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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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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경제 재건 ‘물음표’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극단적 이슬람주의 무장조직인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을 장악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진다. 종교·군사 집단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할 수 있을까? 이 나라의 국세를 살펴보자. 면적을 보면 65만2864㎢로 한반도(22만748㎢)의 약 3배다. 인구는 2020년 아프간 통계청 자료로 3139만명이다. 경제력을 보면 약체 중에서도 약체다. 아프간은 국제통화기금(IMF)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92달러 수준이다. 세계 204위로 최빈국으로 분류된다. GDP가 199억 달러로 119위다. 하루 1.9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빈곤층이 인구의 54.5%에 이른다. 미국이 아프간에 지난 20년 동안 1조 달러를 쏟아 부었다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고개가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군 병력과 장비 유지·운용 비용, 군사비 등에 상당수가 갔겠지만 성적표는 초라해도 너무도 초라하다. 아프간의 최대 문제는 경제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자원 개발·교통 허브 도약 가능성 ‘희박’ 그렇다면 아프간의 미래는 가능성이 있을까? 석유나 가스 같은 자원이 있으니 미국이 점령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실제 존재하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2006년 미국의 지질조사 결과 아프간에는 35조 평방피트의 천연가스와 36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유 매장량을 보면 세계 30위권인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와 비슷하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나라가 중국이다. 경제발전을 위한 에너지원 확보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중국의 석유천연가스 공사는 2011년 아프간 정부와 계약을 맺고 북부 지역 세 군데에서 석유 시추에 들어갔다. 2007년 추정에 따르면 아프간에는 석유 외의 광물 매장량도 상당하다. 전기자동차 시대를 맞아 수요가 늘고 있는 전지 원료인 리튬을 비롯해 구리·금·철광석·석탄 등 다양한 지하자원이 묻혀 있다. 에메랄드·루비·사파이어·석류석·청금석 등 보석도 풍부하게 매장됐다. 일부 희토류도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는 2011년 아프간이 지하자원을 충분히 개발한다면 매년 100억 달러의 수입을 올려 GDP와 1인당 GDP를 당시의 두 배로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는 아프간의 경제가 워낙 바닥이기 때문에 ‘두 배’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국제 투자를 받고 자원을 개발하고 이를 수출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과제다. 과연 이를 능숙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정부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라는 이야기다. 또 다른 가능성은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국제 교통허브로서 기능하는 일이다. 특히 내륙국가인 아프간은 파키스탄(2670㎞)·타지키스탄(1357㎞)·이란(921㎞)·투르크메니스탄(804㎞)·우즈베키스탄(144㎞)·중국(91㎞) 등 6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중국과의 국경은 지나치게 오지에 있는 데다 오래 전에 폐쇄됐다. 아프간 정부가 무역을 위해 국경을 열어달라고 요청해도 중국은 요지부동이었다. 국경을 넘으면 예민한 신장위구르 지역이기 때문이다. 2010년 미국까지 나서 국경 개방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권위주의 체제인 투르크메니스탄은 나라 자체가 쇄국정책을 쓰고 있다. 파키스탄과 많은 인적·물적 교류를 하지만 경제력이 강하지 않은 실정이다. 국제적으로 아프간에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를 지나 아제르바이잔·조지아 등 캅카스 지역을 관통, 흑해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자는 프로젝트가 논의되기도 했다. ‘청금석 프로젝트’로 불린 이 아이디어는 지역의 불안 등의 문제로 사실상 사장되고 있다. 외부와의 교통로 이전에 아프간 국내의 교통도 문제다. 아프간은 ‘링 로드(환상도로)’로 불리는 동그란 도로가 전국을 한 바퀴 돌고 있다. 카불에서 출발해 시계방향으로 마이단·가즈니·칸다하르·델라람·헤라트·마라르이샤리프·풀리쿰리를 거쳐 다시 카불로 돌아오는 도로다. 이 도로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잘랄라바드, 북쪽의 바이·고 쿤두즈 등으로 연결된다. 이 도로는 아시아 전체를 고속도로로 연결하자는 아시안 하이웨이의 일부이기도 하다. 국가고속도로 1번(NH01)으로 불리는 이 도로는 아프간의 급소다. 이 도로를 장악하는 것은 아프간과 관련한 군사 작전의 핵심이다. 1979년 소련이 그랬고 2001년 미국이 그랬다. 미국이 점령한 뒤 1번 고속도로는 탈레반의 공격에도 수리를 계속해 어느 정도 연결이 이뤄졌다. 지난 4월 미국이 아프간 철수를 발표하자 5월 공세를 시작한 탈레반은 외려 이 도로를 이용해 진격의 속도를 가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탈레반은 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장갑차나 험비 외에는 중기관총을 장착한 도요타 트럭과 모터사이클, 자전거가 기동력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국가 인프라 사업이 탈레반의 공격 루트로 이용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경제는 탈레반이 아프간을 통치하는 핵심이다. 자금 없이 나라를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레반이 접수한 것은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일 뿐이다. 그들은 당장 어떻게 나라를 통치할까도 관심사다. 과거 회귀일지, 탈레반 2.0일지는 지켜볼 일이다. ━ 아프간 통치 당시 악명 떨쳤던 탈레반 ━ 탈레반은 1998~2001년 아프간을 통치하면서 극단적인 행동으로 악명을 떨쳤다. 카불에 입성하기도 전부터 유일신 신앙을 해치는 우상숭배라며 국립박물관 소장품 10만 점 중 70%를 파괴했다. 중동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이라크 북부의 유서 깊은 다민족 종교·문화 도시 모술과 고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 시리아의 고대 통상도시 팔미라를 점령한 뒤 박물관의 전시물과 유적의 고대 조각을 마구 파괴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탈레반은 2001년 3월 8~9일 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의 지시로 1500년 역사의 바미안 석불을 로켓과 폭약으로 파괴했다. 6세기 아프간 북부의 힌두쿠시 산맥 절벽을 파서 그레코박트리아 양식으로 새긴 거대한 바미얀 석불은 유네스코 인류유산에 등재된 귀중한 문화재다. 630년 불경을 구하기 위해 천축을 오가면서 이곳을 지나간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 그 기록을 남겼다. 그런 유적을 신성모욕이고 일신교에 대한 도전이라며 파괴한 것이다. 탈레반의 기괴한 행동은 끝이 없었다. 유일신 신앙에 방해가 된다며 음악·영화·방송은 물론 인터넷도 금지했다. 사진과 그림을 걸어두는 것도 막았다. 지도자의 사진을 사무실 벽에 걸어두는 일도 우상숭배라며 막았다. 참고로 이란에선 초대 최고지도자인 루홀라 호메이니와 후계자이자 현역인 알리 하메네이의 사진을 공직 사무실마다 걸어두고 있다.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이지만 서로 다른 점도 많다. 게다가 이슬람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수니파를 신봉하며 시아파를 적이자 신성모독 범죄자로 비난하는 탈레반은 다른 점이 너무도 많다. 탈레반은 축구와 체스를 포함한 스포츠와 오락, 심지어 연날리기나 애완동물 사육도 못 하게 했다. 특히 여성들의 교육과 사회활동은 일절 금지했다. 현대 이슬람은 서구 문물 등에 오염됐으니, 중세 초기 이슬람 시대로 돌아가자는 이런 조치들은 국내에선 물론 국제적으로도 탈레반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하는 요인이 됐다. 탈레반은 이 같은 이슬람 복고주의는 물론 남성은 턱수염을 기르고 여성은 손발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하도록 하는 파슈툰족의 풍습인 파슈툰왈리도 강요했다. 탈레반이 아프간 인구의 42%를 차지하는 파슈툰족의 무장단체이자 정치운동에 머문 이유의 하나다. 아프간 인구의 58%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의 반감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파슈툰족이라고 해도 모두 탈레반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탈레반은 주로 발상지인 남부 칸다하르와 농촌 지역을 토대로 한다. 지식인이나 상인이 많은 도시에선 탈레반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높은 편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서북부의 헤라트나 마자르이샤리프처럼 아프간 인구의 9.7%를 차지하는 이슬람의 종파적 소수파인 시아파와 탈레반은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다. 아니, 견원지간이라고 해야 오히려 정확할 정도다. 탈레반은 1998~2001년 통치 시절 이 지역에서 단지 시아파라는 이유로 주민 처형을 일삼았다. 무자비한 처형은 탈레반의 트레이드마크다. 탈레반은 1996년 카불을 점령하자마자 소련이 벌인 아프간 침공(1979~1989년) 당시 괴뢰 정권에서 마지막 대통령을 지낸 무함마드 나지불라를 잔혹하게 공개 처형해 악명을 높였다. 의사 출신인 나지불라는 1992년 군벌과 무자히딘(이슬람 전사)이 카불을 점령하자 인도로 탈출하려다 실패했다. 그 뒤 군벌들이 처리를 놓고 이견을 해소하지 못해 유엔 컴파운드에 계속 지냈다. 그러다 1996년 탈레반이 군벌 세력을 무력으로 누르고 카불에 입성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탈레반은 나지불라를 자동차 뒤에 매달아 온 도시를 달리면서 고통을 주고 조리돌림을 한 다음, 공개 거세를 했다. 그런 다음 대통령궁 앞에 크레인을 끌고 와 바지가 온통 피에 젖은 그를 교수해 처형했다. 그런 다음 한참을 걸어두면서 시민들에게 겁을 줬다. 당시 상황이 생생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이 15일 황급히 도피한 배경일 것이다. 가니가 돈다발을 들고 나갔다는 이야기는 러시아 국영방송인 스푸트니크(과거 니아노보스티)의 영어 뉴스가 발신지다. 평소 프로파간다와 가짜뉴스로 악명 높아 신뢰도에서 문제가 지적되기 때문에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가니는 미국이 만들다시피 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대통령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악인으로 몰아갈 이유가 많다. 게다가 가니가 떠난 아프간의 국고에는 여전히 70억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가 있다. 탈레반이 이를 차지하게 될 경우 병사들에게 보상금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탈레반의 소중한 통치자금이다. ━ 카불서 달러 기근 등 자금 줄 막힌 탈레반 카불에선 아마 달러 기근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미국이 카불 대사관에 보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백만 달러의 현찰은 매뉴얼대로 항공기에 실어나갔거나 소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1975년 사이공에서 철수하면서 대사관 금고에 보관 중이던 600만 달러의 달러뭉치를 소각로에 태우고 베트남을 떠났다. 아프간 정부기관에서 보관 중이던 현찰은 공무원들이 들고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금융기관의 외환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찾아갔다.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은 현재 자금이 절실할 것이다. 탈레반의 병력은 6만명 정도라는 게 서방 측의 추산이다. 이들을 유지하는 것부터가 큰일이다. 제대로 보급하고 보상하지 않으면 민간인을 상대로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병력이다. 탈레반 지휘부가 이미지를 위해(본심은 아니더라도) 보복과 잔학행위와 줄이고 여성의 활동을 일시 허용하려고 해도 여성 차별과 학대에 익숙한 탈레반 대원들이 총기를 들고 진입한 도시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 탈레반 지도부는 카불 장악 뒤 대변인을 내세워 여성 공무원들에게 계속 일할 것을 요청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립 서비스를 하고 있다. 지난번 통치 당시 국제사회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당하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과 주둔의 명분 중 하나가 여성 권리 보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놓고 여성 학대를 하는 무장대원이나 부대가 나오고 아직 카불에 남아있는 해외 미디어가 이를 촬영하고 전 세계에 타전하면 시작부터 일이 꼬일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탈레반이 대오와 지휘 체계가 통일된 단일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민병대나 게릴라, 반군 세력이 느슨하게 연결된 일종의 ‘프랜차이즈’ 체제라는 추정도 강하다. 아프간 전역을 장악한 탈레반 최고지도부가 이들을 자신의 뜻대로 탈레반 병력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도 거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탈레반은 오랜 세월 함께 싸우다 숨진 사망자와 그 가족을 위한 보훈 자금도 필요하다. 아프간에선 오랫동안 많은 피가 흘렀다. 미국 브라운대 웟슨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2011년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철군을 발표한 지난 4월까지 엄청난 사망자를 냈다. 아프간 측에서 4만7245명의 민간인, 6만6000~6만9000명의 아프간 군경, 5만1000명 이상의 탈레반 무장대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합쳐서 17만1000~17만4000명에 이른다. 질병, 굶주림, 식수문제, 인프라 부족 등으로 숨진 간접 사망자를 포함하면 피해자는 최대 36만 명이 추가될 것으로 왓슨 연구소는 추정했다. 그 대부분이 탈레반이 보훈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앞서 1979~198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는 소련군에 맞서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5만6000명 이상이 숨졌다는 것이 파키스탄 정보당국의 추산이다. 일부 연구에선 15만~18만명의 무자헤딘이 숨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크다. 연구자에 따라 56만2000명에서 200만명까지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 500만명의 난민과 200만명의 국내 이주자들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방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탈레반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정부 보유 외환을 동결할 가능성이 크다. 이 외환은 현찰로 아프간 정부기관이나 국내 은행에 쌓인 게 아니라 글로벌 금융기관에 예치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군자금과 점령 초기 안정화 자금, 그리고 재건 자금으로 써야 할 탈레반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 것이다. 서방은 여성 인권 보호 등 가책을 조금 덜어주는 대가로 이 자금을 탈레반에 넘길 수도 있다. 사실 78억 달러는 아프간 경제 규모로 보면 엄청난 규모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탈레반이 재건과 경제 운용 능력이 있느냐이다. 그들이 전문인 종교로 이 문제를 풀 수는 없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1.08.21 18:55

8분 소요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 의장 “민주주의 토대는 인권‧자유 보장하는 보편 원리”

국제 이슈

21세기를 맞은 지 약 2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전 세계는 질병‧전쟁 등으로 시름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 등 전 세계를 둘러싼 질병과 전쟁의 위험은 여전해 보인다. 코로나19 재확산은 또 다시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고,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은 폭력적인 종교 극단주의의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종교계와 학계 등에선 자유‧평등 등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기본권의 중요성에 대한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초국가적 권리인 천부인권이란 보편 원리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정부의 초석이었던 이 보편 원리가 분열과 반목을 끊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지난 15일 유튜브 생중계 형식으로 개최된 ‘2021 글로벌피스컨벤션 본회의’에 참석한 종교계와 학계 등의 주요 인사는 인간의 보편 원리를 강조했다.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 의장은 기조연설에서 “평화 실현을 위한 인류의 공동 노력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기본권과 자유권의 근본으로 세우고, 가정에서부터 영적 혁명과 관계 교육을 하는 것이 인류가 직면한 난제 해결의 근본적 해법”이라고 지적했다. ‘한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라는 비전을 통해 천부인권의 주요 가치인 종교‧양심의 자유를 교육해 관계 개선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문 의장의 구상이다. 마르코 비니시오 세레조 전 과테말라 대통령도 특별연설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인간 존엄성의 가치에 대한 고려가 확대되면서 신(神) 아래 한 가족 비전이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 끊이지 않는 분쟁, 세계화의 두 얼굴 ━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선 세계화가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정반대로 반목과 분열을 야기하는 부작용도 낳았다고 평가했다.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강대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것. 여기에 인종, 민족, 종교, 문화 등에 대한 다소 급진적인 통합이 일부 집단의 분노를 야기해 민족주의, 폭력적 종교 극단주의 등으로 확산됐다는 지적이다. 실제 세계화 이후에도 민족주의, 종교 극단주의 등으로 촉발된 분쟁은 끊이질 않았다. 오히려 최근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으로 민족‧종교 등을 뿌리에 둔 분쟁이 더욱 확산될 것이란 우려가 많은 상황이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이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확산시킬 것이란 관측이다. 독일과 영국 정부 등은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에 대해 “국제 사회의 실패”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민족과 종교 등으로 인한 분쟁이 끊이질 않자, 일부 국가들이 첨단 기술 등을 활용해 자국민을 통제하는 문제도 불거졌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로 중국이 꼽힌다. 샘 브라운백 미국 국무부 국제종교자유 전 특임대사는 올해 글로벌피스컨벤션 본회의에서 “종교 자유와 관련해 중국이 가장 우려스럽다”며 “기술 발전으로 중국 내에서 감찰과 사살이 자행되고 있고, 특히 디지털 화폐 개발로 향후 중국 정부가 모든 상황을 감시하고 행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카트리나 란토스 스웨트 인권‧정의를 위한 란토스재단 대표는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집단 학살)로 볼 때 중국이 종교와 인권 자유 면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라고 주장했다. ━ 특정 종교‧과학에 대한 믿음 넘어 보편 원리 공유해야 문 의장은 이번 글로벌피스컨벤션 본회의에서 우리가 향후 어떤 원리와 가치 등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혼돈의 길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단순 특정 종교나 과학에 대한 맹목적 확신으로는 전 세계를 둘러싼 다양한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확고한 불가침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문구로 보편 원리에 근거한 정치 토대가 세워졌다”고 분석했다. 이어 현 시점에 이 같은 원칙에 기초하지 않는 세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 반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편 원리를 이해‧공유하기 위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중요성도 강조했다. 외교‧통일 전문가들은 보편 원리에 대한 공유가 경색된 남북 관계를 풀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이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담긴 천부인권이란 보편 원리와 맞닿아 있다는 논리다. 홍익인간을 근간으로 ‘코리안 드림’이란 비전을 공유해 남북통일을 꾀하지는 것이다. 탈북자 출신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한국열린사이버대 석좌교수)은 이번 본회의에서 “현재 북한은 정치경제적으로 분단 이래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며 경제뿐만 아니라 통치력 측면에서 상당한 위기라고 진단했다. 이어 “이 같은 상황 탓에 북한 인민들은 통일이 돼야 구제받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짙어지고 있다”며 “통일 비전인 코리안 드림을 가장 알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서인택 통일을실천하는사람들 공동상임대표도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있는데, 결국 우리 정체성은 홍익인간”이라며 “홍익인간을 뿌리에 둔 코리안 드림이란 비전이 많은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통일 방식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경영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비핵화 통일이라는 한반도 비전은 홍익인간의 이상을 전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시작점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 의장은 “보편 원리와 가치를 근본으로 통일된 나라의 꿈인 코리안 드림에 대해 말해왔다”며 “북한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지적했다. 또 “오랫동안 인위적으로 갈라진 한국인들이 보편 원리에 기초해 통일을 이룬다면 그 영향력은 엄청나게 대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2021.08.19 14:38

4분 소요
2020 도쿄올림픽 바이러스와 전쟁 시작…위기는 여전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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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연기됐던 ‘2020년 도쿄(東京)올림픽·패럴림픽’이 1년 연기 끝에 7월 23일 개막했다. 지난해 그리스에서 채화해 1년간 보관됐다가 올해 일본 47개 현을 돌았던 올림픽 성화가 도쿄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불을 밝혔다. 8월 8일까지 열전이 이어질 이번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악재, 일본의 아날로그 방역과 더딘 백신 접종, 준비 부족, 열기 저하 등 숱한 논란 끝에 개막했다는 점에서 어느 올림픽보다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대회는 난민 대표팀을 포함해 전 세계 206개 국가·조직이 동참하고 1만10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해 33개 종목에서 339개의 경기를 펼치게 된다. 도핑에서 문제가 지적됐던 러시아는 국가 이름으로의 참가가 금지돼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이름으로 개별 선수가 출전한다. 북한은 지난 4월 6일 코로나19를 이유로 불참을 발표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에 나오지 않으며, 도쿄2020올림픽에 불참하는 유일한 국가올림픽위원회(NOC)로 기록됐다. 올림픽이 통째로 연기돼 개최되는 것은 1896년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125년 만에 처음이다. 도쿄 2020패럴림픽은 8월 24일 개막해 9월 5일까지 열린다. 올림픽 1년 연기의 결정적인 이유였던 코로나19의 충격은 올림픽 행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도쿄올림픽과 패럴림픽의 개막식·폐막식의 네 행사는 ‘전진(MovingForward)’이라는 공통 주제를 담았다. 도쿄올림픽·패럴림픽조직위원회(TOCOG·이하 조직위)는 “우리가 지금까지 직면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장애물인 코로나바이러스 범유행 속에서 열리는 2020 도쿄올림픽과 패럴림픽은 지금까지의 대회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며 “스포츠가 가진 힘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개막식과 폐막식을 만들고자 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 코로나19 범유행, 1년 연기 끝에 개막 7월 23일의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주제는 ‘감동으로 하나가 된다(United byEmotion)’였다. 조직위는 “개막식을 통해 우리는 스포츠의 역할과 올림픽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모두 함께 해 온 노력에 대한 감사와 찬사를 전하는 동시에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주제의 의미를 설명했다. 조직위는 그 배경으로 “전 세계 사람들은 코로나19의 위협 속에서 지난 1년을 살아왔고, 2020 도쿄올림픽은 전례 없는 범유행의 한가운데에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지목했다. 8월 8일 치러질 2020 도쿄올림픽 폐막식 주제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Worlds we share)’로 잡았다. 조직위는 “폐막식 주제는 우리가 모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그 세계를 공유한다는 생각을 표현한다”며 “우리는 폐막식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이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렇게 2020 도쿄올림픽은 인류가 바이러스와 벌이는 싸움을 상징하는 대회가 됐다. 대회 자체가 1년 연기된 것부터, 올림픽 선수단·관계자를 거품 안에 넣는 것처럼 외부와 접촉할 수 없게 분리한다는 ‘버블 방역’ 등 초유의 일이 줄을 잇고 있다. 인류는 이런 상황에서도 올림픽을 결국 개최한 데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깔끔하지 못한 방역과 골판지 침대 등 부족한 대회 준비 등으로 지적이 끊임없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도쿄올림픽은 도전과 시행착오, 그리고 극복의 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이러스 말고도 올림픽을 위협하는 요인은 적지 않다. 국제 분쟁과 갈등이 그것이다. 올림픽 헌장에는 “올림픽 이념의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 보존을 추구하는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도모하기 위해 스포츠를 통해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상일뿐 현실은 올림픽이 열린다고 분쟁과 갈등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분쟁 감시·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정부기구(NGO)인 국제위기감시기구(ICR)의 로버트 맬리 전 회장은 ICR 웹사이트에서 기고한 글에서 세계 10대 분쟁·위기·긴장 지역을 제시했다. 아프가니스탄·예멘·에티오피아·부르키나파소·리비아·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한반도·카슈미르·베네수엘라·우크라이나 등이다. 이미 수시로 국제뉴스에 등장해온 지역들이다. 미국외교협회(CFR)는 현재 글로벌 분쟁·갈등·위기 상황을 더욱 자세하게 소개했다. CRR은 전 세계 갈등 지역을 ‘위기 상황’ ‘중대 상황’ ‘제한적 상황’으로 세분했다. 국제적 분쟁이나 내전, 갈등의 고조, 위기나 불안의 지역 또는 글로벌 확대 등 다양한 상황을 고루 반영했다. 미국 국익에 주는 영향을 기준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상황의 심각도를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 올림픽 시작됐지만, 글로벌 분쟁·갈등·위기는 심화 CFR은 위기 상황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남중국해 영토 분쟁, 동중국해 긴장, 북한 위기, 미국과 이란의 대치의 다섯 가지를 꼽았다. 글로벌 5대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남중국해와 동중국해가 중국과 관련이 있다.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이 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 벌이는 섬과 바다의 영유권 다툼이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2016년 7월 중국이 이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인공섬을 건설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했지만, 중국은 마이동풍이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를 앞세워 여기에 개입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견제 차원이기도 하다. 이 바다는 한국과 일본에도 중요한 에너지 수송로이기도 하다. 동중국해 분쟁은 일본이 실효 지배하는 센카쿠 열도(尖閣列島·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와 관련한 갈등을 가리킨다. 2020 올림픽이 열리는 도쿄에서 멀지 않은 바다는 이처럼 긴장 상황이다. CFR은 중대 상황으로는 12가지를 추렸다. 시리아 내전, 이라크와 레바논의 정치적 불안정, 이집트의 불안정, 터키와 쿠르드 무장조직의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 절반이 중동에 집중됐다. 지리적으로 중동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은 이슬람 무장조직의 활동과 인도와의 분쟁 등 2가지 문제를 동시에 안았다. 남미는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범죄와의 전쟁, 베네수엘라의 불안정 등 2가지가 제시됐다. 유럽에선 러시아가 개입한 우크라이나 분쟁이, 아프리카에는 나이지리아에서 학생들을 납치하고 인신매매하며 주민들을 학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보코하람의 폭력이 각각 꼽혔다. 미국의 국익에 대한 영향을 제한적이지만 현지 주민의 고통은 상당한 분쟁·갈등도 10가지가 거론됐다. 중동에선 리비아 내전과 예멘 내전(국제전으로 비화)이 꼽혔다. 유럽에선 카프카스 지역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벌이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들어갔다. 아시아에선 미얀마의 로힝야 위기가 제시됐다. 아프리카에선 말리 지역의 불안정,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민주콩고공화국(DRC)의 폭력, 소말리아 극단주의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인 알샤바브의 발호, 에티오피아 분쟁, 남수단 내전이 6가지가 포함됐다. 대부분 지금도 여전히 분쟁이 벌어지거나 무장단체 조직원이 주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지역이다. 일시 총성이 멎었어도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배한 곳도 있다. 올림픽이 열리는 상황에도 세계 곳곳에 위기가 상존하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 살상이 벌어지지 모르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분쟁이나 갈등과 관련한 이런 지적들은 올림픽이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올림픽 헌장은 인류의 이상을 보여주는 문구일 뿐이며, 현실에선 여전히 갈등과 싸움이 그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고대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사실을 되새김질해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고대 올림픽은 형식적으로는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행사였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력과 국력이 좌우하는 근육질 행사였다. 당연히 이상은 훌륭했다. 기원전 776년에 시작돼 기원후 394년까지 1000년 이상 계속됐던 고대 올림픽의 주관도시인 엘리스는 개막 전 그리스의 각 도시 국가에 3명의 사자를 보냈다. 올림픽 기간 중 전쟁을 중지하고 재판은 연기하며 사형은 미루도록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부정을 타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처럼 고대 올림픽은 스포츠 행사라기보다 신을 모시는 종교 제전에 가까웠다. 선수들은 도시국가 엘리스의 성소인 올림피아에 모여 경기를 치렀다. 엘리스에는 높이 12m의 위압적인 제우스신 석상이 올림픽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 국내와 국제 정치 대결장이었던 올림픽 하지만 고대 그리스 세계도 현실은 종교나 도덕이 아닌 힘이 지배하는 무정부 상태였다. 고대 군사 강국인 스파르타가 전쟁 금지 관례를 어겨 벌금과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벌금을 내지 않고 넘어갔다. 창과 방패를 들고 가공할 전투력을 지닌 스파르타의 경보병을 두려워한 다른 도시 국가들은 누구도 이를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무장한 스파르타 전사들을 야단치고 벌금을 받아내기란 어지간한 배짱으론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이상보다 힘이 좌우하는 국제정치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국제정치는 인간 본성의 하나인 지배욕을 반영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올림픽 기간 중 전쟁은 중지해도 정쟁을 자제했다는 기록이 없다. 올림픽은 국내와 국제 정치의 대결장이 됐다. 선수들의 성적에 따라 관련한 정치인의 위상과 인기가 단박에 오르내리는 것은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 맞붙었다가 진 도시는 이긴 도시에 한참 동안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패배한 도시는 우울증을 겪어야 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올림픽에서도 문제가 되는 아마추어리즘이 고대 올림픽에서도 역시 문제가 됐다. 근대 올림픽을 제안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고대 올림픽이 아마추어리즘의 제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는 두둑한 상금과 격려금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는 근대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올림픽 우승자는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연애와 결혼은 물론 경제활동과 심지어 정치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처음엔 엄격한 아마추어리즘을 내걸었던 근대 올림픽이 현실을 고려해 축구나 야구, 골프 등 여러 종목에서 프로 선수의 참가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마추어 선수라고 돈과 거리가 먼 가난한 스포츠 수도승은 아니다. 그래도 종교행사였으니 고대 올림픽에선 경기를 정정당당하게 했을 것으로 여긴다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올림포스에 반칙 선수들의 벌금을 모아두는 자네스라는 상자를 만들어 둔 것을 보면 반칙이 수시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심판이나 선수를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는 것도 수시로 벌어졌다. 근대 올림픽에선 국적을 바꿔 뛰는 경우가 왕왕 있어 세부 규정까지 마련됐다. 하지만 이런 일은 사실 고대 올림픽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소타데스라는 장거리 경주 선수는 출신 도시인 크레타 소속으로 출전해 우승했으나 다음 경기에선 다른 도시국가 에페스로 국적을 바꿔 출전했다. 두둑한 사례를 받고 움직였을 것이다. 스포츠와 돈의 관계는 역사적인 뿌리가 깊다. 고대 올림픽도 근대 올림픽도 해결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다. 올림픽이 더욱 성숙해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고대 올림픽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부정이나 돈 때문이 아니다. 고대 올림픽은 종교로 시작해 종교로 막을 내렸다. 그리스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347~395년, 재위 379~395년)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국교로 삼은 게 계기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니 이교도 행사인 그리스의 올림픽은 폐지됐다. 이집트에선 신전이 폐쇄되고 사제들이 쫓겨나면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맥이 끊어지면서 하나의 문화가 단절됐다. 이런 고대 이집트의 비극과 비교하면 고대 그리스 세계의 고대 올림픽 폐지는 그나마 평화로운 편이었다. 도쿄올림픽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이런 형편에도 IOC가 중계료 수입 때문에 대회를 강행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 개인의 안전과 명예 사이에서 고민하는 프로 선수들의 참가와 불참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도전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것인지 세계가 도쿄를 주시하고 있다. 7월 23일 개막해 8월 8일까지 17일동안 열전이 벌어질 도쿄 2020 올림픽은 인류가 얼마나 더 성숙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축제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07.24 18:55

8분 소요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 교황의 세계평화 순례와 남북 평화] 이라크 찾아간 교황… 다음 방문지는 북한으로
교황청의 중재외교책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물꼬 터보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3월 5~8일 이라크 방문은 많은 우려에도 성공적이었다. 교황청의 공보를 담당하는 공식 매체인 바티칸 뉴스에 따르면 교황은 3월 10일 수요일 일반 알현 행사에서 이라크 내 이슬람 시아파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티니를 만난 것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고 말했다.교황은 84세라는 고령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테러 우려와 치안 불안이라는 3중 악재를 뚫고 나흘간의 이라크 방문을 무사히 마쳤다. 그는 예수의 사도인 성 베드로에서 시작해 지난 2000년 동안 266대까지 이어진 교황 가운데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 땅을 밟았다.이라크는 인구의 99%가 무슬림이고 기독교도가 1%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라크는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이 시작된 곳이다.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 받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문명 초기 국가인 수메르의 우르 출신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종교·문화적 뿌리가 같아 ‘아브라함 종교’로 불리는 이 세 종교의 근원지다. 이라크는 ‘역사와 종교의 땅’인 셈이다.이라크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바빌로니아와 신바빌로니아, 그리고 아시리아가 명멸했으며 페르시아의 지배 지역이기도 했다. 신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한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끌려와 유배 생활을 하다 이를 정복한 페르시아에 의해 가나안으로 귀향하기도 한 지역이다. 622년 이슬람이 등장한 뒤에도 다양한 기독교 분파가 신앙을 지켜온 지역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로 평가 받는다. 북부 모술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요나와 다니엘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교황은 10일 행사에서 “주님이 내게 이라크 방문을 허락해 요한 바오로 2세의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전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년, 재임 1978~2005년) 당시 이라크 방문을 추진했으나 안전 문제로 무산됐음을 지적한 것이다. 전쟁과 테러의 땅인 이라크 방문은 교황청의 오랜 숙제였음을 재확인한 발언이다. 교황은 이라크 방문 기간 중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은 이라크 기독교 공동체를 위로하고 종교간 대화와 공존, 그리고 평화를 강조했다.3월 5일 이라크의 바그다드 국제공항에 도착해 무스타파 알카드히미 총리의 영접을 받은 교황은 이날 바흐람 살레 대통령을 만나는 등 바티칸 국가원수로서 일정을 가장 먼저 소화했다. 이어 바그다드에 있는 동방 가톨릭 교회를 방문했다. 2003년만 해도 약 150만 명에 이르던 이라크의 기독교인은 내전과 테러 속에서 최근 약 4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해외로 떠난 사람이 많다. 교황은 이들을 위로하고 고난 속에서 지켜온 신앙에 경의를 표했다. ━ 타 종교 지도자들 만나 “우린 같은 뿌리 한 형제” 다음날인 3월 6일은 종교간 대화와 공존을 모색한 날이었다.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를 방문해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와 만났다. 역사적인 회동이었다. 교황은 알시스타니에게 ‘평화로운 공존’을 강조했다. 나자프는 시아파에서 첫 이맘(이슬람 지도자)으로 여기는 알리의 무덤이 있는 도시다. 알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시아파 신앙의 핵심인 후세인의 부친이다. 시아파가 무함마드의 유일 합법 후계자로 여기는 인물인데 우마이야 왕조 4대 칼리프를 지내다 암살됐다.교황은 이날 근처에 있는 고대 수메르의 도시 우르의 유적지를 찾았다. 우르는 기원전 3800년쯤에 처음 건설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도시로 아브라함이 기원전 2166년쯤에 태어난 도시다. 우르 유적에 있는 텔엘무카야르라는 언덕을 아브라함이 태어난 생가로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구약성서와 쿠란에 이름과 신앙이 기록됐다.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 그를 조상으로 여긴다.유대교에선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유일신을 믿은 인물로 본다. 기독교에서도 같은 이유로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이슬람에선 이브라힘으로 부르는 그를 아담에서 무함마드에 이르는 25명의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특히 진실한 믿음의 상징으로 여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아브라함을 기원으로 하는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서로 공통적인 신앙과 철학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 종교를 중심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다른 종교들을 합쳐 ‘아브라함 종교’로 부른다.따라서 교황이 우르를 찾는 것은 가톨릭 수장으로서 신앙의 근원을 따져보는 의미가 있다. 뿌리가 같은 아브라함 종교끼리 서로 갈등하지 말고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서로 평화와 공존을 도모하자고 호소하는 의미가 크다. 교황은 우르 유적에 있는 아브라함의 생가 터(추정)에서 이슬람을 비롯한 이라크의 타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교황은 이들과 만나 종교 화합을 강조하는 생사를 벌이며, 이라크에서 테러와 박해로 갈수록 줄어가는 기독교 공동체와 평화롭게 공존해줄 것을 당부한 셈이다.교황의 이라크 방문에서 하이라이트는 7일 이라크 북부 도시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고 신앙을 지킨 교인들과 전쟁의 고통을 겪은 현지 주민을 위로한 행사일 것이다. 가톨릭 세계의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에 무게를 실었기 때문이다.이날 아침 북부 쿠르드 자치구의 아르빌에서 헬기를 타고 니나와 주에 있는 이 나라 제2의 도시이자 북부 최대 도시인 모술에 도착했다. 니나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고대국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의 현대 발음이다. 모술의 구시가지 중심지인 모술 광장의 주변에는 중동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2015~2017년 이 도시를 점령하는 동안 파괴한 교회 4곳이 위치하고 있다. 당시 니나와 주에 살던 기독교도 수십만 명은 생존을 위해 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교황은 그런 비극의 현장을 찾아 생존 교인들과 현지 종교지도자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호소했다.교황은 일부가 파괴된 모술의 알타헤라 가톨릭 성당 앞에서 “문명의 요람이었던 이 나라가 그토록 야만스러운 공격으로 고대 예배당이 파괴되고 수많은 무슬림과 기독교인, 야지디족 등이 강제 이주되고 살해됐다”고 지적하며 피해를 위로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는 형제애가 형제살해죄 보다 더 오래 가고, 희망이 증오보다 더 강력하며, 평화가 전쟁보다 더 위력적임을 재확인한다”고 희망을 강조했다. ━ 종교 갈등 빚는 박해 지역 찾아가 희망 북돋아 이 연설은 극단주의자의 타종교 박해는 기독교도나 야지디족에겐 물론이고 무슬림에게도 피해임을 강조했다. 야지디족은 2014년부터 IS로부터 박해 받고 학살됐으며 수많은 여성이 납치돼 성노예가 되는 고난을 겪었다.교황은 모술의 교회 파괴 현장에서 30㎞쯤 떨어진 이라크 북부의 기독교 도시인 카라코시의 알타헤라 가톨릭 교회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했다. 이곳은 이라크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기독교 마을이다. 역시 IS 점령 기간에 교회는 파괴되고 주민들은 박해를 받았다.교황은 이어 아르빌의 축구 경기장에서 수천 명이 참석한 대규모 미사를 집전하고 “여러분과 함께하면서 슬픔과 상실의 목소리와 동시에 희망과 위로의 목소리도 들었다”며 “이라크는 나의 마음 속에 항상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교황은 아르빌 미사 뒤 2015년 9월 터키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그리스 코스 섬을 향해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뒤집히면서 익사한 시리아 난민 어린이 알란 쿠르디(당시 3세)의 부친 압둘라 쿠르디를 만나 위로했다. 교황은 이날 가족을 잃은 아버지의 고통과 슬픔에 귀를 기울였다고 바티칸 뉴스는 전했다. 교황은 이날 바그다드로 이동한 뒤 하루를 묵고 이튿날인 8일 바흐람 살레 이라크 대통령 내외의 환송 속에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떠나 로마로 향했다. 교황은 자신들을 환영하고 여행을 지원한 이라크에 대해 10일 “이라크인들을 통해 평화와 형제애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며 “이라크 국민은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으며 자신들의 존엄을 재발견할 권리가 있다”고 덕담을 했다. 그러면서 그런 이라크가 겪어온 비극과 관련해 반전의 목소리를 높였다.교황은 “무엇이 바그다드를 파괴했나. 그것은 전쟁”이라며 “전쟁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모습을 바꾸면서 지금도 계속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전쟁이 아니며, 무기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무기가 아니다”라며 “그 대답은 바로 형제애”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이라크는 물론 분쟁 중인 많은 지역,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가 직면한 도전”이라고 강조했다.교황이 이처럼 전쟁과 갈등의 현장을 찾아 증오를 거두고 평화와 공존을 추구할 것을 호소하는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이래 초지일관 추구해온 길이다. 그간 행적과 이번 일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77세였던 2013년 3월 13일 즉위한 뒤로 전 세계를 다니며 사랑과 관용, 그리고 공존을 역설했다. ━ 전쟁 현장에서 인간성 말살 지적 평화·공존 호소 교황의 주요 방문국을 살펴보면 가톨릭이나 기독교 국가는 물론 이슬람·불교 국가와 종교가 사실상 사라져가는 일당 독재 공산국가까지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교황은 가톨릭 지도자를 넘어 세계평화와 공존, 화해와 소통을 추구한 글로벌 지도자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교황의 첫 해외 방문은 전임 베네딕토 16세 시절에 약속이 됐던 브라질을 2013년 처음 방문한 것이 시작이었다. 2014년엔 이스라엘·요르단·팔레스타인을 찾았다. 기독교도가 소수인 지역이다. 그 해 한국에 이어 알바니아와 프랑스, 그리고 터키를 방문했다. 알바니아는 테레사 수녀를 배출했지만 무슬림이 다수이고 기독교도가 소수다. 터키는 동방정교 이스탄불 대주교가 자리 잡고 있지만 주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교황의 종교간 대화와 공존 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5년엔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와 가톨릭 국가(남부에는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필리핀에 이어, 무슬림인 보스니아인과 동방정교도인 세르비아인, 그리고 가톨릭인 크로아티아인이 1990년대에 내전을 벌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찾았다. 미국을 찾으면서 공산국가인 쿠바도 방문했다. 쿠바는 2016년 다시 방문했으며, 그 해 카프카스 지역의 정교 국가 조지아와 무슬림 국가 아제르바이잔도 찾았다.2017년에는 다수 무슬림과 소수 곱트 기독교도가 공존하는 이집트에 이어 로힝야족 추방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미얀마와 70만 명 이상의 로힝야 난민을 받은 이웃 방글라데시를 찾았다. 정치적인 발언은 없었지만 방문 자체로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됐을 것이다. 교황의 방문 자체가 평화와 공존에 대한 강력한 압박이 되고 있다.2019년에는 무슬림 국가지만 수많은 다종교·다문화 외국인 이주민을 품고 있는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를 찾아 미사를 집전했다. UAE는 마침 2019년을 ‘관용의 해’로 선포하고 다종교·다문화의 공존을 강조했다. 교황은 그 해 또 다른 무슬림 국가인 모로코도 방문했다. 그 해 불교국가인 태국과 기독교 인구가 희박한 일본도 찾았다.이처럼 서로 다른 종교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서로 공존과 평화를 추구하자는 것이 바로 교황의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의 북한 방문에 새로운 기대가 모아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8년 10월 교황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 요청 의사를 전달받은 적이 있다. 당시 교황은 “공식적으로 초청하면 갈 수 있다”고 화답했다. 교황이 만일 방북을 한다면 한반도와 북한이 전 세계의 주목을 다시 한 번 받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을 넘어서는 강력한 이미지의 이벤트가 될 수 있다. 북핵 문제도 해결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지난 3월 11일 이백만 전 주교황청 대사는 교황의 중재외교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에 기여할 수 있다며 교황의 방북 성사를 위해 정부가 외교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전 대사는 이날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종교분과위원회 회의에 외부 발제자로 “교황은 한국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북미관계 개선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황청의 외교적 위상을 활용해 교황청의 중재외교 정책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에 접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교황의 북한 방문은 이를 위한 핵심 열쇠라는 이야기다. ━ 교황의 북한 방문 추진하려는 물밑 외교 시동 문제도 적지 않다. 교황청은 유엔 회원국 가운데 중국과 북한만 승인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과 함께 유엔의 옵저버 회원국인 바티칸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회원국을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라크와도 1930년대에 대표를 파견해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라크전 당시 유일하게 현지에 공관을 유지했다.바티칸은 중국 대신 종교 자유가 있는 대만을 승인하고 있으며,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과는 공식 관계가 없다. 하지만 공식 관계가 없다고 방문하지 않을 교황이 아니다. 보안문제에다 코로나19까지 겹쳐도 이라크까지 다녀온 교황이다. 명분만 있으면 얼마든지 북한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명분과 계기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마침 미국에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서 새로운 대중·대북 정책의 가동을 시작하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나쁘지 않다. 오는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이용해 교황청에 방북 의사를 타진할 수 있을 것이다. 백신의 위력으로 행사가 대면으로 이뤄지면 문 대통령이 교황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다. 코로나19를 이유로 외국의 원조물자도 받지 않겠다는 북한을 설득하는 게 가장 큰 관건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1.03.14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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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란, 드론 vs 미사일 정치 전쟁] 트럼프와 로하니는 왜 한 발짝 물러섰나

항공

대선 앞둔 트럼프, 경제난 이란 모두에게 부담… 군사적 조치 아닌 정치적·상징적 행동 선택 2019년 말과 2020년 초입에 전 세계를 긴장에 몰아넣으며 숨 가쁘게 진행되던 미국과 이란의 대립이 일단 파국을 면하고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월 8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이란이 전날 이라크 내 미군 기지를 공격한 것과 관련해 군사력 사용을 원치 않는다고 한 발짝 물러서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사상자가 없었다”고 강조하면서 군사적 재보복 대신 즉각적인 대이란 추가 경제제재 방침을 밝혔다. 이로써 중동 지역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주목할 점은 트럼프가 이날 이란에 강온 양면 메시지를 동시에 보냈다는 점이다. 이란과 새로운 핵 합의를 추진하겠으며 이를 받아들이면 이란에 위대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 트럼프는 이이란과 맺은 핵합의에서 2018년 5월 8일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앞서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5년(트럼프는 이날 2013년이라고 말실수를 함) 7월 1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독일 6개국(P5+1)과 손잡고 이란과 핵합의에 동의한 바 있다. 이후 트럼프는 이란 핵사찰 범위를 이란 전역으로 확대하고, 탄도미사일도 규제하며, 2025년 10월 18일까지 대이란 경제제재를 모두 푼다는 규정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그 뒤 대이란 경제제재를 재개해 이란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으며, 갈등은 갈수록 증폭됐다. ━ IS 퇴치에 협력하다가 미국 핵합의 탈퇴로 대립 갈등의 폭발점은 지난 1월 3일 이라크의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쿠드스군 사령관이 숨진 사건이다. 쿠드스군은 정규군과 더불어 이란이 운영하는 2개의 군대 중 하나인 혁명수비대 산하 조직이다. 중동 내에서 해외 정보 수집과 파병, 친이란 민병대 훈련 등을 주로 맡고 있다. 아랍어로 쿠드스, 이란어로 고드스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루살렘 수복을 노린다는 의미로 읽힌다. 쿠드스군은 이름대로 반미와 반이스라엘 해외 작전을 총괄한다. 그동안 시리아 정부군,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파인 하마스, 예멘의 후티족 반군,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등을 훈련하고 지원해왔다. 이 조직들은 하마스를 제외하고는 이슬람 시아파 조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란은 쿠드스군의 활동을 통해 이란에서 중동 시아파 지역을 연결해 지중해 지역까지 잇는 ‘시아파 초승달’ 벨트를 만들려고 한다는 분석이 있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한 뒤로는 적은 비용으로 차량을 공격할 수 있는 급조 폭발물(IED)을 이라크 민병대에 대량으로 공급해 미군을 괴롭혔다. IED는 이라크에서 미군 사망의 가장 큰 요인이 됐다.이런 쿠드스군을 1997~98년 무렵부터 이끌어온 솔레이마니는 핵합의가 이뤄진 2015년부터 정보·군사 분야에서 미국에 협조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거점 정보를 제공하고 이라크에서 미군 및 이라크군과 함께 극단주의 무장조직인 이슬람국가(IS) 퇴치 작전에 병력을 보냈다. 미국과 이란이 공동의 적인 IS 퇴치를 위해 협력한 것이다.IS는 이슬람 수니파로만 이뤄진 극단주의 무장조직으로 시아파 국가인 이란에 적대적이다. 이들은 기독교도나 아지드교 등 중동 내 소수종파 신앙인, 서양인들과 함께 시아파 무슬림(이슬람 신자)도 무참히 살해해왔다. 아프가니스탄 다수 종파인 수니파(약 80%)의 파슈툰족이 주축인 탈레반도 자국 내 이슬람 소수 종파인 시아파(약 19%)를 따르는 서북부 하자라족을 탄압하면서 갈등을 빚어왔다. IS와 탈레반에 관해서는 이란은 미국과 협력할 공간이 있는 셈이다.하지만 2018년 미국이 핵합의에서 단독으로 탈퇴하고 대이란 경제제재를 재개하자 양국은 협력 대신 대립의 길을 걷게 됐다. 급기야 이란은 지난해 미군이 주둔한 이라크에서 카타이브 헤즈볼라를 비롯한 친이란 민병대를 동원해 미군 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난 12월 27일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공군기지에서 미국인 민간군사요원 1명이 사망하고 미군 여러 명이 부상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미군은 미국인 사망자가 나온 데 대한 보복으로 12월 29일 이라크 내 카타이브 헤즈볼라 기지를 공습하고 이 과정에서 민병대 29명이 숨졌다. 카타이브 헤즈볼라는 12월 31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을 에워싸고 시위와 방화를 했으며 일부는 담을 넘어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미국 대사관 진입 시도 장면은 미국인에게 불쾌한 기억을 소환했다. 1979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대학생들이 미국대사관 담을 넘어 내부로 진입해 66명을 인질로 잡고 444일간 버틴 사건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결국 1월 3일 미국의 솔레이마니 공격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다.미국-이란 갈등이 화근이 된 이란 핵합의는 공식명칭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으로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대이란 경제제재를 푼다는 내용이다. 트럼프가 핵 합의에서 탈퇴하고 경제제재를 복구하면서 한국의 이란산 석유 수입도 중지됐다. 트럼프는 이날 “이란이 오바마 전 대통령과 합의를 통해 더욱 큰 위협이 됐다”며 전임자를 강력 비난하고 자신의 합의 파기가 정당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솔레이마니가 수많은 미군의 목숨을 빼앗은 인물이고 추가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공격한 조치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란에 대한 일련의 대응이 올해 11월로 예정된 대선에서 재선을 염두에 둔 조치임을 숨기지 않은 셈이다. ━ 정치·경제적으로 전쟁 치를 형편 안되는 이란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기지 두 곳에 대한 미사일 발사로 솔레이마니 사망에 대한 보복을 사실상 정리했다. 보복을 이렇게 간단히 마무리한 배경은 경제난으로 도저히 확전을 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핵합의가 가동해 일부 경제제재가 풀렸던 2017년 3.8%이던 경제성장률은 2018년 추정치가 -4.9%로 악화했으며 2019년 추정치는 -8.7%로 더욱 떨어졌다. 물가도 40% 정도 올랐다.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특히 의약품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이처럼 이란은 경제가 심하게 뒷걸음치는 상태에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국가 재정도 충분하지 못해 확전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전비 마련조차 어려울 전망이다. 이란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 원유 매장량이 3위인 산유국인데다 중동에서 드물게 자동차 생산까지 가능한 산업국가다. 하지만 오랜 제재로 경제적 활기가 떨어진 데다 화폐가치도 떨어져 국민 생활이 힘들고 정부 재정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란 정부는 재정 부담을 줄이려고 지난해 11월 1일 석유 보조금을 전격 삭감했으며 이로써 석유 값이 L당 1만 리알(약 100원)에서 1만5000리알(약 150원)로 50% 인상됐다. 그러자 수도 테헤란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사실 이런 상황에서 1월 3일 솔레이마니가 바그다드에서 드론 공격으로 사망한 이란 정부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담은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동시에 왔을 것이다. 정치적인 부담은 미국의 솔레이마니 공격에 대한 이란 국민의 반응이다. 사실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혁명수비대에 들어가고 1990~88년 벌어졌던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솔레이마니는 국내 정치판에서 강경파에 속한다. 학생 시위가 벌어지면 혁명 수호를 내세우며 정부에 강경 진압을 주문해왔다. 지난해 발생한 시위에서는 진압과정에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서방 보도가 나왔는데, 그 배경에 솔레이마니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란에서 솔레이마니의 인기는 하락세였는데, 그러나 미국 공격으로 숨지면서 분위기가 역전됐다.솔레이마니 사망 직후인 1월 4일 그의 집을 찾아 유족을 만난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누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느냐”는 딸의 질문에 “모든 이란 국민”이라고 대답했다. 이 장면은 이란 국영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됐다. 솔레이마니 복수가 국가적인 과제가 되는 순간이다.게다가 그의 장례식에 모인 군중의 규모와 “미국에 죽음을”을 외치며 복수를 요구하는 열기도 뜨거웠다. 특히 1월 6일 테헤란의 어저디(자유) 탑에는 당국 추산 100만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이곳은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시민이 모여 군주제 폐지를 외쳤던 민주화 성지다. 현대 이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소다. 복수를 요구하는 군중 앞에 이란 당국은 신속히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미루면 대중의 분노가 언제 지도층으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이란의 보복 공격은 대국민 메시지 효과 노린 것 여기에는 이란 만의 속사정도 있다. 이란은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과 국회 위에 시아파 사제가 최고지도자로서 군림하고 통치하는 신정체제다. 이슬람혁명 당시 민주화세력이 종교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탄생한 독특한 체제다. 체제의 상층부에서 기득권층을 이루며 특권을 누려왔던 종교 세력은 최근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국민의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경 조치를 주도해 비난을 받았던 솔레이마니가 사망하자 이란 당국은 그를 순교자로 만들어 유족과 국민에 대응하려 한 것으로 분석된다.1월 5일 이란 서부에 도착한 솔레이마니의 유해는 이날 동부의 시아파 성지인 마슈하드를 거쳐 6일 북부의 수도 테헤란과 시아파 순례지인 쿰을 돌고 7일 안장을 위해 고향인 동남부 케르만에 옮겨졌다. 이란을 한 바퀴 도는 일정에 가는 곳마다 군중이 모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강경파 군인 술레이마니는 이란과 이슬람 시아파의 ‘순교자’가 됐다. 일종의 상징 정치다.그 뒤 6일 ‘순교자 솔레이마니’라는 작전명으로 이라크 내 미군기지 두 곳에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보복 조치를 취했다. 미사일 발사 시간도 솔레이마니가 바그다드 공항에서 피습 당한 새벽 1시에 맞췄다. 군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이란은 이라크에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려줬다. 이라크 측이 미국에 이를 알려 기지 내 미군이 미리 대피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이란이 솔레이마니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미사일 발사라는 수단을 동원한 것은 전면전까지 염두에 둔 치밀한 선제공격이라기보다 다분히 정치적인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란 당국이 신속한 보복을 결정한 배경은 결국 국내 정치적인 압박으로 보인다.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장은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이니가 국가최고위원회에 이례적으로 참석해 상응하는 보복을, 미국의 국가이익이 걸린 곳에, 이란이 직접 한다는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며 “이번 공격은 이런 지시에 맞춰 이뤄진 것”이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이란이 미국에 대응할 물리적 능력은 없다”고 지적했다. 안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란 당국이 민심과 반미 정서를 위무하기 위해서 반격의 수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안 교수는 “이번 공격은 국제사회나 워싱턴에 보내는 것이라기보다 대국민 메시지 효과가 더 크다”고 풀이했다.이란의 혁명수비대는 미국이 반격하면 다음 표적은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나 이스라엘의 북부 도시 하이파가 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물론 이란은 여기까지 날릴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UAE나 이스라엘은 패트리엇 미사일 등 촘촘한 방공망을 설치하고 있고 보복 수단도 다양하다. 두 나라에 대한 공격은 전면전이라는 불을 향해 섶을 지고 뛰어드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엄포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발언이다. 이란의 입을 보거나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이란이 처한 땅바닥(경제와 정치 현실)을 보는 것이 정세 판단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 ‘군비 절감’ 외쳤던 트럼프에게 확전은 이율배반 눈여겨 볼 점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미국이라고 이란을 군사적으로 쉽게 유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 MSNBC에 따르면 이란 주변 국가인 아프가니스탄(1만4000명)·카타르(1만3000명)·쿠웨이트(1만3000명)·바레인(7000명)·이라크(5200명)·아랍에미리트(UAE·5000명)·요르단(2795명)·시리아(2000명) 등에 현재 7만 명 가까운 미군이 주둔한다.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담당하는 미군 중부사령부(USCENTCOM) 산하 해외 파병 병력이다. 여기에 사태 직후 신속대응군인 82공수사단의 일부 병력 등 5000명 이상이 추가로 중동으로 향했다.하지만 이 정도 병력으로 전면전은 어림도 없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 12만 명과 영국·호주·폴란드 등에서 모두 14만 명의 원정군과 7만 명의 쿠르드족 민병대가 참전했다. 주한미군에서도 전차와 아파치 헬기 등 전투장비와 헌병을 주축으로 하는 병력을 차출해갔다. 미국이 현재의 2배에 이르는 병력을 중동에 보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게다가 트럼프는 엄청난 비용이 드는 전쟁에는 줄곧 반대 입장을 해왔다.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군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파병 비용을 절약한다고 외쳐왔던 트럼프가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전면전으로 뛰어드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재선에 도움은커녕 거짓말을 일삼고 세금을 마구 쓴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게다가 현재 탄핵 문제가 걸려 있는 트럼프가 미 의회의 개전 동의나 전쟁 예산을 얻기는 쉽지 않을 상황이다. 민주당 소속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전쟁 예산에 선을 그었다.전쟁을 치르려면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심리적으로 동맹국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2018년 이란 핵합의에서 홀로 탈퇴하면서 독일·프랑스·영국의 반발을 샀다. 지난해엔 프랑스 등 나토 동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서 미군을 돕던 쿠르드족을 방치하고 병력을 철수했다. 그런 트럼프가 서방 동맹국에게 파병을 요청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이 되는 게 급할 때 얼마나 문제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상황이다. 이란과 미국은 계속되는 갈등과 정치적 미봉으로 외교와 군사 분야의 세계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전 세계를 잔뜩 긴장시키면서 말이다. 2020년 새해 벽두에 벌어진 미국과 이란 사태는 미봉됐을 뿐 화근이 제거되지는 않았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1.12 16:25

9분 소요
“우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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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지도자 바그다디와 대변인 사살… 조직 재결집 우려 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월 26일과 27일 시리아에서 펼쳐진 잇따른 미군 특수부대의 작전으로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와 그의 오른팔로 알려진 대변인 아부 알하산 알무하지르를 제거했다고 발표했다. 며칠 뒤 IS도 지도부가 ‘순교’했다고 확인했다.IS의 입장을 대변하는 아마크 통신에 따르면 IS는 10월 31일 음성 성명을 통해 그런 사실을 전하며, 새로운 ‘칼리프’(이슬람 공동체의 신정일치 지도자)로 아부 이브라힘 알하셰미 알쿠라이시를 선출했다고 밝혔다. 음성 성명은 새 대변인 아부 함자 알쿠라이시가 발표했다.인터넷을 통해 유포된 음성 성명에서 IS는 조직의 지도부 격인 슈라위원회와 원로들이 쿠라이시를 후계자로 선출했음을 알리며 미국을 향해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은 우리 지도부의 죽음을 즐거워하지 말라. 우리는 중동에 한정된 조직이 아니며 동서에 걸쳐 건재하고, 우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아울러 IS는 “바그다디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9월)에서 말한 소명을 따라야 한다”며 “우리의 슈라위원회가 순교한 바그다디의 유지를 받들고 새로운 칼리프 쿠라이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라고 선언했다. 바그다디는 9월 음성 메시지에서 조직의 확장과 이라크와 시리아에 수감된 조직원의 석방, 서방에 대한 ‘순교 사명’을 주장했다.쿠라이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IS 전문가인 아이만 알타미미 스완지대학 연구원은 로이터 통신에 “쿠라이시가 하지 압둘라로 알려진 IS 고위 인물일 수 있다”라며 “미국 국무부가 하지 압둘라를 바그다디의 후계자로 점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쿠라이시 부족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하셰미 가문이 속했던 아랍 부족으로 7세기 이슬람의 발상지 메카를 관장했다. IS는 새 지도자의 성씨를 통해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점을 내세워 추종자들에게 ‘칼리프’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바그다디도 IS의 우두머리가 된 뒤 종교적 정통성을 부각하도록 개명했다.바그다디는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 주 바리샤 마을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작전으로 쫓기던 중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에서 출발해 자칭 ‘IS 칼리프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국적과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지역 정보 관리는 뉴스위크에 강경파 이슬람 성직자였던 바그다디의 역할이 대부분 상징적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바그다디는 명목상의 수장이었다. 작전이나 조직의 일상적인 관리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그렇게 하라’ 또는 ‘그렇게 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을 뿐 작전 기획은 전혀 하지 않았다.”미군 작전 중 바그다디의 은신처에서 발생한 상황의 세부 사항이 완전히 밝혀지진 않았다. 아울러 IS의 수장인 그가 경쟁 무장단체였던 알카에다 연계 조직의 근거지였던 곳에 숨어 있었던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다. 원래 그곳은 하야트 타리르 알-샴(HTS)이 장악한 지역이었다(현재는 알카에다 연계 조직인 후라스 알딘의 거점으로 알려졌다). HTS는 처음엔 바그다디의 측근이었던 아부 무함마드 알졸라니가 이끌었다. 졸라니는 그 후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인 누스라 전선을 조직했다. 그러나 바그다디의 IS와 졸라니의 누스라 전선은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하면서 자신들이 저항 작전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행동의 자유를 상당히 잃었다. 바그다디와 졸라니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혼란 상황을 이용해 막강한 무장단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011년 시리아에서 미국-터키를 비롯한 지역 세력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 반기를 든 지하드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IS는 그곳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졸라니는 자신이 이끄는 누스라 전선을 바그다디의 IS에 합병하기를 거부했다.그러나 IS가 이라크와 시리아 두 나라 모두를 상당 부분 장악하자 2014년 미군이 다국적군을 결성해 IS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란도 정규군과 제휴 민병대를 동원해 반군에 맞서 이라크와 시리아 정부를 지원했다. 2015년이 되자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 뛰어들었다. 미국은 이슬람주의 반군 지원을 끊고 쿠르드족이 이끄는 시리아민주군을 거들었다. 시리아 정부와 시리아민주군은 각각 IS를 격파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바그다디는 계속 그들과 다국적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종적을 감췄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바그다디 제거를 노골적으로 추진한 첫 세계 지도자였지만 미국과 외국 관리들은 근년 들어 그의 행적에 관해 상반되는 정보를 제시했다. 주로 시리아 동북부의 자지라 지역과 이라크 동부에 은신한다는 정보였다. 또 바그다디가 공습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IS를 이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주장도 나왔다.그러나 바그다디가 지난 4월 동영상에 등장했을 때 눈에 띄는 부상의 조짐은 없었다. 2014년 6월 그가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옛 바트당 잔당과 이슬람 과격파들을 이끌고 이라크 모술을 점령한 뒤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IS ‘칼리프 제국’ 건국을 선포한 이래 처음 보인 공식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에도 전 세계의 유혈 사태를 조장하고 지시하는 IS의 악명 높은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바그다디 체제에서 IS는 급진 이슬람 거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한 행정부 관리는 숨진 바그다디를 “이라크와 시리아의 권력 공백을 이용하고 전 세계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끌어들여 테러리스트 국가를 건설한, 유례없이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비유하면서 “그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고 평가했다. 알카에다의 수장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이 오히려 알카에다 세력 확장의 계기가 된 것처럼, 바그다디의 죽음이 IS 세력에게 또 다른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뉴스위크가 인터뷰한 익명의 관리는 “그들은 시리아를 공격하고 이라크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럽과 미국도 분명히 공격할 것이다. 잠자는 거인을 건드렸다. 그들이 이제 깨어나 서방 국가에서 예상치 못했던 혼돈을 일으킬 것이다.” 영국의 국제과격화연구소(ICSR) 소속 찰스 윈터 선임 연구원도 월스트리트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IS 잔당들은 앞으로 며칠, 몇 주, 몇 개월 안에 새로운 지도부 아래 뭉칠 것”이라며 바그다디의 죽음이 오히려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실제 미국이 올해 초 IS의 영토를 모두 점령했다고 선언했지만, 시리아 등지에서는 여전히 ‘슬리퍼 셀(sleeper cell, 잠복한 조직원)’이 암약한다. IS가 지난 10월 21일 이라크 북부 살라후딘 주 알라스 유전지대의 검문소들을 공격해 이라크 보안군 2명이 숨지고 3명이 다친 것은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10월 9일 오전 시리아 북부 도시 라까에서도 IS 배후 세력이 자행한 것으로 추정하는 폭탄 테러가 발생해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다른 한편으로 시리아 주둔 미군의 철수에 따라 억류 중이던 IS 포로들이 대거 탈주함으로써 IS 전력이 오히려 강화한다는 지적도 있다. 트럼프 정부의 철군 결정과 함께 터키군이 시리아 북동부를 공격하면서 수백 명의 IS 포로와 그 가족들이 탈주했으며 그동안 조용했던 시리아 북부 지역이 다시금 혼란에 빠져든다고 미국의 외교 전문 매체 포린폴리시가 전했다. 또 아직 수천 명의 IS 전사와 그 가족이 현지 쿠르드 민병대의 허술한 경비 속에 억류 중이라고 덧붙였다.그러나 한 전 미국 정보관리는 바그다디의 사망이 IS의 작전 능력에 실질적인 타격을 줬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생전에 작전과 전략을 편지와 인편으로 승인했다면 그는 그만큼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직에는 수장이 중요하다. 공격하는 쪽에선 누구나 고위 지도부를 노린다. 그들이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시리아 북동부를 장악한 쿠르드족은 IS 격퇴전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동맹으로 입지를 다졌다. 바그다디 제거 작전에도 그들이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터키는 분리주의 쿠르드족을 최대 안보위협 세력으로 여겼다. 터키는 이미 수차례 시리아 국경을 넘어 쿠르드족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시도했지만 시리아 북동부에 주둔한 미군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이후 IS 격퇴전이 공식 종료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동북부에 주둔하던 미군의 철수를 지시하자 터키군은 쿠르드족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쿠르드족이 이끄는 시리아민주군은 터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시리아 정부와 협력 협정을 맺었다. 시리아 정부를 지지하는 러시아는 터키가 시리아 국경 부근의 쿠르드족 전사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도록 중재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동부의 유전 지대를 보호하기 위해 미군을 추가로 파병했다.- 톰 오코너, 나비드 자말리 뉴스위크 기자 ━ IS와 알카에다 뭉칠까 - 이념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미국·러시아로부터 실존적인 위협 받아 미군 특수부대가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지도자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를 급습하면서 얻은 정보를 미국 정보기관들이 분석하는 과정에서 IS와 알카에다의 관계에 관한 의문이 제기됐다. 바그다디는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 주 바리샤 마을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추적을 받던 중 자폭했다. 그곳은 시리아 내전의 결과로 인구가 많이 늘어난 지역 중 하나다. 바리샤 마을은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단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3월 IS의 시리아 최후 거점이 무너졌을 때 많은 IS 생존자가 이들리브 주로 탈출했다.시리아 전문 조사관인 사드라딘 키노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지역에는 알카에다와 연계된 여러 단체가 있다”고 말했다. 바그다디를 제거한 급습 작전은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철군하겠다고 발표한지 3주가 지난 시점에 실시됐으며 쿠르드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이 제공한 정보에 의존했다. 작전팀은 헬기로 이라크 에르빌에서 출발해 현재 러시아가 관장하는 영공을 가로질러 알카에다 연계 조직인 후라스 알딘(‘종교조직 수비대’)이 장악한 이들리브 주 바리샤 마을에 도착했다. 후라스 알딘은 지난해 초 시리아에서 등장했으며, 전사 1500~2000명을 거느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절반은 시리아 출신이 아니다.키노는 “IS와 시리아의 알카에다 연계 조직은 이념이 서로 다르지만 현재 그들은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똑같은 실존적인 위협을 받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바그다디는 후라스 알딘 등 그곳을 장악한 여러 단체와 손잡고 이들리브 주에 은신처를 마련한 것 같다.”이제 바그다디의 사망으로 알카에다에 재기할 기회가 왔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국무부의 대테러 조정관 네이선 A. 세일스는 지난 8월 “알카에다는 지난 수년 동안 가만히 엎드려 전략적으로 인내했다”고 설명했다. “알카에다는 국제 대테러전의 공격을 IS가 혼자서 받도록 해놓고 자신들은 그동안 조직을 재편성했다.”세계안보 문제를 다루는 미국 싱크탱크 수판센터의 콜린 P. 클라크 선임연구원과 미국 중동연구소 대테러·극단주의 프로그램 책임자 찰스 리스터는 최근 외교 전문 매체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병력과 물자를 시리아 쪽으로 옮겨 그곳에서 수년 동안 입지를 강화해왔다고 지적했다.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 이래 알카에다는 “현지주의와 점진주의에 초점을 맞춰 이전보다 훨씬 더 제한적인 전략 목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클라크와 리스터 연구원은 설명했다. 그들은 알카에다의 사령관 중 한 명인 할리드 알아루리(일명 ‘아부 알카삼 알우르두니’)가 이끄는 후라스 알딘은 현지와 서방 양측에서 이슬람의 적을 표적으로 삼았다.미국 전쟁연구소는 조사 보고서를 통해 IS와 알카에다가 단순히 테러단체가 아니라 테러를 전술로 사용하며 서방 정부를 전복하려는 저항운동 조직이라고 결론지었다. “IS와 알카에다에서 중동·아프리카·남아시아에서 싸우는 주류와 서방 공격을 목표로 활동하는 세력을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 알카에다와 IS 연계 조직은 서로 다른 세부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들 모두 지하드(성전)를 서방으로 이전하려고 한다. 세계적인 칼리프 제국을 건설한다는 원대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마시 크라이터 아이비타임즈 기자

2019.11.1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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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정치·군사 지형도 지각변동] 쿠르드 사태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정책이슈

미군 철수한 시리아에서 터키 맹공… 시리아 쿠르드족, 시리아·러시아에 SOS 신호 지난 10월 6일 미군의 시리아 철군으로 함께 싸웠던 시리아 쿠르드족이 보호막을 잃자 터키가 9일부터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면서 중동의 국제정치 지형도가 대규모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시리아 쿠르드족은 어제의 적인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정부와 손을 잡고 병력 이동을 요청한 데 이어 러시아에도 SOS를 보내고 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10월 14일 시리아 사나 통신을 인용해 시리아 정부군이 터키 국경에서 20㎞ 떨어진 탈탐르에 진입했다고 전했다. 터키군은 9일 이후 국경을 넘어 시리아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쿠르드 자치 지역인 라호자 북부에 진입했다. 시리아 국경 근처의 시리아 쿠르드족을 몰아내고 안전지대를 만들어 자신들이 ‘테러세력’으로 부르는 터키 내 쿠르드족 측과 접촉 통로를 막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터키 공세 앞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날에는 방관자가 되는 ‘피아 구분이 모호한 혼란의 시대’를 맞고 있다.터키의 공격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20만 이상의 난민이 발생한 시리아 쿠르드족으로선 자신을 터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어떤 세력이든 우방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독배라도 기꺼이 마실 수밖에 없다. 시리아 쿠르드족 지도자들은 명분과 국민 사이에서 국민을 선택한 셈이다. ━ 피아 구분이 모호한 혼란의 시대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러시아다. 러시아는 “초청받지 않은 외국군은 모두 시리아에서 떠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시리아 정부가 요청해서 파병해서 병력을 주둔 중인 유일한 국가다. 시리아 정부는 내란의 한 축에 지나며 않으며, 화학무기 사용 등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집단으로 지목 받고 있지만 합법적인 정부다.러시아는 미국이 빠진 중동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러시아의 국제방송인 RT는 러시아군이 시리아 북부 도시 만비즈에 헌병을 파병해 순찰과 경비 활동에 나섰다고 10월 16일 보도했다. 앞서 터키군이 9일 시리아 쿠르드족을 공격하면서 쿠르드 민병대 YPG가 핵심인 시리아민주군(SDF)을 몰아내고 요충지인 탈 아브야드 등을 점령한 뒤 유프라테스강 서안의 쿠르드 도시 만비즈에 병력을 집중해왔다. 하지만 시리아 쿠르드족의 요청으로 시리아-터키 국경 근처로 시리아 정부군이 진입하자 러시아군이 이 지역에 진입해 순찰과 경비 활동에 나선 것이다. 이 지역의 시리아 정부군이나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를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터키의 공격을 받은 시리아 쿠르드인으로서는 지금 알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이든, 러시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환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미국 빠진 자리에 러시아 적극 나서 이런 상황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시리아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가 주축이 된 독재자 알아사드 추종세력과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가 주역이다. 거기에 동북부 시리아 쿠르드족이 자치를 선언했다. 이런 내전이 빚은 치안 공백을 노려 극단주의 세력인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북부 락까와 그 동쪽의 이라크 북부 모술 등을 차지해 중세 이슬람 율법을 빙자한 잔혹 통치를 이어나갔다. 시리아 정부군은 반정부군과 시리아 쿠르드족, 그리고 IS에 모두 맞서야 했다. 반군은 정부군과 IS에 맞섰으며 시리아 쿠르드족과는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시리아 북부에선 시리아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호부대(YPG)가 일부 반군부대와 손잡고 IS를 비롯한 극단주의 테러 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시리아민주군(SDF)를 구성해 미군과 함께 IS에 대한 투쟁을 주도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시리아에 파병해 시리아 쿠르드족이 주축이 된 SDF의 협력을 얻어 IS 격퇴전을 치렀으며 올해 6월 IS의 시리아 내 마지막 근거지인 바구즈를 점령했다. 그런 시리아 쿠르드족과 SDF가 미군 철수로 터키의 공격을 받게 됐으나 이들이 미국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문제는 이런 상황이 시리아 내전에서 알아사드의 최종적인 군사적·정치적 승리를 견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외교 전문 매체인 포린 폴리시는 10월 17일자에서 “알아사드가 시리아에 남은 최선의 시나리오가 되고 있다”라며 “잔혹한 독재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 범죄에도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 남은 차악의 선택이 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알아사드는 반정부 시위에 나선 국민을 학살하면서 내전을 유발했으며 그 결과 지금까지 50만 이상의 사망자와 수백만의 난민을 만들었다. 이 매체는 완벽한 세계에서라면 알아사드는 다마스쿠스에서 통치하는 대신 헤이그에 있는 국제법정에 서는 게 마땅하겠지만 우리는 완벽한 세상에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끔찍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나은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쿠르드족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독립국가 수립을 기도할 수 있지만 미국은 이를 지지하지 않아 왔다. 터키·시리아·이라크·이란에 걸쳐 있는 쿠르드족이 결합해 하나의 나라를 만든다면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지역전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 4개국이 힘을 합쳐 자국과 이웃나라의 쿠르드족을 압박하는 것은 물론 서로 각축할 가능성도 있다.문제는 아직 쿠르드 국가도 없고 조만간 생길 가능성도 없는 상황임에도 쿠르드족은 이 지역의 주요 세력의 하나로 이미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시리아 쿠르드족은 시리아 동북부 로하자 지역에서 사실상 자치를 하면서 군사적으로 상당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 ━ 쿠르드족 세 확장 막으려는 터키 터키는 이번에는 YPG가 주축인 시리아민주군(SDF)를 공격했지만, 다음에는 총부리를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구의 민병대인 페슈메르가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터키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쿠르드족이 터키 내 쿠르드족 군사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손잡고 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한다고 비난한다. 이에 따라 터키의 PKK는 물론 시리아 쿠르드족의 YPG와 이라크 쿠르드족의 페슈메르가까지 모두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터키는 이번 시리아 쿠르드족 공격을 테러 세력 응징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미국과 손잡고 테러세력 IS를 몰아낸 YPG까지 테러 세력으로 모는 것은 모순적이다. 터키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다.하지만 포린폴리시는 미군이 시리아에 주둔하면서 YPG를 포함한 SDF와 함께 작전을 펴고 있었기에 늦춰졌을 뿐, 터키는 언젠가는 이들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군이 영구히 시리아에 주둔한다고 해서 시리아 쿠르드족을 터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 트럼프의 생각일 것이라는 지적이다.더욱 큰 문제는 알아사드 대통령의 시리아 정부군이 2011년부터 이어진 내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방 국가가 지원해온 반군을 누르고 군사적으로 최종 승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린폴리시는 “이런 사실은 도덕적인 분노를 일으키지만 도덕적인 분노는 정책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알아사드 체제가 허약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이 시리아 일부를 차지하는 한 그는 자신의 위치를 강화할 수 없으며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다양한 카드로 알아사드를 견제하면 할수록 시리아에 대한 러시아와 이란의 입김이 강해져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중동에서의 입지가 약화한다는 주장이다.이런 상황이라면 알아사드에게 시리아 전체를 통치하는 권한을 인정해주는 게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게 포린폴리시의 의견이다. 이렇게 하면 시리아 쿠르드족 자치에 대한 터키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게 된다. 터키의 에르도완 대통령은 알아사드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쿠르드족은 더욱 싫어한다.알아사드가 시리아 전역을 장악하게 되면 시리아에 아직 남아있는 IS 세력의 처리 문제도 자연스럽게 그가 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더 이상 미국이 파병할 필요가 없어진다. IS는 이슬람 수니파의 극렬 광신도라 이교도만큼이나 시아파를 중오하고 박해한다. 알아사드는 종교적으로 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알라위파에 속한다. 알라위파는 시리아 정부군의 주력이다. IS가 이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개성 있는 분파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사드는 IS를 잔혹하게 말살할 가능성이 크다.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10월 14일 2007년에 이어 12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에너지·항공·보건 분야에서 20건이 넘는 협약을 맺고 100억 달러 규모의 합작법인 30개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VOA가 보도했다.푸틴은 10월 15일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해 트럼프 못지 않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양국 기업과 정부는 푸틴의 방문에 맞춰 13억 달러 규모의 사업·투자 협력 6건에 서명했다. 사우디와 UAE는 수니파 연합군을 만들어 예멘 내전에 개입해 시아파 후티 반군과 싸워왔다. 후티 반군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란산으로 추정되는 탄도 미사일을 사우디에 발사해왔다. 지난 9월 사우디 유전과 정유공장에 대한 드론 공격도 후티 반군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며, 사우디 당국은 이란을 의심하고 있다.푸틴은 중동 순방 하루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국용 알아라비아와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와 이란 모두와 가깝다”며 “중동의 모든 나라와 우호적인 러시아가 한쪽의 메시지를 다른 쪽에 전달할 수 있다”며 중동에서 중재를 비롯한 역할을 확대할 뜻을 비쳤다. 푸틴의 중동 시대가 바야흐로 열리는 셈이다. ━ 푸틴, 중동에서 중재자 역할 확대 뜻 비쳐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이란·북한과 더불어 시리아와 관계가 돈독한 드문 나라라는 점이다.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2011년 시리아 내란이 발발한 이후 딱 3차례 해외를 방문했는데 모두 러시아였다. 알아사드는 2015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뜨거운 환영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2017년 11월 20일에는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한 러시아 흑해 연안 도시 소치를 찾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환영을 받았다. 28일의 유엔 주재 시리아 평화회담을 앞두고서다. 누가 봐도 러시아가 시리아의 후견세력임을 보여주는 이벤트다. 알아사드는 2018년 5월 17일에도 소치에서 푸틴을 만나 경제 재건 등을 논의했다.소치는 옛 소련 시절 건설돼 휴양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이다. 옛 소련과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휴가를 보내거나 정치적 대형 이벤트를 앞두고 지도자들이 모여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로 애용됐다. 미국으로 치면 트럼프의 플로리다 휴양지 마라라고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나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 것과 일맥상통하다. 시리아의 알아사드는 러시아의 푸틴과 그 정도로 친밀하고 협력적인 관계임을 과시한 셈이다. 푸틴은 알아사드를 이용해 중동에서 과거 소련 시절의 위세를 회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알아사드는 2011년부터 내전을 치르면서도 그런 푸틴의 비호 속에 지치지 않고 정권과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러시아는 2018년 7월 30~31일 소치에서 이란과 터키와 유엔난민기구(UNHCR)의 필리포 그란디 대표, 유엔 시리아 특사인 스테판 데 미스투라 등을 불러 시리아 복구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기도 했다. 미국이 중동 문제에서 방관자적 자세를 취하는 동안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중동문제에서 러시아의 입김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푸틴은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과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을 불러 모아 시리아 문제를 논의하는 삼국 정상회의를 지난 9월 16일 터키 앙카라에서 열었다. 이들 세 명은 2017년 11월 소치에서 삼국 정상회담을 연 것을 시작으로, 2018년 4월엔 터키의 앙카라에서, 2018년 9월에는 이란의 테헤란에서, 2019년 2월에는 러시아 소치에서 각각 회담을 열어왔다. 시리아 내전의 종식과 재건 문제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계산이 엿보인다.그동안 러시아는 중장거리 미사일과 로봇 기갑무기, 폭격기, 특수부대 등 다양한 군사력을 시리아에 투입해왔다. 이를 통해 러시아산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고 그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군은 중장거리 미사일을 흑해에서 발사해 시리아의 목표물에 정확하게 타격했다. 게다가 기관포를 장착한 ‘우란 기갑로봇’을 비롯한 다양한 로봇 무기를 실전에 투입해 이 분야의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를 최대한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무게를 옛 소련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푸틴의 중동 전략이 엿보인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10.20 15:50

8분 소요
[사우디 최대 석유 시설의 드론 피폭 그 후] 정치·종파·노동·극단주의… 중동 문제 난맥상 도마 위에

항공

드론 공격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열려… 아람코 상장에도 차질 생길 우려 9월 14일 새벽 4시(현지시간) 드론 공격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관련 시설은 두 군데였다. 사우디 최대 규모의 원유 탈황시설이 자리 잡은 아브카이크 단지와 인근의 쿠라이스 유전이다. 사우디의 유전과 석유 산업은 모두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ARAMCO) 산하다. 이 지역은 수도인 리야드에서 북쪽으로 약 250㎞, 사우디 최대의 석유 선적기지가 있는 담만-두람-카바르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남쪽으로 약 150㎞ 떨어졌다. 사우디의 유전과 석유 시설은 동부의 페르시아만(아랍권에서는 아라비아만으로 부름) 연안 지역에 밀집해 있다. 이 때문에 이번에 드론 공격을 받은 아브카이크 단지와 쿠라이스 유전은 사우디 석유 생산의 심장부인 셈이다.사우디는 이번 공격으로 석유 생산 규모가 반 토막이 났다. 현재 하루 약 97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데, 이번 공격으로 약 570만 배럴의 생산이 차질을 빚어 하루 생산 규모가 약 410만 배럴로 줄었다. 사우디는 걸프 지역 산유국 가운데 최대 산유량을 자랑한다. 걸프 지역의 국가별 하루 원유 생산량은 2018년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1229만 배럴), 이란(472만), 이라크(460만), 아랍에미리트(UAE, 394만), 쿠웨이트(305만), 카타르(188만), 오만(98만)의 순이다. ━ 아브카이크 단지, 사우디 원유 ‘탈황’ 핵심 아브카이크 단지는 사우디 동부에 몰린 주요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탈황·정제해 북부의 수출항인 담만-두람-카바르 지역이나 국내의 다른 정유시설로 보내는 핵심 탈황 단지다. 하루 처리량이 700만 배럴로 사우디 전체 산유량의 70%에 이른다. 세계 원유 생산량의 약 7% 규모다. 이곳 단 한 곳의 가동 중단으로 하루에 수백만 배럴의 원유가 사우디는 물론 국제시장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야말로 급소 중의 급소다. 아브카이크는 과거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던 시설이기도 하다. 그만큼 중요한 시설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시설이 드론 공격을 받아 일시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는 데서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쿠라이스는 하루 150만 배럴을 생산하는 사우디 굴지의 유전이다. 2009년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간 신규 유전이다. 원유 매장량이 200억 배럴에 이른다. 아람코가 상장을 노리는 자신감의 배경에는 사우디에서 새 유전이 연이어 생산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 석유가 지는 해가 아니고 여전히 뜨는 해임을 보여주고, 미래 투자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게 이런 신규 유전이다. 사우디의 실력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왕세자는 아람코 주식의 일부를 상장해 엄청난 자금을 확보한 다음 사우디의 미래를 새롭게 이끄는 ‘비전 2030’을 주도하고 있다. 사우디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대대적인 스마트시티 건설, 새로운 미래 에너지 산업 유치, 원전 건설을 통한 에너지 믹스 선진화 등 대담한 계획으로 가득찼다. 이번 드론 공격은 무함마드 빈 살만의 목을 노렸다는 이야기다. 드론 공격이 이런 신규 유전을 노렸다는 사실은 그 배경에 치열한 전략적인 판단과 정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이번 사우디 석유시설 공격은 당장 국제 원유시장을 흔들었다. 사고 직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0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15%,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브렌트유 10월물은 19% 급등했다. 다만 사우디의 비축유 방출과 원유 시설의 생산 정상화 발표, 미국의 전략비축유(SPR) 방출 추진과 이란 공격 대신 제재 강화 움직임 등으로 국제유가는 9월 17일과 18일(현지시간) 연속 하락 반전하며 진정세를 보였다. 전략비축유는 긴급 사태를 대비해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과 유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비축하는 물량이다. 온라인 에너지 뉴스 사이트인 오일프라이스닷컴(OilPrice.com)에 따르면 국가별 전략비축유 규모는 미국(6조9300억 배럴), 중국(5조1111억 배럴, 목표치), 일본(3조2400억 배럴), 스페인(12조2000억 배럴), 한국(9300억 배럴), 인도(3900억 배럴)의 순이다. 다만 거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석유 시설 전반에 대한 안전과 보안 문제,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긴장 고조,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압박 강화 같은 악재가 연쇄반응을 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아람코의 상장 지연과 이에 따른 사우디 내부 정정 불안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사우디, 아시아 경제대국의 에너지 공급원 이번 사건은 사우디가 세계 석유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특히 사우디 원유의 3분의 2 정도가 한국·중국·일본·인도 등 아시아의 경제 대국으로 공급된다. 대한석유협회 자료를 보면 지난해 한국에 들어온 사우디산 원유는 3억2317만 배럴로 전체 수입량의 29.0%를 차지한다.세계 원유 매장과 생산을 보면 사우디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글로벌 에너지 업체 에니(Eni)가 2018년 6월에 펴낸 ‘세계 석유 리뷰 2018’에 따르면 2018년 하루 원유 생산량은 미국(1319만 배럴, 세계 14.2%), 사우디(1196만 배럴, 12.9%), 러시아(1135만 배럴,12.3%), 캐나다(481만 배럴, 5.2%), 이란(470만 배럴, 5.1%), 이라크(456만 배럴, 4.9%), 중국(387만 배럴, 4.2%), 아랍에미리트(UAE, 377만 배럴, 4.1%), 쿠웨이트(301만 배럴, 3.3%), 브라질(273만 배럴, 3.0%) 순이다. 물론 그 이후 사우디는 감산 정책 등으로 하루 원유 생산량이 970만 배럴로 줄었지만 세계 석유 공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막대하다. 2017년 말 현재 확인 매장량은 베네수엘라(3028억 배럴, 세계 18.0%), 사우디(2662억 배럴, 15.8%), 캐나다(1979억 배럴, 11.8%), 이란(1556억 배럴, 9.3%), 이라크(1472억 배럴, 8.8%), 쿠웨이트(1015억 배럴, 6.0%), 아랍에미리트(UAE, 978억 배럴, 5.8%), 러시아(800억 배럴, 4.8%), 리비아(483억 배럴, 2.9%), 나이지리아(374억 배럴, 2.3%) 순이다.이번에 드론 공격을 받은 아브카이크 단지는 이런 사우디의 석유 수출에서 지극히 중요한 곳이다. 아브카이크 단지는 사우디에서 가장 큰 탈황시설이다. 사우디에서 탈황시설은 필수적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사우디에서 생산하는 원유는 유황이 많이 함유된 저품질유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석유 발전소나 자동차, 산업시설 등에서 유황 성분이 많이 든 석유를 태우면 유독성 자극가스인 이산화황이 대기 중으로 대량 배출된다. 이를 줄이려면 비용을 들여 탈황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원유에 포함된 유황 성분을 촉매를 이용해 제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황 함량이 많은 원유는 정유 과정에서 탈황 비용이 더 많이 들게 된다. 국제 원유시장에서 저유황 원유는 그만큼 비싼 값, 반대로 고유황 원유는 더 낮은 가격에 팔리는 이유다.사실 탈황은 사우디 석유 수출에서 필수적이다. 원유의 품질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API도’와 ‘유황 함유량’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API도는 미국석유협회(API)가 원유 ‘비중’을 바탕으로 정한 기준으로 원유 가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다. 비중이란 어떤 물질의 질량과 동일한 체적의 표준물질의 질량과의 비율을 가리킨다. API도는 섭씨 15.6도의 물과 비중이 같은 원유를 10으로 보고, 비중과 반비례해서 정한 수치다. 비중이 작을수록, 즉 단위당 무게가 가벼울수록 API도는 높아진다. 이탈리아 석유 메이저 기업인 에니의 사이트에 따르면 통상 API도 50도 이상을 초경질유(超輕質油, Ultra Light)로, 35도 이상 50도 미만을 경질유(輕質油, Light)로, 26도 이상 35도 미만을 중질유(中質油, Medium) 등으로 분류한다. 경질유는 휘발유나 나프타 같은 고가의 성분을 뽑기 유리한 고품질 원유여서 가격이 비교적 비싸다.이와 함께 유황 함량도 중요하다. 에니에 따르면 유황 함량이 0.5% 미만이면 저유황유(Sweet)로, 0.5% 이상 1% 미만이면 중(中)유황유(Medium Sour)로, 1% 이상이면 고(高)유황유(Sour)로 각각 분류한다. 초경질유는 유황 함량도 낮다. 이 두 가지 기준을 동시에 적용하면 원유는 대체로 10개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 초경질유, 경질 저유황, 경질 중유황, 경질 고유황, 중(中)질 저유황, 중질 중유황, 중질 고유황 등이다. 원유 가격은 산지, 시기 등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대개 위의 순서로 가격이 떨어진다. 즉, 원유는 유황 함량이 낮고 API도가 높을수록 고급으로 친다는 이야기다. 가치와 정유 비용을 고려한 결과다. 사우디의 경우 하루 생산 원유 중 ‘중(中)질 고유황’이 839만 배럴(84.3%)로 압도적이다. ‘경질 고유황’은 145만 배럴(14.7%), ‘경질 저유황’은 10만 배럴(1.1%) 생산에 그쳤다. UAE는 ‘경질 중유황’이 150만 배럴(51.5%), 중(中)질 고유황’ 75만 배럴(25.8%), ‘경질 고유황’ 66만 배럴(22.7%)의 순이다. 탈황을 거칠 필요가 있는 원유가 대부분이다.그렇다면 드론으로 신규 유전과 탈황시설만 콕 노려 사우디의 석유 수출과 아람코에 상장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세력은 상당한 전략적 판단과 새로운 기술, 그리고 군사 전략에 일가견이 있는 세력일 것이다. 도대체 누구일까. 하지만 드론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사실 오리무중이다. 사우디 석유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세력이 범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먼저 드론 공격자로 지목받은 세력은 예멘의 후티 반군이다. 후티 반군은 2015년부터 정부군은 물론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를 비롯한 수니파 연합군과 싸우고 있다. 예멘의 후티 반군은 이번 사건 직후 자신들이 10대의 드론을 동원해서 공격했다고 주장했다.후티 반군은 사실 이전에도 사우디의 석유 시설을 목표로 드론 공격을 한 적이 있다. 이미 지난해 7월과 올해 5월에도 후티 반군은 석유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을 시도했다. 특히 지난 5월의 공격은 사우디롤 동서로 지나는 석유 파이프라인을 노렸다는 점에서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렀다. 사우디는 동부 페르시아만 연안 지역에 유전과 석유 관련 시설이 밀집해 이를 운반하려면 이란과 대치하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을 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우디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을 이용하면 사우디 서쪽 홍해 쪽의 제다 항구를 이용해 석유를 선적할 수 있다. 홍해를 경유하면 사우디의 중요 석유 수출선인 아시아와는 수송 거리가 멀어지지만 어쨌든 호르무즈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유럽 쪽으로 갈 경우는 오히려 해상 수송로가 줄어든다. 당시 파이프라인 공격의 피해는 경미했고 사우디의 석유 생산과 이동, 수출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공격으로 이어지는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사우디는 철저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사우디 당국은 보안보다 아람코의 상장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석유장관 경질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아우드 왕자는 아람코 상장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석유장관을 경질하고 형제인 압둘아지즈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로 바꾸었다. 하지만 드론 공격에 대비한 대대적인 대공 보안 강화책을 비롯한 보안 대책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우디 왕실 내에서 책임 공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 잇단 드론 공격에도 보안 강화 눈에 띄지 않아 후티 반군이 드론을 이용해 사우디 석유 시설에 타격을 입히면 사우디 석유 산업에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서는 다양한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선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후티 반군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 된다. 국제사회의 협상 압력이 사우디에 가해질 수 있다. 아울러 아람코의 상장을 지연시킬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로 하여금 아람코냐, 예멘이냐를 선택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은 이 둘 가운데 하나를 놓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후티 반군은 더욱 극렬하게 공격을 하고 사우디는 더욱 강력하게 보복을 하면서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이어질 전망이다.후티 반군이 과연 이번 드론 공격의 기획자인지, 실행자인지, 아니면 동조자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후티 반군 지역에서 사우디 동부까지는 거리가 1200㎞를 넘기 때문이다. 항속거리가 긴 드론이 약 700㎞를 날아갈 수 있음을 감안할 때 예멘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은 그리 커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조 연료탱크를 달고 항속거리를 연장할 수는 있다. 그럴 경우 적재할 수 있는 폭탄이나 인화물질의 양이 줄어 공격 효과가 떨어진다.그래서 페르시아만을 넘어 200㎞ 정도 떨어진 이란을 유력한 드론 출발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란이 과연 사우디와 미국에 전면전을 벌일 명분을 줄 수 있는 공격 행위를 벌인다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판단으로 볼 수 없다. 이란의 석유 시설도 미국이나 사우디의 미사일이나 전투기의 공격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석유 시설이 공격을 받으면 가뜩이나 미국 제재로 수출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란은 재앙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라 경제가 마비될 경우 이란의 현 신정체제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처럼 서로 총을 상대의 이마에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이 석유 시설 공격이란 사실상의 자살 공격을 벌일 이유는 적어 보인다.이란과 가까운 사이인 이라크의 시아파 무슬림 무장조직이 드론 출발지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라크는 인구가 많은 남부의 시아파가 중앙 권력을 차지하고 중부의 수니파와 북부의 쿠르드족을 견제하고 있다. 이라크는 이란 군사 조직의 지원도 받고 있다. 시아파 지역인 이라크 남부는 이번 드론 피격 지점에서 500㎞ 정도 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는 충분히 드론을 이용한 공격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 사우디 석유 시설, 국내외 시아파에 둘러싸여 불안 시아파만 따지면 사실 사우디 국내도 만만하지 않다. 사우디의 석유 시설은 시아파나 시아파 동조세력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 석유 생산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동부 페르시아만 연안지역은 사우디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밀집 거주지역이다. 여기에 사우디 당국의 고민이 있다.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 중앙정부는 일부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는 등의 강경 정책으로 자국 내 시아파와 관계가 악화한 상태다. 하지만 사우디가 철저한 경찰국가임을 감안할 때 드론의 반입과 발진, 그리고 조종을 국내에서 했을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밀 조직원이 목숨을 걸고 외부와 연결해 드론 공격에 나섰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드론 공격이 벌어진 사우디 동부 지역은 독립 군주국인 섬나라 바레인과 다리로 연결돼 있다. 바레인 인구 대다수는 시아파인데 군주는 수니파다. 이 때문에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시아파 국민의 시위 사태가 벌어졌다. 군주제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요구와 종파 갈등이 교묘하게 엮인 경우다. 당시 사우디는 바레인에 시위 진압을 돕기 위한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여기에 원한을 품은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이번 드론 공격을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시 사우디 동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타르는 수니파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친이란 정책으로 사우디의 눈 밖에 났다. 이 때문에 사우디와 수니파 연합군은 카타르를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엄청난 가스전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카타르 국민 가운데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다만 사우디는 물론 국경을 맞댄 바레인, 카타르는 물론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외국 이주 노동자 가운데 일부가 드론을 이용한 테러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다. 석유 부자 나라에 열악한 조건으로 돈벌이를 하러 온 수많은 사람 중 일부가 종교적 광신주의에 빠졌을 수도 있다.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정치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드론 출발이나 조종한 장소를 파악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중동의 정치·왕가·종교·종파·이주민·노동·극단주의 등 다양한 요인이 꼬이고 꼬여 오늘날의 사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매파의 생각대로 이란을 공격한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는 상황이다. 오히려 사태가 더욱 꼬일 뿐이다. 더구나 이번 공격은 값싼 드론을 이용해 경제 시설에 천문학적인 손해를 끼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드론 공격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다. 사우디 석유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은 전 세계에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19.09.22 10:07

11분 소요
2020 미국 대선에 해킹 경보

정책이슈

러시아가 고전적인 냉전 전략을 이용해 차기 미국 대선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를 저해하려 한다. 그 전략이 과연 통할까 2016년 10월 7일 꼬리를 물고 잇따라 발생한 3가지 사건이 로비 무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첫째 사건은 오후 약 3시 반에 일어났다. 오바마 정부가 러시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이 민주당전국위원회(DNC)를 해킹하고 민주당에 혼란을 유발하는 이메일 수천 통의 유출을 지휘했으며 이는 “미국 선거절차를 방해하려는 의도”라는 내용이었다. 이날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 속에서 그 특이한 발표는 주목받지 못했다.오후 4시 워싱턴 포스트는 악명 높은 ‘(NBC 방송 연예 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 테이프’를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 후보가 자신이 여성들을 성희롱한 일을 자랑하는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였다. “상대가 스타일 때는 여자들이 거부를 안 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사타구니를 손으로 잡아도. 뭐든 가능해.”한 시간도 안 돼 또 다른 미디어 폭탄이 투하됐다.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또 다른 이메일 뭉치를 공개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존 포데스타 선대위원장 계정을 해킹해 빼돌린 5만 통의 이메일 중 1차분 2만 쪽이었다. 당시 35세로 클린턴 캠프의 선거본부장이던 무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주 분명했다”고 돌이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자들이 월스트리트 은행들 대상으로 한 고액 연설의 옛날 원고, 가톨릭 유권자들과 관련된 문제의 논평들과 기타 클린턴의 선거운동에 불리한 것으로 판명된 문서들을 발굴해 냈다. 미국 정보당국은 그 뒤 포데스타 메일 해킹과 러시아 군부의 연관성을 밝혀냈다.3년의 세월이 흘러 미국이 새로운 대선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무크를 비롯한 다른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KGB 요원들(독일 드레스덴에서 번역가로 위장한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젊은 신참 요원 포함)이 냉전 시대 완성한 ‘아지프로(agitprop, 선전선동)’의 최신 버전을 계속 구사하리라는 분석이다.러시아의 전반적인 의도는 크리스토퍼 레이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미국에 혼란을 유발하고,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분열과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신념을 저해하는” 것이었다고 대다수 정보 당국자와 러시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는 미국 국무부 관료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 테러조정관 출신으로 냉전 시대 많은 경험을 한 리처드 클라크의 말마따나 러시아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미국인이 우리 시스템을 포기하는 것”이다.많은 선거진영이 오래된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30일 정도에 한 번씩 시스템에서 삭제하고 관계자들이 로그인할 때 두 종의 기기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이중 인증(two-factor authentication)을 의무화하면서 사이버보안 예방조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선거보안 기준의 수립에 관여한 각종 민관 기관에서 일했고 다수의 선거운동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사이버보안 전문가 조슈아 프랭클린의 말이다.내년 11월이 가까워짐에 따라 2016년 대선 중 러시아의 조직적인 인터넷 공작 캠페인으로 노출된 방대한 규모의 보안 취약점을 보강하려 동분서주하는 민간인, 공공정책 운동가, 정치인, 주·지방 선거 관계자, 국가 안보 기관이 갈수록 늘어난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뮬러 특검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의회는 대선 사이버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각 주에 3억8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무크는 이번에는 초당적인 역할을 맡았다. 미트 롬니 후보의 2012년 대선 선대위원장을 지낸 공화당원 매트 로즈와 손잡고 2017년 하버드대학 산하 싱크탱크에 디지털민주주의수호프로젝트(D3P)를 설립했다. 사이버·정보 공격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목적의 단체다. 지난 6월 선거자금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선거운동 조직에 무료·저비용 사이버보안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목적의 D3P 계열 조직이 연방선거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이제 무크 팀이 선거 당국의 승인을 받았으니 첨단 패턴인식 소프트웨어를 도입할 수 있는 선거본부가 늘어날 것이다. 은행들이 발생 가능한 스피어피싱(특정 대상을 표적으로 한 피싱 공격) 이메일과 특이한 대규모 데이터 파일의 유출을 모니터하고 불법 활동을 적발하는 데 사용하는 유형의 소프트웨어다. FBI 사이버 전문가 출신으로 사이버보안 업체 애거리 소속 크레인 해솔드 선임 위협연구 팀장의 말이다.선거본부들이 요즘 취하는 예방조치는 과거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경향을 띤다. 예컨대 2016년 클린턴 선거본부에 궁극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줬던 민주당전 국위원회 해킹이 대표적이다. 첩보·보안 전문가들은 2020년 대선 중 러시아인이 지난 두 차례 선거의 영향에서 간과됐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한다. FBI의 레이 국장은 지난 4월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우리의 적들이 계속 적응하면서 강도를 높여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미국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를 러시아가 어떻게 저해할 계획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이버 보안 전문가와 캠페인 관계자들은 2016년과 2018년 선거의 여파를 파헤치며 실마리를 찾고 있다. 2016년 대선 직전 워싱턴대학의 케이트 스타버드 연구원은 ‘#흑인생명도중요하다’ 운동의 온라인 대화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구팀은 가장 활동적인 트위터 계정 일부를 팔로우하면서 그들의 트윗이 미치는 영향을 추적했다.인간-컴퓨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스타버드는 무엇보다도 그 콘텐트 중 독성을 지닌 내용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그리고 토론이 얼마나 신랄하고 분극화됐는지에 충격을 받았다. 폭력을 옹호하거나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타버드 팀이 2017년 10월 그 주제에 관해 첫 논문을 발표한 불과 몇 주 뒤 의회의 조사를 받던 페이스북 관계자들이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라는 정체불명의 러시아 업체에 총 10만 달러를 웃도는 광고가 판매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시인했다. 친크렘린 프로파간다를 주도한 전력이 있는 업체였다. 미국 정보계는 러시아가 소셜미디어 트롤(trolls, 많은 반응을 얻거나 사람들을 선동할 목적으로 논란의 불씨를 던지는 악플러)들을 돈으로 매수해 가짜 뉴스를 퍼뜨려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광고는 총기소유권, 이민과 인종차별 같은 정치적으로 분열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췄다.그 뉴스를 접한 스타버드 연구팀은 그녀가 조사했던 대화에 관여한 트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난해 11월 트위터가 제공한 IRA 관련 계정 리스트를 하원정보위원회가 공개했을 때 스타버드팀은 자신들이 알아볼 만한 계정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리스트의 계정 수십 개가 그들의 데이터에 등장했다. 일부는 가장 많이 리트윗된 계정에 속했다. IRA 계정은 진정한 ‘#흑인생명도중요하다’ 그리고 그 운동가들로도 위장했다.스타버드팀이 2016년의 데이터를 다시 조사했더니 IRA의 인터넷 트롤들이 유사한 계정을 내세워 긴밀히 협력하면서 양 진영에 모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온라인 활동가의 캐릭터를 취해 커뮤니티에 침투하고 다른 참가자들의 정서를 모방하다가 기회다 싶을 때는 인플루언서(SNS의 유명인)로 나서 미묘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일부는 비교적 온순한 캐릭터를 맡아 무리를 추종하면서 신뢰받는 브랜드를 구축했다. 나머지는 미국 유명 정치인의 커리커처를 맡아 반체제의 불길을 부채질하는 폭탄 투척병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좌파 ‘흑인생명도중요하다’ 진영의 대화와 우파의 온라인 보수 행동주의를 모두 표적으로 삼았다”고 스타버드는 말했다. 스타버드는 “따라서 좌파 그리고 친 ‘흑인생명도중요하다’ 그룹에선 경찰을 돼지라고 부르며 경찰에 대한 폭력을 지지하는 ‘경찰 엿먹어라’ 같은 계정이 생겨나면서 IRA 트롤 중 일부는 그런 맥락에서 극히 심한 막말을 던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파에선 인종차별적 욕설을 하며 몇몇 더 악질적인 말들을 쏟아놓는다. 어떤 경우엔 한쪽의 트롤이 반대쪽 트롤과 논쟁을 벌이며 서로에게 막말을 퍼붓기도 한다.”2016년 러시아의 온라인 캐릭터들은 우파에선 트럼프에 좋은 말을 늘어놓고 좌파에선 힐러리를 중상하며 그녀에게 투표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2020년에는 이들 똑같은 트롤이 ‘좌파 분열’ 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스타버드는 예상한다. 주목을 받으려 경쟁하는 후보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트롤들은 특정 후보와 연계된 캐릭터를 택해 대화에 끼어든 뒤 틈날 때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민주당 후보(필시 그들 옆 칸의 트롤들이 내세운 다른 캐릭터의 지지를 받는)를 공격해 결과적으로 득표수를 줄일지 모른다.그녀는 “그들은 ‘저항하라’나 그 밖에 다른 유형의 민주당 캐릭터를 정기적으로 모방하면서 다른 후보들을 폄하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특히 일단 민주당 후보가 선출되면 그를 깎아내리면서 ‘이 사람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으니 그를 선출할 수 없어. 따라서 나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이번에는 트롤들도 더는 깜짝 출현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들을 차단하거나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정치적 압력이 거세짐에 따라 페이스북과 트위터 모두 트롤을 차단하겠다고 다짐했다. 2018년 중간선거 전 FBI는 IRA가 운영하는 수십 개 계정과 페이지를 찾아냈다. 페이스북은 즉시 그들을 폐쇄했다. 또한 위협이 등장할 때 실시간으로 모니터하는 ‘전시상황실’을 설치했다.한편 연방기구들은 유권자들이 봇과 허위정보 유포 캠페인을 적발하도록 하는 노력을 강화했다. 웨스트버지니아·아이오와·캔자스·오하이오·코네티컷 주의 선거 당국자들은 유권자 교육 프로그램에 허위정보 교육을 포함할 계획이다. 군의 사이버사령부도 활발히 움직인다. 지난해 선거 전 2016년 선거개입 공작 배후의 러시아인들을 저지하는 캠페인에 착수했다. 러시아 공작원들에게 활동을 중단하라고 경고하면서 IRA가 운영하는 댓글 부대(troll farm)의 인터넷 연결을 수일간 차단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도전과제에 관해 환상을 갖는 사람은 없다.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지난 1월 상원정보위원회에서 러시아가 계속 “사회적·인종적 긴장의 심화, 당국에 대한 신뢰의 저해, 그리고 반 러시아 성향의 정치인 비판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더 표적 맞춤형으로 추가적인 영향력 도구상자(예컨대 허위정보 유포, 해킹·정보유출 공작 또는 데이터 조작 등)를 동원해 미국의 정책·활동·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할지 모른다.”FBI의 레이 국장은 러시아인이 2018년까지 그들의 전술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모델이 상황에 맞춰 적응해 나가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그 접근방식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목표는 과거와 조금도 변함이 없다. 클라크 전 대테러조정관은 “그들은 정치와 정치인이 끔찍한 존재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교착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그들은 우리끼리 내분을 일으켜 서로 으르렁거리기를 원한다.”냉소주의와 분열을 조장하려는 욕구도 2016년 러시아 해킹 공격의 또 다른 핵심적인 부분 그리고 미국의 2020년 취약점에 관해 그렇게 걱정이 많은 이유를 설명한다. 바로 미국의 선거 인프라에 침투하려는 러시아의 노력 때문이다.수전 그린핼그는 2016년 대선일 승패의 열쇠를 쥔 접전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 카운티의 유권자 등록 시스템에 러시아인이 침투하는 데 성공해 자신이 목격했던 광범위한 혼란을 유발했는지 단언하지 못한다. 또한 2018년 선거일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인디애나·조지아·플로리다 주의 투표절차를 엉망으로 만든 유권자 등록명부 문제의 배후가 그들이라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다.그러나 누군가 지역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투표수를 줄이고 많은 사람을 열 받게 하고 미국 선거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를 원했다면 두 차례의 선거에서 자신이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것과 필시 아주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 사건 중 어느 것도 아직 본격적으로(일부는 전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뮬러 보고서에 따르면 플로리다주에선 2016년 적어도 한 카운티의 투표 시스템이 해킹당했다(주지사와 카운티 당국자들은 어느 카운티인지 입을 다물고 있다).그린핼그는 2020년 11월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한다. 화학 원자재 브로커 출신의 그린핼그는 2000년대 초 금융업을 떠나 선거보안 강화 분야에서 새 천직을 잡았다. 미국 각지의 카운티들이 전자투표와 전자 유권자 등록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종이투표와 그 밖에 고장·해킹·사기에 대한 보호조치를 촉구하는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또한 선거일에 헌법으로 보장되는 투표권을 방해할 만한 어떤 문제든 해결하기 위한 신속대응 선거모니터그룹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2016년 선거일 아침 그녀는 맨해튼 중부의 한 법률사무소의 널따란 콜센터에 배치됐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문제를 모니터하면서 대응하는 업무를 맞은 그룹에 배치됐었다. 오전 6시반 거의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투표소 근무자들이 투표자 확인에 사용하는 랩톱과 태블릿에 유권자 등록명부의 전자판이 깔렸었는데 정보가 부정확한 듯했다. 수십 명의 유권자가 투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기록에는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디지털 정보도 찾아볼 수 없는 투표소 근무자도 있었다. 그런 문제가 너무 만연하자 카운티 선거당국자들은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전자판 등록명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투표소 근무자가 종이 버전 유권자 명부와 법정 투표양식을 찾으려 허둥댈 동안 줄이 길게 늘어서면서 원성이 빗발쳤다. 한 투표구에선 투표가 두 시간 동안 중단됐다. 그러는 동안 다수의 유권자가 아예 투표를 포기하고 직장이나 집으로 돌아갔다.그린핼그는 “줄이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며 “따라서 그것이 그날 사람들이 투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린핼그는 수상쩍다고 느꼈다. 두어 주 전 CNN에서 한 투표 시스템 공급업체가 러시아 정보국의 사이버 공격을 받아 FBI가 조사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녀는 지인에게서 그 공급자가 VR 시스템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뒤 정오쯤 뉴스 기사 중간에 숨겨진 한 문장이 그녀의 숨을 멎게 했다. 불과 1년 전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 VR 시스템의 전자 선거인명부 시스템을 이용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린핼그는 국토안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그들은 상당히 흥미를 보였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그런데도 국토안보부는 당시 선거 중 사용된 랩톱의 과학적 분석을 지난 6월에야 실시할 계획이라고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선거 당국자들은 자체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선거 후 수개월이 지날 때까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뮬러 특검팀은 러시아 첩보 공작원들의 활동을 상술한 기소장을 접수한 뒤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6년 대선 전 몇 주 사이 러시아 정보 요원들이 VR 시스템의 해킹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그 회사의 고객들인 지방 선거 당국자 122명에게 ‘스피어 피싱’ 이메일(다시 말해 수신자를 속여 링크를 클릭하거나 첨부파일을 열어 해커들이 계정에 침투할 수 있게 만들어진 개인 맞춤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같은 러시아 부대가 적어도 21개 주의 시스템을 조사하며 취약점을 찾았다.뮬러 보고서는 러시아 군 첩보부가 2016년 8월 미국 내 밝혀지지 않은 유권자 등록 기술의 “회사 네트워크에 악성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VR 시스템이 바로 그 회사라는 의혹이 널리 퍼졌다고 그린핼그는 말한다.VR 시스템은 러시아 해커들이 자신들의 투표 시스템에 침투하려는 듯 직원과 고객에게 피싱 공격 이메일을 보냈다고 시인했다. 그들은 어떤 직원의 이메일 계정도 해킹당하지 않았으며 즉시 모든 고객에게 공격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명을 통해 “그 이메일을 열어봤다고 신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들은 사법당국과 그동안 내내 협력해 왔으며 사이버 보안을 강화했다고 말했다.그러는 동안 선거 인프라의 취약점을 둘러싼 그린핼그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실제로 2018년 중간선거 때도 똑같은 일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다른 주에서도 문제가 보고됐다.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인디애나·플로리다 주에서 투표하러 나온 일부 유권자는 부재자 투표를 한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었다. 조지아주에선 오래 전부터 이용해온 투표소에 등록된 주소가 변경돼 신분증의 주소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유권자들도 있었다. 등록 명부가 느닷없이 사라진 유권자도 있었다.이런 대다수 사례에서 또다시 신기술이 개입됐다고 그린핼그는 말했다. 그녀는 2016년이나 2018년 선거가 아무런 조작도 없이 깨끗했다고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16년이나 2018년에 “미국의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수를 바꾸거나 투표 집계능력을 저해했을 만한 미국 선거 인프라의 훼손을 나타내는 정보 보고는 없다”고 지난 1월 의회에서 증언한 코츠 DNI 국장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녀의 의혹이 합당하든 않든 러시아인에게는 필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결과를 바꾸는 게 아니라 신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투표 조작은 중요하지 않다. 미국 시민이 투표가 조작됐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작전은 성공한 셈이다.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물론 선거 인프라의 보호장치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미국 선거제도가 분산됐으며 수많은 개별 카운티·도시·타운의 선거관계자들이 관리한다는 점이다. 그들 중 다수가 연방정부에 자치권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한다. 전자투표기 제조업체들은 지방·주 선거당국자들과 낙하산 인사를 주고받는 긴밀한 유착관계를 구축했다.일부 선거보안 운동가들에게는 불가해한 듯한 문제가 이것으로 설명된다. 모든 연방 선거에 대한 새로운 사이버 보안 기준을 수립하는 법안이 상원에서 수개월 동안 묶여 있다(미치 맥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지금껏 표결을 거부했다).뉴욕대학 로스쿨 브레넌 사법센터의 로렌스 D. 노든 선거개혁 프로그램 소장은 “뮬러 보고서의 일부는 우리 선거에 대한 명백한 공격에 맞서 우리가 충분히 대처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더 대비해야 하는지에 관한 진심 어린 호소”라며 “그리고 이런 일부 취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지 않았는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라고 말했다.이런 시스템 중 다수에 보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2016년 더럼에서 아주 많은 문제를 유발했던 유형의 전자 선거인명부가 최소 34개 주 이상에서 사용된다고 노든 소장은 말한다. 그 정보가 클라우드에 저장되거나 아무런 연방 보안 기준이 수립되지 않은 무선 기술로 관리되는 경우가 많다. 2017년 5월 기준으로 최소 41개 이상이 더는 서비스되지 않거나 보안 패치가 제공되지 않는 10년 이상 된 투표 시스템을 이용했다.한편 최소 11개 주 이상이 적어도 일부 카운티와 타운에서 투표용지 없는 페이퍼리스 투표기를 사용한다. 적어도 예비로 투표용지를 준비하는 시스템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미국 국립과학원, 상하원 정보위원회, 국토안보부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투표기의 생산과 프로그래밍 그리고 등록 데이터베이스의 유지(그리고 몇몇 경우 심지어 선거일 밤 투표 결과 집계)를 담당하는 민간 공급업자는 규제를 받지 않는다. 노든 소장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을 고용하는지, 보안과 관련해 어떤 심사 절차를 갖고 있는지, 그들의 사이버보안 관행이 무엇인지, 소유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그들이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도 없다”고 말했다.러시아인과 2020년에 관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이 다가오는지 모른다는 점이라는 우려가 크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사이버보안 정책 국장 출신으로 리처드 클라크 전 대테러조정관과 사이버 보안에 관한 신저를 공동저술한 롭 네이크는 “우리가 2016년의 재연 방지만 생각하는 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쪽 통로를 폐쇄한다고 해커들이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점이 사이버 분쟁의 속성이다. 러시아인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또는 이번에는 투표에 직접 간섭하는 다른 방안을 찾을 것이다.”정보 관계자들은 한 가지 비교적 새로운 무기를 찾아냈다. 코츠 DNI 국장은 의회 증언에서 러시아인이 ‘딥 페이크’(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연출하는 조작된 비디오)로 혼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요즘 한 사람의 얼굴을 다른 사람의 몸에 쉽게 붙일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가 널리 통용된다. 지난 5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술에 취한 듯 불분명하게 발음하는 초보 기술의 조작 동영상이 페이스북에서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을 때 섬뜩한 미래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아담 쉬프 하원 정보위원회 위원장은 지난봄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후보의 딥페이크 동영상이 나올 때 가장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미트 롬니 후보가 (연방소득세를 내지 않는 미국 국민 47%를 비난한) 비디오테이프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보면 더 인화성 강한 비디오테이프가 선거결과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미래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클라크 전 대테러조정관의 가장 큰 우려는 주요 접전주에서 러시아인이 선거인 명부에 침투해 투표수를 전략적으로 줄일 목적으로 혼란을 유발해 선거결과의 합법성에 관해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다. 결국에는 그들을 저지하려는 노력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는 기술과 거의 관계가 없다. 골수 클린턴 충성파들은 2016년의 해킹이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전례 없는 규모의 공격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상당수 경험 많은 냉전주의자들은 그것을 더 큰 맥락에서 바라본다. 역사적인 기준에서 볼 때 호전적인 러시아인이 훨씬 더 공격적인 전술을 택해왔다고 일부는 주장한다. 어쨌든 그들이 노조를 통제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수천 명을 동원해 선동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이런 전술이 훌륭해서 통하는 적은 없다. 모두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효과를 본다.” ‘신냉전: 푸틴의 러시아와 서방에 대한 위협(The New Cold War: Putin’s Russia and the Threat to the West)’을 포함해 많은 책을 써낸 영국의 저술가이자 보안 정책 전문가 에드워드 루카스의 말이다. ━ “미국 민주주의는 사이버 공격에 취약” - 사이버 보안 전문가 리처드 클라크, 2020년 미국 대선이 사이버 전장에서 치러지며 미국이 불리할 것으로 전망해 리처드 클라크는 지금까지 기회만 있으면 미국의 보안 취약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지 W. 부시 정부가 9·11 테러공격을 막지 못했다고 비난하면서 유명해졌다. 그가 로버트 네이크와 함께 집필한 신저 ‘제5영역: 사이버 위협의 시대에 조국과 기업, 우리 자신을 지키는 방법(The Fifth Domain: Defending Our Country, Our Companies, and Ourselves in the Age of Cyber Threats)’은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또 그런 공격을 막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파헤친다.클라크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국무부에서 일했고, 빌 클린턴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대테러 조정관을 맡았으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사이버보안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애덤 피오르 기자가 최근 그를 만나 사이버공간의 무기화와 국가안보에 관해 인터뷰했다.미국이 러시아·중국·이란과 저강도로 서서히 진행되는 사이버 전쟁 중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우리는 바로 지난달에도 이란을 상대로 사이버 공격을 했다. 그것이 하나의 명백한 사례다. 러시아의 경우 우리가 최근 그들의 전력망에 침투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내가 서서히 진행되는 저강도 사이버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앞으로 대규모 실전이 사이버 공격으로 촉발될 수 있다고 보는가?그럴 가능성이 크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올해 초 이스라엘을 상대로 사이버 공격을 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사이버 시설 공습으로 대응했다. 지난 4년 동안 미국 국방부의 정책은 미국에서 중대한 사이버 공격이 있을 경우 미사일이나 폭탄으로 그에 대응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북한이 미국에서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감행한다면 공습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정책이다.사이버 전쟁과 관련해 긴장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가?1970~80년대 유럽에서 군축을 했을 때와 냉전 당시 소련과 미국이 전략적으로 대치했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기본으로 삼았다. 첫째, 우리는 리스크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특이한 활동 등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곧바로 상대측에 전화를 걸어 해명을 요구했다. 과거 우리 미사일 테스트가 잘못돼 목표와 다른 쪽으로 날아갈 때 나는 러시아인이 공격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그들에게 우리 테스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둘째는 신뢰 구축 조치다. 투명한 활동과 상대방의 활동에 참여하거나 참관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신뢰를 쌓았다.사이버 전쟁의 경우 아직은 아무도 리스크 감소 조치나 신뢰 구축 조치를 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전력망에 침투하는 것 같은 사이버 공격으로 위기와 불안정이 더 많이 조성될수록 리스크 감축과 신뢰 구축 조치가 더 많이 필요하다.러시아는 신뢰 구축과 리스크 감축 조치를 도입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그 점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도는 해봐야 한다.그런 위협에 미국이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우리는 방어 측면이 많이 부족하다. 우리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집 안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를 들어 중국이 우리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공격하거나 러시아가 우리의 전력망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안다. 그 외 미국의 다른 중요한 시스템도 상당히 취약하다. 방어에 더 신경 써야 한다.사이버 보안의 관점에서 2020년 대선을 어떻게 보는가?방어보다 공격이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든다. 공격자는 표적을 선택할 수 있지만 방어자는 모든 곳을 막아야 한다. 공격자는 다크웹에서 맬웨어를 몇백 달러 주고 살 수 있겠지만 그 공격을 막으려면 수십만 달러를 들여야 한다. 해커는 다른 나라에서 비교적 소규모 팀으로 활동할 수 있지만 방어자는 미국 전역에서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따라서 공격이 훨씬 더 유리하다. 2020년 대선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이다.미국 민주주의가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내고 건재할 수 있다고 얼마나 낙관하는가?지난 250년 동안 우리는 강하고 상당히 복원력이 뛰어난 국가였다. 끔찍한 상황도 겪었지만 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다. 하지만 앞으로도 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다면 낙관과 비관 어느 쪽인가?상당히 우려스럽다. ━ 해커들이 미국 대선 노린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2년에 걸친 수사로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을 시도했다는 많은 사례가 밝혀졌다. 그 위협은 넓게 4가지 범주로 나뉜다. 소셜미디어, 선거 인프라, 선거운동 보안, 다크 머니(유권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용되는 정치 자금)가 그 영역이다. 보안 전문가는 지금부터 다음 미국 대선이 열리는 내년 11월까지 그와 비슷하게 광범위한 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소셜미디어→ 러시아의 ‘인터넷 리서치에이전시(IRA)’는 2014년부터 수백만 달러를 뿌리며 수많은 사람에게 페이스북·유튜브·인스타그램·트위터에 가짜 계정을 만들도록 했다. 그들은 사회운동가로 행세하며 미국 유권자를 유인하는 소셜미디어 페이지를 운영했다. 목표는 ‘후보들과 정치 시스템 전반을 향한 불신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IRA는 이민자 문제에서는 ‘안전한 국경’ 같은 이름의 SNS 페이지를 통해, 흑인 인권운동과 관련해선 ‘블랙티비스트’ 등의 페이지를 통해, 종교 문제에선 ‘예수군’ ‘미국 통합 무슬림’같은 페이지를 통해, 지역문제와 관련해선 ‘남부 연합’ ‘텍사스의 심장’ 같은 그룹을 통해 분열을 조장했다.→ IRA가 관리하는 SNS 페이지 중 다수는 2016년이 되자 팔로어가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정치 광고와 SNS 페이지는 흑인 팔로어에게 질 스타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를 찍든가 아니면 기권하도록 촉구했다.→ IRA는 풀뿌리 미국 단체로 위장하고 유세를 열고 금전적 보상을 미끼로 유권자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든가 비난하도록 유도했다.선거 인프라→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계된 해커단은 미국 주 선거관리 컴퓨터 네트워크 최소한 21개(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와 투표기계 제조사 최소한 한 곳을 공격했다.→ 지방 선거관리 간부들에게 보낸 스피어피싱(특정한 개인들이나 회사를 대상으로 한 피싱) 이메일로 플로리다 주에서 최소한 한 곳의 카운티 지방정부가 해킹당했다.→ 해커들은 일리노이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유권자 데이터를 훔쳤다.선거운동 보안→ 해커들은 민주당 하원 선거위원회(DCCC)의 컴퓨터 29대에 침투해 79기가바이트 이상의 파일에 담긴 데이터를 훔쳤다. 그로써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해킹의 발판이 마련됐다.→ 해커들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대위원장이던 존 포데스타의 이메일 5만 건 이상을 불법으로 내려받은 뒤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했다.→ 뮬러 특검에 따르면 DCCC와 DNC의 해킹이 알려진 뒤인 2016년 8월 익명의 하원의원 후보가 러시아 정보원들이 만든 가짜 온라인 아이디 ‘Guccifer 2.0’에 연락을 취해 훔친 데이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인은 그에게 상대 후보와 관련된 훔친 자료를 제공했다.다크 머니→ 2010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 판결로 무제한 정치자금 기부 통로가 열리면서 미국 정보관리들은 러시아가 미국 국내 파트너의 도움으로 미국 선거에 자금을 살포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애덤 피오르 뉴스위크 기자

2019.08.0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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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권위기

국제 이슈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 커뮤니티에 대한 공산당 정부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미국 의회가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미군에서 말하는 이른바 중국의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s)”에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억류돼 있다. 그러나 그런 인권위기가 계속 악화되는 동안 미국 당국과 정치인들의 최근 개혁 압박은 거의 효력이 없었다.미국 상원외교위원회는 최근 위구르 인권정책법을 통과시켰다. 지금껏 미국 의회의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미국 국무부 내 중국의 탄압에 초점을 맞춘 보고서 작성과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인권탄압을 규탄하도록 요구하는 법안은 이제 상원 전체회의 표결로 넘어가게 된다.법안의 발안자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플로리다주)은 “극악무도하고 조직적인 인권탄압에 대해 벌써 오래 전에 중국 정부와 공산당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고 말했다.위구르족과 기타 튀르크계 무슬림 소수민족 100만~3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뒤 이 법안에 탄력이 붙었다. 보통 유대인대학살을 연상케 하는 그 용어를 미국 당국자가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중국이 신장 북서부 지역에서 종교적 영향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으로 위구르족들을 자의적으로 수용소와 건물에 억류하면서 피할 수 없는 감시체제로 변한 지 3년 만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2016년 이후 중국은 무슬림 소수민족들 사이의 극단주의를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신장 지구의 위구르족 주민들을 거칠게 단속해 왔다. 그러나 그런 캠페인은 대체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통제하고 나아가 근절하는 방안으로 간주돼 왔다. 전문가들은 신장에서 감시·억압·억류 정책을 시범 운영한 뒤 전국 각지로 보급하려는 목적이라고 여긴다.지난 5월 초 랜달 슈라이버 인도-태평양 안보문제 담당 국방차관보는 지난 5월 초 언론 브리핑에서 “공산당은 치안부대를 이용해 중국인 무슬림들을 강제수용소에 집단적으로 감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수용소라는 용어의 선택에 관해 기자가 문제를 제기하자 슈라이버 차관보는 “억류의 규모, 중국 정부와 그들이 한 공개발언의 목표”를 고려할 때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몇 주 동안 중국 정부, 미국 의회, 트럼프 정부 사이에서 확대돼온 문제에 관해 그렇게 새로운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노력이 이제껏 얼마나 효과가 없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지난 3월 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위구르족 4명을 만나 신장의 인권위기에 관해 논의했다. 몇 일만에 그 중 한 명인 미국인 페르카트 자우다트의 숙모와 숙부가 임시수용소에서 불려 나와 8년 형을 선고 받았다.자우다트의 모친도 수용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됐다. 친지가 그에게 보낸 위챗 메신저 메시지로 볼 때 이번의 실형 선고는 자신이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만난 데 대한 보복조치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국무부는 그 보복조치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으며 “안타까운 일”이라고 뉴스위크에 답했다.자우다트는 지난 4월 “내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는 어머니를 못 만나거나 목소리를 못 듣게 될 수 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자우다트는 2011년 가족 대다수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중국 정부가 어머니에게는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머니와 남은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며 그의 공개 항의를 중단시키려 한다. 근년 들어 현지 경찰과 당국자들이 해외 거주 위구르인들의 입을 막기 위해 구사해온 전략이다. 인권단체 ‘세계위구르회의’의 피터 어윈 대변인은 “중국이 해외 위구르족들에 보복을 가하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지난 2월 위구르족과 기타 무슬림 소수민족 수백 명이 #MeTooUyghur 운동의 일환으로 온라인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공유했다. 어윈 대변인에 따르면 중국은 그처럼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 한다. “중국은 근년 들어 대체로 통제를 받지 않던 해외 거주 중국인 커뮤니티에 이런 두려움을 다시 불어넣고 싶어 할 가능성이 크다.”하원에서 위구르 법안을 공동 발의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미국 정부와 더 희망적인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대화를 가졌다고 미국 시민의 친척을 잡아 가두는 행위는 정의·인권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기본 이념에 대한 모욕이며 모두의 규탄을 받아 마땅하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위구르 커뮤니티에 대한 중국의 줄기찬 탄압이 세계의 양심에 오점을 남겼다.” ━ 트라우마에 시달린 3년 페르카트 자우다트는 “모든 게 나쁜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신장 당국은 2016년부터 초법적인 “재교육” 캠프로 주민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라마단(이슬람교의 금식기간) 같은 종교적 전통의 준수처럼 모호한 위법 또는 턱수염 기르기, 휴대전화 심카드 구입 또는 해외 거주 가족과 대화 등의 사소한 위반이 그 명분이다.그 뒤로 고문 그리고 “성적학대와 사망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고 미국 국무부는 전한다.수용소 내가 아니더라도 위구르인들은 대체로 중국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신장조차 떠나지 못한다. 도처에 얼굴인식 장치가 깔려 있어 많은 공공 공간과 상점에 위구르인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당 관료들이 그들의 주택에 거주하며 위구르인들에게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는 경우도 있다. 당국이 사원과 묘지를 쓸어 없앴다. 그리고 5월 초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혈액형으로부터 전력사용량·소포배달까지 모든 정보를 수집해 의심스러운 행동을 당국에 통보하는 대중 감시 앱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그러나 자우다트 친척들이 최근에 당한 일은 용기 있게 미국 당국자를 만나 인권위기를 논하는 미국인 가족들에 미치는 잠재적인 불이익을 조명한다. 그뿐 아니라 신장과 타지의 교도소로 이송되는 억류자들이 늘어나면서 중국 정부 탄압의 불길한 다음 단계를 예시하는 듯하다. 영국 뉴캐슬대학의 중국과 위구르족 전문가 조앤 스미스 핀리는 “그들은 기본적으로 중국 본토 각지로 분산되는데 현재로선 신장에 스폿라이트가 집중되기 때문에 그들은 레이더에서 사라지는 셈이 된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경비가 철통 같은 교도소로 보내져 “항상 족쇄를 차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내 생각에는 상황이 더 악화됐다.”미국 라디오 프리 아시아(RFA) 방송은 지난 2월 다른 지역으로 억류자들이 이송됐다고 확인했다. 신장 밖으로 이송 수감된 억류자 수가 “대단히 많다”고 한 교도소 당국자가 RFA에 말했다. “그들은 특정한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특수한 이유로 억류돼 있으며 감시가 특히 엄중하다.”자우다트는 신장에서 할머니를 포함한 친척들이 “중국 경찰의 위협”을 받았으며 미국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서명을 강요 받았다고 말했다.해외에서 활동하는 대다수 위구르 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자우다트도 사랑하는 친지들의 억류에 관해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한 뒤 많은 관심을 받았다. 자우다트는 모친이 2017년 11월 22일 동안 억류됐다가 1차로 풀려났다고 전했다. 자우다트는 “당시 중국 경찰이 어머니의 전화기를 압수했으며 어머니가 상당히 겁을 먹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전화를 다시 걸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다고도 말했다. “따라서 그것은 누군가 어머니를 모니터 하면서 어쩌면 통화를 엿들을지 모른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지난해 2월 6일 자우다트는 어머니로부터 다시 떠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돌아올 수 있을지 또는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그러나 지난 5월 자우다트는 어머니가 수용소를 나와서 전화를 걸어 자신이 풀려났으니 중국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라고 하더라고 뉴스위크에 전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음날 수용소로 되돌아갔다. 자우다트는 “5~6명의 경찰”이 모친을 모니터 했으며 그들이 내내 그의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다고 전했다. 자우다트는 “배신당하고 농락당한 느낌이었다. 너무 혼란스러워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며 그 상황을 “블랙홀”로 묘사했다.스미스 핀리 교수는 1995년부터 신장을 왕래해 왔으며 지난해 가장 최근 방문했을 때 목격한 변화가 피부에 와 닿는 듯했다고 말했다.그녀는 “두려움, 절대적인 공포. 테러, 트라우마, 내가 ‘상황’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렸다”며 “그런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스미스 핀리 교수의 현지 지인은 대부분 그녀의 전화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만 그녀의 면담 요청에 응했다. 어둠이 내린 뒤 대화하는 동안 계속 이동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랐다. 그녀는 “음향 감시 때문에 간이 경찰서에 접근할 때마다 대화 주제를 바꿔야 했다”고 말했다.대다수 후이족 무슬림과 기타 중국 내 소수민족은 요즘 신장 당국이 미세 조율하는 억압정책이 중국 각지로 보급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자우다트도 그런 미래를 걱정한다.“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에서 그칠 리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 자리에서 100% 장담컨대 이 문제는 21세기에 일어난 집단학살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 미국의 노력은 별 효과가 없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4월 신장지구에서 중국의 탄압행위를 “빅브러더” 같다고 여러 차례 평했지만 국무부는 인권탄압에 연루된 신장지구 관료들을 제재하겠다는 어떤 공개적인 시사도 아직 내놓지 않았다. 운동가들은 12월에 제재가 이뤄지리라고 믿었다가 헛물만 들이켰다. 트럼프 정부에서 무역협상이 우선순위를 차지했다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지난 5월 TV 인터뷰 중 질문을 받자 폼페이오 국무 장관은 제재가 시행될지 그리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 확답하지 않았다. 베이징의 관계 당국자에게 그 문제를 “거론했다”고만 말했다.스미스 핀리 교수는 “모두가 돈의 논리로만 이야기만 한다. 모두가 구사하는 언어는 양국간 무역”이라며 1986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와 관련해 남아공에 내려진 것과 같은 제재가 효과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신장 지구에서 중국 정부의 행태가 철저히 인종주의적이기 때문에 이번 사태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 정치인들도 비슷한 접근방식을 촉구했다. 의회-행정부 중국 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루비오 상원의원은 신장 지구의 인권탄압에 연루된 중국 공산당 관료에 대해 마그니츠키법 제재(미국 재무부가 인권 침해자에 개별적으로 처벌을 가할 수 있다)의 발동을 요청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주)을 포함한 초당파 의원 수십 명이 동참했다. 서한에서 의원들은 또한 정부가 진작에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실망했다”고 말했다.루비오 의원은 “중국 공산당 정부는 위구르족과 기타 종교적·인종적 소수민족 100만 여명을 이른바 ‘재교육 캠프’에 억류하고 신장 지구에서 빅브러더 같은 최첨단 감시체제를 확대하면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자행하고 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루비오 의원은 또한 수출통제와 재정 투명성 요건을 강화해 미국의 제품과 투자가 “중국의 확대되는 빅브러더 스타일 디지털 권위주의”와 인권 탄압에 기여하지 않게 만들고자 한다.서한이 발표된 다음날 초선의 무슬림인 일한 오마르 하원의원은 트윗을 통해 지지를 표명했다. ‘인류에 대한 범죄이며 모든 관련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전문가들은 신장 지구를 겨냥한 어떤 법안이나 제재를 아직까지 통과시키지 않은 데 대해 민주당과 공화당을 모두 비판했다.상하원 전체 90여명의 초당파 의원이 공동 발의한 위구르 인권정책법은 상하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 해 아직 갈 길이 멀다. 거기에 백악관의 서명도 필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법안에 서명할지는 불확실하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신장 사태에 관한 미국 정부의 노력과 글로벌 리더십이 위태로워지지만 서명할 경우 무역 협상과 대 중국 관계가 더 깊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게 거의 확실하다.중국 전문가 스미스 핀리 교수는 “이는 물론 새 발의 피”라고 말했다. “중국으로선 이렇게 말하면 미국 우파 정치인들을 아주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인권에 관심이 없다. 위구르인들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우리와의 무역전쟁뿐이며 중국 봉쇄에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선 좌파가 더 많은 소음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스미스 핀리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의 민주당원들이 훨씬 더 목청 높여 비난하고 전세계 좌파 진영 전반적으로 더 많은 소음을 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 우파는 글로벌 마그니츠키법을 발동하겠다고 말로만 위협할 뿐이다. 실제로 발동하지 않을 거라면 위협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중국은 가만히 앉아 웃으며 말한다. ‘실컷 떠들어 봐라, 하지만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지 않은가.’” ━ 중국이 용감한 건 그럴 수 있기 때문 베이징 정부는 당초 신장 내 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지난 해 말 갑자기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무해한 직업훈련소라고 주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역풍을 맞지 않았다.스미스 핀리 교수는 “아무도 마땅한 책임을 묻지 않아 중국이 뻔뻔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나온다”며 “그리고 중국은 이를 대단히 명확히 인식한다”고 말했다.이런 대담한 태도는 일정 부분 신장 지구의 탄압이 최대 이슬람 주류 국가 두 나라 지도자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받았다는 배경도 깔려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파키스탄의 임란 칸 총리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2월 중국에는 “국가안보를 위해 테러근절과 극단주의화 방지 조치를 실시할 권리”가 있다고 말해 중국의 행동을 옹호한 반면 칸 총리는 그 문제에 관해 “별로 알지 못한다”며 답변을 피했다.미국의 제재가 없는 현 단계에서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이란·터키 그리고 걸프만 국가 등 이웃 나라들의 국제적인 압력이 변화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라고 어윈 대변인은 믿는다. 이들이 시진핑 주석의 역점 글로벌 인프라 사업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우연찮게 신장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의 미래뿐 아니라 중국 정부가 “자국의 이미지에 훨씬 더 많이 신경을 쓰는” 지역이기 때문이다.더 많은 나라가 조치를 취할 때까지 확대되는 인권탄압과 고문에 관한 전문가들의 걱정은 여전히 계속된다. 카타르 조지타운대학 소속 중국 공산당의 무슬림·이슬람 정책 전문가인 맥스 오이트만은 수용소가 확대되면 제대로 훈련 받지 않은 간수를 “수천 명” 충원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특히 걱정스러운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이들 수용소 운영에 필요한 지방과 정부 예산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면서 수용소 내 인권침해도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지시가 떨어진다 해도 실제로 신장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다. 베이징 정부의 정책이 지방 차원에 일단 도달하면 알아볼 수 없게 달라진다는 스미스 핀리 교수가 전한 위구르 격언이 떠오른다.“도파(테두리 없는 베레모)를 갖다 달라고 하면 그는 머리를 가져온다.”- 타라 프랜시스 챈 뉴스위크 기자

2019.06.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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