 회장의 두 회사 지분율은 15.9%이고, 구본준 회장은 7.72%를 보유한 개인 2대 주주다. 두 회장이 보유한 상대 회사 지분을 정리해 서로 간의 지분율을 3% 아래로 맞추면 계열 분리가 최종 마무리된다. 재계에서는 늦어도 연내에 지분정리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분 정리는 양측이 서로 간의 지분을 교환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를 통해 구광모 대표는 LG그룹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고, 구본준 회장은 최대주주로 올라서면서 LX홀딩스의 계열 분리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두 그룹의 신사업 추진 역시 속도가 붙을 예정이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 4월 23분기 연속 적자를 내던 스마트폰 사업을 철수했다. 대신 기업의 미래 성장동력인 전장과 배터리, 로봇, AI에 대한 투자를 늘리며 기업 체질 개선에 한창이다. LX홀딩스 자회사의 사업 다각화에 나설 예정이다. LG상사는 LX 출범 이후 헬스케어, 관광·숙박, 통신판매·전자상거래 등의 7개 신사업을 정관 상 사업 목적에 추가했다. 특히 친환경 사업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물류 기업인 판토스는 상장(IPO)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김영은 기자 kim.yeongeun@joongang.co.kr
2021.06.18 08:30
2분 소요
구본성 아워홈 부회장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가뜩이나 실적을 두고 경영능력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보복운전을 한 혐의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기 때문. 경영권을 노리는 구지은 전 캘리스코 대표이사는 구미현·명진 자매와 손잡고 ‘문제아’ 오빠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아워홈은 4일 오전 주주총회에 이어 이사회를 열고, 구 전 대표 측이 상정한 대표이사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구 전 대표는 아워홈이 창사 이래 첫 적자를 기록한 가운데 구 부회장이 본인 포함 이사 보수 한도를 늘렸다는 점, 또 최근 보복 운전 혐의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 등을 놓고 해임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예상대로 구 부회장과 구 전 대표의 ‘남매대첩’이 재점화 된 셈. 구 부회장은 5년 전 이 싸움에서 승자한 인물이다. 당시 LG가의 장자승계 원칙이 적용됐다는 분석이 컸다. 구 부회장이 오기 전까지 아워홈의 차기 후계자는 4남매 중 유일한 경영 참여자인 구 전 대표. 그는 지난 2004년 아워홈 입사 후 구매식재사업본부장, 부사장 등을 거치며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구 부회장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자리에서 밀려난 뒤 사보텐·타코벨 등을 운영하는 외식기업 캘리스코를 이끌었다. 오빠인 구 부회장과는 계속해서 갈등을 빚어왔다. 당시 구 부회장은 경영 경력이 전무했던 상황. 삼성경제연구소 임원 등 외부 경력이 전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구 부회장이 경영권을 잡은 이후 아워홈의 실적 부침은 계속됐다. 지난해 실적은 아직 공시되지 않았지만 상반기 기준 매출액은 8040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2.5% 줄었고, 영업적자는 119억원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했다. 반면 배당은 크게 늘었다. 아워홈의 1주당 배당금은 구 부회장이 경영에 참여한 2016년 300원, 2017년 325원, 2018년 750원 등으로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 부회장의 보복운전은 ‘남매대첩’ 반전의 계기가 된 모양새다. 아워홈의 최대 주주는 구본성 부회장으로 지분 38.6%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구미현(19.3%)·명진(19.6%)·지은(20.7%) 세 자매의 지분을 합치면 59.6%에 달한다. 캐스팅보트를 쥔 건 장녀 구미현씨다. 미현씨는 2017년 아워홈 경영권 분쟁 당시 구 부회장 편에 섰지만 이번 주주총회에서는 구 전 대표 손을 들어줬다. 구 부회장은 사내이사 자리는 유지하면서 경영권 방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3분의 2 이상의 지분이 동의해야 사내이사직도 박탈할 수 있어서다. 그가 ‘장자의 힘’으로 얻어낸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2000년 창사 이후 첫 기업이미지(CI) 변경을 검토하면서 ‘변화’에 힘을 주고 있는 아워홈의 행보에 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김설아 기자 kim.seolah@joongang.co.kr
2021.06.04 15:51
2분 소요![[알다가도 모를 재벌가 후계의 법칙] 능력은 기본에 가족관계도 원만해야](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2/24/ecn3696639864_vWkn8a1c_01.353x220.0.jpg)
재계 5위 롯데그룹의 굳건했던 후계 구도 변화가 감지된 것은 지난해 말에서 올해 초 사이였다. 그동안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건재한 가운데 그의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일본 롯데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한국 롯데를 물려받는 구도였지만 이 불문율이 깨진 것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지난해 말 일본 롯데 계열사인 롯데상사와 롯데아이스 등의 임원직에서 해임된 데 이어 올 1월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직도 내려놓아야 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 신동빈 회장은 당시 기자들과 만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형의 해임이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이후 신 전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경쟁에서 동생인 신 회장에게 밀렸다는 분석이 제기됐다.신동빈 회장은 결국 형을 제치고 아버지의 최종 선택을 받았다. 신 회장은 7월 15일 열린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이사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되면서 향후 한국 롯데에 이어 일본 롯데까지 진두지휘하게 됐다. 이는 사실상 신 회장이 롯데그룹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됐음을 의미한다.신 회장은 이날 주요 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이번 이사회 결정을 겸허하고 엄숙하게 받아들인다”며 “총괄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한국과 일본의 사업을 모두 책임지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한편, 리더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제껏 롯데그룹 측은 후계 구도의 변화 기미에도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다”며 말을 아꼈지만, 신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 받았음을 이번 이사회 결정으로 국내외 재계에 알렸다.앞서 재계는 신 전 부회장이 일본에서의 사업 부진으로 신격호 총괄회장의 눈 밖에 났다는 분석을 내놨다. 신 전 부회장이 추진했던 껌 리뉴얼 등의 경영 행보가 탐탁찮은 결과로 이어지면서 껌 사업에 애착이 강한 아버지의 신망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일본 롯데는 지난해에 껌을 발매한 지 57년 만의 대대적 리뉴얼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쓰쿠다 다카유키 일본 롯데홀딩스 사장과 경영 방침을 놓고 대립하다가 해임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 사이 신 회장이 한국에서 아버지의 숙원이던 제2롯데월드 사업을 뚝심 있게 밀어붙여 조기 개장을 이뤄낸 것도 신 전 부회장에게는 악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언론은 신 전 부회장 해임의 또 한 원인으로 신 총괄회장과의 불화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은 올 1월 19일자 기사에서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신 총괄회장과 신 전 부회장 간에 재산 문제 등으로 갈등이 있었다’며 ‘신 전 부회장이 신 총괄회장을 소홀하게 대했거나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고 보도했다. ━ 신동빈 회장 한·일 롯데 후계자로 신 전 부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버지의 비위를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황상 여러 방면에서 신 총괄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게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신 전 부회장은 아버지가 만든 ‘일본 롯데=장남, 한국 롯데=차남’ 구도에도 아랑곳없이 한국 롯데 계열사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동생과의 경영권 승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신 전 부회장은 2013년 8월에 한국 롯데제과 주식 643주를 사들이면서 자신의 지분율을 기존 3.48%에서 3.52%로 높인 바 있다. 2003년 이후 10년 만의 한국 롯데 계열사 지분 매입이었다. 이후 지난해에도 롯데제과 주식을 연달아 매입, 지분율을 3.96%로 높이면서 동생과의 지분율 격차를 줄였다.당시 재계는 롯데그룹에 경영권 분쟁 조짐이 일어난 것으로 해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 전 부회장이 눈독을 들인 롯데제과는 그룹 내에서 ‘롯데제과→롯데쇼핑→롯데알미늄→롯데제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 역할을 하는 계열사다. 이경주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롯데제과는 롯데쇼핑보다 매출과 자산 규모가 작지만 지배구조상 지분 확보가 중요한 계열사”라고 설명했다. 롯데제과 지분을 늘린다는 것은 곧 한국 롯데 모든 계열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다는 의미다.신 총괄회장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장남의 ‘야심’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신 총괄회장이 2013년에 고관절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이 악화된 사이에 신 전 부회장이 한국에 잘 오지 않고 아버지의 지시도 몇 차례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경영 수완도 좋고 아버지의 지시를 잘 따르는 신동빈 회장이 자연스레 후계자로 결정된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했다.통상 한국의 재벌가에서 후계자는 장남으로 낙점되는 경우가 많다. 예로부터 장자 승계의 원칙을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 때문이다. 이 경우 장남이 아닌 나머지 자녀는 그룹 내 일부 기업의 경영권만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본지 집계 결과 우리나라 30대 기업 중 오너의 경영권 소유가 확실한 22곳 가운데 7곳은 장남이 창업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오너가 창업주의 손자나 조카로서 가업을 이었으면서 아버지의 장남인 7곳을 합하면 총 14곳이 장자 승계의 원칙에 충실했다. 오너가 창업주 본인인 3곳을 제외하면 19곳 중 14곳, 즉 74%가 장자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것이다.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자리를 이을 것이 확실시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회장의 장남이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말에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토탈·삼성테크윈(이상 기존 사명)을 비롯한 화학과 방위산업 부문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하는 등 사업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 부회장은 전자·금융 등 그룹의 핵심 사업 부문을 물려받는 절차를 밟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도 집안의 장남으로서 별 어려움 없이 후계자가 된 경우다. ━ 이맹희 전 회장, 장자승계 관행에도 부친 눈 밖에 다만, 이번에 롯데그룹 후계자로 차남이 낙점을 받았듯 가문의 장자라고 해서 후계자가 될 것을 낙관할 일은 아니다. 경쟁자가 될 만한 형제가 있다면 치열한 생존경쟁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경영 수완 등의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장남이더라도 무능하다면 후계자로 낙점되지 못할 공산이 크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변수가 있다. 그룹 경영의 최종 결정권자인 오너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할 경우 언제든 후계 구도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재벌가 자제로서 후계자가 되려면 외적인 능력을 키우는 것 못지않게 아버지 등 가족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능력 면에서 신임을 얻지 못하고 아버지와 대립하는 등 가족관계에서도 낙제점을 받아 후계 구도에서 밀린 대표적인 예다.집안의 장남으로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이 전 회장은 1966년 일명 ‘사카린 밀수사건’ 때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병철 창업주가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자 뒤를 이어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을 진두지휘했다. 한때 삼성전자·삼성물산 등 주력 계열사의 부사장·전무·상무 등 17개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때 이병철 창업주는 이 전 회장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서전 에서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보았으나 6개월도 안 돼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또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적었다. 이어 ‘3남 건희(이건희 회장)가 자질도 있고 기업 경영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보여 후계자로 정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비위를 계속 거스른 것도 결정적이었다. 이 전 회장은 가문의 차남이자 동생인 이창희씨가 청와대에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을 때 여기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병철 창업주는 1977년 일본 닛케이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신문과 방송 쪽 이사직을 맡고 있는 3남 건희를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 전 회장은 이후 “아버지와 여러 번 대화를 시도했지만 서로 양보하지 않아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며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언젠가는 내게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 믿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병철 창업주의 후계자 선택은 탁월했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다. 재계 관계자는 “재벌가 자제들은 편하게 입사해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이지만 이때부터 치열한 경영권 승계 경쟁이 시작된다”며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기업들뿐 아니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적용된다”고 말했다. 더러는 창업주나 선대회장의 뜻을 거스른 ‘왕자의 난’ 또는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정 회장의 아버지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장남인 고 정몽필 회장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차남인 정 회장과 5남인 고 정몽헌 회장을 놓고 후계자 자리를 저울질했다. 애당초 낙점된 사람은 정몽헌 회장이었지만 정주영 창업주가 와병 중이던 2000년 공동회장직을 놓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의 공백을 틈타 보복성 인사를 단행해 정몽헌 회장의 심복들을 전보(轉補)시키며 포문을 열었다. 두 형제의 이전투구 끝에 정주영 창업주가 계열사 지분 정리와 현대차 지분 매입에 나서게 된다. 이때 현대그룹 삼부자는 정부와 채권단의 지배구조 개선 및 경영진 문책 요구에 모두 임원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등을 중심으로 새 그룹을 꾸려 오늘날 재계 2위 현대차그룹의 수장으로 거듭났다. 두산그룹도 2005년 형제의 난으로 홍역을 치르면서 재벌가의 후계자 선정이 녹록하지 않은 일임을 드러냈다. 두산그룹은 창업 2세인 고 박두병 창업주가 현재 그룹의 모태를 일군 이후 3세대부터 이례적인 형제 경영을 시작했다. 박두병 창업주의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1981년부터 1996년까지 그룹 총수를 역임한 이후 차남인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이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2005년에 동생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창업주의 3남)이 그룹 총수로 추대되자 이에 반발, 검찰에 그룹이 경영 과정에서 편법을 써 비자금을 횡령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며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형제들은 그를 가문에서 제명했고, 박용오 회장은 2009년 자살했다. 현재 두산그룹 총수는 창업주의 5남인 박용만 회장이다. ━ 왕자의 난·형제의 난으로 얼룩지기도 이밖에 금호그룹도 고 박인천 창업주 뜻에 따라 형제 경영을 시작했지만 3남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4남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면서 지금은 계열 분리됐다. 이에 반해 LG그룹처럼 모범적인 형제 경영 사례도 있다. LG그룹은 형제와 친인척들이 모두 경영에 참여했지만 LG와 GS, LS, LIG 등으로 나뉘는 계열 분리 과정에서 이렇다 할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지금의 LG그룹을 맡았고 나머지 아들들은 LS그룹을, 창업주의 처가인 허씨 일가는 GS그룹을 각각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창균 기자 lee.changkyun@joins.com
2015.07.1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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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특별기획 ‘한국 10대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5월호 커버스토리는 LG그룹 창업주 일가의 기업가정신이다. 2015년은 특히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취임한지 2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구인회·구자경· 구본무 LG그룹 3대가 면면히 이어온 기업가 정신을 조명했다. 2015년은 LG그룹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해다. 구본무(70) 회장의 취임 20주년이자 럭키금성에서 LG로 기업 이미지(CI)를 바꾸고 LG브랜드로 출범한지 2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1995년 2월 22일, LG그룹은 구자경 2대 회장의 이임식과 3대 회장의 취임식을 함께 개최했다. 재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그만큼 준비경영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날 구자경(90) 명예회장은 LG그룹 깃발을 힘차게 흔들고는 장남인 구본무 신임 회장에게 흔쾌히 넘겨주었다. 럭키(LG화학) 과장으로 시작해 현장에서 20년의 경영수업을 받고 지천명의 적지 않은 나이에 LG그룹 총수의 자리에 오른 구본무 신임 회장의 각오는 남달랐다. 구 회장은 “정도(正道)경영으로 고객·사원·주주·사회를 만족시키는 세계초우량 LG를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임직원들에게 도전정신을 일깨우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전 부문의 역량을 세계 초우량 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최고의 인재들이 저마다의 능력과 창의를 마음껏 펼치는 일등회사, 진정한 프로들의 회사, 공정하고 합리적인 회사를 만들어나가자”는 비전을 제시했다.그로부터 20년, 혁신과 정도경영으로 초우량기업을 만들겠다는 구본무 회장의 약속은 실제로 현실화 됐다. 1994년 말 30조원이었던 LG그룹의 매출은 2014년 말 150조원으로 5배 늘었다. 해외 매출은 10조원에서 100조원으로 10배, 그룹 시가총액은 7조원에서 67조원으로 10배가량 불었다. 많은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1999년 LIG의 계열분리를 시작으로 LS(2003년)·GS(2005년)·LF(2007년) 등이 LG에서 분리되는 악조건 속에서 거둔 성과라는데 놀란다. LG그룹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서도 지난 20년 동안 임직원 수가 10만 명에서 22만 명으로 증가했고, 해외법인도 90개에서 290여개로 늘어났다.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 빛나는 성과에도 구본무 회장은 그 흔한 언론과의 인터뷰도, 거창한 행사 하나도 개최하지 않았다. LG가를 잘 아는 인사들에 따르면 소탈하고 근검 절약이 몸에 밴 능성 구씨(綾城 具氏)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빼닮았다.구본무 회장의 기업인생은 선대 창업주와 2대 회장을 통해 면면히 이어내려온 기업가정신의 계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부터 68년 LG의 역사를 일군 세 명의 거인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LG그룹은 연암(蓮庵) 구인회(1907~1969년)가 창업주다. LG역사는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의 창업으로부터 출발한다. 연암은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공업, 전기, 전자, 무역, 석유화학, 전선, 통신, 언론 등 각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군을 일궈낸 선구적 기업가로 꼽힌다. 경영 사학자들에 따르면, 연암의 경영이념은 인화단결주의, 가족주의, 근검절약주의, 도전과 개척주의, 인재중용주의, 기술혁신주의, 국제화와 정도주의, 사업보국주의, 국민생활편의주의로 요약된다. 그중 연암의 기업가정신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오늘날 LG의 경영이념인 ‘인간 존중의 경영’으로 발전한 ‘인화단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업자 연암의 생활철학이며 경영사상이기도 한 인화단결은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화합하며 한마음, 한 뜻으로 여러 사람이 한데 뭉쳐 단합하는 것이다. ━ LG그룹의 창업정신 ‘인화경영’ 인화경영은 LG그룹 형성기 때부터 시작된 가족중심주의에서 배태됐다. 경남 진양에서 연암의 집안은 구교리댁으로 통했다. 그의 조부 구연호가 과거 시험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냈기 때문이다. 연암은 구교리댁의 전통적인 유교주의 가풍에서 배워나온 가족주의 사상을 그대로 기업 경영활동에 접목시켰다. 연암이 나고 자란 경남 진양군 지수면의 생가에 걸려있는 가훈의 10대 덕목 중에는 지금도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는 내용이 있다. 경영사학자들은 형제간의 우애와 근면 성실함을 강조한 이런 집안 내림이 LG의 인화 경영의 뿌리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연암은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며 자식들에게 늘 인화를 강조했다고 한다. 구자경 명예회장으로 경영권이 승계될 때 얘기다. 연암이 63세를 일기로 1969년 별세하자 세상의 모든 관심이 LG가로 쏠렸다. 한국 재계에서 정상을 다투는 재벌의 총수가 생을 마감하였으니 누가 다음 총수가 되느냐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 재계와 언론들은 당시 럭키금성에 포진하고 있는 6명의 형제와 6남 4녀 등 10명의 자녀들, 사돈가의 허씨들과 창업과정 공신들이 이해다툼을 벌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기대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럭키금성의 양대가문인 구씨, 허씨네 집안은 옛날과 같이 화목하기만 했다. 연암이 별세한지 6일 후인 1970년 1월 6일 유교적 집안의 가풍답게 장자인 상남(上南) 구자경을 럭키그룹의 제2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장자승계의 원칙을 따라 취임했다. 이 장면은 한국 재계사에서 유교적 가풍에 따른 2세 경영자의 장자 승계가 처음 이뤄진 날로 기록되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상남 구자경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자 모두들 놀라워 했다. 재계 주변에서 “구씨네 집안 참 대단하네, 조카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숙부들이 그 밑에서 일하다니 신기하지 않는가”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인화단결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LG그룹의 두드러지는 경영문화는 구본무 회장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구씨 가문이 GS그룹의 허씨 가문과 57년간의 성공적 동업 관계를 유지한 후 아무런 잡음 없이 ‘아름다운 이별’을 할 때도 인화경영이 빛을 발한 것이다. 1999년 LG화재(현 LIG손해보험)가 먼저 그룹에서 떨어져나갔다. 2003년엔 LS그룹이 분리됐다. 2005년 1월에는 3대에 걸쳐 57년 간 이어진 구씨·허씨 두 가문의 동업 관계가 GS그룹과의 분리로 아름답게 끝났다. 반세기 동안 두 집안을 이어주었던 것은 신뢰와 의리였다. 분리된 가문들과는 아무런 잡음이 없었고, 지금도 우호적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후계자 선정과 계열분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재계 3, 4세들이 구 회장 부자(父子)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이건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등 『연암 구인회 상남 구자경 연구』를 진행했던 학자들에 따르면 LG그룹이 초창기에 인화라는 경영이념을 명시한 것은 초창기 럭키금성에 참여한 인적 구성의 복잡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초 허씨 집안, 구씨 성의 ‘회’자 돌림의 여러 형제들, ‘자’자 돌림의 2세들, 그리고 ‘본’자 돌림의 손자들, 여기에 창업주인 연암을 도운 경영자들과 공채로 뽑은 인재들 등등 ‘인화단결’을 강조하지 않고는 오늘의 LG로 성장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이 초창기 럭키금성그룹에 있었다는 것이다.이같은 가족주의 경영방식은 구본무 회장 대에 접어들면서 변화의 고비를 맞는다. 1995년 취임한 구본무 회장은 혁신을 통한 ‘강한 기업’으로의 변신을 예고했다. WTO 체제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경영을 강화하고 젊고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들로 세대교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이 의견일치를 이룬 것이다. 이후 구본무 회장이 주창한 전문경영인에 의한 자율경영체제를 위해 창업회장단의 과감한 용퇴가 뒤따랐다.LG기업 연구자들에 따르면, 구본무 회장 취임 무렵인 1995년 LG그룹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그룹정책위원회로서 회장과 9명의 참모 등 1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그룹정책위원회는 구자경 회장 때의 9인 정책위원회와 비교하면, 그 분위기가 많이 바뀌게 된다. 구자경 회장 시대에는 70세 안팎의 구·허씨에 의한 양가인사가 이끌었고, 회의는 상향보고식이었다. 구자경 회장 시대의 그룹정책위원회 위원은 상남 구자경 회장과 허준구·구태회·구평회·허신구·구두회·구자학·이헌조·변규칠 씨 등이었다고 한다. 9명 중 7명이 선대로부터 이어내려온 구씨·허씨에 의한 양가 경영인들이었다. 그런데 구본무 회장 체제하에서는 이들 9인의 위원 중 구자학씨만 남고 모두 퇴진했다. 이헌조·변규칠만 유임됐을 뿐 허창수·정영의·성재갑·이문호·허동수·구자홍씨 등 새로운 경영진으로 교체되었다. 구·허씨의 가계가 아닌 사람이 3명이나 추가되는 등 소유경영인 대 전문경영인의 비율이 과거 7대 2에서 5대 5로 달라졌다.이처럼 평균 연령이 20년 정도 젊어진 구본무체제하의 그룹정책위원회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상호토론을 통해 그룹의 방향과 사업 비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아울러 LG 특유의 ‘사업문화단위’(CU)의 수장이 회장 자문기구를 통하여 전문경영인을 선발, 임명하는 등 전문경영인체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자율경영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가족주의 경영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문경영인체제의 자율경영으로 이행한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만하다. ━ 자율경영주의와 혹독한 후계자 경영수업 LG그룹의 경영철학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자율경영은 구자경 회장 때부터 LG그룹의 사훈으로 추진되었다. 구자경 회장의 경영이념은 고객가치창조주의, 인간존중경영주의, 자율경영주의, 혁신주의, 초우량기업주의, 책임경영주의, 노사화합주의, 인재중시주의로 요약된다. 그중 자율경영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구자경 명예회장에 따르면 자율경영은 첫째, 능력 있는 후계자를 키워서 믿고 맡기는 경영. 둘째, 현장을 중시하여 현장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영. 셋째, 고민과 고통의 책임이 수반되는 경영. 넷째,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전문가적 경영. 다섯째, 팀워크의 경영으로 요약된다.LG그룹의 자율경영은 독특한 후계자 수업으로 나타났다. 자율경영은 기본적으로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여 그것을 수행해 낼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에게 경영을 맡기는 LG가의 문화 때문이다. 능력있는 인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육성해야 하며,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판단능력과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LG가의 오랜 경영이념이다.이에 따라 LG가의 후계자들은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아야 했다. 재계에서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은 인내와 끈기의 기업인으로 불린다. 그것은 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오랜 경영수업을 거치며 단련됐기 때문이다. 창업주인 구인회와 아들 구자경 사이의 나이는 18세 차이다. 구인회가 41세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창업할 때, 이미 구자경은 23세의 헌헌장부였다. 부친 사업의 창업동반자로 럭키금성을 20여 년동안 성장시키면서 부친으로부터 후계자 경영수업을 충분히 받았다. LG그룹의 후계자 수업은 유교문화에서 장자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가족주의 경영과 어우러지면서 LG만의 독특한 승계문화를 만들게 된다.연암은 때때로 경영수업을 받기 위해 전무의 자리에 있던 장남 구자경을 불러 앉혀놓고 이렇게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본시 맏이란 일이 고된 법이다. 남들은 놀아도 맏이는 놀 새가 없다. 묽은 걸 알고, 된 걸 알아야 남을 다스려 나갈 거 아니냐, 너는 아버지를 대신할 책임 있는 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구자경은 장남이라는 특혜를 누려보지 못했다. 창업주 연암은 왜 장남에게 그토록 어려운 일만 시키느냐고 주위사람들이 걱정하자 “대장장이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담금질을 되풀이 하여 무쇠를 연단하는 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구자경도 아버지인 연암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큰 일을 하면서도 지엽말단의 작은 일들을 저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하고,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소홀히 하지 않은 가운데 능히 대국을 내다보는 슬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견뎌냈다고 한다.후계자에 대한 이같은 혹독한 경영수업은 현장을 중시하는 LG의 경영문화와 맞닿아 있다. 어느 기업이건 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이 자신의 현장에 대해서 손금보듯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본의 한 경영연구소가 대규모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각 조직계층이 기업내의 문제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를 조사해 보았더니 최고경영자층은 납기의 지연이나 고객서비스 문제점 등 기업내의 문제점을 약 4%밖에 알고 있지 못하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능력있는 후계자를 정해 일찍부터 현장경영을 경험하게 하면 이런 걱정은 덜게 된다. 상남은 “나는 고된 경영수업 덕분에 어느 공장에 가도 손때가 묻지 않은 기계가 없었고,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있는 지를 환히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룹내에서 상남만큼 그룹을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을 때 상남은 다른 이들의 반대없이 회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이런 승계 문화는 3세인 구본무 회장의 경영수업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1975년 LG화학의 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입사 15년만인 1989년에야 그룹 부회장직을 맡아 그룹 경영에 발언권을 낼 수 있었다. 다른 그룹 총수의 후계자들은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뒤 4~5년이 지나면 경영권을 이어받았지만 LG가는 이처럼 오랜 현장 수련을 거친 뒤에야 경영 대권을 물려주었다. 앞서 1995년 그룹회장의 이임식과 취임식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자신감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룹 총수가 금쪽처럼 아끼는 장남이지만 밑바닥에서 경험을 혹독하게 쌓은 후계자는 현장을 아는 따뜻한 경영자의 자질을 갖추게 마련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집단 해고 소문이 무성하던 2008년, 구본무 회장은 “사정이 어렵다고 함부로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려 대량해고를 기정사실화하던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LG그룹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구본무 회장이 혹독한 경영수업을 통해 현장에서 고생하는 이들의 노고를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인간존중의 생생한 사례로 평가한다. ━ 연암과 상남의 개척주의 정신 LG가를 특징짓는 또다른 기업가정신은 도전과 개척주의 경영이다. 연암 구인회의 도전과 개척주의 이념은 첫째, 유교적 인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당시로서 택하기 어려운 상업의 길로 투신하는 도전정신. 둘째, 락희의 창업과 화학공업, 전자공업의 새 지평을 여는 도전과 개척주의 정신. 셋째, 국가기간산업의 개척과 성장 등으로 요약된다. 락희화학공업사(1947년)와 금성사(현 LG전자, 1958년)를 거쳐 지금의 LG그룹을 만든 데는 구인회 회장 특유의 개척가 정신이 있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에 먼저 뛰어드는 연암의 사업가적 기재와 기질이 지금의 LG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여성이 있는 한 영원한 것은 화장품이다”며 시작한 크림 생산이 유리 용기 때문에 자꾸 깨지는 어려움을 겪자 재빨리 플라스틱 사업을 펼쳤고 용기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라디오·TV·세탁기 등 전자 제품의 외장을 만들면서 전자 사업에 뛰어들었다.상남 구자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을 하며 정보화시대 제 3의 산업 혁명기를 성공적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개척가였다. 상남은 1970년 1월에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총수가 된 후 1994년 12월까지의 25년 동안 LG그룹(당시 럭키금성그룹)을 이끌면서 선친인 연암의 기업가정신에 바탕을 둔 LG정신을 계승하여 경영혁신을 주도해 나갔다. 그가 1983년 1월 5일자 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기업가정신을 보자. “나의 경영철학이자 우리 그룹의 일관된 기업가정신이기도 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인화를 통해 집단적인 창의를 발현시키는 일이다. 이는 모든 개개인의 활동을 창조적인 집단 활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며, 이 결과 기업발전과 사회복지가 동시에 추구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산업고도화를 선도해 나가는 일이다. 우리 기업은 창업 이래 언제나 독창적인 기업활동을 선도해 왔으며, 앞으로도 첨단 미래산업 등 미개척 분야에 적극 도전하여 주요 제품의 국산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셋째,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활동의 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해 나가는 일이다.” 이같은 상남의 경영방침과 경영철학은 구인회 창업회장으로부터 전승되어 현재까지 LG그룹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상남이 강조했던 개척주의, 도전주의 문화는 LG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업가정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최고의 기업가치를 추구하고 일등을 지향하는 사람은 결코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상사의 지시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과 긍지를 지니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LG가의 개척정신은 구본무 회장 때에 이르러 더욱 꽃을 피우게 된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해 몇차례 위기를 넘겨가는 과정도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취임한지 3년도 안 돼 닥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1차 시련이었다. 각별한 애정을 쏟은 반도체 사업을 정부의 ‘빅딜’ 압박으로 포기해야 했다. 계열분리로 당시 알짜로 분류됐던 LG화재·LG산전·LG칼텍스 등이 떨어져 나가면서 LG의 내수기반이 흔들릴 것으로 우려했지만 구 회장은 배수의 진을 치고 위기를 넘겼다. 구본무 회장은 LG를 선택과 집중의 전략에 따라 전자·화학·통신서비스 중심 기업으로 새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내걸고 특유의 뚝심과 도전으로 이겨냈다. 그의 구상대로 LG는 이후 안정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내수 중심이던 사업 체질을 확 바꾸고 매출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거두는 수출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 구본무 회장의 정도경영과 시장선도 LG그룹의 경영이념은 3대에 걸쳐 발전 과정을 겪는다. 상남은 LG그룹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온 창업주 연암의 ‘인화단결·개척정신·연구개발’ 경영이념을 진일보시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으로 발전시켰다. 기업의 목적은 사람을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인간존중의 경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한 구자경 회장이 ‘개척정신과 연구개발’을 진일보시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로 집약하고, ‘인화단결’의 이념을 승화시켜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이같은 LG그룹의 경영철학은 구본무 회장에 이르러 정도경영으로 발전된다. 구본무 신임회장은 정직과 공정을 바탕으로 하는 ‘정도경영’을 새로운 LG시대의 경영철학으로 확립하고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경영, 일등을 추구하는 기업풍토를 조성함은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을 강조하는 초우량기업 LG를 만들어낸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정도경영, 능력과 업적지향의 성과주의 문화, 최고의 기업가치창조형 일등주의문화 및 도전주의 문화 등 네 가지를 새로운 LG문화로 제시해 정착시켜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1월, 럭키금성그룹을 LG그룹으로 변경함으로써, 21세기의 세계초우량기업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1947년 연암에 의해 창업돼 락희그룹으로 일궈놓은 것을 1970년 1월 상남이 이어받아 2세 경영체제의 구축과 함께 럭키금성그룹으로 성장시켰고, 그 후계자로서 구본무 회장에 의해 21세기를 향한 LG의 새로운 경영 이정표가 제시된 것이다. 이후 정도경영은 구본무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LG그룹은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문화의 정착을 위한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윤리규범이 제정되고 불공정사례신고센터가 설치됐으며, 1995년 3월에는 LG공정문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정도경영을 바탕으로 하는 초우량LG의 방향타를 확고히 했다. LG 그룹이 추구하는 정도경영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외적으로 시장에서 정정당당한 경쟁과 호혜적인 협력을 통하여 세계적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하고, 대내적으로는 공정·정직·성실을 근간으로 하는 공정기업문화를 정립하려는 목적이었다. 정도경영의 실현을 위해 LG그룹은 2003년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대기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어온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고 사업자회사는 오로지 본연의 자기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에는 보무도 당당하게 ‘LG Way’를 선포했다. ‘LG Way’는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LG의 행동 방식인 ‘정도경영’으로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인 지향점인 ‘일등 LG’를 달성하자는 내용이다. 지금도 ‘LG Way’는 LG그룹 모든 임직원의 기업 문화이자 사고 및 행동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 도전과 끈기로 ‘일등LG’ 실현하는 구본무 회장 구본무 회장의 최근 3년간의 화두는 ‘시장선도’와 ‘철저한 실행’이다. 고객가치에서 일등하는 LG, 시장을 선도하는 LG, 100년을 넘어 영속하는 LG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구 회장은 그 배경으로 “갈수록 예측하기 힘든 앞으로의 경영환경에서 이제 일등기업이 아니면 성장이나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냉엄한 현실”이고, “결국 시장선도 상품으로 승부해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스스로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 구 회장은 “창립 이래 60년 동안 LG 경영철학은 시장선도와 맥을 같이해 왔고, 글로벌 시장에서 앞서 나간 경험과 무한한 잠재력, 그리고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더해 시장선도를 철저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LG Way’로 상징되는 구본무 회장 20년사는 도전과 혁신의 20년이었다. 구 회장은 취임 후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전자·화학·통신서비스의 3대 핵심사업을 집중 육성했고, 배전의 노력으로 그에 걸맞는 성과를 냈다. 우선 LG는 현재 전자부문 디스플레이 세계 1위다. 구회장은 총 40조원 이상을 투자해 LG디스플레이를 세계 일등기업으로 키웠다. 경북 구미에서 첫 번째 공장을 가동할 당시 임직원 수는 1100명, 매출은 15억원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임직원 3만2500명에 27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LG전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TV와 스마트폰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LG TV는 세계 최초로 올레드(OLED) TV를 상용화했다. 스마트폰도 G시리즈를 출시하며 세계 3위(매출액 기준)를 달리고 있다. 통신부문에서는 LG유플러스가 LTE로 시장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그룹의 모태인 럭키에서 시작한 LG화학도 20년 동안 연구개발 노력을 기울인 중대형 2차전지 사업이 이제 주력사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편광판, ABS(충격과 열에 강한 합성수지)부문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단기 성과를 내는데 급급하지 않고 부단히 도전해 결실을 보고야마는 구본무 회장 특유의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이런 성장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다. 구본무 회장은 지난 1월 임원들과의 20년 기념 모임에서 “LG 브랜드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위한 혁신의 상징이자 진정한 ‘일등 LG’로 성장하여 영속할 수 있도록 CEO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달라”고 주문했다. 지난 1월 ‘글로벌 CEO 전략회의’ 후 LG브랜드 출범 20주년과 회장 취임 2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20-20’ 행사 자리에서 최고경영진들에게 제시한 비전이다. 그가 말하는 일등 LG는 무한경쟁 시대의 경영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LG그룹이 추구하는 정도경영의 정신에 입각하여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하며 LG의 구성원 모두가 세계의 최고가 되어 세계적 초우량기업을 만들어나가자는 주문이다. 각자가 만들어내는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단 한 장의 보고서에서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보면 21세기의 초우량 LG그룹을 담금질하고 있는 구본무 회장은 2002년 월드컵 때 ‘아직 배가 고프다’며 승부욕을 불태웠던 히딩크 감독처럼 아직도 배가 고픈 것이다. 포브스의 이번 취재에 도움을 아끼지 않은 LG그룹 관계자는 “LG 임직원들은 창업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차세대 새로운 성장엔진을 발굴하고 시장을 개척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며 “20년 자축행사를 여는 것보다 뚝심있게 내실을 다지는 것이 LG의 기업 DNA”라고 설명했다. LG가의 기업가정신을 거론하면서 마지막으로 LG가 특유의 근검절약주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구본무 회장은 어릴 적부터 선친으로부터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쓰는것이 더 중요하다. 돈을 낭비하고 천하게 쓰는 것을 우리 집에서는 가장 큰 악덕중 하나로 여겨 왔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자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선정 한국의 50대 부자 순위(올해는 18위)에 꼽히는 그는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이는 창업주인 연암에서 비롯된 독특한 용전(用錢)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암은 특히 절약하고 저축하되 돈을 쓸 때는 허세부리지 않고 필요한 곳에 서슴없이 쓰는 기업인으로 유명했다. 꼭 써야 할 큰돈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내놓는 배포를 가졌으면서도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아는 그런 성품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 LG가 3대의 아름다운 용전(用錢)철학 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공장들이 활발히 가동하고 럭키치약이 미제치약을 물리치면서 시장을 석권해 가고 있던 무렵, 락희화학은 서울의 반도호텔 빌딩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연암은 일류회사의 사장이었다. 당시 락희화학 김주홍 상무는 신설동에 살면서 아침 저녁 미니 합승버스로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그 차에 구인회 회장이 올라타는 것이다.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미니 합승버스를 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는 합승버스가 좋습니다. 돈 몇 푼 벌었다고 거들먹거리며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을 보면 딱해서 못 보겠습니다. 돈이란 있을 때 아낄 수 있는 것이지 없는데 무엇을 아낀다 말이요. 그래서 옛말에도 돈이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했소. 부자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아니라 쓰지 않고 저축하면서 아끼는 것이 부자가 되는 법이요. 합승버스를 타면 회사까지 오는데 뭣 때문에 휘발유 없애고 길바닥에 돈 뿌리며 택시 탄다는 말이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영락없는 구두쇠 소리나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연암 구인회 회장은 인색한 기업가가 아니었다. 일제 말기에 백산 안희제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1만원을 선뜻 건네준 기업가였다. 1969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연암문화재단을 설립·운영하는 등 큰 돈을 쓰는 데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LG연암문화재단은 1970년부터 지금까지 2900여 명의 석·박사 대학원생들의 학비를 지원하는 ‘연암장학생 지원사업’을, 1989년부터는 인문사회·이공계 대학교수 700여 명에게 1년간 해외연구를 지원하는 ‘연암해외연구교수’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상남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LG상남도서관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건축가 고 김수근씨가 설계한 사저를 LG연암 문화재단에 기증해 1996년 도서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근검 절약이 몸에 배인 그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자리잡은 자신의 사저를 국내 최초의 디지털 도서관이자 과학기술 전문도서관으로 흔쾌히 내놓았다. 근검절약 정신은 구본무 회장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별취재팀은 자료를 수집하다 재미있는 기록을 발견했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 이듬해인 1996년 허례허식을 없애자는 생활개혁운동을 펼치고 절약한 돈을 장학기금으로 전달했다는 뉴스였다. 구본무 회장은 당시 연말연시에 기업체에서 의례적으로 보내는 연하장 안보내기운동을 펼쳐서 절약한 1억원을 우편집배원의 자녀들을 위한 장학단체인 윤당체우장학회 희사해 화제가 되었다. 지난 2000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설립된 공연예술 공간 ‘LG아트센터’도 LG그룹 전통의 용전철학을 보여주는 사례다. 연면적 7000평의 공간에 객석 1100개를 갖춘 최첨단 공연장인 LG아트센터는 문화예술 창작과 교류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설립 이후 LG는 53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아트센터의 안정적인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돈을 쓸 때는 낭비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는 서슴없이 쾌척할 줄 아는 LG가 기업인들의 아름다운 돈씀씀이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2015.04.28 11:59
16분 소요지난해 말과 올해 초 단행된 대기업 정기임원 인사에서는 삼성·LG·현대차·대한항공의 3세 경영인 상당수가 경영수업에 새로 참가한 점이 두드러졌다. 이미 경영에 참여한 오너 경영인들은 한 단계씩 승진하며 후계 구도의 윤곽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대기업들은 CEO 교체를 가급적 자제했다. 어려운 시기에 불확실성을 보태는 모험을 피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오너 일가의 경영참여는 두드러졌다. 특히 사위와 딸의 약진이 눈에 띄게 늘었다. 삼성과 현대 일가에서만 10명에 가까운 사위와 딸들이 승진하거나 새로 입사했다. 삼성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두 딸과 사위가 모두 임원 자리에 올랐다. 이 회장의 맏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는 상무보에서 한 단계 올라섰고, 그의 남편인 임우재 씨는 삼성전기 상무보로 새로 선임됐다. 지난 1999년 이 상무와 결혼한 임 상무보는 그동안 삼성전자 미주본사 전략팀에 적을 두고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올해 초 이건희 회장의 생일을 맞아 귀국했다가 삼성 임원으로 일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부진 상무는 지난 95년 삼성복지재단에 입사한 뒤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을 거쳐 신라호텔로 옮겼다. 둘째 딸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도 부장에서 임원으로 승진했다. 제일모직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남편 김재열 상무는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아들로, 지난 2000년 이 상무보와 결혼했다. 이후 제일기획 상무보에 선임돼 삼성에 첫발을 디딘 그는 2003년 초 제일모직으로 옮겨 지난해 상무로 승진했다. 이미경 CJ 부회장도 승진과 함께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계획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가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맏딸. 이재현 CJ 회장의 누나다. 이 부회장은 CJ엔터테인먼트·CJ CGV·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으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총괄한다. 이 부회장은 95년 CJ가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드림웍스에 자본참여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 뒤 CJ엔터테인먼트 해외파견 상무 직함을 갖고 미국에 머물러 왔다. CJ 측은 이 부회장의 선임에 관해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해외 진출을 위해 전문적인 식견과 폭넓은 해외 네트워크를 가진 전문가가 필요했다”며 “이 부회장의 경영참여는 이재현 회장이 직접 요청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LG가문에서는 분가한 회사들을 맡을 후손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LG가 창업주 구인회 회장부터 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지는 장자승계를 지켜오는 동안 다소 경영에서 떨어져 있던 후손들. ‘회(會)’자 항렬 형제들의 후손인 ‘자(滋)’자 항렬 형제들이다. LG전선그룹은 지난해 말 구두회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의 외아들인 구자은 LG전선 이사를 1년 만에 해외사업담당 상무로 승진시켰다. 또 구평회 E1(옛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의 3남인 구자균 고려대 교수를 LG산전 관리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E1은 구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자용 E1 부사장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구자용 사장은 79년 LG전자에 입사, LG전자 미주법인 이사와 법인장을 거쳤다. 2001년에는 E1으로 자리를 옮겨 기획 및 재경담당 상무와 부사장을 역임했다. 형제들 가운데 맏이인 구자열 LG전선 부회장은 지난해 초 LG전선에 둥지를 틀었다. E1 측은 “형제들이 경영 전면에 나섬에 따라 향후 신규사업 추진 등 회사의 변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인사로 LG전선그룹은 고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구태회·구평회·구두회 명예회장 등 원로 3명의 2세들 대부분이 계열사에서 자리를 잡았다. 구자홍 LG전선그룹 회장과 구자엽 가온전선 부회장, 구자명 극동도시가스 부회장은 구태회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이들은 구본무 LG그룹 회장보다 대체로 나이는 적지만 항렬은 하나씩 높은 당숙들이다. LG상사도 지난해 12월 15일 임원인사를 통해 고 구자승 LG상사 대표의 막내 아들인 구본진 경영기획팀 부장을 상무로 승진시켰다. 구 상무는 형인 구본걸 부사장, 구본순 상무와 함께 LG상사 지분의 15%를 갖고 있는데 앞으로 사내에서 이들 오너 3형제의 역할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이들은 그동안 여러 계열사에 흩어져 일하다 이번에 모두 LG상사에 합류했다. 해외파·기술인력 강세 지속 현대가의 후손들도 3세 경영체제에 속속 동참하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은 2003년 장남인 정지선 부사장을 현대백화점 부회장으로 승진시킨 데 이어, 이번에 차남인 정교선 부장을 그룹 기획조정본부 기획담당 이사로 발령해 본격적인 경영참여의 길을 걷도록 했다. INI스틸 계열사인 BNG스틸 정일선 부사장의 막내 동생인 정대선 씨가 지난달 BNG스틸 공장품질팀 대리로 입사함으로써 3형제가 한솥밥을 먹게 됐다. 정일선 부사장은 영업을 담당하고, 둘째 동생인 정문선 이사는 재정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정주영 창업주의 4남인 고 정몽우 씨의 아들들이다. 정주영 창업주의 일곱째 아들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도 새해 ‘이사회 의장’ 직함을 달고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정 회장이 등기이사로 돌아오는 것은 8년 만이다. 이 밖에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외아들인 조원태 씨도 지난해 10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 부팀장(차장)으로 입사함으로써 한진그룹의 3세 경영체제 구축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씨는 대한항공 기내판매 팀장을 맡고 있다. 오너 일가 외 임원 인사에서는 해외파와 연구개발 인력을 중용하는 최근의 기조가 이어졌다. 40대 임원을 요직에 배치하는 세대교체 바람도 여전했다. 삼성은 오동진 부사장을 북미총괄사장으로 앉히는 등 미국·유럽·중국 등 3대 해외거점의 글로벌 인재들을 대거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또 반도체 제조 효율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김재욱 부사장을 제조담당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기술인력을 중용했다. 주요 기업들은 수출확대를 위해 해외 전문가를 중용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현대자동차는 정기인사에서 노재만 베이징현대자동차(北京現代汽車) 총경리를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비롯해 임원 승진자 56명 가운데 10명을 해외법인 근무자로 채웠다. LG전자도 김광로 인도법인장과 안명규 북미총괄 부사장을 각각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한화는 40대의 최웅진 미주법인장을 구조조정본부장에 전격 기용, 해외시장 확대를 위해 공격경영을 펼칠 뜻을 분명히 했다. 또 올해 임원 인사에서는 기업의 성과별로 보상과 문책의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됐다.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삼성에서는 유례없는 승진 잔치가 벌어진 반면, 실적이 부진했던 코오롱은 부회장 3명 전원을 포함해 임원 34명을 무더기로 퇴진시켰다. 전체 임원의 3분의 1이 한꺼번에 옷을 벗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홍보담당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져 CEO도 배출됐다. 기아차 김익환 홍보담당 부사장이 국내영업담당 대표이사 사장으로 올라섰다. LG전자의 김영수 홍보담당 부사장은 LG스포츠의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겼고, 한화도 남영선 그룹 구조조정본부 홍보팀장을 ㈜한화 사업총괄담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4월 최한영 홍보 및 마케팅담당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이용훈 홍보실장의 직급을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높인 데 이어 연말 인사에서도 김조근 홍보담당 이사를 상무로 승진시켰다. LG화학의 유근창 홍보담당 상무는 부사장, 조갑호 홍보부장은 상무로 각각 승진했다.
2005.02.0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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